세븐데이즈(Seven Days)

 

 

  




 

 

 

  겨우 하루 운동을 쉬었다고 오전 10시 즈음에야 눈을 뜰 카게야마가 아니다.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온 여파 때문이리라. 발목이 욱신거려 밤잠을 설친 탓에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로드 워크는 무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기만 하는 발목을 슬쩍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웃옷을 벗었다. 배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아침 겸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하고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은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었다.

 

 

 

#3rd day

 

 

어디에 가서 식사할까 고민하다가 미야기에 도착 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전단지가 붙어 있던 게 생각났다. 전단지의 약도를 더듬더듬 기억해내 도착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만큼 건물이 깨끗했다. 볼 거라곤 논밭과 주택가, 몇 개 되지 않는 학교밖에 없는데 굳이 언덕 위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낮, 이런 애매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테라스 혹은 창가 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가지를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매미 같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은 귀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카게야마가 입구에서 잠시 멈춰있자 멀리서 키가 작은 종업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창가가 아닌2인용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였다.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메뉴 중에 카레는 단 하나뿐이다. 다행히도 돼지고기 카레였다. 자리를 안내해준 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카레를 주문했다.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당연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이곳 미야기가 더는 제가 아는 곳이 아님을 인지했다. 가게 한쪽에 조그맣게 매달린 벽걸이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하는 뉴스래 봤자 별 다를 게 없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TV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화면 하단에 쓰여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배구계 들썩오이카와 토오루 은퇴?

아직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는데요. 한창 인기를 끌면서 뛰어난 세터로 활약 중이던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몇몇 가까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개인적인 집안 사정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이카와 선수가 소속 중이던 A 팀은 아는 바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은퇴를 승인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남아있던 계약 기간 등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배구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쿠니미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카게야마는 금세 다음 뉴스로 넘어간 TV에서 눈을 뗐다. 주문하신 돼지고기 카레 나왔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종업원은 카게야마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조심스레 놓았다. 카게야마는 앞에 놓인 카레를 잠시 바라봤다. 이탈리아에서도 카레를 먹었다고는 하나, 항상 미야기에서 먹었던 카레 맛이 입 안 어딘가에 맺혀 있었다. 포슬포슬한 밥과 누런 빛깔의 카레를 섞으면 그 사이로 감자와 돼지고기가 보인다. 카게야마는 카레 한 입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카레 향기가 혀끝을 자극하고 익숙한 향신료 맛이 콧속에 가득 찼다. 한입 더 들어 올린 순간 카게야마의 반대쪽 의자에 누군가가 주저앉듯이 앉았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귀에 닿은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자칫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입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짙은 검은색의 양복이 보였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뒤 셔츠는 땀에 적셔져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종업원이 제때 가져온 얼음물을 크게 세 번 들이마신 뒤 이마를 부채질했다. 그의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있다. 이와이즈미가 세게 내려놓은 유리컵은 얼음만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디였지. 외국에서는 잘 적응했고?”

이탈리아요. ……배구, .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시원찮은 대답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의 옷차림과는 달리 카게야마에게도 익숙한 미소였다.

다른 건 아직이라는 말이네.”

이와이즈미는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어렴풋한 눈길로 바라봤다. 여전히 짧게 자른 이와이즈미의 머리는 진한 검은색이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직선적인 눈빛을 피하고 입술을 삐죽이자 그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후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겨진 미간도 익숙하다.

변한 게 없네, 너는.”

카게야마가 그런가요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거뒀다. 종업원이 다시 채워 넣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눈빛을 날카롭게 바꿨다.

오이카와냐?”

…….”

이와이즈미는 대답 없이 눈꺼풀을 내려놓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짜증 난다는 듯 머리 한쪽을 긁었다.

왜 그리 고집이 세냐, 너나 그 녀석이나. 누가 말했어?”

…….”

, 대충 알 거 같긴 하다만. 쿠니미가 킨다이치 둘 중 하나겠지.”

……!”

내가 말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거든.”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카게야마한테 네 입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쿠니미요.”

그럴 거 같았어. 킨다이치는 오이카와를 위해서라도 너한테는 말하지 않겠지.”

……이와이즈미씨.”

오해하지 마. 쿠니미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오이카와를 생각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 그렇다 해도.”

설마 쿠니미가 너한테 말할 줄은 몰랐다만.

이와이즈미는 정말 의외였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자신도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이탈리아가 아닌 이 곳 미야기에 있다는 것부터 쿠니미를 위한 변명은 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전화를 듣고 선택하여 이곳에 왔다. 오이카와로 인해 생긴 손등의 상처가 박동하며 통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앞에 놓인 유리컵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실내는 바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온도였다. 대지를 뒤덮던 여름은 어느 저편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나직이 울리는 보사노바 노랫소리, 땀이 식은 이와이즈미의 이마와 미지근해진 카레.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봤다.

나도 얘기를 들은 건 그 녀석이 이미 결심한 후였어.”

.”

갑자기 낮에 불러제끼길래 평소처럼 시답잖은 얘기겠거니, 짜증 내며 나갔더니 웬 캐리어를 들고나오더라고. 벌써 미야기행 기차도 예약해놓고, 신변정리도 마무리 지은 상태로. 은퇴는 팀 감독한테만 말하고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뭐 감독한테 말한 걸로 이미 끝난 거지.”

이와이즈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듯 카게야마 앞에 놓인 카레에 시선을 두고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만나자더니 배구를 안 하겠다고, 해서 한 대 때려줄까 진심으로 생각했지. 뭐라고 중얼중얼하는데, 그때는 솔직히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오더라. 바보같이 그런 순간 아침에 서에서 봤던 살인사건 용의자 생각이나 하고. , 그럴 땐 희한하게 별 쓸데없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잖아. ,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었나? 하는. 넌 안 그러냐?”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인상을 찌푸리면 이와이즈미는 됐다, 짧게 말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갑자기 그러더라고. ‘그래서, 배구 안 하기로 했어라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게 영 오이카와 그 바보 자식 같지가 않아서 한 마디 해줬지.”

 

그래. 너 이젠 행복해지겠네. 평생 행복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놈이더니, 이제 괜찮을 거 같네.’

 

그랬더니 그냥 웃더라고. 거기서 뭘 말할 수 있겠어. 기차 시간 다 됐다고, 가겠다고 하길래 잘 가라고 했지.”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여름밤처럼 싱싱한 빛깔로 빛나며 이와이즈미만을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저를 탓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이내 허탈하게 웃음 짓고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이 세계 속에 지겨운 더위는 없으나 절대 눈을 피하지 않는 카게야마의 눈빛이 이와이즈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 넌 어떻게 생각해.”

…….”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했어야 된다고 생각해?”

카게야마는 그저 이와이즈미만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 멍청이 오이카와한테, 너한텐 배구밖에 없으니 바보 같은 생각 그만두고 그리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너한테 배구는 그 정도였냐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이렇게 괴로운 듯이 웃는 건 참 낯선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가 끝난 뒤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카게야마는 기억해내려 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네트 너머에서 시선을 교차할 때 그의 눈동자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것만을 기억해냈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런가요.”

이와이즈미는 숨을 얕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떨려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액체였던 카레가 뭉쳐서 식어있었다. 달콤한 냄새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넌 날 나쁜 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요.”

아냐, 상관없어.”

카게야마가 서둘러 대답한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상관없어. 그의 입에서 딱딱한 말이 단단한 어조로 튀어나왔다.

너한테 나쁜 놈으로 보여도 난 별로 상관없거든. 카게야마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

카게야마,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 상황에서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너라면.”

저는……,”

 

 

* * *

 

 

 

카게야마는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를 걸어 올라갔다. 아래로 투명한 냇물이 흐르는 짧은 다리 위, 봄이면 벚꽃으로 풍성한 공원지금은 연두색에서 올리브빛깔까지 다양한 색의 잎사귀로 물들어있었다, 식물 총 100종 내외의 작은 식물원을 지나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보다 더 높은 언덕을 오르면 평소 뛰던 로드워크 코스의 마지막이었다. 발목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었으나 햇볕이 내리쬐는 광선 탓에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왔다. 카게야마는 언덕 위에서 오후의 햇빛에 흠뻑 젖은 마을을 내려다봤다. 언덕 위의 풍향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턱 아래가 간질거려 카게야마는 그쪽에 맺힌 땀방울을 거칠게 닦았다. 오이카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기억하는 건 그의 집뿐인데도 낯선 풍경에 뒤덮이면 그를 찾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를 감싸 안은 미야기는 카게야마를 다시금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카게야마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을 찾은 건 몇 년 만일까. 외양은 바뀐 게 없지만, 바깥에 둔 조경물이 늘어있었다. 5년 전에는 없었던 벤치와 나무가 체육관 입구를 바라보는 형태로 한두 개 놓여있다. 카게야마가 벤치에 앉자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서 악취처럼 매미 소리가 퍼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한 햇볕이 눈두덩을 온통 잡아먹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만약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카게야마였다면. 카게야마는 금세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시작은 쿠니미처럼 갑작스러운 전화겠지.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다. 수신음은 멈추지 않고 울린다. ‘오이카와씨라고 등록해놓은 화면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 바빠?

……아뇨.”

여보세요라고 받지 않은 카게야마도 그답지만, 오이카와의 물음도 꽤 의외였다. 항상 카게야마의 사정과 상관없이 제 용건만 말하던 오이카와가, 입술 사이로 작게 내뱉듯이 묻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문득 그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이카와씨가 카레 사줄까.

. 좋아요.”

카게야마는 전화를 끊고 옷을 서둘러 챙겨입는다. ‘준비하면 나와라고 말한 오이카와는 대체로 늦는 때가 많았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도착했을 때 저가 없다면 이후 평생 오이카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되풀이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고’, ‘무의식적으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러낸 카레 집으로 들어간다. 평소 함께 식사하던 카레 집이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몇 번 헤맨 뒤에야 찾아낸다. 어색하게 한쪽에 자리 잡고 가게에서 나오는 뉴스 라디오를 들으며 입구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이내 오이카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평소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엷게 땀이 밴 피부에 흰 티셔츠와 면바지. 그의 뒤쪽으로 커다란 민트색 캐리어가 따라 들어온다.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바라보고, 오이카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자리 뒤쪽에 두고 오이카와는 턱을 괴며 미소 짓는다.

카레, 시켰어?”

아뇨.”

? 여기 주문이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와 부드럽게 굽힌 눈꼬리. 아무렇지 않게 카게야마 대신 돼지고기 카레를 주문한 뒤 오이카와는 전 됐어요라고 말하고 주문을 끝낸다. 카게야마는 그것에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웃는 낯이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아주 묘하게도 오이카와가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 놓인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아래로 내린 눈꺼풀은 살며시 젖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땀조차도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살포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린 뒤, 마치 주문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배구, 그만하려고.”

…….”

머리 한쪽 끄트머리에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그만두는 이유. 오이카와 토오루가 더는 걷지 않기로 한 길.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나이가 젊다고는 하지만 오래 하기도 했고. , 내 나름대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만큼 했어.”

, 맞아. 킨다이치 얘기 들었어? 이번에 승진했다던데.”

……킨다이치한테 전수나 받아야지. 이제 회사 다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얘기를 귓바퀴 너머로 흘려들으면서, 배구를 하지 않는 오이카와를 상상한다. 오이카와의 서브와 토스는 두 번 다시 발현되지 않는 신기루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카게야마 안에서 여전히 빛을 뿜으며 숨 쉬고 있는 오이카와의 서브는 오로지 제 안에서만 살아있겠지.

그래서, 은퇴는 다음 주쯤에 기사 날 거 같고, 감사합니다.”

주문했던 카게야마의 카레가 나오고 대화는 잠시 중단된다. 오이카와는 먹어, 라며 카게야마에게 카레를 권하고 카게야마는 입안에서 부서지는 카레를 억지로 씹는다. 오이카와는 잠시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웃음을 거두고 홍차빛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본다.

그래서, 미야기로 돌아가려고.”

…….”

카게야마는 잠시 먹는 걸 그치고 오이카와를 마주 본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만 살며시 올린 채 조금 전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자취집도 정리했어. 토비오쨩 다 먹으면 기차 시간 딱 맞을 거 같은데.”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핸드폰의 민트색 케이스는 먼지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는 이 곳카게야마가 있는 곳에는 그 어떤 흔적도 가져가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것조차도 카게야마의 생각에 불과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내려놓았다. 카레와 섞인 밥이 치아 사이로 돌아다닌다.

카레 안 먹어?”

먹어야죠.”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을 뜨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다시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묘한 식감이다. 상상 속이라 그런 걸까, 카레는 무미무취(無味無臭).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카레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깊고 그윽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반복적인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체취가 카레에 묻어 카게야마의 입 안으로 들어간다.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장 속에 골고루 퍼져 오이카와가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통해 저 자신을 분해한다. 오이카와가 남길 것 없이 두고 떠나는 모든 것은 카게야마의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서브, 향내, 홍차 빛 눈동자도 혹은 그의 무언의 감정도……….

오이카와는 이내 살포시 웃는다. 카게야마는 손을 멈췄다. 올라간 입술이 열리고, 하얀 치아가 보였다.

잘 있어. 더럽게 귀여운 토비오쨩.”

뒤에 놓았던 캐리어를 꺼낸 후 오이카와는 계산대로 향한다. 카게야마가 먹고 있는 카레 값을 계산한 후 문을 밀어 연다. 문 위쪽에 달린 종()이 두꺼운 여름 바람 탓에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로 빛이 산란된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입술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저의 입술에 집중한다. 무슨 말을 자아내야 할까.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오른쪽 눈에 들어가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체육관 뒤쪽으로 노을이 깔려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하늘 북쪽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누군가 베어 먹은 것처럼 반 토막 난 달이 불투명하게 걸려있다. 잠시 잠들었던 건지 몸이 벤치에 녹아내린 듯 축 늘어진 채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근처 나무에서는 매미 한 마리만 끊어질 듯 말 듯 울음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카게야마는 눈에 들어간 땀을 닦아내고 끈적이는 몸을 일으켰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기억 속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시야 어딘가에 박혀있다.

 

 

* * *

 

 

하얀 간판은 거뭇한 하늘에 잠겨 언뜻 어두운 하늘색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팻말은 아직 ‘OPEN’ 상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에 있던 여성이 카게야마를 보고 아, 작은 소리를 냈다.

저번에 우유빵 10개 사가신 손님이네요.”

.”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여기서 그렇게 많이 사가시는 분은 처음이라 놀랐어요. 맛있으셨나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집 앞에서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우유빵을 떠올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10개나 가져가셨는데 맛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랑 남편 둘 다 걱정했어요.”

그녀는 흘긋 옆을 바라봤다. 내부가 비쳐 보이는 유리 너머로 남성 한 명이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우유빵 남았나요?”

. 오늘은 방금 나온 건 아니어도 좀 남아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몇 개 드릴까요?”

“10개요.”

여성은 이번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기쁘게 웃었다. 봉지에 들어가는 우유빵 한 개 한 개를 볼 때마다 땅바닥에 짓이겨졌던 우유빵이 떠올랐다.

 

 

* * *

 

 

 

지평선을 감싸는 안개처럼 불그스름한 줄 몇 개가 바닥에 깔려있다.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여도 노을빛은 가라앉는 빛의 대기 속에서 부옇게 남아있었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진 않았어도 여름인걸 고려하면 꽤 늦은 시간일 것이다. 한번 땀으로 푹 젖었다가 눅눅한 바람결에 서서히 마른 티셔츠가 무겁고 거북하다. 오늘 밤은 열대야인 걸까, 오후를 장악했던 습습한 공기가 검은색 티셔츠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를 반대쪽 손으로 옮긴 후 어제와 같이 다시 한번 오이카와의 집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벨을 누르려던 움직임이 멈춘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번 꾹 다물고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제대로 걸려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뒤돌자 오이카와가 짙은 남색과 보라색에 뒤덮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

…….”

카게야마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도 적나라하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뒤 그의 옆을 지나쳐 걸어간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반무테 안경을 끼고 쪽빛 셔츠를 입은 오이카와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다. 카게야마는 저를 지나쳐가는 오이카와를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오이카와가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를 보고 다시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까지 바라본 뒤 몸을 떨었다.

…….”

오이카와는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오이카와의 입이 여전히 굳게 닫힌 걸 보고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오이카와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곤 팔짱을 꼈다. 가늘게 남아있는 노을빛이 가라앉으면서 구름의 경계선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녁이 몰려오기 전에 여러 빛깔로 채색된 하늘이 오이카와의 흰 피부에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두 번 여닫았다. 오이카와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유빵 봉지를 저번처럼 던지지도 않고, 카게야마에게 모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를동정하는 게 아니에요. 오이카와씨와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일본으로 돌아왔어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입을 닫았다.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이 뒷목에 맺힌 땀방울을 싣고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숨이 멈출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깊게 내뱉었다.

그것뿐이에요.”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안경이 콧잔등으로 내려와, 푸른 색조가 섞인 눈동자가 굴절되어 다양한 빛깔로 빛났다. 오이카와는 후,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꿈에서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멍청한 토비오쨩한테 오이카와씨가 친절히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선심 쓰듯이 장난스럽게 말한 오이카와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있지, 동정이 아니라고 하는 네 말이 바로 그거거든. 토비오쨩은 바보야?”

달 꼬리처럼 휘었던 눈동자가 사납게 구겨졌다. 오이카와는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말했지. 죽여버리기 전에…… 찾아오지 말라고. 잘 들어. 너를 죽인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거든. 바보 같은 토비오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가 왼쪽, 오른쪽, 오른쪽을 반 바퀴 돌고 다시 왼쪽천천히 선회하다가 이윽고 멈췄다. 그쳤던 매미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유빵 봉지에 손을 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붕대를 감아놓은 발목이 어두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실낱같던 오렌지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달이 충분히 빛을 뿜기 전 하늘의 장막이 덮이는 시간이었다. 봉지가 움직이던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목 신경섬유 사이에 통증이 퍼졌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보다 낮게, 눈언저리에서 울렸다. 오이카와가 만들었던 손등의 상처,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생긴 염좌. 오이카와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다고, 차가운 빛을 뿌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한 일? 그 이상? 배구를 영원히 못 하게 되는? 혹은 그보다 더한 일? 오이카와의 살인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카게야마의 구체적 절망인 배구를 앗아간다 해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아올 수 있을까. 느긋하게 우유빵을 10개 사서 그의 문고리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두고, 맛있다면 더 사오겠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과연 오이카와는 그랬을까.

카게야마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유일하고도 절대적 절망인 배구또한 오이카와에게도 그러할의 뒤에 남겨지는 게 무엇일지 카게야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게야마가 알 수 없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오이카와는 서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미야기 속에 녹아있었고 빵을 썩힐 만큼 작열하는 태양 빛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처음 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으리라. 카게야마의 속을 후벼 파고, 날카롭게 난도질하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집에 찾아올 동안 심어놓았던 본심을 들쑤셨다.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아득했다. 카게야마는 아찔해지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밤이 구름을 먹어치우고 카게야마의 몸까지 잠식했다. 카게야마는, 저는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오이카와를 멋대로 절망한 사람으로 규정지어놓았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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