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미지근한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하다. 눈을 뜨면 물속에 있는 것보다 많은 일조량이 얼굴에 닿았다. 공기가 코를 통해 오간 후에야 지상에 있음을 실감한다. 머리 뒤쪽부터 오금에 이르기까지 땀이 배어 나와 이불보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잠이 덜 깨서 무거운 머리를 들고 상반신도 마저 일으켰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듯 들어와 바닥에 꽂혔다. 눈가가 뜨겁고 머리가 멍하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1, 어머니.

 

잘 지내는 거니?

 

카게야마는 잠시 대답을 두고 고민한다. 붕대가 둘린 발목에 그치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미약한 두통과 어지러움까지. 손가락을 키패드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 글자를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발목을 조심하며 방 안을 거닐면 처음 병원에 갔을 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전보다 통증도 감소했고 겉으로 보기에도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카게야마는 저를 따라오는 햇빛을 밝은 아이보리색 커튼으로 가렸다. 속눈썹조차 무거워서 힘들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여름 기후에 더위를 먹은 걸까, 숨쉬기도 갑갑하고 폐가 충분히 확장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욕실로 향했다. 땀이 식지 않은 축축한 신체가 열을 보관하고 머리를 더욱 달구고 있었다. 미야기의 여름은 병적이었다.

 

 

 

#4th day

 

 

시야에 비치는 모든 나무의 잎과 잎 사이 경계가 흐릿하다.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푸른 입자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그대로 관통하는 햇빛에 찔려 섬광을 내뿜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매미 울음소리에 부딪히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연 눈동자가 비추는 모든 것이 뜨겁다. 카게야마는 축축한 이마를 훔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 아래에서 나무, 잎사귀, 카게야마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잘 지내는 거니?’ 그 메시지 글자만으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겠지.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말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죽음까지 몰고 오는 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죽음 자체는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절차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비교적 최근이어서 그럴 테지. 카게야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접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죽음이어도 제각기 다른 인상(印象)을 남긴다는 건 묘한 일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 달랐듯, 아버지의 죽음도 부쩍 다르겠지.

카게야마는 제 기억 아래에 남아있는, 사망했을 당시의 할아버지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윤곽을 덮어씌웠다. 파리한 얼굴을 한 채 관 안에 눕혀진 아버지의 시신. 눈과 입을 꾹 닫은 아버지의 몸에는 흰색 수의가 입혀져 있다. 관 속은 머리 주변부터 발끝까지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꽃이 장식하고 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몇 번 훔치더니 결국 얼굴을 가리고 만다. 손가락 사이로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염없이 스며 나온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목소리가 이내 겹쳐지면서 하나의 흐느낌이 되는 것을 카게야마는 듣고 있다. 익숙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어긋나 전혀 다른 음색을 띤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버지의 이마 주름과 청회색 얼굴도 낯설었다. 카게야마는 제 안에서 예고 없이 생각의 방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카게야마에겐 이런 생각을 몰아넣을 방이 없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캉한 뇌 속을 들여다본다. 그의 생각의 가지는 단단한 것부터 금세 부러질 것처럼 얇은 것까지 다양해서 카게야마는 그 아주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수천 개의 방이 급박하게 열린다. 카게야마는 그 하나하나를 생각하다가 활동을 그쳤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오이카와의 집 현관문이 보였다. 이곳으로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게야마가 향하는 곳은, 그 몸이 무의식중에 다다르는 곳은 결국 오이카와라는 결론이 우스울 정도로 눈에 보였다.

이미 죽은 자의 뱃속을 몇 번이고 쑤시는 살인자처럼 태양이 대지 위에 녹아버린 몸을 세로로 쪼갰다. 뼈에 직접 소리를 전달하는 매미와 눈동자를 달구는 덥숙한 공기, 두개골을 가르고 연두부처럼 미끈한 뇌를 꺼내 짓이기는 햇볕. 마치 오이카와가 던져서 바닥 위를 뒹굴던 우유빵처럼 몸이 조각나고 해체되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거 같은데. 환상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는 현관문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 문이 열리고 깨진 유리같이 흔들리는 형상의 오이카와가 보였다. 혹은 어제 체육관 앞 벤치에서 꿨던 꿈처럼 망막에 맺힌 상상일지도 몰랐다. 몸이 전부 녹아서 하나의 더러운 기름 덩어리가 된다. 오이카와가 바람에 흐르는 꽃잎처럼 흩어지고, 눈이 감겼다.

 

 

* * *

 

 

……처음 보는 천장. 왼쪽 손등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때문에 손을 들어보면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수액 줄을 따라가 보니 머리맡에 걸린 수액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눈을 뜬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이카와가 콜 벨을 누르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표정과 카게야마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이제 괜찮으니까.”

오이카와는 천천히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병원에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는 카게야마와 그 옆에서 지켜보던 오이카와. 그의 집 앞에서 느꼈던 속이 쓰릴 정도의 울렁거림, 의식이 끊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기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다행이에요. 굉장히 회복이 빠르시네요. 간단한 피검사도 했는데 괜찮으셔서, 이만 돌아가셔도 될 거 같아요.”

간호사는 빠르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손등에 꽂힌 바늘을 능숙하게 뽑아냈다. 묵직한 통증이 사라지고 물 흐르듯 이어진 동작 이후에 간호사는 병실을 나섰고, 오이카와도 그 뒤를 이었다.

오이카와씨, 잠깐!”

카게야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닫혔다.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던 때에 잠시 누르고 계세요라고 들었던 말을 이행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밴드 한가운데를 적시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피가 보여도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문을 열자 접수대에서 수납을 하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오이카와씨!”

그를 저지하고자 다리를 내디뎠으나 그대로 무너졌다. 양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약한 어지러움이 겹쳐 다시 일렁이는 시야를 만들어냈다.

괜찮으세요?!”

옆을 지나던 간호사 한 명이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카게야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일사병으로 쓰러지셨거든요.”

일사병?[각주:1]

이런 여름날에는 종종 있어요.”

카게야마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키가 180을 넘은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나 비틀거리다니 꼴사납다.

괜찮습니다. 부축, 안 해주셔도.”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하고 손을 무른 후 벽에 기대섰다. 오이카와는 물빛 반소매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카게야마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더니, 통보하듯이 짧게 말했다.

가자.”

몸을 돌리고 그대로 병원 밖으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보다가 카게야마도 몸을 움직였다.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가 불안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좀 전의 상황을 보고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건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를 쫓아가는 것도 여전히, 카게야마의 몫이다.

 

 

* * *

 

 

끝나지 않는 매미 소리와 달궈진 공기는 여전했다. 가장 열기를 내뿜는 시간인 오후의 태양은 저 자신의 궤도를 따라 둥그렇게 돌고 있었다. 단 두 개뿐인 구름이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과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쓰러지기 전보다 한결 편해진 가슴 속에 숨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내보냈다. 오이카와가 앞서고, 카게야마가 뒤를 따르는 모습은 병원을 나오고도 계속되었다. 오이카와의 등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건 가히 오랜만이다. 제 기억보다 골격이 두드러진 그의 등은 얼룩덜룩한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전부 흡수하고 있었다. 바지와 겨우 맞닿을 정도로 짧은 물빛 티셔츠가 푸른 잎 사이로 비치는 빛에 흔들리면서, 바다처럼 그물망 무늬를 만들었다. 적당히 멋스럽게 고정된 머리카락, 가늘게 떨어지는 목과 티셔츠에 가려진 두툼한 근육, 그와는 다르게 얇은 팔목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새삼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카게야마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등이 곧은 사람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다가 그가 구태여 그늘을 골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더위를 싫어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 외의 이유인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일수록 입을 다물었다. 그건 때로는 오이카와의 친절이었고, 가끔은 카게야마를 애태우는 성질의 버릇이었다.

더위를 가라앉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바람은 오이카와의 등에서 소멸하고, 그늘에 놓인 그의 등을 비추고자 햇빛은 더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도 햇빛도 전부 오이카와만을 따라다닌다. 눈이 부셨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물론 돈은 토비오쨩이 내겠지? 오이카와씨가 생명을 구해줬는데 말이야.”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구해줬다는 건 좀 과장 아닌가 싶어 입술이 튀어나오다가 실제 그가 구해준건 사실이었기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발목에 다시 통증이 배어 나오려던 때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걷는 속도가 비슷해지고 그로 인해 오이카와의 옆모습이 보였다. 홍차 빛 눈동자는 빛을 투명하게 반사해 평소보다 옅은 색소로 빛났다. 카게야마는 잠시 편안해졌던 가슴이 다시 옥죄이는 걸 느꼈다. 열기 때문도, 어지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 * *

 

 

좌석이 총 5개 남짓한 작은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테라스 석이 마련된 공간을 고른 건 오이카와였다. 카페 내부와 유리문으로 통하는 테라스 석에는 수국 화분이 아름드리 놓여있다. 방금 물을 받은 걸까, 푸른색 꽃잎에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있다.

저는 아이스 커피 한 잔요. , 이쪽은 오렌지 주스로 부탁해요.”

오이카와는 제멋대로 주문한 후 종업원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주문할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의 상상 속에서 제멋대로 카레를 주문하던 오이카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테라스 석에서 보이는 거리는 주택가처럼 한적하다. 이처럼 해가 뜨거운 시간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어 작열하는 태양이 그대로 바닥을 지핀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수국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게야마는 입을 열어야할지 고민을 여러 번 하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이제 오이카와의 시선은 카페 주변에 심어진 나무로 옮겨졌다. 센다이는 누가 뭐라 해도 시골이었고, 도시에서 보기 힘든 생생한 빛깔의 잎사귀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재회했을 때처럼 쏘아보듯 날카로운 눈빛이 아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오이카와였다.

아이스 커피, 오렌지 주스 나왔습니다.”

조금 전 오이카와에게서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며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를 흘끔 바라보며 볼을 더더욱 붉힌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구겼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래?”

오이카와는 관심 없다는 듯 금세 대화를 종료했다. 능청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입으로 커피를 마신 후 그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어.”

이와이즈미씨요?”

아니, 이와쨩이면 이와쨩이라고 했겠지.”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바보,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카게야마는 바보 아니에요, 마저 말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멈춘다.

그 친구는 꽤 잘 살았던 거같아. 집이 무척 컸거든. , 집은 그것과 상관없을지 몰라도 대충 어린아이가 느끼는 게 있잖아.”

카게야마는 그러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관념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집에는 오이카와가 있다. 그에게는 익숙한 정의가 타인에겐 이해받기 힘들다는 걸 카게야마는 어머니가 말해줘서야 알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아마 여름방학 때였다고 생각해. 무척 더웠거든. 오늘처럼.”

센다이였나요?”

당연하지. 여기서 태어나고 이곳에서만 살았는걸. , 그래도 너처럼 쓰러질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어.”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장난이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얄밉게 웃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웃음소리였다. 일본, 미야기, 센다이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4일째인데도 오이카와의 모든 것이 매 순간 다르게 느껴졌다. 센다이의 기억은 흙과 공기처럼 오이카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오이카와가 보여주는 익숙한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카게야마를 주조(鑄造)했다. 그와 보냈던 여름의 센다이는 매번 동공이 하얗게 물든 것처럼 눈부셨다.

놀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우연히 저녁까지 먹게 된 날이었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무척 요리를 잘한다고 나한테 자랑한 적이 많았거든.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참 이상하지, 선택이라는 거.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삶이 빚어지니까.”

오이카와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댔다. 마주 보던 눈길을 돌려 다시 풍경을 바라보고, 꿈에서 이야기를 하던 것처럼 일상적인 말투로 이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창밖이 깜깜해졌고,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감사하다고 여러 번 인사한 후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왔어.”

오이카와는 어렸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으면서 말했다. 친구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기억, 그것도 어린아이의 시야에서 본 상황인지라 대체로 부정확하고 모호했다. 그런데도 선명한 이미지 몇 개가 등장할 때마다 오이카와는 특별히 신경 쓰며 자세히 묘사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 세 명, 그들이 내민 종이에 쓰여있던 문구. ‘갚지 못할 시 무슨 일이든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았던 0의 개수와 그 아래 찍힌 지장. 오고 간 말다툼과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

그때 난 너무 무서웠는데,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 누군가의 공포와 증오, 분노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표정을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그 사람들이 간 후에 친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고 있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 미안하다고.”

…….”

알고 보니 그 아이 아버지가 돈을 빌리고 도망쳤다고 하더라. 사업을 시작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그게 실패했다나. 그 아이와 어머니는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얄궂지.”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미소 짓던 얼굴의 근육이 전부 이완됐다. 그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와 누나가 그렇게 되게 할 순 없잖아.”

…….”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오이카와와 얼음물을 마시던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천천히 겹쳐진다. 이와이즈미의 말이 테라스 석 주위를 맴돌았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눈가를 구겼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를 흉내 내어행복해지세요같은 형식적인 말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은 쓸모없는 멍청이였다. 이와이즈미가 하지 못했던 말도, 할 수밖에 없던 말도 하지 못하는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오렌지 주스를 바라보자 동동 떠 있는 얼음이 점차 흐릿해진다. 다시금 머리가 어지럽고 가벼운 두통이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카페 내부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이별 선고였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그래왔듯, 카게야마가 원하는 바를 최소한의 표현으로 채우는 사람이었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아주 작은 틈새도 막지 못하는 부족한 자였다.

손님.”

카게야마의 시야 옆으로 갈색의 정사각형이 보였다. 종업원이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은 네모난 티슈였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제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오렌지 주스에 퐁당퐁당 떨어지고, 그 안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밴드가 붙어있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센다이의 여름 속에 홀로 서 있는 오이카와를 규정짓고, 더러운 붕대를 뭉쳐서 배구가 빠진 그의 빈칸에 조잡하게 쑤셔 넣은 건 카게야마였다. 그런 그가 말할 자격도, 울 자격도 있을까. 저는 그를 제 방식대로 난도질한 만큼 상처 입을 자격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 열에 노출되어 심부의 온도가 섭씨 37도에서 40도 사이로 상승한 상태. 어지럼증, 두통, 구역, 즉시 회복되는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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