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오이카게 5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 연령반전 소재가 있습니다.

 

 

 

 

이카와 토오루는 씻을 때 물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 그가 씻으러 들어간 뒤 하도 조용해서 욕실에 들어가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 일화를 말하면서 카게야마를 힘껏 놀리는 오이카와가 가끔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저가 실제로 했던 행동이기에 할 말은 없었다. 카게야마와는 거의 반대였다. 오히려 카게야마는 설거지를 할 때나 씻을 때나, 세수할 때에도 물소리를 크게 내는 편이었다. 그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이카와가 씻고 있는 욕실에서는 거의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반면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하는 주방에서는 요란한 물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쉬는 날을 맞추고 이것저것 살 것도 겸해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건 전날 밤이었다. 애초에 내일 뭐 할까?’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잠들기 직전에서야 무엇을 할지 정해졌으니, 오이카와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평소대로 로드워크를 가려던 카게야마를 붙잡고 다시 침대로 끌어들인 오이카와 덕분에, 두 사람이 일어난 건 오전 아홉시 남짓. 주린 배를 움켜잡고 아침을 챙겨 먹은 게 열 시 전후.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거의 끝마친 지금은 열한 시 경이다. 하루도 로드워크를 빼먹지 않는 카게야마였으니 이렇게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보내는 휴일. 그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날이다.

카게야마는 옆에 있던 수건에 젖은 손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맨발로 바닥을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도 연달아 들렸다. 카게야마는 몸을 돌리고 그가 들어간 방 쪽을 바라봤다. 방문은 닫혀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걸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닦아놓은 식기를 정리하면서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오이카와씨.”

작게 부르면 대답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이렇게 조용했던가?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릇을 전부 정리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방문 앞에 이르러 노크를 해도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오이카와씨. 장 보러 안 가요?”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또 그 패턴인가. 지난날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저번에도 오이카와가 하도 말이 없길래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오이카와의 양팔에 붙잡혔었다. ‘오이카와씨!’ 소리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기분 좋은 듯이 웃어넘긴 오이카와는 토비오쨩.’ 연달아 이름을 불렀다.

또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아니, 가능성은 꽤 높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계를 돌아보면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고 카게야마는 문고리를 노려봤다.

오이카와씨.”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바닥을 바라보면 오이카와의 옷가지가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었다. 옷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이카와가 저렇게 늘어놓았다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에 서 있는 그의 몸을 가로지르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그라고 하기에는 어깨가 지나치게 좁고길이도 짧았다. 아직 옷 갈아입는 중인 건가?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 옷가지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씨?!”

그림자를 따라가던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존재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걸친 건 오이카와의 하얀색 셔츠뿐이었고, 셔츠로는 가느다랗게 뻗은 하반신을 전부 가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하얀색 셔츠는 작은 오이카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위험한 장면을 그려냈다. 작은 몸통에 작은 머리. 동그란 눈동자를 한 오이카와가 그곳에 서 있었다.

형은 누구세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 목소리조차 제가 기억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와는 어렴풋이 달랐다. 카게야마는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와 동거하는 건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 토오루고, 아침을 함께 먹은 것도 그 오이카와였으며 씻으러 들어간 것도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였다. 틀림없다. 카게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오이카와를 자세히 살펴봤다. 어느 모로 보나 오이카와다. 동시에 오이카와가 아니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고개를 몇 번 더 갸웃하더니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 그 표정은 오이카와 그대로였다. 이내 작은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무의식중에 부정하고 있던 진실이 객관적인 증거로 드러난 기분이다. 카게야마는 아연실색한 채로 서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그 이름이, 지금. 카게야마가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Baby, It's You!

 

 

 

 

오이카와는 팔과 다리를 몇 번 휘적였다. 하얀색 셔츠를 걸쳤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인다.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지나치게 얇아 카게야마가 강하게 붙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옷은 맞아요?”

!”

오이카와는 얼굴 가득 미소를 피우고 강하게 끄덕였다. 자신의 중학교 1학년 시절 옷이 이 정도로 꼭 맞는다니,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도 그 정도 나잇대인 걸까. 어린 시절 입고 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키타가와 제일중학교 체육복이 이곳에 있는 건 순전히 우연이다. 도쿄로 올라올 때부터 옷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옷장에 있는 옷을 전부 가지고 올라왔더니. 오이카와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는 빨래하는 족족 카게야마의 옷을 버리는 오이카와 때문에촌스럽다가 그 유일한 이유였다옷 정리를 하기보다 있는 옷을 사수하기 바빴다. 그러다 우연히 찾게 된 키타이치 체육복. 이렇게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도 고개를 들고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의 가슴과 허리 사이 정도의 키.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도 이만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고민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기억은 오이카와의 뒷모습만 가득하다.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끈질기게 굴던 시절. 그 시절과 그리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그의 서브에 비하면 멀었다. 분한 마음이 들어 카게야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험악한 인상으로 바뀐 카게야마의 얼굴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를 뜨고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형은 누구세요?”

조그마한 입술에서 어린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음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을 조금 길게 늘이고 아무런 의심 없이 묻는 목소리.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무어라 둘러대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저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오이카와에게 자신의 이름을 댄 건 중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이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토비오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와 나 사이에 이름을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름만은 한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와 어울리는 모양과 뜻. 처음 그 한자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는 그 이름을 곱씹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작게 읊조렸다. 이윽고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기억보다 작고 앙증맞은 눈동자와 콧방울이 부드러운 빛깔로 빛났다.

그럼 토비오쨩이네!”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를 놀란 눈동자로 바라봤다. 제 기억 속 오이카와와 똑같은 미소였다. 눈꼬리가 완곡하게 휘어지고, 볼살을 부드럽게 접으며 미소 짓는 눈앞의 오이카와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했다.

카게야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의심의 고리를 끊었다. 오이카와구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였다. 몸이 아무리 작아도, 카게야마의 존재를 몰라도.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오이카와씨는, 몇 살이에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손 두 개를 들어 펴 보였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환하다.

열 살!”

열 살. 열 살, 인가. 10열 살……. 카게야마는 문득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스물일곱 살이던 오이카와가 열 살 오이카와가 된 걸까. 무엇 때문에? 씻다가? 물소리를 많이 내지 않고 씻어서? 혹은 무언가 병 같은 걸까. 카게야마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앓고 있는? 그럼 이 세계에 있던 오이카와는 열 살인 오이카와가 있는 곳으로 간 걸까. 아니, 옷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카게야마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몇 번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생각하기를 그쳤다. 오이카와는 험상궂은 얼굴의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고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묘한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행동을 하는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오이카와는 제 배를 문지르다가 거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구슬같이 작은 홍차 빛 눈동자가 이곳저곳에 닿았다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 그런가.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와 함께 살아온 이 집이 익숙하고, 오이카와가 이곳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이질적인 존재는 오직 눈앞의 오이카와 뿐인데, 열 살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것들이구나.

카게야마의 눈길을 느낀 것인지, 오이카와는 두리번거리던 눈동자를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돌렸다. 배시시 미소 짓는 입가에서 하얀 치아가 반짝인다. 카게야마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 순간마다 어린 오이카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색다른 미소가 오이카와를 쏙 닮은 얼굴 위로 겹쳐진 모습은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삼 제 심장이 이상한 박동으로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열 살의 오이카와라 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 유일하게 영원히 좋아할 사람.

아니, 어린애잖아. 열 살! 고개를 있는 힘껏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의아하다는 듯이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코코아 드실래요?”

!”

오이카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으며 볼록 튀어나온 볼이 벚꽃 잎처럼 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말 한마디마다 반응하고 감정을 얼굴에 바로 드러내는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코코아 좋아해.’ 기분 좋은 듯이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오이카와가 어릴 때는 이랬을까. 열 살이라면 카게야마를 만나기 6년 전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보다 한참 큰 존재였다. 그 등은 곧게 뻗어 흩어지는 빛을 흡수했고 그가 내려치는 서브는 카게야마의 가슴을 파열시켰다. 카게야마에게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펼쳐준 그가 지금, 제 앞에서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코코아 생각에 행복한 웃음을 짓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비밀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가로 내리고 뺨을 붉혔다.

부엌으로 가서 타드릴게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말한 후 앞서 부엌 쪽으로 걸었다. 보폭이 더 작은 오이카와는 급하게 걸어오며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다시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따라 걷고 있다. 어디 갈 땐 어른 손을 잡으라고 배운 걸까. 저도 어릴 적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집 안에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머그컵 두 개에 코코아 가루를 부어 넣는다. 권장량인 테이블 스푼으로 한 스푼보다 조금 더. 평소 카게야마가 먹던 습관 그대로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용으로 산 민트색, 검은색 머그컵은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처음 산 물건이었다. 코코아를 마시지 않는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위해 코코아 가루를 고르고, 커피를 마시지 않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위해 커피 가루를 골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하나하나를 맞추어갔다. 물론 지금은 각자의 입맛을 알고 있어 오이카와가 원하는 커피 가루를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처음에는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토비오쨩. 이거 영어는 읽었어? 분쇄 안 된 커피콩을 사 오면 어떡해!’

커피라고 적혀있는 거 아닙니까? 여기. 오이카와씨가 라인으로 보내준 영어랑 똑같은데.’

이거 말고! 정말이지, 토비오쨩이랑 못 살겠네!’

그렇게 말하던 그와 산지도 이럭저럭 몇 년이 지났다. 그는 처음부터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코코아 가루를 정확하게 사오곤 했지만, 지금은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이제는 카게야마가 어떤 때에 어떤 코코아를 원하는지조차 아는 수준이었다.

민트색 머그컵에 코코아 가루를 담는 것은 처음이다. 매번 커피와 코코아를 타는 역할은 카게야마였다지만, 실수로 그의 컵에 코코아를 탄다 해도 컵을 바꿔 먹었으면 먹었지. 오이카와는 커피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고르라면 커피를 마시는 쪽이었다. 그 덕분에 그의 민트색 머그컵에선 항상 미미하게 커피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는 코코아 가루가 담긴 오이카와의 컵을 코에 가까이 가져갔다. 방금 넣은 코코아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기가 겹쳐진다.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커피를 마시며 웃던 오이카와, 입꼬리에 코코아가 묻었다며 손으로 닦아주던 오이카와, 그러다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그대로…….

카게야마는 서둘러 생각을 지우고,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처음 볼 때처럼 눈동자를 크게 뜨고 부엌, 연결된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괜히 사진 같은 게 보이면 작은 오이카와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까? 자기랑 똑 닮은 얼굴의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가 보인다면.

카게야마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급하게 훑었다. 그제서야 카게야마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 찍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집 안에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핸드폰 속 비밀번호를 걸어 둔 토비오폴더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오이카와의 핸드폰과 노트북에는 그조차도 단 몇 장 정도만에만 존재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물이 끓고 있는 전기 포트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는 코코아가 담긴 컵을 들고 몇 번 입김을 불었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컵 위로 올라오던 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톡 튀어나온 입술은 제 기억보다 조그맣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코코아를 마셨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걸까, 카게야마가 몇 모금 마실 동안 오이카와는 연신 입김만 불었다. 카게야마는 가슴이 따뜻한 물에 잠기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오이카와구나.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것도, 입술의 모양도.

오이카와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코코아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멈추지를 않는다. 전부 마시기에는 뜨거웠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배가 고픈 건가? 무언가 만드는 게 좋은 걸까,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카게야마는 애매하게 계속되는 고민을 연상하면서 코코아를 조금씩 마셨다. 닫힌 창문으로 들어오는 건 슬그머니 낮아진 햇빛뿐이다. 코코아 향기와 눈앞의 오이카와그 오이카와가 열 살이라는 점만 빼면 여느 때의 휴일 풍경이었다.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마시던 코코아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목구멍을 움직였다. 뜨거운 액체가 한 번에 지나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는 코코아 액체가 거품처럼 묻어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긴 토비오쨩네 집 맞지?”

……,”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살며시 떨었다.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저 눈빛은 그대로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곳에 있나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요?’ 허나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카게야마를 알고 있는 열여섯 살 이후의 오이카와였다면 설명하기 더 쉬웠을 텐데. 어째서 그 이전의 오이카와인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 돌아오나요?묻지 못하는 질문을 입 안에 남은 코코아와 함께 삼켰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카와씨 어머니께서, 오늘 같이 있으라고…… 하셔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오이카와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얘기도 나눴고. ‘토오루랑 사는 거 힘들 테지만 힘내요.’라는 응원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응원인도 받은 적 있고. 카게야마가 거짓말 한 건 오늘밖에 없다. 오이카와가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오늘이라는 기한을 정한 건 온전히 카게야마의 생각이다. 어쩌면, 내일도? 혹은 모레도? 영원히 오이카와는 이 모습으로 있는 걸까? 설마.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카게야마는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오늘이라 말한 건 무의식적이었지만, 그리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오늘이냐 물으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미약하게나마 느꼈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코코아를 마시면서도 카게야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카게야마는 어색한 죄책감 때문에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 오이카와에게 거짓말할 때처럼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오이카와도 더 묻지 않은 채 눈동자를 내렸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다시금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보다는 짧은 머리지만,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처럼 윤기 있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생기 있는 눈동자는 과거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 역할을 했다. 카게야마보다 키가 작다고는 하나, 분명 또래보다는 큰 키.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는 순간적이나마 카게야마가 아는 몸의 윤곽을 그려냈다. 카게야마가 보지 못했던 어린 오이카와의 형태가 눈앞에서 공기와 햇빛을 반사하며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평생 오이카와와의 2년 터울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보다 어리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그를 내려다보다니. 소파에 앉아있을 때도 카게야마가 내려다보는 게 기분 나빠서 선 채로 잡지를 보던 오이카와가. 언제나 그는 카게야마보다 2년 앞선 곳에 서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저는 오이카와에게 맞붙는 정도까지가 한계였다. 때로 카게야마가 고집을 부려 원하는 바를 성취하더라도, 그 모든 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고집을 끄덕이고’ ‘받아들여 줬기때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간의 관계에서 흔히 주고받는 객관적인 이해는 오이카와와 저 사이에 힘든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감정의 교류서로만이 알 수 있는 배구에 대한 깊은 신념은 느낄 수 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있다면 오이카와를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뇌 안쪽이 저릿할 정도의 깊은 충족감과 만족감. 다른 무엇으로도 느껴본 적 없던 새롭고 따뜻한 감정은 카게야마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는 등불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저를 받아주는 오이카와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기고 싶다는 욕심도 불어갔다. 오이카와를 사랑하기에 그의 등을 따라잡고, 오이카와가 제 배구의 구심점이기에 그의 배구를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에게 그와 같은 욕심을 말했을 때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네 사랑이라면.’ 오이카와는 그리 말했었다. 사랑.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랑은 다소 특이한 형태인 건 아닐까.

카게야마는 혀끝에서 스며드는 코코아의 달콤한 맛을 느꼈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 코코아를 열심히 마시던 오이카와에게로 눈을 돌리면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토비오쨩, 입술에 코코아 묻었어.”

눈꼬리를 접고 웃는 얼굴이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온전히 오이카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앞에서 어린아이답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오이카와 또한 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간지럽다. 몽글몽글한 솜털로 잔뜩 간지럽히고,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하게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 * *

 

 

코코아를 다 마신 후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카게야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열 살 오이카와가 나타났던 장소였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배구공을 들어 올렸다.

배구공! 토비오쨩도 배구 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공을 내밀었다. 눈이 반짝이며 빛났고, 흥분을 가리지 못한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꾸물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동자 두 개가 카게야마의 입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들어 올린 건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의 배구공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오늘 자신의 배구공을 사기로 약속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며칠 전 낡아서 버린 탓에 마침 장도 볼 겸 함께 배구공을 사자고 먼저 제안한 건 오이카와였다.

다시 고민의 사슬이 입을 옭아맸다. 배구를 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까? 눈앞의 오이카와는 6년이 지나면 중학교 1학년이 된 카게야마를 만나게 될 텐데. 설마 지금 스물다섯 살인 나를 만난 탓에 과거가 바뀌는……그런 일이 일어날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오이카와가 전에 어려운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타임…… 어쩌고였나. 아마 과거가 바뀌면 미래에도 영향이 간다는 얘기였던 것 같? 카게야마는 잠시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카게야마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배구공을 꼭 끌어안은 오이카와는 조금 발을 굴렀다. 안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의 기대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든 오이카와는 오이카와다. 스물일곱 살이어도, 열 살이어도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만나는 것이 흐르는 섭리 중 하나라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만나자마자 사랑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단지 조금 일찍 만난 것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 세상이든 어떻게 태어나든 오이카와를 사랑하고 만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과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보다도 느린 움직임이었다.

. 배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공 튀겨 봐도 돼?”

오이카와는 긴장한 눈초리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는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대답했다.

.”

고마워!”

힘찬 대답을 내뱉은 오이카와는 공을 들고 방 한가운데에 섰다. 낮게 올리는 오버핸드 토스가 이어졌다. 자세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다. 공을 주시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 안에 이미 카게야마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오이카와가 토스 연습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진지하고 생생한 얼굴. 고등학교 무렵 시합했던 때와 달리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표정으로 나타났다. 어릴 땐 저런 표정으로, 저런 자세로 배구를 했을까. 저렇게 작은 손가락이 그리도 커져서, 그 손으로 배구공을 감쌀 정도까지. 문득 그가 커가는 과정을 보고 싶다는 묘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조금 더 높이 올려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토스 높이를 낮추려고 조정하던 오이카와는 언뜻 곁눈질로만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괜찮냐고 묻는듯한 눈빛이다.

천장에 부딪혀도 괜찮아요. 윗집에는 한 명만 사는데, 평일도 주말도 새벽 일찍 나가고선 밤 10시 다 되어야 돌아오거든요. 더 올려도 돼요.”

언제는 높고 언제는 낮던 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오이카와는 허리를 곧게 펴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토스 연습을 이어갔다. 카게야마가 말한 대로, 위층에 사는 여성은 휴일에도 새벽같이 나가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걸 알게 된 오이카와는 주말 아침부터 카게야마를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날이 늘었는데……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은 쓸데없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들리는 마찰음, 공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얼굴을 가로 비추는 나른한 온기 등. 카게야마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원하는 포지션, 있나요?”

세터!”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후, 지금껏 묻지 못한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계속 묻고 싶었으나 한 번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질문. 카게야마는 겨우 맞붙은 입술을 떼었다.

, 세터가되고 싶습니까?”

띄엄띄엄 단어를 꺼내면서도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한없이 작아졌다.

그야, 멋있잖아.”

오이카와는 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걸까,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어떤 스파이커든 그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가 되고 싶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내가 그 팀에 있는 것만으로 팀의 실력이 순식간에 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신기한 거 같아. 세터는 배구에서 가장 고독한 포지션이면서 동시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포지션이야.”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고 울렸다.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 팀의 실력을 순식간에 올리는 존재. 카게야마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채 오이카와를 바라보지 못하고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세터.”

저가 처음으로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상대. 코트에 계속 서 있으려면 끊임없이 이겨야 한다. 그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 이기기 위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연단하는 과정은 당연한오히려 즐겁기까지 한일이었다. 그러던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와 싸우며 처음으로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이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각했다. 그때, 자각한 바로 그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철저하게 졌다.

이후 아오바죠사이를 이기고 전국 대회에 진출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이카와는 저의 시야 너머에 있는 존재였다. 또한 끊임없이 앞서나가며 카게야마에게서 멀어져 가는 극점이기도 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생각은 없다. 카게야마는 배구의 끝없는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의 가치이자 숨결이자 생명이었다. 그 끝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생각은 가끔 한다. 바로 그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스스럼없이 나아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길의 앞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토비오쨩, 뭔가 이상해.”

오이카와는 토스 연습하던 손을 멈추고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 가요?”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될 수 있을 거라고 한 말?

마치 내가 이미 그런 세터가 된 걸 보고 온 것 같은 말투야.”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몇 번 더 키득이더니 그저 가만히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투박하게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다시 토스 연습을 시작했다. 통 통, 가볍게 공을 튀기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있던 방, 두 사람이 함께 나날을 보내온 방. 포근한 이불 같은 햇볕이 창문을 통해 방 안을 가로지르며 비췄다. 햇볕이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고,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노곤한 기운이 이마를 붕대처럼 둘렀다. 오이카와가 들이쉬고 내뱉는 공기가 푸근하다.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우선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만다. 언제고 그랬다. 카게야마에게 새로 생긴 버릇 같은 성질이었다. 덕분에 함께 나가서 영화를 보면 잠들기 일쑤라 쓴소리 들은 적도 많지만.

깃털처럼 가라앉으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보다 훨씬 키도, 덩치도 작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공을 섬세하게 튀기고 있었다. 열 살. 초등학생인가? 어느 초등학교에 다닐까? 배구부에 들었을까? 어떤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렸을까? 카게야마는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의 과거이자 현재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했다.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도, 오이카와가 모르는 카게야마도 분명 존재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를 모르는 오이카와라는 건 제3의 인류처럼 생소한 존재였다.

토비오쨩은 포지션이 뭐야?”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물었다. 대답해도 되는 걸까. 또 잠시 동안의 고민이 나른한 머릿속을 뒤덮쳤다. 카게야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목소리를 흘렸다.

뭐일 것 같으세요?”

세터.”

오이카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카게야마 쪽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로 오이카와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를 눈치챈 오이카와가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푸하하, 자연스레 터져 나온 오이카와의 웃음소리 덕분에 그의 자세가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잡고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토비오쨩, 너무 티 나는 걸. 아까 코코아 마실 때 보니까 손톱이 특히 가지런해서, 특별히 관리하는구나 싶었어.”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바라봤다. 손톱이 가지런한 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가 되고 싶은 세터를 말할 때도 별말 없길래. 이와쨩한테 말했더니 그런 건 불가능하지, 바보야라고 했거든. 어떤 스파이커를 만나든 그 사람의 100%를 끌어내는 건 꿈같은 이야기라고.”

맞지?’ 오이카와는 확신에 찬 물음으로 말을 마친 후 미소를 지었다. 스물일곱 살이든 열 살이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대로다. 아마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어떤 포지션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부터 카게야마는 세터라고 어느 정도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것저것을 조합한 후 가장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에 능한 사람이었으니, 어리다고 그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카게야마의 질문으로 더 큰 확신을 얻었을 게 분명하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분한 마음에 인상을 구겼다.

배구를 하고, 세터로서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리고 시합을 지휘한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반면에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 개별로 놓으면 모양이 가지각색이나 완벽하게 맞붙는 퍼즐 조각과도 같다. 배구와 세터, 동시에 연인인 두 사람. 그중 하나라도 성립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함께 있지 못할 것이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연하게 웃으며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흐릿한 겨울날, 눈발 가운데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를 부르던 오이카와……. 숨이 차서 목구멍이 파열할 것처럼 더운 여름 날, 물안개 속에서 한숨을 내쉬며 웃던 오이카와.

눈앞의 오이카와는 예전에 봤던지금은 훌쩍 커버린오이카와의 조카를 떠올리게 했다. 열 살? 오이카와는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애초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어떤 이유로 어려졌는지혹은 어린 몸으로 바뀌었는지알지 못한다. 특정한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사라진 거라면?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심장이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찾아온 건 등을 덮는 식은땀과 헐떡임이었다. 가릴 길 없는 생각들이 유선형으로 뻗어나가 가슴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만약 오이카와가 오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의 시야가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코끝을 누를 뻔한 공을 겨우 붙잡았다. 거의 맞닿은 상태였다. 짧게 마찰한 콧방울이 따끔거렸다.

, 하시는 겁니까! 공 맞을 뻔했잖아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귓속을 시끄럽게 채웠다. 정작 카게야마에게 공을 던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손을 디뎠다.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와 그의 몸에 기대선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토비오쨩, 무서운 얼굴 하고 있네.”

오이카와는 늦은 밤 카게야마를 안을 때 보이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깊고 그윽하여 카게야마의 속까지 훑을 것 같은 눈동자. 숨결이 마주 닿는 거리를 두고 카게야마는 가만히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이미 알고 있으며 몇 번이고 마주 봤던 얼굴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눈꺼풀을 내리며 예쁜 빛깔의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섬세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그에 이끌리듯이 뜨거운 눈동자를 감았다. 오이카와의 작은 입술과 카게야마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은 채 떨어졌다. 닿자마자 떨어진 입술에서 감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슷한 간격을 두고 눈을 뜬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오이카와의 볼이 해가 질 때의 하늘처럼 불그스름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과 맞닿았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내가 무언가로 걱정할 때면 누나가 항상 이렇게 해줬거든.”

그렇구나. 오이카와씨의 누나가. 그랬구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화끈거렸다. 시간을 따라 나아가던 태양이 잠시 멈춰 서 두 사람을 오롯이 비췄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몸이 따스한 오후의 온도로 달아올랐다. 세포 속까지 채우는 햇볕이 반짝이는 눈동자 사이에도 속속들이 차올랐다. 오이카와는 기대고 있던 양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카게야마가 들이마시는 숨 속에 오이카와의 향기가 향수처럼 달라붙었다. 익숙한 향기였다.

토비오쨩이 뭘 걱정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괜찮아.”

괜찮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톡톡 다독이듯이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은 거구나.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근거 없는 그의 말이 움직이지 않는 확신의 바위가 되어 중심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카게야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유를 알기 힘든 안도감이었다. 오이카와의 향기를 머금은 한숨을 내보내면 심장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물에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의 배에서 갑작스레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떼고 마주 보면, 오이카와의 얼굴이 보송보송 물들었다.

미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카게야마는 눈동자의 셔터를 눌렀다. 제 기억 속 그 무엇보다 생소한 표정이다. 신기했다. 이런 표정의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쑥스러운 듯 발그레한 얼굴로 흘긋거리며 카게야마의 눈치를 살피는 오이카와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카레 좋아하세요?”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삐죽 내밀고 웅얼웅얼 물었다.

 

오이카와와의 첫 데이트하얀 햇살이 아스팔트 도로의 우둘투둘한 면을 하나하나 비추는 날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선글라스를 쓰고 그렇게 물은 그는 언뜻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카게야마는 글쎄요, 운을 뗀 후 잠시 간격을 두었다. ? 오이카와는 재차 물으며 카게야마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바퀴의 민감한 살결로 그의 굳은살을 느끼며, 카게야마는 귀를 붉혔다.

카레 좋아하세요?’

 

그때 물었던 그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첫 데이트, 처음으로 오이카와와 둘이서만 먹었던 카레. 그 시작을 다시금,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이카와와 하고 싶다. 오이카와는 잠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이내 그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 좋아해.”

첫 데이트 때의 오이카와와 같은 대답. 비록 겉모습을 다를지라도, 카게야마는 그가 바로 오이카와임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 *

 

 

배불러!”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만든 카레를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긁어먹었다.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놓은 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카게야마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구공이 침대 근처를 굴러다녔다. 좀 전, 오이카와와 나눴던 짧은 입맞춤을 기억해내고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대 푹신해.”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운 후 사지를 쭉 폈다. 이불이 기분 좋은 듯 얼굴을 비비면서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와 가까운 침대 끝에 앉았다.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졸린 걸까? 가늘고또래 아이보다는긴 팔 끝에는 작은 손이 있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잡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투박하게 내뱉었다.

피곤하면 주무세요.”

으음싫어!”

아이가 떼를 쓸 때처럼 몸을 버둥거리던 오이카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불만이 전부 얼굴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볼을 뭉툭하게 부풀린 얼굴은 못생겨 보일 법도 한데, 왜 이다지도 가지런할까.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좁히곤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토비오쨩도 같이 자.”

왜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카게야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카게야마가 입고 있는 니트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은 작은 아기 고양이 같았다. 오이카와는 단호한 얼굴로 불뚝 튀어나온 입을 열었다.

아깝잖아. 토비오쨩이랑 하루밖에 같이 못 있는데. 그러니까 같이 자자.”

아깝다고? 카게야마는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후, 가끔 카게야마가 신칸센을 타고 오이카와를 만나러 도쿄로 오던 시절.

갈게요.’

. 잘 가.’

또 올게요.’

.’

이제 곧 차 오니까 가세요.’

갈 거야.’

가라니까요…….’

그런 의미 없는,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대화를 나누던 시절처럼그런 기분인 걸까. 그때와 같은 기분인 걸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결국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도 그를 따라 침대에 몸을 눕혔다.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이 그의 몸을 감쌌다. 평소 오이카와와 밤을 보내는 침대에서 어린 오이카와와 함께 눕는다.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불을 꼭 붙잡았다.

토비오쨩네는 침대네. 우리 집은 바닥인데.”

……그런가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할 무렵 침대를 살지, 이불보를 둘 지로 꽤 오랫동안 둘이 고민했던 적이 있다. 사실 카게야마는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라고 답했지만결국 다다미 방도 아니니 침대를 샀으나 오이카와는 익숙해질 때까지 서툴러 했다. 알고 보니 카게야마가 도쿄로 올라오기 전 2년 동안도 자취방에서 꽤 고생했다고. 항상 저보다 모든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는데, 카게야마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 오이카와에게는 서툰 일이라니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는 잘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카레를 완식한 후의 포만감,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는 큰 창문,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로 눅눅해진 머릿속……. 카게야마의 이마와 눈꺼풀 위에 잠가루가 솔솔 떨어지면서 두껍게 쌓였다. 꾸벅꾸벅 감기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바라보면, 오이카와는 알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토비오쨩은 이상하네.”

? 제가요?”

잠의 바다에 젖어들면서도 울컥한 마음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상한 건 오이카와씨죠.”

뚱한 얼굴로 말하자 오이카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내가 훨씬 어린데도 존댓말 쓰잖아. 이상한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잠시 숨을 멈춘 후 눈동자를 휘었다. 진한 홍차 빛 눈동자가 새하얀 이불안에서 은은한 빛으로 흔들거렸다. 카게야마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열 살이 된 후에도 여전히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건 카게야마 자신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에 열이 모이고 평소보다 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몇 살이어도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 토오루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고선 그걸 이제야 말하는 오이카와도 그 다웠다. 키득이는 오이카와에게서 그의 향기가 맑은 물처럼 흘러나왔다. 방안을 비추는 태양과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카게야마에게로 잠이 쏟아졌다.

카레의 향기, 오이카와의 향기, 아련히 풍기는 햇볕의 냄새.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잘 자, 토비오쨩. 또 만나고 싶어.

 

언뜻 오이카와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 것 같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그 대신일까, 손을 맞잡은 온기만큼은 유독 강렬하게 남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그의 손은, 기억보다도 따뜻했다.

 

 

* * *

 

 

……비오쨩. 토비오!”

…….”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누군가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두 번 깜빡인 카게야마는 푸른 눈동자를 크게 떴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오이카와가 침대에 앉은 채로 카게야마를 흔들고 있었다. 질색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한숨을 강하게 내쉬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스물일곱 살의 체격 그대로다.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했잖아? 토비오 배구공도 사고. 그래놓고 낮잠 잔 거야?”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흐릿한 머리를 들고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뭐야? 아니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이해하기 힘들단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 오후 5시야. 지금이라도 나갈까? 많이 피곤해?”

…….”

카게야마는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옷을 가다듬고 이미 멋들어진 머리를 몇 번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간질간질한 눈을 비볐다. 얇게 잘라놓은 햇빛이 점차 가늘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 앞에 서있는 오이카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 몽롱한 물속에 빠졌던 의식이 뭍으로 나와 활동을 재개했다.

오이카와씨.”

. ? 토비오, 얼른 준비해.”

오이카와씨 맞나요?”

……토비오.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카게야마의 상태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카게야마를 마주 본 그의 눈동자는 다정한 빛을 담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이마에 손도 대보고.

열은 없는데.”

작게 중얼거린 후 그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카게야마는 제 이마에 놓인 오이카와의 큰 손, 저보다아주 약간큰 키와 다부진 신체를 눈으로 따라갔다. 얼굴 윤곽도 성인답게 또렷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당기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불 빨래하면서 함께 넣었던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난다.

돌아왔네요.”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오이카와의 어깨가 움직였다. 카게야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한 건지 그의 목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소리야? 토비오, 어디 아파?”

아니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제 어깨에 고개를 묻은 카게야마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그럼 얼른 일어나. 오이카와씨가 휴일 대낮부터 토비오쨩이랑 낮잠을 자다니, 정말이지. 어떻게 잠든 건지는 기억 안 나는데.”

오이카와는 계속 투덜대면서 카게야마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카게야마는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고 오이카와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오이카와씨는 어릴 때가 훨씬 귀엽네요.”

?”

홍차 빛 눈동자가 여지없이 커졌다. 근거리에서 그의 당황한 얼굴을 접한 카게야마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는 얼굴이다. 오이카와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바꿨다.

오이카와씨는 항상 귀여워. 인상 나쁜 토비오쨩보다 훨씬 귀엽고 예쁘지.”

미소 지은 카게야마의 미간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꾹 눌렀다. 살며시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애초에 언제 내 어릴 때를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건방지네.”

오이카와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는 점점 아파지는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열 살 오이카와는 솔직하게 웃고 장난치고 훨씬 귀여웠는데. 잠들기 전 미소 짓던 어린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건 눈앞의 오이카와였다. 툴툴거리고 카게야마를 어린애 취급하고 항상 선배처럼 구는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는 그가 서있는 방 안의 풍경을 돌아봤다. 큰 창문 옆에 선 오이카와, 약한 빛을 흘려보내는 조명이 그의 등을 비추면서 떨어졌다. 몇 가지 가구가 없는 방 안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오이카와가 내뿜는 존재감은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모양이다.

타임 어쩌고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

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카게야마가 의아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가 제 심장의 혈관에 스며드는 걸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오이카와씨가 있구나 싶어서요.”

난 항상 있잖아.”

그렇네요.”

뭐야, 그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볼을 어루만졌다. 갈비뼈 안쪽이 뜨겁고 뻐근하다. 카게야마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 번에 들이마셨다. 오이카와가 있는 집 안, 그의 냄새가 나는 방.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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