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역(地域), 인명(人名)은 가상입니다.

*여행을 떠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제3자의 시선(나)에서 바라본 글입니다.

*'나'가 타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타케다씨께 보내는 편지 (01일째)





 

바람이 곧추 불고 있습니다. 저희 여관 앞을 장식한 단풍나무도 어느덧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저희는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에 지렛대를 세우고, 지붕 위에 돌을 얹었고 정원도 다듬었습니다. 아직 이르다고 하시려나요. 쓰야마촌에서의 겨울이 빠르다는 건, 타케다씨가 아무리 마을을 떠난 지 오래됐다고 해도 아직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하신지요? 안부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리츠코도 건강하다는 소식을 들어 무척 기쁩니다. 타케다씨의 편지를 받은 건 8월 막바지였습니다. 마당에 물이라도 뿌릴 겸 나갔다가 마침 땀을 뻘뻘 흘리는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얼음을 세 개 띄운 물을 드린 후 편지를 받아 들은 뒤, 타케다씨의 이름이 적힌 걸 보고 제가 어찌나 놀랐는지 타케다씨는 모르시겠죠. 물이고 뭐고 제 방으로 뛰어들어가 편지를 정독했습니다. 적어주신 말씀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펜을 드는 게 10월 그믐밤이니 답장이 참으로 늦어졌네요. 죄송한 마음을 담아 변명을 말씀드리면, 저는 답장을 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편지에 적힌 건 주로 타케다씨의 안부인사와 간단한 근황, 그 뒤로는 전부 왜 제가 그런 결심을 했는지에 관해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방금 편지를 다시 꺼내보았습니다만 역시나 제 기억이 옳네요.

저는 타케다씨의 편지를 읽은 후 곧장 답장을 쓰려고 했습니다. 흰 편지지를 꺼내고 옆에 편지봉투를 준비해두고, 펜까지 꺼내 들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열어둔 창문으로 오후의 햇빛이 새어들고 물을 뿌리지 않은 마당에서 올라온 열이 지나치게 뜨거웠습니다. 끈으로 매어둔 소매 안쪽으로 땀이 스며 나왔습니다. 너무 더운 걸까 싶어 얼음물을 준비해놓고 다시금 책상에 앉았습니다. 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내 답장 쓰기를 포기하고 편지지를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지금 제가 쓰는 편지는 오랜 고민을 거친 끝에, 제가 저 자신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심정으로 쓰는 것임을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편지에 쓰려는 이야기는 제게 지나치게 부끄럽고 동시에 지극히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치부보다 부끄러운, 심장보다 소중한 추억을 타케다씨께 과연 말해도 될지 망설였던 것입니다. 타케다씨를 못 믿어서도 아니고, 타케다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게, 그 기억은 제게 무척이나 특별합니다. 저는 단지 그들, 그들과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도 될지 망설였을 뿐입니다.

그리 고민하다 보니 이리도 늦은 답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답장을 반드시 주지 않아도 된다. 허나 답장을 하기로 정했다면 꼭 주기 바란다고 하셨던 타케다씨 말씀처럼, 저는 답장을 쓰기로 정했으니 이 편지를 마치기 전에는 펜을 놓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저녁 6시 반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세이와 쇼우, 여관 식구들은 저녁 식사 중입니다. 저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한 후 방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마쳤을 때 몇 시가 되어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손을 멈추는 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타케다씨가 편지를 보실 때도 그러한 순간들이 이 글에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낌새를 눈치채신다면, 그저 조용히 타케다씨께서도 손을 멈춰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 대해서, 그들의 순간의 분위기에 대해서 아주 잠시라도 상상해주세요.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새기며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여관을 방문하는 사람 중 젊은 사람의 비율이 극히 적다는 것을 타케다씨도 알고 계시겠죠. 그 적은 비율조차도 어르신들을 안내하기 위해 온(혹은 어르신들의 자녀, 손자분들로 그저 그분들을 따라온) 사람이라는 것도 역시나 알고 계시겠죠. 때는 4월이었습니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3일 연속 내렸던 비가 그치고 초록빛 태양이 맑게 떠오른 날이었습니다. 4월에는 저희 여관으로 오르는 언덕길이 온통 진달래로 뒤덮인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주로 붉은 색조입니다만, 분홍색과 주황색이 섞여 다채로운 봄의 향취를 더합니다. 타케다씨께서는 어릴 적 그 언덕길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며 진달래꽃을 온통 따다가 꽃대를 빨아 꿀을 먹곤 했죠. 저는 타케다씨의 입술이 톡 튀어나와 꽃대를 물고 오물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쓸데없이 어릴 적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본론을 말하라고 화내고 계시겠네요.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였던 모습을 당신은 그리 탐탁지 않아 하셨죠. 저는 그 당시의 당신을 꽤 좋아합니다.

그렇게 꿀을 풍성하게 머금은 진달래꽃이 올해도 어김없이 곱게 피어 언덕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마당에서 바람에 날려온 진달래꽃을 쓸고 있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꽤 정취 있는 일입니다만, 타케다씨도 잘 아시다시피 저희 어머니는 깨끗한 돌길을 좋아하십니다. 덕분에 저는 진달래꽃대가 떨어질 때마다 마당에 나가 한두 개의 꽃을 쓸곤 했습니다. 언덕길을 직선으로 걸어 올라오다가 갑작스레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 저희 여관이 있는 탓에 저는 마당에서 올라오는 손님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당에서 꽃을 쓸던 저는 저녁노을보다도 다정한 빛깔의, 꽃잎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발견했습니다. 머리카락에서 이마, 눈동자와 연이어 얼굴, 상체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건 어떤 청년 한 명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청년을 만나는 게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기에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저를 놀리지 말아 주세요. 여관에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온천을 즐기러온 어르신들뿐이고, 여관에서 일하는 식구들조차 기본 나잇대가 40대 후반이시니까요. 세이와 쇼우, 중학생인 그 아이들을 제외하면 제게 젊은 청년이란 미지의 존재였습니다.

이곳이 쓰야마 여관인가요?”

청년은 나뭇잎을 살살 건드리는 햇살처럼 부드럽게 웃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려고 해도 꽁꽁 얼어버린 입술을 탓하면서 몇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은 다행이네요, 말한 후 뒤돌아 크게 외쳤습니다.

토비오! 여기야! 괜히 헤매지 말고 올라와!”

다시 제 쪽으로 몸을 돌린 청년은 남은 방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입을 열고, 숨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남은 방은 언제고 있다고. 다행이네요, 청년은 다시금 웃었습니다. 선선한 눈동자를 한 청년은 웃는 얼굴이 마치 국화처럼 깨끗했습니다. 그는 이런 시골에 오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짐은 무척 가벼웠고 정갈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뒤로 나타난 건 밤바다처럼 검은빛의 눈동자를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제게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처음 든 인상은 두 사람 모두 무척이나 준수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음극과 양극처럼 끌어들이기도 하고, 때로 함께 있을 때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두 사람을 처음부터 특수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 쓰야마 여관에 일부러 찾아온 젊은 청년, 남성 두 명이 함께 왔다는 점, 함께 있을 때면 애틋한 눈동자가 오간다는 점……. 저는 그 모든 것들이 야릇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두 사람을 이끌고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오후 2시의 종이 멀리서 울려 퍼졌습니다. 쓰야마촌 안에만 들리는 종소리는 깊은 산 속 절에서부터 시작해 산등성을 지나 계곡을 넘고, 삼각형을 이루며 넓게 퍼지는 강을 따라 흐르고 미츠호수를 지나 이곳 쓰야마 여관에 이를 때 즈음이면 거의 흩어집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열어야만 들리는 성질의 것이지요. 종소리를 듣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저는 쓰기 편하게 넓은 받침대에 올려놓은 숙박 장부를 부드러운 머리색의 청년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분은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은 후 제게 물었습니다.

저 종은 매시간 울려 퍼지나요?”

……아뇨. 오후 2시에만 울립니다. ……절에서 정한 기도시간이죠.”

저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혀가 풀려 그나마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 써놓은 간격보다는 더 길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독특하네요. 그분은 그리 말하고 숙박 장부에 이름을 써 넣었습니다. 오이카와 토오루(及川 ). 깨끗한 한자였습니다. 저는 어째선지 그분의 이름을 보자 미츠호수가 생각났습니다. 이름에 들어간 내 천()자 때문이라면 강줄기가 떠올라야 할 것 같은데도요. 그분은 자신의 이름 옆에 펜을 두고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무의식적으로 뒤에 선 검은 머리카락의 분을 바라봤습니다. 단순하게 저분의 이름을 뭘까, 하는 정도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아마도 오이카와씨는 그 순간 저의 눈빛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들과의 추억이 있는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눈길을 돌리려던 저의 머리를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다고도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오이카와씨는 다시금 조용하게 글씨를 적어나갔습니다. 카게야마 토비오(影山 飛雄). 서로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깔끔하고 정갈한 이름의 오이카와씨, 살며시 입술을 다물고 고요한 눈동자를 한 카게야마씨. 초면인데도 저는 두 사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혼의 교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제 마음이 온통 두 사람에게 쏠렸지요. 타케다씨께서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 살지도 않은 제가 영혼의 교감이니, 분위기니 말하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지요. 저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살며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종의 교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가 미약하냐 강하냐의 차이일 뿐이겠지요. 저는 타케다씨께서도 두 사람을 만나면 그러한 감정의 일점(一點)이라도 느끼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편지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는 두 사람에게 방 하나의 열쇠를 건넸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오이카와씨는 잠시 제가 건넨 열쇠를 바라보다가, 이내 산들바람 같은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씨는 그것만을 말하고 입술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오이카와씨의 눈동자가 저를 곧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에 무어라 답했어야 좋았을지 지금도 고민이 됩니다.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인 시간이었습니다. 벌레 무리가 울기 시작하고, 복도와 연결된 정원에서는 초저녁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온천을 청소하러 청소 도구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습니다. 쓰야마 여관이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만큼, 바닥을 짚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 그나마 요령을 압니다만, 혹시 타케다씨는 기억하고 계신가요? 발끝을 조심스레 댔다가 재빨리 뒷발을 물 흐르듯 대고, 급하게 한꺼번에 떼면 그나마 소리가 작게 나지요. 그렇게 걷고 있을 때쯤 반대쪽에서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오이카와씨가 서 있었습니다. 푸른 나팔꽃이 그려진 유카타로 갈아입은 오이카와씨의 모습은 제가 본 어떤 분보다 그림 같았습니다. 유카타가 그리 잘 어울리는 분도 드물거라 생각합니다.

오이카와씨는 저를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습니다. 저도 마주 끄덕였습니다. 가벼운 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이카와씨는 제 앞에 선 후 눈동자를 굴렸습니다.

청소하러 가시는 건가요?”

. 온천을.”

혹시 저녁은 방으로 가져다주시나요?”

. 아마 30분 후에. 제가 올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저는 대화 도중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담은 색깔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여관인지 가을 숲속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씨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저를 지나쳐갔습니다. 그는 발소리를 시끄럽게 내는 게 신경 쓰이는지 움직임이 아주 느렸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고 싶은 내용 중 반 이상을 말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무의식중에 느꼈습니다. 무엇이 저에게 그런 느낌을 준 걸까요? 어쩌면 움직임이 느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가 스치듯이 연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릅니다. 저는 누군가를 속단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제 글이 너무 두서없이 진행된다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편지를 써야 한다 생각했기에, 이야기가 껑충 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때면 타케다씨는 그 사이를 상상으로 메꿔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들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이 편지에 불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쓸 때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온전히, 제가 느낀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전달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타케다씨께 솔직하고 싶은 저의 심정이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저 스스로 정한 규칙이기도 합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두 사람의 방 장지문을 두드린 건 몇 시 즈음이었을까요. 밤 벌레 소리가 조용히 들리고 마당과 정원에 어둠이 깔린 시간이었습니다. 쓰야마촌은 고요에 휘감겼고, 복도는 조용했으며 먼 방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가 있는 방을 제외하면 20명 내외의 단체손님이 한 다리 건넛방에서 묵는 밤이었습니다. 그날 달이 초승달이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하늘이 참 맑았습니다. 두 사람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혹시나 방이 비어있나 싶어 다시 쳐다봤더니 그림자 두 개가 어른거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이윽고 장지문이 열리고 카게야마씨가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녁을,”

들어오세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이카와씨의 목소리가 방 안쪽에서 들려왔습니다. 제 앞에 서 있던 카게야마씨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유카타를 입고 있었고, 카게야마 씨의 유카타는 저희가 준비해놓은 두 개의 유카타 중 아무 무늬 없이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가 그려진 유카타였습니다. 방금 온천에서 나온 건지 앞머리카락이 살며시 젖어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에 달려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그의 유카타를 적시는 것이 또렷이 보였습니다. 저는 준비해 온 저녁상을 두 사람 앞에 놓았습니다.

저녁 먹고 온천 다시 들어갈 거야?”

아뇨. 오이카와씨는요?”

두 사람은 저녁상을 옮기는 저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조용히 이루어졌고, 사이사이 밤벌레 소리가 들릴 정도로 대답의 간격이 길었습니다. 제 숨소리가 들릴까 봐 저는 조심조심 숨을 내뱉었을 정도였습니다. 자연스레 저녁상을 옮기는 제 손도 느려졌습니다. 저는 얼른 이 일을 끝마치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타케다씨께만 말씀드립니다만, 솔직한 마음으로 저는 그곳에 가능한 한 오래 있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분위기에 빠져 그 방이 따로 떨어진 공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편안했습니다. 조곤조곤 들려오는 오이카와씨의 목소리, 카게야마씨의 응답. 맑은 달밤에 풍기는 풀잎 냄새. 편지에 그 순간을 표현해내지 못하는 건 단순히 저의 말솜씨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나도. 그럼 밥 먹고 잘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일은?”

글쎄요. 그때 오이카와씨가 호수 얘기를 하셨잖아요.”

. 호수……. 그렇지.”

저는 두 분이 말씀하시는 호수가 미츠호수를 얘기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쓰야마촌에서 그나마 볼거리라고는 미츠호수 뿐이죠. 저는 급하게 저녁상 차리는 것을 마친 후 방을 나왔습니다. 오이카와씨가 제게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발소리가 울리는 것도 잊은 채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츠호수를 몇 시에 가시는 걸까? 언제 가시려나? 어떤 길을 통해서? 쓰야마촌 한가운데 있는 미츠호수로 가는 방법은, 타케다씨도 아시다시피 10가지가 넘습니다. 저는 가능한 편하고 좋은 길을 두 분께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주제넘은 참견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안내 해 드릴까요라는 말 한마디도 못 건넨 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제가 나간 후에도 미츠호수의 얘기를 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답하고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여관의 손님께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두 사람에게 무척 큰 궁금증을 품었습니다.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의 관계와 이곳에 온 경위 등이 궁금해졌습니다. 타케다씨는 왜 제가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무척 궁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제 기분을 설명하는 건 이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달밤에 눈을 감으면 밤바람이 뺨을 적시는 것 같달까요. 달리 말해, 그들을 만나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무척이나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저는 순수하게 그들이 궁금했습니다. 저의 궁금증이 옳은 것이었는지, 아주 이기적인 궁금증이었는지는 지금에야 그나마 구별이 됩니다. 당시에는 제 기분이 그저 그들을 돕고 싶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일 두 사람에게 제가 미츠호수로 안내해 드릴까요하며 말을 건네는 걸 몇 번이고 연습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의 얼굴이 떠돌았습니다. 정갈한 얼굴의 두 사람은 제 상상 속에서 서로 마주 봤습니다. 두 사람의 눈길이 교차하고, 그 사이로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저는 안 보이는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맑은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고, 동시에 검은 밤 속 달이 휘영청 떠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어라 대화하기 시작했고 저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대화내용을 듣고 싶어서 더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제가 그들의 몸에 닿은 순간 두 사람은 연기처럼 흩어졌습니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제 상상이었는지, 아니면 허깨비가 보여준 환상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타케다씨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이 글을 읽고 타케다씨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합니다. 부디 타케다씨께서도, 가능하다면 답장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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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오이카게 5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 연령반전 소재가 있습니다.

 

 

 

 

이카와 토오루는 씻을 때 물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 그가 씻으러 들어간 뒤 하도 조용해서 욕실에 들어가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 일화를 말하면서 카게야마를 힘껏 놀리는 오이카와가 가끔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저가 실제로 했던 행동이기에 할 말은 없었다. 카게야마와는 거의 반대였다. 오히려 카게야마는 설거지를 할 때나 씻을 때나, 세수할 때에도 물소리를 크게 내는 편이었다. 그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이카와가 씻고 있는 욕실에서는 거의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반면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하는 주방에서는 요란한 물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쉬는 날을 맞추고 이것저것 살 것도 겸해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건 전날 밤이었다. 애초에 내일 뭐 할까?’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잠들기 직전에서야 무엇을 할지 정해졌으니, 오이카와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평소대로 로드워크를 가려던 카게야마를 붙잡고 다시 침대로 끌어들인 오이카와 덕분에, 두 사람이 일어난 건 오전 아홉시 남짓. 주린 배를 움켜잡고 아침을 챙겨 먹은 게 열 시 전후.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거의 끝마친 지금은 열한 시 경이다. 하루도 로드워크를 빼먹지 않는 카게야마였으니 이렇게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보내는 휴일. 그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날이다.

카게야마는 옆에 있던 수건에 젖은 손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맨발로 바닥을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도 연달아 들렸다. 카게야마는 몸을 돌리고 그가 들어간 방 쪽을 바라봤다. 방문은 닫혀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걸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닦아놓은 식기를 정리하면서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오이카와씨.”

작게 부르면 대답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이렇게 조용했던가?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릇을 전부 정리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방문 앞에 이르러 노크를 해도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오이카와씨. 장 보러 안 가요?”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또 그 패턴인가. 지난날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저번에도 오이카와가 하도 말이 없길래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오이카와의 양팔에 붙잡혔었다. ‘오이카와씨!’ 소리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기분 좋은 듯이 웃어넘긴 오이카와는 토비오쨩.’ 연달아 이름을 불렀다.

또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아니, 가능성은 꽤 높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계를 돌아보면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고 카게야마는 문고리를 노려봤다.

오이카와씨.”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바닥을 바라보면 오이카와의 옷가지가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었다. 옷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이카와가 저렇게 늘어놓았다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에 서 있는 그의 몸을 가로지르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그라고 하기에는 어깨가 지나치게 좁고길이도 짧았다. 아직 옷 갈아입는 중인 건가?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 옷가지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씨?!”

그림자를 따라가던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존재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걸친 건 오이카와의 하얀색 셔츠뿐이었고, 셔츠로는 가느다랗게 뻗은 하반신을 전부 가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하얀색 셔츠는 작은 오이카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위험한 장면을 그려냈다. 작은 몸통에 작은 머리. 동그란 눈동자를 한 오이카와가 그곳에 서 있었다.

형은 누구세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 목소리조차 제가 기억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와는 어렴풋이 달랐다. 카게야마는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와 동거하는 건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 토오루고, 아침을 함께 먹은 것도 그 오이카와였으며 씻으러 들어간 것도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였다. 틀림없다. 카게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오이카와를 자세히 살펴봤다. 어느 모로 보나 오이카와다. 동시에 오이카와가 아니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고개를 몇 번 더 갸웃하더니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 그 표정은 오이카와 그대로였다. 이내 작은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무의식중에 부정하고 있던 진실이 객관적인 증거로 드러난 기분이다. 카게야마는 아연실색한 채로 서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그 이름이, 지금. 카게야마가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Baby, It's You!

 

 

 

 

오이카와는 팔과 다리를 몇 번 휘적였다. 하얀색 셔츠를 걸쳤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인다.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지나치게 얇아 카게야마가 강하게 붙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옷은 맞아요?”

!”

오이카와는 얼굴 가득 미소를 피우고 강하게 끄덕였다. 자신의 중학교 1학년 시절 옷이 이 정도로 꼭 맞는다니,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도 그 정도 나잇대인 걸까. 어린 시절 입고 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키타가와 제일중학교 체육복이 이곳에 있는 건 순전히 우연이다. 도쿄로 올라올 때부터 옷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옷장에 있는 옷을 전부 가지고 올라왔더니. 오이카와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는 빨래하는 족족 카게야마의 옷을 버리는 오이카와 때문에촌스럽다가 그 유일한 이유였다옷 정리를 하기보다 있는 옷을 사수하기 바빴다. 그러다 우연히 찾게 된 키타이치 체육복. 이렇게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도 고개를 들고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의 가슴과 허리 사이 정도의 키.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도 이만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고민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기억은 오이카와의 뒷모습만 가득하다.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끈질기게 굴던 시절. 그 시절과 그리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그의 서브에 비하면 멀었다. 분한 마음이 들어 카게야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험악한 인상으로 바뀐 카게야마의 얼굴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를 뜨고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형은 누구세요?”

조그마한 입술에서 어린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음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을 조금 길게 늘이고 아무런 의심 없이 묻는 목소리.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무어라 둘러대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저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오이카와에게 자신의 이름을 댄 건 중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이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토비오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와 나 사이에 이름을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름만은 한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와 어울리는 모양과 뜻. 처음 그 한자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는 그 이름을 곱씹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작게 읊조렸다. 이윽고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기억보다 작고 앙증맞은 눈동자와 콧방울이 부드러운 빛깔로 빛났다.

그럼 토비오쨩이네!”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를 놀란 눈동자로 바라봤다. 제 기억 속 오이카와와 똑같은 미소였다. 눈꼬리가 완곡하게 휘어지고, 볼살을 부드럽게 접으며 미소 짓는 눈앞의 오이카와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했다.

카게야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의심의 고리를 끊었다. 오이카와구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였다. 몸이 아무리 작아도, 카게야마의 존재를 몰라도.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오이카와씨는, 몇 살이에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손 두 개를 들어 펴 보였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환하다.

열 살!”

열 살. 열 살, 인가. 10열 살……. 카게야마는 문득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스물일곱 살이던 오이카와가 열 살 오이카와가 된 걸까. 무엇 때문에? 씻다가? 물소리를 많이 내지 않고 씻어서? 혹은 무언가 병 같은 걸까. 카게야마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앓고 있는? 그럼 이 세계에 있던 오이카와는 열 살인 오이카와가 있는 곳으로 간 걸까. 아니, 옷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카게야마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몇 번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생각하기를 그쳤다. 오이카와는 험상궂은 얼굴의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고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묘한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행동을 하는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오이카와는 제 배를 문지르다가 거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구슬같이 작은 홍차 빛 눈동자가 이곳저곳에 닿았다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 그런가.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와 함께 살아온 이 집이 익숙하고, 오이카와가 이곳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이질적인 존재는 오직 눈앞의 오이카와 뿐인데, 열 살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것들이구나.

카게야마의 눈길을 느낀 것인지, 오이카와는 두리번거리던 눈동자를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돌렸다. 배시시 미소 짓는 입가에서 하얀 치아가 반짝인다. 카게야마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 순간마다 어린 오이카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색다른 미소가 오이카와를 쏙 닮은 얼굴 위로 겹쳐진 모습은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삼 제 심장이 이상한 박동으로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열 살의 오이카와라 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 유일하게 영원히 좋아할 사람.

아니, 어린애잖아. 열 살! 고개를 있는 힘껏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의아하다는 듯이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코코아 드실래요?”

!”

오이카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으며 볼록 튀어나온 볼이 벚꽃 잎처럼 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말 한마디마다 반응하고 감정을 얼굴에 바로 드러내는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코코아 좋아해.’ 기분 좋은 듯이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오이카와가 어릴 때는 이랬을까. 열 살이라면 카게야마를 만나기 6년 전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보다 한참 큰 존재였다. 그 등은 곧게 뻗어 흩어지는 빛을 흡수했고 그가 내려치는 서브는 카게야마의 가슴을 파열시켰다. 카게야마에게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펼쳐준 그가 지금, 제 앞에서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코코아 생각에 행복한 웃음을 짓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비밀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가로 내리고 뺨을 붉혔다.

부엌으로 가서 타드릴게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말한 후 앞서 부엌 쪽으로 걸었다. 보폭이 더 작은 오이카와는 급하게 걸어오며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다시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따라 걷고 있다. 어디 갈 땐 어른 손을 잡으라고 배운 걸까. 저도 어릴 적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집 안에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머그컵 두 개에 코코아 가루를 부어 넣는다. 권장량인 테이블 스푼으로 한 스푼보다 조금 더. 평소 카게야마가 먹던 습관 그대로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용으로 산 민트색, 검은색 머그컵은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처음 산 물건이었다. 코코아를 마시지 않는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위해 코코아 가루를 고르고, 커피를 마시지 않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위해 커피 가루를 골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하나하나를 맞추어갔다. 물론 지금은 각자의 입맛을 알고 있어 오이카와가 원하는 커피 가루를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처음에는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토비오쨩. 이거 영어는 읽었어? 분쇄 안 된 커피콩을 사 오면 어떡해!’

커피라고 적혀있는 거 아닙니까? 여기. 오이카와씨가 라인으로 보내준 영어랑 똑같은데.’

이거 말고! 정말이지, 토비오쨩이랑 못 살겠네!’

그렇게 말하던 그와 산지도 이럭저럭 몇 년이 지났다. 그는 처음부터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코코아 가루를 정확하게 사오곤 했지만, 지금은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이제는 카게야마가 어떤 때에 어떤 코코아를 원하는지조차 아는 수준이었다.

민트색 머그컵에 코코아 가루를 담는 것은 처음이다. 매번 커피와 코코아를 타는 역할은 카게야마였다지만, 실수로 그의 컵에 코코아를 탄다 해도 컵을 바꿔 먹었으면 먹었지. 오이카와는 커피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고르라면 커피를 마시는 쪽이었다. 그 덕분에 그의 민트색 머그컵에선 항상 미미하게 커피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는 코코아 가루가 담긴 오이카와의 컵을 코에 가까이 가져갔다. 방금 넣은 코코아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기가 겹쳐진다.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커피를 마시며 웃던 오이카와, 입꼬리에 코코아가 묻었다며 손으로 닦아주던 오이카와, 그러다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그대로…….

카게야마는 서둘러 생각을 지우고,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처음 볼 때처럼 눈동자를 크게 뜨고 부엌, 연결된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괜히 사진 같은 게 보이면 작은 오이카와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까? 자기랑 똑 닮은 얼굴의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가 보인다면.

카게야마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급하게 훑었다. 그제서야 카게야마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 찍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집 안에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핸드폰 속 비밀번호를 걸어 둔 토비오폴더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오이카와의 핸드폰과 노트북에는 그조차도 단 몇 장 정도만에만 존재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물이 끓고 있는 전기 포트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는 코코아가 담긴 컵을 들고 몇 번 입김을 불었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컵 위로 올라오던 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톡 튀어나온 입술은 제 기억보다 조그맣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코코아를 마셨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걸까, 카게야마가 몇 모금 마실 동안 오이카와는 연신 입김만 불었다. 카게야마는 가슴이 따뜻한 물에 잠기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오이카와구나.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것도, 입술의 모양도.

오이카와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코코아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멈추지를 않는다. 전부 마시기에는 뜨거웠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배가 고픈 건가? 무언가 만드는 게 좋은 걸까,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카게야마는 애매하게 계속되는 고민을 연상하면서 코코아를 조금씩 마셨다. 닫힌 창문으로 들어오는 건 슬그머니 낮아진 햇빛뿐이다. 코코아 향기와 눈앞의 오이카와그 오이카와가 열 살이라는 점만 빼면 여느 때의 휴일 풍경이었다.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마시던 코코아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목구멍을 움직였다. 뜨거운 액체가 한 번에 지나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는 코코아 액체가 거품처럼 묻어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긴 토비오쨩네 집 맞지?”

……,”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살며시 떨었다.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저 눈빛은 그대로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곳에 있나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요?’ 허나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카게야마를 알고 있는 열여섯 살 이후의 오이카와였다면 설명하기 더 쉬웠을 텐데. 어째서 그 이전의 오이카와인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 돌아오나요?묻지 못하는 질문을 입 안에 남은 코코아와 함께 삼켰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카와씨 어머니께서, 오늘 같이 있으라고…… 하셔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오이카와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얘기도 나눴고. ‘토오루랑 사는 거 힘들 테지만 힘내요.’라는 응원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응원인도 받은 적 있고. 카게야마가 거짓말 한 건 오늘밖에 없다. 오이카와가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오늘이라는 기한을 정한 건 온전히 카게야마의 생각이다. 어쩌면, 내일도? 혹은 모레도? 영원히 오이카와는 이 모습으로 있는 걸까? 설마.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카게야마는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오늘이라 말한 건 무의식적이었지만, 그리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오늘이냐 물으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미약하게나마 느꼈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코코아를 마시면서도 카게야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카게야마는 어색한 죄책감 때문에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 오이카와에게 거짓말할 때처럼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오이카와도 더 묻지 않은 채 눈동자를 내렸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다시금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보다는 짧은 머리지만,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처럼 윤기 있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생기 있는 눈동자는 과거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 역할을 했다. 카게야마보다 키가 작다고는 하나, 분명 또래보다는 큰 키.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는 순간적이나마 카게야마가 아는 몸의 윤곽을 그려냈다. 카게야마가 보지 못했던 어린 오이카와의 형태가 눈앞에서 공기와 햇빛을 반사하며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평생 오이카와와의 2년 터울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보다 어리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그를 내려다보다니. 소파에 앉아있을 때도 카게야마가 내려다보는 게 기분 나빠서 선 채로 잡지를 보던 오이카와가. 언제나 그는 카게야마보다 2년 앞선 곳에 서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저는 오이카와에게 맞붙는 정도까지가 한계였다. 때로 카게야마가 고집을 부려 원하는 바를 성취하더라도, 그 모든 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고집을 끄덕이고’ ‘받아들여 줬기때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간의 관계에서 흔히 주고받는 객관적인 이해는 오이카와와 저 사이에 힘든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감정의 교류서로만이 알 수 있는 배구에 대한 깊은 신념은 느낄 수 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있다면 오이카와를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뇌 안쪽이 저릿할 정도의 깊은 충족감과 만족감. 다른 무엇으로도 느껴본 적 없던 새롭고 따뜻한 감정은 카게야마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는 등불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저를 받아주는 오이카와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기고 싶다는 욕심도 불어갔다. 오이카와를 사랑하기에 그의 등을 따라잡고, 오이카와가 제 배구의 구심점이기에 그의 배구를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에게 그와 같은 욕심을 말했을 때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네 사랑이라면.’ 오이카와는 그리 말했었다. 사랑.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랑은 다소 특이한 형태인 건 아닐까.

카게야마는 혀끝에서 스며드는 코코아의 달콤한 맛을 느꼈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 코코아를 열심히 마시던 오이카와에게로 눈을 돌리면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토비오쨩, 입술에 코코아 묻었어.”

눈꼬리를 접고 웃는 얼굴이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온전히 오이카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앞에서 어린아이답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오이카와 또한 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간지럽다. 몽글몽글한 솜털로 잔뜩 간지럽히고,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하게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 * *

 

 

코코아를 다 마신 후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카게야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열 살 오이카와가 나타났던 장소였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배구공을 들어 올렸다.

배구공! 토비오쨩도 배구 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공을 내밀었다. 눈이 반짝이며 빛났고, 흥분을 가리지 못한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꾸물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동자 두 개가 카게야마의 입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들어 올린 건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의 배구공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오늘 자신의 배구공을 사기로 약속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며칠 전 낡아서 버린 탓에 마침 장도 볼 겸 함께 배구공을 사자고 먼저 제안한 건 오이카와였다.

다시 고민의 사슬이 입을 옭아맸다. 배구를 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까? 눈앞의 오이카와는 6년이 지나면 중학교 1학년이 된 카게야마를 만나게 될 텐데. 설마 지금 스물다섯 살인 나를 만난 탓에 과거가 바뀌는……그런 일이 일어날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오이카와가 전에 어려운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타임…… 어쩌고였나. 아마 과거가 바뀌면 미래에도 영향이 간다는 얘기였던 것 같? 카게야마는 잠시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카게야마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배구공을 꼭 끌어안은 오이카와는 조금 발을 굴렀다. 안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의 기대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든 오이카와는 오이카와다. 스물일곱 살이어도, 열 살이어도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만나는 것이 흐르는 섭리 중 하나라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만나자마자 사랑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단지 조금 일찍 만난 것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 세상이든 어떻게 태어나든 오이카와를 사랑하고 만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과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보다도 느린 움직임이었다.

. 배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공 튀겨 봐도 돼?”

오이카와는 긴장한 눈초리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는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대답했다.

.”

고마워!”

힘찬 대답을 내뱉은 오이카와는 공을 들고 방 한가운데에 섰다. 낮게 올리는 오버핸드 토스가 이어졌다. 자세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다. 공을 주시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 안에 이미 카게야마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오이카와가 토스 연습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진지하고 생생한 얼굴. 고등학교 무렵 시합했던 때와 달리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표정으로 나타났다. 어릴 땐 저런 표정으로, 저런 자세로 배구를 했을까. 저렇게 작은 손가락이 그리도 커져서, 그 손으로 배구공을 감쌀 정도까지. 문득 그가 커가는 과정을 보고 싶다는 묘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조금 더 높이 올려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토스 높이를 낮추려고 조정하던 오이카와는 언뜻 곁눈질로만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괜찮냐고 묻는듯한 눈빛이다.

천장에 부딪혀도 괜찮아요. 윗집에는 한 명만 사는데, 평일도 주말도 새벽 일찍 나가고선 밤 10시 다 되어야 돌아오거든요. 더 올려도 돼요.”

언제는 높고 언제는 낮던 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오이카와는 허리를 곧게 펴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토스 연습을 이어갔다. 카게야마가 말한 대로, 위층에 사는 여성은 휴일에도 새벽같이 나가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걸 알게 된 오이카와는 주말 아침부터 카게야마를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날이 늘었는데……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은 쓸데없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들리는 마찰음, 공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얼굴을 가로 비추는 나른한 온기 등. 카게야마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원하는 포지션, 있나요?”

세터!”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후, 지금껏 묻지 못한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계속 묻고 싶었으나 한 번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질문. 카게야마는 겨우 맞붙은 입술을 떼었다.

, 세터가되고 싶습니까?”

띄엄띄엄 단어를 꺼내면서도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한없이 작아졌다.

그야, 멋있잖아.”

오이카와는 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걸까,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어떤 스파이커든 그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가 되고 싶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내가 그 팀에 있는 것만으로 팀의 실력이 순식간에 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신기한 거 같아. 세터는 배구에서 가장 고독한 포지션이면서 동시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포지션이야.”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고 울렸다.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 팀의 실력을 순식간에 올리는 존재. 카게야마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채 오이카와를 바라보지 못하고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세터.”

저가 처음으로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상대. 코트에 계속 서 있으려면 끊임없이 이겨야 한다. 그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 이기기 위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연단하는 과정은 당연한오히려 즐겁기까지 한일이었다. 그러던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와 싸우며 처음으로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이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각했다. 그때, 자각한 바로 그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철저하게 졌다.

이후 아오바죠사이를 이기고 전국 대회에 진출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이카와는 저의 시야 너머에 있는 존재였다. 또한 끊임없이 앞서나가며 카게야마에게서 멀어져 가는 극점이기도 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생각은 없다. 카게야마는 배구의 끝없는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의 가치이자 숨결이자 생명이었다. 그 끝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생각은 가끔 한다. 바로 그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스스럼없이 나아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길의 앞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토비오쨩, 뭔가 이상해.”

오이카와는 토스 연습하던 손을 멈추고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 가요?”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될 수 있을 거라고 한 말?

마치 내가 이미 그런 세터가 된 걸 보고 온 것 같은 말투야.”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몇 번 더 키득이더니 그저 가만히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투박하게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다시 토스 연습을 시작했다. 통 통, 가볍게 공을 튀기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있던 방, 두 사람이 함께 나날을 보내온 방. 포근한 이불 같은 햇볕이 창문을 통해 방 안을 가로지르며 비췄다. 햇볕이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고,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노곤한 기운이 이마를 붕대처럼 둘렀다. 오이카와가 들이쉬고 내뱉는 공기가 푸근하다.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우선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만다. 언제고 그랬다. 카게야마에게 새로 생긴 버릇 같은 성질이었다. 덕분에 함께 나가서 영화를 보면 잠들기 일쑤라 쓴소리 들은 적도 많지만.

깃털처럼 가라앉으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보다 훨씬 키도, 덩치도 작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공을 섬세하게 튀기고 있었다. 열 살. 초등학생인가? 어느 초등학교에 다닐까? 배구부에 들었을까? 어떤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렸을까? 카게야마는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의 과거이자 현재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했다.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도, 오이카와가 모르는 카게야마도 분명 존재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를 모르는 오이카와라는 건 제3의 인류처럼 생소한 존재였다.

토비오쨩은 포지션이 뭐야?”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물었다. 대답해도 되는 걸까. 또 잠시 동안의 고민이 나른한 머릿속을 뒤덮쳤다. 카게야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목소리를 흘렸다.

뭐일 것 같으세요?”

세터.”

오이카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카게야마 쪽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로 오이카와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를 눈치챈 오이카와가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푸하하, 자연스레 터져 나온 오이카와의 웃음소리 덕분에 그의 자세가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잡고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토비오쨩, 너무 티 나는 걸. 아까 코코아 마실 때 보니까 손톱이 특히 가지런해서, 특별히 관리하는구나 싶었어.”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바라봤다. 손톱이 가지런한 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가 되고 싶은 세터를 말할 때도 별말 없길래. 이와쨩한테 말했더니 그런 건 불가능하지, 바보야라고 했거든. 어떤 스파이커를 만나든 그 사람의 100%를 끌어내는 건 꿈같은 이야기라고.”

맞지?’ 오이카와는 확신에 찬 물음으로 말을 마친 후 미소를 지었다. 스물일곱 살이든 열 살이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대로다. 아마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어떤 포지션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부터 카게야마는 세터라고 어느 정도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것저것을 조합한 후 가장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에 능한 사람이었으니, 어리다고 그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카게야마의 질문으로 더 큰 확신을 얻었을 게 분명하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분한 마음에 인상을 구겼다.

배구를 하고, 세터로서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리고 시합을 지휘한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반면에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 개별로 놓으면 모양이 가지각색이나 완벽하게 맞붙는 퍼즐 조각과도 같다. 배구와 세터, 동시에 연인인 두 사람. 그중 하나라도 성립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함께 있지 못할 것이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연하게 웃으며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흐릿한 겨울날, 눈발 가운데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를 부르던 오이카와……. 숨이 차서 목구멍이 파열할 것처럼 더운 여름 날, 물안개 속에서 한숨을 내쉬며 웃던 오이카와.

눈앞의 오이카와는 예전에 봤던지금은 훌쩍 커버린오이카와의 조카를 떠올리게 했다. 열 살? 오이카와는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애초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어떤 이유로 어려졌는지혹은 어린 몸으로 바뀌었는지알지 못한다. 특정한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사라진 거라면?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심장이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찾아온 건 등을 덮는 식은땀과 헐떡임이었다. 가릴 길 없는 생각들이 유선형으로 뻗어나가 가슴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만약 오이카와가 오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의 시야가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코끝을 누를 뻔한 공을 겨우 붙잡았다. 거의 맞닿은 상태였다. 짧게 마찰한 콧방울이 따끔거렸다.

, 하시는 겁니까! 공 맞을 뻔했잖아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귓속을 시끄럽게 채웠다. 정작 카게야마에게 공을 던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손을 디뎠다.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와 그의 몸에 기대선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토비오쨩, 무서운 얼굴 하고 있네.”

오이카와는 늦은 밤 카게야마를 안을 때 보이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깊고 그윽하여 카게야마의 속까지 훑을 것 같은 눈동자. 숨결이 마주 닿는 거리를 두고 카게야마는 가만히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이미 알고 있으며 몇 번이고 마주 봤던 얼굴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눈꺼풀을 내리며 예쁜 빛깔의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섬세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그에 이끌리듯이 뜨거운 눈동자를 감았다. 오이카와의 작은 입술과 카게야마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은 채 떨어졌다. 닿자마자 떨어진 입술에서 감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슷한 간격을 두고 눈을 뜬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오이카와의 볼이 해가 질 때의 하늘처럼 불그스름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과 맞닿았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내가 무언가로 걱정할 때면 누나가 항상 이렇게 해줬거든.”

그렇구나. 오이카와씨의 누나가. 그랬구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화끈거렸다. 시간을 따라 나아가던 태양이 잠시 멈춰 서 두 사람을 오롯이 비췄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몸이 따스한 오후의 온도로 달아올랐다. 세포 속까지 채우는 햇볕이 반짝이는 눈동자 사이에도 속속들이 차올랐다. 오이카와는 기대고 있던 양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카게야마가 들이마시는 숨 속에 오이카와의 향기가 향수처럼 달라붙었다. 익숙한 향기였다.

토비오쨩이 뭘 걱정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괜찮아.”

괜찮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톡톡 다독이듯이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은 거구나.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근거 없는 그의 말이 움직이지 않는 확신의 바위가 되어 중심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카게야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유를 알기 힘든 안도감이었다. 오이카와의 향기를 머금은 한숨을 내보내면 심장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물에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의 배에서 갑작스레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떼고 마주 보면, 오이카와의 얼굴이 보송보송 물들었다.

미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카게야마는 눈동자의 셔터를 눌렀다. 제 기억 속 그 무엇보다 생소한 표정이다. 신기했다. 이런 표정의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쑥스러운 듯 발그레한 얼굴로 흘긋거리며 카게야마의 눈치를 살피는 오이카와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카레 좋아하세요?”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삐죽 내밀고 웅얼웅얼 물었다.

 

오이카와와의 첫 데이트하얀 햇살이 아스팔트 도로의 우둘투둘한 면을 하나하나 비추는 날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선글라스를 쓰고 그렇게 물은 그는 언뜻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카게야마는 글쎄요, 운을 뗀 후 잠시 간격을 두었다. ? 오이카와는 재차 물으며 카게야마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바퀴의 민감한 살결로 그의 굳은살을 느끼며, 카게야마는 귀를 붉혔다.

카레 좋아하세요?’

 

그때 물었던 그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첫 데이트, 처음으로 오이카와와 둘이서만 먹었던 카레. 그 시작을 다시금,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이카와와 하고 싶다. 오이카와는 잠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이내 그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 좋아해.”

첫 데이트 때의 오이카와와 같은 대답. 비록 겉모습을 다를지라도, 카게야마는 그가 바로 오이카와임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 *

 

 

배불러!”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만든 카레를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긁어먹었다.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놓은 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카게야마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구공이 침대 근처를 굴러다녔다. 좀 전, 오이카와와 나눴던 짧은 입맞춤을 기억해내고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대 푹신해.”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운 후 사지를 쭉 폈다. 이불이 기분 좋은 듯 얼굴을 비비면서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와 가까운 침대 끝에 앉았다.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졸린 걸까? 가늘고또래 아이보다는긴 팔 끝에는 작은 손이 있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잡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투박하게 내뱉었다.

피곤하면 주무세요.”

으음싫어!”

아이가 떼를 쓸 때처럼 몸을 버둥거리던 오이카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불만이 전부 얼굴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볼을 뭉툭하게 부풀린 얼굴은 못생겨 보일 법도 한데, 왜 이다지도 가지런할까.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좁히곤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토비오쨩도 같이 자.”

왜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카게야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카게야마가 입고 있는 니트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은 작은 아기 고양이 같았다. 오이카와는 단호한 얼굴로 불뚝 튀어나온 입을 열었다.

아깝잖아. 토비오쨩이랑 하루밖에 같이 못 있는데. 그러니까 같이 자자.”

아깝다고? 카게야마는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후, 가끔 카게야마가 신칸센을 타고 오이카와를 만나러 도쿄로 오던 시절.

갈게요.’

. 잘 가.’

또 올게요.’

.’

이제 곧 차 오니까 가세요.’

갈 거야.’

가라니까요…….’

그런 의미 없는,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대화를 나누던 시절처럼그런 기분인 걸까. 그때와 같은 기분인 걸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결국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도 그를 따라 침대에 몸을 눕혔다.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이 그의 몸을 감쌌다. 평소 오이카와와 밤을 보내는 침대에서 어린 오이카와와 함께 눕는다.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불을 꼭 붙잡았다.

토비오쨩네는 침대네. 우리 집은 바닥인데.”

……그런가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할 무렵 침대를 살지, 이불보를 둘 지로 꽤 오랫동안 둘이 고민했던 적이 있다. 사실 카게야마는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라고 답했지만결국 다다미 방도 아니니 침대를 샀으나 오이카와는 익숙해질 때까지 서툴러 했다. 알고 보니 카게야마가 도쿄로 올라오기 전 2년 동안도 자취방에서 꽤 고생했다고. 항상 저보다 모든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는데, 카게야마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 오이카와에게는 서툰 일이라니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는 잘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카레를 완식한 후의 포만감,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는 큰 창문,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로 눅눅해진 머릿속……. 카게야마의 이마와 눈꺼풀 위에 잠가루가 솔솔 떨어지면서 두껍게 쌓였다. 꾸벅꾸벅 감기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바라보면, 오이카와는 알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토비오쨩은 이상하네.”

? 제가요?”

잠의 바다에 젖어들면서도 울컥한 마음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상한 건 오이카와씨죠.”

뚱한 얼굴로 말하자 오이카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내가 훨씬 어린데도 존댓말 쓰잖아. 이상한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잠시 숨을 멈춘 후 눈동자를 휘었다. 진한 홍차 빛 눈동자가 새하얀 이불안에서 은은한 빛으로 흔들거렸다. 카게야마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열 살이 된 후에도 여전히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건 카게야마 자신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에 열이 모이고 평소보다 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몇 살이어도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 토오루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고선 그걸 이제야 말하는 오이카와도 그 다웠다. 키득이는 오이카와에게서 그의 향기가 맑은 물처럼 흘러나왔다. 방안을 비추는 태양과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카게야마에게로 잠이 쏟아졌다.

카레의 향기, 오이카와의 향기, 아련히 풍기는 햇볕의 냄새.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잘 자, 토비오쨩. 또 만나고 싶어.

 

언뜻 오이카와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 것 같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그 대신일까, 손을 맞잡은 온기만큼은 유독 강렬하게 남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그의 손은, 기억보다도 따뜻했다.

 

 

* * *

 

 

……비오쨩. 토비오!”

…….”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누군가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두 번 깜빡인 카게야마는 푸른 눈동자를 크게 떴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오이카와가 침대에 앉은 채로 카게야마를 흔들고 있었다. 질색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한숨을 강하게 내쉬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스물일곱 살의 체격 그대로다.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했잖아? 토비오 배구공도 사고. 그래놓고 낮잠 잔 거야?”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흐릿한 머리를 들고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뭐야? 아니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이해하기 힘들단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 오후 5시야. 지금이라도 나갈까? 많이 피곤해?”

…….”

카게야마는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옷을 가다듬고 이미 멋들어진 머리를 몇 번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간질간질한 눈을 비볐다. 얇게 잘라놓은 햇빛이 점차 가늘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 앞에 서있는 오이카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 몽롱한 물속에 빠졌던 의식이 뭍으로 나와 활동을 재개했다.

오이카와씨.”

. ? 토비오, 얼른 준비해.”

오이카와씨 맞나요?”

……토비오.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카게야마의 상태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카게야마를 마주 본 그의 눈동자는 다정한 빛을 담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이마에 손도 대보고.

열은 없는데.”

작게 중얼거린 후 그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카게야마는 제 이마에 놓인 오이카와의 큰 손, 저보다아주 약간큰 키와 다부진 신체를 눈으로 따라갔다. 얼굴 윤곽도 성인답게 또렷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당기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불 빨래하면서 함께 넣었던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난다.

돌아왔네요.”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오이카와의 어깨가 움직였다. 카게야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한 건지 그의 목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소리야? 토비오, 어디 아파?”

아니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제 어깨에 고개를 묻은 카게야마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그럼 얼른 일어나. 오이카와씨가 휴일 대낮부터 토비오쨩이랑 낮잠을 자다니, 정말이지. 어떻게 잠든 건지는 기억 안 나는데.”

오이카와는 계속 투덜대면서 카게야마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카게야마는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고 오이카와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오이카와씨는 어릴 때가 훨씬 귀엽네요.”

?”

홍차 빛 눈동자가 여지없이 커졌다. 근거리에서 그의 당황한 얼굴을 접한 카게야마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는 얼굴이다. 오이카와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바꿨다.

오이카와씨는 항상 귀여워. 인상 나쁜 토비오쨩보다 훨씬 귀엽고 예쁘지.”

미소 지은 카게야마의 미간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꾹 눌렀다. 살며시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애초에 언제 내 어릴 때를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건방지네.”

오이카와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는 점점 아파지는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열 살 오이카와는 솔직하게 웃고 장난치고 훨씬 귀여웠는데. 잠들기 전 미소 짓던 어린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건 눈앞의 오이카와였다. 툴툴거리고 카게야마를 어린애 취급하고 항상 선배처럼 구는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는 그가 서있는 방 안의 풍경을 돌아봤다. 큰 창문 옆에 선 오이카와, 약한 빛을 흘려보내는 조명이 그의 등을 비추면서 떨어졌다. 몇 가지 가구가 없는 방 안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오이카와가 내뿜는 존재감은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모양이다.

타임 어쩌고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

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카게야마가 의아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가 제 심장의 혈관에 스며드는 걸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오이카와씨가 있구나 싶어서요.”

난 항상 있잖아.”

그렇네요.”

뭐야, 그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볼을 어루만졌다. 갈비뼈 안쪽이 뜨겁고 뻐근하다. 카게야마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 번에 들이마셨다. 오이카와가 있는 집 안, 그의 냄새가 나는 방.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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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휴매인 2017.03.20 15:07 신고

    핫삐님~ 오랜만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글로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ㅠㅠ 제가 꼬꼬마 오이카게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라 이번 글이 정말 제 취향을 갈아넣은 글이 아닐 수가 없고...ㅠㅠ 보는 내내 엄마미소를 헤벌쭉 걸쳐놓고 읽었답니다ㅠㅠ 오이카와의 어릴 때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던지..ㅠㅠ 10살밖에 안 된 꼬맹이한테 꼬박꼬박 존댓말하는 토비오쨩도 너무너무 귀엽고요ㅠㅠ 전 뽀뽀하는 장면 기대도 안했는데 캬...ㅠㅠ 토오루쨩 누나한테 받았다고 거짓말하고 그냥 뽀뽀한 건 아닌가 속으로 상상해보면서ㅎㅎㅎㅎㅎㅎ 머릿속에 사랑스럽고 예쁜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져서 정말 행복했답니다~! 어릴 때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면서 카게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배구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정말 좋았구요^^ 좋은 글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감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ㅠㅠㅠㅠㅠ

    • 핫삐 2017.03.24 17:00 신고

      휴매인님 안녕하세요!!>.< 요번에도 댓글 감사합니다 ㅠㅁ ㅠ 꼬꼬마 오이카게 보고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이랍니다...!!!ㅋㅋ 토비오는 오이카와가 어려져도 왠지 존댓말 할거 같아요 ㅋㅋㅋㅋ 오이카와는 오히려 반말할거 같구요! 그래선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거짓말ㅋㅋㅋㅋ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오이카와는 거짓말이 능하니까..! ㅋㅋ 토비오한테 뽀뽀하고 싶어서 무심코 한 뒤에 얼버무린걸지도 모르죠 ㅎ.ㅎ
      제 글에 항상 등장하는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결국 그는 오이카와이고, 토비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죠. 어떤 모습이든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요. 색다르게 써본 글이라 괜찮을지 많이 걱정했는데 재밌게 보셔서 다행입니다 ㅠㅁ ㅠ♥♥ 휴매인님이 재밌다 하셨으니 성공입니다..! 후후..
      요즘 바빠서 답글 늦게 달아드려 죄송해요 ㅠ.ㅠ 에궁 갑자기 바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네용.. 휴매인님도 오카온 마감 하시는 것 같은데.. 같이 힘내요

 

 




세븐데이즈(Seven Days)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일 하던 로드 워크를 잠시라고는 하나 중단했던 걸 카게야마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작용 한 것인지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밤을 점점이 수놓았던 가로등 불빛이 미처 꺼지기도 전이었다. 밤새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안개가 희뿌연 수증기처럼 카게야마의 발목 언저리를 덮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심호흡을 크게 두세 번 한 후 카게야마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로드워크 코스를 따라, 물결치는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냇물을 가로지르고 나무의 그림자가 깨어나는 공원을 지났다. 작은 식물원 앞을 금세 추월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면서 언덕 위를 오르면 이슬이 촘촘히 내려앉은 땅이 부드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깨닫고 카게야마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당시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카게야마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재학 시절보다 키도 컸고 어깨도 넓었으며 근육량도 늘어있었다. 미야기, 센다이가 5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거의 없는 것과 달리 카게야마는 변해 있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재정의하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5년의 공백이란 충분히 재정의가 필요한 기간이었고, 카게야마는 저만 똑같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햇살이 수평처럼 퍼지며 검은 밤을 하얗게 분칠했다. 쏟아지는 여름의 향기가 깨어나고 있다. 카게야마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언덕길을 다시 내려갔다.

 

 

# 6th day

 

 

큰 벚나무를 돌아들어가 오이카와의 집 앞에 이르면 미야기로 돌아온 후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마치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승자 팀에 달라붙어 너나 할 것 없이 질문을 쏟아붓는 기자들 같다. 수많은 카메라와 몇 가지 방송 장비,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 수십 명. 카게야마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저쪽에서 카게야마를 발견한 기색은 없다. TV 방송처럼 카메라를 쳐다보며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보였다.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퇴로 큰 화제인 오이카와 선수의 집 앞에 서 있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사실일까요? 인기척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끔 극성 팬이 집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사례를 눈으로 본 건 처음이다. 기자 및 카메라 담당자는 이곳에서 밤이라도 새려는지 각 잡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갑작스레 울려서 카게야마는 퍼뜩 놀랐다. 발신번호는 미야기, 카게야마의 집. ? 집이라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심스레 화면을 눌렀다.

토비오쨩? 어디야?

오이카와씨?”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오이카와의 조금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맑은 여름 하늘 같은 목소리다. 수많은 기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오직 제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있다. 묘한 충족감이었다.

나 지금 너희 집인데.

? 아뇨,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오이카와씨 집 앞에,”

알아. 올 때 우유빵 좀 사와. , 10개까지는 필요 없으니까 적당히.

. 통화는 강제 종료되었다. 카게야마는 메인화면으로 돌아온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오이카와의 집 앞으로 눈을 돌렸다. 기자, 카메라 등 전부 그대로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빵집으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걷던 걸음이 이내 뜀박질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숨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사선으로 비추는 햇빛이 머리를 풍성하게 적셨고, 카게야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는 걸 느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빵집 문을 열고 카게야마가 들어서자마자 여성은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크게 뜨고 손님, 손님! 부르곤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손님, 그거 아세요?! 어제 손님처럼 우유빵 10개 사가신 분이, 글쎄, 그 오이카와 토오루씨래요!”

.”

카게야마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눈길을 피했다. 여성은 손을 맞잡더니 아, 우유빵 사러 오셨죠? 흥분한 채 물었다.

몇 개 드릴까요? 10개 드릴까요?”

아뇨…… 7, 주세요.”

오이카와가 말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10개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보다는 적을 테고, 과연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몇 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제가 아는 건 그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 뿐이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하고 웃어 보였다.

평소보다는 적네요. 7개 맞으시죠? 맞다, 그래서 그 오이카와 선수 말인데요! 국가대표시라던데, 알고 계셨어요? 이런 조그만 마을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예정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실은 이 사람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 이 여성에게는 오이카와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여름의 맑은 하늘과 겨울의 메마른 공기가 동시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녀가 담는 우유빵을 멍하니 바라봤다. 동그랗게 안쪽으로 회오리진 빵이 봉지에 하나둘 들어갔다. 아마 이 우유빵은 카게야마가 산 우유빵 중 유일하게 오이카와의 입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 * *

 

 

현관문을 열면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식탁에 오이카와가 앉아있었다. 7부 소매의 아이보리색 윗옷을 입은 그는 표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식탁 위에는 그가 가져온 듯 책 한 두 권이 펼쳐져 있다.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이상한 대화다. 이곳은 오이카와의 집이 아니었고, 그가 있는 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다. 저에게 익숙한 무채색 풍경 안에서 이질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독특한 사물처럼, 오이카와는 여타 물질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운동화 끈을 풀었다. 고개를 숙인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토비오쨩, 문도 안 잠그고 다니면 안 되지. 도둑 들면 어쩌려고.”

도둑, 안 왔는데요.”

오이카와씨가 불법침입했잖아.”

오이카와씨는 괜찮아요.”

…….”

운동화를 벗은 후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의 불쾌해 보이는 표정과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에 기분이 나빠진 건지, 5년이 지나도 도통 어려운 사람이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멈춰있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반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책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서브를 넣을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눈동자를 살며시 내려놓은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다. 그것도 저의 집의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샤프가 종이 위를 긁는 소리, 소소하게 들리는 숨소리. 카게야마가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카락은 향기가 되어 콧속에 보드라운 냄새를 풍겼다.

오이카와를 따라 고개를 숙이면 책 내용이 언뜻 보였다. 카게야마가 알아볼 수 없는 해괴한 단어들이 가득하다. 아니, 책에 쓰인 언어는 영어였고 카게야마에게는 알파벳의 모양만 익숙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낸 지 5. 아무리 그래도 어느 수준까지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마치 그 자리를 바꿔 끼운 듯 영어에 대한 지식은 깨끗이 사라졌다. 고등학생 때 츠키시마에게 배웠던 것도, 유급 직전까지 위험한 상황에 몰려 오이카와에게 급하게 배웠던 영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와의 기억 중 저가 잊은 건 없지만, 그때 그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걸 가르쳐줬는가. 카게야마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5년의 간극이란 그런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영어공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옆에 놓아둔 봉지에서 우유빵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깨끗한 입술 주변은 우유 크림도 피해 가는 성역이다. 엷은 분홍색의 작은 입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영어 공부는 왜요?”

취직해야지. 지금까지 배구만 했으니까,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잖아.”

…….”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여러 번 베어 물었고, 몇 번의 반복된 행동 끝에 우유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묻은 우유 크림을 조금 핥아먹은 후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이 영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다는 말을 오이카와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게야마는 피가 살며시 식는 걸 느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연한 홍차색으로 빛나는 속눈썹이 깜빡이면서 영어를 읽어나갔다. 그는 정말로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처럼 보인다. 이제 오이카와는 거의 배구선수로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 안 고프세요?”

고프니까 우유빵을 먹고 있지. 토비오쨩은 바보예요?”

바보라는 말에 잠시 울컥했으나 카게야마는 입술만 삐죽이는 걸로 끝냈다. 미간을 좁히며 불만을 표현해도 오이카와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카레 만들어 드릴게요.”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놀란 듯 입까지 살며시 열린 채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쩐지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이 예상된다.

너 카레도 만들 줄 알아?”

외국에서 살다 보니 카레 파는 곳이 별로 없어서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아주 당연하게 카게야마가 카레를 못 만들 거라 생각하는 오이카와의 여유가 조금 분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까지 카게야마는 카레 만드는 법을 배울 생각도 없었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어머니, 같이 가지 않으셨어?”

어머니도 바쁘시니까요. 제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배우는 게 어떻냐고 하셨어요.”

흐응.”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과연 네가? 라는 말을 담고 있는 그 노골적인 눈빛에 카게야마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맛있게 만들 수 있어요. 뚱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오이카와가 그래? 일부러 놀란 듯이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한 번 만들어보든지.”

턱을 괴고 도전적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모습은 제 기억 속 오이카와처럼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고, 이슬이 맺혀 간질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미묘하게 올리고. 카게야마는 그의 깊은 눈동자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날 사뒀던 카레 재료를 꺼내는 카게야마의 등 뒤로 오이카와의 선명한 눈빛이 꽂혔다. 등을 바라보는 건 항상 제 역할이었다. 5년의 간극을 지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제 등을 밀어내기만 했던 미야기의 여름처럼.

 

 

* * *

 

 

카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실포실했다. 제 상상속보다, 이와이즈미와 있던 레스토랑보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어떤 카레보다. 푹신하게 밥을 덮은 카레와 연하게 달콤한 향을 내뿜는 접시.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넣고 몇 번 우물거렸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앞서 오이카와가 공부할 때처럼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은 채 카레를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저의 입 안에 같은 음식이 있고 같은 맛과 향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서 반짝이는 빛깔을 푸른 하늘에 가득 담아놓은 시간대였다. 그 때문일까? 혹은 카레 때문일까. 체온이 약간 올라 몸 이곳저곳이 따스하게 차올랐다. 혹은……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접시를 전부 비운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카레의 열기 때문인지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카게야마는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물로 헹구어도 닦여나갈 내용물은 접시에 달라붙은 카레 약간뿐이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꾸물거렸다.

카레만 배운 거야?”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면, 오이카와는 목소리만큼 달콤함이 묻어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너답네, 토비오.”

오이카와는 눈가를 찌푸리며 천천히 웃었다. 마른 장미꽃잎처럼 연하게 물든 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이 오가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오이카와에 대한 갈증이 바닥을 덮은 안개처럼 남아있는 카게야마를, 그가 오늘은 채워줄지 몰랐다. 오이카와는 이내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가는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방 한가운데서 카게야마를 기다리듯이 서 있다가, 침대에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토비오, 이리 와.”

오이카와는 제 옆자리를 톡톡 누르며 카게야마를 불렀다. 마치 연인을 부르듯 말꼬리는 길게 늘이고 조금 낮은 목소리. 창가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를 등 뒤에서 비췄다. 빛무리가 형성된 그의 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오이카와의 옆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분만큼 가라앉은 침대 쪽으로 오이카와가 몸을 눕혔다. 카게야마는 천장을 보고 누운 오이카와와 눈을 맞췄다.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흐리다. 오이카와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할 게 산더미야. 학교 공부랑 근본은 비슷해도 적당히만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씨는 성적도 좋으셨었죠.”

“‘그러고 보니’? 토비오쨩, 나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울면서 찾아왔을 땐 언제고!”

울면서 찾아가진 않았어요!”

, 건방진 토비오쨩은 이렇게 해줘야지.”

오이카와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더니 카게야마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 외마디 소리를 낸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처럼 뒤로 엎어졌다. 똑같이 천장을 보는 처지가 된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으나, 무심코 숨을 삼켰다.

토비오.”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오이카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눈앞에서 맑게 빛나고 그의 숨결이 따뜻했다. 그가 붙잡고 있는 팔뚝이 홧홧하니 뜨겁다. 여름이 방 안에 갇혀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숨결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온기가 더해졌다. 뺨의 피부가 열을 발산하고 혈관을 넓힌다. 얼굴이 뜨거웠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오이카와의 눈동자 두 개는 그 조그맣고 동그란 세계 속에 카게야마를 가뒀다. 오랫동안 우린 홍차 속에, 카게야마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잠겼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의 눈동자와 마주 봤을 때부터 그 홍차의 맛을 알고 있었다. 침을 삼키고 서서히 숨을 내뱉으며 공기 위에 음조를 얹었다.

오이카와씨는영원히 제가 이기고 싶은 상대예요.”

.”

오이카와씨가 배구를 그만둔다고 들었을 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굉장히 갖고 싶은 배구공이 있었는데 그게 터져버린 것만 같은오이카와씨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제 목표였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이렇다 할 목표를 정하고 배구를 한 적은 없지만요.”

카게야마에게 배구는 삶이고 인생이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순간을 지나는 관문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구는 제 인생의 가치이자 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역이었다.

그래도 오이카와씨는그 안에서 저의 확고한, 흔들린 적 없는 목표였어요.”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피죽 웃었다.

누구 맘대로 목표로 삼는 거야, 도대체. 난 토비오쨩 따위 안중에도 없었거든?”

알아요. 오이카와씨는 항상 저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었죠. 그 등을 보는 건 제 역할이었어요.”

카게야마가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가둔 채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홍차에 녹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제가 이길 거예요.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씨도, 그렇지 않은 오이카와씨도변한 건 없어요.”

…….”

그걸 알게 됐어요. 생각해 봤는데, 오이카와씨는 중학생 때부터 우유빵을 좋아하셨잖아요. 달라진 건 없어요.”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를 은은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마주 보면서, 카게야마는 입가를 꾸물거렸다. 무언가 아주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풀잎을 쓰다듬는 따스한 햇볕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발그레한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만져선 안 될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고, 그의 손바닥에 아직 남아있는 굳은살이 꺼끌꺼끌하게 피부를 긁었다.

난 이제부터 널 죽일 거야.”

……?”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몸 위로 넘어왔다. 누워있는 카게야마의 양팔을 누르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목덜미에 묻었다. 그의 면바지와 카게야마의 트레이닝 바지를 사이에 두고 중심부위가 맞비벼졌다.

오이카와씨?!”

토비오. 가만히 있어…….”

쇄골을 알싸하게 씹은 치아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뇌를 녹이던 태양보다 더욱 달콤한 숨소리에 카게야마의 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무엇을 한다는 걸까.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들어 올린 티셔츠 속으로 오이카와의 따뜻한 손이 들어왔다.

.”

평소 타인이 만지지 않던 부위다. 양쪽 가슴 사이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문지르던 손이 눌러 붙어있던 돌기 두 개를 동그랗게 돌렸다.

묘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는 한 손으로는 돌기를 굴리고, 다른 한 손은 땀이 스며 나온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오이카와의 손에 붙은 굳은살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이상한 감각에 허리가 들렸다.

,

오이카와가 하반신을 서서히 돌렸다. 마주 댄 중심부위에 은근한 간지러움이 모였다. 마치 관계를 맺듯이 허리를 돌리기도 하고 위아래로 흔들기도 하면서, 중심부위에 열기를 더했다. 묘한 감각이었다…….

 

 

그의 손안에 뜨거운 것을 토해낸 뒤 오이카와는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말없이 젖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입술에 천천히 닿았다.

오이카와씨.”

그의 눈동자는 너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던 순간의 눈동자 빛과 비슷했다. 나른하게 퍼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지구와 태양의 관계처럼, 카게야마가 그의 안에서 죽는 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는 저 자신이 또한 한심했다. 이 이상 한심해질 순 없었다. 그 흔한 말 한마디 못했던 카페에서처럼 다시 그럴 순 없다.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히고 시야가 점차 흔들거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카게야마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말해야 한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와이즈미가 행복해지겠네라고 했던 것처럼, 이건 저의 할 일이다.

오이카와씨, 괜찮아요.”

……토비오.”

죽여주세요. 저를.”

…….”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카게야마는 아주 약하게 미소 지었다. 저가 제대로 웃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여느 때의 오이카와였다. 바보구나, 작게 내뱉은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창문 밖으로 들리는 매미 소리보다 약했다.

오이카와씨도요.”

건방지네.”

5년이나 지났는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에 소리를 내어 키스한 뒤, 카게야마의 뒤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찌할 수 없었다. 저도 만져본 적 없는 곳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만지고 있다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긴장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묘해져서, 카게야마는 그저 눈을 감았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던 몸을 풀고 그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카게야마는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물로 젖어 든 뺨에 다시 물줄기 하나가 서서히 흘렀다.

오이카와씨…….”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와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인상을 찡그린,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면 그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 대신 하고 싶은 말을 카레처럼 혹은 우유빵처럼 삼키고, 장 속에 녹여서, 제 세포 구석구석에 집어넣었다. 제 안의 구성성분인 오이카와 토오루로 남도록. 오이카와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입술은 보드라운 미소를 만드는 게 참 그다웠다.

바보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태양에 녹아내리는 매미를 떠올렸다. 그때 저의 전신을 녹이던 햇빛처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쏟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한 일사병을 앓았다. 이번에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햇볕 아래 분해되어 기름이 번들거리는 우유빵은 썩을 수밖에 없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다.

 

 

 

 

# 7th day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제가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지지하고 천천히 현관문 쪽으로 돌아선 후, 문을 잠그려던 손을 멈칫했다. 현관문을 바라본다. 첫날 갔던 오이카와의 집처럼 인기척은 없다. 카게야마는 문고리에 끼우려던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다. 구름 없는 하늘에는 살인적인 열기를 내뿜는 태양만 강하게 빛났다. 매미 소리는 처음 왔던 날보다 줄어들었다. 많이 죽은 걸까, 햇볕에 녹은 걸까. 어느 쪽이든 무엇이 사실이든, 지금 남아있는 매미도 언젠가 전부 떨어져 죽을 테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는 익숙한 여성이 다시 호들갑스럽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 손님! 어서 오세요! 우유빵 열 개 드릴까요?”

미리 옆에 준비해둔 것 같은 우유빵을 봉지에 담을 준비를 하면서, 여성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 후 천천히 대답했다.

아뇨, 한 개만 주세요.”

어머, 그래요? 의외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 여성은 우유빵 한 개를 솜씨 좋게 봉지에 담았다.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던 여성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어제 말씀드렸던 오이카와 선수요알고 보니 이미 마을을 떠나셨대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알아봤나 봐요.”

그런가요.”

그것도 모르고 어제 손님께 마구 이야기나 하고어휴, 주책이 참. 죄송해요.”

……아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성은 볼을 물들이고 한 번 더 작게 죄송해요.’ 중얼거렸다. 포장한 우유빵 하나를 건네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면 그 열 개 사 가신 분은 누구실까요?”

글쎄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아마도, 오이카와 선수가 아닌우유빵을 무척 좋아하는누군가이리라.

카게야마는 밖으로 나온 후 카페 근처에 그늘을 드리운 나무를 바라봤다. 연한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투명하게 흐르는 여름 공기를 들이마시고, 카게야마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움직였다.

 

 

* * *

 

 

오이카와 집 앞은 어제의 광경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빈터였다. 수많은 카메라 장비도, 기자도, 사람들도 없다. 언뜻 낡은 것처럼 보이는 현관문은 정형외과 의원처럼 몇십 년이고 똑같은 모습일 것만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그 상태 그대로 굳은 채 땅속에 사는 매미처럼 오랜 기간을 기다릴 것이다.

거기, 사람 안 살아요.”

생소한 목소리다. 몸을 돌리면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지겹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훑어보고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살고 있다는 루머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어제 잔뜩 기자들이 들이닥쳤어요. 근데 웬걸, 벌써 이사했대요.”

언제요?”

나야 모르지. 가족은 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는데 혼자만 남아있을 리 없죠. 기자들도 헛다리 짚은 거지, .”

남성은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안 좋게 구기고 가버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돌려 현관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몸을 돌리고 캐리어를 끌면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유빵을 담은 봉지는 눅눅한 바람을 받아 이리저리 흔들린다. 왼쪽으로 반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다시 왼쪽으로…….

 

 

* * *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도로를 거닐면 고생하는 건 캐리어였다. 캐리어가 바닥에서 들렸다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매앰매앰 소리 위에 겹친다. 햇살처럼 투명한 땀이 관자놀이에서 흘렀다. 바닥 위로 오르는 아지랑이, 물결치며 흐르는 습기 가득한 바람, 땅을 짓누르는 여름 구름.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멈춰선 후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 토비오요. 돌아가려고요……. , . 아뇨, . 발목은괜찮아요. 저기감독님.”

, 배구가 하고 싶어요. 작게 말하고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입가 주위가 떨려서 작게 깨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감독님, ……,”

카게야마는 파들거리던 다리를 굽히고 주저앉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검은 물방울이 툭, 툭 떨어지자마자 스며들었다.

어제, 한 번 죽어서앞으로도앞으로도 저는, 그 사람한테는 없는 사람이라……,

카게야마는 눈을 꼬옥 감았다. 감정의 컵에 담긴 내용물이 넘쳐서 떨어지는 눈물로 형상이 바뀌었다. 전날 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어지러움과 함께 머리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햇볕과 매미 소리. 발목이 다시 욱신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 왜 또 말썽인 것처럼 구는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은 카게야마의 욕심을 탓하는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철저하게 믿었다. 그의 안에서 죽어있을 제 시신을, 오이카와가 깨끗하게 닦아주고 수의를 입혀준 뒤 잿더미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줄 거라는 믿음. 완벽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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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13 22:42

    비밀댓글입니다

    • 핫삐 2017.02.13 23:40 신고

      아닛! 죄송합니다 ㅠ.ㅜ 제가 트위터에만 정보를 올렸네요 ㅠ.ㅜ 성인인증은 제 개인 포스타입을 통해 하시면 됩니다. 주소☞ http://hatpphi.postype.com/post/56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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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Seven Days)

 







 

다시 찾아간 정형외과는 변한 게 없었다. 아마도 개원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한 건 없을 것이다. 빛바랜 백의를 입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 비슷하게 적당한 연배로 보이는 간호사.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와 겨우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X-ray 기계까지. 5년 뒤도 똑같이 이 모습일 것 같은, 포르말린에 담겨 부패하지 않을 것만 같은 오래된 정형외과 의원. 카게야마는 왜 벌써 왔냐는 의사의 말에 머쓱하게 입술만 삐죽였다. 의사는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며 장난스럽게 말장난을 치다가, 붕대를 풀고 그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진 후 기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역시 젊은 청년은 다르네요. 회복이 굉장히 빨라요. 한 일주일은 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괜찮은 건가요?”

카게야마는 그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는 의사의 물음은 옳은 말이었다. 붕대가 갑갑하고 불편하다기보다, 로드워크나 근력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끝에는 배구가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삶의 일부분이다. 의사는 턱살이 두툼하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붓기도 나아지고 통증도 없으며 관절운동도 괜찮아 보인다고는 하지만. 전에 말했듯 염좌라는 건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세요.”

.”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주사 한 대만 맞고 가요. 알았죠? 무리는 금물입니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이고 스스로 절망하기 마련이에요. 모든 일이 그렇죠.”

…….”

카게야마군처럼 젊은 청년들은 저 자신의 힘으로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의사는 단호하게, 동시에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은 책상 위에 놓인 처방전에 몇 가지 영어단어를 적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인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그에 따라 인상을 찌푸린 탓일까,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저젊은이들은 이런 시골에 잘 오지 않으니까, 무슨 연유가 있을까 해서요.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것뿐입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삶에든, 운동에든, 관계에서도요.”

. 감사합니다.”

감사 표현을 해도 될지 조금 망설였으나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검고 푸른 눈동자로 백발이 잔뿌리처럼 일부만 남아있는 그를 바라보면 의사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카게야마가 관계에 무리를 가한 것의 대가는 아마도 오이카와가 치렀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내리며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5th day

 

 

오전 10시에서야 여는 의원을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센 시간대가 되고 만다. 묵직한 여름의 향기가 다시금 대기를 휘돌았다. 카게야마는 아찔하게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만 골라 걸었다. 땀은 이제 신체의 장기처럼 붙어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불쾌한 감각을 자아냈다. 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겨우 10분 거리다. 붕대를 푼 발목은 전날보다 훨씬 매끄럽게 구부러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삐끗하며 비틀거렸다. 더는 절뚝이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절뚝이는 기분이었다.

나무의 푸른끼가 짙다. 이끼처럼 잎사귀를 덮은 빛깔은 빛에 따라 앞, , 양옆으로 흔들린다. 하늘 안에 곱게 갈아 넣은 색깔은 두툼한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 아래에 섰다. 봄이었다면 떨어진 벚꽃잎에 묻혀 흙이 분홍색이었을 텐데. 벚나무를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길은, 오이카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붕대를 했을 땐 버거웠던 길이 이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발을 땅에 대고 몇 번 발목을 천천히 돌리면 수월하게 돌아간다.

 

아아, 미야기에 있을 이유가 없구나.

 

막연히 떠올리자, 카게야마의 마음을 아는 듯 발목이 마른 통증으로 신경을 잘게 긁었다. 발목도 나았고 돌아가서 국내이탈리아대회도 준비해야 한다. 오이카와와 이야기할 염치도 얼굴을 보러 갈 자격도 없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주저 없이 번호를 눌렀다.

,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입니다. , 죄송합니다. , 돌아가려고요. 일정보다 조금 이르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 때문에 카게야마는 손을 귀에서 잠시 떼어놓았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처럼 들려오는 매미 소리만이 귀를 채운다. 카게야마는 제 근처에 떨어진 매미 허물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되면…… 배구가 하고 싶어요.”

 

 

* * *

 

 

가져온 짐은 옷 몇 가지와 혹시나 싶어 챙겨온 배구공, 세면도구 등이 전부였다. 머물었던 기간도 이제야 5일째, 짐이 많을 턱이 없었다. 짐 정리를 몇 분 만에 끝내고 마지막으로 배구공을 가방에 넣고자 방에 들어갔다. 채도가 낮은 벽지와 바닥은 제 방이 처음 생겼던 중학생 때부터 바뀌지 않았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3년과 카라스노 고등학교 3년이 녹아있는 방이었다. 주변 벽보다 색이 덜 찌든 곳은 트레이닝 메뉴를 붙여뒀던 곳이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곳을 매만지다가 오이카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저의 트레이닝 메뉴에 팔 근력 트레이닝이 몇 가지 추가된 날이기도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 이상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 다른 기억을 몇 개 더 꺼내보아도 그는 결코 친절한 선배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그럼에도 그의 서브빛을 모으고 볼의 한 점에 집중한 뒤 찰나를 섬광처럼 내던지듯 던지던 그의 서브는 명백하게 카게야마의 배구를 뒤흔들었다. 그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지.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깨달았던 순간. 생애 최초의 절대적인 패배였다. 아오바죠사이와 두 번째 경기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말. 그 어느 때보다도 카게야마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로, 아니. 오이카와가 줄곧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깨달은 순간.

이걸로 11패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 당시 그의 뺨 어느 부위에 땀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땀방울이 눈꼬리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흘러내리던 모양, 네트 너머에 있는 그의 숨소리, 입가에 맺히던 땀방울.

대학 시절 간간이 만났던 그는 매번 환한 여름처럼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카게야마의 옷만 보고도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곤 했다.

토비오쨩,’

가볍게 공기주머니를 부풀리듯 둥그렇게 이름을 부르던 오이카와. 그와 가끔 갔던 카레 집과 카페는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의 안에도 사금(砂金)처럼 남아있었다.

토비오.’

언제였을까. 카게야마가 이탈리아에 간다고 말했던 날이었을까. 함께 카레를 먹고, 오이카와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듯이 말하다가 카게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출국이 언제야? 잘 가, 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은 그를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일모레요.’

그래.’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만히 내리고, 카게야마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바로 이 집 앞에서. 어둑해진 거리를 비추는 연한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부터 전신을 비스듬히 비췄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손을 다시금 꽉 붙잡았다. 제 것이 아닌 온도와 감촉이 낯설었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봤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합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눈빛과 그 흐르던 눈동자의 움직임을 뚜렷이 인식했다. 그 뒤에 오이카와는 뭐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감고 있는 눈동자에 힘을 줬다. 신경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토비오. 죽지 마.’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으면요.’

바보. 그런 게 아니야.’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선 카게야마의 손을 깨끗이 놓았다. 그의 낯선 온기가 떨어져 나가고 미묘하게 남은 잔류 열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걸로 11패야.’

죽지 마.’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트레이닝 메뉴를 붙였던 벽이 보인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자잘한 자국들이 보였다. 이곳에 카게야마가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꺼내 다시 번호를 눌렀다. 카게야마는 좀 전에 비해 지나치게 신호음이 길다고 느꼈다.

저예요, 감독님. 카게야마요. . 저기죄송합니다. 역시,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그리고사실…… , 발목도 다쳤거든요. 제가.”

좀 전과 똑같이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있자 온갖 목소리가 저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렸다. 고성, 잔소리, 크게 내지르는 소리가 안 좋은 통화 음질 탓에 지직거리는 소리와 섞였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적어도 저의 잘못은 아니다.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경우는 카게야마도 어찌할 수 없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 죄송해요. 저기…… 그렇게 할게요. .”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문을 바라보면 불그스름한 연기처럼 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카게야마는 입맛을 다셨다. 우유빵이 먹고 싶다.

 

 

* * *

 

 

어머, 손님!”

카게야마가 ‘OPEN’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와 빵 만드는 쪽을 초조하게 번갈아 바라보더니 꽉 묶은 머리 옆을 매만졌다. 말하기 어려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기, 우유빵이한 개밖에 없어요.”

여성은 선반에 놓여있는 우유빵을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한 개만 남은 우유빵과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럼, 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도로 다물었다.

손님 말고도 10개나 사가신 분이 계셨거든요.”

? 어떤, 어떤 분이

글쎄요,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분이셨어요. 무척 잘생긴 분이셨는데, 물론 손님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여성은 볼을 물들이며 서둘러 말했다. 우유빵을 10, 무척 잘생긴 사람……. 카게야마는 그녀에게서 눈을 피해 우유빵 한 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 사이를 좁혔다.

열 개, 사 갔다고요.”

, 열 개…….”

여성은 부끄러운 듯 가로 내렸던 얼굴을 들어 의아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사려고 했던 우유빵이 없어서 화가 난 걸까. 카게야마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무언가 진한 감동이 서려 있는 듯이 보였다. 우유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게야마는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한 개 남은 거 주세요.”

, 알겠습니다.”

역시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걸까. 키도 크고 어느 정도 덩치도 있는 남성인데 귀여운 면이 있네. 윤곽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며 여성은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우유빵 한 개를 손에 들고나오면 불꽃처럼 붉은빛의 태양이 밤의 장막으로 덮이고 있었다. 거뭇하게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으며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제가 직접 빵을 그렇게 많이 사 본 것도 처음인데, 이제야 맛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음식을 사면 자연스레 입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던 카게야마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에게 그 이상의 대상이라는 씁쓸한 자각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잇모양대로 눌려 들어가는 빵의 감촉, 그 사이로 튀어나온 우유 크림이 점막에 닿아 녹으면서 향기를 풍긴다. 몇 번 씹을수록 우유빵은 카게야마의 입안에서 모양이 변하면서 달콤한 맛을 자아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의 베일, 똑같이 제 뿌리 쪽으로 빛을 흡수하는 올리브 빛 나무와 카게야마. 우유빵이 자신의 안에서 녹고 제 몸 곳곳에 퍼져 세포의 구성성분이 되는 걸 느끼며 카게야마는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또 한 입 베어 물으며 눈을 꼬옥 감았다. 정말이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붕대가 감겨있었던 발목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통증, 심장을 직접 관통하는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쪽 발목이 부어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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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Seven Days)

 

 







미지근한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하다. 눈을 뜨면 물속에 있는 것보다 많은 일조량이 얼굴에 닿았다. 공기가 코를 통해 오간 후에야 지상에 있음을 실감한다. 머리 뒤쪽부터 오금에 이르기까지 땀이 배어 나와 이불보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잠이 덜 깨서 무거운 머리를 들고 상반신도 마저 일으켰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듯 들어와 바닥에 꽂혔다. 눈가가 뜨겁고 머리가 멍하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1, 어머니.

 

잘 지내는 거니?

 

카게야마는 잠시 대답을 두고 고민한다. 붕대가 둘린 발목에 그치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미약한 두통과 어지러움까지. 손가락을 키패드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 글자를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발목을 조심하며 방 안을 거닐면 처음 병원에 갔을 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전보다 통증도 감소했고 겉으로 보기에도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카게야마는 저를 따라오는 햇빛을 밝은 아이보리색 커튼으로 가렸다. 속눈썹조차 무거워서 힘들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여름 기후에 더위를 먹은 걸까, 숨쉬기도 갑갑하고 폐가 충분히 확장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욕실로 향했다. 땀이 식지 않은 축축한 신체가 열을 보관하고 머리를 더욱 달구고 있었다. 미야기의 여름은 병적이었다.

 

 

 

#4th day

 

 

시야에 비치는 모든 나무의 잎과 잎 사이 경계가 흐릿하다.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푸른 입자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그대로 관통하는 햇빛에 찔려 섬광을 내뿜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매미 울음소리에 부딪히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연 눈동자가 비추는 모든 것이 뜨겁다. 카게야마는 축축한 이마를 훔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 아래에서 나무, 잎사귀, 카게야마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잘 지내는 거니?’ 그 메시지 글자만으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겠지.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말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죽음까지 몰고 오는 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죽음 자체는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절차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비교적 최근이어서 그럴 테지. 카게야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접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죽음이어도 제각기 다른 인상(印象)을 남긴다는 건 묘한 일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 달랐듯, 아버지의 죽음도 부쩍 다르겠지.

카게야마는 제 기억 아래에 남아있는, 사망했을 당시의 할아버지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윤곽을 덮어씌웠다. 파리한 얼굴을 한 채 관 안에 눕혀진 아버지의 시신. 눈과 입을 꾹 닫은 아버지의 몸에는 흰색 수의가 입혀져 있다. 관 속은 머리 주변부터 발끝까지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꽃이 장식하고 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몇 번 훔치더니 결국 얼굴을 가리고 만다. 손가락 사이로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염없이 스며 나온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목소리가 이내 겹쳐지면서 하나의 흐느낌이 되는 것을 카게야마는 듣고 있다. 익숙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어긋나 전혀 다른 음색을 띤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버지의 이마 주름과 청회색 얼굴도 낯설었다. 카게야마는 제 안에서 예고 없이 생각의 방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카게야마에겐 이런 생각을 몰아넣을 방이 없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캉한 뇌 속을 들여다본다. 그의 생각의 가지는 단단한 것부터 금세 부러질 것처럼 얇은 것까지 다양해서 카게야마는 그 아주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수천 개의 방이 급박하게 열린다. 카게야마는 그 하나하나를 생각하다가 활동을 그쳤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오이카와의 집 현관문이 보였다. 이곳으로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게야마가 향하는 곳은, 그 몸이 무의식중에 다다르는 곳은 결국 오이카와라는 결론이 우스울 정도로 눈에 보였다.

이미 죽은 자의 뱃속을 몇 번이고 쑤시는 살인자처럼 태양이 대지 위에 녹아버린 몸을 세로로 쪼갰다. 뼈에 직접 소리를 전달하는 매미와 눈동자를 달구는 덥숙한 공기, 두개골을 가르고 연두부처럼 미끈한 뇌를 꺼내 짓이기는 햇볕. 마치 오이카와가 던져서 바닥 위를 뒹굴던 우유빵처럼 몸이 조각나고 해체되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거 같은데. 환상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는 현관문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 문이 열리고 깨진 유리같이 흔들리는 형상의 오이카와가 보였다. 혹은 어제 체육관 앞 벤치에서 꿨던 꿈처럼 망막에 맺힌 상상일지도 몰랐다. 몸이 전부 녹아서 하나의 더러운 기름 덩어리가 된다. 오이카와가 바람에 흐르는 꽃잎처럼 흩어지고, 눈이 감겼다.

 

 

* * *

 

 

……처음 보는 천장. 왼쪽 손등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때문에 손을 들어보면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수액 줄을 따라가 보니 머리맡에 걸린 수액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눈을 뜬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이카와가 콜 벨을 누르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표정과 카게야마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이제 괜찮으니까.”

오이카와는 천천히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병원에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는 카게야마와 그 옆에서 지켜보던 오이카와. 그의 집 앞에서 느꼈던 속이 쓰릴 정도의 울렁거림, 의식이 끊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기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다행이에요. 굉장히 회복이 빠르시네요. 간단한 피검사도 했는데 괜찮으셔서, 이만 돌아가셔도 될 거 같아요.”

간호사는 빠르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손등에 꽂힌 바늘을 능숙하게 뽑아냈다. 묵직한 통증이 사라지고 물 흐르듯 이어진 동작 이후에 간호사는 병실을 나섰고, 오이카와도 그 뒤를 이었다.

오이카와씨, 잠깐!”

카게야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닫혔다.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던 때에 잠시 누르고 계세요라고 들었던 말을 이행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밴드 한가운데를 적시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피가 보여도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문을 열자 접수대에서 수납을 하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오이카와씨!”

그를 저지하고자 다리를 내디뎠으나 그대로 무너졌다. 양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약한 어지러움이 겹쳐 다시 일렁이는 시야를 만들어냈다.

괜찮으세요?!”

옆을 지나던 간호사 한 명이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카게야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일사병으로 쓰러지셨거든요.”

일사병?[각주:1]

이런 여름날에는 종종 있어요.”

카게야마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키가 180을 넘은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나 비틀거리다니 꼴사납다.

괜찮습니다. 부축, 안 해주셔도.”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하고 손을 무른 후 벽에 기대섰다. 오이카와는 물빛 반소매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카게야마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더니, 통보하듯이 짧게 말했다.

가자.”

몸을 돌리고 그대로 병원 밖으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보다가 카게야마도 몸을 움직였다.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가 불안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좀 전의 상황을 보고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건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를 쫓아가는 것도 여전히, 카게야마의 몫이다.

 

 

* * *

 

 

끝나지 않는 매미 소리와 달궈진 공기는 여전했다. 가장 열기를 내뿜는 시간인 오후의 태양은 저 자신의 궤도를 따라 둥그렇게 돌고 있었다. 단 두 개뿐인 구름이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과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쓰러지기 전보다 한결 편해진 가슴 속에 숨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내보냈다. 오이카와가 앞서고, 카게야마가 뒤를 따르는 모습은 병원을 나오고도 계속되었다. 오이카와의 등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건 가히 오랜만이다. 제 기억보다 골격이 두드러진 그의 등은 얼룩덜룩한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전부 흡수하고 있었다. 바지와 겨우 맞닿을 정도로 짧은 물빛 티셔츠가 푸른 잎 사이로 비치는 빛에 흔들리면서, 바다처럼 그물망 무늬를 만들었다. 적당히 멋스럽게 고정된 머리카락, 가늘게 떨어지는 목과 티셔츠에 가려진 두툼한 근육, 그와는 다르게 얇은 팔목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새삼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카게야마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등이 곧은 사람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다가 그가 구태여 그늘을 골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더위를 싫어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 외의 이유인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일수록 입을 다물었다. 그건 때로는 오이카와의 친절이었고, 가끔은 카게야마를 애태우는 성질의 버릇이었다.

더위를 가라앉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바람은 오이카와의 등에서 소멸하고, 그늘에 놓인 그의 등을 비추고자 햇빛은 더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도 햇빛도 전부 오이카와만을 따라다닌다. 눈이 부셨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물론 돈은 토비오쨩이 내겠지? 오이카와씨가 생명을 구해줬는데 말이야.”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구해줬다는 건 좀 과장 아닌가 싶어 입술이 튀어나오다가 실제 그가 구해준건 사실이었기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발목에 다시 통증이 배어 나오려던 때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걷는 속도가 비슷해지고 그로 인해 오이카와의 옆모습이 보였다. 홍차 빛 눈동자는 빛을 투명하게 반사해 평소보다 옅은 색소로 빛났다. 카게야마는 잠시 편안해졌던 가슴이 다시 옥죄이는 걸 느꼈다. 열기 때문도, 어지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 * *

 

 

좌석이 총 5개 남짓한 작은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테라스 석이 마련된 공간을 고른 건 오이카와였다. 카페 내부와 유리문으로 통하는 테라스 석에는 수국 화분이 아름드리 놓여있다. 방금 물을 받은 걸까, 푸른색 꽃잎에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있다.

저는 아이스 커피 한 잔요. , 이쪽은 오렌지 주스로 부탁해요.”

오이카와는 제멋대로 주문한 후 종업원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주문할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의 상상 속에서 제멋대로 카레를 주문하던 오이카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테라스 석에서 보이는 거리는 주택가처럼 한적하다. 이처럼 해가 뜨거운 시간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어 작열하는 태양이 그대로 바닥을 지핀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수국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게야마는 입을 열어야할지 고민을 여러 번 하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이제 오이카와의 시선은 카페 주변에 심어진 나무로 옮겨졌다. 센다이는 누가 뭐라 해도 시골이었고, 도시에서 보기 힘든 생생한 빛깔의 잎사귀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재회했을 때처럼 쏘아보듯 날카로운 눈빛이 아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오이카와였다.

아이스 커피, 오렌지 주스 나왔습니다.”

조금 전 오이카와에게서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며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를 흘끔 바라보며 볼을 더더욱 붉힌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구겼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래?”

오이카와는 관심 없다는 듯 금세 대화를 종료했다. 능청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입으로 커피를 마신 후 그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어.”

이와이즈미씨요?”

아니, 이와쨩이면 이와쨩이라고 했겠지.”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바보,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카게야마는 바보 아니에요, 마저 말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멈춘다.

그 친구는 꽤 잘 살았던 거같아. 집이 무척 컸거든. , 집은 그것과 상관없을지 몰라도 대충 어린아이가 느끼는 게 있잖아.”

카게야마는 그러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관념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집에는 오이카와가 있다. 그에게는 익숙한 정의가 타인에겐 이해받기 힘들다는 걸 카게야마는 어머니가 말해줘서야 알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아마 여름방학 때였다고 생각해. 무척 더웠거든. 오늘처럼.”

센다이였나요?”

당연하지. 여기서 태어나고 이곳에서만 살았는걸. , 그래도 너처럼 쓰러질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어.”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장난이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얄밉게 웃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웃음소리였다. 일본, 미야기, 센다이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4일째인데도 오이카와의 모든 것이 매 순간 다르게 느껴졌다. 센다이의 기억은 흙과 공기처럼 오이카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오이카와가 보여주는 익숙한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카게야마를 주조(鑄造)했다. 그와 보냈던 여름의 센다이는 매번 동공이 하얗게 물든 것처럼 눈부셨다.

놀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우연히 저녁까지 먹게 된 날이었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무척 요리를 잘한다고 나한테 자랑한 적이 많았거든.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참 이상하지, 선택이라는 거.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삶이 빚어지니까.”

오이카와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댔다. 마주 보던 눈길을 돌려 다시 풍경을 바라보고, 꿈에서 이야기를 하던 것처럼 일상적인 말투로 이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창밖이 깜깜해졌고,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감사하다고 여러 번 인사한 후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왔어.”

오이카와는 어렸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으면서 말했다. 친구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기억, 그것도 어린아이의 시야에서 본 상황인지라 대체로 부정확하고 모호했다. 그런데도 선명한 이미지 몇 개가 등장할 때마다 오이카와는 특별히 신경 쓰며 자세히 묘사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 세 명, 그들이 내민 종이에 쓰여있던 문구. ‘갚지 못할 시 무슨 일이든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았던 0의 개수와 그 아래 찍힌 지장. 오고 간 말다툼과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

그때 난 너무 무서웠는데,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 누군가의 공포와 증오, 분노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표정을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그 사람들이 간 후에 친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고 있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 미안하다고.”

…….”

알고 보니 그 아이 아버지가 돈을 빌리고 도망쳤다고 하더라. 사업을 시작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그게 실패했다나. 그 아이와 어머니는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얄궂지.”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미소 짓던 얼굴의 근육이 전부 이완됐다. 그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와 누나가 그렇게 되게 할 순 없잖아.”

…….”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오이카와와 얼음물을 마시던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천천히 겹쳐진다. 이와이즈미의 말이 테라스 석 주위를 맴돌았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눈가를 구겼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를 흉내 내어행복해지세요같은 형식적인 말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은 쓸모없는 멍청이였다. 이와이즈미가 하지 못했던 말도, 할 수밖에 없던 말도 하지 못하는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오렌지 주스를 바라보자 동동 떠 있는 얼음이 점차 흐릿해진다. 다시금 머리가 어지럽고 가벼운 두통이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카페 내부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이별 선고였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그래왔듯, 카게야마가 원하는 바를 최소한의 표현으로 채우는 사람이었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아주 작은 틈새도 막지 못하는 부족한 자였다.

손님.”

카게야마의 시야 옆으로 갈색의 정사각형이 보였다. 종업원이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은 네모난 티슈였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제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오렌지 주스에 퐁당퐁당 떨어지고, 그 안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밴드가 붙어있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센다이의 여름 속에 홀로 서 있는 오이카와를 규정짓고, 더러운 붕대를 뭉쳐서 배구가 빠진 그의 빈칸에 조잡하게 쑤셔 넣은 건 카게야마였다. 그런 그가 말할 자격도, 울 자격도 있을까. 저는 그를 제 방식대로 난도질한 만큼 상처 입을 자격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 열에 노출되어 심부의 온도가 섭씨 37도에서 40도 사이로 상승한 상태. 어지럼증, 두통, 구역, 즉시 회복되는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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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Seven Days)

 

 

  




 

 

 

  겨우 하루 운동을 쉬었다고 오전 10시 즈음에야 눈을 뜰 카게야마가 아니다.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온 여파 때문이리라. 발목이 욱신거려 밤잠을 설친 탓에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로드 워크는 무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기만 하는 발목을 슬쩍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웃옷을 벗었다. 배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아침 겸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하고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은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었다.

 

 

 

#3rd day

 

 

어디에 가서 식사할까 고민하다가 미야기에 도착 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전단지가 붙어 있던 게 생각났다. 전단지의 약도를 더듬더듬 기억해내 도착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만큼 건물이 깨끗했다. 볼 거라곤 논밭과 주택가, 몇 개 되지 않는 학교밖에 없는데 굳이 언덕 위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낮, 이런 애매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테라스 혹은 창가 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가지를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매미 같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은 귀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카게야마가 입구에서 잠시 멈춰있자 멀리서 키가 작은 종업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창가가 아닌2인용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였다.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메뉴 중에 카레는 단 하나뿐이다. 다행히도 돼지고기 카레였다. 자리를 안내해준 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카레를 주문했다.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당연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이곳 미야기가 더는 제가 아는 곳이 아님을 인지했다. 가게 한쪽에 조그맣게 매달린 벽걸이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