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상의 오이카와 누나가 등장합니다.

* 오이카게입니다만 오이카와의 등장 비율은 적습니다.

 

 

 

1st.

 

 

 

 

하얗고 둥근 테이블이었다. 상앗빛을 닮은, 혹은 우유색을 닮은 오묘한 흰색. 그와 세트인지 비슷한 색상의 의자에 카게야마는 앉아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투명하고 긴 꽃병이 있었고, 꽃병 안에는 흰 수선화가 두 송이 꽂혀 있었다. 테이블 바로 옆에 있는 큰 창문을 통해 들어온 여름 햇살이 테이블을 바로 비췄다. 하얗고, 따뜻한 공기가 카게야마의 콧속으로 들어오고 폐를 돌아 천천히 나왔다.

 

 

커피 괜찮으신가요?”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키가 160cm 정도 되어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의 여성은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준비 중이었다. 여성의 팔은 희고 가늘다. 하얀 셔츠 원피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타고 흘러온 커피 향 때문인지 코가 간지러웠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연기가 오르는 검은색 머그잔과 연갈색 액체와 얼음이 담긴 유리컵. 두 개의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그녀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한쪽으로 정리한 앞머리와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의 머리길이. “보리차예요.” 짧게 내뱉은 그녀는 카게야마를 마주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얼핏 미소지었다.

 

 

사진이랑 똑같으시네요.”

 

 

카게야마는 그녀가 본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그 안의 카게야마가 어떻게 찍혔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답하지 않았다. 미소지은 그녀의 눈은 작은 어깨처럼 굽이져 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름다운 빛깔의 눈동자. ‘오이카와 토오루의 누나라고 본인을 칭한 여성은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동시에 조심스레 커피를 마시는 동작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토오루를 만난 건 언제예요?”

중학교 1학년, 키타가와 제일 중학교에서였습니다.”

오래된 인연이네요.”

 

 

학교 이름을 들은 후 입꼬리를 내리더니 카게야마를 다시금 마주 본 그녀는 재차 입을 열었다. “오래된 인연이네요.” 타인의 일을 말하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혹은 그리 느낀 건 카게야마의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눈앞의 유리컵 겉면에 결로가 맺혔다. 짧은 공백이었다.

 

 

토오루가 언제부터 배구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나요?”

초등학생, 때부터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카게야마씨는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비슷하네요.”

 

 

그리운 일을 회상하듯이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말간 빛을 띠었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었다.

 

 

그때 당시에 저희 가족은 배구라는 스포츠는 잘 몰랐으니까, 토오루가 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작게 웃는 그녀의 얼굴 위로 햇빛이 드리웠다. 하얀 얼굴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런 저희한테 토오루는 혼자서 이것저것 알아보곤 '여기 가면 배울 수 있대', '이렇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대'라며... 그때부터였어요. 토오루의 방에 항상 배구공이 놓여 있었던 건."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부드럽게 닫혔다. 잠시의 정적 동안 카게야마는 눈앞의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간 보리차의 차가운 기운이 가슴 안에 퍼졌다. 밖을 돌던 바람 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와 여성의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눈을 한두 번 깜빡이곤, 깊게 감았다가 떴다. 카게야마는 그 속눈썹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깊이 생각에 빠진 모습이 비슷하다. 자연스레 그를 떠올릴 정도로

카게야마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보리차의 맑은 물결이 조각 얼음에 부딪혀 찰랑거렸다. 나이 차가 몇 살이라고 했던가. 카게야마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이카와가 누나를 언급한 일은 많지 않았다. 조카는 만난 적도 있지만...

 

"중학교 때 만났다고 하셨죠?"

", ."

"그럼 카게야마씨가 입학했을 때 토오루는 3학년이었겠네요."

"..."

"그때였어요. 토오루가 이상한 질문을 했던 건."

 

그녀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앞머리를 조심스레 붙잡고는 금세 져버릴 것 같은 약한 꽃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카게야마의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시선을 옮겨 카게야마를 잠시 바라본 후 눈앞의 머그잔으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작은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저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날이었고, 타케루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은 후엔 오늘처럼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그래선지 이런 날이면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떠오르거든요."

 

여성은 혼잣말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눈앞의 카게야마는 그녀의 추억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오이카와, 키타이치 제일 중학교에서의 그의 모습.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바라봤던 그의 등을 떠올렸다.

 

"토오루는 말했어요.

 

'누나, 만약.'

 

그 아이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었죠. 마치 잔뜩 닳아 해진 인형을 품속에서 꺼내서 제게 보여주는 것처럼, 뭔가를 잃은 표정이었어요.

 

'만약 내가 배구를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

 

저는 그 아이가 말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았어요. 배구를 못 하게 되는 것. 불가피한 사고나 혹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토오루의 손에서 배구공이 떠나는 것. 아니, 배구가 사라진다는 것. 처음 배구를 만났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그것'이 사라진다면?

제가 입을 열기 전의 짧은 시간 동안 토오루의 옆에서 자고 있던 타케루가 작은 소리를 냈고, 저는 고민했어요. 어떻게 답해줘야 할까를 고민한 게 아니었어요. 이것을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는.

 

카게야마 씨라면 어떻게 답할 거예요?"

 

돌연 돌아온 질문 탓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심해에 사는 조개빛깔처럼 푸른 눈동자를 두 번 깜빡이고, 살며시 인상을 찌푸린 카게야마.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가 도로 다무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하얀 테이블 위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춤을 췄다. 어딘가 냉소적인 어기가 서린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었다.

 

"저는 그래도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토오루의 이 질문에 온전한 그대로를 답해야 한다고. 그것이 토오루를 위한 일이니까. 그래서 저는 말해줬죠. 평소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어요. '배구가 너에게서 사라지는 게 아니고, 네가 배구를 떠나는 거겠지.' 어쩌면 토오루는 그때 제 말이 자신을 탓하는 말투처럼 들렸을지도 몰라요. 실제로 저는 토오루에게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바로 너야,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죠. 그러자,"

 

숨을 한 번 참아내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입술을 꽉 깨물더군요. 저한테서 고개를 훽 돌리곤 어깨를 잠깐 들썩였어요. 조심스레 쳐다봤지만 절대로 눈가를 비비진 않았죠. 토오루의 등과 어깨가... 꽉 잡은 주먹의 의미를 저도 알고 있었어요. 토오루가 처한 상황이나, 어떻게 느끼는지도... 저는 항상 토오루에게 관심이 많았고, 시합을 보러 가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오는 정보들이 있잖아요?"

 

그 순간 그녀는 언뜻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그 시선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그의 차가운 보리차로 이어졌다. 결로가 맺힌 투명한 유리컵을 감싼 카게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명백히 무언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토오루의 결정이지만, 저는 그저 그 아이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 합리화나 내세우면서 도망치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런 제 마음이 담긴 건 토오루에게 아픈 소리일 수밖에 없지만요."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머그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은 마치 자신에게 말해주듯이 작게 말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는 다시 한번 카게야마를 바라본 후 처음과 같이 부드럽게 웃었다. 냉소적 미소, 차가운 시선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엔 카게야마씨 차례네요."

 

대신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말꼬리를 늘렸다. 엷은 갈색의 눈동자는 뜨거워져 가는 햇볕을 받아 일렁이며 빛났다.

 

"토오루를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한 마디 따끔하게 날려주세요."

 

 

 

 

 

 

 

 

 

 

 

2nd.

 

 

 

 

그 녀석,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으니까.”

 

이와이즈미는 토해내듯이 말했다. 카게야마는 새하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던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요?”

 

한낮의 공원은 점점 뜨거워져 가는 태양 빛을 두 팔 가득 받아들이고 있었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앉은 카게야마의 옆이마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와이즈미는 제 손에도 들린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먹은 후 다시 입술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멍청한 놈이었어. 편해질 방법도, 행복해지는 방법도 다 알고 있으면서 하지 못하는 바보.”

“...오이카와 선배를 가장 잘 아는 이와이즈미 선배가 하시는 말이니 분명 맞겠죠.”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와이즈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한 걸까? 의심의 눈초리를 담아 바라봐도 카게야마는 일없이 아이스크림을 한두 모금씩 먹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와이즈미는 그 표현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누구보다도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고, 그의 배구를 향한 아집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오이카와가 자신의 길의 동반자로서 선택했던사람. 이와이즈미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그와 동행했으며 지금도 이와이즈미는 그의 가장 큰 지지자이다. 허나 그뿐이었다. 자신은 오이카와처럼은 할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여름의 햇빛을 받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카게야마를 천천히 바라봤다. 카게야마 또한 이와이즈미의 시선을 눈치채곤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고요. 이와이즈미 갑작스레 푸핫, 큰 소리로 웃더니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닮았을지도 모르겠네.”

?”

 

카게야마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한다. 그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미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참은 후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오이카와를 찾으러 갈 거지? 카게야마.”

.”

 

이와이즈미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바보 같은 녀석을 찾으러 가는 바보 같은 후배. 그것이 이와이즈미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인상이었다. 중학교 3학년, 카게야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오이카와의 표정을 이와이즈미는 평생 잊지 못한다. 감독의 변덕으로 오이카와 대신 들어간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다른 누구에게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그 자리에서 카게야마는 '세터'로서 배구공을 만졌었다. 벤치에 앉아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고, 카게야마의 토스를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마치

 

마치. 불변의 진리라도 발견한 학자의 표정이었달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들었다. 구름 없는 파랗고 투명한 하늘이 보였다. 저 멀리서 하얗게 빛을 발하는 태양에서 발산된 열이 이와이즈미를 감싸고 있었다. 이 하늘 아래에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두 사람은 만났고, 같은 영역을 택했고 이제는 이와이즈미조차 손댈 수 없는 무대 위에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카게야마. 너한테 배구는 어떤 거냐?”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질문을 이번엔 재차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달려온 햇빛은 나무 사이로 비쳐들어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간간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매미 소리는 새파란 하늘 사이로 퍼졌고 천천히 몸을 훑는 바람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카게야마는 여름이 왔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잘하고 싶고 누구보다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그럼 오이카와는?”

반드시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역시 닮았구나, 너희 두 명.”

 

이와이즈미가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카게야마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오이카와랑 함께 하면 불행할 거다, 카게야마.”

 

이와이즈미는 낯설게 웃으며 말했다. 커다란 적란운이 태양을 가렸다.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는 커다란 구름의 그림자 안에 갇혔다. 강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파스스, 저들끼리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가 매미 소리 사이로 들렸다.

 

제게 불행이란 배구를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불행할 거야, 분명.”

 

이와이즈미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웃는 건 낯선 일이었다. "이상하지. 분명 행복하기 위해 사는 건데 말이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래도 난 네가 오이카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처음엔 너와 만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오이카와 선배가 배구를 계속하는 한, 제가...”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이와이즈미에게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바라봤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묻은 입가가 번들거렸다. 서로 만나지 못했어도, '배구'를 계속하는 한은 이어지고 마는 관계. 그것이 카게야마가혹은 오이카와가'만들어낸' 두 사람의 우연이라고 하는 걸까.

이와이즈미는 마음속으로만 한숨을 내뱉었다. 땀이 등 뒤를 타고 흘렀다. 아이스크림콘을 잡고 있던 손이 끈적거렸다. 매년 느끼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지독한 더위였다.

 

'나로서는 둘 다 행복해졌으면 하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고, 중학교 시절부터의 후배다. 두 사람의 관계를 떼고 보면 이와이즈미로서는 둘 다 지키고 싶은 상대다. 허나 두 사람이 선택한 것이 해답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와이즈미는 그저 카게야마의 등을 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바보 녀석 만나면 한 마디 해줘.”

어떤 말이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몇 살이 되든 여전하다. 카게야마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와이즈미는 피식 웃었다.

 

또 한 해 동안 열심히 불행하라고.”

 

 

 

 

 

 

 

 

 

3rd.

 

 

 

 

분홍빛을 담은 오렌지 빛깔이 한쪽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하늘의 색을 그대로 담은 바닷물결이 갈색빛으로 변한 모래를 덮었다가 그대로 쓸어 담았다. 만조가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젖어 드는 모래의 영역도 넓어졌다. 오이카와는 바로 그 바다 안에서, 바닷물과 하늘의 경계가 불분명한 지점에 서 있었다. 그의 허리춤까지 오른 바닷물 표면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속은 시큼한 소금 냄새를 풍겼다. 붉게 물든 석양은 오이카와의 뒤편에서 둥그런 둘레를 빛내며 구름을 몰아내고 있었다. 몰려오는 어둠이 오이카와의 흰 티셔츠를 뒤덮었다.

카게야마는 젖어 드는 모래 위에 서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서서히 발을 움직여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닷물은 그의 신발, 양말, 바지의 밑단, 중간, 허벅지, 벨트를 적시고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복부를 침식했다. 그제야 그는 오이카와의 등 뒤에 설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등을 보인 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의 타오르는 빛이 아름다운 홍차 빛 머리카락에 녹아들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마치 누가 와 있는지 안다는 듯이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석양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카게야마가 그 그늘에 익숙해졌을 때, 그의 속을 파고드는 듯한 깊은 눈동자가 곱게 굽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미소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체내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잠시 뒷걸음질하던 오이카와는 그만 바닷속으로 빠졌고 카게야마는 그를 놓지 않았다. 얽어맨 두 사람의 몸이 바다 안에서 수천, 수만 개의 기포를 만들어 냈다. 투명한때로는 검고 때로는 붉게 비치는 기포는 수면 위에서 포글포글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카게야마는 검은 물속에서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오이카와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카게야마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물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석양의 빛깔, 바닷속 검은 물줄기 등 주변의 것이 전부 그의 깊은 홍차 빛 눈동자 안에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피부와 피부가 서로 맞닿으려는 순간 오이카와가 강하게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 늦었네. 벌써 해가 다 지고 있잖아.”

 

두 사람의 몸은 완전히 젖어 그 머리카락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긴 후 오이카와는 날 선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네요.”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찾게 해준' 거야.”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다가갔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쪽으로 당겼다. 젖은 티셔츠가 달라붙은 몸이 서로 밀착했다. 젖은 바지도 맞닿아 묘한 열을 자아냈다.

 

오이카와 선배가 어디로 가든 제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오이카와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소금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의 냄새와 젖은 바다의 냄새.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 때문에 카게야마의 심장이 저릿하게 울렸다.

 

제가 이기기 전까진 멋대로 사라지시면 안 돼요.”

건방지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되고. 토비오 많이 컸다?”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카게야마의 허리를 꼬집었다. 눈썹을 약간 꿈틀한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가 제 앞에 계시는 한, 전 반드시 따라가서 붙잡을 거예요. 그러니까,..”

 

입술을 다문 카게야마는 필사적인 애원을 입술 사이에 씹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언제가 되든 오이카와에게 건네는 말은 같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으나, 젖은 티셔츠 때문에 호흡이 힘들었다.

 

"제 앞에서 사라지지 마세요."

"..."

"오이카와 선배가 살아있는 한, 배구를 계속하시는 한..."

"..."

"그 때까지는 제가 이길 기회를 주세요."

"...여전히 멍청하네, 토비오는. 날 이기려면 백 년은 더 살고 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젖은 물방울이 그의 따뜻한 손에 닿아 뭉근한 열이 피어났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목젖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의 존재가 카게야마를 얽어맸다. 젖은 몸이 맞닿은 자리마다 카게야마의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떨려왔다.

 

 

바닷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황혼을 맞이하는 하늘은 짙은 파란색의검보랏빛을 빛내며 마지막 숨을 내뿜었다. 거세지는 파도 소리와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 카게야마는 720일의 밤을 맞이하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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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Happy Birthday, Toru Oikawa.









 Tell me, Please don’t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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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kawa side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티가 나는 법이다. 사람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건 선천적인 걸까, 그에 대해선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말을 거는 여자아이들, 모른 척 기대는 좁은 어깨, 남자치고 피부가 희다면서 가볍게 하는 접촉들. 그런 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자연적으로 머릿속에서 전환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다. 여름은 낮이 길다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역시 카게야마 토비오는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 뚱한 얼굴이 떠올랐다. 노란 끼가 도는 피부에 까만 머리, ‘뭐하러 오셨어요.’하며 삐죽 튀어나온 입술. 이상하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태도, 저는 모르겠지만 손끝까지 긴장한 것 같은 그 모습은 좋아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오이카와는 가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또 무슨 이상한 짓 꾸미고 있냐며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이며

그냥. 솔직하지 못하구나 싶어서.”

가볍게 내뱉을 뿐이었다. 연습이 없는 날의 귀갓길 가운데로 햇빛은 부서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습기가 끈적거렸다. 뜨끈한 바람이 드러난 팔에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카라스노에 도착했을 무렵엔 석양이 바닥 저변에 녹아들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나절은 매미 소리도 한풀 꺾여 낮에 비해서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무리를 보고 가방을 고쳐맸다. 지그시 한 사람만을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오이카와를 발견한 건지 강한 인상을 쓰고 있는 험악한 표정의 후배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눈을 가늘게 굽히면서 안녕, 토비오쨩. 가볍게 내뱉고 손을 살살 흔들어 보이면, 카게야마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강하게 한숨을 쉰 뒤 무리 속의 누군가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오이카와쪽으로 걸어왔다. 카게야마가 다가오면 올수록 그 까만 저지에 노을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까만 머리카락에도, 꾹 다문 입술에도. 어둑해져 가는 저녁에 얼굴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카게야마는 발을 멈췄다. 더는 찌푸려지지 않는 미간을 더욱 좁히면서, 뚱한 입술을 열었다.

뭐하러 오셨어요.”

토비오쨩 보러.”

거짓말 치지 마세요.”

조금의 쉼도 없이 주고받은 말 뒤에 카게야마는 시선을 틀었다. 잠시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를 그대로 지나치려는지 몸을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서둘러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냥 가지 말고. ? 할 말 있으니까.”

…….”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이카와와, 오이카와가 붙잡은 팔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잠시간 달싹였지만 오이카와가 응? 운을 떼자 다시 꾹 닫혔다. 연습을 끝낸 몸에서는 연한 땀 냄새가 나서,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같이 남아서 늦게까지 연습하던 날은 바람에 실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었다. 시선이 비슷해질 정도로 키가 자라도, 예전에는 순진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이제는 짜증이 가득해도, 예전과는 달리 굵어진 팔이 한 손에 들어오지 않아도, 카게야마는 카게야마였다.

 

 

저녁이 물드는 카페에는 사람이 적었다. 뚱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연거푸 물만 마셔대는 카게야마를 보면서, 오이카와는 기어코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를 올린 오이카와를 보더니 카게야마는 먼저 운을 뗐다.

할 말이 뭔데요.”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게야마가 놀란 듯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조금 뺐다. 열이 올랐던 몸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은 걸까, 그 팔을 조금 떨면서.

솔직하게 말하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오이카와는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간질간질한 목구멍을 타고 톡톡 튀는 아이스티가 내려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뭐가요?”

오이카와는 피식 웃더니, 아이스티의 얼음을 빨대로 휘적휘적 흔들었다.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다 아니까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 오이카와씨의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카게야마가 어떤 식으로 고백하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한가지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다는 당연한 이치처럼. 카게야마는 얼마간 조용한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지어 보인 미소에 이내 웃어 보였다.

? 웃었다고?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마시던 아이스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후배는 인상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요?”

,?”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지 못한 상황에 오이카와는 잠시간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카게야마는 웃고 있었고,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은 어느새 소소한 한기를 주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정해놓지 않은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소름이 돋는 미소를 거두더니 조용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씨가 뭘 생각하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카게야마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낚아채고 끌어당기더니, 두 입술 사이에 아주 조금의 간격만을 남겨두고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너무 바보로 보지 마시죠.”

입술에 와 닿는 뜨거운 입김에 오이카와는 입술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잡고 있던 넥타이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카게야마는 무언가 해냈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이카와는 얼마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간질이던 이마, 바로 앞에서 마치 별이 담긴 듯 반짝이던 검고 푸른 눈동자. 귓속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져 머릿속이 다시 한 번 새하얘졌다.

뭐야, 토비오쨩?”

얼굴이 뜨거웠다. 카페 안에서 저만 다른 세상인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서 오이카와는 손을 꽉 쥐었다. 카게야마에게 잡혔던 넥타이에 주름이 져 있었다. 목이 타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셔도 가시지를 않았다. 귓속에 들렸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재차 떠오르면, 다시 열이 올라 목구멍을 태웠다.

…… 토비오쨩?”

그 까맣고 푸르던 눈동자가, 저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는 착각이 일었다.

 

 

 

 

 

 

Kageyama side

 

 

오이카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그는 그랬다. 무언가를 꾸미고, 나를 놀리고, 장난치고, 자기가 한껏 즐거운 다음에 남겨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서브를 가르쳐달라는 나를 내치고, 혼자 앞으로 나아가고. 졸업식 날 세이죠에 가도 되나요? 라고 물었을 때 그건 토비오쨩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저 혼자 졸업해버리고. 오이카와는 그랬다.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와 마주할 때면 또 어떤 짓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던 손을 멈췄다. 아무도 없을 때 하는 연습은 조용하고 기분이 좋았다. 새벽 기운은 아직 오르지 못한 태양 빛을 가려주어 선선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도 열이 모인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낮게 숨을 내뱉자 폐에 가득했던 뜨거운 열기가 한차례 빠져나갔다. 그래도, 이제 예전과는 다르다. 당하지만은 않을 거니까. 다시 배구공을 들어 올리고, 서브 자세를 취했다. 뭘 꾸미는지는 모른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날, 오이카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결국엔 그런 일이겠지. 날 놀리려는 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석양이 녹아든 웃는 얼굴에, 이상하게 저 안쪽이 욱신거리는 건 카게야마에게 일종의 병이었다. 고질병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사라지질 않는 지독한 병. 서브를 내려치는 맛이 좋지 않았다. 공이 저 바깥쪽으로 빠져 아웃코스로 날아들었다. , 짧게 혀를 차고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었다.

토비오쨩, 솔직하게 말하지? 그의 정해진 순서였다. 먼저 저의 마음을 파헤치고, 무언가 재미난 건 없을까 떠보고. 바보같이 거기에 걸려들어서 저 속까지 드러내 보이면, 오이카와는 그 안을 온통 할퀴는 사람이었다. 여자애들이 자주 말하는, 쇼트케이크에서 딸기만 빼 먹는 얄미운 사람이란 건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 자세한 건 모르지만 비슷한 말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이제 당신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니까. 오이카와는 어차피 저를 놀릴 생각만 가득하니까, 나도 내 맘대로 할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내리치자, 공이 슬쩍 휘어 아웃선 아슬아슬한 곳에 꽂혔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들어 올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어 닦았다. 더워지고 있었다. 체육관의 열린 창문으로 후덥지근한 바람과 습기가 카게야마를 온통 휘어 감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어 올렸다. 반 박자 쉬고, 도움닫기를 하고. 팔을 휘두르면. 한 번 해보자구요,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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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기념 연성 첫번째. 상중하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평소 쓰던 느낌이 아니라 뭔가 어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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