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오이카게 5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 연령반전 소재가 있습니다.

 

 

 

 

이카와 토오루는 씻을 때 물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 그가 씻으러 들어간 뒤 하도 조용해서 욕실에 들어가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 일화를 말하면서 카게야마를 힘껏 놀리는 오이카와가 가끔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저가 실제로 했던 행동이기에 할 말은 없었다. 카게야마와는 거의 반대였다. 오히려 카게야마는 설거지를 할 때나 씻을 때나, 세수할 때에도 물소리를 크게 내는 편이었다. 그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이카와가 씻고 있는 욕실에서는 거의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반면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하는 주방에서는 요란한 물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쉬는 날을 맞추고 이것저것 살 것도 겸해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로 약속한 건 전날 밤이었다. 애초에 내일 뭐 할까?’ 정도로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잠들기 직전에서야 무엇을 할지 정해졌으니, 오이카와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평소대로 로드워크를 가려던 카게야마를 붙잡고 다시 침대로 끌어들인 오이카와 덕분에, 두 사람이 일어난 건 오전 아홉시 남짓. 주린 배를 움켜잡고 아침을 챙겨 먹은 게 열 시 전후. 카게야마가 설거지를 거의 끝마친 지금은 열한 시 경이다. 하루도 로드워크를 빼먹지 않는 카게야마였으니 이렇게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보내는 휴일. 그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날이다.

카게야마는 옆에 있던 수건에 젖은 손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맨발로 바닥을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도 연달아 들렸다. 카게야마는 몸을 돌리고 그가 들어간 방 쪽을 바라봤다. 방문은 닫혀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걸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닦아놓은 식기를 정리하면서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오이카와씨.”

작게 부르면 대답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이렇게 조용했던가?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릇을 전부 정리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방문 앞에 이르러 노크를 해도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오이카와씨. 장 보러 안 가요?”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또 그 패턴인가. 지난날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저번에도 오이카와가 하도 말이 없길래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가 오이카와의 양팔에 붙잡혔었다. ‘오이카와씨!’ 소리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기분 좋은 듯이 웃어넘긴 오이카와는 토비오쨩.’ 연달아 이름을 불렀다.

또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아니, 가능성은 꽤 높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계를 돌아보면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고 카게야마는 문고리를 노려봤다.

오이카와씨.”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바닥을 바라보면 오이카와의 옷가지가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었다. 옷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이카와가 저렇게 늘어놓았다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에 서 있는 그의 몸을 가로지르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그라고 하기에는 어깨가 지나치게 좁고길이도 짧았다. 아직 옷 갈아입는 중인 건가?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 옷가지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씨?!”

그림자를 따라가던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존재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가 걸친 건 오이카와의 하얀색 셔츠뿐이었고, 셔츠로는 가느다랗게 뻗은 하반신을 전부 가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하얀색 셔츠는 작은 오이카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면서 위험한 장면을 그려냈다. 작은 몸통에 작은 머리. 동그란 눈동자를 한 오이카와가 그곳에 서 있었다.

형은 누구세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 목소리조차 제가 기억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와는 어렴풋이 달랐다. 카게야마는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와 동거하는 건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 토오루고, 아침을 함께 먹은 것도 그 오이카와였으며 씻으러 들어간 것도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였다. 틀림없다. 카게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오이카와를 자세히 살펴봤다. 어느 모로 보나 오이카와다. 동시에 오이카와가 아니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천천히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고개를 몇 번 더 갸웃하더니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 그 표정은 오이카와 그대로였다. 이내 작은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무의식중에 부정하고 있던 진실이 객관적인 증거로 드러난 기분이다. 카게야마는 아연실색한 채로 서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그 이름이, 지금. 카게야마가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Baby, It's You!

 

 

 

 

오이카와는 팔과 다리를 몇 번 휘적였다. 하얀색 셔츠를 걸쳤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인다.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지나치게 얇아 카게야마가 강하게 붙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옷은 맞아요?”

!”

오이카와는 얼굴 가득 미소를 피우고 강하게 끄덕였다. 자신의 중학교 1학년 시절 옷이 이 정도로 꼭 맞는다니,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도 그 정도 나잇대인 걸까. 어린 시절 입고 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키타가와 제일중학교 체육복이 이곳에 있는 건 순전히 우연이다. 도쿄로 올라올 때부터 옷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옷장에 있는 옷을 전부 가지고 올라왔더니. 오이카와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는 빨래하는 족족 카게야마의 옷을 버리는 오이카와 때문에촌스럽다가 그 유일한 이유였다옷 정리를 하기보다 있는 옷을 사수하기 바빴다. 그러다 우연히 찾게 된 키타이치 체육복. 이렇게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도 고개를 들고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의 가슴과 허리 사이 정도의 키.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도 이만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고민해 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기억은 오이카와의 뒷모습만 가득하다.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끈질기게 굴던 시절. 그 시절과 그리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그의 서브에 비하면 멀었다. 분한 마음이 들어 카게야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험악한 인상으로 바뀐 카게야마의 얼굴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를 뜨고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형은 누구세요?”

조그마한 입술에서 어린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음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을 조금 길게 늘이고 아무런 의심 없이 묻는 목소리.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무어라 둘러대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저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오이카와에게 자신의 이름을 댄 건 중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이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토비오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와 나 사이에 이름을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름만은 한자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와 어울리는 모양과 뜻. 처음 그 한자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오이카와는 그 이름을 곱씹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작게 읊조렸다. 이윽고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기억보다 작고 앙증맞은 눈동자와 콧방울이 부드러운 빛깔로 빛났다.

그럼 토비오쨩이네!”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를 놀란 눈동자로 바라봤다. 제 기억 속 오이카와와 똑같은 미소였다. 눈꼬리가 완곡하게 휘어지고, 볼살을 부드럽게 접으며 미소 짓는 눈앞의 오이카와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했다.

카게야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의심의 고리를 끊었다. 오이카와구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였다. 몸이 아무리 작아도, 카게야마의 존재를 몰라도.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오이카와씨는, 몇 살이에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손 두 개를 들어 펴 보였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환하다.

열 살!”

열 살. 열 살, 인가. 10열 살……. 카게야마는 문득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스물일곱 살이던 오이카와가 열 살 오이카와가 된 걸까. 무엇 때문에? 씻다가? 물소리를 많이 내지 않고 씻어서? 혹은 무언가 병 같은 걸까. 카게야마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앓고 있는? 그럼 이 세계에 있던 오이카와는 열 살인 오이카와가 있는 곳으로 간 걸까. 아니, 옷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카게야마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걷는 기분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몇 번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생각하기를 그쳤다. 오이카와는 험상궂은 얼굴의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고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묘한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행동을 하는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를 가만히 지켜봤다. 오이카와는 제 배를 문지르다가 거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구슬같이 작은 홍차 빛 눈동자가 이곳저곳에 닿았다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 그런가.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와 함께 살아온 이 집이 익숙하고, 오이카와가 이곳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이질적인 존재는 오직 눈앞의 오이카와 뿐인데, 열 살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것들이구나.

카게야마의 눈길을 느낀 것인지, 오이카와는 두리번거리던 눈동자를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돌렸다. 배시시 미소 짓는 입가에서 하얀 치아가 반짝인다. 카게야마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 순간마다 어린 오이카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색다른 미소가 오이카와를 쏙 닮은 얼굴 위로 겹쳐진 모습은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삼 제 심장이 이상한 박동으로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열 살의 오이카와라 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 유일하게 영원히 좋아할 사람.

아니, 어린애잖아. 열 살! 고개를 있는 힘껏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의아하다는 듯이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코코아 드실래요?”

!”

오이카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으며 볼록 튀어나온 볼이 벚꽃 잎처럼 연한 색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말 한마디마다 반응하고 감정을 얼굴에 바로 드러내는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코코아 좋아해.’ 기분 좋은 듯이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오이카와가 어릴 때는 이랬을까. 열 살이라면 카게야마를 만나기 6년 전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보다 한참 큰 존재였다. 그 등은 곧게 뻗어 흩어지는 빛을 흡수했고 그가 내려치는 서브는 카게야마의 가슴을 파열시켰다. 카게야마에게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펼쳐준 그가 지금, 제 앞에서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코코아 생각에 행복한 웃음을 짓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비밀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가로 내리고 뺨을 붉혔다.

부엌으로 가서 타드릴게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말한 후 앞서 부엌 쪽으로 걸었다. 보폭이 더 작은 오이카와는 급하게 걸어오며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다시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따라 걷고 있다. 어디 갈 땐 어른 손을 잡으라고 배운 걸까. 저도 어릴 적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집 안에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머그컵 두 개에 코코아 가루를 부어 넣는다. 권장량인 테이블 스푼으로 한 스푼보다 조금 더. 평소 카게야마가 먹던 습관 그대로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용으로 산 민트색, 검은색 머그컵은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처음 산 물건이었다. 코코아를 마시지 않는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위해 코코아 가루를 고르고, 커피를 마시지 않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위해 커피 가루를 골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하나하나를 맞추어갔다. 물론 지금은 각자의 입맛을 알고 있어 오이카와가 원하는 커피 가루를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처음에는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토비오쨩. 이거 영어는 읽었어? 분쇄 안 된 커피콩을 사 오면 어떡해!’

커피라고 적혀있는 거 아닙니까? 여기. 오이카와씨가 라인으로 보내준 영어랑 똑같은데.’

이거 말고! 정말이지, 토비오쨩이랑 못 살겠네!’

그렇게 말하던 그와 산지도 이럭저럭 몇 년이 지났다. 그는 처음부터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코코아 가루를 정확하게 사오곤 했지만, 지금은 그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이제는 카게야마가 어떤 때에 어떤 코코아를 원하는지조차 아는 수준이었다.

민트색 머그컵에 코코아 가루를 담는 것은 처음이다. 매번 커피와 코코아를 타는 역할은 카게야마였다지만, 실수로 그의 컵에 코코아를 탄다 해도 컵을 바꿔 먹었으면 먹었지. 오이카와는 커피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고르라면 커피를 마시는 쪽이었다. 그 덕분에 그의 민트색 머그컵에선 항상 미미하게 커피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는 코코아 가루가 담긴 오이카와의 컵을 코에 가까이 가져갔다. 방금 넣은 코코아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기가 겹쳐진다.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커피를 마시며 웃던 오이카와, 입꼬리에 코코아가 묻었다며 손으로 닦아주던 오이카와, 그러다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그대로…….

카게야마는 서둘러 생각을 지우고,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처음 볼 때처럼 눈동자를 크게 뜨고 부엌, 연결된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괜히 사진 같은 게 보이면 작은 오이카와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까? 자기랑 똑 닮은 얼굴의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가 보인다면.

카게야마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급하게 훑었다. 그제서야 카게야마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 찍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집 안에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핸드폰 속 비밀번호를 걸어 둔 토비오폴더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오이카와의 핸드폰과 노트북에는 그조차도 단 몇 장 정도만에만 존재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물이 끓고 있는 전기 포트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는 코코아가 담긴 컵을 들고 몇 번 입김을 불었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컵 위로 올라오던 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톡 튀어나온 입술은 제 기억보다 조그맣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코코아를 마셨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걸까, 카게야마가 몇 모금 마실 동안 오이카와는 연신 입김만 불었다. 카게야마는 가슴이 따뜻한 물에 잠기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오이카와구나.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것도, 입술의 모양도.

오이카와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코코아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멈추지를 않는다. 전부 마시기에는 뜨거웠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배가 고픈 건가? 무언가 만드는 게 좋은 걸까,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카게야마는 애매하게 계속되는 고민을 연상하면서 코코아를 조금씩 마셨다. 닫힌 창문으로 들어오는 건 슬그머니 낮아진 햇빛뿐이다. 코코아 향기와 눈앞의 오이카와그 오이카와가 열 살이라는 점만 빼면 여느 때의 휴일 풍경이었다.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마시던 코코아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목구멍을 움직였다. 뜨거운 액체가 한 번에 지나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는 코코아 액체가 거품처럼 묻어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긴 토비오쨩네 집 맞지?”

……,”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살며시 떨었다.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저 눈빛은 그대로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곳에 있나요?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요?’ 허나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카게야마를 알고 있는 열여섯 살 이후의 오이카와였다면 설명하기 더 쉬웠을 텐데. 어째서 그 이전의 오이카와인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씨는 돌아오나요?묻지 못하는 질문을 입 안에 남은 코코아와 함께 삼켰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카와씨 어머니께서, 오늘 같이 있으라고…… 하셔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오이카와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얘기도 나눴고. ‘토오루랑 사는 거 힘들 테지만 힘내요.’라는 응원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응원인도 받은 적 있고. 카게야마가 거짓말 한 건 오늘밖에 없다. 오이카와가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오늘이라는 기한을 정한 건 온전히 카게야마의 생각이다. 어쩌면, 내일도? 혹은 모레도? 영원히 오이카와는 이 모습으로 있는 걸까? 설마.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카게야마는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오늘이라 말한 건 무의식적이었지만, 그리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오늘이냐 물으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미약하게나마 느꼈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코코아를 마시면서도 카게야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카게야마는 어색한 죄책감 때문에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 오이카와에게 거짓말할 때처럼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오이카와도 더 묻지 않은 채 눈동자를 내렸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다시금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보다는 짧은 머리지만,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처럼 윤기 있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생기 있는 눈동자는 과거의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 역할을 했다. 카게야마보다 키가 작다고는 하나, 분명 또래보다는 큰 키.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는 순간적이나마 카게야마가 아는 몸의 윤곽을 그려냈다. 카게야마가 보지 못했던 어린 오이카와의 형태가 눈앞에서 공기와 햇빛을 반사하며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평생 오이카와와의 2년 터울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보다 어리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그를 내려다보다니. 소파에 앉아있을 때도 카게야마가 내려다보는 게 기분 나빠서 선 채로 잡지를 보던 오이카와가. 언제나 그는 카게야마보다 2년 앞선 곳에 서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저는 오이카와에게 맞붙는 정도까지가 한계였다. 때로 카게야마가 고집을 부려 원하는 바를 성취하더라도, 그 모든 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고집을 끄덕이고’ ‘받아들여 줬기때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간의 관계에서 흔히 주고받는 객관적인 이해는 오이카와와 저 사이에 힘든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감정의 교류서로만이 알 수 있는 배구에 대한 깊은 신념은 느낄 수 있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있다면 오이카와를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뇌 안쪽이 저릿할 정도의 깊은 충족감과 만족감. 다른 무엇으로도 느껴본 적 없던 새롭고 따뜻한 감정은 카게야마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는 등불이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저를 받아주는 오이카와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기고 싶다는 욕심도 불어갔다. 오이카와를 사랑하기에 그의 등을 따라잡고, 오이카와가 제 배구의 구심점이기에 그의 배구를 이기고 싶다. 오이카와에게 그와 같은 욕심을 말했을 때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네 사랑이라면.’ 오이카와는 그리 말했었다. 사랑.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랑은 다소 특이한 형태인 건 아닐까.

카게야마는 혀끝에서 스며드는 코코아의 달콤한 맛을 느꼈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맛. 코코아를 열심히 마시던 오이카와에게로 눈을 돌리면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토비오쨩, 입술에 코코아 묻었어.”

눈꼬리를 접고 웃는 얼굴이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온전히 오이카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앞에서 어린아이답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오이카와 또한 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간지럽다. 몽글몽글한 솜털로 잔뜩 간지럽히고,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강하게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 * *

 

 

코코아를 다 마신 후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카게야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열 살 오이카와가 나타났던 장소였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배구공을 들어 올렸다.

배구공! 토비오쨩도 배구 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공을 내밀었다. 눈이 반짝이며 빛났고, 흥분을 가리지 못한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꾸물거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동자 두 개가 카게야마의 입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들어 올린 건 스물일곱 살 오이카와의 배구공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오늘 자신의 배구공을 사기로 약속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며칠 전 낡아서 버린 탓에 마침 장도 볼 겸 함께 배구공을 사자고 먼저 제안한 건 오이카와였다.

다시 고민의 사슬이 입을 옭아맸다. 배구를 한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까? 눈앞의 오이카와는 6년이 지나면 중학교 1학년이 된 카게야마를 만나게 될 텐데. 설마 지금 스물다섯 살인 나를 만난 탓에 과거가 바뀌는……그런 일이 일어날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오이카와가 전에 어려운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타임…… 어쩌고였나. 아마 과거가 바뀌면 미래에도 영향이 간다는 얘기였던 것 같? 카게야마는 잠시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한계까지 고민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카게야마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배구공을 꼭 끌어안은 오이카와는 조금 발을 굴렀다. 안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오이카와의 기대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든 오이카와는 오이카와다. 스물일곱 살이어도, 열 살이어도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만나는 것이 흐르는 섭리 중 하나라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만나자마자 사랑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단지 조금 일찍 만난 것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 세상이든 어떻게 태어나든 오이카와를 사랑하고 만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과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보다도 느린 움직임이었다.

. 배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공 튀겨 봐도 돼?”

오이카와는 긴장한 눈초리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게야마는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가볍게 대답했다.

.”

고마워!”

힘찬 대답을 내뱉은 오이카와는 공을 들고 방 한가운데에 섰다. 낮게 올리는 오버핸드 토스가 이어졌다. 자세는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다. 공을 주시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 안에 이미 카게야마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오이카와가 토스 연습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진지하고 생생한 얼굴. 고등학교 무렵 시합했던 때와 달리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표정으로 나타났다. 어릴 땐 저런 표정으로, 저런 자세로 배구를 했을까. 저렇게 작은 손가락이 그리도 커져서, 그 손으로 배구공을 감쌀 정도까지. 문득 그가 커가는 과정을 보고 싶다는 묘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조금 더 높이 올려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토스 높이를 낮추려고 조정하던 오이카와는 언뜻 곁눈질로만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괜찮냐고 묻는듯한 눈빛이다.

천장에 부딪혀도 괜찮아요. 윗집에는 한 명만 사는데, 평일도 주말도 새벽 일찍 나가고선 밤 10시 다 되어야 돌아오거든요. 더 올려도 돼요.”

언제는 높고 언제는 낮던 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오이카와는 허리를 곧게 펴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토스 연습을 이어갔다. 카게야마가 말한 대로, 위층에 사는 여성은 휴일에도 새벽같이 나가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걸 알게 된 오이카와는 주말 아침부터 카게야마를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날이 늘었는데……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은 쓸데없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들리는 마찰음, 공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얼굴을 가로 비추는 나른한 온기 등. 카게야마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원하는 포지션, 있나요?”

세터!”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후, 지금껏 묻지 못한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계속 묻고 싶었으나 한 번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질문. 카게야마는 겨우 맞붙은 입술을 떼었다.

, 세터가되고 싶습니까?”

띄엄띄엄 단어를 꺼내면서도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한없이 작아졌다.

그야, 멋있잖아.”

오이카와는 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당연하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걸까,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어떤 스파이커든 그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가 되고 싶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내가 그 팀에 있는 것만으로 팀의 실력이 순식간에 오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신기한 거 같아. 세터는 배구에서 가장 고독한 포지션이면서 동시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포지션이야.”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고 울렸다. 스파이커의 실력을 100% 끌어내는 세터. 팀의 실력을 순식간에 올리는 존재. 카게야마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숙인 채 오이카와를 바라보지 못하고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세터.”

저가 처음으로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상대. 코트에 계속 서 있으려면 끊임없이 이겨야 한다. 그것을 의심한 적은 없다. 이기기 위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연단하는 과정은 당연한오히려 즐겁기까지 한일이었다. 그러던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와 싸우며 처음으로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이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각했다. 그때, 자각한 바로 그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철저하게 졌다.

이후 아오바죠사이를 이기고 전국 대회에 진출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이카와는 저의 시야 너머에 있는 존재였다. 또한 끊임없이 앞서나가며 카게야마에게서 멀어져 가는 극점이기도 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생각은 없다. 카게야마는 배구의 끝없는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의 가치이자 숨결이자 생명이었다. 그 끝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생각은 가끔 한다. 바로 그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스스럼없이 나아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길의 앞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토비오쨩, 뭔가 이상해.”

오이카와는 토스 연습하던 손을 멈추고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 가요?”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했던 말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될 수 있을 거라고 한 말?

마치 내가 이미 그런 세터가 된 걸 보고 온 것 같은 말투야.”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몇 번 더 키득이더니 그저 가만히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투박하게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다시 토스 연습을 시작했다. 통 통, 가볍게 공을 튀기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있던 방, 두 사람이 함께 나날을 보내온 방. 포근한 이불 같은 햇볕이 창문을 통해 방 안을 가로지르며 비췄다. 햇볕이 오이카와의 몸을 감싸고,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노곤한 기운이 이마를 붕대처럼 둘렀다. 오이카와가 들이쉬고 내뱉는 공기가 푸근하다.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우선 그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고 만다. 언제고 그랬다. 카게야마에게 새로 생긴 버릇 같은 성질이었다. 덕분에 함께 나가서 영화를 보면 잠들기 일쑤라 쓴소리 들은 적도 많지만.

깃털처럼 가라앉으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보다 훨씬 키도, 덩치도 작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공을 섬세하게 튀기고 있었다. 열 살. 초등학생인가? 어느 초등학교에 다닐까? 배구부에 들었을까? 어떤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렸을까? 카게야마는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의 과거이자 현재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했다. 저가 모르는 오이카와도, 오이카와가 모르는 카게야마도 분명 존재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를 모르는 오이카와라는 건 제3의 인류처럼 생소한 존재였다.

토비오쨩은 포지션이 뭐야?”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물었다. 대답해도 되는 걸까. 또 잠시 동안의 고민이 나른한 머릿속을 뒤덮쳤다. 카게야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목소리를 흘렸다.

뭐일 것 같으세요?”

세터.”

오이카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카게야마 쪽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로 오이카와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를 눈치챈 오이카와가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푸하하, 자연스레 터져 나온 오이카와의 웃음소리 덕분에 그의 자세가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자세를 고쳐잡고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토비오쨩, 너무 티 나는 걸. 아까 코코아 마실 때 보니까 손톱이 특히 가지런해서, 특별히 관리하는구나 싶었어.”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바라봤다. 손톱이 가지런한 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가 되고 싶은 세터를 말할 때도 별말 없길래. 이와쨩한테 말했더니 그런 건 불가능하지, 바보야라고 했거든. 어떤 스파이커를 만나든 그 사람의 100%를 끌어내는 건 꿈같은 이야기라고.”

맞지?’ 오이카와는 확신에 찬 물음으로 말을 마친 후 미소를 지었다. 스물일곱 살이든 열 살이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대로다. 아마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어떤 포지션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부터 카게야마는 세터라고 어느 정도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것저것을 조합한 후 가장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에 능한 사람이었으니, 어리다고 그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카게야마의 질문으로 더 큰 확신을 얻었을 게 분명하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분한 마음에 인상을 구겼다.

배구를 하고, 세터로서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리고 시합을 지휘한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반면에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 개별로 놓으면 모양이 가지각색이나 완벽하게 맞붙는 퍼즐 조각과도 같다. 배구와 세터, 동시에 연인인 두 사람. 그중 하나라도 성립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함께 있지 못할 것이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연하게 웃으며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흐릿한 겨울날, 눈발 가운데서 살포시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를 부르던 오이카와……. 숨이 차서 목구멍이 파열할 것처럼 더운 여름 날, 물안개 속에서 한숨을 내쉬며 웃던 오이카와.

눈앞의 오이카와는 예전에 봤던지금은 훌쩍 커버린오이카와의 조카를 떠올리게 했다. 열 살? 오이카와는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애초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어떤 이유로 어려졌는지혹은 어린 몸으로 바뀌었는지알지 못한다. 특정한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스물일곱 살의 오이카와가 사라진 거라면?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심장이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찾아온 건 등을 덮는 식은땀과 헐떡임이었다. 가릴 길 없는 생각들이 유선형으로 뻗어나가 가슴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만약 오이카와가 오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카게야마의 시야가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코끝을 누를 뻔한 공을 겨우 붙잡았다. 거의 맞닿은 상태였다. 짧게 마찰한 콧방울이 따끔거렸다.

, 하시는 겁니까! 공 맞을 뻔했잖아요!”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소리가 귓속을 시끄럽게 채웠다. 정작 카게야마에게 공을 던진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손을 디뎠다. 침대에 걸터앉은 카게야마와 그의 몸에 기대선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토비오쨩, 무서운 얼굴 하고 있네.”

오이카와는 늦은 밤 카게야마를 안을 때 보이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깊고 그윽하여 카게야마의 속까지 훑을 것 같은 눈동자. 숨결이 마주 닿는 거리를 두고 카게야마는 가만히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이미 알고 있으며 몇 번이고 마주 봤던 얼굴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눈꺼풀을 내리며 예쁜 빛깔의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섬세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그에 이끌리듯이 뜨거운 눈동자를 감았다. 오이카와의 작은 입술과 카게야마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은 채 떨어졌다. 닿자마자 떨어진 입술에서 감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슷한 간격을 두고 눈을 뜬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오이카와의 볼이 해가 질 때의 하늘처럼 불그스름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과 맞닿았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내가 무언가로 걱정할 때면 누나가 항상 이렇게 해줬거든.”

그렇구나. 오이카와씨의 누나가. 그랬구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화끈거렸다. 시간을 따라 나아가던 태양이 잠시 멈춰 서 두 사람을 오롯이 비췄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몸이 따스한 오후의 온도로 달아올랐다. 세포 속까지 채우는 햇볕이 반짝이는 눈동자 사이에도 속속들이 차올랐다. 오이카와는 기대고 있던 양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카게야마가 들이마시는 숨 속에 오이카와의 향기가 향수처럼 달라붙었다. 익숙한 향기였다.

토비오쨩이 뭘 걱정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괜찮아.”

괜찮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톡톡 다독이듯이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은 거구나.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근거 없는 그의 말이 움직이지 않는 확신의 바위가 되어 중심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카게야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유를 알기 힘든 안도감이었다. 오이카와의 향기를 머금은 한숨을 내보내면 심장 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물에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의 배에서 갑작스레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떼고 마주 보면, 오이카와의 얼굴이 보송보송 물들었다.

미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카게야마는 눈동자의 셔터를 눌렀다. 제 기억 속 그 무엇보다 생소한 표정이다. 신기했다. 이런 표정의 오이카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쑥스러운 듯 발그레한 얼굴로 흘긋거리며 카게야마의 눈치를 살피는 오이카와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다.

카레 좋아하세요?”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삐죽 내밀고 웅얼웅얼 물었다.

 

오이카와와의 첫 데이트하얀 햇살이 아스팔트 도로의 우둘투둘한 면을 하나하나 비추는 날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선글라스를 쓰고 그렇게 물은 그는 언뜻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카게야마는 글쎄요, 운을 뗀 후 잠시 간격을 두었다. ? 오이카와는 재차 물으며 카게야마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바퀴의 민감한 살결로 그의 굳은살을 느끼며, 카게야마는 귀를 붉혔다.

카레 좋아하세요?’

 

그때 물었던 그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와의 첫 데이트, 처음으로 오이카와와 둘이서만 먹었던 카레. 그 시작을 다시금,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이카와와 하고 싶다. 오이카와는 잠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이내 그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 좋아해.”

첫 데이트 때의 오이카와와 같은 대답. 비록 겉모습을 다를지라도, 카게야마는 그가 바로 오이카와임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 *

 

 

배불러!”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만든 카레를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긁어먹었다.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놓은 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카게야마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구공이 침대 근처를 굴러다녔다. 좀 전, 오이카와와 나눴던 짧은 입맞춤을 기억해내고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대 푹신해.”

오이카와는 침대에 누운 후 사지를 쭉 폈다. 이불이 기분 좋은 듯 얼굴을 비비면서 고양이처럼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와 가까운 침대 끝에 앉았다.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졸린 걸까? 가늘고또래 아이보다는긴 팔 끝에는 작은 손이 있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잡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투박하게 내뱉었다.

피곤하면 주무세요.”

으음싫어!”

아이가 떼를 쓸 때처럼 몸을 버둥거리던 오이카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불만이 전부 얼굴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볼을 뭉툭하게 부풀린 얼굴은 못생겨 보일 법도 한데, 왜 이다지도 가지런할까.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좁히곤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토비오쨩도 같이 자.”

왜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카게야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카게야마가 입고 있는 니트에 얼굴을 부비는 모습은 작은 아기 고양이 같았다. 오이카와는 단호한 얼굴로 불뚝 튀어나온 입을 열었다.

아깝잖아. 토비오쨩이랑 하루밖에 같이 못 있는데. 그러니까 같이 자자.”

아깝다고? 카게야마는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후, 가끔 카게야마가 신칸센을 타고 오이카와를 만나러 도쿄로 오던 시절.

갈게요.’

. 잘 가.’

또 올게요.’

.’

이제 곧 차 오니까 가세요.’

갈 거야.’

가라니까요…….’

그런 의미 없는, 그럼에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대화를 나누던 시절처럼그런 기분인 걸까. 그때와 같은 기분인 걸까.

알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결국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도 그를 따라 침대에 몸을 눕혔다.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이 그의 몸을 감쌌다. 평소 오이카와와 밤을 보내는 침대에서 어린 오이카와와 함께 눕는다.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불을 꼭 붙잡았다.

토비오쨩네는 침대네. 우리 집은 바닥인데.”

……그런가요.”

처음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할 무렵 침대를 살지, 이불보를 둘 지로 꽤 오랫동안 둘이 고민했던 적이 있다. 사실 카게야마는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라고 답했지만결국 다다미 방도 아니니 침대를 샀으나 오이카와는 익숙해질 때까지 서툴러 했다. 알고 보니 카게야마가 도쿄로 올라오기 전 2년 동안도 자취방에서 꽤 고생했다고. 항상 저보다 모든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는데, 카게야마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 오이카와에게는 서툰 일이라니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는 잘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카레를 완식한 후의 포만감,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는 큰 창문,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로 눅눅해진 머릿속……. 카게야마의 이마와 눈꺼풀 위에 잠가루가 솔솔 떨어지면서 두껍게 쌓였다. 꾸벅꾸벅 감기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바라보면, 오이카와는 알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토비오쨩은 이상하네.”

? 제가요?”

잠의 바다에 젖어들면서도 울컥한 마음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상한 건 오이카와씨죠.”

뚱한 얼굴로 말하자 오이카와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내가 훨씬 어린데도 존댓말 쓰잖아. 이상한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잠시 숨을 멈춘 후 눈동자를 휘었다. 진한 홍차 빛 눈동자가 새하얀 이불안에서 은은한 빛으로 흔들거렸다. 카게야마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열 살이 된 후에도 여전히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건 카게야마 자신이었다. 카게야마는 얼굴에 열이 모이고 평소보다 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몇 살이어도 카게야마에게는 오이카와 토오루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놓고선 그걸 이제야 말하는 오이카와도 그 다웠다. 키득이는 오이카와에게서 그의 향기가 맑은 물처럼 흘러나왔다. 방안을 비추는 태양과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카게야마에게로 잠이 쏟아졌다.

카레의 향기, 오이카와의 향기, 아련히 풍기는 햇볕의 냄새.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의식이 점차 멀어졌다.

 

잘 자, 토비오쨩. 또 만나고 싶어.

 

언뜻 오이카와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 것 같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그 대신일까, 손을 맞잡은 온기만큼은 유독 강렬하게 남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그의 손은, 기억보다도 따뜻했다.

 

 

* * *

 

 

……비오쨩. 토비오!”

…….”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누군가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두 번 깜빡인 카게야마는 푸른 눈동자를 크게 떴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오이카와가 침대에 앉은 채로 카게야마를 흔들고 있었다. 질색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한숨을 강하게 내쉬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스물일곱 살의 체격 그대로다.

같이 장 보러 가기로 했잖아? 토비오 배구공도 사고. 그래놓고 낮잠 잔 거야?”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흐릿한 머리를 들고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뭐야? 아니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이해하기 힘들단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가만히 지켜봤다.

지금 오후 5시야. 지금이라도 나갈까? 많이 피곤해?”

…….”

카게야마는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옷을 가다듬고 이미 멋들어진 머리를 몇 번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간질간질한 눈을 비볐다. 얇게 잘라놓은 햇빛이 점차 가늘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 앞에 서있는 오이카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 몽롱한 물속에 빠졌던 의식이 뭍으로 나와 활동을 재개했다.

오이카와씨.”

. ? 토비오, 얼른 준비해.”

오이카와씨 맞나요?”

……토비오.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카게야마의 상태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카게야마를 마주 본 그의 눈동자는 다정한 빛을 담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이마에 손도 대보고.

열은 없는데.”

작게 중얼거린 후 그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카게야마는 제 이마에 놓인 오이카와의 큰 손, 저보다아주 약간큰 키와 다부진 신체를 눈으로 따라갔다. 얼굴 윤곽도 성인답게 또렷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당기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불 빨래하면서 함께 넣었던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난다.

돌아왔네요.”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오이카와의 어깨가 움직였다. 카게야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한 건지 그의 목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소리야? 토비오, 어디 아파?”

아니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제 어깨에 고개를 묻은 카게야마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그럼 얼른 일어나. 오이카와씨가 휴일 대낮부터 토비오쨩이랑 낮잠을 자다니, 정말이지. 어떻게 잠든 건지는 기억 안 나는데.”

오이카와는 계속 투덜대면서 카게야마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카게야마는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고 오이카와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오이카와씨는 어릴 때가 훨씬 귀엽네요.”

?”

홍차 빛 눈동자가 여지없이 커졌다. 근거리에서 그의 당황한 얼굴을 접한 카게야마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는 얼굴이다. 오이카와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바꿨다.

오이카와씨는 항상 귀여워. 인상 나쁜 토비오쨩보다 훨씬 귀엽고 예쁘지.”

미소 지은 카게야마의 미간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꾹 눌렀다. 살며시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애초에 언제 내 어릴 때를 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건방지네.”

오이카와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는 점점 아파지는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열 살 오이카와는 솔직하게 웃고 장난치고 훨씬 귀여웠는데. 잠들기 전 미소 짓던 어린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카게야마가 기억하는 건 눈앞의 오이카와였다. 툴툴거리고 카게야마를 어린애 취급하고 항상 선배처럼 구는 오이카와 토오루.

카게야마는 그가 서있는 방 안의 풍경을 돌아봤다. 큰 창문 옆에 선 오이카와, 약한 빛을 흘려보내는 조명이 그의 등을 비추면서 떨어졌다. 몇 가지 가구가 없는 방 안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오이카와가 내뿜는 존재감은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모양이다.

타임 어쩌고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

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카게야마가 의아했는지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목소리가 제 심장의 혈관에 스며드는 걸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오이카와씨가 있구나 싶어서요.”

난 항상 있잖아.”

그렇네요.”

뭐야, 그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카게야마의 볼을 어루만졌다. 갈비뼈 안쪽이 뜨겁고 뻐근하다. 카게야마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 번에 들이마셨다. 오이카와가 있는 집 안, 그의 냄새가 나는 방.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 사망 소재 있습니다.

- 모브가 주인공입니다만 오이카게입니다.

- 글에 나오는 모든 의학 지식은 의학적 사실 및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전등 몇 개는 약한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교체할 때가 된 건지 계속 깜빡였다.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둘러싸인 방은 조금 추웠다. ?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구석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홀대와 수액. C대 병원 로고가 박혀있는 환자복. 병원? 그 외 몇 가지 단서가 이곳이 병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문, 손잡이가 없는 창문 등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라니? 양쪽 손을 들어 보면, 낯선 굳은살과 손금이 보였다. 내 손이 이랬던가? 아주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방 한쪽에 세면대와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미닫이문이 열렸다.

, 일어나셨나요.”

백의를 걸친 남자 의사 2명과 백의를 걸치지 않은 한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 두 명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둘 중 한 명은 키가 크고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썹 숱이 적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음하며 운을 띄웠고 운을 띄울 때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백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수많은 종류의 펜과 펜 라이트 등이 정돈되지 않고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주머니 아래 명찰을 보니 그의 이름은 하야마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의사는 인자한 미소 때문인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살이 두껍게 쌓인 양쪽 볼과 턱 아래는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힘겹게 셔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남성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깊게 우린 홍차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반짝거리며 그 색을 바꾸었고, 곧게 뻗은 큰 키와 몸에 좋게 붙은 근육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의사 두 명과는 거리를 띄우고 미닫이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의사 둘 중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하야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

그의 말을 무시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원치 않게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지, 아닌지 조금 망설였다. 아주 잘생긴 미남미닫이문 옆에 서 있는이 차분한 표정으로, 동시에 꿰뚫을 것처럼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물빛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 짙은 남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 걸친 코트는 끈이 없고 허벅지까지만 내려오는 얇은 재질이었다.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조합이었다.

하야마는 내 무언(無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고 나를 마주 봤다.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였다.

많이 어지럽진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다른 증상은요?”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이라고 답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의 목소리에 더 큰 의문을 느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성인 남성의 목소리라기보다 조금 가볍고, 원한다면 가성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목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야마는 흡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살이 적은 얼굴 전면에 근육이 경련하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힘겨운 듯 금방 미소를 풀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왼쪽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바라봤다. 수액은 크기가 컸고, 무어라 적혀있었지만 앉아있는 상태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야마는 다시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의 안경이 다시 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뇌 이식 수술이요.”

뇌요?”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꼼꼼히 주변부를 만져보자 무언가 수술 자국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뒤통수에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신경 다발의 이식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12중 추돌 자동차 사고였죠. 당신의 몸은 아주,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가슴 아래쪽이 아주 납작하게 구겨져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만은 온전했죠. 뇌가 살아있으니 숨도 쉬고 있었고요. 기흉과 출혈로 호흡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뇌에 영양을 공급한 건 사실이죠.”

하야마는 말을 마칠 때마다 숨을 고르고 안경테를 올렸다. 나는 남성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하야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자 구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1층 혹은 2층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환의 사이로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계절. 날씨. 기억이 날 듯 말 듯 모호했다. 시린 이의 계절. 하늘로 높게 치솟는 연기의 계절. 바람이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들이대는 계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야마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기존에 뇌사로 사망 시 기증을 원한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에요.”

기증, 수술이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 저기.”

부끄럽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증, 수술, 뇌사 등 단어 자체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들어오기 전 봤었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당신은 젊었고, 수술을 서두른다면 뇌 기능이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말 그대로 몸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씨는 머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을정도로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고, 하야마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는 다른 의사 한 명과 남성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저들과의 눈빛 대화를 끝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빛 눈동자의 남성은 이제 살며시 웃고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가 인사와도 같다는 듯이 남자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현재 당신은 기증자인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쓰고 있습니다. 의족이라 말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의미죠. 뇌 이식 수술 기술은 현재 항생제 및 면역억제제만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하야마는 고개를 강하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그는 얇게, 아주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몇 번 뒤적거렸다. 하야마가 서류를 볼 사이 다른 의사 한 명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언어에 문제가 없으신 걸 보니 뇌 기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함 한 번 알려주시겠습니까.”

성함성함이요?”

성함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성함. 이름. , 나의 이름. 난 누구인가. 내가 누구지. 지금 현재,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이 더러운 기생충은, 뭐지. 심장 고동이 거세지면서 더욱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고조되는 박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대를 튀어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남성의 깊은 눈이 하지 말라는 듯 강한 눈동자로 나를 꽉 붙잡았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제 이름, 말이죠.”

. 그렇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의사 한 명이 천천히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던 하야마도 나를 바라봤다. 모두가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걸걸한 사막처럼 모래알갱이가 씹히는 착각도 들었다. 다만 나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이자 입술이었다.

그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지. 무엇이었을까. 낯선 목소리를 가진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입술과 목을 빌려 이름을 빚었다.

스도 하루나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 강하게 소리를 냈다.

 

 

 

 

 

 

 

Lost in Memory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거의 보름 가까이 신세 진 병원 입구를 나서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하늘의 계절이었다. 지금까지 지냈던 15층 병동을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 병동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야마도 만날 일이 없었다. 외래에서는 카노우 교수님을 만날 테니까당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분이 교수님이란 걸 내가 안 것은, 일주일이 지나 그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였다. 두툼한 잠바를 챙겨 입어도 목이나 허리, 발목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겼다. 스도는 얇은 입김을 새어 보내고 다리를 옮겼다. 남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원 수속 끝났어?”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을 한 그는 첫날과 비슷하게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밝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리는 코트는 그의 큰 키와 퍽 잘 어울렸다. 머리 한쪽을 빗어 넘기고 왁스로 고정한 그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났다.

. 방금요.”

첫날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자주 스도의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스도는 그와 대화를 하며 병원 생활을 적적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대부분은 기억과 관련한 상기 훈련이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의사 몇 명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가지였다.

이름은 스도 하루나, 현재 22살로 미야기 현 K 대학교에 재적 중이었다. K대학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도는 학생증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기에, 스도는 일부러 거울을 보진 않았다. 스도는 기억 훈련을 지속한 뒤 그가 여동생이 한 명 있는 4인 가족의 장남이면서, 2년 전 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그 이후 또 이런 끔찍한 사고에 휘말리다니 운도 없다며 스도는 가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대학을 1년 휴학한 뒤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까.”

남성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넓은 어깨는 사진으로 봤던 그의 코트 위 모습보다 더 넓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항상 사진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 눈동자의 빛깔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스도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발음해서일까. 예쁘고 앙증맞게 들리는 그 이름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스도는 그가 없을 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고는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현재 도쿄에 있는 A대 졸업반 4학년이다. 배구로 유명한 A대 안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인 세터로 꽤 유명한 사람인지 병원에서 스포츠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면 배구란에 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실려 있기도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T대 상대로 압도적 센스 자랑

“A대 배구부 공식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역량 분석

 

스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그가 고교 3년 동안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과 어떤 스파이커와도 금방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걸 스도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는 낯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저가 그의 웃는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도는 입술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만 웃은 뒤 기사 끝쪽에 달린 조막만 한 문구를 보았다.

 

뛰어난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 전격 분석 :: 월간 밸리 다음 호 게재 예정!”

 

지금의 스도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기사였다. 해당 홍보 문구가 달린 월간 밸리가 이번 달 잡지이니 월간 밸리 다음 호에 스도가 원하는 기사가 실릴 예정이었다. 스도는 서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도가 다시 잡지를 뒤적이며 오이카와의 기사를 찾는 순간 적당한 세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콩콩 뛰는 심장 때문에 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을 옷차림치고는 지나치게 얇게 차려입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한번 바라보고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찬바람의 꼬리가 잘린 덕분에, 방은 비슷한 정도의 온기를 유지했다. 오이카와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스도의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스도는 목을 가다듬고 오이카와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어 곱게 접고 입김을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정을 거쳤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부모님, 여동생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천애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신경 써 준 걸까. 몸의 주인이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관계를 그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정의했다.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서 이제 성인이 다 된 마당에, 그것도 뇌사 판정을 받고 다른 사람의 뇌가 이식된심지어 기억마저 다른자의 병문안을 오는 게 평범한 걸까. 그것도 도쿄에서 여기, 미야기까지. 스도는 제가 생각하는 평범에 대한 정의에 자신이 없어졌다. 평범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개인별로 다르니, 오이카와에게 그것이 평범이라면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도는 빛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질 나쁜 사람처럼 웃었다.

기증자를 아는 사람이 오는 건 불쾌한가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스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오이카와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스도의 옆에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홀대에 닿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수액 백이 달려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말없이 지켜봤다. 스도를 찾아오는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스도가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이카와 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알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알고 싶었다. 거울을 보면 보이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어쩐지 금세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처럼 우수를 두르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라.”

어차피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그래. 좋아.”

오이카와는 스도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지못한 듯 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도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그러한 행동이, 저가 거울을 일부러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러다가도 스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심산인 듯 스도만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럴 때면 지금 자신의 얼굴혹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는 오이카와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늦게 온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찬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산스럽게 코트를 벗어 정리하고 면회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미안, 이와쨩이랑 얘기하다 보니.”

…….”

스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한 박자 느리게 ,’ 중얼거리더니 스도의 손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 이와쨩이라는 건 내 소꿉친구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괜찮아요.”

스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사과해야 할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것. 스도는 그 점에 있어 오이카와를 이해하고 싶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토비오쨩이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실제로 오이카와는 때때로 스도를 잘못 부르고 나서 빠르게 정정하곤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 스도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구름 없는 하늘이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달력을 봤을 땐 벌써 한 가을이었다. 줄곧 병실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수 없는 스도는 오이카와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가늠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계절 상관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리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스도는 다시 떠올렸다. 하야마는 여느 때처럼 이젠 짜증 날 지경인 운을 떼더니 약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퇴원합시다. 몸에 있던 찰과상, 외상도 다 없어졌고. 기억이 아직 부정확하지만,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 한 명에게 스도씨 내일모레 퇴원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딱히 퇴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스도는 망설여졌다. 퇴원하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 그는 기생충이었다. 스도는 틈이 나는 대로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이전 몸에 대한 기억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이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도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 토비오씨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죠?”

. 맞아.”

카게야마 토비오씨아니,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실래요? 카게야마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오이카와는 창가에서 눈을 옮겨 스도에게 향했다. 그는 스도의 환자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넌 이제 스도 하루나인걸.”

오이카와씨 말씀대로, 전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이카와씨가 듣기엔 웃긴 소리일지 몰라도, 전 카게야마씨를 알고 싶어요. 알고, 기억하고 싶어요.”

스도는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스도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바심이 커졌다. 지금 오이카와를 잡지 않으면, 그가 영영 스도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도의 병실에 찾아올 때도 그저 방문객이었고, 오이카와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도는 그와 영영 타인이었다.

저 내일모레 퇴원합니다.”

다행이네. 축하해.”

그러니까, 퇴원 날 딱 하루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저를 데리고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세요.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좋아.”

그러지 말고, 부탁드려요! ……?”

좋다고. 데려가 줄게. 단 하루 동안.”

오이카와는 어느새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도중이었다. 스도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심산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빨리 승낙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어안이 빠진 표정에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작게 퇴원 축하해중얼거린 후 밤색 코트를 날리며 나갔다. 스도는 그 뒤로 이틀 내내 오이카와가 데리고 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틀이 지난 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앞에 나오자, 오이카와가 약속대로 서 있었다.

약속 지켰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그는 어쩐지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도는 잡지에서 말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의 다양한 매력에 대해 떠올리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 사이에서 모델처럼 웃다가도, 여름 한 철의 햇빛이 어울리는 소년처럼 웃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스도를 데리고 간 곳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이었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봄고 지역 예선 결승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스도는 어쩌면 난생처음 올지도 모르는 지역 체육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이카와가 놓고 간다한마디 한 뒤에야 체육관 실내로 들어갔다.

TV 같은 곳에서 비춰주는 코트 사이드가 아니라, 한쪽 코트 뒤에 앉자 색다른 시야가 보였다. 스도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스코어는 2 1. N 고교가 이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밀집해서 앉은 곳에서는 응원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호루라기 소리와 선수들이 소리치는 소리, 그 외에 운동화 밑창과 바닥이 마찰하여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도는 체육관 내부에 응집한 공기가 답답했다. 답답한 심장을 죄이는 건 떨림이었다. 스도는 제 쪽에 보이는 N 고교 선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선수들은 모두 공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로 동료와 눈 맞춤을 하고, 감독과도 손가락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인 만큼 좌석은 드문드문 비어있을 뿐 그 외에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스도의 바로 뒤에서도 남자 두 명이 현 상황에 대해 중계를 하고 있었다. 스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터, 리베로, 미들 블로커, 스파이커코트에서 보니 좀 더 잘 알겠네요.”

…….”

오이카와는 스도와 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갑작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몰래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저를, 오이카와는 분명 꿰뚫어 본 것이리라. 스도는 괜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입을 다시금 열었다.

오이카와씨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포츠 잡지나 월간 밸리 같은 걸 병원에서 봤어요. 초보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속공이 성공해서 선수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장면이 보였다. 눈을 굴려 세터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도는 속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저런 역할을 하는구나. 공을 올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누구나 세터에게 공을 보낸다. 중요한 역이구나. 스도는 잡지 어딘가에서 본 코트 위의 지휘자라는 문구를 기억했다. 굉장한 기교를 부리거나 엄청난 음색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가 있음으로써 코트는 새롭게 태어난다. 공을 올리는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시합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스도의 손끝이 간지럽고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분명 배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손끝을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겠지. 스도는 뛰어 내려가 코트 안에 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심한 편두통이 신경을 좀먹었다. 이게 바로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거겠지. 스도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봤다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토비오도 세터였어.”

.”

짜증 나는 천재였지.”

오이카와는 이가 보이게 미소 지었다. 호전적인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댔다. 스도는 저가 병원 간호사에게 졸라서 얻어낸 월간 밸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이름은 월간 밸리 곳곳에 등장했다. 특히 오이카와가 적혀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뛰어난 세터이자 고향이 같은 중학교 선후배 두 사람에 대한 드라마는 흔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유일하다시피 한 월간 밸리 인터뷰는 스도가 가장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식 실업팀 선수도 아니고, 대학 배구팀 선수에게 그런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질문에 아주 간결한 단답으로 응한 카게야마도 대단하다 싶었다. 분명 고집이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많은 분이 원하셨는데요. 카게야마 선수에게 오이카와 선수란?

카게야마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한번 이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배구에서도 저번 시합 때 이겼던 걸로 알고 있고요.

카게야마 항상 저보다 저 앞을 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그 등을 잡을 때면 이기고, 놓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오이카와씨의 등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구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이카와 두 명 모두 이후의 인생이 더 촉망받는 인물이었겠지. 스도는 카게야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가 고집이 세고 목표 의식도 있으며 심지어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에는 매번 제 머리를 이파리 따듯이 똑 떼서 그날의 사고 현장에 도로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폐가 저를 거부하듯 숨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스도는 기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사진으로 보는 카게야마는 거울로 보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든 토비오쨩은 스도한테 몸을 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걸까요.”

오이카와의 어조는 상냥하면서도 냉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N 고의 세터를 쳐다봤다. 시합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2 2, 마지막 세트를 앞둔 상태였다. N고 세터는 몸을 풀며 동료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N고 세터가 한 번 빙긋 웃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

, .”

스도도 몸을 일으켰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는 말로 하지는 않아도 금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스도는 다만 그걸 느끼곤 했다. 카게야마라면 그 이유를 알았을까. 스도가 묻지 못하는 질문이 한두 방울씩 모여 마음속에서 이미 샘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음으로 스도를 데려간 곳은 센다이 기차역仙台駅이었다. 센다이역 내부로 들어갈 때 스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차로 가야 하는 곳인가요?”

걸어갈 수 있으면 기차역으로 데려오지 않아.”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스도는 멋쩍게 대답한 뒤 오이카와의 뒤를 마냥 따라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미야기 출신이나 대학은 도쿄에 재적 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12중 추돌 사고는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겪은 일이었다. , 도쿄역에 가려는 건가. 스도는 제 나름대로 답을 도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이카와가 건넨 기차표는 스도의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을 뿐이었다.

 

미야기현宮城県 센다이역에서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데라역山寺駅까지, 다이토大東산을 지나 약 한 시간 삼십 분. 스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에 탑승한 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도쿄역이 아닌 건 스도에게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데라에 카게야마 토비오와 관련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기차표를 건넨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도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오이카와가 그의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센다이시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아무런 제약 없이 높이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마주 앉아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도 마주 앉은 승객이 보였는데, 승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스도는 그 승객 중 한 명이 N 고의 리베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연달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배구 경기가 떠올랐다. 세터의 움직임과 공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스도는 하나하나를 꼼꼼히 떠올렸다.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창밖을 보다가 곁눈질로만 스도를 마주 봤다.

, 배구는 잘 모르지만.”

스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세터보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하는 건 스도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었다.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스도는 배구 초보자에 불과할 텐데저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우습게 여길 게 분명했다. 스도는 양 귀 끝이 보얀 온기를 띠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스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도는 내가 배구하는 걸 본 적이 있어?”

, 아뇨.”

그렇지?”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감정이 그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배구를 가볍게 논한 건 스도의 잘못이었다. 스도는 잡지에서 얻은 그의 지식으로 감히 카게야마인 것처럼그를 평가한 게 부끄러웠다. 스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지 않자,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위로라도 건네듯 부드럽게 말했다.

토비오쨩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네.”

카게야마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말한 대로야. 짜증 나는 천재.”

엄청 똑똑했나 봐요.”

오히려 반대야. 너무 멍청해서 힘들었다니까.”

스도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는 것에 왠지 모를 짜증이 일었다. 거울로 본 카게야마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족함 없는 얼굴이었고신분증 너머로 본 자신의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렸다오이카와가 표현하는 만큼 멍청해보이진 않았다. 스도가 짜증이 난 듯 눈가를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니야?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보다 멍청한 건 다 알고 있네요.”

말을 마치고 스도보다 더 놀란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스도의 눈을 피한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속으로 있는 힘껏 후회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의 억양, 어조 등 전부 스도에게 어색했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토비오쨩으로 잠시나마 착각이라 해도 된다면한 게 분명했다. 스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스도는 만약 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뭐가?”

토비오쨩이라 부르셔도요. 오이카와씨에게는 토비오쨩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이카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확고하게 선을 그어 놓았던 토비오쨩스도의 경계가 아주 잠시라도 허물어졌던 건 그의 실수였다. 또한 그 실수가 단지 순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님을 그도 스도도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스도.”

오이카와는 긴 공백 끝에 답했지만 스도는 그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나온다면 스도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도는 다만 작게 입을 내밀고 괜찮은데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행동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스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 두 명을 보다가, 그들이 내린 뒤에는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창가와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등성이 보였다. 다음 역인 야마데라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가을 후반부로 접어든 산은 붉고 노란, 때로는 주홍빛의 군집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스도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오른쪽 눈동자 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도는 이 풍경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여행잡지 어딘가에서였겠지. 본인이 한가롭게 여행 잡지나 들춰 볼 만큼 여유로운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산등성 사이의 움푹한 곳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냇물은 햇빛을 받아 시린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은 스도에게 어색했다. 마치 뒤바뀌듯 카게야마 토비오의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스도는 그 사실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눈으로 새하얀 하늘과 구름 안개가 드리운 산, 날 선 냇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오이카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스도에게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먼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스도 또한 그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스도는 입고 있는 잠바를 여몄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웃었다.

추워? 나약하네.”

오이카와씨야말로 코가 빨간데요.”

난 원래 코가 빨개.”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코를 한번 훌쩍였다. 얇은 셔츠에 코트 차림이니 추울 게 분명했다. 산에 올 거였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스도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기차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높게 굽이진 산길과 그 사이사이의 절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절도 언뜻 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꼭대기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춥다고는 하지만 이 계절에 눈이라니 농담이 심했다.

갈까.”

가다뇨?”

저곳. 토비오와 간 적이 있어. 야마데라山寺.”

그 이름 그대로, 산속에 이어지는 절이었다. 오이카와는 놀리듯이 정상까지는 1,000개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야 해. 스도, 괜찮겠어?’ 물었고 스도는 대답 없이 입을 내밀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알 수 없었다. 운동선수이니 그럭저럭 갖춰져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몸이 저를 잘 이끌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계단을 앞서 걷기 시작한 건 오이카와였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행이었지만 1,000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스도는 오르는 중간중간 자신이 올라온 길을 뒤 돌아봤다. 흰 눈덩이가 얼룩처럼 검은 산 주변에 퍼져 있었다. 스도와 오이카와가 내렸던 기차역이 이슬만큼 작게 보였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경련했다. 확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동자는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도는 다시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전 카게야마씨와 뒤바뀐 사람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사잇길로 난 절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직 산 정상의 사원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찬 공기가 온몸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왔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에는 코트가 잘 어울렸다.

제가 생기고 카게야마씨가 사라졌으니까요.”

…….”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오이카와씨 외에 다른 사람이 절 본다면 절 카게야마씨로 볼까요, 스도로 볼까요? 겉모습은 카게야마씨잖아요.”

넌 스도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스도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눈을 닦아놓은 돌계단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한심한데도 닦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카게야마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스도는 지금 느끼는 저의 감정이 맞는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맞든 맞지 않든, 그건 분명 스도의 심장을 쪼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정상에 놓인 정자에는 네모난 상자를 두르듯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마를 가를듯한 추위였다. 오이카와는 죽는소리를 내뱉더니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값비싼 코트가 나무 의자에서 튀어나온 조각에 헤집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도는 깊게 심호흡했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 테두리에 몸을 붙이고 숨을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 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바람 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눈은 이세계(異世界)의 물질 같았다. 산등성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콰 코, 눈 중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스도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선 그는 건조한 시야 안에서 눈처럼 투명했다.

토비오쨩이랑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오이카와씨도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웬 건방진 소리야?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스도의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스도는 말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현하고 산등성을 다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스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스도.”

.”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오이카와는 애원하듯이, 동시에 마치 이뤄지지 않을 걸 부탁하듯이 말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배구를 하라는 부탁은 스도이기에 하는 부탁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스도 하루나이기에. 문득, 스도는 산 사이에 걸친 투명한 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매번 스도를 조용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는 어떤 관계예요?”

중학교 선후배 사이.”

오이카와는 금방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다시 묻냐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이 하얀 입김에 뒤덮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입김은 그 자리에서 녹았다.

아뇨, 그거 말고요.”

스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스도의 눈동자와 겹쳤다. 그의 눈을 빛내고 있는 홍차 빛 눈동자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비추고 있었다. 스도는 바로 그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책에 적힌 문구를 읽듯이 스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가 거울에서 봤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조용했던 눈동자, 저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던 푸른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담기면지독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채색됐다.

 

 

 

 

 

 

미야기 역에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하늘 한쪽에 걸린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푸른색부터 보라색까지의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하늘에 펼쳐졌다. 오이카와는 기차역에서 나와 스도를 마주 보았다. 그는 조금 서툴게 웃었다.

조심히 가.”

스도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스도와 했던 약속을 지킨 그는 두 번 다시 스도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만날 수 있죠?”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스도예요, 아니면 카게야마씨예요?”

오이카와는 안타깝게 웃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이 그의 머리에 닿아 묘한 빛을 자아냈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조금 매만졌다.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가 결국 스도를 마주 봤다. 그는 마치 하야마처럼 운을 뗐다.

짓궂네. 토비오쨩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씨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오이카와씨도 그걸 알고 있고요.”

……갈게.”

오이카와는 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실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봤던 그의 등이었다. 스도는 오렌지빛에 휩싸여 가는 그의 등을 보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어깨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오이카와가 멀어질수록 오렌지빛, 주홍빛 하늘이 번져 땅을 덮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퍼지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못 본 건가. 눈을 한두 번 비비다가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그러지는 차들. 치솟는 불꽃.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살코기가 타는 냄새. 어그러진 모습으로 자동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귀 양옆에서 울려 퍼지면서 스도를 덮쳤다.

아악!”

스도는 그 자리에서 고꾸러졌다. 앞으로 주저앉은 스도는 심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 머리가 아팠다. 심한 통증과 구역질이 위를 덮쳤다. 토하고 싶은데 창자를 한 꺼풀씩 칼로 벗겨내는 것 같은 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강한 빛과 함께 장면 장면이 튀어나왔다. 스도의 피에 젖은 신분증. 오토바이 아래에 깔아뭉개진 청년의 모습. 청년이 쓰고 있던 헬멧 사이로 검붉은 빛 피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와 다리를 적시는 장면. 다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다리의 근육? 하얀, 흩어진 살점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것은? 뇌가 갈고리에 채인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며 스도는 의식을 끊었다.

 

 

 

 

 

 

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몸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하얀 공간이었다. 저 앞에 오이카와가 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얇게 입은 옷차림. 곧 죽어도 멋 부릴 것 같은 그는 여전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카와 주변으로 새하얀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옆을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앞의 사람만 보고 있었다.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쳤고, 저 앞에는 다른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홍차 빛 눈동자에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번의 그는 말이 없었다. 넓은 어깨가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쳐져 있기도 했다. 걸어갈 때마다 오이카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흰 공간 속의 그는 하얗고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걷던 중 천장혹은 하늘이라고 해야 옳을까에서 작은 솜 덩어리가 눈처럼 떨어졌다. 솜사탕을 일부 뜯은 것처럼 엉성한 솜 덩어리는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 솜 덩어리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의 몸에 닿아 녹았다. 그 순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걸어가며 솜 덩어리 하나가 몸에 닿아 녹을 때마다, 하나씩.

웃지 말고.’

오이카와가 서투르게 웃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양팔을 폈다. 팔에 닿아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오이카와가 서서히 명확해졌다. 멈췄던 기억의 시냇물이 소리 없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담갔다.

 

전 오이카와씨를 좋아하는데요.

「…알아.

오이카와씨는요?

글쎄.

「…그렇게 대답하는 거 반칙이에요.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말을 안 하시잖아요.

「…토비오.

 

배구, 계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엇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해.

 

그럼 오이카와씨를 만날 수 있나요?

 

 

 

 

 

 

나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백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셨나요. 괜찮으세요?”

그의 왼쪽 가슴에 명찰이 달려서 흔들거렸다. 하야마라는 이름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펜 라이트를 들어, 내 눈 양쪽을 번갈아가며 비췄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펜 라이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몸 이곳저곳이 아파서 몇 번 뒤척이다가 일으켰다. 방은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에는 C대 병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병원? 왜 병원에? 고개를 갸웃하자 햐아마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서류를 앞뒤로 뒤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가 귀 뒤로 빗어 넘기려는 옆머리가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이에요. 길가에 쓰러졌던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또 기억에 변화가 있으셨나요?”

쓰러졌다고요?”

.”

자동차, 사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함,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안경을 올렸으나 금세 다시 내려갔다. 그는 내가 말하기 전 적어도 열 번은 안경을 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요.”

……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야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종의 발작까지 일어날 것 같은 격양된 움직임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기억? 돌아왔냐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야마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더니 의자에 다시 천천히 앉았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열심인 것 같았다. 낮게 읊조리듯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보이거나, 무언가 환청이 들리거나 하진 않죠? 몸에 변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물감이라든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등

없는 것 같은데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야마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보았다. 숱이 적은 눈썹 아래로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해리성 기억 장애였습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게야마의 입을 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과거나 자기 신분 및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기억장애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의 행세를 하고, 본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중에는 새로운 이름, 직장, 주소 등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요.”

정체성?”

보통 자연적으로 회복합니다만, 기억장애 기간의 일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는 카게야마씨가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리성 둔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스도 하루나라는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가족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도 하루나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물론 그렇죠. 원래 그렇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그러니까, 그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게야마씨는

 

 

끔찍한 사고였다. 카게야마가 통증을 이기고 눈을 뜨자 주변은 불바다와 같았다. 치솟아 오르는 불길, 무언가 타는 냄새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이 귀를 메우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불꽃, 불길이 입을 벌려 차와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어지럽고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야를 둘러보았다. 몇 걸음 앞에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 한 대와 차 한 대에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의 헬멧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카게야마에게까지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는 기어코 구토하고 말았다. 그가 쓰러진 옆으로 피에 젖은 지갑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지갑에 손을 댔는지 카게야마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누군가를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지갑을 열고, 그의 신분증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는 여성과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 작은 여자아이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가족사진이었다. 신분증에는 사진 속 청년이 남성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미야기 현 소재 K 대학교 학생증. , , 하루, 카게야마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문득, 다리로 시선이 향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욱 심해져 절단된 것 같이 타는 통증이 번졌다. 검은 피칠이 된 다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본 다리 주변에는 타고 있는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살점? 벌려진 다리, 뿌연 시야 안에서 헤쳐진 저의 다리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쇠로 만든 종으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머물렀고,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울 것만 같은, 울고 싶은 감정의 불꽃이 심장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병원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씨는 그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도 하루나의 행세요?”

. 자신은 스도 하루나인데, 도대체 왜 자기를 자꾸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부르냐며. 몇 번 과격한 행동도 보였죠. 불안한 심리에서 표현된 행동화(Acting-Out)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타국에 계신 카게야마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격으로 온 오이카와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오이카와씨가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움직였다. 하야마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의 말에 따라 저희는 뇌 이식 수술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쳐서 당신이 스도 하루나처럼 느끼게 만들었죠. 강제로 현실을 들이대는 방법이 성공하리라는 법도 없고, 더 강한 충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다리는 정상이었고 스도 하루나로서의 당신이 회복할수록 다리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신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점뿐이었죠.”

다리. 카게야마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멍을 포함해 아직 피부가 완전히 수복된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하면 매끈한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야마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서류에 무언가 적어나갔다.

퇴원 후 오이카와씨와 외출을 한 당신은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무언가 더 궁금한 건 있나요? 기억에 혼란이 있거나 한 점은요? 기억장애 기간의 기억이 없는 건 정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야마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눈을 있는 힘껏 구기면서까지 웃는 게 정말 기뻐 보였다.

정상, 이라고요?”

카게야마는 따끔거리는 머리 한쪽을 짚었다. 단풍나무 위에 포개져 있던 눈 더미, 골목마다 숨어있던 절과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 조각 조각나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기억해내려 하면 오이카와의 안타까운 미소만 떠올라서 이어지는 조각들을 맞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씨는요?”

하야마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어요.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하야마가 주의를 주었으나 카게야마는 두 다리를 딛고 다시금 일어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외투를 걸치고 카게야마는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어서 가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자꾸만 재촉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웠으나 카게야마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야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씨?”

가야 해요.”

어딜 가시게요? 아직 안 돼요. 인지 사고 검사를 하셔야죠. 어지러우실 텐데.”

가봐야 해요. 오이카와씨를 만나야,”

카게야마씨!”

하야마가 막으려고 했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카게야마는 그저 달렸다. 마침 눈앞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뛰듯이 몸을 구겨 넣고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저 열리기 전에 뛰었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몇 번이고 본 오이카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환의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몸을 바람이 거칠게 덮쳤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절대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한 가닥씩 몸을 휘어 감았다.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데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씨!”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때렸다. 하이얀 솜 덩어리가 한두 개씩 흩날렸다. 어머, 이 시기에 눈?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말을 나누며 하늘 사진을 찍었다. 꿈에서와 달리 회색빛깔 하늘에서 찢긴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눈이 닿아 녹아도,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향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만날 수 없을 거야.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소리치고 싶은 입술이 은색 한숨만 연신 내뿜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엷게 웃음 짓던 그는 드물게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와 겹치고, 그의 손이 카게야마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배구를 하면 만날 수 있어.”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울기보다 미소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배어 나오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 사랑은 배구니까.”

 

 

 

 

 

 

 

 

 

- 해리성 둔주는 실존하는 기억장애입니다만 글 안에서의 내용은 픽션입니다.

- 해리성 둔주의 개념을 참고한 문헌 :

양 수 외(2013). 정신건강간호학. 서울, 현문사.

  * 월간 오이카게 3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내일, 오늘

 

 

  




 

좋아해요. 저와 사귀어주세요.”

미안,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오이카와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난감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웃으면,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욱 형용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놓은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그런가요……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미안해.”

 

오이카와는 이어지는 질문이 불편했다. 말을 마치지 못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화제가 지겨웠고, ‘미안해다시 한 번 천천히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렸다. 연습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닦은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는 것만큼 익숙하고 정해진 일이었다. 고백을 받는 일. 타인의 호의를 구체화한 언어로 전달받는 일. 다른 점은 오이카와의 대답뿐이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교정 뒤뜰 길 주변에는 버려진 쓰레기가 몇몇 개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거의 먹지도 않고 버려진 빵 부스러기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쁘게 포장되어 전달된 호의를 살짝 맛보고 길바닥에 버린 꼴이었다. 버려진 사랑을 쓰레기라고 명명하는 건 오이카와 본인도 지나치다고 느꼈으나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오이카와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까.

춘추복 안쪽으로 바람이 서늘하게 치고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쓰레기 몇 개가 나뒹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이카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자친구를 좋아하세요?”

 

점심시간 도중이었다. 며칠 찬바람만 불다가 유달리 따뜻한 날이었고, 오이카와는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가던 길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우유를 먹고 있던 카게야마를 만나, ‘우유만 먹는다고 키 안 큰다?’ 장난기 섞인 인사를 건넨 뒤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했다. 카게야마는 우유를 쪽 빨더니, 쪼그라든 우유 팩을 들고 물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냐고? 당연하지오이카와의 입이 뻐끔거리는 걸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보고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도 아니었고, 오이카와의 대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금붕어처럼 몇 번 움직이던 입술을 닫았고, 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만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결국 그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다시 돌려준 후, 며칠 안 가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것까지 기억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 날과 비슷하게 따뜻한 날이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뜻했으나 동시에 몇몇 곳을 따갑게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고, 체육복을 입고 있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연습에 늦어 뛰어가고 있던 건지 짧은 앞머리 사이로 이슬같이 투명한 땀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도 지금 가세요?”

토비오쨩이야말로 1학년이 이렇게 늦게 가도 되는 거야? 더 일찍 가서 공 닦고 체육관 청소하고 있지는 못하고.”

종례가, 늦게 끝나서.”

 

목을 움츠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게야마를 지나친 후, 오이카와는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작은 발을 힘차게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에서 기대를 품은 듯 상기된 목소리가 흘렀다.

 

오이카와 선배,”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이어질 말이 나오기 전에 일부러 심술 맞은 투로 말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샐쭉 내밀었다. 항상 하고 싶은 말혹은 하지 못한 말의 반 이상을 담고 있는 건 카게야마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할 거야. 해도 토비오쨩한테는 안 알려줘.”

괜찮아요. 옆에서 보기만 할게요.”

 

오이카와가 서브 연습을 한다는 말에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몇 마디 말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릴 때 오이카와가 몇 번 향했던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햇빛을 등지고 음영 진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그 입술에 대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는 사이 또 오이카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가 저를 말없이 바라보는 건 그런 표시였다. 카게야마는 지금껏 다른 이가 내비치는 그러한 표시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달랐다. 되도록 오이카와는 웃어주길 바랐다. 체육관 안의 불빛도, 햇빛도 전부 흡수해 밝게 빛나는 그의 미소를 카게야마는 예쁘다고 느끼곤 했다. 그 미소가 저에게만 향하지 않는 걸 안 뒤로, 그는 어쩌면 카게야마를 타인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말과 표정에 집중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그의 어떤 말에 기분이 상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일방적인 불쾌에 맞부딪쳤다. 카게야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저 재촉하듯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 선배!”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등에 대고.

 

 

* * *

 

 

 

예정된 연습 시합이 곧이었다. 평소의 리시브, 서브 연습에 더해 부내 모의 시합도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연습 사이의 짤막한 휴식시간이었고, 오이카와는 선 채로 땀을 닦고 있었다. 같은 스타팅 멤버인 K가 놀리듯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 쟤 또 왔다.”

 

K가 고개를 까딱이는 곳으로 오이카와도 눈길을 돌렸다. 며칠 전 고백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체육관 창문 너머로 연습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와 보얀 얼굴이 약간 붉었다. 오이카와는 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손에 빤히 잡힐 듯 보이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 감정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건, 오이카와가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불만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긴 후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3학년에서 나름 귀엽다고 소문난 애잖아? 여자친구 있는데도 좋대?”

 

또 다른 동료인 A가 물을 마시다 말고 K와 오이카와의 근처로 왔다. AK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아직도 몰랐냐,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1학년 신입생이랑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진짜? 오래갈 줄 알았더니.”

 

오이카와가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실 동안 AK는 오이카와의 지난 여자 친구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그 모든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었고, 오이카와는 창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를 주시했다. 예쁜 미인상이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검고 긴 머리카락, 뽀얗고 하얀 피부. 굳이 말하면 오이카와의 취향이었고, 그녀가 고백하며 건넸던 쿠키는 맛있어 보였고받지도 않고 물렀지만좋았지만. 어째서일까.

오이카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이 다시 시작된다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머리에 붙은 땀을 덜어내며 생각했다. 왜 저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자신은 있다. 어릴 적부터 시선을 끌었던 얼굴에 그 어느 것도 대충 하지 않는 성격, 오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좋은 인상에 대한 자신. 거기에 배구까지 잘하니, 인기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좋아한다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금세 허물어질 정도로 옅은 인상에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 여자아이와 사귀면 즐거웠고, 재밌기도 했고, 그 아이들이 베푸는 사랑에 오이카와는 뿌듯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즐겁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들이 주는 사랑을 즐겼고, 그 사랑이 쉽게 떠나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본디 무의식 아래에서 사람에게 영원한 건 없었다. 카게야마의 한 마디가 있기 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연애는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묻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거짓말이 싫었고,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그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었고, 거절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아이들을 떠올리며 저가 그들을 좋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 그만! 오이카와씨 이제 배구에만 집중할 거니까! 너희도 진지하게 연습하라고?”

이제 와서 오이카와가 그런 말을 해봤자

그치?”

너무하잖아!”

 

AK의 장난 섞인 웃음에 오이카와는 우는 시늉을 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연습으로 다시 능숙하게 이끌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 그에 맞춰 행동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하면 인간관계는 능사였다. 오이카와는 연애를 할 무렵, 저가 친구들과 여자친구를 다른 존재로 대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점이 없었다.

 

 

* * *

 

 

오이카와가 연습을 하려고 공 하나를 들었을 때였다. 카게야마가 아기 병아리처럼 쪼르르 달려와 오이카와의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빛내며 서 있는 모습이 아기 새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못 본 척 공에 집중했다.

 

오이카와 선배.”

, .”

 

이어질 말은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지겹게 반복될 실랑이에 벌써 지친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작은 동물을 내쫓을 때처럼 쉿, 쉿 잇사이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카게야마는 불만을 양 볼에 가득 물고 부풀렸다.

 

그런 행동 하면 고양이한테 미움받는대요.”

잘됐네. 토비오쨩이라는 성가신 고양이한테 미움받으면 참 좋겠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로서는 드물게 큰 의사 표현이었다.

 

아뇨, 저 말고 고양이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저리 가라니까. 오이카와씨 이제 연습해야 돼. 연습 방해하면 나쁜 어린이지요?”

 

아이를 타이르듯 어르는 목소리로 대화를 끝맺은 후 오이카와는 손에 들린 공을 한 번 돌렸다. 카게야마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선배 몇몇의 화두에 오른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시선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 선배. 쳐다보고 있는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공에 이마를 맞대었다. 항상 서브 전에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서브 준비 자세에 들어가면 카게야마는 보통 숨을 죽이고 그 존재를 지우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그녀와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살짝 홍차 빛 눈동자를 들어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 연습에 방해돼?”

그런 건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앞머리가 흔들렸고,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체육관 조명과는 상관없이 빛나면서 오이카와를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친구 안 하시나요?”

 

오이카와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가 깊은 의미 없이 말했다는 것은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저를 몰아가는 착각이 일었다.

 

글쎄. 지금은 아니어도, 마음이 바뀌어서 사귈 지도.”

마음이 바뀌나요?”

당연하지. 바뀌지 않는 마음이란 없어.”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공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이마에 대었던 공을 떼어내고,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돌렸다. 착잡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배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안 바뀌는걸요.”

 

카게야마는 알 수 없다는 듯 고민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가 쪽으로 올린 뒤, 머릿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한 번 흘겨본 뒤 그에게로 다가갔다. 줄어드는 거리에 비례하며 점점 커지는 오이카와의 신체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움츠렸다.

 

그건 다르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쉽게 바뀌니까. 방해 그만하고 안 가면 토비오쨩 괴롭힌다?”

, 서브 가르쳐 주세요.”

카게야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오이카와 선배 방해 그만하라고.”

오이카와 선배, 죄송합니다.”

 

오이카와의 눈빛이 다른 빛깔로 바뀐 걸 눈치챈 킨다이치와 쿠니미 두 사람이 카게야마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카게야마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했으나 두 사람은 팔을 놓지 않았다. 두 명보다 키가 작은 카게야마의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지겨운 찰거머리야. 오이카와는 속 언저리에서 솔솔 풍겨오는 짜증에 입술을 씹었다. 공을 들어 올렸다. 체육관 조명이 전부 공 한 점에 모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이란 쉽게 허물어진다. 금세 빛을 잃는다. 잘 만들어진 타르트가 바닥에 떨어지면 한순간에 모양이 망가지듯이, 사랑이란 그러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화학작용이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활처럼 굽혔다가, 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손바닥에 전달된 충격이 전기와도 같았다. 팔 전체가 후들거리며 끝에 이어지는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작년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헤어진 이후 다른 남자와 함께 복도를 걷다가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자신감, 충족감. 오이카와는 그가 누구를 사귀든, 어떻게 지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렇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와 사귀기 전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옳았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는 없어지기 마련이고,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좋아하고 사랑해줄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사랑은 그중에서도 달콤함이 제일 짧았다. 이와이즈미와 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기에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는 관계였고, 그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영원하지 않은 관계일지라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이즈미와의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별로, 사랑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저가 조금은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모든 걸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고, 그런 확신이 들어 관계의 온전한 만족을 포기 하고 마는 저 자신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번 리시브 연습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연습은 종료될 예정이었다. 오이카와는 익은 토마토 빛으로 물드는 창가를 보면서, 그 여자아이가 아직도 서 있는 걸 바라봤다. 노을과 같이 붉은 볼이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곱게 빗어놓았던 머리카락 끝부분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잠시 울고 온 걸까, 눈동자가 붉었다. 혹은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는 그녀가 안타까웠고, 달려가 울고 있는 그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뿌리가 사랑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자신. 자연스레 누구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사랑은 종이로 만든 케이크였다.

 

 

* * *

 

 

가끔 비가 오는 날이 이어졌다. 맑게 갰나 싶다가도 찌푸린 구름이 모여 부슬부슬 얇은 비를 뿌렸고, 몸에 닿는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틀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친 날이었다. 연습시합에서 키타가와 제1중학교가 21로 이긴 뒤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체육관 창문으로 보이던 그녀가 안 보인지 일 주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오지 않게 된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팀 동료들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저 관심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창밖으로 그 여자아이가 보인 건 아주 흔한 우연이었다. 오이카와가 서 있는 2층 복도의 창밖은 1층 뒷문 근처였고, 그녀는 검도부 주장과 함께 있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던 미소 대신 볼을 파스텔 색조로 물들인 미소가 보였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교복 치마를 힘겹게 꼭 쥐고 있던 손은 검도부 주장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 사귀고 있구나. 그럼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야 할, 이루어져야 할 일의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후련함까지 느꼈다. 억지로 침수시켜놓았던 죄책감이 멀리 날아가 버린 상쾌함이었다. 조금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앞을 보자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 토비오가 평소보다 기대감에 찬 눈동자로 뛰어왔다. 체육복이 든 에나멜 가방을 보니 연습에 가는 도중인 것 같았다. 무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오이카와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저거 봐.”

 

오이카와는 창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쏙 내밀었고,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에 두 사람이 비쳤다.

 

뭐가요?”

저기 저 여자애.”

……?”

 

카게야마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그 입이 열리려다가 다시 닫히고, 입꼬리를 꼬물거리는 것이 영.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해.”

, 런게, 아니고

 

오이카와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카게야마는 몇 번 말을 더듬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적중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토비오쨩, 진짜 심각하네. 그때 토비오쨩이 말했잖아? 이번엔 여자친구로 안 하냐고

그랬었나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때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제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눈가를 구겼다. 생각해 보면 카게야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사랑 관과, 마음의 불변성에 대한 주제 같은 건.

 

저 선배가 왜요?”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느니, 그때 토비오쨩이 건방진 말을 하면서 이 오이카와 선배를 가르치려 들었잖아? 저거 봐, 다 변하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저런 거야.”

저 선배가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했나요?”

그랬, .”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고백은 받았으나, 오이카와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 체육관 창문에서 바라봤으나 실제 어땠는지 오이카와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더 모를 일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바뀌지 않는 좋아도 있는 걸요.”

토비오쨩은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래.”

 

오이카와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보폭을 넓혀 카게야마보다 앞섰다. 평소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얹은, 가벼이 여기는 어조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렇게 입만 삐죽 내밀다간 언젠가 입 삐죽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그걸로 또 놀릴 생각을 여러 가지 해보았다.

 

몰라도, 제대로 좋아하고 있어요. 오이카와 선배요.”

?!!”

 

다리가 휘청,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갈 뻔했으나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쳐다보자 작은 체구가 계단에 멈춰 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러세요?”

, , 좋아, 좋아한, 다고?”

 

한심하게도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방금까지 삐죽이고 있던 작은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배구도, 카레도,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도 좋아해요.”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다. 배구나, 카레 같은 좋아’. 심지어 그것도 서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동시에 그 작은 머리 위를 꾹 눌러주고 싶었다. 감히 오이카와씨를 서브로만 평가해? 실제 오이카와가 머리를 누른 것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인상을 안 좋게 찌푸렸다.

 

가끔, 괴롭힐 땐 싫을 때도 있지만그래도 좋아해요. 처음부터 똑같은 걸요.”

 

처음부터, 오이카와의 존재와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순간적인 기분의 흔들림과는 별개로 쭉.

아니, 아니 아니.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배구나 카레와 같은 좋아라니까. 그럼에도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제대로 된 좋아였다. 카게야마가 아마 앞으로도 쭉 좋아할 배구와 카레. 가끔 지칠 때는 있어도, 질리고 싫어질 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카게야마에게 사랑일 배구나 카레와 동일하다고. 동일하다고.

 

근데 그거 서브잖아?!”

?”

 

카게야마는 반문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가, 지금은 흰 피부를 붉은 거품처럼 몽글 물 들이고. 오이카와는 역시 이상했다. 가끔, 아니 혹은 자주.

 

 

* * *

 

 

토비오쨩, 집에 같이 갈까?”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굽혀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등 뒤에 섰다.

 

너 이 자식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아니, 아니라니까? 이와쨩,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무서워. 그냥 같이 가는 것뿐이니까?”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이즈미가 눈빛으로 넌지시 괜찮은지 의향을 물었으나 카게야마가 알아챌 리 없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있던 이와이즈미를 벗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전 소리가 났다.

 

가는 길에 만두 사줄까?”

!”

먹는 걸로 꼬셔서 뭐하려고?”

아니, 이와쨩 왜 그런 생각만 하는 건데. 늦었으니까 바래다주는 거라고?”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빛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가자, 이를 보이며 웃은 뒤 앞서 걸었다. 가방을 고쳐 맨 등이 카게야마보다 두 뼘 정도 컸다. 걸친 재킷에는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고 바라봤던 등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물들이면서 뒤를 쫓았다. 뒤따라오는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있었다.

 

 

, 뜨거우니까.”

감사합니다!”

 

만두를 한 개씩 사 들고 걸어가는 길목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점점이 퍼진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윤곽을 비췄다. 오이카와는 만두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카게야마의 볼에 닿아 촉촉이 젖는 걸 보면서, 작게 물었다.

 

토비오쨩은 집이 어디야?”

저기요.”

 

카게야마가 가리킨 곳은 골목 안쪽 주택가의 한 지점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나 거리상 멀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카게야마의 발음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가깝네.”

오이카와 선배는요?”

거기서 15분 더 걸어가야 해.”

가깝네요.”

가까운 거야?”

못 만나는 거리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끄덕였다. 말로는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느덧 만두를 한입에 다 넣고 양쪽 볼 주머니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을 열면 만두가 튀어나오려는지 작은 입을 양손으로 누르면서 입안을 열심히 움직였다. 햄스터 같은걸, 오이카와는 생각하면서 카게야마 입술 옆에 붙은 만두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

 

말로 하지 못한 당황이 카게야마의 얼굴에 번졌다. 입을 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손가락을 떼지 못하고 왜 그런 걸 먹어요라는 눈빛만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양팔을 잡아 끌어당긴 뒤, 보이는 작고 모양 좋은 귀에 속삭였다.

 

토비오쨩은 내가 서브 평생 안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할 거야?”

 

온기를 담고 있는 입김이 귓속의 솜털을 간지럽히자, 물감이 퍼지듯 귓바퀴를 따라 귀 전체가 천천히 붉어졌다. 귓불을 조금 세게 꼬집으면서,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토비오쨩 귀 붉어졌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가를 찌푸린 뒤 만두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작은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귀로 옮겼다. 작은 주먹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방해했다.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노려보면서, 카게야마는 작게 투덜거렸다.

 

지금도 안 가르쳐 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 카게야마의 말에 동조할 일이 잦았다. 카게야마와 그만큼 많이 마주 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갸우뚱하는 고개, 불만이 담긴 눈동자, 삐죽 내민 입술 모두 지금의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카게야마의 저러한 버릇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제 귀를 감싸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맞잡고,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몇 번 주물렀다. 아기같이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냥,

 

그럼 오이카와 선배가 싫어지지 않겠어?”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내렸다. 흘러내린 가로등 불빛이 검은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가라앉았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고요한 적막이 카게야마의 입술 끝에 잠시간 머물렀다. 비가 그친 뒤 물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맞잡은 손 사이를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지금껏 저와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여자친구, 이제는 싫어진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렸다. 이와이즈미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오이카와는 제가 생각하는 온전한 이해와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없는 거라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이랑 달라질 게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까요?”

 

카게야마는 고민을 마친 듯 눈동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푸른, 별 몇 조각이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 중 한 가지였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고, 서브는가르쳐주시면 좋겠지만 안 가르쳐 주는 건 지금도 똑같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달라지잖아. 내가 언제까지 대단한 선수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순히 토비오쨩이 나에 대한 마음이 훅 바뀔지도 모르고?”

 

오이카와는 그런 말을 하는 저가 이상했다. 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까지혹은 언제 즈음. 오이카와는 저를 좋아하냐고 집요하게 물었던 지금까지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 바뀌어요.”

 

카게야마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앞선 질문보다도 망설임이 없었다. 입술에 만두 부스러기를 붙인 꼬맹이가 당돌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불룩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장담해? 토비오쨩 미래 보고 왔어? 아직 꼬꼬마가 그렇게 책임도 못 질 말 막 하면 안 되는데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들어 카게야마의 이마를 꾹 눌렀다. 카게야마의 인상 쓴 얼굴이 뒤로 밀렸다가 다시 되돌아오자, 그 이마에 붉은 점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붉은 이마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양손을 잡힌 상태였다.

 

미래는 모르지만지금은 안 바뀌는 걸요. 지금은 어제였고, 그저께였으니까, 내일이나 모레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매일 매일 지나면 결국 안 바뀌는 거잖아요.”

토비오쨩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안 해?”

? 해요. 내일 저녁 메뉴는 카레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내일이면 오이카와 선배가 미워질지도 모르잖아?”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건 전부 지금이랑은 상관없는 얘기인 거 같아요. 빨리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오늘 저녁도 카레인데.”

 

카게야마는 이야기가 지겨운지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저의 집 쪽으로 틀려는 걸 오이카와가 제지했다.

 

요 녀석, 선배가 얘기하는데! 그리고 너희 집은 매일 저녁이 카레냐! 얼마나 좋아 하는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당겼다. 찹쌀떡처럼 죽 늘어나 카게야마의 입이 벌려졌다. 우우, 아하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작은 손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고 말았다. 늘어난 볼을 놔주고, 머리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밤이 녹아, 카게야마의 우주 같은 눈동자와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집에 가야지. 토비오쨩은 어린아이니까.”

…….”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을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 홍차 빛 눈동자와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봤다.

 

?”

, 오이카와 선배만큼 대단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

, 고마워?”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지만, 이상한 칭찬에 이상한 대답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머리 위를 쓰다듬던 오이카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별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서, 유성군처럼 떨어지는 별똥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면이 뒤집힌 것처럼 몰려드는 어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밤하늘이 오이카와의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달 웅덩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카게야마 주변으로.

 

어머니가 그랬어요. 그 선배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구 선수가 더 잘하지는 않냐고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에게 대단한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인걸요. 앞으로도 계속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제 손바닥까지 적셔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뜨거움이 전달되고 제 심장이 눅진하게 녹고 있는 걸 느꼈다. 카게야마가 뜨거웠다. 종이 케이크가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진짜 생크림과 과일로 덮이고 있었다.

 

토비오쨩그렇게 칭찬해도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건데.”

.”

 

카게야마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전기가 한 차례 몸을 돌고 오이카와의 시야를 흔들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토비오쨩의 좋아는 어느 정도 오래 갈 것 같네. 어느 정도는.”

진짜예요. 자신 있어요.”

 

무슨 자신인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빛나는 눈동자를 손으로 한번 훑었다. 속눈썹, 눈꼬리까지 달빛을 한바닥 머금은 눈동자를. 오이카와의 머리 위에 뜬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람개비처럼 오이카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천천히, 조금 빠르게.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온통 카게야마가 흩뿌려놓은 별 가루로 가득했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내렸다. 양 볼이 마주 잡은 카게야마의 손만큼 뜨거웠다. 이끌리듯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키스하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꼭 잡았다.

 

한입에 집어넣은 카게야마의 케이크는 의외로 잊지 못할 맛이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월간 오이카게 합작 홈의 편집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Love Actually








  소리 없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퐁당, 퐁당 액체가 물과 만나 작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그 파도는 변기 벽에 부딪혀 스러졌다.

  “우, …윽. 하아, 하아… 욱.”

  변기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타는 듯한 목을 타고 올라온 건 노란 신물이었다.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부여잡고 꼭꼭 짜내는 위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물과 섞인 침 몇 방울이 이미 더러운 변기 물에 떨어졌고, 오이카와는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와 찌릿한 코를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으나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표정. 공을 들고 서 있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박제된 나비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입과 코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다시 울렁거렸으나 오이카와는 손 한 번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카게야마는 돌고 돌았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오이카와 선배” 낮게 말한 뒤 오이카와에게 공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한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이카와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서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코 안을 깨끗이 씻어내자 하얀 덩어리와 침, 일부의 노란 신물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전부 쓸려 내려가면 될 일이다. 내장 구석구석에 붙은 토기(吐氣)도, 머릿속에 박제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내려앉았다. 세상이 하얗게 번지는 것이,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뿌옇고 제 모습조차 흐릿한데도, 머릿속 카게야마는 속눈썹 한 올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는 공을 매만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자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자리로 휙 가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만, 오이카와는 길게 바라봤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빛을 냈다. 오이카와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가락을 댔다. 며칠 전 병원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심전도검사, X-ray 등 몇몇 기초적인 검사 및 활력 징후까지 확인했으나 오이카와에게 이상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극히 건강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박동을 느꼈다. 뚝, 뚝뚝뚝, 뚝뚝뚝. 끊어질 듯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빠른 맥박이 이어졌다. 누가 만져 보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심장이 과도하게 팽창해, 폐를 짓누르는 탓일까. 혹은 여름 특유의 짭조름하고 답답한 공기 때문일까. 숨쉬기가 힘들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찮냐.”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가?”

  매만지던 공을 몇 번 바닥에 내려쳤다. 오늘도 해야 할 연습이 많았다.

  “네 표정 장난 아냐.”


  “또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서는 걱정 끼가 묻어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좋은 친구지만, 오이카와는 가끔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건, 이미 생긴 구멍을 후벼 파 넓히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그저 웃어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 하든 소용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브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심장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살을 찌르는 직사광선이 온통 저에게로 모이고, 등이 탈 것처럼 뜨거운 태양 탓에 다시 숨이 막혔다. 후, 후우. 들이쉬고, 내뱉고. 억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과도한 심박 수와 산소가 부족한 뇌 때문에 다시 토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바라봤다.


  연습 전 마셨던 스포츠 드링크가 그대로 나왔다. 연한 소다 빛깔의 좋아하는 음료수였는데.

  “하아….”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변기 물을 내렸다. 심한 심박동으로 울렁거림을 느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현재 오이카와가 겪는 증상이었다. 오이카와는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심장병’을 검색했다. 심계항진, 부정맥, 심근경색, 협심증 등…… 오이카와가 느끼는 증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심장의 고통,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건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처음 들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서브를 가르쳐 주세요.”

  어떤 부탁 조도, 애원하는 말투도 아니고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왜?”

  오이카와는 화가 나 있었다. 선배로서 응당 후배보다 침착하고 후배를 이끌어줘야 한다, 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와이즈미가 들으면 다르지 않다 말하더라도 오이카와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배우고 싶어요.”

  “관심 없어.”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붙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 뒤뜰에 울렸다. 뒤뜰에 심긴 나무의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 먼지처럼 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이카와의 머리가 울렸다. 손발이 조금 떨리면서 식은땀이 등 뒤로 배어 나와, 오이카와는 약한 오한을 느꼈다. 다리, 발목, 복부, 귀 뒤 등 여기저기에서 박동치는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로 인해, 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초원과도 같이 넓은 평원에는 보랏빛 풀이 번져 있었다. 깊은 밤과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 풀빛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차가웠다. 폐가 찢기듯 차가운 공기 탓에 오이카와는 꿈인데도 목이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느꼈다. 저 앞 초원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실루엣만으로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공을 들고 서 있었다. 흰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에 짧은 앞머리. 동그란 눈동자까지, 오이카와가 아는 카게야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빛도 없는 검은 꿈 안에서, 카게야마의 주변에만 반딧불이 몇 마리가 떠돌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카게야마의 말간 이마와 노란 빛깔의 팔, 흰 운동화까지 비췄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입을 연 카게야마의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뒤 그 몸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넘어진 카게야마의 아래로 보랏빛 풀이 흩날리고, 흰 티셔츠는 이슬방울에 젖어들었다. 카게야마 주변의 반딧불이는 흩어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흰색 가루가 총총히 박힌 검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을 힘주어 눌렀다. 배구공을 놀리는 오이카와의 악력이 결코 서툴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괴롭지 않은 듯 오이카와를 두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에 맞닿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보드라웠다. 톡 오른 복숭앗빛 입술이 기억 속에 떠올랐고, 제 손 아래에 짓눌린 게 그 입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이카와의 허리 주변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이 맞닿았고, 카게야마의 심장과 오이카와의 심장이 한 소리로 박동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제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유성우 무리가 소리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고, 초원의 밤은 광활한 우주와 같이 별의 죽음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왜?”

  오이카와는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야.”

  보랏빛 풀이 누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초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왜 나야. 왜 너고, 왜 나야. 어째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에 맞춰 오이카와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슬이 묻어 머리카락이 젖어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수술용 칼이 들려있었다.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에 대고 조심스레 긁자, 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선이 생기고 그 안으로 솜털이 오른 속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토기가 밀려왔다. 동시에 기대감도 있었다. 이 칼이 저 자신에게 닿기 전에 해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도 들었다. 오이카와는 실선 사이에 손을 넣고 흰 티셔츠를 벌렸다.

  카게야마의 폭신한 살결에 닿고, 조금 힘을 주어 칼을 내리그으면 말랑거리는 젤리처럼 피부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술용 칼에 달라붙는 피부조직을 떼어내면, 노란 빛깔의 동글동글한 지방과 갈비뼈 위에 겹쳐진 엷은 핑크 빛의 근육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총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어 나오는 장막 액과 혈액이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를 적셨다. 점점이 퍼지는 붉은 꽃잎이 카게야마의 가슴에서부터 퍼졌다. 근육에 손을 대보면 강한 박동이 갈비뼈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는 호흡곤란 때문에, 오이카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칼을 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렸다.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기분 나쁜 꿈이었다.




  “너 연습 할 수 있겠어?”

  “완전 괜찮다니까. 이와쨩 자꾸 왜 그러실까.”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은 뒤 체육복으로마저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놈이 말은 잘하네. 이와이즈미는 옷을 대충 구겨 접고 사물함에 넣었다. 새벽 2시에 오이카와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는 ‘혹시 자?’ 한 마디였다. 아침에 그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요 며칠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를 만나면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도 자주 있는 모습이었다.

  “이와쨩?”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탈의실 입구에 서서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이와이즈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서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미 아주 옛날 일이었다.

  ‘누구야, 쟤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던데. 이름이 독특했어. 카게… 뭐였지.’

  ‘카게야마 토비오쨩.’

  ‘알면서 물어본 거냐!’

  말 그대로 첫 만남 때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꽤 길게,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이카와의 그런 눈빛은 이와이즈미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었다. 오이카와가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부원이 연습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넓은 체육관이 사람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등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작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수많은 인원 사이에서 작고 검은 머리통이 오이카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꿈을 기억해냈다. 꿈에서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풀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인사가 마저 끝나기 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의 입술에서, 항상 다른 부원의 이름만 오가던 입술에서 저의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눈동자를 크게 뜬 뒤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다음 경기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료수, 주문하러 가자.”

  다음 경기용 음료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미리 정해놓은 매장에서 직접 공수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더더욱 연습 시간에 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부르자, 카게야마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공을 바라보고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이후 네, 작게 대답한 뒤 저가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공을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손이 꿈에서보다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육관의 2층 창문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카게야마의 볼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성우도 검은 밤도, 낮의 햇빛도 카게야마 주변을 돌고 돌았다. 카게야마는 지나치게 빛나는 존재였다.



  파란 하늘, 한두 번씩 울리다가 멈추고 다시 일제히 이어지는 매미 소리가 더웠다. 팔에 닿은 공기가 끈적거렸고, 눈에 닿는 초록이 부셨다. 길가에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바닥에는 매미 허물과 떨어져 죽은 매미 사체 한두 개가 보였다. 하수구 주변에는 진물이 번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서 걷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작은 볼이 더위 탓인지 조금 붉었다. 보폭 차 때문에 오이카와가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에서 네 걸음을 걸어야 하는 카게야마의 발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가슴을 새가 쫀 듯 강한 흉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시야에 현기증이 맺혔다. 올라가는 심박동과 여름의 습습한 공기가 기도를 눌렀고, 다시 호흡곤란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서브, 옆에서 연습하는 거 봐도 될까요.”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돼.”

  오이카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조금 충격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야.”

  꿈에서 물었던 말이었다. 왜 오이카와여야만 하는가. 왜 카게야마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왔고, 왜 오이카와는 그의 2년 선배이며, 왜 오이카와의 서브여야 하는가. 옆에서 걷던 카게야마가 재빨리 다리를 굴려 오이카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졌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보면 가슴이 뛰니까요.”

  “가슴이 뛴다고?”

  “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작은 손은 꿈에서 오이카와가 갈랐던 카게야마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 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세어 보았다. 뚝, 뚝뚝뚝… 지나치게 빨랐다.

  “어떻게 뛰는데?”

  “네?”

  “가슴이, 어떻게 뛰냐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고민하듯 머리를 갸우뚱해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어. 두근두근… 하고요? 오이카와 선배가 서브를 치려고 뛰어오르면, 체육관 안의 빛이 전부 오이카와 선배한테 모여서, 약간 눈이 부시니까 눈을 세게 뜨고 봐야 해요.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움직이고, 공 소리가 울리고 나면 가슴이 뛰어요. 강하게.”

  매미가 울고 있는 공기 속에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갔다. 그 속에 또, 카게야마의 심장 고동이 함께. 오이카와는 꿈에서처럼 손을 대지 않아도, 가슴을 맞닿지 않아도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빛 볼, 동그란 어깨에 떨어지는 태양 빛은 카게야마의 색과 섞여 부드러운 여름의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의 검은 밤, 아니 짙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는 오이카와를 담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공을 들고 있던, 꿈에 나왔던 카게야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낮에, 나무 한 그루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마주칠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박동치던 심장은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심장은 거짓말쟁이인 오이카와를 심하게 힐책하고, 오이카와의 전신을 뒤흔들어 놨으며, 카게야마의 앞에서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오이카와는 테이핑 되어 있는 검지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그곳에 오이카와의 심장이 있었다.


  "여기가 멈추면, 가르쳐줄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겹치고, 코끝의 한숨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보다 뜨거웠다. 질식해서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 심장이 그렇게도 소리친다면, 오이카와도 평생 거짓말쟁이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멈추면, 토비오쨩이 원하는 거 전부 줄게."

  그때까지는, 심장이 오이카와에게 굴복하기 전까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줄 이유'가 없었다.

  달콤한 한숨 한 번까지도.




* 편집은 월간 오이카게 주최님이 쓰신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 미약한 쿠니카게 요소가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장면은 희뿌옇게 먼지처럼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그 단계를 3단계로 분류하고 천천히 상기시켰다. 어느 위치에 서고, 손가락의 굽히는 정도, 어느 순간에 다리를 올려야 하는지 깊게 생각한 뒤 다시금 눈을 들었다. 배구공의 오밀조밀한 매듭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돋움을 하고,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이미지를 눈앞에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였다.





Kill Your Darlings





  “―목요일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잊지 말고. 아, 이거 내일까지 적어와야 한다? 진로희망조사서.”


  손에 들린 15x10cm, 두께 약 5mm에 해당하는 종이를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봤다. 이름, 반, 번호, 희망 고등학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아직 ‘진로’라는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마지막 시기에 한 번 만났던 그 종이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채 잠깐의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정확히 두 번 접어, 교탁까지 걸어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3학년, C반, 오이카와 토오루까지 적은 뒤 손을 멈췄다. 몇 번 나눴던 대화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느 학교 갈 거야?’

  ‘어느 학교로 가시나요?’

  ‘오이카와, 고등학교도 대학 못지않게 중요해.’


  같은 3학년 친구들, 이제 부에 들어온 지 갓 1년이 되어가는 1학년 후배들, 코치에게 각각 들었던 말이다. ‘어느’ 학교에 갈 건지― 저러한 말 뒤에는 항상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 배구부도 유명하니까.’


  오이카와는 찝찔한 얼굴로 입가를 굽실거렸다. 중학교 3년은 배구가 전부인 기간이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체육대회 때는 일부러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항상 중요한 건 배구였고, 오이카와는 배구보다 더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오바죠사이 아니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가방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었다. 옆 반인지라 종례가 끝나면 오이카와의 반에 들러 함께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종이를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와쨩은 이미 냈어? 진로조사서.”

  “당연하지. 그런 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까먹을걸. 특히 오이카와 너는.”

  “특히라는 말 뒤는 이해할 수 없는걸. 뭐, 실제로 이런 건 가방에서 구겨지기 일쑤지만. 뭐라고 적었는데?”

  “아오바죠사이.”

  “아니, 칸이 세 개잖아?”

  “한 개밖에 안 썼어.”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와쨩이야. 오이카와는 몇 번 달깍달깍 시끄럽게 볼펜을 괴롭히더니, 반쯤 열려있는 가방에 종이와 함께 집어넣었다. 지금 쓰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이와이즈미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연습이 금방 시작될 터였다. 주장, 부주장인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시라토리자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레 내뱉었다. 종이의 가장 위 칸에 적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시라토리자와학원이라.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네, 생각했다. 


  “이와쨩은 왜 아오바죠사이야?”

  “…선배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그곳 배구가 맘에 드니까.”

  “배구가 맘에 들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이와쨩, 나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이카와는 핀잔을 들은 아이처럼 볼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화를 억누른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흘겨본 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그건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이카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애매하게 마음을 깊게 드리우고 있던 안개가 수증기가 되어 가슴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이미 우시지마에게 추천이 들어간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시라토리자와에서 추천이 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전날 연습 중에 떠올랐던 장면이 다시금 축축한 심장에서 살아났다.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은 느릿느릿하게 재생되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말한 ‘잘하는’ 배구가 어떤 배구인지, 누구의 배구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단계에서, 지금 있는 그 어떤 고등학교에도 그러한 배구가 없는 단계에서 진로희망조사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못내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는 계단을 몇 개씩이고 뛰어 내려갔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하얀 배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얇은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는 깨끗한 글씨로 적힌 ‘카게야마’가 수로 박혀있었고, 짧게 올라간 반바지 아래에는 솜털이 막 빠진 반질한 살결의 두 다리가 생채기도 없이 뻗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조그만 이마를 꾹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갸우뚱한 채 오이카와를 말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조금 짧아진 앞머리 때문에 이마가 평소보다 잘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가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건넸다. 배구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작아서, 그 끝의 손톱은 모래알로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토비오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점프 서브, 알려주세―”

  “대답할 가치도 없네.”


  오이카와는 마저 듣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포기하지도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와서는 다시금 공을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가슴을 다시 툭, 친 배구공이 괜스레 거슬렸다.


  “서브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에게 들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판이 기억났다.

  주변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긴 하지, 그 성격이면.

  코치는 이따금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오이카와와 둘만 있을 때 꺼내곤 했다.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거예요? 가끔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보고 그 기분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못하고 코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주장이니까.

  오이카와는 배구부 주장이고, 카게야마 선배니까. 왜 코치는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오이카와에게 하는가. 코치가 개인적으로 학생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카게야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도 굳이 물어볼 것 없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른 존재였고, 그건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부류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한 뒤에 세대 교체할 사람으로서 내정해두었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오이카와 만큼의 친화력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왜 토스가 아니고?”

  “네?”

  “말해봐, 토비오쨩. 왜 토스가 아니고 서브인데?”

  “…서브를 가장 잘하는 건 오이카와 선배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오이카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쯤은 빤히 보였다.


  “토스를 가장 잘하는 건 내가 아닌가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카게야마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밀었던 배구공을 천천히 끌어당겨 다시 제 품에 가둔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난 알아, 토비오쨩.”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부드러운 목 뒤를 가볍게 쓸면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오이카와의 형체는 흔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거. 누가 가장 토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난 알아.”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동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내듯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조바심 때문에 퇴출당했던 그 시합,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타로 내보냈었다. 2학년 세터인 니카이도 있는데, 왜 카게야마냐며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높았다. 당연히 카게야마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2학년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잘하니까.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들어가야 팀이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코치는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니카이보다, 그때의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가 더 잘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세터로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네트 앞쪽에 섰다. 세터의 위치였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는 1학년 후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 던져주지 않을래? 혹시 괜찮으면.”


  1학년 후배는 잠시 당황하더니 공 바구니를 끌고 온 뒤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 하나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도 선명하게 그 날의 시합이 떠올랐다. 그 날 카게야마의 위치, 어떤 곳을 시선으로 훑는지, 누구를 쳐다보는지,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이카와는 일련의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한 뒤, 발돋움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이 흘러가는 토스 전 단계에서는 배구공의 매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이 방금 봤던 카게야마의 손처럼 보이는 환상을 느꼈다.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오이카와는 제 안에서 비웃는 듯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건 그냥 흉내쟁이잖아. 오이카와는 입술을 씹었다. 오이카와가 하고 싶었던 배구는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자체에 있었다.

  세터로서 하고 싶었던 토스를 상상하는 건, 동시에 자신이 한낱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




  “오이카와 선배처럼은 못 뛸걸.”

  “…알아.”


  쿠니미가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꾸물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근처 지역체육관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오이카와처럼 높은 점프력과 강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키타이치 중학교에 들어가고 오이카와의 서브를 본 뒤로, 몇 번 이렇게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으나 기억 속 그 점프 서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서브 자세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옆에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카게야마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배구부 연습이 끝나서까지 집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가끔 ‘못할걸’의 말만 툭툭 던졌다.


  “오이카와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잖아.”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곁눈질로 보고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해?”

  “…왜 안 가르쳐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저번에 오이카와 선배가 그랬어. ‘왜 토스가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오이카와 선배가 자긴 다 알고 있다고 말했고,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걸.”

  “카게야마, 너 영어 시간에 졸았지?”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깨서 수업을 들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가 봐도 체육계 소년이었고, 쿠니미는 주변으로부터 배구부여서 의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쿠니미는 다만 그런 편견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Kill Your Darlings’이란 말이 있어. 공부해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공부해보라고. 너랑 오이카와 선배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요 근래 서브 연습 대신 토스 연습이 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서브를 보며 받았던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오이카와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서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듯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배구가 어정쩡한 상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좋은 형태든 나쁜 형태든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서로가 만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감하고, 아주 작은 신경학적 신호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숨소리조차도 겹치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 탓이 아니었다. 이미 모른척하기에는 서로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




  “카게야마가 최근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한다던데.”


  반쯤 장난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에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더라.”

  “지역 체육관에서 혼자 한다던데. 네가 안 가르쳐주니까 몸 달았나 보지?”


  비아냥거리며 툭툭 오이카와의 어깨를 치는 친구에게 피식 웃어준 뒤 오이카와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카게야마나, 가르쳐주지 않고 요즘 토스 연습에 매진하는 오이카와에 대한 건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던가. 다만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 건 조금 상쾌했다. 그래서였는지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 한 명과 서둘러 헤어진 뒤 지역 체육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브 연습을 하는 카게야마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그룹, 멀리서 3대 3으로 배구연습을 하는 아주머니 그룹이 보였고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더 다가가지 않고 체육관 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공을 올리고, 높이 뛰고, 공을 내려치는 일련의 과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니, 선명한 것 그 이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저 과정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3단계로 나눠서 기억해놓은 저 과정은 오이카와의 서브 과정이었다. 


  “…바보 아냐?”


  픽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입을 가렸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제 서브를 흉내내고 있는 카게야마나, 카게야마의 토스를 상상하며 제 토스 자세를 비트는 오이카와나. 모든 것이 바보 같았고, 왜 카게야마와 저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바벨탑과 같이 쌓고 있던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토스가 모래성처럼 바닥부터 허물어졌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게야마의 서브가 어긋날 때마다, 그 서브 뒤편으로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꿈에서보다도 선명했던 카게야마의 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자세도, 위치도 전부 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녹아내려서, 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등을 돌렸다. 

  넌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어, 토비오. 형태도 없는 내 그림자만 따라가면서 흉내쟁이로 살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해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그림자를 부숴주러 올게.

  오이카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구름이 말갛게 빛나고,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거리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배구가 하고 싶었다. 또한, 간만에 서브 연습을 하고 싶었다. 반에서 오이카와만 제출하지 못한 진로희망조사서에 쓸 내용도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구를 하고 싶었다.




**




  “이와쨩, 이거 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내밀었다. 1순위부터 3순위까지,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똑같은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


  이와이즈미는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 읽었다. 배시시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종이를 정확히 2번 접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갈 거야. 이번엔 꼭 우시와카쨩 이길 거라고. 아, 토비오쨩도.”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는 어쩌고?”

  “아, 그건 됐어. 하고 싶은 거 바뀌었으니까.”

  “가벼운 남자네, 이거.”

  “이와쨩, 한 마디 많다고!”


  오이카와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가슴 통증이 그 눈동자와 함께 찾아올 때면, 오이카와는 다시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를 봤던, 그 영겁의 삶도 가치 없어질 만큼 무섭게 아름답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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