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은 월간 오이카게 주최님이 쓰신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 미약한 쿠니카게 요소가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장면은 희뿌옇게 먼지처럼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그 단계를 3단계로 분류하고 천천히 상기시켰다. 어느 위치에 서고, 손가락의 굽히는 정도, 어느 순간에 다리를 올려야 하는지 깊게 생각한 뒤 다시금 눈을 들었다. 배구공의 오밀조밀한 매듭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돋움을 하고,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이미지를 눈앞에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였다.





Kill Your Darlings





  “―목요일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잊지 말고. 아, 이거 내일까지 적어와야 한다? 진로희망조사서.”


  손에 들린 15x10cm, 두께 약 5mm에 해당하는 종이를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봤다. 이름, 반, 번호, 희망 고등학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아직 ‘진로’라는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마지막 시기에 한 번 만났던 그 종이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채 잠깐의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정확히 두 번 접어, 교탁까지 걸어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3학년, C반, 오이카와 토오루까지 적은 뒤 손을 멈췄다. 몇 번 나눴던 대화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느 학교 갈 거야?’

  ‘어느 학교로 가시나요?’

  ‘오이카와, 고등학교도 대학 못지않게 중요해.’


  같은 3학년 친구들, 이제 부에 들어온 지 갓 1년이 되어가는 1학년 후배들, 코치에게 각각 들었던 말이다. ‘어느’ 학교에 갈 건지― 저러한 말 뒤에는 항상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 배구부도 유명하니까.’


  오이카와는 찝찔한 얼굴로 입가를 굽실거렸다. 중학교 3년은 배구가 전부인 기간이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체육대회 때는 일부러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항상 중요한 건 배구였고, 오이카와는 배구보다 더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오바죠사이 아니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가방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었다. 옆 반인지라 종례가 끝나면 오이카와의 반에 들러 함께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종이를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와쨩은 이미 냈어? 진로조사서.”

  “당연하지. 그런 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까먹을걸. 특히 오이카와 너는.”

  “특히라는 말 뒤는 이해할 수 없는걸. 뭐, 실제로 이런 건 가방에서 구겨지기 일쑤지만. 뭐라고 적었는데?”

  “아오바죠사이.”

  “아니, 칸이 세 개잖아?”

  “한 개밖에 안 썼어.”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와쨩이야. 오이카와는 몇 번 달깍달깍 시끄럽게 볼펜을 괴롭히더니, 반쯤 열려있는 가방에 종이와 함께 집어넣었다. 지금 쓰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이와이즈미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연습이 금방 시작될 터였다. 주장, 부주장인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시라토리자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레 내뱉었다. 종이의 가장 위 칸에 적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시라토리자와학원이라.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네, 생각했다. 


  “이와쨩은 왜 아오바죠사이야?”

  “…선배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그곳 배구가 맘에 드니까.”

  “배구가 맘에 들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이와쨩, 나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이카와는 핀잔을 들은 아이처럼 볼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화를 억누른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흘겨본 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그건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이카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애매하게 마음을 깊게 드리우고 있던 안개가 수증기가 되어 가슴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이미 우시지마에게 추천이 들어간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시라토리자와에서 추천이 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전날 연습 중에 떠올랐던 장면이 다시금 축축한 심장에서 살아났다.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은 느릿느릿하게 재생되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말한 ‘잘하는’ 배구가 어떤 배구인지, 누구의 배구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단계에서, 지금 있는 그 어떤 고등학교에도 그러한 배구가 없는 단계에서 진로희망조사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못내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는 계단을 몇 개씩이고 뛰어 내려갔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하얀 배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얇은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는 깨끗한 글씨로 적힌 ‘카게야마’가 수로 박혀있었고, 짧게 올라간 반바지 아래에는 솜털이 막 빠진 반질한 살결의 두 다리가 생채기도 없이 뻗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조그만 이마를 꾹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갸우뚱한 채 오이카와를 말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조금 짧아진 앞머리 때문에 이마가 평소보다 잘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가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건넸다. 배구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작아서, 그 끝의 손톱은 모래알로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토비오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점프 서브, 알려주세―”

  “대답할 가치도 없네.”


  오이카와는 마저 듣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포기하지도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와서는 다시금 공을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가슴을 다시 툭, 친 배구공이 괜스레 거슬렸다.


  “서브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에게 들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판이 기억났다.

  주변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긴 하지, 그 성격이면.

  코치는 이따금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오이카와와 둘만 있을 때 꺼내곤 했다.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거예요? 가끔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보고 그 기분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못하고 코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주장이니까.

  오이카와는 배구부 주장이고, 카게야마 선배니까. 왜 코치는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오이카와에게 하는가. 코치가 개인적으로 학생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카게야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도 굳이 물어볼 것 없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른 존재였고, 그건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부류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한 뒤에 세대 교체할 사람으로서 내정해두었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오이카와 만큼의 친화력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왜 토스가 아니고?”

  “네?”

  “말해봐, 토비오쨩. 왜 토스가 아니고 서브인데?”

  “…서브를 가장 잘하는 건 오이카와 선배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오이카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쯤은 빤히 보였다.


  “토스를 가장 잘하는 건 내가 아닌가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카게야마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밀었던 배구공을 천천히 끌어당겨 다시 제 품에 가둔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난 알아, 토비오쨩.”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부드러운 목 뒤를 가볍게 쓸면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오이카와의 형체는 흔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거. 누가 가장 토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난 알아.”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동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내듯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조바심 때문에 퇴출당했던 그 시합,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타로 내보냈었다. 2학년 세터인 니카이도 있는데, 왜 카게야마냐며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높았다. 당연히 카게야마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2학년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잘하니까.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들어가야 팀이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코치는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니카이보다, 그때의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가 더 잘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세터로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네트 앞쪽에 섰다. 세터의 위치였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는 1학년 후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 던져주지 않을래? 혹시 괜찮으면.”


  1학년 후배는 잠시 당황하더니 공 바구니를 끌고 온 뒤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 하나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도 선명하게 그 날의 시합이 떠올랐다. 그 날 카게야마의 위치, 어떤 곳을 시선으로 훑는지, 누구를 쳐다보는지,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이카와는 일련의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한 뒤, 발돋움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이 흘러가는 토스 전 단계에서는 배구공의 매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이 방금 봤던 카게야마의 손처럼 보이는 환상을 느꼈다.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오이카와는 제 안에서 비웃는 듯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건 그냥 흉내쟁이잖아. 오이카와는 입술을 씹었다. 오이카와가 하고 싶었던 배구는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자체에 있었다.

  세터로서 하고 싶었던 토스를 상상하는 건, 동시에 자신이 한낱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




  “오이카와 선배처럼은 못 뛸걸.”

  “…알아.”


  쿠니미가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꾸물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근처 지역체육관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오이카와처럼 높은 점프력과 강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키타이치 중학교에 들어가고 오이카와의 서브를 본 뒤로, 몇 번 이렇게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으나 기억 속 그 점프 서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서브 자세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옆에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카게야마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배구부 연습이 끝나서까지 집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가끔 ‘못할걸’의 말만 툭툭 던졌다.


  “오이카와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잖아.”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곁눈질로 보고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해?”

  “…왜 안 가르쳐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저번에 오이카와 선배가 그랬어. ‘왜 토스가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오이카와 선배가 자긴 다 알고 있다고 말했고,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걸.”

  “카게야마, 너 영어 시간에 졸았지?”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깨서 수업을 들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가 봐도 체육계 소년이었고, 쿠니미는 주변으로부터 배구부여서 의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쿠니미는 다만 그런 편견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Kill Your Darlings’이란 말이 있어. 공부해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공부해보라고. 너랑 오이카와 선배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요 근래 서브 연습 대신 토스 연습이 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서브를 보며 받았던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오이카와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서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듯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배구가 어정쩡한 상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좋은 형태든 나쁜 형태든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서로가 만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감하고, 아주 작은 신경학적 신호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숨소리조차도 겹치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 탓이 아니었다. 이미 모른척하기에는 서로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




  “카게야마가 최근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한다던데.”


  반쯤 장난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에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더라.”

  “지역 체육관에서 혼자 한다던데. 네가 안 가르쳐주니까 몸 달았나 보지?”


  비아냥거리며 툭툭 오이카와의 어깨를 치는 친구에게 피식 웃어준 뒤 오이카와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카게야마나, 가르쳐주지 않고 요즘 토스 연습에 매진하는 오이카와에 대한 건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던가. 다만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 건 조금 상쾌했다. 그래서였는지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 한 명과 서둘러 헤어진 뒤 지역 체육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브 연습을 하는 카게야마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그룹, 멀리서 3대 3으로 배구연습을 하는 아주머니 그룹이 보였고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더 다가가지 않고 체육관 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공을 올리고, 높이 뛰고, 공을 내려치는 일련의 과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니, 선명한 것 그 이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저 과정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3단계로 나눠서 기억해놓은 저 과정은 오이카와의 서브 과정이었다. 


  “…바보 아냐?”


  픽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입을 가렸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제 서브를 흉내내고 있는 카게야마나, 카게야마의 토스를 상상하며 제 토스 자세를 비트는 오이카와나. 모든 것이 바보 같았고, 왜 카게야마와 저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바벨탑과 같이 쌓고 있던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토스가 모래성처럼 바닥부터 허물어졌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게야마의 서브가 어긋날 때마다, 그 서브 뒤편으로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꿈에서보다도 선명했던 카게야마의 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자세도, 위치도 전부 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녹아내려서, 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등을 돌렸다. 

  넌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어, 토비오. 형태도 없는 내 그림자만 따라가면서 흉내쟁이로 살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해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그림자를 부숴주러 올게.

  오이카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구름이 말갛게 빛나고,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거리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배구가 하고 싶었다. 또한, 간만에 서브 연습을 하고 싶었다. 반에서 오이카와만 제출하지 못한 진로희망조사서에 쓸 내용도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구를 하고 싶었다.




**




  “이와쨩, 이거 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내밀었다. 1순위부터 3순위까지,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똑같은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


  이와이즈미는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 읽었다. 배시시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종이를 정확히 2번 접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갈 거야. 이번엔 꼭 우시와카쨩 이길 거라고. 아, 토비오쨩도.”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는 어쩌고?”

  “아, 그건 됐어. 하고 싶은 거 바뀌었으니까.”

  “가벼운 남자네, 이거.”

  “이와쨩, 한 마디 많다고!”


  오이카와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가슴 통증이 그 눈동자와 함께 찾아올 때면, 오이카와는 다시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를 봤던, 그 영겁의 삶도 가치 없어질 만큼 무섭게 아름답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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