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큐 글전력 60분. 주제는 편지.
* 지루함. 재미없음 주의
* 전력이기에 조각글입니다. 짧아요!






[오이카게] 편지는 싫어하지만.




  수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항상 살아왔다.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편했다. 머리로 전달할 말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저 팔을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말이란 하나의 숙제와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말로 전달한다는 것에 대해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고자 입을 열어도 나오는 건 잉어와 같은 뻐끔거림 뿐이었다. 비단 말 뿐만이 아니었다.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 문자메세지부터 시작해서- 메일, 낙서, 노트정리 등등 하기까지. 모든 것에서 카게야마는 '말'에 서툴렀다.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그건 그에게 숙제였다. 정말 그러했다.

  그것은 편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고등학교 1학년의 2월,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졸업하는 선배들에게 다같이 편지를 쓰고자 합의하고, 카게야마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로 문구점에 들렀다. 예쁜, 알록달록한 편지지를 고르는 여자아이들이 고른 걸 곁눈질로 바라봤다. 다양했다. 칸이 작은 것에서부터 아예 칸이 없는 것까지. 꾸밈이 없는 것에서 편지지라고 하기 힘들정도로 화려한 것까지. 카게야마는 그저 눈가를 찌푸리고 편지지들 앞에서 망부석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몰랐다. 카게야마에게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편지라는 숙제는 더 어려운 고난일지도 몰랐다. 이렇듯 편지지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힘들다면-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결국 연한 아이보리색의 편지지를 들어올렸다. A4 반쪽 크기의, 20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아무런 배경없이 그저 휑하니 줄만 그어진 것이, 카게야마답다고 하면 그렇기도 했다. 언제나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부딪치는 남자였다. 백마디 말을 포기한 대신 그는 솔직하게 행동했다. 그렇기에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의 진심이 흐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서투른 그의 말이, 언어가 그 안에서 존재감 없이 부웅 떠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카게야마 토비오는 편지를 싫어했다.




* * *



  허나 그 바로 3개월 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그 문구점으로 향했다. 그것도 편지지가 모여있는 앞으로. 그는 3개월 전과 같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였고, 여전히 여자아이들이 고르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눈가가 깊게 패인것은 3개월 전보다는 더 심해져있었다. 눈동자가 더 날카로웠다. 카게야마는 집중하고 있었다. 전에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편지지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그 색 하나하나를 보면서. 줄 간격까지 신경쓰면서.

  며칠 전 오이카와에게서 편지가 왔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미 추천을 받았던 여러 대학 중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오이카와가 은퇴 후 시작한 관계이기 때문에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오이카와와 더욱 함께 있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싶고, 그 냄새를 맡으며 품에 안기고 싶었다. 더더욱, 그래서. 오이카와가 도쿄의 대학으로 가는 것이 기쁘고, 축하하고 싶은 마음인 동시에 슬펐다. 슬프다는 표현이 옳은 걸까. 카게야마는 알지 못했다.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자신의 감정표현에 서툴렀다. 그러니 그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조금 더 내 옆에 있어주세요. 가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편지, 보낼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그렇게 말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대학 입학을 위해 도쿄로 가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3월 후반의 날은 아직 추웠고, 바람은 허리를 가르고 매섭게 지나갔다. 그래서 오이카와의 귀는 붉게 올라 있었다. 눈앞의 붉은 귀와, 귓가에서 들려오는 슬며시 떨리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묵지근한,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하나씩 배아래에 쌓였다.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되는데. 편지가 아닌, 그냥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의 깨끗한 글씨가 아닌, 그냥 오이카와씨가.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안개와 같이 뿌옇게 흐려지기만 하는 시야가 아파서. 오이카와의 체온이 그저 그저 그리워질 것만 같아서. 왜 편지일까. 왜 편지여야만 했을까. 항상 새로운 유행은 반드시 체험해보고야 마는 오이카와가. 핸드폰을 손에 끼고 절대 놓지 않는 오이카와가. 왜 굳이, 편지를 골랐을까.



* * *



  카게야마는 결국 편지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벌써 연한 장밋빛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날이 지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이마에는 조그만 땀방울이 한두어개 맺혀 있었다. 힘겨웠다, 편지지와의 싸움이. 하지만 이 승리의 전리품을 들고 집으로 가면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카게야마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약간 상기된 눈가가 생그랗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꼬옥 감겼다가, 다시 깜빡거렸다. 들고있던 배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손에는 편지지를 들어올렸다. 굳이 그 조그만 편지지를 양손으로 들고.


  편지에서 오이카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편지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보내 온 작은 엽서를 떠올렸다. 도쿄의 야경을 찍은 사진 뒷면에는 오이카와의 깨끗한 글씨가 놓여있었다. 선이 없는데도 정갈하게 줄을 맞춰서. 글씨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오이카와에게 들었던 도쿄의 자취집 주소, 그리고 카게야마의 집주소. 풀자국도 없이 붙여진 우표 아래의 오이카와의 글씨가 무언가 생소했다. 항상 라인으로만 대화했으니까, 글씨를 보는 것은 중학교 이래 처음일지도 몰랐다. 글씨를 잘 쓰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의 깨끗한 글씨로 쓰여진 '카게야마 토비오 귀하' 가 못내 생소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두근두근하면서도, 무언가 오이카와가 다른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어쩌면 오이카와는 자신이 못 본 며칠 사이에 조금씩 변한 걸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조금의 두려움을 느끼며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깨끗한 오이카와의 글씨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편지의 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이 조금 움찔거렸다.


  '너와 보고싶은 것 첫번째'






  카게야마는 손에 든 편지지를 꽉 쥐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완연히 석양빛으로 물든 하늘이 거리를 부드럽게 비췄다. 동네 빵집은 문을 열어 방금 갓 구운 빵냄새를 풍겼다. 슈퍼 앞 할머니는 여전히 이 시간엔 졸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을 지나며 카게야마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어느새 반 달리다시피 하며 그 풍경들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보고싶다. 오이카와가. 보고싶다. 오이카와가 보는 풍경이. 이제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해졌을 그 풍경이, 나도 보고싶다.




  편지는 귀찮다. 편지는 골치아프다.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하나의 전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펜을 든다. 예쁘지 않은 글씨이지만, 길게 쓰지도 못하지만.
  오이카와가 좋아한 민트색의 편지지에 글을 적는다. 펜을 굴린다.


  '오이카와씨를 생각하며 산 편지지 첫번째.'


  그건 분명 편지로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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