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봄비를 닮은 사람

 

 

 

 

오랜만에 맞는 봄비였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봄비는 3월 막바지에야 겨우 내리기 시작해서 겨울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바람을 잠재웠다. 부슬비라고 하던가, 이런 비를. 카게야마는 복슬복슬 흐르는 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검은 우산 아래서의 까맣던 손이, 확 노래지면서 비를 맞게 되었다. 손에 와 닿는 감촉도 없이 젖어갔다. 서서히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하는 손을 다시 끌어당겨 우산 아래로 옮겼다. 젖어버린 손을 타고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줄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연하게 부는 바람은 카게야마의 귀 뒷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

 

카게야마는 툭 내뱉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빗줄기 안에서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우산 안에서 맴돌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몸을 적시는 봄비. 누군가와 닮았다, 는 생각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조그맣게 보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글몽글하게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있어서 봄비는 생소한 존재였다. 아니, 생소하다기보다낯선 느낌이었다. 무섭게 쏟아내리는 소나기나, 여름의 끝없는 장마 같은 장대비나, 겨울의 거친 바람 속의 흩날리는 비가 아닌. 소리도 없이 몸을 적시는 봄비는 낯설었다. 모 아니면 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실한 카게야마에게는 낯설고. 또 어려웠다. 항상 봄비를 맞이할 때면 누군가가 생각났다. 벌써 이런 봄비 아래에서 그 사람을 생각한 것도 몇 년째였다. 이제는 조금 알 법도 한데여전히 어려운 그 사람은 카게야마에게 수수께끼였다. 눈앞에 흐르는, 느낌조차 없이 젖어드는 봄비와 같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에게 하나의 답 없는 문제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

 

비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등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세이죠 교복을 입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눈가는 찡그리고 웃으며 서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빗줄기 건너로 보이는 오이카와는 약간의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벌써 약간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우산을 꼭 잡았다. 검은색 우산이 약한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뭐해? 가만히 서서.”

여기서, 기다리라고.”

여기 말고 저기. 저쪽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카게야마가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멋들어진 카페가 눈에 보였다. ‘멋들어진이란 표현은 오이카와에게 배운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게 무엇이냐고 오이카와에게 반문했지만 오이카와는 저런 걸 말하는 거야라며 카페를 가리켰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말에 있어서는 오이카와가 더 능숙했기 때문에 그런 거냐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카페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 들어서면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사실 오이카와는 어디에 서 있어도 풍경을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사람이었다.

 

뭔가 저런 데 혼자 있는 건 거북해서요.”

하핫, 그런 무서운 표정 짓고 있으면 당연히 그렇지.”

뭐라고요?”

, . 인상 쓰지 말라니까? 인상만 안 쓰면 꽤 괜찮은 얼굴인데 말이야.”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우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연한 민트색의 우산은 세이죠 교복과도 어울려 오이카와의 흰 피부를 더욱 드러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의 우산 아래에 오이카와의 흰 손이 불쑥 들어왔다. 우산과 우산이 겹쳐 비가 묻지 않은 그 흰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오이카와가 픽 웃었다.

 

, 안 잡아?”

밖이잖아요.”

, 어때?”

 

오이카와는 으쓱하면서 그저 공기 중에 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잡았다. 우산끼리 맞부딪쳐 어느 정도의 충격이 우산을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으로 전해졌다. 오이카와의 무게였다. 약간 버거운 느낌이 들면서도 기분 좋은 무거움. 눈앞의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이 뜨거웠다. 부슬거리며 내리던 비는 어느새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봄비란 그런 것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시작되고, 저도 모르는 새에 그치고. 그러면서도 어느새 봄비에 함빡 젖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 ✤ ✤

 

 

카페 안에선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딸랑가벼운 종소리에 종업원들은 고개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카페 내부는 많이 북적이진 않았다. 다만 봄비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자주 앉는 그 자리만 고집하는 오이카와를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는 어디든 똑같을 텐데도, 오이카와는 매번 그 자리에 가 앉곤 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기억하려고라고 대답했다. 무얼 기억하고자 한 걸까. 오이카와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카게야마도 그에 대해서는 짚이는 점이 있었다. 정해진 자리에서 보는 오이카와는 약간 빛이 났다. 약간 노란 전등불빛이 몸에 닿아 부서져 흰빛을 뿜어냈다. 카페라떼를 마시는 손가락의 움직임, 눈의 움직임. 가볍게 내렸던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볼 때의 그 얼굴. 카게야마는 그 모든 것들을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모두 저 자리에서만 오이카와를 마주 본 덕이었다. 어쩌면 오이카와도 그런 의미였을지도 몰랐다. 그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지고, 주변의 풍경에 녹아드는 그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에게도 카게야마가 그런 모습일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토비오쨩은 언제나 먹던 거지? 나도 그걸로 주문했어.”

왜 항상 마시던 카페라떼 아니구요?”

비오니까. 가끔은 좋잖아.”

비가 오면좋은 건가요?”

. 비가 오면 같은 걸 마시고 싶잖아.”

…….”

 

카게야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얼굴에 볼그랗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운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오이카와는 자리에 앉더니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항상 보던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의자 뒤편은 통유리라서 밖이 그대로 보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로 비치는 가느다란 빗줄기에 눈이 갔다. 봄비는봄비는, 오이카와를 닮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봄비를 닮았어요.”

?”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말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놀란 것은 카게야마였다. , 하는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숙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말이야? 반문하며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길지 않아 카게야마의 얼굴이 다 가려지지 않은 것이 카게야마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오이카와는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어느새 좁아진 미간을 흰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머리가 밀리는 느낌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마주봤다. ? 말해봐, 토비오쨩.

 

저기, 그러니까.”

.”

봄비는, 언제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잖아요. 그칠 때도 그렇고.”

.”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런 기척도 없고. 그래서 괜찮나 보다, 하고 발을 내디디면 순식간에 젖어버려요. 봄비로. 전부.”

, 그렇네.”

 

오이카와는 약간의 웃음기를 지우고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빠질 만한 말을 내뱉었나 고민해봤지만 아무런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지 오이카와는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해도 되는 걸까, 하면 안 되는 걸까. 카게야마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등 뒤로 흐르던 봄비가 그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빗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눈에 얇게 봄비가 다시 보였다. 멈춘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적시고, 나무를 적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우산 위로 떨어져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오이카와 선배도. 어느 순간 저를 적셔서 이것도 저것도 다 오이카와 선배로 만들어버리니까. 저도 모르는 새에 모두 흠뻑 젖어서 말릴 틈도 없이 오이카와 선배로 가득 차버려서. 봄비를 닮았구나, 하고.”

…….”

 

오이카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조심조심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폈다. 화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알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던 머리가 순간 새하얘졌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하얀 피부가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입술, , 이마까지. 그 작은 흰 얼굴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카게야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오이카와는 갑자기 짜증을 부렸다.

 

으아아, 정말이지! 토비오쨩 진짜 바보야?”

, ?”

 

갑작스레 욕을 얻어먹은 카게야마는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한 번 머리가 새하얘졌다. 오이카와가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테이블에 풀썩 엎어졌다. 부드러운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가 보였다. 보송보송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는 만지면 너무도 부드러워 이 세상의 감촉이 아닌 느낌을 느끼게 했다.

 

바보 토비오쨩. 날 또 죽이려고?”

, 뭘 죽여요?”

맨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는 툭툭 내뱉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까 봤던 붉어진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잡고, 저도 몰랐지만. 어째선지 키스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제 얼굴에도 확확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째선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생각한 것을 오이카와에게 그대로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보드랍게 퍼지는 머리카락은 예쁜 빛을 띠었다. 빛이 부서져, 반짝반짝.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길을 느끼는 건지 머리를 살짝 틀어 옆얼굴을 보였다. 정갈한 옆모습이 카게야마의 눈길을 끌었다. 그 자세 그대로, 눈길만을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움찔, 몸이 떨렸다. 그 홍차 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신기한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의 볼은 약간 발그랗게 물들어 있었다.

 

토비오쨩, 건방져졌어.”

제가요?”

. 중학교 때보다, .”

, 런가요. 아니, 중학교 때도 건방지진 않았어요!”

 

카게야마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오이카와는 그에 화내는 기색도 없이 생글 웃어 보였다. 예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붉은 입술이 분홍빛 볼에 어울렸다.

 

너도봄비야.”

?”

봄비라구.”

…….”

 

카게야마는 아까 오이카와가 했듯이 서서히 얼굴이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이내 푹.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번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마주 볼 수 없었다. 심장이 이상한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밖에선, 오이카와 건너편에선. 벌써 그친 봄비가 햇볕을 받아 바닥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맑은 햇살, 바닥을 적신 비. 마치 당신처럼.

 

토비오쨩, 나 봐봐.”

싫어요

? 고개 들어보라니까?”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서서히 눈을 들었다. 오이카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다. 어딜 가나 풍경이 되는 사람이다. 햇살 아래에서도, 빗줄기 아래에서도, ‘멋들어진카페에서도. 그 풍경 속에 젖어드는 게 자신이 되길 바랐다. 온통 오이카와로 젖어서, 그 안에 살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이카와도.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에 놓였던 카게야마의 손을 깍지껴서 맞잡아, 쭉 자신에게로 당겼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몸이 오이카와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그대로, 오이카와는 가볍게 카게야마의 입술에 키스했다. 스칠 뿐인 키스였다. 바로 앞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코가 스쳐서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달콤한 향기였다. 약간의 민트향도 섞인, 오이카와의 냄새. 카게야마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따스한 기운이 그 안에서 피어났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바라보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도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생크림같이 말랑한 입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이카와도 또한,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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