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네가

 

 

 

 

 

연이어 내린 비로 공기 중에 수분이 가득했다. 카게야마는 창문을 열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너져 내릴 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보슬비로 바뀌어있었다. 젖은 냄새가 났다. 킁킁, 카게야마는 몇 번 소리 내어 비 냄새를 맡은 뒤 고개를 들었다. 검회색 구름이 온통 뒤덮인 하늘은 가느다란 실을 뚝뚝 끊어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안개에 그대로 노출된 머리카락이 수분을 머금고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토비오쨩? 비 다 들어오잖아.”

오이카와가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흰색 브이넥에 주름진 청바지, 집에서의 그는 지나치게 바깥 모습과는 달랐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안경까지 쓰고,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며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를 읽는 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 오는 날은 싫어, 머리가 맘에 안 드니까라고 했던 오이카와는 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넘긴 채였다. 쉬는 날이어도 머리 세팅은 반드시 했으면서. 비가 오는 날의 오이카와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일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커피 테이블에 올려둔 코코아에서 나는 달콤한 향내가 거실 전체에 퍼져서, 비 냄새 사이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비 냄새는 싫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돌렸던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향한 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토비오쨩?’ 낮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빗소리 뒤로 넘겨버린 채.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곳은 작은 임대주택이었다. 아직 대학생 신분인 카게야마 대신 오이카와 명의로 된 집. ‘같이 살까라고, 오이카와는 그 날 우산 아래에서 말했었다. 오늘같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 비에 쫄딱 젖어서 조그만 구멍가게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오늘과 같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같이 살까, 토비오쨩.”

그 날 오이카와가 그 말을 건넨 건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와 눈이 마주치면 무심코 데려오고 마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그 날 카게야마를 만나버렸기에, 카게야마와 같이 사는 걸까. 카게야마는 비에 젖은 강아지와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걸까. 오이카와를 만나버리면, 카게야마는 그런 눈을 하고 마는 것일까. 서로가 어찌할 수 없었던 걸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보면 그런 눈을 하는 것도, 오이카와가 그런 눈을 한 카게야마를 보면 데려올 수밖에 없는 것도. 서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결국은.

오이카와는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카게야마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집안일은 반반씩이니까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벌써 반년. 오이카와는 여전히 카게야마와 같이 살고 있다. 카게야마는 비 오는 날이면 거울을 들여다봤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난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에 비친 저를 아주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저에게 오이카와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조금도 모르는 오이카와와도 같이.

무슨 생각해?”

뒤에서 큰 손이 뻗어와 제 입술을 톡 치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둘러 뒤를 바라보면 오이카와가 속 끝까지 훑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카게야마의 정면에는 흰색 브이넥 사이로 보이는 쇄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날 자신이 남겼던 붉은 자국이 여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걸 알고서 브이넥을 입은 게 분명하다. 성격 나쁜 건 변하질 않는군,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투둑, 툭 짧은 빗줄기가 창가에 떨어져 맑은소리를 냈다. 창 아래에는 꽃이 그려진 우산을 쓴 여고생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저러면 다 젖어버릴 텐데. 그런데도 강아지는 좋다고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코코아의 달콤한 냄새, 비 냄새, 오이카와의 향수 냄새가 났다. 보드라운 입술이 뒷목 선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

뿔테안경의 테두리가 귀 뒤편을 간지럽혔다. , 쪽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내려가던 오이카와는 손을 올려 창틀을 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창문, 닫는 게 좋지 않아?”

오이카와가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예쁜 손가락이 흘러 창문에 닿는 것을 보고,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창문 바깥, 아래층에서 키우는 화초에서 조그만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달팽이의 표면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오면. 저 달팽이는 저렇게 기어가는 걸까. 보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면서.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는 곳에 뭉근하게 열이 올랐다. 속눈썹이 무거웠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것을 견디면서,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

오이카와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착한 몸의 허리 부근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의 향수가 아닌, 그의 냄새. 그의 피부에서 나는 냄새는 카게야마의 침샘을 자극했다.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삼킨 뒤,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제가 달팽이로 변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달팽이?”

. 강아지나, 고양이나, 토끼같이 귀여운 동물이 아니라. 달팽이 같은 거요. , 지렁이여도 좋구요.”

토비오쨩, 달팽이야?”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게야마에게 눈을 맞췄다. 뒤돌아있던 카게야마도 창가에서 몸을 떼어내고, 오이카와에게로 돌아섰다. 약간 거세진 빗줄기가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에 후두둑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브이넥을 꽉 붙잡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달팽이가 되고 싶은 거야?”

…….”

카게야마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틀었다.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잠시간 카게야마를 바라보더니, 글쎄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빗소리가 들렸다. 비는 연이어 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비를 타고 건너온 바람결에 흔들흔들 움직였다.

휙 버려버릴지도.”

, 이요?”

. 휙 하고. 달팽이로 변한 토비오쨩을 바깥으로 버려버릴지도.”

그런가요.”

아무렇지 않게, 여러 여자를 울렸던 웃는 얼굴로 말하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슬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던져지면 더는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시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오이카와의 브이넥도, 주름진 청바지도, 저 익숙지 않은 까만 뿔테안경도, 홍차 빛 눈동자도, 쉬는 날이면 약간은 무장 해제되는 그의 모습도. 모두,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평생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있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창가에 서 있느라 온통 식어버린 입술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부드럽게 누르는 손가락은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그런데도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카게야마를 다루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허락해줄게. 배고파하는 것 같으면 양배추 한 쪼가리는 건네줄 수 있어. 비바람이 심하면 아주 잠깐이지만 집 안에 있는 것도 허락해줄게.”

달팽이인데도요?”

달팽이여도. 토비오쨩이잖아?”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요?”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 비에 쫄딱 젖은 토비오쨩이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징그러운 건 질색이니까, 징그럽게 생긴 달팽이여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때, 오이카와씨 친절하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허리 뒤로 손을 두른 뒤,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그의 피부에만 닿으면 카게야마는 열이 올랐다. 전신이 그의 냄새를 기억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화학작용과도 같이. 카게야마에게 있어서의 오이카와는, 오이카와가 평생 가도 모르는 존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어떤 존재인지,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봐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친 저가 어떨지. 그래도, 아주 조금. 카게야마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이카와에게 저는, 어쩌면.

카게야마는 이제 슬며시 열이 오른 팔을 들어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의 등에 대고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의 쇄골에 입술을 묻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도 보통 달팽이 이상은 되는 것 같네요.”

보통 달팽이면 버리긴커녕 창문에서 떨어뜨릴 거야. 징그럽잖아.”

착하다기보단 잔인한 거 같은데요.”

징그럽잖아.”

어린아이같이 투덜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속에 녹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무거웠던 눈꺼풀을 그제야 내려놓았다. 뜨끈뜨끈한 눈가가 기분 좋았다. 빗소리가 다시 약해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숨을 들이켰다. 젖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코코아의 향기도 났다. 오이카와와 사는 집의 향기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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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카와의 브이넥, 검은 뿔테안경 이미지는 히징님이 언젠가 그렸던 오이카와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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