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란오님의 생일 기념 짧게 끄적인 글입니다!!
   * 란오님 생일 축하드려요!!!! >////<






[오이카게] 눈치 없는 후배

 

 

 

 

번쩍하는 섬광이 하늘을 찢고 지나갔다. 그 뒤를 잇는 거대한 천둥소리가 지면을 흔들었다.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여름날의 장마는 매번 심했지만, 이번 해에는 유달리 강렬하게 퍼부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회색의 시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거세게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살풍경해서, 세상 끝날에라도 서있는 기분을 자아냈다. 이제 겨우 오후 5시인데도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리저리 튀어 오른 머리를 짜증스레 매만지며 체육관을 나섰다. 아침에 챙겼다고 생각했던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집 안 신발장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정하게 학교까지 데리러 오는 부모는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는 포기하고 가방을 머리에 단단히 이었다. 겨우 머리만 감쌀 수 있는 가방은 이미 눅눅한 습도에 축 늘어져있었다.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는 굳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꿍얼거렸다. 한 시간 일찍 가버린 이와이즈미는 우산을 쓰고 여유롭게 갔으리라. 그 때에는 오이카와도 우산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이와이즈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뒤적이니 언제나 쓰고 다니던 민트 색 우산이 없었다. , 가볍게 혀를 차며 오이카와는 다리를 박차 검은 공간에 몸을 던졌다. 얼굴을 때리는, 몸을 때리는 매서운 빗줄기가 따가웠다. 막을 새도 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비바람에 오이카와는 가방을 잡고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입안에 고이는 젖은 먹구름의 맛은 축축했다. 가볍게 입술을 핥고 발을 열심히 움직였다. 교복으로 안 갈아입길 잘했다, 오이카와는 가빠오는 숨을 느끼며 생각했다. 비록 세이죠의 새하얀 저지는 더럽혀질지언정, 저지는 항상 빨 수 있으니까. 발 끝자락에 스며든 검은 흙탕물을 보면 조금 불쾌해질 것 같지만, 뭐 그 정도야.

 

◆ ◆

 

오이카와는 눈앞에 보이는 처마 끝에 급하게 몸을 우겨넣었다. 평소 이와이즈미,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즐겨 들르던 작은 가게였다. 가게 주인인 할머니는 지병인 무릎통증 때문에 비가 오면 가게를 열지 않곤 했다. 애초부터 이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빗줄기가 나아지길 기다릴 예정이었다. 온 몸이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젖어있었다. 가방으로 겨우 가린 머리카락도 세찬 바람에 의해 잔뜩 젖어서, 그 끝에 종모양의 물방울을 톡톡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흘린 뒤 어깨며 머리카락을 털었다. 몸 구석구석 싸인 비의 장막을 덜기에 소용은 없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불쾌감만이라도 덜고 싶었다. 속눈썹 끝에 맺힌 물방울이 간지러워서 눈을 감았더니, 볼 언저리로 또륵 흘렀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빗소리만이 들렸다. 파도소리가 끝도 없이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젖은 공기, 흔들리는 진동, 몰려드는 한기. 언제쯤 그치는 걸까. 멈추지 않는 물소리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검은 시야검은 시야였다. 아니, 빗줄기로 채워진 검은 공간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질이 그곳에 있었다. 익숙한 검은색 저지였다. 낯익은 몸이었다.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몸통이 아닌 제대로 된 고등학생의 몸이었다. 이제는 시선의 방향이 퍽 비슷한 몸이기도 했다. 검은 색 우산을 쓰고, 검은 색 저지를 입고, 검은 색 가방을 매고, 검은 색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뭘까, 검은 사신일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뭐해,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야말로 이런 곳에서 뭐하세요?”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약간 음영이 진 얼굴은 험악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매번 저런 표정을 지었다. 짜증을 내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단순히 ?’라는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보면 몰라? 우산 없어서 쫄딱 젖었잖아. 여기서 잠깐 기다릴거야.”

, 오늘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하던데요.”

카게야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이카와를 꼼꼼히 바라봤다. 젖어서 가라앉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흙탕물이 이리저리 튄 발끝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검은 색 일색이라 젖은 티도 나지 않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욱한 심정이 들었다. 상쾌함이라고는 일점도 없는 음울한, 말 그대로 찌그러진 비구름에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나도 알거든? 잠깐 빗줄기가 약해질때까지만이야.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옷 다 젖었는데요. 바람도 거칠고. 춥지 않으세요?”

또 한 번, 갸웃거린 카게야마는 우산을 든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하나하나 생각이 눈에 보이는 번거로운 후배였다. 오이카와는 그 눈에 빤히 보이는 움직임에 시선을 사선으로 틀어 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면 눈이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 귀 안에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카게야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다시 시선을 맞추자 카게야마는 한 발자국 다가와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선 짙은 파랑 빛이었던 눈동자가, 검은 하늘 아래에선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우산.”

필요 없어.”

오이카와는 조급하게 내뱉었다. 차갑게 떨궈낼 요량으로 낮게 내뱉었으나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도 없는 후배는 이런 때에도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제 생각은 하나하나 눈에 박힐 정도로 보이게 만들어놓고선, 오이카와가 던지는 비언어적인 표현은 하나도 알아먹질 못하는 짜증나는 후배였다. 카게야마가 가까워져서일까, 그의 검은 우산에 퍼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커졌다. 투둑 툭 간헐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계속되는 바람소리. 거칠게 처마 안으로도 노나드는 빗줄기는 오이카와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바람이 거칠었다.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 그럼, 갈게요.”

그래. 얼른 가라니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내리더니 그 길로 뛰어가 버렸다. 찰박 찰박, 촉촉한 물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메꿨다. 오이카와는 괜시리 짜증이 났다. 자신에 대해서, 카게야마에 대해서. 중학교 때 제 등을 지칠 줄 모르고 쫓아다니던 카게야마는 더이상 없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옆에 서서, 같이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 , 다시 혀를 차면서 머리를 털었다. 처마로 들어온 비 때문이었을까, 젖은 머리에서 아까와 같이 다시 물방울이 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이카와가 전하고자하는 생각은 못 알아먹는 후배였다. 건방진 녀석, 항상 하던 말을 머릿속에서 툭 내뱉은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먹구름이 하늘 안에 빼곡히 차들어 있었다. 저게 다 투명한 흰색으로 돌아오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걸까. 굳게 닫힌 가게 셔터에 몸을 기댄 뒤 길게 한숨을 뱉었다. 몰려드는 피로감과 끝도 없는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뛰어오는 소리. 뛰어오는 소리? 오이카와는 다시 정면으로 시야를 돌렸다. 검은 사신이 오이카와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건, 밝은 갈색의우산이었다. 사신은 아까와 비슷한 거리까지 오더니 몸을 굽혀 숨을 가다듬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오이, 카와 선배

, 토비오쨩?! 뭐 하러 다시 온 거야?”

이거요!”

처마 밑으로 내민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밝은 갈색의 우산.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 안에서, 유일하게 을 가진 존재였다. 오이카와는 우산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에서 새끼손톱만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라니. 항상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좀 더 심했다. 아니, 모든 것이 빤했다. 제 감정 따위, 생각 따위 숨기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후배 녀석.

이거 뭐? 우산이잖아.”

오이카와는 애써 넘겼다. 받아야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걸 위해 카게야마가 다시 온 것조차도, 오이카와는. 모든 건 오이카와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속속들이 보였음에도 오이카와는 눈을 가렸다.

우산, 쓰세요. 저희 집에서 가져온 거에요. 가지셔도 되니까 안 돌려주셔도 돼요.”

아니, 됐다니까? 왜 내가 너희 집 우산을 받아야하는데?”

저 집 문을 열어두고 와서요. 얼른 돌아가야 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들린 채 그 길로 다시 뛰어가 버렸다. 서서히 사라지는 검은 사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더 이상 눈을 가릴 수 없었다. 손에 들린 우산이 묘하게 무거웠다. 무거워서, 떨어뜨릴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꼭 감쌌다. 메마른 우산이, 물기가 녹아있는 오이카와의 두 손 안에서 젖어 들어갔다. 항상 검은색 우산만 들고 다니는 카게야마가, 밝은 색의 우산을 고르고. 집 문도 열어둔 채, 온 몸이 젖어가면서. 오이카와에게 검은 사신은, 건방진 후배는 정말이지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온갖 정보를 들이붓는 귀찮은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 위에는 흘러내릴 물방울이 없었다. 그런데도 볼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톡톡 튀는 별사탕이 목구멍에 잔뜩 걸린 느낌이었다.

더럽게 귀여운 후배 녀석.”

별사탕이 하나씩 터져서 목이 따끔거렸다. 볼은 간질간질, 목은 따끔따끔. 손 안에서 우산이 자꾸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우산을 펼쳤다. 둥그렇게 퍼지는 밝은 갈색의 우산이, 누군가의 머리통을 떠올려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우산을 들어 머리 위에 썼다. 새하얀 저지가 갈색 빛에 물들었다. 약간 어두운 색이 더해진 그 저지는, 마치 검은 빛에 감싸인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킁, 코를 훔치며 거센 빗줄기 속으로 발을 옮겼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