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징님(@phantom_hj)과 한문장 연성하기 '나는 아직도 당신이 어렵다.' (호칭 변경 가능) 첫문장 맡았어요!! >.<
    히징님의 세계 최고 오이카게 만화는 이쪽입니닷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524C335545CE290D









와르르 무너져 내린 하늘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빗줄기가 거칠게 우산에 붙어왔다. 오이카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우산을 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때리는 비바람이 거셌다. 아침에는 맑았는데, 입술을 씹으면서 생각해봤자 몰아치는 폭우에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우산으로 머리는 겨우 가렸지만 덮치듯이 불어온 빗줄기는 온몸을 흠뻑 적셨다.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는 오이카와의 눈앞에 현관문이 보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함께 사는 집. 2층 주택을 싸게 구한 건 더 없는 행운이었다. 여기저기 낡았다거나, 이런 비 오는 날 가끔 물이 새는 걸 빼면 아쉬울 것 없는 집이었다. 겨우 도착했네,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2층 베란다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시야 속에서 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멈춰선 뒤, 입을 벙긋거리며 하얀 한숨만 토해냈다.

지금, 잘못 본 거 아니지? 눈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광경에, 짙은 회색빛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오이카와는 고개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다리를 조금 전보다 거칠게 움직이자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 물방울들이 다시 첨벙거리며 솟아올랐다. 다 젖어버린 손에 들려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 때문에 버스럭버스럭 소리를 냈다.

 

✤ ✤

 

토비오! 빨래!”

 

외치면서 들어온 오이카와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거실에서 월간 밸리 잡지를 읽고 있던 카게야마가 눈을 들어 올리자마자 오이카와는 사라져있었다. 오이카와씨, 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카게야마도 몸을 일으켰다. 계단이 물 얼룩으로 가득이었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양말이 젖지 않게 얼룩들을 피하며 발을 내디뎠다. 기껏 청소 다 해뒀더니. 꿍얼거리면서 계단을 모두 오르자, 오이카와는 2층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빗물이 잔뜩 물든 옷가지를 걷어들이고 있었다. 이미 젖어버린 오이카와의 셔츠와 바지에 한 차례 물벼락이 쏟아졌다.

오이카와씨?!”

비 오는데 왜 빨래를 여기에 널어놔?!”

오이카와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빗줄기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옆에 개켜놓았던 수건 한 장을 들어 그 머리에 허겁지겁 엎었다.

오이카와씨가 빨래 널라고 하고 나가셨잖아요!”

비가 오면 당연히 걷어놔야지!”

갑자기 쏟아질 줄 저도 몰랐다고요!”

오이카와는 베란다 옆에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젖어버린 빨래들을 던져놓고선, 제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 떨리면서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깊은 한숨을 내뱉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보였다. 머리에 붙어있던 물기를 모두 머금은 수건 사이로, 축 늘어진 홍차 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열린 채로 남아있는 베란다 문 너머, 눈에 보일정도로 선명한 빗줄기가 연이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투둑, . 베란다 문에,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쑥날쑥 들려왔다. 오이카와의 전신에서 풍기는 축축한 비 냄새가 작은 2층 방 안에 훅 퍼졌다. 금속같이 차가웠던 손이 카게야마의 온기를 받아 서서히 열을 띠었다. 젖은 셔츠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카게야마의 귓속에 울렸다.

진짜, 토비오. 정말이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동골동골 맺힌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난 네가. 나는 아직도 네가 어렵다.

 

 

 

 

 

 

 

 

 

 

30년이 지나도

 

 

 

 

 

 

 

 

 

샤워를 방금 끝내 보송보송 열이 오르는 몸은 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휘파람을 불면서, 저녁 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봉지에 손을 넣어 재료를 꺼내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오이카와는 아까와 같이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보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토비오, 뭐 해줄까? 저녁.”

카레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묻자 카게야마는 읽던 잡지를 거칠게 내려놓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은 별이 담긴 듯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알았어.”

오이카와는 손을 움직여 봉지 속의 카레 루를 꺼냈다. 이어서 나오는 것은 고기, 당근, 양파, 감자누가 봐도 카레 재료였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달걀 두 개까지 꺼내면, 머릿속에 있는 레시피의 재료로 빠진 것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갈 때까지 볶았다. 2인분으로 샀던 냄비를 찬장에서 꺼내 볶은 재료들을 넣고, 익숙한 양만큼 물을 채워 넣으면 밑준비는 완성이었다. 그 안에 방금 사 온 카레 루를 조심조심 넣고 불을 올리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포크커틀릿으로 만들 돼지고기 등심을 다듬고 있자, 등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달걀도 올려주실 거에요?”

내키면.”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티셔츠 끝자락을 붙든 손이 컸다. 중학교 때에는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어깨에 턱 괴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네. 오이카와는 기억 속의 카게야마를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매달린 채로 고기를 다듬는 손길을 뚫어질 듯이 바라봤다. 강하게 뻗어오는 시선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한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몇 번이나 만들어줬잖아? 이제와서 다를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봐.”

오이카와씨가 만들어주는 카레는 매번 다른걸요. 매일매일 다른 맛이 나요.”

카게야마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말에, 오이카와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카게야마의 시선은 그대로 돼지고기에 고정된 채였다.

뭐야, 맛없던 적도 있어?”

똑같은 레시피인데 매일매일 다른 맛이라니.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레시피만을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었기에, 오이카와의 요리실력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의 등에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강하게 도리질 쳤다. 꾸욱 꾸욱 눌리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푸핫,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벌이라는 의미로 쓰다듬던 목 뒤를 찰싹, 가볍게 때렸다. 카게야마는 아야,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고개를 갸웃해 보인 카게야마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날따라 조금씩 느낌이 달라요. 어떨 땐 뭐랄까, 행복해지는 맛이고. 어떨 땐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고. 어떨 땐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쳤다. 입은 그대로 열려있는데, 들리는 건 불에 올려놓았던 카레가 잘게 끓는 소리뿐이었다. 오이카와는 한번 가볍게 숨을 들이킨 후, 어떨 땐?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떨 땐 매일 먹고 싶어요.”

매이일~?”

오이카와는 대놓고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카게야마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려 다시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씨는 매일 카레는 싫어.”

전 좋은걸요!”

카게야마는 어깻죽지 사이에 머리를 갖다 대더니, 꾸욱 꾸욱. 오이카와의 상체가 약간 밀릴 정도로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깨에서 느꼈던 간지러움이 살살살 등에 모이자 오이카와는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토비오, 그만하라니까.”

오이카와는 고기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제 등에 매달려있던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돌려서 그 얼굴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오이카와의 팔이 카게야마의 허리에 둘려 있었다. 티셔츠 너머로 단단한, 그래도 아직은 얇게 잡힌 근육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씨에 비하면 아직은 한참 멀었다니까. 오이카와는 눈을 얇게 뜨고, 카게야마의 살짝 열려있는 입술에 닿을 뿐인 키스를 했다. , 가벼운 소리가 나기 전에 눈을 감았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채 떨어지기 전에 살포시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민트 색의 티셔츠를 붙들고 있는, 오이카와의 가슴께에 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까지 굳어있는 그 손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잡은 뒤 오이카와는 입술 간의 좁은 사이를 메우듯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얼굴을 틀어 더욱 깊숙이 혀를 집어넣고, 침이 고인 카게야마의 혀 밑을 훑었다.

,

얼굴을 새로 겹칠 때마다 젖은 소리가 귀에 촉촉하게 젖어 붙었다. 그 사이사이 섞여나오는 카게야마의 비음에, 오이카와는 혀가 녹을 것 같은 달콤함을 느끼며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간의 키스가 지난 뒤, 오이카와는 동그랗게 붉어진 카게야마의 눈가를 매만졌다.

카레, 다 끓겠다.”

오이카와가 말랑말랑한 귓불을 꼬집으며 흘려 넣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그럼 허리 놔주세요.”

카게야마의 볼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귓가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키득거렸다.

.”

오이카와는 솜털이 보들보들 남아있는 귓바퀴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다시 입술로 옮겨 카게야마의 입 안쪽으로 혀를 돌렸다. 입천장을 쓸 듯이 긁고, 몰캉한 볼 안쪽도 간질이자 카게야마가 헐떡이는 신음을 흘렸다. 불 위에 올려둔 카레에서 폭폭폭 끓는 소리가 났다. 뇌 속을 녹이는 달콤한 입술에서 겨우 얼굴을 뗀 후, 오이카와는 타액이 묻어있는 입술을 다셨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르르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그 상태 그대로 제 얼굴을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묻더니, 다시 꾸욱꾸욱. 머리를 비비면서 밀어왔다. 이번에는 자연스레 솟아나는 웃음에, 오이카와는 다시 미소 지으면서 카게야마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 달짝지근한 카레 냄새가 부엌 공기를 가득 메웠다.

 



✤ ✤

 



조그마한 2인용 목제 식탁은 둘이서 고른 물건이었다. 가구 같은 건 잘 모르겠다는 카게야마를 외국에서 들어온 유명한 가구점으로 이끈 건 오이카와였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성이 좋은 걸 몇 개 오이카와가 먼저 고른 후 그 안에서 카게야마가 고르게 했다. 안 그러면 가구점에서 죽치고 앉아서 땀만 뻘뻘 흘리는 카게야마를 평생 기다릴 게 뻔하니까. 당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골라 온 몇 개의 후보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간 고민하더니, 정사각형 모양에 백색에 가까운 상아색의 목제 식탁을 골랐다. 왜 이걸로 골랐느냐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그냥요. 가장 오이카와씨랑 어울리니까? 그렇게 대답한 건, 아직도 의문이지만.

오이카와는 민트 색의 식탁보가 깔린 양쪽 측면에 카레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았다. 방금 튀겨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크커틀릿을 얹고, 완숙이 되지 않게 신경 쓴 반숙 달걀을 올리면 음식 자체는 완성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샐러드를 투명한 볼에 담고, 레몬 갈릭 드레싱을 살짝 뿌리면 평소의 저녁밥이었다. 마지막으로 물 두 잔을 정수기에서 받은 뒤 접시 옆에 두면, 작은 목제 식탁은 꽉 들어찼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부르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금세 다물었다. 상아색 식탁 한가운데에는 연한 초록빛의 로즈마리 화분이 놓여있었다. 3일 전 카게야마가 먹을 수 있대요, 하면서 갑자기 사온 허브 화분이었다.

아니, 먹을 수는 있지만?’ 오이카와는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꿀꺽 삼킨 후, 손을 들어 로즈마리 화분을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로즈마리 잎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문지르던 손을 들어 가만히 코에 갖다 대면, 언젠가 맡았던 아로마 향초같이 노곤한 향기가 슬그머니 묻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손을 내리고, 다시 카게야마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읽는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소파에 앉아있는데도 꿋꿋이 다리를 올리고, 특정 부분을 읽을 때면 미간을 좁히면서 표정이 험악해지는 버릇. 눈이 반짝이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몰입한 모습에,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토비오, 밥 먹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가면, 카게야마는 귀를 쫑긋 세우고 돌아봤다. 방금까지 빛나던 눈동자가 더욱 밝기를 더하더니, 읽고 있던 월간 밸리를 던지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눈앞에서 스르르 연기가 오르는 카레를 보고선, 카게야마는 진정되지 않는 모양새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오이카와도 마주 보듯이 자리에 앉은 뒤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잠시간 가만히 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숟가락을 들더니, 카레를 한 움큼 퍼올렸다. 아앙크게 벌린 입안으로 카레 한 움큼이 푹 들어가는 걸 보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입가 구석에 카레 소스를 잔뜩 묻히는 것을 바라봤다. 한 입 넣었는데도 벌써 묻다니. 한숨이 나오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아직도 그래서 넌 어떡하냐, 진짜.”

약간의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장난스레 내뱉은 뒤, 또 한 입을 넣으려는 카게야마의 턱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 입꼬리에 묻어있는 묽은 금빛의 카레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쓸고, 손가락을 끌어 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만히 혀에 갖다 대고 맛을 음미하면, 오이카와의 기억 속 그 맛 그대로였다.

, 맛있네. 역시 내가 만든 카레야.”

오이카와는 뿌듯한 듯이 미소 지으며 자기 몫의 카레를 한 입 떴다. 그대로 집어넣으려고 조그마한 입을 벌리자, 카게야마의 눈빛이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먼 곳을 보는 듯이 멍하게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눈치채고, 오이카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콧망울에 닿을 듯이 모락모락 오르던 카레 김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깊은 카레 향이 목제 테이블 안에 가득했다.

?”

오이카와는 말없이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미소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의 입 주변은 아까와는 달리 깨끗했다. 그 입이 슬며시 닫혔다가, 오물거린 뒤 다시 열리는 것을 오이카와는 가만히 지켜봤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오이카와씨가 만든 카레는 30년이 지나도 이 맛이겠죠?”

오이카와는 머릿속이 잠시간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 끝에 걸어놓았던 미소를 내려놓았다. 뒷골이 슬쩍 당기는 것을 느끼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손을 아로쥐어 주먹을 꾹 쥐었다.

토비오, 너 나한테 30년이나 카레만 만들게 할 셈이야?”

카게야마는 물음으로 대답한 오이카와에게 누가 봐도 놀랐다는 얼굴로 엇,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안 만들어 주실 건가요?”

연이어 이어진 질문에 오이카와는 하아깊은 한숨을 내쉰 뒤, 주먹 쥐었던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무거운 두통이 눈 바로 위에서 뚝뚝 떨어졌다.

저기 있지, 토비오. 너 말야

오이카와는 입을 연 채로,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눈을 낮게 내리깔자, 푸근한 열기가 오르는 카레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한 오리지널 레시피. 바삭하게 튀긴 포크커틀릿, 그 위에 올린 반숙 계란. 전부 오이카와의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자다가 일어나도 대답할 수 있는 레시피. 혀끝에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맛.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오이카와를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조금 전의 카게야마와 같이 입을 다물고, 얼마간 우물거리다가 다시 열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약하게 들리면 어쩌지, 조금 걱정하면서.

있지, 토비오쨩. 나 벌써 스물일곱 살이잖아? 마음의 나이는 스무 살이지만. 토비오는 스물다섯 살이고.”

마음의 나이, 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죠.”

카게야마는 의문의 눈초리로 미간을 좁히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걸쭉하게 흰 쌀밥 위를 덮고 있는 카레를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밥과 카레가 섞이면서, 고운 빛깔이 촉촉하게 빛났다. 테이블 위의 전등에서 부드러운 크림색의 빛이 부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토비오는 언제까지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인걸까.”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요?”

카레를 휘저을 때마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연기가 뭉텅이로 터져 나와 조용한 공기 속에 퍼졌다. 오이카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로즈마리를 흘끗 곁눈질했다. 연초록색 잎들이 싱싱했다. 오이카와는 약간의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뽑아냈다.

카레도 언젠가는 식고. 로즈마리도, 언젠가는 말라죽을거고. 그렇게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이 집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토비오도

오이카와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 입이 이번에는 열리지 않았다. 꾹 다문 입술을 입안으로 당긴 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번 갸웃, 해 보이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기어코 팔짱까지 낀 카게야마의 관자놀이에 연하게 땀이 배었다. 눈에 안 보이는 증기가 피쉭 피쉭 머리 위로 몰려나오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입을 툭 내밀더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저기무슨 뜻이에요?”

하아, 하하

오이카와는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단념이 섞인 한숨을 흘린 후, 휘젓던 카레를 숟가락으로 한 입 떴다.

아냐, 됐어. 카레나 먹자.”

오이카와씨는 항상 어려운 말만 하시네요.”

오이카와가 눈을 들자, 카게야마는 조용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오이카와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전등에서 떨어지는 불빛이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흩어졌다. 오이카와는 다른 존재를 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끼는 동시에 저 아래 쪽으로 접어넣은 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저 안 어린데요. 스물다섯인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흐응? 코를 울린 뒤 눈썹을 씰룩이더니 카게야마의 깨끗한 입 주변을 가리켰다.

입가에 묻히면서 먹는 토비오는 아무리 커도 어린애랍니다.”

…….”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노려보듯 오이카와를 치켜봤다. 오이카와가 이겼다라는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는 다시 차분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전 어려운 말은 잘 몰라요. 오이카와씨가 하는 말 대부분은 어려운 말이니까, 대부분은 잘 몰라요. 그래도 그건 알아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눈앞의 카레로 향했다.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어느새 잦아든 오이카와의 카레는, 아직도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1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저한테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는 건 알아요.”

오이카와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곧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아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조금 기울이더니, 어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 때의 카게야마였다.

,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오이카와씨는 언제나 제 옆에 있으실거잖아요? 믿고 있거든요, 오이카와씨를.”

입가가 시큰거릴 정도로 달큼한 카레의 향기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얼풋 로즈마리 향이 나는 듯했다. 코 안쪽이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로 가득차서 머리가 약간 몽롱해졌다. 오이카와는 입가를 몇 번 달싹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저 뱃속까지 내려갈 듯이 아래쪽을 향해 고동치고 있었다. 흰 볼이 열기로 인해 따끔거릴 정도로 붉어진 게 느껴졌다. 뜨거운 카레의 맛이 그 볼에 닿아 훅훅 퍼졌다. 입을 열면 그 열기가 한꺼번에 후욱 빠져나올 것 같아 오이카와는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나랑 같이, 계속 이대로 있고 싶어? 토비오.”

카게야마는 짜증이 톡 올라온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봤다. 인상나쁜 눈매의 끝이 엷게 물들어 있었다.

꼭 말해야 해요?”

.”

오이카와는 심장으로부터 열이 전달된 손을 들어, 다홍빛으로 물든 그 눈꼬리에 가만히 갖다 댔다. 카게야마는 제 볼에 닿은 오이카와의 손에 가볍게 기대면서 시선을 틀었다. 우주가 담긴 눈동자 끝이, 여름날 잘 익은 체리처럼 더욱 붉어졌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의 열기와 카게야마의 볼에 담긴 따스함이 뭉근한 열을 만들어냈다.

전 그냥, 오이카와씨가조금만 더 저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걸?”

제가 오이카와씨를 그저,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요.”

믿고 있다고?”

카게야마가 틀었던 시선을 돌려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의 속을 훑어, 저 끝까지 꿰뚫어보는 눈동자였다. 저에게 고백할 때도 카게야마는 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겉모습, 행동, 말투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향한 눈동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카게야마의 저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임을 실감했다.

. 30년 뒤의 일은 몰라요. 제가 어떻게 될지,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그저 배구를 계속하리란 것뿐이에요. 근데 오이카와씨는 믿을 수 있어요. 30년 뒤에도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고. 오이카와씨는, 그때도 제 얼굴을 잡고. 키스, 해 주실 거라고.”

잠시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던 카게야마는, 다시 얼굴을 고쳐 들었다.

이 집이 아니어도 돼요. 로즈마리 화분이 있는, 이 테이블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냥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의 카레면 돼요.”

오이카와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아, 목덜미를 붙잡힌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따뜻해진 심장에 머리가 적응하지 못해, 여기저기서 치직치직 불꽃이 타는 느낌이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전부 익어서 녹아내린 뇌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과도한 열로 인해, 카게야마의 볼에 대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한 땀으로 가득했다. 가슴을 그대로 부여 잡힌 듯한 괴로움에 발끝까지 쥐가 난 듯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에 닿았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토비오.”

제대로 말로 나오고 있는 걸까.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인 건 아닐까. 입술이 작게 떨리면서, 오이카와는 눅눅하게 익어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머릿속에서 부옇게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낯익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말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는 너무 알기 쉽다면서요?”

불만이 담긴 입술이 튀어나오더니, 카레를 한 입 떠서 제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따스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오이카와도 금빛 카레를 담았던 숟가락을 들어 입안에 넣었다. 코끝에만 가득했던 카레 향이 입안 곳곳에 퍼졌다. 토비오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레시피는, 누가 쿡 찔러도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 30년이 지난 뒤에도 잊을 수는 없겠지. 오이카와는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올라간 입꼬리를 보더니, 카게야마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또 저 비웃으려고 그러죠?”

푸핫, 아니야.”

됐어요. 익숙하니까.”

불퉁한 얼굴로 반숙 달걀과 함께 카레를 입에 넣고, 카게야마는 쩝쩝 소리가 나게 씹었다. 오이카와는 하핫,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난 아직도 네가 어려워. 가끔은.”

전 항상 오이카와씨가 어려운데요.”

그건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안 어리거든요?!”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감싸듯이 잡았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단단한 손은 오이카와가 전부 감쌀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오이카와는 스물다섯 살 남자의 손을 확인하듯 가만히 쓰다듬었다.

. 알아. 알고 있어, 토비오에 대해선 전부.”

그런데도, 난 아직도 네가 가끔 무서워질 정도로 어려울 때가 있어. 내가 알 지도 못 하는 곳에 조용히 스며들어서, 넌 가끔 툭 튀어나오거든. 난 몰랐던 네가. 오이카와는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이사이로 열이 퍼지자, 카게야마도 몸을 오이카와에게로 기울인 후 속눈썹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감긴 눈두덩이 전등 빛을 받아 보드라운 색을 띠고 있었다. , 가벼운 소리가 퍼지며 서로의 입술이 닿자마자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가늘게 뜬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다시 키스를 떨어뜨렸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숨소리만 퍼지는 공기 속에 간간이 들렸다. 코끝으로 달콤한 카레 향에 섞인 카게야마의 냄새가 스치고 지나갔다.

“30년 뒤에도, 카레 먹고 싶어?”

낮게 물으며 간지럽히듯이 콧망울에 키스하자,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뜬 뒤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볼덩이를 말갛게 붉혔다.

. 오이카와씨의 카레요.”

카게야마에게서부터 얽어오는 혀가 뜨겁고, 물컹하고, 또 전기가 오를 정도로 달았다. 익숙한 카레 맛이 타액에 속속들이 녹아들어 풍미를 더했다. 맞잡은 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이 들어갔다. 30년 뒤에도 네 손이 똑같이 따스하다면, 그렇다면.

 

, 만들어줄 수는 있어. 카레쯤이야. 30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