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운명의 상대라는 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면 자주 나오는 저 말은, 쉽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상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색이 아주 특별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회색의 세상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 내가 먹고 있는 수프의 색과 아주 단순하게 내 몸의 털이 무슨 색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전부 다 회색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말을 배우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회색 그림책을 내게 사줬다. 그림책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색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지만. 어머니는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을 읽고 한 장 넘겼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아는 회색의 세상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 내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

어느 날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빛깔, 얼음처럼 차갑고 사나운 빛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빛까지. 루시아는 그것이 색깔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시아의 운명의 상대는 소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림책의 문자를 읽어나갔다. 책 속의 루시아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머니는 그림책을 덮고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에 찬 듯 반짝였다.

토오루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루시아에게 소니 같은 사람, 엄마에게 아빠 같은 사람.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내 행복이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가기 전 동거 상대가 데려온 회색 고양이 토토가 가늘게 울었다. 토토의 등을 한두 번 쓰다듬어준 후 작은 코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동거 상대와 머무는 회색 지붕의 건물 3층은 경치가 꽤 좋고, 안방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2인용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동거 상대는 자주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안방에서 토토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이면 직접 만든 카레를 먹고, 회색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그와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고, 루시아가 말했듯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얼마 후 있을 국가대표 결정전을 대비하고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날도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이었다. 나는 그가 없는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동거 상대는 내가 없는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선잠이 드는 날이 늘어갔다.

급해서 대충 챙겨 입고 나온 외투는 초겨울용이었다. 소매 안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색이 없는 세상에서회색을 색이 아니라고 본다면사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바람의 세기와 피부에 와 닿는 온도, 콧속을 한꺼번에 채우는 향기뿐이었다. 봄의 벚꽃과 장미향기, 여름의 턱 끝까지 답답한 열기,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겨울의 회색 눈덩이가 내가 아는 계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실내에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바쁘게 연습과 시합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건 내 동거 상대가 더 심해서, 작년 겨울에는 후드 티에 얇은 조깅팬츠 하나만 입고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하고 와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지독하게 건강한 건지 결국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키스를 한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단 건 답답한 일이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세상은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비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가?”

토비오는 설탕으로 착각해서 소금 범벅이 된 계란말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물었다. 냉장고에 몇 개 있는 남은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고, 수저를 놓은 후 내가 대답했다. 쓰레기통 속에 여전히 시선을 향한 채, 토비오는 내게서 등 돌리고 있었다. 회색 브이넥은 입은 어깨가 넓었다. 똑같이 브이넥을 입은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는 커플티를 입은 상태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커플 옷을 사 입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옷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고 옷장에 따로 보관해도 섞이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체격이 더 큰앞으로도 토비오보다는 항상 더 클내가 옷을 구분해서 다시 넣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거요.”

회색은 보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보인다던데요.”

그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났다. 토비오는 가끔 내가 짜증 낼만 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짜증을 내는 나 또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길 바랐다. 나는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로 토비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토비오는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토비오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여러 가지 말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는 말로 대화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토비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항상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몰랐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

내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토비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토비오의 시선이 식탁 위의 회색 반찬들을 향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토비오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짜증 섞인 말투를 억누르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고, 토비오는 또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가끔 토비오는 내게 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운명의 상대가 아닌, 색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었고 나와 토비오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에게는 가끔 힘이 들었다.

전 오이카와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함께 있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요?”

……토비오.”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토비오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거품처럼 떠올랐다. 회색의 세상이 말로만 듣던 채도를 갖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경험은 나에겐또한 토비오에겐없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나는 중학교 때 토비오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 토비오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비오와 생활하고 있는 3층 동거 집은 회색 일색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색에 대해 떠올렸다. 꿈속에선 너무 많은 색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결국 웃고 마는 나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토비오의 머리색은 무슨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태양 빛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했고 어떨 땐 꽤 그럴싸한 걸 상상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운명의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그쳤다. 나는 그날 밤 회색 이불 안에서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잠이 든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회색 머리에 얼굴을 묻고, 회색 입술에 입을 맞추고 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세상은 회색이었고, 토비오였다.

 

약속장소는 동거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라고 정해져 있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살얼음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리를 조급히 움직였다. 카페의 넓은 통유리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토비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동자에 붙었던 먼지가 하나둘 닦이는 듯 색채가 촛불처럼 드러났다. 카페의 지붕은 황갈색이었고, 하늘에선 색유리를 낀 구름이 눈부시게 새하얀 빛으로 빛났고,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민들레 잎이 무섭도록 노랗게 반짝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한 여성도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박차고 달렸다. 회색 렌즈를 끼듯 한 줌, 두 줌 멀어지는 색채가 아쉽고 덧없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중심을 잃고 몇 번 발을 헛디뎠으나 카페 입구에 몸을 부딪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카페의 입구 문은 회색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점원은 회색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그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토비오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토비오의 앞머리를 몇 번 정돈해준 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루시아가 소니를 만난 순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토비오,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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