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4 발렌타인 데이

 

 




 

겨울 끝자락에는 항상 달콤한 향이 머물렀다. TV나 길거리 현수막에는 달콤한 사랑을 전하라는 문구로 가득 찼다. 달콤하다는 건, 콧속을 따끔하게 채우는 겨울 구름 냄새보다 더 따스한 걸까. 어머니가 자주 보던 드라마 속 커플은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그렇게나 따뜻한 거냐고 묻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몸은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놔두고 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친 겨울바람의 기승 속에서 연습하면서 몸을 데우는 것과는 또 다른 걸까. 어머니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토비오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을 스가와라 선배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알아?”

알아요. 화이트데이랑 반대되는 말이죠? 화이트랑 반대면 블랙 아니에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기는 츠키시마를 한껏 의식하면서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츠키시마는 또 코웃음 칠 뿐이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생글 웃더니, 목도리를 여미며 말했다.

, 반대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 날에 주는 물건이 뭐인진 알고 있어?”

, 알아요. 초콜릿이랑, 사탕이잖아요.”

잠시간 머릿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릿이었는지, 사탕이었는지 고민을 거쳤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며칠간 떠들썩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높은 옥타브의 재잘거림이 생각났다. 결국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는 거로 결론이 났던가. 수제가 역시 좋다느니, 진심이 담겼다느니. 초콜릿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수제라면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걸까. 가게에서 파는 걸 사면 진심이 아닌 걸까.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가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네. , 맞아. 곧 있으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설명하려고 준비했다가 필요가 없어진 걸 알았는지 잔뜩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뱉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이 하얗고, 또 서늘했다. 왜 발렌타인 데이가 이 차가운 겨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달콤한 향내가 뜯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덕지덕지 붙은 계절이 좋을 텐데. 하필 2, 겨울 끝자락이 날카로운 이빨을 사람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이 때가 아니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난 몇 년간 나와 상관없던 날에 대한 생각이 물에 풀린 물감처럼 점점이 퍼졌다. 구태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 선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가 어떤 날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은 올해도 세이죠의 부실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아니, 어쩌면 올해는 많이 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이 받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만인에게 초콜릿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었다.

카게야마는 받을 사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짓궂은 얼굴로 왕님은 얼굴만은 꽤 인기 많으니까라고 했지만, 항상 츠키시마가 말하는 얼굴만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짜증 나니까 한번 째려봤다. 초콜릿은 어머니에게서 받는 게 전부였다. 올해가 어떨지는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는 걸까, 받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기에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말하든 일반적이진 않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일반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한 명이 꼭 무언가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이런 날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낯설었다.

받아야 하는 건지,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뭘 줘야 할지도요.”

줄 사람은 있는 거야?”

스가와라 선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걷던 히나타나 다이치 선배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설명을 요구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 카게야마, 무슨 소리야? 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히나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줄 게 있다면 줄 사람이 있는 거고, 줄 게 없다면 없는 거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과 무언가가 다르단 건 알겠는데, 어디에서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맹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한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준비한 초콜릿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수제는커녕, 가게에서 톡 치면 쏟아 내릴 정도로 수많은 양의 초콜릿을 쌓아올린 곳에서 젠가를 하듯이 하나를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겠지만실제로 여자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만드는 아이가 몇 있는 것 같았다어쨌든 오이카와 선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게 초콜릿 기대한다는 둥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면 키스해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손을 잡고 싶으면 말없이 내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듯 이상한 관계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괜찮았다.

, 어쨌든. 줄 사람이 있든 없든 그건 카게야마의 문제고. 올해 다들 하나씩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요! 저도요!”

스가와라 선배가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고, 히나타는 내게 향했던 눈을 돌려 땅에서 휙 뛰어올랐다. 스가와라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웃었다. 입꼬리가 얇게 올라가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볼이 말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

 

 

오늘도 춥네. 토비오, 목도리 정말 안 해도 괜찮아?”

, 괜찮아요. 목에 뭔가 닿는 게 싫어서.”

그 말 몇 번이고 들었지만, 용케 감기에도 안 걸리네. 몸은 진짜 건강하다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풋 웃으면서 목도리를 더 강하게 묶었다. 맵시 좋게 묶인 목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서 형태를 만들고, 오이카와 선배는 왼쪽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쇼핑백 끈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상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하트 모양에 랩핑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고, 포장지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얘기하던 초콜릿 중에 몇 번이고 들었던 유명 상표의 포장지도 보였다. 쇼핑백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오이카와 선배는 그저 웃으면서 부실에 남은 건 내일 가져가려고.’ 중얼거렸다.

한 개 먹을래?”

그걸 왜 제가 먹어요.”

맛있잖아.”

오이카와 선배한테 준 거잖아요. 저한테가 아니라.”

그럼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한테 주는 걸로.”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단순한 말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생각하고 마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이카와 선배가 강제로 내 입에 각진 사각형의 초콜릿 한 개를 입에 집어넣은 까닭도 있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입안 양쪽에서 조금씩 묻어난 침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혀끝에 진한 단맛이 퍼지고, 코에서 초콜릿 향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선배는 볼을 물들이며 웃더니, 손가락에 조금 묻어나온 초콜릿을 살며시 핥았다. 붉은 혀와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코와 입을 침식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맛과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초콜릿이 오이카와 선배의 윗입술 끝자락에 묻었다. 흰 피부는 한겨울 날씨에 보들보들하고 투명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좋아요.”

……?”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는 초콜릿을 핥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입에서 전부 녹은 초콜릿은 아쉬운 단 맛만 남기고 약간의 까슬 거리는 쓴맛이 입 점막을 긁었다.

그거 지금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되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이해하는가. 내 말에 등장도 하지 않은 키스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토비오쨩은 내 손가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상아조각처럼 자리 잡은 손톱은 분홍색 조약돌 같았다.

손가락은그것도, 좋지만. 입술이 좋아요. 예쁘잖아요.”

예쁘다고?”

. 오이카와 선배한테 초콜릿을 주는 여자들은, 어쩌면.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지 않았을까요.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먹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사 오는 게 좋았을지도요. 발렌타인 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러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토비오 역시 지금 키스해달라고 하는 거지?”

제 말 제대로 들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키스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조금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 선배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알았으니까, 토비오. 초콜릿 한 개 더 먹어.”

싫다고 말하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안에 침투해 온 초콜릿의 단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맛있어? 오이카와 선배는 달콤함이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 쇼콜라티에 되고 싶다던 아이였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오이카와 선배는 쇼핑백 안의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웃는 얼굴이 귀엽고, 이 아이는 보조개가 귀여워. 이 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얘는 어깨선이 동그랗게 퍼져서 참 예쁜 애야. 방금 줬던 초콜릿을 만드는 아이는 말했듯이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들고. 토비오,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 모든 사람을 기억할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은 알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원하는 토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기억 회로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는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의 일을 가끔 말할 때면 아무리 나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그 여자아이들도 모두 오이카와 선배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속 방 하나가 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울진 않지만.

, 이 아이들은 그렇게나 귀엽고 나에게 초콜릿까지 주잖아? 토비오가 말했듯이 난 달콤한 걸 좋아하고.”

.”

그래도 난, 초콜릿 한 조각 주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토비오가 좋아. 토비오를 좋아하는 거야. 내 입술이 좋다는 토비오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토비오의 귀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끌어안고 싶어.”

…….”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잖아? 토비오, 초콜릿 맛있었어?”

……저기, .”

다행이네.”

오이카와 선배는 살며시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입안의 초콜릿은 다시 순식간에 녹아 혀끝을 아찔한 단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려는 여자아이의 추억은 내 입술 안에서 녹았다. 그 뒤에 애매하게 남은 쓴맛이 조금 견디기 힘들어서, 오이카와 선배의 손을 먼저 잡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마주 잡아준 손에서는 방금 먹은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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