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novel > 하이큐!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Blindness Love  (2) 2016.06.02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0) 2016.05.03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3) 2016.04.04
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0) 2016.03.24
오이카게 전력 #7 동거  (0) 2016.03.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