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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