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과 마법사







 

다녀 왔습니다.”

카게야마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꽉 조여 맸던 운동화 끈을 풀기보다, 손으로 직접 운동화 뒤쪽을 누르며 신발을 벗었다. 연습이 끝난 건 오후 8시 반. 생각보다도 늦은 시각이었다. 며칠 전 비가 온 뒤 갑작스레 차가워진 바람 한가운데를 걷다가, 카게야마는 반년 전부터 사는 동거 집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다녀왔다고 고하는 건 아직 낯설고, 조금은 낯간지럽기도 했다. 매번 말하게 되는 건 억지로 만든 버릇이었다. 그가 가끔 내킬 때 말해주는 어서 와를 듣기 위해 만든 고집이었다.

“Trick or treat!”

신발장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불쑥 검은 물체가 시야를 가렸다. 초점을 맞추고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 생긴 모자였다. 표면이 전부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별가루가 뿌려져 있었지만, 만지면 전부 손에 묻어나올 것 같이 생긴 싸구려 모자. 모자의 모양을 따라 찬찬히 훑어보면 독특한 모양이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챙이 넓게 벌려진 모자는 언젠가 봤던 것 같은 마법사의그래, 마법사 모자였다. 모자 안쪽에는 가격 태그가 아직 붙어있었는데, 크게 ‘200이라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모자 옆으로 시선을 비껴 보내자 동거인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입술 끝이 묘한 모양으로 올라가고, 그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반년 전부터 함께 사는 동거인이자, 그의 연인본인 말로는 사귀어 주고 있는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평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Trick or treat’라니까? , 어서.”

오이카와는 모자를 제 몸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다른 한 손을 쑥 내밀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는 굳은살과 긁힌 상처 자국이 가득했고, 손바닥에는 곧은 손금 몇 개가 줄지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과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저건. 영어라는 건 알겠는데.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줄 알면서 말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 생각하니 작은 짜증이 일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귀찮은 얼굴을 하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온 손이 오이카와의 온기와 입맞춤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쳐 내더니,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진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얏! 뭐예요, 갑자기!”

간식 없지? 그럼 벌을 받아야지.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기어들어 와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 거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조금 전의 그의 미소는 온 데 간데없었다. 오이카와는 이마를 연신 문지르는 카게야마의 머리에 마법사 모자를 푹 눌러 씌우더니 자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가려진 시야를 보상하고자 마법사 모자를 고쳐 썼다. 오이카와가 있는 거실 왼쪽의 부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와.”

…….”

무어라 해주고 싶은 말을 눌러 삼켰다. 이제는 또 앞선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부르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신발을 마저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흰색의 2인용 소파가 정면으로 보였다.

거실부터 침실 및 욕실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가 선택한 색상의 벽지와 가구들이었는데, 오이카와의 취향은 평소 카게야마가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인테리어 전반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올리던 밝고 빛나는 색조가 아닌, 화이트 앤 블랙의(가끔 그레이가 섞인) 침착하고 단정한 색조였다. 가구들도 단순한 점과 선, 면의 조합과도 같이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동거 생활에 쓸 가구를 고르러 유명 가구 매장에 가서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보며, 그때도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씨 사고 싶은 것 사세요.’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오이카와는 찬찬히 웃으며 대답했다. 카게야마도 그 대답 뒤에는 입술을 다물고 묵묵히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지켜봤다. 오이카와가 부엌의 아일랜드 카운터에 놓을 의자로 온통 검은색의 바 스툴(bar stool)을 고른 뒤,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내뱉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랑 살면 이래도 될 것 같아서.’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가구를 고르든, 어떤 색조의 벽지로 방을 덮든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그와 달리 매우 신중히 색상과 디자인을 꼼꼼히 따졌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카게야마와는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산 물건 중 가장 밝고 투명한 색상은 연한 물빛과도 같은 민트색이었다. 그건 두 사람용으로 산 더블베드를 덮을 침대 이불이었다. 100% 솜이불에 적당한 두께로, 아침에 추위를 타는 카게야마와 밤에 추위를 타는 오이카와 모두 만족하고 잘 수 있는 적당한 온기를 선사했다. 카게야마는 왜 침대 이불만 그리 밝은 색상을 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그 민트색 이불만은 특별한 무언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왜 침대 이불이어야만 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토비오. 이리 와 봐.”

오이카와는 마법사 모자를 쓰고 부엌 근처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게야마를 불러들였다. 싱크대가 있는 안쪽 카운터와 평소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소인바 스툴이 놓여있는바깥쪽 아일랜드 카운터 2개까지 제외하고, 나머지 카운터 2개에 전부 호박이 가득했다. 아니, 호박. 호박이 맞나? 저 넓고 큰 모양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호박 중 하나를 들어 올리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었다. 호박은 오이카와의 얼굴 2개 크기였다. 그가 작은 얼굴의 소유자라 해도, 호박이 큰 건 사실이었다.

오늘 할로윈이잖아. 마침 늙은 호박이 세일해서, 몇 개 사와 버렸지.”

할로윈, 할로윈이요?”

뭐야, 알고 있었어?”

일부러인 기색이 역력하게, 오이카와는 눈썹을 들었다. ‘토비오쨩 의외네라며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기억을 더듬었다. 돌이켜보니, ‘마법사 모자를 본 건 할로윈을 주제로 한 TV 애니메이션에서였다. 그 안에서 한 마법사는 할로윈을 무척 좋아해서, 마법을 이용해 모든 마을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365일 매일을 할로윈 날로 지정했다. 그랬더니 사탕을 줄 어른이 없어 장난을 일삼고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어린아이로 변한) 마을 사람들을 보며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아아, 그래서 아까 현관에서. 카게야마는 왼쪽 위로 눈동자를 돌린 뒤 조심스레 말했다.

아이로 변해서 사탕을 받아내지 못하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날이죠?”

뭐야, 그 어딘가에서 주워온 듯한 인상은? 대충 비슷하긴 하네.”

오이카와는 낮게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발을 옮겨 호박에 둘러싸인 오이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보리 빛 조명 아래 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여러 가지 괴물이나 징그러운 인물로 분장해서 ’trick or treat‘라고 말하며 달콤한 과자 같은 걸 받는 날이야. 달콤한 걸 안주면, 장난을 치겠다는 말이지. 마침 호박도 있으니까, 잭 오 랜턴(Jack-o'-lantern)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너도 도와, 토비오.”

잭 오 랜턴……이 뭐예요?”

호박에 유령의 가면을 씌우는 거야. 잭이라는 유령에 관련된 얘기가 있다지만,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호박에 모양을 새긴 뒤 거기에 불을 피우면 완성이지.”

다시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니,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의 사람들은 모두 오싹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마법을 부린 마법사, 드라큘라, 늑대의 분장 등생각해보니 모든 날이 할로윈 날로 바뀌고 난 뒤 마법사는 마법을 부려 마을 전체를 장식하는데, 유독 호박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났다. 왜 호박이었을까, 그때도 조금 의문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 끝난 후 왜 호박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지만, 배구 경기가 시작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까지 떠올리고 카게야마는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만드는데요?”

먼저 호박 겉면에 얼굴 도안을 그린 뒤 위를 덮개처럼 잘라내고 호박 속을 파낼 거야. 도안을 따라 칼로 도려낸 뒤 그 안에 촛불을 넣으면 완성. 이것 봐, 초도 사 왔어. 작고 귀엽지?”

오이카와는 부엌 한쪽에 있던 작은 캔들을 카게야마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사과 향이 나는 바닐라 색의 손바닥만 한 캔들, 다른 하나는 깊고 아늑한 꽃향기가 나는 브라운 색의 캔들이었다. 오이카와는 기대되는 듯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런 작고 예쁜(?)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미 호박 겉면에 그려진 도안 두 개의 사악하고 악랄해 보이는카게야마는 오이카와씨랑 닮았네요라고 한소리 했다가 또 딱밤 한 대를 벌었다표정과는 좋게 말해도 부조화였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더해 딱밤 한 대를 더 벌 필요는 없으니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먼저 위부터 떼어내면 되는 거죠? 이 모양 따라서요?”

맞아. 손가락 조심해야 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내민 손에 칼을 쥐여주면서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홍차 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서 전날 밤의 저가 보이는 듯해, 카게야마는 물들기 시작한 얼굴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칼은 오이카와가 평소 쓰는 칼보다는 작고, 주로 과일을 깎을 때 쓰는 용도 같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예쁜 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가 칼을 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주로 부엌은 오이카와의 영역이다 보니, 카게야마는 가끔 그를 도와줄 때 빼고는 칼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세터로서 손가락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이카와는 어떻게 요리를 잘하는 걸까. 그가 만들면 포크 카레도 각별한 맛이 났다. 생각하니 또 먹고 싶어져, 카게야마는 내일 저녁은 카레로 부탁해볼까 생각하면서 호박에 손을 댔다.

!”

단단해!

!”

칼에 힘을 주고 강하게 밀어 넣자 그제야 약간 칼날이 흠집을 내고 들어갔다. 됐다! 조금 기쁜 마음까지 들면서 카게야마는 작업을 계속했다.

! , , 흐읏!”

……저기 토비오쨩. 열심인 건 좋지만, 이상한 소리 내는 건 그만둬줄래?”

! , ?”

카게야마는 몰두하느라 어느새 이마에 작게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뾰로통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그 검은 눈동자가 저를 곧게 바라보는 걸 느낀 뒤 한숨을 작게 뱉었다.

아냐됐어. 토비오쨩이 바보인 게 하루 이틀인가.”

왜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바보라고 합니까.”

카게야마는 뚱하게 내뱉곤 다시 칼을 고쳐 들었다. 오이카와가 거슬려한다고 생각했는지 전보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회색 빛깔의 테이블과, 검은 의자, 아이보리빛 조명 아래의 카게야마는 이제 어느 정도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반년 전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와 같은 대학으로 진학한 뒤 저에게 고백하고, 함께 살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저 중학교 선후배에 불과하던 관계가 어떻게 이리 빨리 변모하게 되었는지 묘한 일이었다. 카게야마에게 먼저 동거를 권한 건 오이카와였다. ‘같이 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동거 집을 같이 알아본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오이카와가 말없이 건넨 열쇠를 카게야마가 받아든 게 전부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무슨 열쇠예요?’라고 묻거나, 받아들지 않았다면 그와의 동거는 시작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한 번 보고, 그가 내민 열쇠를 보고, 봄날의 햇빛에 부서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그 열쇠를 받아들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동거는 그때부터였다.

오이카와는 한번 눈을 깜빡였다. 호박의 속을 파내 호박 속을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에 남김없이 담고, 눈과 코와 입 모양을 따라 칼을 댔다. 눈앞의 호박이 남김없이 잭 오 랜턴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이 호박의 씨를 뿌릴 때 농부는 이것이 잭 오 랜턴이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도매상은? 마트 주인은? 이 호박 자신은? 호박의 자아를 생각하기에 이르자 오이카와는 오른쪽 입술 끝을 올리며 웃고 말았다. 무언가 큰 운명의 섭리를 따지는 것도 좋지만, 결국 어찌할 도리 없이 그리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다 됐어?”

!”

카게야마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나름대로 자신 있다는 듯 자랑스럽게 저가 들고 있던 호박을 내미는 꼴이 영 어린아이 같았다. 아직 머리에 쓰고 있는 마법사 모자도 한몫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호박을 바라보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삐뚤빼뚤한 눈과 코, 입은 약간 징그러운 모양으로 일그러져있고어찌 말하면 할로윈에 적합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크게 웃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시늉까지 보였다.

이게 뭐야? 주인 닮아서 못생겨도 너무 심하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 어떻길래요?”

또 지기 싫어서 욱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흘겨보는 게, 정말 꼬맹이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호박을 카게야마의 호박 옆에 두었다. 바로 옆에 두니 큰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오이카와의 호박은 본래 호박에 그려놓았던 도안에서 조금 빠져나갔을 뿐 거의 도안 형태 그대로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배를 잡으면서 과장스럽게 웃었다. 이런 시답잖은 일에서 힘의 차이를 느끼는 건 카게야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토라져 있지만 말고. , 불 붙일게. 토비오는 전등을 꺼.”

오이카와는 달랠 마음이 없는 것처럼 평소의 어조로 말했다. 오이카와가 얼마 전 길 가는 길에 받았던 싸구려 라이터로 캔들 두 개에 불을 붙이자, 카게야마는 뭐라 꿍얼거리며 거실과 부엌 불을 껐다. 테이블 위에 있는 두 개의 캔들 주변으로 아주 작고 뽀얀 온기의 이글루가 생겼다.

오이카와가 캔들 두 개를 들고, 각각의 호박에 집어넣자 은은한 불빛이 호박에 난 얼굴 구멍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젊고 잘생긴 잭 오 랜턴과 그 친구이면서 가장 사악한 잭 오 랜턴이 놀러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평소에 드나드는 부엌인데도, 불을 끄고 이 작은 두 명의 이웃을 초대한 것만으로도 생소한 감각이 피어나다니 신기했다. 카게야마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사과 향이랑 꽃향기 좋지?”

오이카와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런 미소가 낯설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캔들의 푸근한 주홍빛을 받는 그의 얼굴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뒤덮였다.

향기는 잘 모르겠어요. 타는 냄새는 나는데.”

카게야마는 그다지 코가 좋지 못했다. 캔들이 들어있는 잭 오 랜턴의 머리 쪽에 코를 대고 킁킁, 하며 카게야마가 말했다. ‘위험하니까 그런 짓 하지 말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강하게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이 다시 순간적으로 바뀌어 카게야마를 뜨거운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이 남은 호박 속은 어떻게 되나요?”

씨를 솎아낸 뒤 꿀하고 견과류 조금이랑, 설탕과 졸여서 오븐에 구울 거야. 맛있겠지?”

……카레는요?”

세상에는 카레 외에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다는 걸 이젠 좀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듣는 것만으로도 맛있어 보이지만, 카레는 각별하다. 카게야마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잭 오 랜턴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조용히 흔들리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고 불빛을 계속 바라보면,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 두 개의 뚜껑을 덮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토비오는 할로윈 분장을 한다면, 뭐가 좋아?”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 카게야마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마을 사람들의 분장을 떠올렸다. 드라큘라와 마법사 말고는 정확히 명칭도 모르는 분장이 대부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분장들의 명칭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녹아있는 화이트 앤 블랙 톤의 방 안에서 호박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카게야마는 작게 툭 내뱉었다.

호박……?”

잭 오 랜턴 말하는 거야? 의외네.”

오이카와는 눈썹을 올렸다. 오이카와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듯 금방 눈을 돌렸지만 카게야마는 저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말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말 없는 공기가 카게야마의 목젖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냥, 어디서든눈에 띄니까요.”

실제로 카게야마의 기억 속 애니메이션에서도 가장 많은 건 잭 오 랜턴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대답에 놀란 듯 잠깐 눈동자를 크게 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만 카게야마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오이카와의 미소였다.

그렇구나. 넌 정말 카게야마 토비오야.”

무슨 말이에요?”

오이카와는 원하지 않는 말을 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한 뒤 저가 만든 잭 오 랜턴에게로 향한 오이카와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어디서든 눈에 띄니까라니. 카게야마 토비오만 할 수 있는 대답이네.”

그냥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

또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오이카와는 미소를 거두고 그랬겠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작은 캔들 안에 투명한 촛농이 고였다. 그제야 풍겨오는 연한 꽃향기에 카게야마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카게야마가 아는 꽃이라고는 오이카와가 전에 대학 입학 축하한다며정작 입학식이 지나고 한 달 뒤였다선물해준 작고 청초한 백합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그 향기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 유일하게 있는 꽃에 대한 기억을 오이카와가 새겼다는 점이 부끄럽고 간지러웠다.

난 마법사가 되고 싶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카게야마는 TV 애니메이션 속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마법은 없잖아요.”

그것은 만화 속의 이야기였다. 유령도 없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만,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허무맹랑한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유령이나 마법사나 같은 것일까? 카게야마는 어릴 적 기억 속의, 후회하며 마을이 넘치도록 눈물을 흘리던 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오이카와를 대입시켜보려고 노력하던 중,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뺏어 썼다.

마법은 있는걸.”

없어요.”

아냐, 있어. 토비오쨩한테 마법 걸어 볼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카게야마는 반쯤 질렸다는 얼굴로 해보시던가요. 조롱 조로 내뱉었다. 오이카와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후회하지 마. 토비오쨩은 이제 10초 이내에 오이카와씨한테 키스를 합니다.”

?!”

.”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얇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깊은 온기가 쌓인 속눈썹, 오이카와의 보들 거리는 머리 위에 가볍게 씌워진 마법사의 모자. 흡사 어느 동화책의 젊은 미남 마법사와 같은 모양새였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자신의 입술을 겹쳤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보드라운 분홍빛으로 빛나며 눈앞에 있었다.

키스할 줄 알고? 오이카와의 노림수였다. 고개를 피한 채 잭 오 랜턴만 열심히 들여다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흘끔흘끔 오이카와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다가, 항상 본인이 원하는 페이스로 이끌어가던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이건 기회다 싶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임에도, 오이카와의 속눈썹이 움직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눈을 감으며 가볍게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 작은 입맞춤 소리가 캔들 불빛 사이로 흘러내렸다. 오이카와는 가늘게 눈을 떠 입술만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결국 또 이것이 오이카와의 속셈임을 알고, 저가 넘어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신음을 내며 그의 허리를 팔로 세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숨소리가 달콤하게 콧잔등을 스치고, 타액이 흘러넘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입술을 떼어냈다.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작게 카게야마의 입술 내부에 가득 찼다.

거봐, 마법은 있지?”

겨우 들릴 정도의 속삭임만 한숨에 섞어 보낸 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가장 얇은 피부와 가장 얇은 피부를 맞댈 뿐인데도, 몸 안쪽부터 머리까지 저릿한 달콤함에 숨이 벅찼다. 오이카와의 온기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계속 이렇게 둘 수도 없고. 이제 정리하고 호박요리 해서 먹을까?”

오이카와가 잭 오 랜턴의 캔들 불빛을 후 불어 껐다. 방 안 속이 고요한 적막 및 남아있는 향흔으로 가득 찼다. 풍성한 꽃향기는 무언가 안타까운 향흔만을 남겼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더듬었다.

오이카와씨는 마법사가 되면 어떤 마법을 부리고 싶으세요?”

마법?”

. 단 하나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요.”

오이카와는 당분간 답이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형태를 그려가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형태의 머리카락, 각이 좋은 얼굴형과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까지. 그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낯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의 마법. 토비오가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동거를 시작할 무렵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카게야마에게 열쇠를 건네던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 열쇠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단 어떤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물(聖物)을 받는 듯했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열쇠를 받아든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조금 강하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그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으스러질 듯 강하게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뼈가 모두 부서져 제 속을 낱낱이 찌른다면, 그의 뜨거운 피로 적셔진다면 카게야마의 아침도 그리 차갑지마는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열고 다시 닫았다. 오이카와와 겹쳤던 입술의 감촉이 입술 신경에 남아 있었다. 저를 그렇게 자신에게 침식하게 하고, 정작 본인에게는 그 어떤 마법도 기대하지 않는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에게만 마법사였다.

카게야마는 울며 후회하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마법사 모자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가라앉을 정도로 울던 그는 왜 자신은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았을까.

카게야마 토비오가 생각건대, 그는 사탕을 받고 싶은 어른이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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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징님 생일 축하해요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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