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PPY BIRTHDAY TORU!






다시 태어난 여름








카게야마는 꿈을 꿨다.

 

바닷속에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고, 보석같이 작고 파란 물고기 떼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지며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카게야마는 나신으로 바닷속에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이 기분 좋아 눈을 살포시 감았다. 볼과 가슴, 허리에는 보드라운 물의 손길이 닿는 듯하면 떨어졌다.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로 카게야마는 멈춰 있었다. 바다 위쪽으로 약한 바람이 불었고, 가끔 물살이 흔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언뜻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건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작은 드럼 소리가 들리는 재즈 음악이었고, 아버지가 즐겨 듣는 건 오래된 팝송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음악을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물방울 소리, 찌잉 머리를 달구는 햇볕의 뜨거움,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잠꾸러기 토비오쨩.”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오이카와가 샐쭉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듯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우린 홍차와 같이 예쁜 색의 머리카락, 형태 좋은 눈동자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조금 붉었다. 카게야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그나, 방금 잠에서 깬 카게야마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꿈에서 나신인 이유가 이거였나.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꿈 때문에, 카게야마는 의도치 않게 조금 웃었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웃어?”

지금 몇 시예요?”

일어나서 오이카와씨 얼굴을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옆에 있는 시계를 보시던가요.”

 

고개를 돌리니 작은 탁상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830.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가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행지에서 오이카와씨 혼자 밥 먹게 하려는 거야?”

아뇨, 배가 고프시다면야

됐고, 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이카와는 데구르르 표정을 바꾸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단단한 근육의 조합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에 맞춰 상체를 올렸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벗어나 왼쪽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나신 뒤쪽으로 투명한 통유리 창문 2, 그 너머로 하얀 베란다가 보였다. 아침의 태양 빛을 받아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연초록과 하늘색을 섞어놓은 바다는 지평선과 맞닿아 뿌연 경계선까지 뻗어있었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하얀 베란다까지 온통 새하얀 숙소는 커다란 배구공 안에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갈 거야?”

 

오이카와는 하얀 반소매 셔츠에 속이 비치는 민트색 칠 부 카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아색 면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뇨, 일어났어요. 그냥

 

꿈을 꿨어요. 뒷말을 삼키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기댔다. 오이카와의 숨소리에 따라 솟았다 가라앉는 오이카와의 배가 기분이 좋았다.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나왔던가, 안 나왔던가. 바다가 나왔단 건 기억이 나는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뱃속에서 낮은음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얼른 가자. 나도 배고파.”

 

오이카와는 어루만지던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부축하듯 톡톡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파도치는 소리가 시계 소리 사이사이로 들렸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바다를 보러 온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

 

 

남쪽 섬에 가자고 얘기를 꺼낸 건 오이카와였다. 기간은 719일부터 21일까지,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로 이틀. 3일의 여행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야기를 벗어나고 어디에 도쿄가 있는지, 오사카 혹은 삿포로가 있는지 등 지리에는 무심했다.

 

일본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라, .’

 

오이카와는 질렸다는 식으로 카게야마를 걱정스레 쳐다봤고, 카게야마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로 응수했다. 오이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야.”

?”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권 준비해놔.”

?”

외국이라고.”

 

설마 생애 첫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남쪽 섬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남쪽 섬인지, 위도 및 경도는 몇 도이며 어떤 문화가 있는지 등. 카게야마가 여행지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건 영어를 쓰는 나라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여권을 찍기 위해 갔던 사진관에서, 좀 더 웃으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던 사진사를 떠올렸다. 30분을 들여가며 힘들게 찍은 여권사진을 보고 오이카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찍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여권 사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찍었다고 하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 앳돼 보였다.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여권과, 카게야마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여권에는 같은 마크가 찍혀있었다. 새삼 카게야마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어를 쓰는 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와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다는 식으로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에, 같이 여행이라니. 얼마나 복 받은 건지 알라고,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호텔 1, 바닷가가 보이는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석에 앉았다. 6층 위, 같은 자리에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숙소가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연청빛 바다가 보이는 자리였다. 짚을 엮어 만든 듯 곳곳에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는 의자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선택한 자리에 앉고 바다를 바라봤다. 머릿속 바다보다도 에메랄드빛이 진했다. 연둣빛 바다가 흔들리고, 레스토랑에서 보아도 속이 비쳐 보이는 바닷속에는 암갈색 바위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물고기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지, 전날 저녁에 보였던 파란색에서 형광 노란색, 장미처럼 붉은색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백색과 상아색이 섞인 해안가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 무리가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 파라솔을 펴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 무리,카게야마가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쨩.”

 

어느새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앞에는 망고주스가 놓여있었다. 크고 투박한 얼음 두세 개가 동동 떠 있는 유리잔은 노란 빛깔로 채워져 있었고, 같이 나온 망고 1개는 반으로 잘려서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없어?”

 

떠보는 듯이 묘한 웃음을 띄우고,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고막 안을 채웠다. 카게야마는 오늘이 여행 둘째 날인 걸 떠올렸다.

 

생일, 축하해요.”

, 고마워.”

 

오이카와는 그제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자리한 입술에는 망고 주스가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도 앞에 있는 망고 주스를 한 입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밥 먹으면 바다를 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집에 가도 생각날 것 같다며?”

오늘 태어난 오이카와 선배랑 같이 보고 싶어요. 어제의 오이카와 선배랑 오늘의 오이카와 선배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네. 28년 전 난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오이카와 선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토비오쨩은 태어났겠지. 2년 뒤에.”

그러면 혼자서 이곳에 앉아있을까요. 혼자서 바다를 보면서.”

평행 세계의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만약의 이야기예요.”

글쎄. 그렇다면 토비오쨩은 방금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망고 주스를 시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숙소에 묵지도 않았겠지.”

 

카게야마는 그런 자신을 상상했다. 이 숙소에 묵지 않고, 바다를 보러 가지 않고, 망고 주스를 먹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 조건은 단지, 오이카와가 없다는 것뿐인데.

 

 

오이카와 선배가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바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오이카와 선배가 없었다면, 바다가 저런 색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망고 주스가 이렇게 달다는 것도. 아주 많이, 몰랐을 거예요.”

나도 몰랐을 거야. 토비오쨩이 망고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파도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똑같네요. 카게야마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

 

 

오이카와는 신발을 벗었다. 하와이안 꽃이 그려져 있는 샌들 한 짝을 손에 들고, 희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앞을 보면 오이카와의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바닷가를 향해 난 야자수 나무 그늘은 백사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파라솔을 펼친 몇 사람들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다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봤던 것보다 선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물살이 몰려드는 소리, 백사장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손톱만 한 물고기 몇 마리, 속눈썹을 무겁게 누르는 햇볕

 

바람이 기분 좋아.”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디건을 벗은 그는 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목을 타고 흐른 땀 몇 줄기가 셔츠 윗자락을 적셨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예쁜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

 

카게야마는 끄덕이며 대답한 후 오이카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볍게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와있는 이 여행에 대해서, 바다에 대해서, 오이카와의 생일에 대해서, 카게야마를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게 작은 심장 안에 꼭꼭 담겨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건 짤막한 단어 몇 마디였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선배.”

토비오?”

그냥, 다행이에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 선배여서.”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저보다 2년 먼저, 배구를 하는 사람으로.”

, 고마워.”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깊숙이 굽히며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 뒤로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렸다. 하얀 파도 빛깔과 오르는 물거품, 오이카와의 오뚝한 콧방울의 땀 몇 방울이 투명했다.

카게야마는 꿈을 기억해냈다. 바닷속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오이카와와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간 물고기와 남쪽 섬의 태양에 대해서도. 모두 오이카와가 태어났기에, 이곳에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카게야마는 웃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백사장 모랫바닥에서 열이 올라, 그 열이 오이카와의 몸을 돌아, 살아있는 온기로 카게야마에게 전해졌다. 카게야마를 울리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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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입니다 ㅠㅠ
멋진 합작 홈페이지는 여기 ▶ http://gywjd1555.wixsite.com/merrysummer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신 치리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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