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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찻잔의 가장자리는 얼마 전 깨뜨려서 이가 나가 있었다.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꽃무늬의 딱 꽃잎 자리였다. 희고 깨끗한 배경에 민트색으로 모양 좋게 꽃이 그려져 있는 찻잔은 오이카와가 사온 물건이었다. 찻잔을 꺼내들다 말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가 나간 찻잔을 도로 제자리에 놓은 뒤, 재차 이미 꺼내놓은 티포트로 눈을 돌렸다. 찻잔과 세트로 맞췄던 티포트에도 민트색의 꽃무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꽃이 타고 올라오는 듯한 무늬는 티포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티포트 뚜껑에는,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얇은 실금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실금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티포트에도 군데군데 금이 새겨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질린듯한 표정으로 티포트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는 Made in Italy 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 깊게 파인 자국이 나 있었다. 뭘 어떻게 하면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조용한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포트와 찻잔 모두, 일주일 전 사 왔을 때 보였던 깨끗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뭘 어떻게 설거지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오이카와는 티포트와 찻잔 모두 조심스레 다시 집어넣었다. 달그락거리며 제자리에 자리를 잡은 티포트와 찻잔이 이상하게 추레해 보였다. 입술을 씹었다. 오후에 마시려고 기껏 준비해놓았던 향 좋은 커피도 다시 들여놓았다. 수북이 쌓였던 오후의 여유가 한 줌 바람에 흐트러졌다. 부엌 옆에 조그맣게 난 창에서는 햇빛이 흘러들어와 포근한 온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컵 하나를 들고 물로 한번 씻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런 날씨에는 미지근한 물도 차갑게 느껴지는 법이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손끝을 가볍게 털고, 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 얼음을 몇 개 동동 띄웠다. 속 끝에서 밀려 올라오는 짜증에 찬물을 들이붓듯이, 오이카와는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 시절 후배와 동거를 시작한 지 반년이었다. 고작 반년이었다. 아니, 반년이나 되어있었다. 왜 내가 토비오따위랑오이카와는 다시 입술을 씹었다. 촉촉하게 물이 묻은 입술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혀를 따라 얼음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상처가 나 있는 입안 점막이 따끔거렸다. 거친 키스 탓이다. 생긴 건 깔끔하게 생기고선, 그 꼬맹이는 하는 짓 하나하나 당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선 식탁 의자에 대충 앉았다. 엉덩이를 내리기만 하면 뒤에서 감아오던 손길은 오늘은 없었다. 얼음을 씹으면 씹을수록 얼음 조각이 상처 난 점막을 콕콕 찔렀다. 찔끔찔끔 느껴지는 아픔은, 제 입술을 휘어잡으면서 삼킬 듯이 키스하던 토비오를 떠올리게 했다. 오이카와는 남은 물을 전부 들이켰다. 빈 컵에는 몇 방울의 물이 바닥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난방이 돌지 않는 방 안에는 시린 한기가 천장까지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벼운 스웨터만 걸친 몸을 떨었다. 토비오가 없을 때의 집은 사람이 없는 집같이 냉랭했다. 그렇게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집으로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애초에 오이카와는 이곳을 이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년 전부터 그에게 이곳은 토비오가 있는 곳에 불과했다. 제 몸이 이곳으로 돌아와도, 밤이면 이 집에 있는 침대에서 몸을 부대껴도 매번 이곳에 있는 저가 낯선 오이카와였다.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질린다는 건 어디에 질린단 말이었을까. 반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상조차 모호했다. 동거를 시작한 것도 토비오가 귀찮게 굴어서였다. 토비오를 안고 나서 집으로 가는 오이카와에게 귀찮지 않냐며, 그냥 같이 살아요. 혼자 살기엔 넓은 집이니까. 귀를 붉히면서 그렇게 말한 건 토비오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인 것밖에 없었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정을 두지 말자고 정한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만든 것도, 집이 아닌 장소로 대하자고 정한 것도, 토비오가 없는 이곳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것도 오이카와였다. 언제든지 토비오떠날 수 있는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씨, 우리 해요.”

뭔 소리야, 이 꼬맹아.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오이카와는 제 가슴팍에 들러붙은 토비오를 힘들여 떼어냈다.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와 같이 볼을 붉힌 고등학생의 얼굴을 하고선, 이 꼬맹이는 가끔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토비오는 이마를 찌푸리고선 오이카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일부러 열기를 담은 한숨을 근육 선을 따라 흘려보내면서, 토비오는 낮게 말했다.

겨우 2살 차이잖아요. 엄마 젖 더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나한테는 꼬맹이야. 당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초저녁부터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건 싫어.”

태양도 멀쩡히 떠 있는 시간대였다. 가을이라 날이 저무는 게 빠르다고는 해도 오후 5시 반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몸을 밀착하고 있는 두 명의 옆에선 석양빛이 붉게 바닥을 물들였다. 넓은 베란다 바깥에서 홍차 빛으로 물든 석양이 스멀스멀 저물고 있었다. 토비오는 한번 밖을 바라본 후,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뭐라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딱 어린애였다.

꿍얼거리지 말고.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 난 이따가 나갈 거니까.”

오이카와는 제 복근을 만지기 시작한 토비오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단단한 손목을 힘주어 잡자, 토비오의 손이 아쉬운 듯이 복근에서 떨어져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디 가는데요?”

말했잖아. 여자친구 친구들이랑 만난다고.”

늦게 오나요?”

늦게 올 거야.”

자고 올 거에요?”

…….”

자고 와요?”

토비오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검고 푸른 눈동자는 중학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오이카와만 담고 있는 눈동자를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가렸다. 가린 손을 꼭 잡은 토비오는, 얼굴을 움직여 오이카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토비오와 키스를 하고 나면 입술이나 입안 어딘가에는 꼭 상처가 나곤 했다. 왜일까, 오이카와는 알지 못했다. 거친 키스 때문이겠지. 그래서일까, 상처가 따끔거릴 때면 토비오가 떠올랐다. 대답이 없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토비오는 몇 번이고 훔쳤다. 조용한 거실에서 촉촉한 소리를 울리면서, 한번 떼었던 복근에 다시 손을 옮겼다. 근육의 모양새를 따라 손가락이 흐르고, 그 손이 이윽고 바지 버클에 닿았을 때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귀를 꼬집었다.

아얏,”

그만하라고. 밤늦게는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거에요?”

돌아올 거야.”

알았어요.”

토비오는 다시 한 번 키스하곤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가 닿았던 곳이 화끈거렸다. 석양은 금세 져버린 걸까. 베란다에는 수명이 다해 깜빡이는 전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깜빡, 깜빡. 그 움직임에 따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으면 토비오의 입술의 감촉이 살아나서, 혀끝으로 입술을 한번 훑었다. 눈을 뜨면 차가운 베란다에서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약속은 저녁 8. 곧 있으면 나갈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비어있는 컵에 다시 가득 물을 담았다. 속이 탔다. 감기에 걸리려나, 목에 뭐가 걸린 듯 불쾌한 이물감이 들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 이력을 살펴보면 여자친구의 이름이 가득했다. 토비오와는 몇 시까지 들어갈게.’ 같은 일상적인 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돌아올게.’ 한 마디면 충분했다. 서로가 그랬다. 돌아올게요, 토비오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제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토비오는 어디에 있든지 돌아올 것이다. 오이카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전 얼음 때문에 안 그래도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더 깊어진 느낌에, 이번에는 얼음을 조심스레 녹였다. 동그란 얼음을 혀로 굴리자 그때마다 차가운 물덩이가 입안에 고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토비오와 키스할 때처럼 입안에 고인 액체를 삼켰다.

키스도 해본 적 없는 거예요?

여자친구의 친구가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서 취했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키스는커녕 잠자리도 안 한 걸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여자친구를 포함한 친구들 모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소중한걸요, 아껴주고 싶어요. 어딘가의 바람둥이가 입에 담을 법한 대사를 흘린 뒤, 여자친구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젖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키스도, 잠자리도 모두 하고 있어요. 토비오랑. ,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여자친구의 갈색빛 눈동자가 좋았다.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 평소엔 여드름 하나 없는 피부인데 웃을 때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사귄 지도 꽤 됐지, 이제 1년이던가. 오이카와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건 토비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토비오는 오이카와에게 단 하나만 물었다.

오이카와씨는 제 거 맞죠?”

뭐라는 거야.”

제 거 맞잖아요. 그쵸?”

그러더니 당돌하게 입술박치기를 해오는 토비오를 반강제로 떼어놓은 뒤,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누구 것도 아닌데. 애초에 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아무 사이가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여기에 있잖아요. 지금 저랑.”

토비오 웅변학원 다녔어? 꼬맹이가 별의별 말을 다 하게 됐네.”

웅변이 뭐에요?”

……….”

 

여자친구랑은 하지 않는 키스와 잠자리를 토비오와 하고, 집도 아닌 이곳에 가장 맘에 드는 티포트와 찻잔을 두고, 토비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히터도 안 틀고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뭐 하자는 건지.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어찌하고 싶은 걸까.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도, 해가 지고 또 달이 뜨면 오이카와는 이곳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토비오를 안고, 그 입술에 키스하고 밥을 같이 먹고. 좋아하는 건 여자친구였다. 소중하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오이카와의 몸을 만지고 그 귓속에 혀를 집어넣는 것도 토비오였다.

뭘 하고 싶은 걸까.’

중학교 시절 후배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자기는. 맘에 드는 찻잔과 티포트를 설거지하다가 박살 내는 후배와 왜 여태껏 같이 살고 있는 걸까. 둘의 관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올게.’ 한마디만 하지 않으면 이 집도 아무 쓸모 없는 허물이 된다. 그런데도 오이카와와 토비오는 동거를 하고 있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이카와가 생각하기에, 저와 토비오의 관계는 다 마신 컵 속의 물 한 방울이었다. 서로 간에 나눌 것이 조금도 없는데도 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물 한 방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제 증발할지 모른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컵 속의 물 몇 방울은 말끔히 사라져있을 게 분명하다. 그 몇 방울의 물을 구하며 키스를 하고, 타액을 넘기고, 밤을 보내고 나면 질려버릴지도. 그때까지만은 토비오와 함께여도 좋으리라. 가끔 수컷처럼 욕망의 눈동자를 번뜩이는 녀석의 놀이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어가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는 토비오를 기다렸다. 왜 하필 토비오일까, 그건 오이카와가 굳이 묻지 않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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