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Ring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 약지는 쉬질 않았다. 중학교 시절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부터, 작은 반지는 거기서 빠지질 않았다. 반지의 종류, 어떤 형태, 혹은 박힌 보석의 모양이 바뀌는 날은 있어도 약지가 비어있는 날은 없었다. 연습할 때 반지는 잠깐 모습을 감췄다가, 연습이 끝나고 여자친구와 만나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반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조그만 걸 그렇게 잃어버리지도 않고 용케 뺐다 꼈다 한다고 감탄도 했다. 테이핑도 손수 정성스레 묶는 섬세함이 거기서 드러나는 걸까, 반지는 깨끗하게 보관되었다가 다시 손가락 안에 자리 잡았다.

 

그게, 그렇잖아요.”

 

오이카와 선배의 길고 가느다란, 손톱이 잘 정돈된 약지에는 항상 예쁜 모양의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오이카와 선배는 그 반지를 다시 끼웠다. 몇 번이고 손을 여기저기 들었다 놨다 하며 반지가 빛을 반사하고 반짝이는 모습을 줄곧 바라봤다.

 

누구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그 손가락이 쉬는 건 아주 잠깐의 기간뿐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면 거짓말같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선 반지가 사라졌다. 오이카와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는 일종의 증거였다. 가설을 입증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물적 증거였다.

 

생각하잖아요. 누구라도. , 정말 좋아하는구나. 여자친구.”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가 아주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시합이 끝난 후, 오이카와 선배는 한동안 새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단순한 변덕 정도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날을 새는 것보다 달을 세는 게 더 빨라질 무렵 그 자리가 비어있는 게 당연한 때가 천천히 찾아왔다. 그 사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는 반지가 남아있던 자국이 스르르 없어지고, 대신 선명한 테이핑 자국만 남아있게 되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내가, 남자인 내가, 오이카와 선배와 사귀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어땠냐고요?”

. 반지 받았을 때요. 전 그게 제일 궁금하네요.”

화났어요.”

화가 났다고요?”

.”

 

토비오쨩, 이거.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오이카와 선배는 입을 열었다. 갈색 각설탕 2개를 졸인 목소리였다. 달콤하고, 입 끝에서 녹아버리는 목소리. 내 손을 천천히 가져가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은 목소리보다도 조심스러웠다. 사귈까, 라는 애매한 말로 사귀기 시작한 지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365일하고 3시간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 날은 사귀고 나서 1년째였다.

이게 뭔데요.

생애 처음 태어나서 모르는 척이란 걸 해봤다.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구부러진 눈썹 형태에서 이미 오이카와 선배는 눈치챈 모양이었겠지만. 김빠진다는 듯이 웃더니 무슨 표정이 그래? 핀잔을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골랐다고. 아무래도, 남자용으로 2개는 없더라. 사이즈 조정을 좀 한 것뿐이고, 한번 껴보는 게 제일 좋을걸. 입술을 움직이며 혼자서 열심히 설명하는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멍한 귀 뒤편에서 울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반지를 소중하다는 듯이 들어 올려서, 내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우려 했다.

하지 마세요. 개미 소리도 이보단 크겠다. 자학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대신 손가락을 움츠렸다.

토비오?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에 들린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비슷하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과 비슷했다. 어쩌면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몰랐다. 반지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 몇 번이고 바뀌었던, 지독히도 가벼웠던 그 반지들과 같은 색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하잖아요. 너무하다고? 자꾸 억울한 감정이 들어 이상하게 눈이 시큰했다. 멍청아, 이런 데서 이상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머릿속 카게야마 토비오가 뭐라뭐라 말하는데도 웅얼거리는 물소리로 바뀌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하다고요. 하나도, 오이카와 선배가 아주 조금도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안 하는 건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되잖아요. 언젠가, ―…헤어지는 건알고, 있으니까.

아니, 토비오. 지금 무슨 소린데?

반지 얘기하고 있잖아요.

반지가 왜 헤어지는 얘기가 되는 건데?

반지니까요.

아니, 무슨 소리냐니까!

 

왜 웃으세요?”

아니,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알 거 같아요. 카게야마씨가 왜 그랬는지. 반지는 증거였으니까요.”

오이카와 선배는 몰랐어요. 저도 몰랐죠. 저희 둘 다 몰랐어요. 서로에게 무슨 의미인지.”

 

헤어지면 뺄 거잖아요. 뺏다가, 사귀면 새로 끼고, 다시 헤어지면 반지는 없어지고. 그런 과정 중 하나일 뿐인 거잖아요. 저도, 그냥 결국 똑같이.

뭐가 불만인 건데.

반지가 빠지면 저희는 헤어지는 거잖아요. 헤어지면, 반지는 빠지고. 그럼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은 다시 반지를 끼울 테고, 전 그냥 버린 반지나 가지고 있겠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이카와는 드물게 진지하게 화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붉게 물든 카게야마의 눈가를 훑었다. 부드럽게 잡았던 손에 힘을 주고선, 꽉 잡힌 카게야마의 왼손을 앙 깨물었다.

아얏! 날카로운 목소리를 흘린 카게야마는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겨우 그런 생각 때문에, 이 오이카와씨가 주는 반지를 거절해?

꽉 깨문 자국을 지나, 반지가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꼭 들어맞았다. 주문 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에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결국, 제 손가락에 들어가고 말았다. 언젠가 손가락에서 빠질 날만 기다리는 증거’.

이제 두 번 다시 반지는 안 살 거니까. 그걸로 끝이야.

그게 무슨 말인데요.

, 오이카와씨 왼손 약지에 끼워. 빨리.

거의 반강제로 오이카와의 약지에 세트로 만들어진 반지를 끼우고 난 뒤, 카게야마는 거의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최악이다. 하필 1년 된 날에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연애에 무지한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1년째 되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는 걸. 적어도, 이런 걸 하는 날은 아니잖아. 입 밖으로 당장에라도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만족스럽다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면서 반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내 왼손 약지는 이걸로 끝이니까.

?

이제 반지는 죽을 때까지 이거 하나뿐이라고. 비싼 거로 사서 다행이지, 녹슬 때까지 끼고 다녀야 하니까.

무슨 말인데요.

이해 못하겠냐고, 바보야.

오이카와 선배는 눈꽃이 닿아 녹는 것처럼, 순간의 키스를 하고선 다시금 웃어 보였다. 흰 눈처럼 새하얀 미소였다.

 

또 웃으시네요.”

두 사람이 귀엽잖아요. 전 제 아내랑 그렇게 재밌게 연애해본 적은 없거든요. 애초에 아내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죄송해요. 제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죠.”

괜찮아요. ‘재미나게 연애하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 . , 죄송해요. ‘주례얘기였죠? 좋아요.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 그 반지가 그거에요? 평생 하나뿐이라는 반지.”

. 결혼식 때도 이걸로 할 거라네요.”

오이카와씨나 카게야마씨나 정말, 엄청난 고집쟁이 같네요.”

워낙에 배구란 게 포기하면 지는 경기라서요.”

멋지네요. 두 사람 다. 약간 낡은 반지여도, 그 반지가 부러울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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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님 생일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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