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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