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너를 사랑한다는 것 01








너를 만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는 사람만 가는 편집샵에서 평소 사고 싶었던 재킷을 사고, 조금 이르지만 초겨울 용으로 부드러운 털로 짜인 갈색 목도리를 샀다.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목도리도 하나 손에 들었다. 가게 밖에는 몇몇 사람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지나간 여자 두 명은 군청색 털모자를 세트로 쓰고 있었다. 입술이 붉었다. 나는 그 여자들 뒤에 자리를 잡고 몇 명의 행인으로 이루어진 기류에 몸을 맡겼다. 가을에서 겨울로 지나가는 계절의 자리에는 낡은 낙엽 잎만 몇 개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목도리 두 개가 담긴 갈색 봉투를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잡고, 얇은 코트를 반대쪽 손에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정의는 아주 모호했다. 나에게는 지나간 계절만큼이나 의미 없던 시간들이 너에게는 세상 마지막 날보다도 중요한 날이었을지도 몰랐다. 나의 계절에서 네가 없던 시간의 축은 일그러져 아주 빠르고도 천천히, 때로는 거꾸로 흐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하루라는 날은 지나갔다. 시간이란 그랬다. 시침이 없든 분침이 없든 혹은 그 두 개가 모두 존재하지 않아도 의식 없이 흘러가는 게 시간이었다.

앞서 걷던 여자 두 명이 오른쪽 골목길로 발을 틀었다. 유명한 호텔의 애프터눈 티세트 광고 간판이 골목길 앞에 서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다르트류가 프린팅된 종이는 그냥 보기에도 고급 재질이었다. 3단 트레이 앞에는 흰색에 선이 예쁘게 자리 잡은 도자기와 찻잔이 놓여있었다. 찻잔 안의 홍차가 김이라도 오를 듯 선명한 빛깔이었다. 군청색 털모자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따라 들어간 뻔한 다리를 멈추고 다시 다른 대열에 끼어들었다. 거리 양쪽에 놓인 건물은 3층 건물도 있었고 10층 건물도 있었다. 얼마 전 모 유명 가수가 공연했다던 넓은 콘서트홀도 있는 곳이었고, 동네 구멍가게 수준으로 물건 몇 가지만 들여놓은 슈퍼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너를 만나기로 한 곳은 한 블록 넘어서 테라스가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초겨울 바람이 바닥을 때리고 낙엽 몇 개가 팔랑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얼마 전 머리를 자른 뒤로 뒷목이 서늘해서, 방금 산 목도리를 한번 둘렀다. 코트는 손에 들고서 목도리만 두른 모습이 내가 봐도 우스울 것 같았다. 넌 웃지 않겠지만, 조금 이상하게 쳐다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여름 한낮이었다. 손으로 가려도 각진 햇볕이 머리를 덮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야기에서 30분에 한 번씩만 버스가 오는 버스정류장이었다. 처음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때에 만들어졌던 버스정류장은 페인트칠 한 곳이 군데군데 벗겨져 시커먼 회반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몇 년 전 새로 단 유리 천장은 햇빛을 끌어모아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뒤편 나무그늘에서 자라기 시작한 담쟁이 넝쿨이 언제인지 모르게 뒤편 기둥 반 이상을 휘돌아 감쌌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으면 으레 그렇듯, 버스를 탈 일도 없는데 괜스레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차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오지 않는 너에 대한 생각이 더위로 눌린 의식 안에 수북이 쌓였다.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확신으로 가기까지는 이 자리에 나올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기대라는 품목이 심장에 남아있던 것 같다. 기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덧없는 믿음이 버스 한두 대가 지나갈 때마다 여름 태양에 스러져갔다. 핸드폰을 두고 나온 건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약속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의 축은 가끔씩 흔들거렸고, 그날따라 지구 전체가 누워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씨."

네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언제인지 모르게 나는 얼 풋 잠이 들어 있었다. 꿈일까, 현실일까 확신이 들지 않는 경계에서 나는 서 있었고 그건 꿈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너는 검은색 티셔츠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포시 열린 입술 사이에서 약한 한숨이 나왔다. 네 뜨거운 손이 맞닿아있는 어깨가 다른 조직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토비오."

잠긴 목소리였다. 네 이름의 운을 떼고서부터 제 박동을 찾지 못하는 심장이 강한 햇볕에 짓눌려 찬찬히 속도를 되찾았다. 카게야마 뒤편으로 버스가 한 대 멈췄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자고 있는 한 여성만이 유일한 승객이었다. 버스 출입문이 느릿하게 열리는 걸 너와 내가 바라봤다. 잠시간의 시간적 간극이 지나고 버스 문이 다시 닫혔다. 몇 차례 바닥을 긁는 시동 소리가 나더니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창문에 기대고 있던 여성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찰나는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르는 척하려 했던 사실은 네 눈동자 안에 있었다. 바람 한편 때문에 흔들린 담쟁이 넝쿨의 버서석거리는 소리가, 기대라는 의미 없던 믿음이 애초에 가졌던 확신으로 바뀌는 소리 같았다. 생각이 갈음하는 한 장면에서는 소리도 운을 띄워주는 법이다.

"문자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핸드폰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

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너와 나 모두 알고 있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고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이 몇 번 왕복했다. 유리 천장이 모아 내린 햇빛이 닿아 네 뺨을 비추고 또 빛났다. 너는 닫혀 있던 입을 몇 번 여닫은 후, 다시 열었다. 나는 입을 열어야만 했다. 눌린 배 안에 힘을 주고, 잠긴 목에서 버서석 거리는 소리라도 내야 했다. 알 수 없는 책임감은 어디서 오는 거였을까. 어쩌면 난 그제야 내가 너보다 2년 선배라는 사실을 억지로 인식한 걸지도 몰랐다.

"헤어지자고?"

"……."

너는 약간 놀란 듯 어깨에 둔 손을 조금 떨었다. 열렸던 입이 다시 닫혔다. 긍정하는 데에는 말 한마디보다 행동 하나가 더 진실을 담고 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게는 더욱이 그랬다. 확신은 순간 진실로 바뀌어 빠른 뇌내 변환을 거쳤다. 어깨에 놓여있던 네 손을 잡았다. 너에게 닿은 부분만 다른 조직으로 변했다. 시간의 축은 다시 조금씩 어긋나,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다시 혼란을 자아냈다. 다만 가로젓지 않는 네 얼굴은 진실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오이카와씨."

너는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왜 네게 그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또 왜 네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밟힌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연스레 내게 속해 있었던 애정의 조각은 몸에서 떨어져나와 제 자리를 찾아갔다. 너는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이 되어있었다. 사랑의 말미를 끊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나의 손이 더이상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지나간 버스를 떠올렸다. 30분에 한 번씩 버스가 온다고 해도, 같은 버스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새삼 지나치게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숨이 끊길 듯 아픈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내가 들은 너의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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