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일 하던 로드 워크를 잠시라고는 하나 중단했던 걸 카게야마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작용 한 것인지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밤을 점점이 수놓았던 가로등 불빛이 미처 꺼지기도 전이었다. 밤새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안개가 희뿌연 수증기처럼 카게야마의 발목 언저리를 덮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심호흡을 크게 두세 번 한 후 카게야마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로드워크 코스를 따라, 물결치는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냇물을 가로지르고 나무의 그림자가 깨어나는 공원을 지났다. 작은 식물원 앞을 금세 추월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면서 언덕 위를 오르면 이슬이 촘촘히 내려앉은 땅이 부드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깨닫고 카게야마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당시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카게야마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재학 시절보다 키도 컸고 어깨도 넓었으며 근육량도 늘어있었다. 미야기, 센다이가 5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거의 없는 것과 달리 카게야마는 변해 있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재정의하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5년의 공백이란 충분히 재정의가 필요한 기간이었고, 카게야마는 저만 똑같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햇살이 수평처럼 퍼지며 검은 밤을 하얗게 분칠했다. 쏟아지는 여름의 향기가 깨어나고 있다. 카게야마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언덕길을 다시 내려갔다.

 

 

# 6th day

 

 

큰 벚나무를 돌아들어가 오이카와의 집 앞에 이르면 미야기로 돌아온 후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마치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승자 팀에 달라붙어 너나 할 것 없이 질문을 쏟아붓는 기자들 같다. 수많은 카메라와 몇 가지 방송 장비,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 수십 명. 카게야마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저쪽에서 카게야마를 발견한 기색은 없다. TV 방송처럼 카메라를 쳐다보며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보였다.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퇴로 큰 화제인 오이카와 선수의 집 앞에 서 있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사실일까요? 인기척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끔 극성 팬이 집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사례를 눈으로 본 건 처음이다. 기자 및 카메라 담당자는 이곳에서 밤이라도 새려는지 각 잡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갑작스레 울려서 카게야마는 퍼뜩 놀랐다. 발신번호는 미야기, 카게야마의 집. ? 집이라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심스레 화면을 눌렀다.

토비오쨩? 어디야?

오이카와씨?”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오이카와의 조금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맑은 여름 하늘 같은 목소리다. 수많은 기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오직 제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있다. 묘한 충족감이었다.

나 지금 너희 집인데.

? 아뇨,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오이카와씨 집 앞에,”

알아. 올 때 우유빵 좀 사와. , 10개까지는 필요 없으니까 적당히.

. 통화는 강제 종료되었다. 카게야마는 메인화면으로 돌아온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오이카와의 집 앞으로 눈을 돌렸다. 기자, 카메라 등 전부 그대로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빵집으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걷던 걸음이 이내 뜀박질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숨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사선으로 비추는 햇빛이 머리를 풍성하게 적셨고, 카게야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는 걸 느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빵집 문을 열고 카게야마가 들어서자마자 여성은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크게 뜨고 손님, 손님! 부르곤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손님, 그거 아세요?! 어제 손님처럼 우유빵 10개 사가신 분이, 글쎄, 그 오이카와 토오루씨래요!”

.”

카게야마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눈길을 피했다. 여성은 손을 맞잡더니 아, 우유빵 사러 오셨죠? 흥분한 채 물었다.

몇 개 드릴까요? 10개 드릴까요?”

아뇨…… 7, 주세요.”

오이카와가 말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10개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보다는 적을 테고, 과연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몇 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제가 아는 건 그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 뿐이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하고 웃어 보였다.

평소보다는 적네요. 7개 맞으시죠? 맞다, 그래서 그 오이카와 선수 말인데요! 국가대표시라던데, 알고 계셨어요? 이런 조그만 마을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예정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실은 이 사람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 이 여성에게는 오이카와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여름의 맑은 하늘과 겨울의 메마른 공기가 동시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녀가 담는 우유빵을 멍하니 바라봤다. 동그랗게 안쪽으로 회오리진 빵이 봉지에 하나둘 들어갔다. 아마 이 우유빵은 카게야마가 산 우유빵 중 유일하게 오이카와의 입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 * *

 

 

현관문을 열면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식탁에 오이카와가 앉아있었다. 7부 소매의 아이보리색 윗옷을 입은 그는 표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식탁 위에는 그가 가져온 듯 책 한 두 권이 펼쳐져 있다.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이상한 대화다. 이곳은 오이카와의 집이 아니었고, 그가 있는 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다. 저에게 익숙한 무채색 풍경 안에서 이질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독특한 사물처럼, 오이카와는 여타 물질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운동화 끈을 풀었다. 고개를 숙인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토비오쨩, 문도 안 잠그고 다니면 안 되지. 도둑 들면 어쩌려고.”

도둑, 안 왔는데요.”

오이카와씨가 불법침입했잖아.”

오이카와씨는 괜찮아요.”

…….”

운동화를 벗은 후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의 불쾌해 보이는 표정과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에 기분이 나빠진 건지, 5년이 지나도 도통 어려운 사람이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멈춰있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반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책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서브를 넣을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눈동자를 살며시 내려놓은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다. 그것도 저의 집의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샤프가 종이 위를 긁는 소리, 소소하게 들리는 숨소리. 카게야마가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카락은 향기가 되어 콧속에 보드라운 냄새를 풍겼다.

오이카와를 따라 고개를 숙이면 책 내용이 언뜻 보였다. 카게야마가 알아볼 수 없는 해괴한 단어들이 가득하다. 아니, 책에 쓰인 언어는 영어였고 카게야마에게는 알파벳의 모양만 익숙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낸 지 5. 아무리 그래도 어느 수준까지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마치 그 자리를 바꿔 끼운 듯 영어에 대한 지식은 깨끗이 사라졌다. 고등학생 때 츠키시마에게 배웠던 것도, 유급 직전까지 위험한 상황에 몰려 오이카와에게 급하게 배웠던 영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와의 기억 중 저가 잊은 건 없지만, 그때 그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걸 가르쳐줬는가. 카게야마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5년의 간극이란 그런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영어공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옆에 놓아둔 봉지에서 우유빵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깨끗한 입술 주변은 우유 크림도 피해 가는 성역이다. 엷은 분홍색의 작은 입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영어 공부는 왜요?”

취직해야지. 지금까지 배구만 했으니까,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잖아.”

…….”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여러 번 베어 물었고, 몇 번의 반복된 행동 끝에 우유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묻은 우유 크림을 조금 핥아먹은 후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이 영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다는 말을 오이카와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게야마는 피가 살며시 식는 걸 느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연한 홍차색으로 빛나는 속눈썹이 깜빡이면서 영어를 읽어나갔다. 그는 정말로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처럼 보인다. 이제 오이카와는 거의 배구선수로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 안 고프세요?”

고프니까 우유빵을 먹고 있지. 토비오쨩은 바보예요?”

바보라는 말에 잠시 울컥했으나 카게야마는 입술만 삐죽이는 걸로 끝냈다. 미간을 좁히며 불만을 표현해도 오이카와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카레 만들어 드릴게요.”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놀란 듯 입까지 살며시 열린 채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쩐지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이 예상된다.

너 카레도 만들 줄 알아?”

외국에서 살다 보니 카레 파는 곳이 별로 없어서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아주 당연하게 카게야마가 카레를 못 만들 거라 생각하는 오이카와의 여유가 조금 분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까지 카게야마는 카레 만드는 법을 배울 생각도 없었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어머니, 같이 가지 않으셨어?”

어머니도 바쁘시니까요. 제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배우는 게 어떻냐고 하셨어요.”

흐응.”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과연 네가? 라는 말을 담고 있는 그 노골적인 눈빛에 카게야마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맛있게 만들 수 있어요. 뚱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오이카와가 그래? 일부러 놀란 듯이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한 번 만들어보든지.”

턱을 괴고 도전적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모습은 제 기억 속 오이카와처럼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고, 이슬이 맺혀 간질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미묘하게 올리고. 카게야마는 그의 깊은 눈동자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날 사뒀던 카레 재료를 꺼내는 카게야마의 등 뒤로 오이카와의 선명한 눈빛이 꽂혔다. 등을 바라보는 건 항상 제 역할이었다. 5년의 간극을 지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제 등을 밀어내기만 했던 미야기의 여름처럼.

 

 

* * *

 

 

카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실포실했다. 제 상상속보다, 이와이즈미와 있던 레스토랑보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어떤 카레보다. 푹신하게 밥을 덮은 카레와 연하게 달콤한 향을 내뿜는 접시.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넣고 몇 번 우물거렸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앞서 오이카와가 공부할 때처럼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은 채 카레를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저의 입 안에 같은 음식이 있고 같은 맛과 향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서 반짝이는 빛깔을 푸른 하늘에 가득 담아놓은 시간대였다. 그 때문일까? 혹은 카레 때문일까. 체온이 약간 올라 몸 이곳저곳이 따스하게 차올랐다. 혹은……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접시를 전부 비운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카레의 열기 때문인지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카게야마는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물로 헹구어도 닦여나갈 내용물은 접시에 달라붙은 카레 약간뿐이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꾸물거렸다.

카레만 배운 거야?”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면, 오이카와는 목소리만큼 달콤함이 묻어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너답네, 토비오.”

오이카와는 눈가를 찌푸리며 천천히 웃었다. 마른 장미꽃잎처럼 연하게 물든 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이 오가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오이카와에 대한 갈증이 바닥을 덮은 안개처럼 남아있는 카게야마를, 그가 오늘은 채워줄지 몰랐다. 오이카와는 이내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가는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방 한가운데서 카게야마를 기다리듯이 서 있다가, 침대에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토비오, 이리 와.”

오이카와는 제 옆자리를 톡톡 누르며 카게야마를 불렀다. 마치 연인을 부르듯 말꼬리는 길게 늘이고 조금 낮은 목소리. 창가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를 등 뒤에서 비췄다. 빛무리가 형성된 그의 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오이카와의 옆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분만큼 가라앉은 침대 쪽으로 오이카와가 몸을 눕혔다. 카게야마는 천장을 보고 누운 오이카와와 눈을 맞췄다.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흐리다. 오이카와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할 게 산더미야. 학교 공부랑 근본은 비슷해도 적당히만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씨는 성적도 좋으셨었죠.”

“‘그러고 보니’? 토비오쨩, 나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울면서 찾아왔을 땐 언제고!”

울면서 찾아가진 않았어요!”

, 건방진 토비오쨩은 이렇게 해줘야지.”

오이카와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더니 카게야마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 외마디 소리를 낸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처럼 뒤로 엎어졌다. 똑같이 천장을 보는 처지가 된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으나, 무심코 숨을 삼켰다.

토비오.”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오이카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눈앞에서 맑게 빛나고 그의 숨결이 따뜻했다. 그가 붙잡고 있는 팔뚝이 홧홧하니 뜨겁다. 여름이 방 안에 갇혀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숨결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온기가 더해졌다. 뺨의 피부가 열을 발산하고 혈관을 넓힌다. 얼굴이 뜨거웠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오이카와의 눈동자 두 개는 그 조그맣고 동그란 세계 속에 카게야마를 가뒀다. 오랫동안 우린 홍차 속에, 카게야마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잠겼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의 눈동자와 마주 봤을 때부터 그 홍차의 맛을 알고 있었다. 침을 삼키고 서서히 숨을 내뱉으며 공기 위에 음조를 얹었다.

오이카와씨는영원히 제가 이기고 싶은 상대예요.”

.”

오이카와씨가 배구를 그만둔다고 들었을 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굉장히 갖고 싶은 배구공이 있었는데 그게 터져버린 것만 같은오이카와씨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제 목표였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이렇다 할 목표를 정하고 배구를 한 적은 없지만요.”

카게야마에게 배구는 삶이고 인생이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순간을 지나는 관문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구는 제 인생의 가치이자 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역이었다.

그래도 오이카와씨는그 안에서 저의 확고한, 흔들린 적 없는 목표였어요.”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피죽 웃었다.

누구 맘대로 목표로 삼는 거야, 도대체. 난 토비오쨩 따위 안중에도 없었거든?”

알아요. 오이카와씨는 항상 저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었죠. 그 등을 보는 건 제 역할이었어요.”

카게야마가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가둔 채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홍차에 녹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제가 이길 거예요.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씨도, 그렇지 않은 오이카와씨도변한 건 없어요.”

…….”

그걸 알게 됐어요. 생각해 봤는데, 오이카와씨는 중학생 때부터 우유빵을 좋아하셨잖아요. 달라진 건 없어요.”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를 은은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마주 보면서, 카게야마는 입가를 꾸물거렸다. 무언가 아주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풀잎을 쓰다듬는 따스한 햇볕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발그레한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만져선 안 될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고, 그의 손바닥에 아직 남아있는 굳은살이 꺼끌꺼끌하게 피부를 긁었다.

난 이제부터 널 죽일 거야.”

……?”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몸 위로 넘어왔다. 누워있는 카게야마의 양팔을 누르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목덜미에 묻었다. 그의 면바지와 카게야마의 트레이닝 바지를 사이에 두고 중심부위가 맞비벼졌다.

오이카와씨?!”

토비오. 가만히 있어…….”

쇄골을 알싸하게 씹은 치아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뇌를 녹이던 태양보다 더욱 달콤한 숨소리에 카게야마의 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무엇을 한다는 걸까.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들어 올린 티셔츠 속으로 오이카와의 따뜻한 손이 들어왔다.

.”

평소 타인이 만지지 않던 부위다. 양쪽 가슴 사이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문지르던 손이 눌러 붙어있던 돌기 두 개를 동그랗게 돌렸다.

묘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는 한 손으로는 돌기를 굴리고, 다른 한 손은 땀이 스며 나온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오이카와의 손에 붙은 굳은살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이상한 감각에 허리가 들렸다.

,

오이카와가 하반신을 서서히 돌렸다. 마주 댄 중심부위에 은근한 간지러움이 모였다. 마치 관계를 맺듯이 허리를 돌리기도 하고 위아래로 흔들기도 하면서, 중심부위에 열기를 더했다. 묘한 감각이었다…….

 

 

그의 손안에 뜨거운 것을 토해낸 뒤 오이카와는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말없이 젖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입술에 천천히 닿았다.

오이카와씨.”

그의 눈동자는 너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던 순간의 눈동자 빛과 비슷했다. 나른하게 퍼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지구와 태양의 관계처럼, 카게야마가 그의 안에서 죽는 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는 저 자신이 또한 한심했다. 이 이상 한심해질 순 없었다. 그 흔한 말 한마디 못했던 카페에서처럼 다시 그럴 순 없다.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히고 시야가 점차 흔들거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카게야마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말해야 한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와이즈미가 행복해지겠네라고 했던 것처럼, 이건 저의 할 일이다.

오이카와씨, 괜찮아요.”

……토비오.”

죽여주세요. 저를.”

…….”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카게야마는 아주 약하게 미소 지었다. 저가 제대로 웃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여느 때의 오이카와였다. 바보구나, 작게 내뱉은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창문 밖으로 들리는 매미 소리보다 약했다.

오이카와씨도요.”

건방지네.”

5년이나 지났는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에 소리를 내어 키스한 뒤, 카게야마의 뒤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찌할 수 없었다. 저도 만져본 적 없는 곳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만지고 있다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긴장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묘해져서, 카게야마는 그저 눈을 감았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던 몸을 풀고 그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카게야마는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물로 젖어 든 뺨에 다시 물줄기 하나가 서서히 흘렀다.

오이카와씨…….”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와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인상을 찡그린,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면 그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 대신 하고 싶은 말을 카레처럼 혹은 우유빵처럼 삼키고, 장 속에 녹여서, 제 세포 구석구석에 집어넣었다. 제 안의 구성성분인 오이카와 토오루로 남도록. 오이카와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입술은 보드라운 미소를 만드는 게 참 그다웠다.

바보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태양에 녹아내리는 매미를 떠올렸다. 그때 저의 전신을 녹이던 햇빛처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쏟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한 일사병을 앓았다. 이번에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햇볕 아래 분해되어 기름이 번들거리는 우유빵은 썩을 수밖에 없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다.

 

 

 

 

# 7th day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제가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지지하고 천천히 현관문 쪽으로 돌아선 후, 문을 잠그려던 손을 멈칫했다. 현관문을 바라본다. 첫날 갔던 오이카와의 집처럼 인기척은 없다. 카게야마는 문고리에 끼우려던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다. 구름 없는 하늘에는 살인적인 열기를 내뿜는 태양만 강하게 빛났다. 매미 소리는 처음 왔던 날보다 줄어들었다. 많이 죽은 걸까, 햇볕에 녹은 걸까. 어느 쪽이든 무엇이 사실이든, 지금 남아있는 매미도 언젠가 전부 떨어져 죽을 테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는 익숙한 여성이 다시 호들갑스럽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 손님! 어서 오세요! 우유빵 열 개 드릴까요?”

미리 옆에 준비해둔 것 같은 우유빵을 봉지에 담을 준비를 하면서, 여성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 후 천천히 대답했다.

아뇨, 한 개만 주세요.”

어머, 그래요? 의외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 여성은 우유빵 한 개를 솜씨 좋게 봉지에 담았다.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던 여성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어제 말씀드렸던 오이카와 선수요알고 보니 이미 마을을 떠나셨대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알아봤나 봐요.”

그런가요.”

그것도 모르고 어제 손님께 마구 이야기나 하고어휴, 주책이 참. 죄송해요.”

……아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성은 볼을 물들이고 한 번 더 작게 죄송해요.’ 중얼거렸다. 포장한 우유빵 하나를 건네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면 그 열 개 사 가신 분은 누구실까요?”

글쎄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아마도, 오이카와 선수가 아닌우유빵을 무척 좋아하는누군가이리라.

카게야마는 밖으로 나온 후 카페 근처에 그늘을 드리운 나무를 바라봤다. 연한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투명하게 흐르는 여름 공기를 들이마시고, 카게야마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움직였다.

 

 

* * *

 

 

오이카와 집 앞은 어제의 광경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빈터였다. 수많은 카메라 장비도, 기자도, 사람들도 없다. 언뜻 낡은 것처럼 보이는 현관문은 정형외과 의원처럼 몇십 년이고 똑같은 모습일 것만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그 상태 그대로 굳은 채 땅속에 사는 매미처럼 오랜 기간을 기다릴 것이다.

거기, 사람 안 살아요.”

생소한 목소리다. 몸을 돌리면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지겹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훑어보고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살고 있다는 루머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어제 잔뜩 기자들이 들이닥쳤어요. 근데 웬걸, 벌써 이사했대요.”

언제요?”

나야 모르지. 가족은 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는데 혼자만 남아있을 리 없죠. 기자들도 헛다리 짚은 거지, .”

남성은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안 좋게 구기고 가버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돌려 현관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몸을 돌리고 캐리어를 끌면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유빵을 담은 봉지는 눅눅한 바람을 받아 이리저리 흔들린다. 왼쪽으로 반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다시 왼쪽으로…….

 

 

* * *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도로를 거닐면 고생하는 건 캐리어였다. 캐리어가 바닥에서 들렸다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매앰매앰 소리 위에 겹친다. 햇살처럼 투명한 땀이 관자놀이에서 흘렀다. 바닥 위로 오르는 아지랑이, 물결치며 흐르는 습기 가득한 바람, 땅을 짓누르는 여름 구름.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멈춰선 후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 토비오요. 돌아가려고요……. , . 아뇨, . 발목은괜찮아요. 저기감독님.”

, 배구가 하고 싶어요. 작게 말하고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입가 주위가 떨려서 작게 깨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감독님, ……,”

카게야마는 파들거리던 다리를 굽히고 주저앉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검은 물방울이 툭, 툭 떨어지자마자 스며들었다.

어제, 한 번 죽어서앞으로도앞으로도 저는, 그 사람한테는 없는 사람이라……,

카게야마는 눈을 꼬옥 감았다. 감정의 컵에 담긴 내용물이 넘쳐서 떨어지는 눈물로 형상이 바뀌었다. 전날 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어지러움과 함께 머리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햇볕과 매미 소리. 발목이 다시 욱신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 왜 또 말썽인 것처럼 구는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은 카게야마의 욕심을 탓하는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철저하게 믿었다. 그의 안에서 죽어있을 제 시신을, 오이카와가 깨끗하게 닦아주고 수의를 입혀준 뒤 잿더미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줄 거라는 믿음. 완벽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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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13 22:42

    비밀댓글입니다

    • 핫삐 2017.02.13 23:40 신고

      아닛! 죄송합니다 ㅠ.ㅜ 제가 트위터에만 정보를 올렸네요 ㅠ.ㅜ 성인인증은 제 개인 포스타입을 통해 하시면 됩니다. 주소☞ http://hatpphi.postype.com/post/56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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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Seven Days)

 







 

다시 찾아간 정형외과는 변한 게 없었다. 아마도 개원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한 건 없을 것이다. 빛바랜 백의를 입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 비슷하게 적당한 연배로 보이는 간호사.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와 겨우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X-ray 기계까지. 5년 뒤도 똑같이 이 모습일 것 같은, 포르말린에 담겨 부패하지 않을 것만 같은 오래된 정형외과 의원. 카게야마는 왜 벌써 왔냐는 의사의 말에 머쓱하게 입술만 삐죽였다. 의사는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며 장난스럽게 말장난을 치다가, 붕대를 풀고 그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진 후 기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역시 젊은 청년은 다르네요. 회복이 굉장히 빨라요. 한 일주일은 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괜찮은 건가요?”

카게야마는 그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는 의사의 물음은 옳은 말이었다. 붕대가 갑갑하고 불편하다기보다, 로드워크나 근력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끝에는 배구가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삶의 일부분이다. 의사는 턱살이 두툼하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붓기도 나아지고 통증도 없으며 관절운동도 괜찮아 보인다고는 하지만. 전에 말했듯 염좌라는 건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세요.”

.”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주사 한 대만 맞고 가요. 알았죠? 무리는 금물입니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이고 스스로 절망하기 마련이에요. 모든 일이 그렇죠.”

…….”

카게야마군처럼 젊은 청년들은 저 자신의 힘으로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의사는 단호하게, 동시에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은 책상 위에 놓인 처방전에 몇 가지 영어단어를 적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인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그에 따라 인상을 찌푸린 탓일까,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저젊은이들은 이런 시골에 잘 오지 않으니까, 무슨 연유가 있을까 해서요.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것뿐입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삶에든, 운동에든, 관계에서도요.”

. 감사합니다.”

감사 표현을 해도 될지 조금 망설였으나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검고 푸른 눈동자로 백발이 잔뿌리처럼 일부만 남아있는 그를 바라보면 의사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카게야마가 관계에 무리를 가한 것의 대가는 아마도 오이카와가 치렀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내리며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5th day

 

 

오전 10시에서야 여는 의원을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센 시간대가 되고 만다. 묵직한 여름의 향기가 다시금 대기를 휘돌았다. 카게야마는 아찔하게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만 골라 걸었다. 땀은 이제 신체의 장기처럼 붙어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불쾌한 감각을 자아냈다. 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겨우 10분 거리다. 붕대를 푼 발목은 전날보다 훨씬 매끄럽게 구부러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삐끗하며 비틀거렸다. 더는 절뚝이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절뚝이는 기분이었다.

나무의 푸른끼가 짙다. 이끼처럼 잎사귀를 덮은 빛깔은 빛에 따라 앞, , 양옆으로 흔들린다. 하늘 안에 곱게 갈아 넣은 색깔은 두툼한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 아래에 섰다. 봄이었다면 떨어진 벚꽃잎에 묻혀 흙이 분홍색이었을 텐데. 벚나무를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길은, 오이카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붕대를 했을 땐 버거웠던 길이 이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발을 땅에 대고 몇 번 발목을 천천히 돌리면 수월하게 돌아간다.

 

아아, 미야기에 있을 이유가 없구나.

 

막연히 떠올리자, 카게야마의 마음을 아는 듯 발목이 마른 통증으로 신경을 잘게 긁었다. 발목도 나았고 돌아가서 국내이탈리아대회도 준비해야 한다. 오이카와와 이야기할 염치도 얼굴을 보러 갈 자격도 없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주저 없이 번호를 눌렀다.

,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입니다. , 죄송합니다. , 돌아가려고요. 일정보다 조금 이르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 때문에 카게야마는 손을 귀에서 잠시 떼어놓았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처럼 들려오는 매미 소리만이 귀를 채운다. 카게야마는 제 근처에 떨어진 매미 허물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되면…… 배구가 하고 싶어요.”

 

 

* * *

 

 

가져온 짐은 옷 몇 가지와 혹시나 싶어 챙겨온 배구공, 세면도구 등이 전부였다. 머물었던 기간도 이제야 5일째, 짐이 많을 턱이 없었다. 짐 정리를 몇 분 만에 끝내고 마지막으로 배구공을 가방에 넣고자 방에 들어갔다. 채도가 낮은 벽지와 바닥은 제 방이 처음 생겼던 중학생 때부터 바뀌지 않았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3년과 카라스노 고등학교 3년이 녹아있는 방이었다. 주변 벽보다 색이 덜 찌든 곳은 트레이닝 메뉴를 붙여뒀던 곳이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곳을 매만지다가 오이카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저의 트레이닝 메뉴에 팔 근력 트레이닝이 몇 가지 추가된 날이기도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 이상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 다른 기억을 몇 개 더 꺼내보아도 그는 결코 친절한 선배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그럼에도 그의 서브빛을 모으고 볼의 한 점에 집중한 뒤 찰나를 섬광처럼 내던지듯 던지던 그의 서브는 명백하게 카게야마의 배구를 뒤흔들었다. 그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지.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깨달았던 순간. 생애 최초의 절대적인 패배였다. 아오바죠사이와 두 번째 경기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말. 그 어느 때보다도 카게야마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로, 아니. 오이카와가 줄곧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깨달은 순간.

이걸로 11패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 당시 그의 뺨 어느 부위에 땀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땀방울이 눈꼬리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흘러내리던 모양, 네트 너머에 있는 그의 숨소리, 입가에 맺히던 땀방울.

대학 시절 간간이 만났던 그는 매번 환한 여름처럼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카게야마의 옷만 보고도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곤 했다.

토비오쨩,’

가볍게 공기주머니를 부풀리듯 둥그렇게 이름을 부르던 오이카와. 그와 가끔 갔던 카레 집과 카페는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의 안에도 사금(砂金)처럼 남아있었다.

토비오.’

언제였을까. 카게야마가 이탈리아에 간다고 말했던 날이었을까. 함께 카레를 먹고, 오이카와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듯이 말하다가 카게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출국이 언제야? 잘 가, 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은 그를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일모레요.’

그래.’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만히 내리고, 카게야마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바로 이 집 앞에서. 어둑해진 거리를 비추는 연한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부터 전신을 비스듬히 비췄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손을 다시금 꽉 붙잡았다. 제 것이 아닌 온도와 감촉이 낯설었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봤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합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눈빛과 그 흐르던 눈동자의 움직임을 뚜렷이 인식했다. 그 뒤에 오이카와는 뭐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감고 있는 눈동자에 힘을 줬다. 신경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토비오. 죽지 마.’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으면요.’

바보. 그런 게 아니야.’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선 카게야마의 손을 깨끗이 놓았다. 그의 낯선 온기가 떨어져 나가고 미묘하게 남은 잔류 열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걸로 11패야.’

죽지 마.’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트레이닝 메뉴를 붙였던 벽이 보인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자잘한 자국들이 보였다. 이곳에 카게야마가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꺼내 다시 번호를 눌렀다. 카게야마는 좀 전에 비해 지나치게 신호음이 길다고 느꼈다.

저예요, 감독님. 카게야마요. . 저기죄송합니다. 역시,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그리고사실…… , 발목도 다쳤거든요. 제가.”

좀 전과 똑같이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있자 온갖 목소리가 저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렸다. 고성, 잔소리, 크게 내지르는 소리가 안 좋은 통화 음질 탓에 지직거리는 소리와 섞였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적어도 저의 잘못은 아니다.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경우는 카게야마도 어찌할 수 없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 죄송해요. 저기…… 그렇게 할게요. .”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문을 바라보면 불그스름한 연기처럼 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카게야마는 입맛을 다셨다. 우유빵이 먹고 싶다.

 

 

* * *

 

 

어머, 손님!”

카게야마가 ‘OPEN’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와 빵 만드는 쪽을 초조하게 번갈아 바라보더니 꽉 묶은 머리 옆을 매만졌다. 말하기 어려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기, 우유빵이한 개밖에 없어요.”

여성은 선반에 놓여있는 우유빵을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한 개만 남은 우유빵과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럼, 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도로 다물었다.

손님 말고도 10개나 사가신 분이 계셨거든요.”

? 어떤, 어떤 분이

글쎄요,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분이셨어요. 무척 잘생긴 분이셨는데, 물론 손님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여성은 볼을 물들이며 서둘러 말했다. 우유빵을 10, 무척 잘생긴 사람……. 카게야마는 그녀에게서 눈을 피해 우유빵 한 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 사이를 좁혔다.

열 개, 사 갔다고요.”

, 열 개…….”

여성은 부끄러운 듯 가로 내렸던 얼굴을 들어 의아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사려고 했던 우유빵이 없어서 화가 난 걸까. 카게야마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무언가 진한 감동이 서려 있는 듯이 보였다. 우유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게야마는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한 개 남은 거 주세요.”

, 알겠습니다.”

역시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걸까. 키도 크고 어느 정도 덩치도 있는 남성인데 귀여운 면이 있네. 윤곽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며 여성은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우유빵 한 개를 손에 들고나오면 불꽃처럼 붉은빛의 태양이 밤의 장막으로 덮이고 있었다. 거뭇하게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으며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제가 직접 빵을 그렇게 많이 사 본 것도 처음인데, 이제야 맛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음식을 사면 자연스레 입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던 카게야마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에게 그 이상의 대상이라는 씁쓸한 자각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잇모양대로 눌려 들어가는 빵의 감촉, 그 사이로 튀어나온 우유 크림이 점막에 닿아 녹으면서 향기를 풍긴다. 몇 번 씹을수록 우유빵은 카게야마의 입안에서 모양이 변하면서 달콤한 맛을 자아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의 베일, 똑같이 제 뿌리 쪽으로 빛을 흡수하는 올리브 빛 나무와 카게야마. 우유빵이 자신의 안에서 녹고 제 몸 곳곳에 퍼져 세포의 구성성분이 되는 걸 느끼며 카게야마는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또 한 입 베어 물으며 눈을 꼬옥 감았다. 정말이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붕대가 감겨있었던 발목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통증, 심장을 직접 관통하는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쪽 발목이 부어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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