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부상 때문에 로드워크를 하지 못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못했던 게 언제였을까. 1년 전, 작년 9월 즈음 유럽 챔피언십 결승전이 끝나고였나. 무리하게 리시브한 공을 바로 토스로 연결하느라 발을 접질린 게 원인이었다. 가벼운 염좌기도 했고 결승전이 끝나고 난 뒤라 적당히 쉬면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 2주일 동안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불만스럽게 동료들의 연습을 지켜봤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염좌는 한 번 일어나면 두 번, 세 번 연달아 일어나기 쉽다고 그 당시 단단히 주의받았다. 그 뒤로는 카게야마도 발목에 특히나 주의를 기울였으나, 이건 불가항력이다. 적어도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야야…….”

발목이 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면서 카게야마는 옷을 챙겨입었다. 시간은 오전 930. 미야기에서는 아무리 일찍 여는 의원도 10시부터다. 평소 습관대로 눈을 뜬 건 오전 7시 전후였으나, 그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건 카게야마를 괴롭게 했다. 대충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씻고 나오면 발목은 전날 밤보다 더욱 부어 있었다. 효모를 넣은 빵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발목 한 부위도 붉게 달아올라 발목을 돌리면 찌릿한 통증을 자아냈다. 통증이 박동처럼 퍼질 때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서늘한 눈동자,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카게야마의 귀를 난도질하던 낮은 목소리. 지금의 이 통증은 바로 그 오이카와가 선사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둔 오이카와, 미야기로 돌아온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지갑을 챙겼다. 발 한쪽을 절뚝이면서 문을 나서면 이탈리아의 여름처럼 눈 부신 태양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적어도 이탈리아는 이 정도로 매미가 많지는 않다. 대지를 뒤덮은 것이 태양이라면, 열기로 덥힌 공기를 진동시키는 건 수를 가늠하기 힘든 매미였다. 집에서 겨우 두 발자국 뗐을 뿐인데 목 뒤로 엷게 땀이 배어 나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매미의 무거운 폭음(爆音)이 카게야마를 짓누른다. 마치 미야기의 여름이, 미야기 땅이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것만 같다. 5년 전에는 이곳이 저의 땅이고 제가 숨 쉬는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흐릿한 기억처럼 풍화되었다. 카게야마가 살던 집이 있고, 카라스노 고등학교가 있고, 사카노시타 상점이 있었으나 미야기는 과거의 잔해와 함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돌아가.’

돌아가라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미야기 안에서 카게야마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인 오이카와가 저를 밀어낸다 해도, 카게야마는 가야 했다. 발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오이카와를 선명하게 떠올릴수록 통증이 날카로워졌다.

 

 

#2nd day

 

 

오래 입은 듯 빛바랜 백의를 입은 의사가 컴퓨터 화면에 X-ray 사진을 띄웠다. 정면에서 찍은 것, 옆에서 찍은 것 총 두 개였다. 얇게 뻗은 하얀색 뼈대가 검은 바탕 속에 선명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네요.”

그렇게 말해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의사가 대답을 원하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봤기에 조금 끄덕였다.

그런가요.”

붕대를 감아드릴테니 나흘 뒤에 교환하러 오세요. 많이 아프시면 진통 주사를 좀 놔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의사는 그래요? 의외라는 듯 반문한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의 발목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노르스름한 피부에 붉게 자리 잡은 부위는 오목하니 부어있다.

그나저나 어디 세게 부딪치셨어요? 웬만하면 이 정도는 안 되는데. 인대가 안 찢어진 게 다행이네요.”

.”

운동하신다면서요,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겨주세요. 특히 염좌는 재발하기 쉬우니까. 한 번 멀어진 관계는 수복하기 힘든 것처럼요.”

.”

의사로서는 드문 비유다. 카게야마는 멀어진 관계라는 표현에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오늘만도 벌써 그를 생각한 지 여러 번이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의사와 비슷할 정도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간호사가 볼록 튀어나온 볼살을 동그랗게 모으며 웃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 * *

  


 

붕대로 꽉 죄인 발목은 쉽게 구부러지지 않았다. 간호사는 목발 대여를 권했으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의원을 나왔다. 붕대를 감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 햇빛이 기세를 떨치는 오후였다. 카게야마는 드문드문 이어진 나무 그늘로 걸었다. 여름 바람이 푸르고 창창한 잎사귀를 건드리자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시원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배구 이외의 영역에서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라 해도 한 번 가봤던 길을그것도 몸이 기억하고 있던 길을잊지는 않았다. 벚나무 왼쪽으로 들어간 후 하얀 간판의 빵 가게를 보고 카게야마는 멈춰 섰다. 전날 밤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 상념 때문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빵.

우유빵이 있을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맛일까.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우유빵과 다른 빵이면 어쩌지. 혹은, 어쩌면입맛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숙 달걀을 얹은 돼지고기 카레를 좋아하지만 오이카와는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으니. 중학교 때 언뜻 전해 들은 우유빵에서 다른 음식으로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아는 건 우유빵 하나뿐이다.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다. 붕대를 감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목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곱게 구운 밀가루의 향기와 달콤한 우유 향이 미미하게 풍겨온다. 가게 안은 크게 3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하나는 케이크를 넣어둔 냉장고, 나머지 두 개는 크림빵 종류가 있는 선반과 크루아상 종류가 있는 선반이었다. 잔머리 한 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 한 명이 웃는 낯으로 카게야마를 반겼다. 계산대 옆 공간은 빵 굽는 과정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게 유리로 되어있었다.

우유빵 있나요?”

지금 곧 나올 거예요. 만들어진 건 있는데, 혹시 새로 나온 걸로 가져가실 건가요?”

뭐가 더 맛있나요?”

아무래도 새로 만들어진 거죠.”

그럼 그걸로 주세요.”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성은 계산대와 연결된 빵 굽는 쪽을 바라보며 우유빵 얼마나 걸려요?’ 물었고 그 안에선 곧 있으면요.’ 대답이 들려왔다. 여성은 대화 내용대로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반에 놓인 빵들을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팥빵부터 시작해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브리오슈까지. 아무래도 이탈리아에서 살다 보니 5년간 빵도 꽤 먹어보았으며 적어도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구분할 수준까지는 되었다. 그렇다 해도 빵과 밥,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카게야마는 단연 밥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카레와 먹기에는 밥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은 황토색을 띠는 것도 있었고 옅은 노란색부터 황금색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 위에 하얀 가루가 뿌려진 빵은 설탕 내음을 뿜었다. 카게야마는 벽면에 마련된 좌석을 바라보다가 그 바깥에 흐드러진 큰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가지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달라붙은 푸른 잎을 보이지 않는 햇빛이 쓰다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햇빛은 존재했고, 나뭇잎이 그 존재의 증인이 되었다.

손님, 우유빵 나왔습니다.”

, .”

다시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자 하얀 김을 피우는 우유빵이 가득했다. 안쪽으로 휘감긴 빵 모양이 독특하다.

몇 개 드릴까요? 방금 만들어서 제일 맛있을 거예요.”

“10개 주세요.”

?”

여성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유빵을 담으려던 손이 멈칫한다.

“10개 주세요.”

…….”

 

 

* * *

  


 

작은 빵이어도 10개는 확실히 조금 무겁다. 카게야마는 붕대를 감지 않은 쪽으로 우유빵 봉지를 들고 절뚝이며 걸어갔다.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뜨거우니까 비닐에 안 넣고 종이 봉지에 넣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여성은 정사각형 종이로 우유빵 10개를 각각 감싼 뒤 큰 비닐봉지에 넣었다. 카게야마는 이마에 벌써 흐르기 시작한 땀방울을 천천히 닦아냈다. 매미 소리가 더위를 부추겼다. 5년 동안 이탈리아의 여름에 익숙해진 몸은 눅눅한 습기와 찐득한 공기로 뒤덮인 일본의 여름이 버거웠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둔한 불편감이 붕대 안쪽에서 저릿했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에서 스며 나오는 온기로 손이 노곤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골목길을 꺾었다. 보이는 2층 주택 집 앞에까지 온 다음에야 카게야마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폐 속의 더운 공기를 내보내도 들어오는 건 똑같이 뜨거운 공기였다.

딩동전날과 마찬가지로 벨을 한번 눌렀다. 어제와 같이 문 너머는 조용했다. 카게야마는 조용히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가 집을 비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집에 있을 거라는 직감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문 너머에서, 카게야마라는 걸 알고서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라고. 항상 그의 생각을 추론할 때도 그랬듯이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단지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이카와씨.”

문 너머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른 뒤 우유빵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웃긴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우유빵 사 왔어요.”

방금 만든 거예요. 방금 만든 게 가장 맛있대요.”

…….”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집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앞서 생각했듯 그가 집에 있다는 건 순전히 카게야마의 근거 없는 느낌에 불과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맛있을 때 그가 먹었으면 좋겠다. 아쉬운 건 그것 때문이었다.

두고 갈게요.”

카게야마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어놓으려고 다른 한쪽 손을 마저 든 순간전날 문이 닫혔을 때와 똑같이 무서운 속도로 꽉 닫혔던 공간이 열렸다. 갈귀처럼 튀어나온 흰 손이 카게야마가 들어 올린 손을 낚아챘다. 카게야마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전에 다시 닫힌 문 안쪽에서, 강한 충격이 등과 머리를 가격했다. 문이 떨리면서 세게 울린 마찰음 뒤로 이어진 건 극심한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부딪친 뒤통수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불 꺼진 공간에서 검은 그림자가 카게야마의 가슴과 목 바로 아래 부근에 내려앉았다. 폐 속에 남아있던 숨을 내뱉은 카게야마는 그림자의 허벅지가 내리누르는 압박 탓에 원하는 만큼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좁아진 기도로 들어오는 건 색색이는 목소리뿐이다. 답답한 심장이 떨리면서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좀 전의 충격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그림자를 쳐다보면, 오이카와의 두 눈동자만이 검은 공간 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허벅지로 카게야마를 잡아 눌렀다. 전력질주로 산을 올랐을 때보다 폐가 조여왔다.

.”

오이카와는 사방의 벽이 진동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평소 그의 말투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려고? 나를 비웃으려고?”

무표정했던 얼굴이 몇 번 움직이더니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고, 그는 미소 지었다. 일그러진 눈동자, 미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린 입술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잘난 카게야마 토비오씨가 여기 와서 뭘 어쩌려고?”

, 이카와,”

원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끊어졌다. 성대를 움직이려 하면 그의 아래에 눌린 폐가 찔린 듯이 괴롭다. 숨을 내쉬면서 겨우겨우 이름을 부르면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손을 낚아챘던 손으로 오이카와는 이번엔 검은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앞머리에서 이어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다. 짧은 머리카락을 다섯 손가락 가득 쥐고 피부에서 뜯어낼 것처럼 잡아당긴 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본 오이카와의 피부는 희고 건조했다.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토비오쨩, 너무 멍청해서 일본어도 못 알아듣게 된 거야?”

……오이, 카와

말해, 토비오. 왜 오는 거야.”

……오이카와 씨,”

입술을 둥글게 만들고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그의 체중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 또한 지독한 통증이 되어 카게야마의 목울대를 갉아먹었다. 말해야만 한다, 카게야마는 하얗게 의식이 새는 도중에도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우유빵…… 지금 먹어야, 맛있대요…….”

……….”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안 좋은 표정을 짓더니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던졌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바지의 꺼끌한 감촉이 가슴에서 사라졌다. 급격히 들어오는 산소에 절로 기침이 나온다. 목 졸린 사람처럼 목을 붙잡고 헐떡이는 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카게야마는 일어날 수 있었다. 붕대로 감싼 발을 절뚝이며 일어나자 오이카와가 붕대를 흘겨봤다. 금세 고개를 돌리고 비웃듯이 이마를 찌푸린다.

우유빵이라고?”

. 여기요. 몇 개 사야 할지 몰라서 10개 정도 사 왔어요. 맛있으시면 더 사올게요.”

오이카와는 시선만 아래로 내리고 카게야마가 건네는 봉지를 쳐다봤다.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카게야마의 머리를 쥐어뜯던 손이 이번에는 봉지를 건네받으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 손에 들려있던 우유빵 봉지를 오이카와 쪽으로 조심스레 건네려고 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손이 봉지를 든 카게야마의 손을 튿어내며 우유빵 봉지를 채간 뒤 문을 열어 멀리 던졌다. 카게야마는 어두웠던 방 안에 가득 찬 태양 빛에 눈을 찌푸리며 날아가는 봉지를 바라봤다. 마치 슬로 모션과 같다. 불투명한 봉지는 햇빛을 받아 오색빛깔의 스펙트럼을 빛냈고, 봉지가 천천히 회전하며 우유빵이 하나둘 흩어져 나온다. 보드라운 갈색의 빵 사이 우유 크림이 태양 빛에 빛난다. 찢어진 구름과 청색 하늘, 매미 소리 진동하는 대기 속에서 우유빵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늘 어딘가를 날던 비둘기와 까마귀가 우유빵으로 날아들었다. 매미 소리를 압도하는 괴성을 지르며 그들은 땅에 떨어진 우유빵 조각에 얼굴을 처박고 쪼아댔다. 보이는 건 새의 머리뿐이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멈춰서 있었다. 빛이 비추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우유빵을 잡아챘던 손이 카게야마의 멱살을 잡고 비틀었다. 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이 목이 조여왔다.

잘 들어, 토비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위험한 빛깔로 빛났다. 태양이 더위에 녹아내리면 나타나는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내건 내가 사.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카게야마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카게야마는 답답한 숨을 얕게 내뱉으며 오이카와의 타오르는 눈동자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말하기 어려운 듯 시선을 내렸다. 이내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오이카와는 찢어진 초상화 같다.

다시 오면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내던지듯 밖으로 밀어붙이고 문을 다시 닫았다. 닫힌 문 너머는 조용하다. 갑자기 해방되어 벌떡이는 심장과 폐에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오이카와의 형형하게 빛나는 홍차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몸에 짓눌렸다가 억지로 밀쳐진 다리가 욱신거렸다.

카게야마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널브러진 우유빵 쪽으로 걸어가 엉망이 된 빵을 봉지에 하나둘 집어넣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크림이 손에 묻는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벌써 크림은 지방층이 분리되어 기름이 번득이고 있었다. 손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찌푸렸다. 우유빵을 담는 손등이 붉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봉지를 채갈 때 그의 손에 만든 생채기였다. 핏방울이 몽울몽울 맺혀있던 흔적이 이제는 굳어있다.

발목도 손등도 그가 남긴 흔적투성이였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남긴 건 통증뿐인데도, 카게야마는 통증조차 버거울 정도로 오이카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습니다. (부상은 아닙니다.)

* 세이죠 및 카라스노 캐릭터의 미래 날조, 오이카와 가족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센다이仙台駅 역을 나오면 매미와 빛의 세계였다. 내리쬐는 열기가 지면을 가른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 어딘가에 달려있을 매미떼는 그칠 줄 모르는 폭풍우처럼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얇게 입고 왔다고는 하나 본래 있었던 곳에 비해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이 흡수했던 아지랑이를 분출했다. 카게야마는 검은색 캐리어를 끌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쉬고 내뱉는 한숨이 모두 뜨겁다. 푸르게 빛나는 나뭇잎 사이의 햇빛조차 살을 가를 듯이 날카롭다. 5년 만에 돌아온 일본, 미야기현宮城県은 카게야마의 조각난 기억보다 달랐다.

 

 

 

#1st Day

 

 

 

길고 구불진 길과 곧게 난 주택가를 걸어가다 보면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가 나온다. 벚나무의 왼쪽으로 돌아들어가 다시 걸어가기를 5, 하얀 간판이 달린 빵 가게를 지나카게야마의 기억으로는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홍삼즙 가게였는데, 지난 5년 사이에 바뀐 모양이었다한 번 더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2층 주택 집. 바뀌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집이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갈 자신은 없었으나 다행히도 카게야마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캐리어를 문 근처에 놓아두고 벨을 눌렀다. 이름 팻말은 없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없었다. 카게야마가 기억하기로 오이카와의 집은 오이카와가 있다, 그 외에 생각나는 건 없었다. 카게야마에게 중요한 건 그 하나뿐이었으니, 그의 기억력이 나쁘다며 탓할 수는 없다.

문 너머는 조용했다. 목 뒤로 땀이 흐른다. 한번 멈췄던 매미가 재차 울고 있다. 매미 소리에 맞춰 햇볕이 더욱 열기를 더했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

문을 열고 나온 건 한 명의 남자였다. 거품처럼 가볍게 정돈된 홍차 빛 머리카락과 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눈동자, 햇빛 아래에서 더욱 빛나는 흰 피부. 카게야마가아마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가장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이었다. 이마와 양 관자놀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오이카와가 한 일은, 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을 빛과 같은 속도로 닫는 일이었다. 카게야마 또한 그에 질세라 서둘러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문 사이에서 묵직한 소리가 나고 윽, 고통을 참는 신음이 땀으로 젖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발목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고통이 살을 쪼개더니, 이어지는 둔한 통증이 왼쪽 다리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문 사이로 냉기 담은 눈동자만 내밀고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휴가를 받았어요. 일주일이요.”

그래서.”

오이카와씨를 보러왔어요.”

본인이 들어도 다급한 말투였다. 말소리 사이로 들리는 매미 소리에 귀가 아프다. 발목이 뜨겁게 불타는 것만 같았다. 이 발을 빼면 오이카와는 문을 닫아걸고 두 번 다시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도 바보는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차례 매미 소리가 지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

저랑 얘기해요.”

너랑 할 얘기 없어.”

, 안 치우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중얼거린 뒤 오이카와는 희번득한 눈길로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를 품은 말투였다.

자를지도 몰라.”

카게야마는 척수를 따라 흐른 생존본능에 의해 저도 모르게 발을 빼고 말았다. 그 순간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오싹한 공포 때문에 땀이 온통 식더니 이번엔 식은땀이 스멀거리며 배어 나왔다. 처음 보는 눈동자. 아니, 기억해보면 중학교 때 단 한 번 봤었던. 허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근원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 잔인한 말은 담은 입술. 카게야마의 안에서 지난 기간의 오이카와가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나 이때까지 그를 잊은 적은 없다. 센다이를 떠났던 지난 5년간도 그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카게야마는 5년간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메꿔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등에 녹아있던 식은땀도 증발해버릴 정도로 해가 뜨거웠다.

 

 



 

 

센다이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가는 동안 여러 곳을 지나왔지만 카게야마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바뀐 곳도 많았다. 기억에 남아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는 그대로였다. 시간 탓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몇몇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나타에게 듣기로 남자 배구부는 강호로 남아있었지만 카게야마가 아는 후배는 없었다. 애초에 제 바로 아래 연도의 후배도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적었다. 사카노시타상점 간판은 남아있으나 내부는 비어있다. 우카이 감독은 도쿄에 있는 모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채용되어 그곳에서 남자 배구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사와무라에게 듣기로 유명한 강호교여서 우카이 감독도 꽤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고.

센다이를 떠난 지 5. 24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탈리아로 떠난 지도 똑같이 5년째다. 소속 팀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냈던 5년 사이에 바뀐 장소도 많았지만 사람 또한 장소와 동일하게 가변적인 존재였다. 히나타를 비롯하여 사와무라와 아사히가 실업 배구팀에 소속한 건 그렇다 해도 스가와라가 교사가 된 건 카게야마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동시에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말아, 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심 카게야마는 그가 배구 외에 다른 일이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키타이치 시절의 사람들을 얘기하자면 이와이즈미는 도쿄도 경시청에 있고, 킨다이치와 쿠니미는 각각 다른 현에 있는 일반 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센다이에 아는 사람이라곤 이제 오이카와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인사해도 집에는 인기척이 없다. 카게야마는 불을 켜고 캐리어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5년 전에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방은 짐이 없다는 걸 제외하곤 침대나 책상 모두 그대로였다. 카게야마가 스카우트 제의를 승낙하고 이탈리아로 떠날 때 부모님도 함께 그쪽 직장을 구해 이동했던지라 센다이에 남아있는 건 빈집이었다. 빈집이라 해도 전기와 수도 모두 멀쩡하다.

노후는 일본에서 보내고 싶어.’

그렇게 말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집은 팔지 않고 아직 카게야마가의 소유였으며, 가끔 일본에 돌아오는 어머니가 청소해둔 덕분에 사람이 살 정도의 청결함은 유지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방 내부를 둘러봤다. 남겨놓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로 떠날 때 웬만한 건 버렸고, 물건에 특별한 감정을 두지 않는 카게야마였기에 들고 간 짐도 무척 간소했다. 그 탓에 5년이 지나 집에 돌아와도 무엇 하나 추억할만한 거리가 없다.

캐리어 짐을 정리하면서 카게야마는 일본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뜻하지 않은 일주일의 휴가는 갑작스러웠다. 계기 또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의 거의 1년 반만의 전화. 이탈리아와 일본의 시차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새벽 3시의 전화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그날은 특히나 고된 연습을 했던 날이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잔 날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날에 핸드폰 벨 소리는 못 들었을 테지만 묘하게도 눈이 떠졌다.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와 통화하는 건 여전히 낯선 일이다.

쿠니미지금 새벽 3시야.”

잠긴 목소리를 열심히 가다듬어도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 정도다. 핸드폰 너머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알아. 그래도 전화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어?

없는데…….”

안 그래도 타지 생활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는 안타깝게도 없었다. 만약 부모님이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밥은 매일 사 먹기 일쑤고 빨래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의 소식은 주로 히나타로부터 전해 듣는 내용과 이탈리아 배구잡지에 가끔 나오는 일본 배구 기사가 전부였다. 초기에는 가끔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으로 오이카와 토오루 이름을 검색해보거나 그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몇 번이고 봤었다. 최근에는 검색 한 번 해보지 않은 탓인지 이렇다 할 소식을 듣지 못했다. 히나타와 연락이 닿은 지도 반년이 넘었다. 세계적인 대회를 제외하면 일본과 이탈리아 배구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국내대회 시기도 다르니 그의 기사가 보이지 않아도 단지 그러한 시기상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 선배, 배구 그만뒀어.

…….”

배구 그만뒀어.’

나도 이와이즈미 선배한테 들은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

아버지.

자세히는 모르겠어.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미야기에 있는 건설회사 사장님이셨는데, 대대로 오이카와 가문 회사였나 봐. 오이카와 선배가 실업팀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대표 선발 시합 준비하고 있던 건 알지? 도쿄에 있다가 임종도 못 지키고 가셨나 봐.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 그걸 오이카와 선배가 알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들려오는 목소리가 우묵하게 퍼졌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귀가 가득 차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집중해서 들으려 해도 자꾸만 귓바퀴 뒤로 스쳐 지나가서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더욱 귀에 가까이 댔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목소리에 스며들어 카게야마를 방해했다. 배구 그만뒀어. 그 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건설회사는 안그래도 요 몇 년간 경영난이 있어서 그냥 팔고, 회사 취직하신다고.

.”

쿠니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카게야마, 힘주어 말하는 쿠니미의 목소리는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처럼 단호했고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관처럼 무거웠다. 새어드는 달빛보다 싸늘한 말이 귓속을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는 이제 평생 배구를 안 할 거야.

국가대표가 되지도 않을 거야. 회사원이 될 거야. 나 같은.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삶에서 배구는 사라지고, 그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의 경기가 끝나고 그가 했던 말과 함께.

이걸로 11패야. 너무 우쭐대지 마.”

오이카와가 졸업하고 도쿄로 가는 날 들었던 말과 함께.

따라오지 마, 바보 토비오쨩.”

그는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구부리고 벚꽃잎이 싸르라기 눈처럼 흩어지는 날에 오이카와는 등을 돌리고 떠났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새벽빛이 밝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거리를 따라 아침 로드워크를 다녀온 후 바로 소속팀 감독에게 전화했다. 다짜고짜 일주일 휴가를 달라고 떼를 쓰니 무어라 쓴소리를 강하게 들었지만 완강하게 고집하자 지금까지 못 받은라기보다 안 받은휴가를 전부 포함해서 받은 걸로 합의를 내렸다. 센다이로 가겠다고 하자 도대체 왜?’라고 당연하게도 부모님이 물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을 찾기 힘들었다. 오이카와 때문에? 와달라고 하지도 않은 그의 이름을 댈 정도로 카게야마는 뻔뻔하지 못했다. 사실 센다이에 돌아온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라면 카게야마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왜 돌아온 걸까? 오이카와와 다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욕구의 이유도 찾지 못한 채 무작정 오른 일본행 비행기에서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오이카와를 생각했다. 제 안에 녹아있는 오이카와는 생각 이상으로 농도가 짙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떠오를 정도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기억하고있었다.

카게야마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레 양말을 벗었다. 언뜻 보기에도 불그스름하게 퉁퉁 부어있다. , 짧게 혀를 차고 대충 찬물에 적신 수건을 대었다. 병원은 내일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예전에 딱 한 번 가본 정형외과 의원의 위치를 떠올리고자 노력했다. 침대에 조심스레 눕자 묵은 이불 냄새가 난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이불까지 깨끗이 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불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가웠던 눈동자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저는. 확실하진 않아도 오이카와와 이야기를 나누면 해결될 것이다. 불편하게 내려앉은 응어리도, 쿠니미와 통화한 후부터 부연 머릿속도 전부. 카게야마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저가 일본으로 돌아온 이유 중 가장 뚜렷하고 절망적인 이유를 하나 대라면, 다만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붉은빛을 쏘는 태양은 달과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며 움푹 팬 반달이 뜨고 있다. 12시간이 소요된 비행은 5년 전보다도 힘겨웠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이 중세 시대 존재했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마(睡魔)에 잠식되는 눈꺼풀을 닫으면서, 카게야마는 멀리서 매미 소리가 잦아드는 걸 느꼈다. 지금쯤 카라스노 고등학교 뒷산에는 반딧불이가 풀 사이로 빠져나와 꼬리를 빛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생각해보니,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건 우유빵이었다. 잠들기 전 누구나 흔히 그렇듯 쓸데없는 상념을 되풀이하면서 카게야마는 잠들었다.













LOVERS










새 햇빛을 집안에 맞아들인 지도 오늘로 8일째였다. 카게야마는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노란 바구니에 담았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오이카와의 민트색 티셔츠와 카게야마의 진한 청바지,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수건 등. 두 명이 쓰는 양이라 많지는 않았으나 카게야마 혼자 살던 대학생 초기 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한 사람 분량을 느끼고 만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거두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빤히 바라봤다. 이 바지를 입은 오이카와에게 안겼던 때가 잦다.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옷인지 아닌지, 그 판단 기준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토비오, 아직 멀었어?”

아뇨, 끝났어요.”

주방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 카게야마는 면바지도 바구니에 마저 집어넣고 말했다.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오면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 놓인 식탁에는 벌써 2인용 식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이자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도 고개를 끄덕인 후 들고 있던 바구니를 소파 옆에 놓았다.

오늘은 된장국이랑 연어 카르파쵸, 렌틸콩을 넣은 보리밥과 찹스테이크야. 얼마 전에 찹스테이크 맛있다고 한 게 기억나서.”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이카와가 하는 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식 이름이었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딱히 상관없었다. ‘찹스테이크가 맛있다고 한 기억은 없으나 눈앞에 보이는 고기와 피망, 양파를 섞어 조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은 적은 있다. 나는 토오루씨의 좋아하는 음식이라고는 우유빵밖에 모르는데. 카게야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 한마디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얼굴에 보이는 행복까지도 잊지 않으며 또 요리까지 해내는 오이카와는 정말 대단하다. 나의 말을 그가 기억해준다. 최근 카게야마가 알게 된 행복 중 하나였다.

맛있어?”

. 토오루씨는 안 드세요?”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으며 먹어야지부드럽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오이카와는 꿀을 넣은 홍차처럼 달콤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혀끝에서 달고 짭조름한 맛을 내는 찹스테이크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오이카와는 아,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 물 주는 걸 깜빡했네.”

……!”

형태 좋은 근육이 잡힌 팔을 들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들고 정수기에서 찬물을 떠서 카게야마에게 주기까지. 카게야마는 씹는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한 채 오이카와를 계속 쳐다봤다. 제 옆에 놓인, 눈사람이 그려진 물컵을 만지고도 믿기지 않는다. 차가운 감촉은 현실이었으나, 오이카와가 물을 떠다 준 게 현실이라고? 정수기가 저랑 더 가까워도 항상 물을 뜨는 건 카게야마의 역할이었다. 심지어 카게야마보다 물을 더 자주 마시는 건 오이카와였으니, 밥을 먹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일으키는 건 요리 담당인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 쪽이었다.

토오루씨가 다 먹을 건데 왜 제가 떠야 하냐고요.’

토비오쨩은 내 후배니까.’

몇 번이고 투덜대며 불만을 표했으나 능청스레 내뱉는 오이카와의 말에 입술을 내미는 게 최선이었다. 후배라는 호칭에는 아직도 약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키는 거의 비슷한 지점까지 자랐다 해도 저는 그보다 2년 어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목표 지점이자 이상적 존재였다. 중학교 졸업앨범만 봐도 그렇다.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는 앨범에 적힌 연도보다 카게야마의 앨범이 2년 뒤다. 그러했다.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선배였고, 어떻게 봐도 그를 이길 수 없는 건 카게야마였다.

결국 입을 삐죽 내밀고 갖은 불만을 꿍얼거려도 오이카와에게 물을 떠다 주는 건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떠다 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는 불현듯 불안이 스며들어와 조심스레 오이카와를 흘겨봤다.

왜 그래? 밥 안 먹어?”

아뇨, 먹을 거예요.”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카게야마도 그를 알게 된 지 햇수로만 10년이 넘었다. 어느 정도 위험 수준을 넘으면 카게야마도 무의식중에 느끼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번은 모르겠다, 가 솔직한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다시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입은 실내복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오버핏 형태의 터틀넥이다. 늘어진 소매가 그의 손등을 엄지손가락 아래까지 덮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오른쪽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사탕을 아삭 씹을 때 톡 터지는 달콤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오이카와와 살기 시작한 후로 그의 저런 표정을 보는 건 가끔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수룩한 감정이 귀 주변을 간질이는 건 어찌할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미야기로 한 번 내려오라고 그러시던데.”

, 들었어요.”

토비오한테도 말했어? 나한테만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일부러인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진 티를 냈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오이카와와 연락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카게야마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오이카와하고만 얘기할 리는 없다. 어머니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토비오를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이 첫 번째였다.

토오루씨가 편한 날에 한 번 오라고 하셨어요.”

역시 어머니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도 제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를 집어 올렸다. 아직 연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카게야마의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는 거의 소스만 남은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가운데에 놓인 연어 카르파쵸를 한 입 집어넣었다. 싱싱한 연어의 살결이 입 안에 돌았다.

토오루씨한테, 연락 자주 해요?”

어느 정도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오이카와에게 자주 연락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카게야마와 그다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를 따뜻하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카게야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오이카와를 통해 말할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에 개인적인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렌틸콩을 오물오물 씹으며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밤이 내려앉은 바깥은 조용했다. 1층에 자리한 집치고는 주변이 조용한 편이었다.

최근 전지훈련 어디로 갔다 왔지?”

“Y 현이요. 체육관 시설이 좋았어요.”

, 그곳. 나도 갔었지. 거기 실업팀의 P 세터가 유명하잖아.”

봤어요! 굉장했죠.”

너무 미끼를 잘 무는 거 아냐, 토비오?”

?”

아냐.”

오이카와는 다시 기분이 나빠진 건지 고개를 홱 돌렸다. 카게야마는 한번 갸웃하고 찹스테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열심히 오물거리느라 달아오른 입술로 말하면, 오이카와가 다시 푸핫 웃었다.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가지런하게 먹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되새기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넌 역시 어머니 쪽을 닮았어.”

그런가요?”

. 눈 쪽이 특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가로 손을 뻗어 보들 거리는 눈두덩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촉감이 눈가를 채운다.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쪽을 닮았다는 말을 흔히 들어보지는 않았으나, 오이카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게야마는 심야의 가로등 불빛처럼 말간 빛을 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토오루씨는 아버지를 더 닮은 것 같아요. 말로 하지는 않는다. 어느 부분이?라고 그가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이얗게 물결치는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속눈썹이, 달빛 아래서 특히 다정한 색으로 보이는 홍차 빛 머리카락이.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어는 적고 뜻이 협소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번 헤맸다.

토비오. 목걸이는 잘 메고 있어?”

오이카와는 표정을 고쳐 자못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목을 세로로 긋는 근육을 짚으면서, 그는 온기를 느끼듯이 손가락 다섯 개로 카게야마의 목을 감쌌다.

.”

카게야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얇은 은색 목걸이를 티셔츠 속에서 꺼냈다. 미색 조명등 아래의 은빛이 평소보다 반짝인다. 목걸이에 연결된 반지는 똑같은 은색이었고, 남성용이라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가느다랗게 반지를 감싸는 큐빅이 고급스러운 반지였다. 오이카와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서 손을 거뒀다.

잃어버리지 마.”

안 잃어버려요.”

당신한테 받은 건 무엇 하나, 특히 이건. 카게야마는 양 볼을 찬찬히 물들였다. 오이카와는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의 입을 바라보았다. 또 입가에 뭐가 묻었나 싶어 카게야마는 입 주변을 만지작거렸고, 오이카와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꼬리를 휘면서 웃었다. 누군가가 그의 눈에 초승달을 심기운 것 같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내일?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일감독님이랑 미팅 있는데요.”

그 순간 오이카와가 놀란 듯 눈동자를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멀뚱히 바라봤다. 입이 몇 번 여닫히더니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토비오. 진심이야?”

. 뭔가 위험하다. 카게야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자신의 눈치 없음을 이럴때면 통감하고만다. 처음 오이카와가 내일이라고 특정해서 물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서서히 의심으로 물드는 걸 눈치 보면서 카게야마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무지 기억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꼬물거리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 알아요. 알죠.”

당장 이 순간만은 모면해야 한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일단 입 밖에 냈다. 이런 게 통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만다. 너무도 당연한 귀순에 따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찹스테이크가 순식간에 얹힌 기분이다.

나 토비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싫은데.”

조금 전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냉기가 도는 목소리다. 날카로운 눈으로 카게야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낮은 음조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건 진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해야 한다. 무언가, 어떤 거든. 동시에 안된다. 이 순간 허투루 말했다간 적어도 석 달은 아웃이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더듬으면서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냉정하게 그 입술을 흘겨봤다.

됐어. 기억 안 나면.”

끝이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타임아웃의 종소리가 들렸다.

 

 

⟡ ⟡ ⟡

 

 

토오루씨.”

한 침대 안에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만 쳐다보길 세 시간째였다. 조심스레 불러도 오이카와는 대답도 없다. 연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은 평소보다 기온이 낮았다. 카게야마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시 한번 오이카와를 불렀다.

내일, 중요한 날이에요?”

글쎄. 토비오쨩에게는 엄청 중요한 날이겠지. 무려 감독님이랑 미팅하는 날이니까.”

저녁 식사할 때보다는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말 속에 씨가 박혀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모를 리는 없었다. 오이카와의 넓고 단단한 등이 한번 움직이더니 카게야마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잠시, 저가 날짜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날짜 하나하나에 민감한 오이카와가 미워지기도 했으나 이번은 저가 잘못했겠지.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삐져나온 입술을 밀어 넣고자 애썼다.

오이카와의 생일은 720일이고몇 년 전 까먹었다가 오이카와에게 이 주 동안 괴롭힘당한 후에야 겨우 머리에 입력한 날짜였다, 내 생일은 1222일이고. 두 사람의 생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날 이길래, 카게야마는 세 시간 동안 오이카와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카게야마에게 날짜란 말 그대로 날짜일 뿐이어서, 제 생일은 기쁘고 주변에서 축하를 받는 것도 고맙지만 그건 수많은 날 중 하루에 불과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좋고 특별하다면 특정한 날을 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카게야마에게 하루는 순간이었으며, 순간은 영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한기를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끔뻑거렸다. 머릿속에서 720일과 1222일의 숫자가 부유하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생일보다 중요한 날인가?

……토비오. 정말 모르는 거야?”

힌트도 줬다구? 토오루씨 할 만큼 했어.”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대답 없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하게 들리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카게야마의 코 고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입가에 고이기 시작한 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폭신한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더니 기어코 오이카와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믿기지가 않네, 정말!”

오이카와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카게야마를 강하게 노려봤다. 오이카와로서는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날이다. 카게야마도 꼭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억은 할 줄 알았는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못내 아쉬워서 오이카와는 더욱 둥글게 몸을 말았다.

 

 

⟡ ⟡ ⟡

 

 

카게야마는 살포시 눈을 들었다. 연한 녹색의 이불보가 보였다. 비슷한 색깔의 베개도. 다시 눈을 감고 그곳을 한두 번 손으로 짚어도 있어야 할 사람은 없다. 시각으로나, 촉각으로나 부재(不在)는 명확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이라 안 그래도 푹 꺼진 눈썹 사이가 더욱 좁아졌다.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는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는 먼저 집을 나선 후였다.

성가셔.”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척이나 깊고 풍성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카게야마가 보지 못하는 많은 걸 보고 예상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와 사귀고 함께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와의 인생을 선택한 건 제 인생 중 배구를 시작한 것 다음으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실감한다. 다만, 그것과 실제 삶에서 겪는 자잘 자잘한 충돌은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복잡하고 민감한 생각 회로를 느낄 때면 때로는 성가시고또 때로는, 버겁기도 했다. 예전 사귀던 시절에는 이럴 땐 며칠 안보는 게 상책이었는데. 며칠 안 보면 그만큼 보고 싶어지고, 불필요하게 빈자리를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것만이가장 큰 기쁨이 되고 말아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그를 이해하고자 다짐하곤 했다.

지금은 그와 같은 해결법은 쓸 수 없다. 관계가 변하면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 그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했을 때 어머니가 충고했던 말대로다. 알고 있니, 토비오?

누구나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면 그만큼의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

난 영원히 네 편이겠지만 그 안에서의 고통은 너의 몫이야.’

그래도 손을 놓지는 말렴. 손을 놓지 못해서 그 선택을 한 거잖아?’

맞는 말이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불가피하게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다.

 

 

⟡ ⟡ ⟡

 

 

감독과의 올해 들어 처음 있는 미팅을 마치고 난 후 카게야마답지 않게 서둘러 핸드폰을 들춰보았으나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흔히 보내곤 했던 배고파같은 라인 메시지 한 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겠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

하아…….”

뭐야? 싸웠던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어? 웬 한숨?”

A 감독은 짓궂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아뇨, …….”

굳이 말하면 연락이 없어서 한숨을 쉰 거지만. 굳이 무어라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죄 없는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A 감독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애인이랑 잘 해봐도움 되지 않는 조언과 함께 떠났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켜 A 감독에게 90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카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절로 답답한 기분이 들어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서둘러 풀었다. 기껏, 기껏 결혼해도 이 모양이다.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이해하기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는 되었다 해도 오이카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카게야마에게는 심각하게 난해한 문제였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카페의 통유리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정면에는 꽃가게가 놓여있다. 지나가는 여성 두 명이 온실 안쪽에 놓인 백합을 가리켰다. 꽃집 주인은 흰색 백합을 꺼내 파스텔 색조 포장지로 감싼 후 여성 중 한 명에게 건넸다. 눈꽃이 내려앉은 듯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은 여성은 백합에 코를 묻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은색 목걸이. 목걸이를 조심스레 꺼내면 함께 걸려있는 반지는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잃어버리지 마.’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받은 당일 이후로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본 적 없는 반지를 유심히 바라봤다. 바깥쪽은 세심하게 세공된 건지 매끈한 은빛을 빛냈고, 안쪽은 울퉁불퉁하게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건 숫자와 알파벳이었다. 이탤릭체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 새겨진 건, 아무리 영어에 약한 카게야마도 아는 이름이었다.

 

01. 09 Oikawa Toru

 

평생을 산다 해도 잊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 ⟡ ⟡

 

 

오이카와는 핸드폰에 등록된 유명한 카레 집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화면에 띄웠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오후 8시에 잡아둔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미처 움직이질 않는다. 카게야마가 어떤 날인지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예약 취소를 결심한 오이카와였지만, 감정은 무 자르듯 선을 긋는 생각과는 달랐다.

……멍청이 토비오.”

사귀는 중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비난을 툭 내뱉은 후,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혼하고 1. 오히려 동거할 때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혼은 아주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오이카와는 식장에서 카게야마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안정감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을 때는 서로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제 토비오가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거구나.’

카게야마와 밤에 몸을 얽어맸을 때보다도 더 깊게 카게야마를 피부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아마 앞으로도 평생 겪기는 힘들안위(安慰)를 실감했다. 오이카와에게는, ‘누군가가 평생 자신의 유일하고도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서 옆에 있다.’는 건 배구만큼이나 묘한 의미였다. 더욱이 그 누군가가 토비오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고작 두 살 어릴 뿐인 중학교 후배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누구도 수긍하지 못할 인생을 함께 걸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때의 저 자신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오이카와는 중학교 시절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짧은 앞머리와 작은 몸통, 배구공만 들고 다니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오이카와는 다시금 카게야마가 저의 곁에 있는 게 기적과도 같은 건 아닐까 느낀다. 카게야마가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고오이카와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택한 건 상상 이상으로 오이카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5년 전의 오이카와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까지 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카게야마에게는 연락 한 통 없다. 오이카와는 카레 집 전화번호를 다시 띄웠다. 예약. 취소해야 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자 노렸다는 듯이 카게야마에게 전화가 왔다. 뾰로통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바보라고 등록된 번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도적으로 10초 정도 기다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토오루씨. 어디세요?

일부러인 듯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게 또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대답하지 않았더니 카게야마가 토오루씨?’ 한 번 더 불렀다.

집에 가는 중인데.”

누구누구 씨 덕분에 예약했던 카레 집도 못 가고 말이야.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을 불만은 꾸욱 삼켰다.

집 앞의 M 공원에서 만나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핸드폰 화면에는 총 통화시간 31초만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전날 카게야마가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오이카와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건방지게 먼저 끊은 거야? 선배랑 전화하면서 감히?’

고작 2년 선배였던 걸로 생색내지 말라며 소꿉친구에게 몇 번이고 혼났지만 오이카와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2년이어도, 1년이어도 선배는 선배다. 카게야마는 저보다 2살 연하였으며 그건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생일도 내가 더 먼저고! 어느 모로 보나 카게야마 토비오가 이렇게 건방져도 된다는 법은 세상천지에 없다.

또 우유빵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기만 해봐.”

뻔하지, . 오이카와는 이를 갈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봤자 카게야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그는 오이카와의 손바닥 안이었고, 오이카와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결국 카게야마가 부르는 대로 가고 마는 게 무척 뻔한 두 사람의 관계였다.

 

 

⟡ ⟡ ⟡

 

 

두 사람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M 공원은 평소 두 명의 좋은 산책로였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도, 한여름의 태양이 흙을 달구는 대낮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이곳을 함께 걸었다. 결혼하고 난 후 초기에는 특히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꼭 이곳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꼭 이곳을 걸었고, 약속하지 않아도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그래선지 이른 저녁 시간이어도 M 공원의 내부는 익숙했다.

오이카와는 풀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어선지 꽃은 모두 시들어있고 벌레들도 고요했으나 상록수는 똑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해가 저문 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이런 시간대는 나무들이 초록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옷을 바꿔입는 때였다. 카게야마는 최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상록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었다.

오셨나요.”

오이카와가 가까이 가자 몸을 일으키고 작게 말한 카게야마의 코와 귀가 온통 새빨갛다. 오이카와는 눈을 끔뻑인 뒤 그의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얼음물에 얼린 나무껍질처럼 차가웠다.

뭐야,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한 시간쯤이요.”

나한테 전화한 건 10분 전이잖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카게야마는 시선을 오이카와의 발끝으로 옮겼다. , 이라고 반문하기 전에 카게야마가 손을 들었다. 윗단추 두 개가 풀린 제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빼낸 카게야마는, 달려있던 반지를 꺼낸 후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토비오,”

오이카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카게야마는 딱 들어맞는 반지를 바라보고 입김을 후 내뱉었다. 하얗고 투명한 입김이 두 사람 사이의 온기로 녹아 사라졌다. 오이카와의 왼손 약지에 걸린 차가운 은색 감촉. 오이카와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듯이 놀라며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의 귀와 목, 얼굴이 살며시 물들었다.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소행성처럼 반짝였다.

토오루씨가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결혼할 때.”

카게야마가 왼손으로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찬 공기에 식어있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안쪽에 새겨진 이름이 반대예요’, 제가 말했더니.”

토비오.”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으나 아직 말하지 말라는 듯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더니, 언제나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없는 사이니까 쉽게 잊을 수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둘 다 운동선수인 데다가, 동성혼이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반지를 계속 끼고 다닐 순 없다. 물론 주변 사람의 눈길을 신경 쓸 정도였다면 아예 이 결혼을 선택하지도 않았겠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약속을 맺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았다. 반지와 목걸이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손가락과 거울을 봐야만 비치는 목은 엄연히 되새김질의 정도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다. 두 사람의 약속은 타인보다도 쉽게 허물어지는 토대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1년이 지나 다시 결혼했던 그 날이 되면 그 날만큼은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자고. 서로의 주인을 찾아주는 의미로. 아직, 반지는 서로에게 있다는 뜻으로.”

오이카와는 짙은 보랏빛 하늘 아래 제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추위 때문인지 조금 파래진 입술을 못난 모양으로 내밀었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지만1년이 벌써 지났네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잠시 망설이는 듯 눈동자를 살며시 내렸다가 이내 곧은 표정으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어느새 비슷한 정도의 온도로 따스해져 있었다.

토오루씨랑 결혼하고 1. 솔직히 동거할 때와 다른 점은 잘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가 토오루씨로 달라졌다는 것과 반지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래도, 저와 토오루씨만의 날이 생겼다는 게토오루씨가 주신 반지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 토오루씨가 제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그 목에 걸고 다닌다고 생각하면조금, 흥분돼요…….”

마지막 말을 뭉그러뜨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카게야마를 보고 오이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가 온통 불그스름하다.

뭐야, 그게. 토비오쨩 뭔가 변태 같은 말했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째려보곤 입술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무어라 꿍얼거린다.

그냥, 그렇다고요.”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한번 피식 웃은 후 잠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고요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동이다. 다만 괜찮다. 카게야마가 옆에 있으면 오이카와는 가끔 심장병이 있는 건 아닐까 착각했다.

.”

오이카와는 제 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를 빼내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오이카와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만들어진 반지답게 꼭 들어맞았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같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1년에 한 번은 주인에게 가야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또렷한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다. 카게야마의 깊은 눈동자는 오이카와가 몇 시간이고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신비(神祕)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다시 한번 세게 마주 잡더니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차피 전 항상 토오루씨와 함께 있으니까, 반지도 토오루씨가 갖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언제나 같이 있잖아요.”

조금의 차이를 두고 두 번 대답한 카게야마는 빨간 코에서 보얀 숨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우린 홍차처럼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그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토비오 너, 갈수록 건방져진다.”

? 뭐가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은 후 고개를 돌려 쇄골과 목 사이 연한 살결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우왓?! , 하시는 거예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나려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이카와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이어서 동글 튀어나온 목젖을 앙 깨물자 카게야마가 공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 ,”

느꼈어?”

오이카와가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올린 오이카와를 노려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변태는 그쪽이면서.”

? 한 번 더 해 달라구?”

낮게 속삭이며 오이카와가 야릇하게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물린 목젖이 따끔거린다. 오이카와가 선수 치기 전 그의 움직임을 막듯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찬 기운이 이슬처럼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토오루씨 냄새나요.”

향수 냄새?”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의 온기로 어깨 한쪽이 온통 햇볕에 닿은 듯 뜨거웠다.

토오루씨의 냄새요.”

카게야마가 코를 묻은 채 강하게 들이마셨다. 살포시 눈감은 카게야마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차분히 눈꺼풀을 내렸다. 입꼬리가 보드랍게 올라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토비오쨩밖에 없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근육을 지지한 오이카와의 왼손에서 은색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토비오.”

?”

카레, 먹으러 갈까.”

.”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볼이 반딧불처럼 환하게 빛났고 입가가 꼬물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손으로 문지른 후, 그곳에 입술을 대고 온기를 느꼈다. 딱 적당한 온도로 끓은 카레와 같은 온기였다.

 

넌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 쪽이.’

흐르는 은하수처럼 푸른 눈동자, 소행성처럼 반짝이는 빛깔을 보면서 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지 나는 알 수 있거든.















-
제가 찾아본 바로는 일본 몇몇개의 구에서 승인한, 사실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파트너 제도에서 어느 한 명의
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조항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인게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흡수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부동성은 두 사람에게 맞지 않겠다 싶어
결혼했음에도 성은 그대로입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