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다시 찾아간 정형외과는 변한 게 없었다. 아마도 개원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한 건 없을 것이다. 빛바랜 백의를 입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 비슷하게 적당한 연배로 보이는 간호사.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와 겨우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X-ray 기계까지. 5년 뒤도 똑같이 이 모습일 것 같은, 포르말린에 담겨 부패하지 않을 것만 같은 오래된 정형외과 의원. 카게야마는 왜 벌써 왔냐는 의사의 말에 머쓱하게 입술만 삐죽였다. 의사는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며 장난스럽게 말장난을 치다가, 붕대를 풀고 그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진 후 기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역시 젊은 청년은 다르네요. 회복이 굉장히 빨라요. 한 일주일은 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괜찮은 건가요?”

카게야마는 그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는 의사의 물음은 옳은 말이었다. 붕대가 갑갑하고 불편하다기보다, 로드워크나 근력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끝에는 배구가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삶의 일부분이다. 의사는 턱살이 두툼하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붓기도 나아지고 통증도 없으며 관절운동도 괜찮아 보인다고는 하지만. 전에 말했듯 염좌라는 건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세요.”

.”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주사 한 대만 맞고 가요. 알았죠? 무리는 금물입니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이고 스스로 절망하기 마련이에요. 모든 일이 그렇죠.”

…….”

카게야마군처럼 젊은 청년들은 저 자신의 힘으로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의사는 단호하게, 동시에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은 책상 위에 놓인 처방전에 몇 가지 영어단어를 적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인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그에 따라 인상을 찌푸린 탓일까,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저젊은이들은 이런 시골에 잘 오지 않으니까, 무슨 연유가 있을까 해서요.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것뿐입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삶에든, 운동에든, 관계에서도요.”

. 감사합니다.”

감사 표현을 해도 될지 조금 망설였으나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검고 푸른 눈동자로 백발이 잔뿌리처럼 일부만 남아있는 그를 바라보면 의사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카게야마가 관계에 무리를 가한 것의 대가는 아마도 오이카와가 치렀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내리며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5th day

 

 

오전 10시에서야 여는 의원을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센 시간대가 되고 만다. 묵직한 여름의 향기가 다시금 대기를 휘돌았다. 카게야마는 아찔하게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만 골라 걸었다. 땀은 이제 신체의 장기처럼 붙어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불쾌한 감각을 자아냈다. 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겨우 10분 거리다. 붕대를 푼 발목은 전날보다 훨씬 매끄럽게 구부러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삐끗하며 비틀거렸다. 더는 절뚝이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절뚝이는 기분이었다.

나무의 푸른끼가 짙다. 이끼처럼 잎사귀를 덮은 빛깔은 빛에 따라 앞, , 양옆으로 흔들린다. 하늘 안에 곱게 갈아 넣은 색깔은 두툼한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 아래에 섰다. 봄이었다면 떨어진 벚꽃잎에 묻혀 흙이 분홍색이었을 텐데. 벚나무를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길은, 오이카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붕대를 했을 땐 버거웠던 길이 이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발을 땅에 대고 몇 번 발목을 천천히 돌리면 수월하게 돌아간다.

 

아아, 미야기에 있을 이유가 없구나.

 

막연히 떠올리자, 카게야마의 마음을 아는 듯 발목이 마른 통증으로 신경을 잘게 긁었다. 발목도 나았고 돌아가서 국내이탈리아대회도 준비해야 한다. 오이카와와 이야기할 염치도 얼굴을 보러 갈 자격도 없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주저 없이 번호를 눌렀다.

,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입니다. , 죄송합니다. , 돌아가려고요. 일정보다 조금 이르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 때문에 카게야마는 손을 귀에서 잠시 떼어놓았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처럼 들려오는 매미 소리만이 귀를 채운다. 카게야마는 제 근처에 떨어진 매미 허물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되면…… 배구가 하고 싶어요.”

 

 

* * *

 

 

가져온 짐은 옷 몇 가지와 혹시나 싶어 챙겨온 배구공, 세면도구 등이 전부였다. 머물었던 기간도 이제야 5일째, 짐이 많을 턱이 없었다. 짐 정리를 몇 분 만에 끝내고 마지막으로 배구공을 가방에 넣고자 방에 들어갔다. 채도가 낮은 벽지와 바닥은 제 방이 처음 생겼던 중학생 때부터 바뀌지 않았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3년과 카라스노 고등학교 3년이 녹아있는 방이었다. 주변 벽보다 색이 덜 찌든 곳은 트레이닝 메뉴를 붙여뒀던 곳이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곳을 매만지다가 오이카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저의 트레이닝 메뉴에 팔 근력 트레이닝이 몇 가지 추가된 날이기도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 이상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 다른 기억을 몇 개 더 꺼내보아도 그는 결코 친절한 선배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그럼에도 그의 서브빛을 모으고 볼의 한 점에 집중한 뒤 찰나를 섬광처럼 내던지듯 던지던 그의 서브는 명백하게 카게야마의 배구를 뒤흔들었다. 그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지.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깨달았던 순간. 생애 최초의 절대적인 패배였다. 아오바죠사이와 두 번째 경기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말. 그 어느 때보다도 카게야마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로, 아니. 오이카와가 줄곧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깨달은 순간.

이걸로 11패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 당시 그의 뺨 어느 부위에 땀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땀방울이 눈꼬리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흘러내리던 모양, 네트 너머에 있는 그의 숨소리, 입가에 맺히던 땀방울.

대학 시절 간간이 만났던 그는 매번 환한 여름처럼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카게야마의 옷만 보고도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곤 했다.

토비오쨩,’

가볍게 공기주머니를 부풀리듯 둥그렇게 이름을 부르던 오이카와. 그와 가끔 갔던 카레 집과 카페는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의 안에도 사금(砂金)처럼 남아있었다.

토비오.’

언제였을까. 카게야마가 이탈리아에 간다고 말했던 날이었을까. 함께 카레를 먹고, 오이카와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듯이 말하다가 카게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출국이 언제야? 잘 가, 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은 그를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일모레요.’

그래.’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만히 내리고, 카게야마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바로 이 집 앞에서. 어둑해진 거리를 비추는 연한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부터 전신을 비스듬히 비췄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손을 다시금 꽉 붙잡았다. 제 것이 아닌 온도와 감촉이 낯설었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봤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합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눈빛과 그 흐르던 눈동자의 움직임을 뚜렷이 인식했다. 그 뒤에 오이카와는 뭐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감고 있는 눈동자에 힘을 줬다. 신경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토비오. 죽지 마.’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으면요.’

바보. 그런 게 아니야.’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선 카게야마의 손을 깨끗이 놓았다. 그의 낯선 온기가 떨어져 나가고 미묘하게 남은 잔류 열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걸로 11패야.’

죽지 마.’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트레이닝 메뉴를 붙였던 벽이 보인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자잘한 자국들이 보였다. 이곳에 카게야마가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꺼내 다시 번호를 눌렀다. 카게야마는 좀 전에 비해 지나치게 신호음이 길다고 느꼈다.

저예요, 감독님. 카게야마요. . 저기죄송합니다. 역시,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그리고사실…… , 발목도 다쳤거든요. 제가.”

좀 전과 똑같이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있자 온갖 목소리가 저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렸다. 고성, 잔소리, 크게 내지르는 소리가 안 좋은 통화 음질 탓에 지직거리는 소리와 섞였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적어도 저의 잘못은 아니다.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경우는 카게야마도 어찌할 수 없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 죄송해요. 저기…… 그렇게 할게요. .”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문을 바라보면 불그스름한 연기처럼 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카게야마는 입맛을 다셨다. 우유빵이 먹고 싶다.

 

 

* * *

 

 

어머, 손님!”

카게야마가 ‘OPEN’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와 빵 만드는 쪽을 초조하게 번갈아 바라보더니 꽉 묶은 머리 옆을 매만졌다. 말하기 어려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기, 우유빵이한 개밖에 없어요.”

여성은 선반에 놓여있는 우유빵을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한 개만 남은 우유빵과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럼, 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도로 다물었다.

손님 말고도 10개나 사가신 분이 계셨거든요.”

? 어떤, 어떤 분이

글쎄요,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분이셨어요. 무척 잘생긴 분이셨는데, 물론 손님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여성은 볼을 물들이며 서둘러 말했다. 우유빵을 10, 무척 잘생긴 사람……. 카게야마는 그녀에게서 눈을 피해 우유빵 한 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 사이를 좁혔다.

열 개, 사 갔다고요.”

, 열 개…….”

여성은 부끄러운 듯 가로 내렸던 얼굴을 들어 의아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사려고 했던 우유빵이 없어서 화가 난 걸까. 카게야마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무언가 진한 감동이 서려 있는 듯이 보였다. 우유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게야마는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한 개 남은 거 주세요.”

, 알겠습니다.”

역시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걸까. 키도 크고 어느 정도 덩치도 있는 남성인데 귀여운 면이 있네. 윤곽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며 여성은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우유빵 한 개를 손에 들고나오면 불꽃처럼 붉은빛의 태양이 밤의 장막으로 덮이고 있었다. 거뭇하게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으며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제가 직접 빵을 그렇게 많이 사 본 것도 처음인데, 이제야 맛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음식을 사면 자연스레 입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던 카게야마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에게 그 이상의 대상이라는 씁쓸한 자각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잇모양대로 눌려 들어가는 빵의 감촉, 그 사이로 튀어나온 우유 크림이 점막에 닿아 녹으면서 향기를 풍긴다. 몇 번 씹을수록 우유빵은 카게야마의 입안에서 모양이 변하면서 달콤한 맛을 자아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의 베일, 똑같이 제 뿌리 쪽으로 빛을 흡수하는 올리브 빛 나무와 카게야마. 우유빵이 자신의 안에서 녹고 제 몸 곳곳에 퍼져 세포의 구성성분이 되는 걸 느끼며 카게야마는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또 한 입 베어 물으며 눈을 꼬옥 감았다. 정말이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붕대가 감겨있었던 발목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통증, 심장을 직접 관통하는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쪽 발목이 부어도 상관없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미지근한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하다. 눈을 뜨면 물속에 있는 것보다 많은 일조량이 얼굴에 닿았다. 공기가 코를 통해 오간 후에야 지상에 있음을 실감한다. 머리 뒤쪽부터 오금에 이르기까지 땀이 배어 나와 이불보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잠이 덜 깨서 무거운 머리를 들고 상반신도 마저 일으켰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듯 들어와 바닥에 꽂혔다. 눈가가 뜨겁고 머리가 멍하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1, 어머니.

 

잘 지내는 거니?

 

카게야마는 잠시 대답을 두고 고민한다. 붕대가 둘린 발목에 그치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미약한 두통과 어지러움까지. 손가락을 키패드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 글자를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발목을 조심하며 방 안을 거닐면 처음 병원에 갔을 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전보다 통증도 감소했고 겉으로 보기에도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카게야마는 저를 따라오는 햇빛을 밝은 아이보리색 커튼으로 가렸다. 속눈썹조차 무거워서 힘들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여름 기후에 더위를 먹은 걸까, 숨쉬기도 갑갑하고 폐가 충분히 확장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욕실로 향했다. 땀이 식지 않은 축축한 신체가 열을 보관하고 머리를 더욱 달구고 있었다. 미야기의 여름은 병적이었다.

 

 

 

#4th day

 

 

시야에 비치는 모든 나무의 잎과 잎 사이 경계가 흐릿하다.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푸른 입자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그대로 관통하는 햇빛에 찔려 섬광을 내뿜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매미 울음소리에 부딪히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연 눈동자가 비추는 모든 것이 뜨겁다. 카게야마는 축축한 이마를 훔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 아래에서 나무, 잎사귀, 카게야마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잘 지내는 거니?’ 그 메시지 글자만으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겠지.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말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죽음까지 몰고 오는 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죽음 자체는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절차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비교적 최근이어서 그럴 테지. 카게야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접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죽음이어도 제각기 다른 인상(印象)을 남긴다는 건 묘한 일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 달랐듯, 아버지의 죽음도 부쩍 다르겠지.

카게야마는 제 기억 아래에 남아있는, 사망했을 당시의 할아버지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윤곽을 덮어씌웠다. 파리한 얼굴을 한 채 관 안에 눕혀진 아버지의 시신. 눈과 입을 꾹 닫은 아버지의 몸에는 흰색 수의가 입혀져 있다. 관 속은 머리 주변부터 발끝까지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꽃이 장식하고 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몇 번 훔치더니 결국 얼굴을 가리고 만다. 손가락 사이로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염없이 스며 나온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목소리가 이내 겹쳐지면서 하나의 흐느낌이 되는 것을 카게야마는 듣고 있다. 익숙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어긋나 전혀 다른 음색을 띤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버지의 이마 주름과 청회색 얼굴도 낯설었다. 카게야마는 제 안에서 예고 없이 생각의 방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카게야마에겐 이런 생각을 몰아넣을 방이 없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캉한 뇌 속을 들여다본다. 그의 생각의 가지는 단단한 것부터 금세 부러질 것처럼 얇은 것까지 다양해서 카게야마는 그 아주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수천 개의 방이 급박하게 열린다. 카게야마는 그 하나하나를 생각하다가 활동을 그쳤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오이카와의 집 현관문이 보였다. 이곳으로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게야마가 향하는 곳은, 그 몸이 무의식중에 다다르는 곳은 결국 오이카와라는 결론이 우스울 정도로 눈에 보였다.

이미 죽은 자의 뱃속을 몇 번이고 쑤시는 살인자처럼 태양이 대지 위에 녹아버린 몸을 세로로 쪼갰다. 뼈에 직접 소리를 전달하는 매미와 눈동자를 달구는 덥숙한 공기, 두개골을 가르고 연두부처럼 미끈한 뇌를 꺼내 짓이기는 햇볕. 마치 오이카와가 던져서 바닥 위를 뒹굴던 우유빵처럼 몸이 조각나고 해체되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거 같은데. 환상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는 현관문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 문이 열리고 깨진 유리같이 흔들리는 형상의 오이카와가 보였다. 혹은 어제 체육관 앞 벤치에서 꿨던 꿈처럼 망막에 맺힌 상상일지도 몰랐다. 몸이 전부 녹아서 하나의 더러운 기름 덩어리가 된다. 오이카와가 바람에 흐르는 꽃잎처럼 흩어지고, 눈이 감겼다.

 

 

* * *

 

 

……처음 보는 천장. 왼쪽 손등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때문에 손을 들어보면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수액 줄을 따라가 보니 머리맡에 걸린 수액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눈을 뜬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이카와가 콜 벨을 누르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표정과 카게야마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이제 괜찮으니까.”

오이카와는 천천히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병원에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는 카게야마와 그 옆에서 지켜보던 오이카와. 그의 집 앞에서 느꼈던 속이 쓰릴 정도의 울렁거림, 의식이 끊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기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다행이에요. 굉장히 회복이 빠르시네요. 간단한 피검사도 했는데 괜찮으셔서, 이만 돌아가셔도 될 거 같아요.”

간호사는 빠르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손등에 꽂힌 바늘을 능숙하게 뽑아냈다. 묵직한 통증이 사라지고 물 흐르듯 이어진 동작 이후에 간호사는 병실을 나섰고, 오이카와도 그 뒤를 이었다.

오이카와씨, 잠깐!”

카게야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닫혔다.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던 때에 잠시 누르고 계세요라고 들었던 말을 이행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밴드 한가운데를 적시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피가 보여도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문을 열자 접수대에서 수납을 하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오이카와씨!”

그를 저지하고자 다리를 내디뎠으나 그대로 무너졌다. 양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약한 어지러움이 겹쳐 다시 일렁이는 시야를 만들어냈다.

괜찮으세요?!”

옆을 지나던 간호사 한 명이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카게야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일사병으로 쓰러지셨거든요.”

일사병?[각주:1]

이런 여름날에는 종종 있어요.”

카게야마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키가 180을 넘은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나 비틀거리다니 꼴사납다.

괜찮습니다. 부축, 안 해주셔도.”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하고 손을 무른 후 벽에 기대섰다. 오이카와는 물빛 반소매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카게야마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더니, 통보하듯이 짧게 말했다.

가자.”

몸을 돌리고 그대로 병원 밖으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보다가 카게야마도 몸을 움직였다.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가 불안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좀 전의 상황을 보고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건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를 쫓아가는 것도 여전히, 카게야마의 몫이다.

 

 

* * *

 

 

끝나지 않는 매미 소리와 달궈진 공기는 여전했다. 가장 열기를 내뿜는 시간인 오후의 태양은 저 자신의 궤도를 따라 둥그렇게 돌고 있었다. 단 두 개뿐인 구름이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과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쓰러지기 전보다 한결 편해진 가슴 속에 숨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내보냈다. 오이카와가 앞서고, 카게야마가 뒤를 따르는 모습은 병원을 나오고도 계속되었다. 오이카와의 등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건 가히 오랜만이다. 제 기억보다 골격이 두드러진 그의 등은 얼룩덜룩한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전부 흡수하고 있었다. 바지와 겨우 맞닿을 정도로 짧은 물빛 티셔츠가 푸른 잎 사이로 비치는 빛에 흔들리면서, 바다처럼 그물망 무늬를 만들었다. 적당히 멋스럽게 고정된 머리카락, 가늘게 떨어지는 목과 티셔츠에 가려진 두툼한 근육, 그와는 다르게 얇은 팔목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새삼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카게야마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등이 곧은 사람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다가 그가 구태여 그늘을 골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더위를 싫어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 외의 이유인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일수록 입을 다물었다. 그건 때로는 오이카와의 친절이었고, 가끔은 카게야마를 애태우는 성질의 버릇이었다.

더위를 가라앉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바람은 오이카와의 등에서 소멸하고, 그늘에 놓인 그의 등을 비추고자 햇빛은 더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도 햇빛도 전부 오이카와만을 따라다닌다. 눈이 부셨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물론 돈은 토비오쨩이 내겠지? 오이카와씨가 생명을 구해줬는데 말이야.”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구해줬다는 건 좀 과장 아닌가 싶어 입술이 튀어나오다가 실제 그가 구해준건 사실이었기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발목에 다시 통증이 배어 나오려던 때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걷는 속도가 비슷해지고 그로 인해 오이카와의 옆모습이 보였다. 홍차 빛 눈동자는 빛을 투명하게 반사해 평소보다 옅은 색소로 빛났다. 카게야마는 잠시 편안해졌던 가슴이 다시 옥죄이는 걸 느꼈다. 열기 때문도, 어지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 * *

 

 

좌석이 총 5개 남짓한 작은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테라스 석이 마련된 공간을 고른 건 오이카와였다. 카페 내부와 유리문으로 통하는 테라스 석에는 수국 화분이 아름드리 놓여있다. 방금 물을 받은 걸까, 푸른색 꽃잎에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있다.

저는 아이스 커피 한 잔요. , 이쪽은 오렌지 주스로 부탁해요.”

오이카와는 제멋대로 주문한 후 종업원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주문할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의 상상 속에서 제멋대로 카레를 주문하던 오이카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테라스 석에서 보이는 거리는 주택가처럼 한적하다. 이처럼 해가 뜨거운 시간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어 작열하는 태양이 그대로 바닥을 지핀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수국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게야마는 입을 열어야할지 고민을 여러 번 하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이제 오이카와의 시선은 카페 주변에 심어진 나무로 옮겨졌다. 센다이는 누가 뭐라 해도 시골이었고, 도시에서 보기 힘든 생생한 빛깔의 잎사귀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재회했을 때처럼 쏘아보듯 날카로운 눈빛이 아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오이카와였다.

아이스 커피, 오렌지 주스 나왔습니다.”

조금 전 오이카와에게서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며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를 흘끔 바라보며 볼을 더더욱 붉힌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구겼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래?”

오이카와는 관심 없다는 듯 금세 대화를 종료했다. 능청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입으로 커피를 마신 후 그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어.”

이와이즈미씨요?”

아니, 이와쨩이면 이와쨩이라고 했겠지.”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바보,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카게야마는 바보 아니에요, 마저 말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멈춘다.

그 친구는 꽤 잘 살았던 거같아. 집이 무척 컸거든. , 집은 그것과 상관없을지 몰라도 대충 어린아이가 느끼는 게 있잖아.”

카게야마는 그러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관념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집에는 오이카와가 있다. 그에게는 익숙한 정의가 타인에겐 이해받기 힘들다는 걸 카게야마는 어머니가 말해줘서야 알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아마 여름방학 때였다고 생각해. 무척 더웠거든. 오늘처럼.”

센다이였나요?”

당연하지. 여기서 태어나고 이곳에서만 살았는걸. , 그래도 너처럼 쓰러질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어.”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장난이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얄밉게 웃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웃음소리였다. 일본, 미야기, 센다이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4일째인데도 오이카와의 모든 것이 매 순간 다르게 느껴졌다. 센다이의 기억은 흙과 공기처럼 오이카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오이카와가 보여주는 익숙한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카게야마를 주조(鑄造)했다. 그와 보냈던 여름의 센다이는 매번 동공이 하얗게 물든 것처럼 눈부셨다.

놀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우연히 저녁까지 먹게 된 날이었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무척 요리를 잘한다고 나한테 자랑한 적이 많았거든.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참 이상하지, 선택이라는 거.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삶이 빚어지니까.”

오이카와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댔다. 마주 보던 눈길을 돌려 다시 풍경을 바라보고, 꿈에서 이야기를 하던 것처럼 일상적인 말투로 이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창밖이 깜깜해졌고,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감사하다고 여러 번 인사한 후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왔어.”

오이카와는 어렸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으면서 말했다. 친구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기억, 그것도 어린아이의 시야에서 본 상황인지라 대체로 부정확하고 모호했다. 그런데도 선명한 이미지 몇 개가 등장할 때마다 오이카와는 특별히 신경 쓰며 자세히 묘사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 세 명, 그들이 내민 종이에 쓰여있던 문구. ‘갚지 못할 시 무슨 일이든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았던 0의 개수와 그 아래 찍힌 지장. 오고 간 말다툼과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

그때 난 너무 무서웠는데,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 누군가의 공포와 증오, 분노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표정을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그 사람들이 간 후에 친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고 있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 미안하다고.”

…….”

알고 보니 그 아이 아버지가 돈을 빌리고 도망쳤다고 하더라. 사업을 시작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그게 실패했다나. 그 아이와 어머니는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얄궂지.”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미소 짓던 얼굴의 근육이 전부 이완됐다. 그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와 누나가 그렇게 되게 할 순 없잖아.”

…….”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오이카와와 얼음물을 마시던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천천히 겹쳐진다. 이와이즈미의 말이 테라스 석 주위를 맴돌았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눈가를 구겼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를 흉내 내어행복해지세요같은 형식적인 말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은 쓸모없는 멍청이였다. 이와이즈미가 하지 못했던 말도, 할 수밖에 없던 말도 하지 못하는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오렌지 주스를 바라보자 동동 떠 있는 얼음이 점차 흐릿해진다. 다시금 머리가 어지럽고 가벼운 두통이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카페 내부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이별 선고였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그래왔듯, 카게야마가 원하는 바를 최소한의 표현으로 채우는 사람이었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아주 작은 틈새도 막지 못하는 부족한 자였다.

손님.”

카게야마의 시야 옆으로 갈색의 정사각형이 보였다. 종업원이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은 네모난 티슈였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제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오렌지 주스에 퐁당퐁당 떨어지고, 그 안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밴드가 붙어있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센다이의 여름 속에 홀로 서 있는 오이카와를 규정짓고, 더러운 붕대를 뭉쳐서 배구가 빠진 그의 빈칸에 조잡하게 쑤셔 넣은 건 카게야마였다. 그런 그가 말할 자격도, 울 자격도 있을까. 저는 그를 제 방식대로 난도질한 만큼 상처 입을 자격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 열에 노출되어 심부의 온도가 섭씨 37도에서 40도 사이로 상승한 상태. 어지럼증, 두통, 구역, 즉시 회복되는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본문으로]

  




 

세븐데이즈(Seven Days)

 

 

  




 

 

 

  겨우 하루 운동을 쉬었다고 오전 10시 즈음에야 눈을 뜰 카게야마가 아니다.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온 여파 때문이리라. 발목이 욱신거려 밤잠을 설친 탓에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로드 워크는 무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기만 하는 발목을 슬쩍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웃옷을 벗었다. 배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아침 겸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하고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은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었다.

 

 

 

#3rd day

 

 

어디에 가서 식사할까 고민하다가 미야기에 도착 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전단지가 붙어 있던 게 생각났다. 전단지의 약도를 더듬더듬 기억해내 도착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만큼 건물이 깨끗했다. 볼 거라곤 논밭과 주택가, 몇 개 되지 않는 학교밖에 없는데 굳이 언덕 위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낮, 이런 애매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테라스 혹은 창가 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가지를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매미 같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은 귀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카게야마가 입구에서 잠시 멈춰있자 멀리서 키가 작은 종업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창가가 아닌2인용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였다.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메뉴 중에 카레는 단 하나뿐이다. 다행히도 돼지고기 카레였다. 자리를 안내해준 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카레를 주문했다.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당연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이곳 미야기가 더는 제가 아는 곳이 아님을 인지했다. 가게 한쪽에 조그맣게 매달린 벽걸이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하는 뉴스래 봤자 별 다를 게 없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TV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화면 하단에 쓰여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배구계 들썩오이카와 토오루 은퇴?

아직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는데요. 한창 인기를 끌면서 뛰어난 세터로 활약 중이던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몇몇 가까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개인적인 집안 사정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이카와 선수가 소속 중이던 A 팀은 아는 바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은퇴를 승인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남아있던 계약 기간 등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배구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쿠니미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카게야마는 금세 다음 뉴스로 넘어간 TV에서 눈을 뗐다. 주문하신 돼지고기 카레 나왔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종업원은 카게야마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조심스레 놓았다. 카게야마는 앞에 놓인 카레를 잠시 바라봤다. 이탈리아에서도 카레를 먹었다고는 하나, 항상 미야기에서 먹었던 카레 맛이 입 안 어딘가에 맺혀 있었다. 포슬포슬한 밥과 누런 빛깔의 카레를 섞으면 그 사이로 감자와 돼지고기가 보인다. 카게야마는 카레 한 입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카레 향기가 혀끝을 자극하고 익숙한 향신료 맛이 콧속에 가득 찼다. 한입 더 들어 올린 순간 카게야마의 반대쪽 의자에 누군가가 주저앉듯이 앉았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귀에 닿은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자칫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입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짙은 검은색의 양복이 보였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뒤 셔츠는 땀에 적셔져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종업원이 제때 가져온 얼음물을 크게 세 번 들이마신 뒤 이마를 부채질했다. 그의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있다. 이와이즈미가 세게 내려놓은 유리컵은 얼음만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디였지. 외국에서는 잘 적응했고?”

이탈리아요. ……배구, .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시원찮은 대답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의 옷차림과는 달리 카게야마에게도 익숙한 미소였다.

다른 건 아직이라는 말이네.”

이와이즈미는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어렴풋한 눈길로 바라봤다. 여전히 짧게 자른 이와이즈미의 머리는 진한 검은색이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직선적인 눈빛을 피하고 입술을 삐죽이자 그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후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겨진 미간도 익숙하다.

변한 게 없네, 너는.”

카게야마가 그런가요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거뒀다. 종업원이 다시 채워 넣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눈빛을 날카롭게 바꿨다.

오이카와냐?”

…….”

이와이즈미는 대답 없이 눈꺼풀을 내려놓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짜증 난다는 듯 머리 한쪽을 긁었다.

왜 그리 고집이 세냐, 너나 그 녀석이나. 누가 말했어?”

…….”

, 대충 알 거 같긴 하다만. 쿠니미가 킨다이치 둘 중 하나겠지.”

……!”

내가 말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거든.”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카게야마한테 네 입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쿠니미요.”

그럴 거 같았어. 킨다이치는 오이카와를 위해서라도 너한테는 말하지 않겠지.”

……이와이즈미씨.”

오해하지 마. 쿠니미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오이카와를 생각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 그렇다 해도.”

설마 쿠니미가 너한테 말할 줄은 몰랐다만.

이와이즈미는 정말 의외였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자신도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이탈리아가 아닌 이 곳 미야기에 있다는 것부터 쿠니미를 위한 변명은 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전화를 듣고 선택하여 이곳에 왔다. 오이카와로 인해 생긴 손등의 상처가 박동하며 통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앞에 놓인 유리컵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실내는 바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온도였다. 대지를 뒤덮던 여름은 어느 저편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나직이 울리는 보사노바 노랫소리, 땀이 식은 이와이즈미의 이마와 미지근해진 카레.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봤다.

나도 얘기를 들은 건 그 녀석이 이미 결심한 후였어.”

.”

갑자기 낮에 불러제끼길래 평소처럼 시답잖은 얘기겠거니, 짜증 내며 나갔더니 웬 캐리어를 들고나오더라고. 벌써 미야기행 기차도 예약해놓고, 신변정리도 마무리 지은 상태로. 은퇴는 팀 감독한테만 말하고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뭐 감독한테 말한 걸로 이미 끝난 거지.”

이와이즈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듯 카게야마 앞에 놓인 카레에 시선을 두고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만나자더니 배구를 안 하겠다고, 해서 한 대 때려줄까 진심으로 생각했지. 뭐라고 중얼중얼하는데, 그때는 솔직히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오더라. 바보같이 그런 순간 아침에 서에서 봤던 살인사건 용의자 생각이나 하고. , 그럴 땐 희한하게 별 쓸데없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잖아. ,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었나? 하는. 넌 안 그러냐?”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인상을 찌푸리면 이와이즈미는 됐다, 짧게 말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갑자기 그러더라고. ‘그래서, 배구 안 하기로 했어라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게 영 오이카와 그 바보 자식 같지가 않아서 한 마디 해줬지.”

 

그래. 너 이젠 행복해지겠네. 평생 행복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놈이더니, 이제 괜찮을 거 같네.’

 

그랬더니 그냥 웃더라고. 거기서 뭘 말할 수 있겠어. 기차 시간 다 됐다고, 가겠다고 하길래 잘 가라고 했지.”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여름밤처럼 싱싱한 빛깔로 빛나며 이와이즈미만을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저를 탓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이내 허탈하게 웃음 짓고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이 세계 속에 지겨운 더위는 없으나 절대 눈을 피하지 않는 카게야마의 눈빛이 이와이즈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 넌 어떻게 생각해.”

…….”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했어야 된다고 생각해?”

카게야마는 그저 이와이즈미만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 멍청이 오이카와한테, 너한텐 배구밖에 없으니 바보 같은 생각 그만두고 그리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너한테 배구는 그 정도였냐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이렇게 괴로운 듯이 웃는 건 참 낯선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가 끝난 뒤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카게야마는 기억해내려 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네트 너머에서 시선을 교차할 때 그의 눈동자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것만을 기억해냈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런가요.”

이와이즈미는 숨을 얕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떨려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액체였던 카레가 뭉쳐서 식어있었다. 달콤한 냄새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넌 날 나쁜 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요.”

아냐, 상관없어.”

카게야마가 서둘러 대답한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상관없어. 그의 입에서 딱딱한 말이 단단한 어조로 튀어나왔다.

너한테 나쁜 놈으로 보여도 난 별로 상관없거든. 카게야마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

카게야마,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 상황에서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너라면.”

저는……,”

 

 

* * *

 

 

 

카게야마는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를 걸어 올라갔다. 아래로 투명한 냇물이 흐르는 짧은 다리 위, 봄이면 벚꽃으로 풍성한 공원지금은 연두색에서 올리브빛깔까지 다양한 색의 잎사귀로 물들어있었다, 식물 총 100종 내외의 작은 식물원을 지나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보다 더 높은 언덕을 오르면 평소 뛰던 로드워크 코스의 마지막이었다. 발목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었으나 햇볕이 내리쬐는 광선 탓에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왔다. 카게야마는 언덕 위에서 오후의 햇빛에 흠뻑 젖은 마을을 내려다봤다. 언덕 위의 풍향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턱 아래가 간질거려 카게야마는 그쪽에 맺힌 땀방울을 거칠게 닦았다. 오이카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기억하는 건 그의 집뿐인데도 낯선 풍경에 뒤덮이면 그를 찾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를 감싸 안은 미야기는 카게야마를 다시금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카게야마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을 찾은 건 몇 년 만일까. 외양은 바뀐 게 없지만, 바깥에 둔 조경물이 늘어있었다. 5년 전에는 없었던 벤치와 나무가 체육관 입구를 바라보는 형태로 한두 개 놓여있다. 카게야마가 벤치에 앉자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서 악취처럼 매미 소리가 퍼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한 햇볕이 눈두덩을 온통 잡아먹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만약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카게야마였다면. 카게야마는 금세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시작은 쿠니미처럼 갑작스러운 전화겠지.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다. 수신음은 멈추지 않고 울린다. ‘오이카와씨라고 등록해놓은 화면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 바빠?

……아뇨.”

여보세요라고 받지 않은 카게야마도 그답지만, 오이카와의 물음도 꽤 의외였다. 항상 카게야마의 사정과 상관없이 제 용건만 말하던 오이카와가, 입술 사이로 작게 내뱉듯이 묻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문득 그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이카와씨가 카레 사줄까.

. 좋아요.”

카게야마는 전화를 끊고 옷을 서둘러 챙겨입는다. ‘준비하면 나와라고 말한 오이카와는 대체로 늦는 때가 많았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도착했을 때 저가 없다면 이후 평생 오이카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되풀이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고’, ‘무의식적으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러낸 카레 집으로 들어간다. 평소 함께 식사하던 카레 집이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몇 번 헤맨 뒤에야 찾아낸다. 어색하게 한쪽에 자리 잡고 가게에서 나오는 뉴스 라디오를 들으며 입구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이내 오이카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평소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엷게 땀이 밴 피부에 흰 티셔츠와 면바지. 그의 뒤쪽으로 커다란 민트색 캐리어가 따라 들어온다.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바라보고, 오이카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자리 뒤쪽에 두고 오이카와는 턱을 괴며 미소 짓는다.

카레, 시켰어?”

아뇨.”

? 여기 주문이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와 부드럽게 굽힌 눈꼬리. 아무렇지 않게 카게야마 대신 돼지고기 카레를 주문한 뒤 오이카와는 전 됐어요라고 말하고 주문을 끝낸다. 카게야마는 그것에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웃는 낯이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아주 묘하게도 오이카와가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 놓인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아래로 내린 눈꺼풀은 살며시 젖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땀조차도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살포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린 뒤, 마치 주문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배구, 그만하려고.”

…….”

머리 한쪽 끄트머리에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그만두는 이유. 오이카와 토오루가 더는 걷지 않기로 한 길.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나이가 젊다고는 하지만 오래 하기도 했고. , 내 나름대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만큼 했어.”

, 맞아. 킨다이치 얘기 들었어? 이번에 승진했다던데.”

……킨다이치한테 전수나 받아야지. 이제 회사 다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얘기를 귓바퀴 너머로 흘려들으면서, 배구를 하지 않는 오이카와를 상상한다. 오이카와의 서브와 토스는 두 번 다시 발현되지 않는 신기루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카게야마 안에서 여전히 빛을 뿜으며 숨 쉬고 있는 오이카와의 서브는 오로지 제 안에서만 살아있겠지.

그래서, 은퇴는 다음 주쯤에 기사 날 거 같고, 감사합니다.”

주문했던 카게야마의 카레가 나오고 대화는 잠시 중단된다. 오이카와는 먹어, 라며 카게야마에게 카레를 권하고 카게야마는 입안에서 부서지는 카레를 억지로 씹는다. 오이카와는 잠시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웃음을 거두고 홍차빛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본다.

그래서, 미야기로 돌아가려고.”

…….”

카게야마는 잠시 먹는 걸 그치고 오이카와를 마주 본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만 살며시 올린 채 조금 전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자취집도 정리했어. 토비오쨩 다 먹으면 기차 시간 딱 맞을 거 같은데.”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핸드폰의 민트색 케이스는 먼지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는 이 곳카게야마가 있는 곳에는 그 어떤 흔적도 가져가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것조차도 카게야마의 생각에 불과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내려놓았다. 카레와 섞인 밥이 치아 사이로 돌아다닌다.

카레 안 먹어?”

먹어야죠.”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을 뜨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다시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묘한 식감이다. 상상 속이라 그런 걸까, 카레는 무미무취(無味無臭).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카레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깊고 그윽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반복적인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체취가 카레에 묻어 카게야마의 입 안으로 들어간다.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장 속에 골고루 퍼져 오이카와가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통해 저 자신을 분해한다. 오이카와가 남길 것 없이 두고 떠나는 모든 것은 카게야마의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서브, 향내, 홍차 빛 눈동자도 혹은 그의 무언의 감정도……….

오이카와는 이내 살포시 웃는다. 카게야마는 손을 멈췄다. 올라간 입술이 열리고, 하얀 치아가 보였다.

잘 있어. 더럽게 귀여운 토비오쨩.”

뒤에 놓았던 캐리어를 꺼낸 후 오이카와는 계산대로 향한다. 카게야마가 먹고 있는 카레 값을 계산한 후 문을 밀어 연다. 문 위쪽에 달린 종()이 두꺼운 여름 바람 탓에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로 빛이 산란된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입술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저의 입술에 집중한다. 무슨 말을 자아내야 할까.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오른쪽 눈에 들어가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체육관 뒤쪽으로 노을이 깔려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하늘 북쪽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누군가 베어 먹은 것처럼 반 토막 난 달이 불투명하게 걸려있다. 잠시 잠들었던 건지 몸이 벤치에 녹아내린 듯 축 늘어진 채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근처 나무에서는 매미 한 마리만 끊어질 듯 말 듯 울음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카게야마는 눈에 들어간 땀을 닦아내고 끈적이는 몸을 일으켰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기억 속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시야 어딘가에 박혀있다.

 

 

* * *

 

 

하얀 간판은 거뭇한 하늘에 잠겨 언뜻 어두운 하늘색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팻말은 아직 ‘OPEN’ 상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에 있던 여성이 카게야마를 보고 아, 작은 소리를 냈다.

저번에 우유빵 10개 사가신 손님이네요.”

.”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여기서 그렇게 많이 사가시는 분은 처음이라 놀랐어요. 맛있으셨나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집 앞에서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우유빵을 떠올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10개나 가져가셨는데 맛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랑 남편 둘 다 걱정했어요.”

그녀는 흘긋 옆을 바라봤다. 내부가 비쳐 보이는 유리 너머로 남성 한 명이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우유빵 남았나요?”

. 오늘은 방금 나온 건 아니어도 좀 남아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몇 개 드릴까요?”

“10개요.”

여성은 이번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기쁘게 웃었다. 봉지에 들어가는 우유빵 한 개 한 개를 볼 때마다 땅바닥에 짓이겨졌던 우유빵이 떠올랐다.

 

 

* * *

 

 

 

지평선을 감싸는 안개처럼 불그스름한 줄 몇 개가 바닥에 깔려있다.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여도 노을빛은 가라앉는 빛의 대기 속에서 부옇게 남아있었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진 않았어도 여름인걸 고려하면 꽤 늦은 시간일 것이다. 한번 땀으로 푹 젖었다가 눅눅한 바람결에 서서히 마른 티셔츠가 무겁고 거북하다. 오늘 밤은 열대야인 걸까, 오후를 장악했던 습습한 공기가 검은색 티셔츠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를 반대쪽 손으로 옮긴 후 어제와 같이 다시 한번 오이카와의 집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벨을 누르려던 움직임이 멈춘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번 꾹 다물고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제대로 걸려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뒤돌자 오이카와가 짙은 남색과 보라색에 뒤덮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

…….”

카게야마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도 적나라하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뒤 그의 옆을 지나쳐 걸어간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반무테 안경을 끼고 쪽빛 셔츠를 입은 오이카와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다. 카게야마는 저를 지나쳐가는 오이카와를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오이카와가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를 보고 다시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까지 바라본 뒤 몸을 떨었다.

…….”

오이카와는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오이카와의 입이 여전히 굳게 닫힌 걸 보고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오이카와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곤 팔짱을 꼈다. 가늘게 남아있는 노을빛이 가라앉으면서 구름의 경계선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녁이 몰려오기 전에 여러 빛깔로 채색된 하늘이 오이카와의 흰 피부에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두 번 여닫았다. 오이카와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유빵 봉지를 저번처럼 던지지도 않고, 카게야마에게 모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를동정하는 게 아니에요. 오이카와씨와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일본으로 돌아왔어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입을 닫았다.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이 뒷목에 맺힌 땀방울을 싣고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숨이 멈출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깊게 내뱉었다.

그것뿐이에요.”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안경이 콧잔등으로 내려와, 푸른 색조가 섞인 눈동자가 굴절되어 다양한 빛깔로 빛났다. 오이카와는 후,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꿈에서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멍청한 토비오쨩한테 오이카와씨가 친절히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선심 쓰듯이 장난스럽게 말한 오이카와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있지, 동정이 아니라고 하는 네 말이 바로 그거거든. 토비오쨩은 바보야?”

달 꼬리처럼 휘었던 눈동자가 사납게 구겨졌다. 오이카와는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말했지. 죽여버리기 전에…… 찾아오지 말라고. 잘 들어. 너를 죽인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거든. 바보 같은 토비오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가 왼쪽, 오른쪽, 오른쪽을 반 바퀴 돌고 다시 왼쪽천천히 선회하다가 이윽고 멈췄다. 그쳤던 매미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유빵 봉지에 손을 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붕대를 감아놓은 발목이 어두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실낱같던 오렌지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달이 충분히 빛을 뿜기 전 하늘의 장막이 덮이는 시간이었다. 봉지가 움직이던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목 신경섬유 사이에 통증이 퍼졌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보다 낮게, 눈언저리에서 울렸다. 오이카와가 만들었던 손등의 상처,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생긴 염좌. 오이카와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다고, 차가운 빛을 뿌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한 일? 그 이상? 배구를 영원히 못 하게 되는? 혹은 그보다 더한 일? 오이카와의 살인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카게야마의 구체적 절망인 배구를 앗아간다 해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아올 수 있을까. 느긋하게 우유빵을 10개 사서 그의 문고리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두고, 맛있다면 더 사오겠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과연 오이카와는 그랬을까.

카게야마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유일하고도 절대적 절망인 배구또한 오이카와에게도 그러할의 뒤에 남겨지는 게 무엇일지 카게야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게야마가 알 수 없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오이카와는 서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미야기 속에 녹아있었고 빵을 썩힐 만큼 작열하는 태양 빛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처음 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으리라. 카게야마의 속을 후벼 파고, 날카롭게 난도질하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집에 찾아올 동안 심어놓았던 본심을 들쑤셨다.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아득했다. 카게야마는 아찔해지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밤이 구름을 먹어치우고 카게야마의 몸까지 잠식했다. 카게야마는, 저는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오이카와를 멋대로 절망한 사람으로 규정지어놓았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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