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편집은 월간 오이카게 주최님이 쓰신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 미약한 쿠니카게 요소가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장면은 희뿌옇게 먼지처럼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그 단계를 3단계로 분류하고 천천히 상기시켰다. 어느 위치에 서고, 손가락의 굽히는 정도, 어느 순간에 다리를 올려야 하는지 깊게 생각한 뒤 다시금 눈을 들었다. 배구공의 오밀조밀한 매듭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돋움을 하고,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이미지를 눈앞에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였다.





Kill Your Darlings





  “―목요일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잊지 말고. 아, 이거 내일까지 적어와야 한다? 진로희망조사서.”


  손에 들린 15x10cm, 두께 약 5mm에 해당하는 종이를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봤다. 이름, 반, 번호, 희망 고등학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아직 ‘진로’라는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마지막 시기에 한 번 만났던 그 종이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채 잠깐의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정확히 두 번 접어, 교탁까지 걸어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3학년, C반, 오이카와 토오루까지 적은 뒤 손을 멈췄다. 몇 번 나눴던 대화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느 학교 갈 거야?’

  ‘어느 학교로 가시나요?’

  ‘오이카와, 고등학교도 대학 못지않게 중요해.’


  같은 3학년 친구들, 이제 부에 들어온 지 갓 1년이 되어가는 1학년 후배들, 코치에게 각각 들었던 말이다. ‘어느’ 학교에 갈 건지― 저러한 말 뒤에는 항상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 배구부도 유명하니까.’


  오이카와는 찝찔한 얼굴로 입가를 굽실거렸다. 중학교 3년은 배구가 전부인 기간이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체육대회 때는 일부러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항상 중요한 건 배구였고, 오이카와는 배구보다 더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오바죠사이 아니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가방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었다. 옆 반인지라 종례가 끝나면 오이카와의 반에 들러 함께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종이를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와쨩은 이미 냈어? 진로조사서.”

  “당연하지. 그런 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까먹을걸. 특히 오이카와 너는.”

  “특히라는 말 뒤는 이해할 수 없는걸. 뭐, 실제로 이런 건 가방에서 구겨지기 일쑤지만. 뭐라고 적었는데?”

  “아오바죠사이.”

  “아니, 칸이 세 개잖아?”

  “한 개밖에 안 썼어.”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와쨩이야. 오이카와는 몇 번 달깍달깍 시끄럽게 볼펜을 괴롭히더니, 반쯤 열려있는 가방에 종이와 함께 집어넣었다. 지금 쓰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이와이즈미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연습이 금방 시작될 터였다. 주장, 부주장인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시라토리자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레 내뱉었다. 종이의 가장 위 칸에 적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시라토리자와학원이라.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네, 생각했다. 


  “이와쨩은 왜 아오바죠사이야?”

  “…선배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그곳 배구가 맘에 드니까.”

  “배구가 맘에 들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이와쨩, 나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이카와는 핀잔을 들은 아이처럼 볼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화를 억누른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흘겨본 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그건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이카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애매하게 마음을 깊게 드리우고 있던 안개가 수증기가 되어 가슴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이미 우시지마에게 추천이 들어간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시라토리자와에서 추천이 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전날 연습 중에 떠올랐던 장면이 다시금 축축한 심장에서 살아났다.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은 느릿느릿하게 재생되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말한 ‘잘하는’ 배구가 어떤 배구인지, 누구의 배구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단계에서, 지금 있는 그 어떤 고등학교에도 그러한 배구가 없는 단계에서 진로희망조사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못내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는 계단을 몇 개씩이고 뛰어 내려갔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하얀 배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얇은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는 깨끗한 글씨로 적힌 ‘카게야마’가 수로 박혀있었고, 짧게 올라간 반바지 아래에는 솜털이 막 빠진 반질한 살결의 두 다리가 생채기도 없이 뻗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조그만 이마를 꾹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갸우뚱한 채 오이카와를 말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조금 짧아진 앞머리 때문에 이마가 평소보다 잘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가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건넸다. 배구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작아서, 그 끝의 손톱은 모래알로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토비오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점프 서브, 알려주세―”

  “대답할 가치도 없네.”


  오이카와는 마저 듣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포기하지도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와서는 다시금 공을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가슴을 다시 툭, 친 배구공이 괜스레 거슬렸다.


  “서브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에게 들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판이 기억났다.

  주변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긴 하지, 그 성격이면.

  코치는 이따금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오이카와와 둘만 있을 때 꺼내곤 했다.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거예요? 가끔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보고 그 기분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못하고 코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주장이니까.

  오이카와는 배구부 주장이고, 카게야마 선배니까. 왜 코치는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오이카와에게 하는가. 코치가 개인적으로 학생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카게야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도 굳이 물어볼 것 없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른 존재였고, 그건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부류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한 뒤에 세대 교체할 사람으로서 내정해두었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오이카와 만큼의 친화력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왜 토스가 아니고?”

  “네?”

  “말해봐, 토비오쨩. 왜 토스가 아니고 서브인데?”

  “…서브를 가장 잘하는 건 오이카와 선배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오이카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쯤은 빤히 보였다.


  “토스를 가장 잘하는 건 내가 아닌가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카게야마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밀었던 배구공을 천천히 끌어당겨 다시 제 품에 가둔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난 알아, 토비오쨩.”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부드러운 목 뒤를 가볍게 쓸면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오이카와의 형체는 흔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거. 누가 가장 토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난 알아.”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동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내듯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조바심 때문에 퇴출당했던 그 시합,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타로 내보냈었다. 2학년 세터인 니카이도 있는데, 왜 카게야마냐며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높았다. 당연히 카게야마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2학년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잘하니까.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들어가야 팀이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코치는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니카이보다, 그때의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가 더 잘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세터로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네트 앞쪽에 섰다. 세터의 위치였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는 1학년 후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 던져주지 않을래? 혹시 괜찮으면.”


  1학년 후배는 잠시 당황하더니 공 바구니를 끌고 온 뒤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 하나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도 선명하게 그 날의 시합이 떠올랐다. 그 날 카게야마의 위치, 어떤 곳을 시선으로 훑는지, 누구를 쳐다보는지,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이카와는 일련의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한 뒤, 발돋움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이 흘러가는 토스 전 단계에서는 배구공의 매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이 방금 봤던 카게야마의 손처럼 보이는 환상을 느꼈다.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오이카와는 제 안에서 비웃는 듯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건 그냥 흉내쟁이잖아. 오이카와는 입술을 씹었다. 오이카와가 하고 싶었던 배구는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자체에 있었다.

  세터로서 하고 싶었던 토스를 상상하는 건, 동시에 자신이 한낱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




  “오이카와 선배처럼은 못 뛸걸.”

  “…알아.”


  쿠니미가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꾸물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근처 지역체육관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오이카와처럼 높은 점프력과 강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키타이치 중학교에 들어가고 오이카와의 서브를 본 뒤로, 몇 번 이렇게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으나 기억 속 그 점프 서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서브 자세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옆에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카게야마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배구부 연습이 끝나서까지 집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가끔 ‘못할걸’의 말만 툭툭 던졌다.


  “오이카와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잖아.”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곁눈질로 보고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해?”

  “…왜 안 가르쳐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저번에 오이카와 선배가 그랬어. ‘왜 토스가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오이카와 선배가 자긴 다 알고 있다고 말했고,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걸.”

  “카게야마, 너 영어 시간에 졸았지?”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깨서 수업을 들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가 봐도 체육계 소년이었고, 쿠니미는 주변으로부터 배구부여서 의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쿠니미는 다만 그런 편견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Kill Your Darlings’이란 말이 있어. 공부해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공부해보라고. 너랑 오이카와 선배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요 근래 서브 연습 대신 토스 연습이 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서브를 보며 받았던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오이카와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서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듯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배구가 어정쩡한 상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좋은 형태든 나쁜 형태든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서로가 만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감하고, 아주 작은 신경학적 신호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숨소리조차도 겹치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 탓이 아니었다. 이미 모른척하기에는 서로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




  “카게야마가 최근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한다던데.”


  반쯤 장난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에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더라.”

  “지역 체육관에서 혼자 한다던데. 네가 안 가르쳐주니까 몸 달았나 보지?”


  비아냥거리며 툭툭 오이카와의 어깨를 치는 친구에게 피식 웃어준 뒤 오이카와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카게야마나, 가르쳐주지 않고 요즘 토스 연습에 매진하는 오이카와에 대한 건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던가. 다만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 건 조금 상쾌했다. 그래서였는지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 한 명과 서둘러 헤어진 뒤 지역 체육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브 연습을 하는 카게야마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그룹, 멀리서 3대 3으로 배구연습을 하는 아주머니 그룹이 보였고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더 다가가지 않고 체육관 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공을 올리고, 높이 뛰고, 공을 내려치는 일련의 과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니, 선명한 것 그 이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저 과정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3단계로 나눠서 기억해놓은 저 과정은 오이카와의 서브 과정이었다. 


  “…바보 아냐?”


  픽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입을 가렸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제 서브를 흉내내고 있는 카게야마나, 카게야마의 토스를 상상하며 제 토스 자세를 비트는 오이카와나. 모든 것이 바보 같았고, 왜 카게야마와 저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바벨탑과 같이 쌓고 있던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토스가 모래성처럼 바닥부터 허물어졌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게야마의 서브가 어긋날 때마다, 그 서브 뒤편으로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꿈에서보다도 선명했던 카게야마의 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자세도, 위치도 전부 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녹아내려서, 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등을 돌렸다. 

  넌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어, 토비오. 형태도 없는 내 그림자만 따라가면서 흉내쟁이로 살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해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그림자를 부숴주러 올게.

  오이카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구름이 말갛게 빛나고,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거리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배구가 하고 싶었다. 또한, 간만에 서브 연습을 하고 싶었다. 반에서 오이카와만 제출하지 못한 진로희망조사서에 쓸 내용도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구를 하고 싶었다.




**




  “이와쨩, 이거 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내밀었다. 1순위부터 3순위까지,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똑같은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


  이와이즈미는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 읽었다. 배시시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종이를 정확히 2번 접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갈 거야. 이번엔 꼭 우시와카쨩 이길 거라고. 아, 토비오쨩도.”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는 어쩌고?”

  “아, 그건 됐어. 하고 싶은 거 바뀌었으니까.”

  “가벼운 남자네, 이거.”

  “이와쨩, 한 마디 많다고!”


  오이카와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가슴 통증이 그 눈동자와 함께 찾아올 때면, 오이카와는 다시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를 봤던, 그 영겁의 삶도 가치 없어질 만큼 무섭게 아름답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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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소재 주의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괴롭지 않게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서둘러 지나면서 생각을 털었다. 뛰어가는 오이카와의 옆으로 외제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잠시 주춤한 뒤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을 좋게 떠나는 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었다. 서점에는 요즘에서 안락사에 대한 책이 즐비해 있다. TV를 몇 번 돌려보면 여러 가지 죽음의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죽음, 사고 현장의 사망자 통계,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좋게 헤어지는 방법 등

오이카와는 드라마 속 배우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빗속을 뛰어가면서 그 표정을 조심스레 흉내 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단 건 알 수 있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봤다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발아래에서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튀겼다. 저번 주에 산 새 구두가 몹쓸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라는 글자가 왼쪽 귀 언저리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양 귀에 이어폰을 낀 듯 그 이름은 금세 머리 전체에 퍼져 카게야마와 연관된 몇 가지가 줄줄이 낚여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그중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이미 부유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했다.

 

 

**

 

 

잘 모르겠어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다는 말은 카게야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한쪽 입 끝을 오므리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작은 식탁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카게야마를 다리 사이에 끼면 어제 세탁한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조금 달콤한 솜사탕 향, 오이카와의 취향이었다.

생각해야지. 이후의 일.”

고집부리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 건 오이카와씨잖아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오이카와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가늘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요 근래 입에 제대로 대는 것이 없었다.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면 장골능이 오이카와의 허리에 닿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단단한 근육을 짓누르고, 카게야마는 약간 오이카와에게 기대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플라스틱 식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두른 카게야마의 팔을 풀고 얇은 팔을 덮는 티셔츠의 소매를 올렸다. 두 개로 곧게 뻗은 뼈는 보기에 좋았다.

요새 많이 건방져졌다? 이 오이카와씨한테 그런 말도 하고.”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제 팔을 힘겹게 빼냈다. 앞서 목에 둘렀던 팔을 재차 허리 뒤로 둘렀다. 검은 고양이 같았다. 두 검은 눈동자가 동그라니 떠서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고, 얇은 몸을 오이카와에게 천천히 부비적댔다.

지낸 시간 보다 이후의 시간이 더 길잖아.”

오이카와는 쓴맛을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방금 마신 커피는 평소보다 씁쓸했고, 평소 사던 원두가 아닌 걸 이제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매달린 팔이 힘겹게 풀리려고 해서, 오이카와는 그 허리를 더욱 지탱했다. 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갖다 대자 모난 뼈가 잡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전 상관없어요.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쟁이인지는 몰라도, 전 지금 정도면 됐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실핏줄을 닮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오이카와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물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식탁에 내려놓자, 플라스틱 식탁은 버겁다는 듯 날 선 소리를 냈다. 엉덩이 밑에 갖다 댄 손에는 카게야마의 청바지 촉감이 까슬하게 닿았다. 뒷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천천히 만지자, 카게야마는 하지 말라는 듯 오이카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지금은 언젠가 사라지잖아. 네가 말한 지금은 이미 방금 전이 됐고, 몇 분이 지나면 예전이 되고,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잖아.”

전 언제나 지금이에요. 지금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하는 건 항상 오이카와씨였죠.”

오이카와는 부정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솜사탕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티셔츠에 코를 묻으면서도, 당장 내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는 친선 경기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누나의 생일이었다. 이후를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간은 항상 어느 정도 어긋나있었고, 오이카와는 그러한 시간의 틈에 답답하면서도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제 오이카와와 싸운 일도, 내일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지금의 그에겐 두 팔에 남겨진 오이카와의 단단한 허리로도 충분했다.

버릇인걸.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말해줄래? 그러니까, 난 준비하고 싶은 거야. 헤어지는 준비는 일이 닥치고 나서 하면 늦으니까.”

만남과 이별은 하나였고, 일맥상통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맺어진 인연은 어디로 가든 이별로 통했고, 오이카와는 이 만남을 맺은 것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지점을 카게야마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끊는 건 카게야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집불통인 점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고개를 피하고 오이카와의 허리에만 들러붙고 있었다. 무겁게 누르는 카게야마의 뼈가 아팠다. 부엌의 통유리로 짙게 들어오는 햇볕이 등에 닿아 피부 사이사이로 땀이 한두 방울 맺혔다.

오이카와씨는 너무 뒷일까지 생각하시네요.”

카게야마는 불만인 듯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강하게 안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튀어나와 오이카와를 곳곳이 찔렀다. 이별하기까지의 아픔이었다.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 태양 빛에 오이카와의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먹먹한 목이 씁쓸했다. 식탁 위에 올려졌던 커피잔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고집을 부리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 아세요?”

그건 단어와 형용사의 조합이잖아. 말이 아니야.”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요. 죽음이란 건 제각기 다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준비는 닥치고 나서 해도 괜찮다고요. 항상 어긋났던 것들도 그때가 되면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는 않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피했다. 카게야마의 앞에서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입을 다물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마주 잡았던 손을 카게야마가 풀고 난 뒤에, 시간이 어긋난 채로 남는 건 오이카와였다. 좋은 죽음의 뒤에 새로이 기억을 덧입혀야 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그 준비를 하고 싶었다. 뒷일을 항상 미리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딱딱한 뼈를 만졌다. 튀어나온 팔꿈치 뼈, 아래팔뼈, 엉덩이 아래쪽의 몽글한 뼈, 톡 튀어나온 귀 아래쪽 턱뼈까지. 카게야마는 왜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냐며 비죽 웃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항상 왜 그렇게 어긋났을까 하고 생각할 지도요.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같이 지낸 시간도 길고, 의외로 저랑 오이카와씨는 닮았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오이카와씨를 누구랑 닮았다고 하는 거야. 전혀 다르잖아. 난 토비오처럼 어둡지도 않은걸.”

항상 조금씩 어긋났던 시간이 그때가 되면 마침 마주쳐서,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카게야마의 현재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오이카와에게 옮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단단히 짜증이 난 듯 오이카와의 목 언저리를 꽉 깨물었다.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촉촉한 감촉이 새로운 감각이 되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카게야마의 혀는 말캉거렸고, 솜사탕 향을 머금은 듯 조금 달달했다.

나쁜 버릇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나, 항상 이별을 생각하는 거나.”

버릇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한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가 생각하는 것과 카게야마의 생각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의 서브 모습을 찍은 비디오가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나치게 닮은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났었다. 그가 카게야마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는 점에서 더욱 싫증을 느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매사 어긋나는 것도, 조금의 취향도 겹치지 않는 것도, 전부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처럼, 좋은 이별이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오이카와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가끔 오이카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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