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일 하던 로드 워크를 잠시라고는 하나 중단했던 걸 카게야마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작용 한 것인지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밤을 점점이 수놓았던 가로등 불빛이 미처 꺼지기도 전이었다. 밤새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안개가 희뿌연 수증기처럼 카게야마의 발목 언저리를 덮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심호흡을 크게 두세 번 한 후 카게야마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로드워크 코스를 따라, 물결치는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냇물을 가로지르고 나무의 그림자가 깨어나는 공원을 지났다. 작은 식물원 앞을 금세 추월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면서 언덕 위를 오르면 이슬이 촘촘히 내려앉은 땅이 부드러웠다.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깨닫고 카게야마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당시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카게야마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재학 시절보다 키도 컸고 어깨도 넓었으며 근육량도 늘어있었다. 미야기, 센다이가 5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거의 없는 것과 달리 카게야마는 변해 있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재정의하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5년의 공백이란 충분히 재정의가 필요한 기간이었고, 카게야마는 저만 똑같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햇살이 수평처럼 퍼지며 검은 밤을 하얗게 분칠했다. 쏟아지는 여름의 향기가 깨어나고 있다. 카게야마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언덕길을 다시 내려갔다.

 

 

# 6th day

 

 

큰 벚나무를 돌아들어가 오이카와의 집 앞에 이르면 미야기로 돌아온 후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마치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승자 팀에 달라붙어 너나 할 것 없이 질문을 쏟아붓는 기자들 같다. 수많은 카메라와 몇 가지 방송 장비,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 수십 명. 카게야마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저쪽에서 카게야마를 발견한 기색은 없다. TV 방송처럼 카메라를 쳐다보며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보였다.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은퇴로 큰 화제인 오이카와 선수의 집 앞에 서 있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은퇴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사실일까요? 인기척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끔 극성 팬이 집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사례를 눈으로 본 건 처음이다. 기자 및 카메라 담당자는 이곳에서 밤이라도 새려는지 각 잡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갑작스레 울려서 카게야마는 퍼뜩 놀랐다. 발신번호는 미야기, 카게야마의 집. ? 집이라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조심스레 화면을 눌렀다.

토비오쨩? 어디야?

오이카와씨?”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오이카와의 조금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맑은 여름 하늘 같은 목소리다. 수많은 기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오직 제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있다. 묘한 충족감이었다.

나 지금 너희 집인데.

? 아뇨,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오이카와씨 집 앞에,”

알아. 올 때 우유빵 좀 사와. , 10개까지는 필요 없으니까 적당히.

. 통화는 강제 종료되었다. 카게야마는 메인화면으로 돌아온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오이카와의 집 앞으로 눈을 돌렸다. 기자, 카메라 등 전부 그대로다. 카게야마는 그들이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빵집으로 향하는 길을 천천히 걷던 걸음이 이내 뜀박질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숨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사선으로 비추는 햇빛이 머리를 풍성하게 적셨고, 카게야마는 검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는 걸 느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빵집 문을 열고 카게야마가 들어서자마자 여성은 호들갑을 떨었다. 눈을 크게 뜨고 손님, 손님! 부르곤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손님, 그거 아세요?! 어제 손님처럼 우유빵 10개 사가신 분이, 글쎄, 그 오이카와 토오루씨래요!”

.”

카게야마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눈길을 피했다. 여성은 손을 맞잡더니 아, 우유빵 사러 오셨죠? 흥분한 채 물었다.

몇 개 드릴까요? 10개 드릴까요?”

아뇨…… 7, 주세요.”

오이카와가 말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10개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보다는 적을 테고, 과연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몇 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제가 아는 건 그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 뿐이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하고 웃어 보였다.

평소보다는 적네요. 7개 맞으시죠? 맞다, 그래서 그 오이카와 선수 말인데요! 국가대표시라던데, 알고 계셨어요? 이런 조그만 마을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예정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실은 이 사람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 이 여성에게는 오이카와가 우유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여름의 맑은 하늘과 겨울의 메마른 공기가 동시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녀가 담는 우유빵을 멍하니 바라봤다. 동그랗게 안쪽으로 회오리진 빵이 봉지에 하나둘 들어갔다. 아마 이 우유빵은 카게야마가 산 우유빵 중 유일하게 오이카와의 입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 * *

 

 

현관문을 열면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식탁에 오이카와가 앉아있었다. 7부 소매의 아이보리색 윗옷을 입은 그는 표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식탁 위에는 그가 가져온 듯 책 한 두 권이 펼쳐져 있다.

어서 와.”

다녀왔습니다.”

이상한 대화다. 이곳은 오이카와의 집이 아니었고, 그가 있는 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다. 저에게 익숙한 무채색 풍경 안에서 이질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독특한 사물처럼, 오이카와는 여타 물질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운동화 끈을 풀었다. 고개를 숙인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토비오쨩, 문도 안 잠그고 다니면 안 되지. 도둑 들면 어쩌려고.”

도둑, 안 왔는데요.”

오이카와씨가 불법침입했잖아.”

오이카와씨는 괜찮아요.”

…….”

운동화를 벗은 후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의 불쾌해 보이는 표정과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에 기분이 나빠진 건지, 5년이 지나도 도통 어려운 사람이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며 카게야마를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멈춰있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반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책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서브를 넣을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눈동자를 살며시 내려놓은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다. 그것도 저의 집의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샤프가 종이 위를 긁는 소리, 소소하게 들리는 숨소리. 카게야마가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카락은 향기가 되어 콧속에 보드라운 냄새를 풍겼다.

오이카와를 따라 고개를 숙이면 책 내용이 언뜻 보였다. 카게야마가 알아볼 수 없는 해괴한 단어들이 가득하다. 아니, 책에 쓰인 언어는 영어였고 카게야마에게는 알파벳의 모양만 익숙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낸 지 5. 아무리 그래도 어느 수준까지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마치 그 자리를 바꿔 끼운 듯 영어에 대한 지식은 깨끗이 사라졌다. 고등학생 때 츠키시마에게 배웠던 것도, 유급 직전까지 위험한 상황에 몰려 오이카와에게 급하게 배웠던 영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와의 기억 중 저가 잊은 건 없지만, 그때 그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걸 가르쳐줬는가. 카게야마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5년의 간극이란 그런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영어공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옆에 놓아둔 봉지에서 우유빵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깨끗한 입술 주변은 우유 크림도 피해 가는 성역이다. 엷은 분홍색의 작은 입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영어 공부는 왜요?”

취직해야지. 지금까지 배구만 했으니까,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잖아.”

…….”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여러 번 베어 물었고, 몇 번의 반복된 행동 끝에 우유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묻은 우유 크림을 조금 핥아먹은 후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이 영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쌓은 게 전부 소용없다는 말을 오이카와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게야마는 피가 살며시 식는 걸 느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연한 홍차색으로 빛나는 속눈썹이 깜빡이면서 영어를 읽어나갔다. 그는 정말로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처럼 보인다. 이제 오이카와는 거의 배구선수로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 안 고프세요?”

고프니까 우유빵을 먹고 있지. 토비오쨩은 바보예요?”

바보라는 말에 잠시 울컥했으나 카게야마는 입술만 삐죽이는 걸로 끝냈다. 미간을 좁히며 불만을 표현해도 오이카와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카레 만들어 드릴게요.”

오이카와는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놀란 듯 입까지 살며시 열린 채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쩐지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이 예상된다.

너 카레도 만들 줄 알아?”

외국에서 살다 보니 카레 파는 곳이 별로 없어서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아주 당연하게 카게야마가 카레를 못 만들 거라 생각하는 오이카와의 여유가 조금 분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까지 카게야마는 카레 만드는 법을 배울 생각도 없었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어머니, 같이 가지 않으셨어?”

어머니도 바쁘시니까요. 제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배우는 게 어떻냐고 하셨어요.”

흐응.”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과연 네가? 라는 말을 담고 있는 그 노골적인 눈빛에 카게야마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맛있게 만들 수 있어요. 뚱한 말투로 중얼거리자 오이카와가 그래? 일부러 놀란 듯이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한 번 만들어보든지.”

턱을 괴고 도전적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모습은 제 기억 속 오이카와처럼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고, 이슬이 맺혀 간질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미묘하게 올리고. 카게야마는 그의 깊은 눈동자를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날 사뒀던 카레 재료를 꺼내는 카게야마의 등 뒤로 오이카와의 선명한 눈빛이 꽂혔다. 등을 바라보는 건 항상 제 역할이었다. 5년의 간극을 지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제 등을 밀어내기만 했던 미야기의 여름처럼.

 

 

* * *

 

 

카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실포실했다. 제 상상속보다, 이와이즈미와 있던 레스토랑보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어떤 카레보다. 푹신하게 밥을 덮은 카레와 연하게 달콤한 향을 내뿜는 접시. 오이카와는 우유빵을 먹을 때처럼 입 안에 넣고 몇 번 우물거렸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앞서 오이카와가 공부할 때처럼 두 사람은 마주 보지 않은 채 카레를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저의 입 안에 같은 음식이 있고 같은 맛과 향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서 반짝이는 빛깔을 푸른 하늘에 가득 담아놓은 시간대였다. 그 때문일까? 혹은 카레 때문일까. 체온이 약간 올라 몸 이곳저곳이 따스하게 차올랐다. 혹은……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접시를 전부 비운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카레의 열기 때문인지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카게야마는 빈 접시 두 개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물로 헹구어도 닦여나갈 내용물은 접시에 달라붙은 카레 약간뿐이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꾸물거렸다.

카레만 배운 거야?”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면, 오이카와는 목소리만큼 달콤함이 묻어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너답네, 토비오.”

오이카와는 눈가를 찌푸리며 천천히 웃었다. 마른 장미꽃잎처럼 연하게 물든 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이 오가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오이카와에 대한 갈증이 바닥을 덮은 안개처럼 남아있는 카게야마를, 그가 오늘은 채워줄지 몰랐다. 오이카와는 이내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가는 오이카와를 따라갔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방 한가운데서 카게야마를 기다리듯이 서 있다가, 침대에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토비오, 이리 와.”

오이카와는 제 옆자리를 톡톡 누르며 카게야마를 불렀다. 마치 연인을 부르듯 말꼬리는 길게 늘이고 조금 낮은 목소리. 창가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를 등 뒤에서 비췄다. 빛무리가 형성된 그의 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오이카와의 옆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분만큼 가라앉은 침대 쪽으로 오이카와가 몸을 눕혔다. 카게야마는 천장을 보고 누운 오이카와와 눈을 맞췄다.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흐리다. 오이카와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할 게 산더미야. 학교 공부랑 근본은 비슷해도 적당히만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씨는 성적도 좋으셨었죠.”

“‘그러고 보니’? 토비오쨩, 나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울면서 찾아왔을 땐 언제고!”

울면서 찾아가진 않았어요!”

, 건방진 토비오쨩은 이렇게 해줘야지.”

오이카와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더니 카게야마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 외마디 소리를 낸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처럼 뒤로 엎어졌다. 똑같이 천장을 보는 처지가 된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으나, 무심코 숨을 삼켰다.

토비오.”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오이카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눈앞에서 맑게 빛나고 그의 숨결이 따뜻했다. 그가 붙잡고 있는 팔뚝이 홧홧하니 뜨겁다. 여름이 방 안에 갇혀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숨결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온기가 더해졌다. 뺨의 피부가 열을 발산하고 혈관을 넓힌다. 얼굴이 뜨거웠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오이카와의 눈동자 두 개는 그 조그맣고 동그란 세계 속에 카게야마를 가뒀다. 오랫동안 우린 홍차 속에, 카게야마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잠겼다. 카게야마는 처음 오이카와의 눈동자와 마주 봤을 때부터 그 홍차의 맛을 알고 있었다. 침을 삼키고 서서히 숨을 내뱉으며 공기 위에 음조를 얹었다.

오이카와씨는영원히 제가 이기고 싶은 상대예요.”

.”

오이카와씨가 배구를 그만둔다고 들었을 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굉장히 갖고 싶은 배구공이 있었는데 그게 터져버린 것만 같은오이카와씨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제 목표였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이렇다 할 목표를 정하고 배구를 한 적은 없지만요.”

카게야마에게 배구는 삶이고 인생이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순간을 지나는 관문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구는 제 인생의 가치이자 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역이었다.

그래도 오이카와씨는그 안에서 저의 확고한, 흔들린 적 없는 목표였어요.”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피죽 웃었다.

누구 맘대로 목표로 삼는 거야, 도대체. 난 토비오쨩 따위 안중에도 없었거든?”

알아요. 오이카와씨는 항상 저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었죠. 그 등을 보는 건 제 역할이었어요.”

카게야마가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가둔 채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홍차에 녹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제가 이길 거예요.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씨도, 그렇지 않은 오이카와씨도변한 건 없어요.”

…….”

그걸 알게 됐어요. 생각해 봤는데, 오이카와씨는 중학생 때부터 우유빵을 좋아하셨잖아요. 달라진 건 없어요.”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를 은은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마주 보면서, 카게야마는 입가를 꾸물거렸다. 무언가 아주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풀잎을 쓰다듬는 따스한 햇볕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발그레한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만져선 안 될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고, 그의 손바닥에 아직 남아있는 굳은살이 꺼끌꺼끌하게 피부를 긁었다.

난 이제부터 널 죽일 거야.”

……?”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몸 위로 넘어왔다. 누워있는 카게야마의 양팔을 누르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목덜미에 묻었다. 그의 면바지와 카게야마의 트레이닝 바지를 사이에 두고 중심부위가 맞비벼졌다.

오이카와씨?!”

토비오. 가만히 있어…….”

쇄골을 알싸하게 씹은 치아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뇌를 녹이던 태양보다 더욱 달콤한 숨소리에 카게야마의 등으로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무엇을 한다는 걸까.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들어 올린 티셔츠 속으로 오이카와의 따뜻한 손이 들어왔다.

.”

평소 타인이 만지지 않던 부위다. 양쪽 가슴 사이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문지르던 손이 눌러 붙어있던 돌기 두 개를 동그랗게 돌렸다.

묘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는 한 손으로는 돌기를 굴리고, 다른 한 손은 땀이 스며 나온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오이카와의 손에 붙은 굳은살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이상한 감각에 허리가 들렸다.

,

오이카와가 하반신을 서서히 돌렸다. 마주 댄 중심부위에 은근한 간지러움이 모였다. 마치 관계를 맺듯이 허리를 돌리기도 하고 위아래로 흔들기도 하면서, 중심부위에 열기를 더했다. 묘한 감각이었다…….

 

 

그의 손안에 뜨거운 것을 토해낸 뒤 오이카와는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말없이 젖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입술에 천천히 닿았다.

오이카와씨.”

그의 눈동자는 너를 죽일 거야라고 말하던 순간의 눈동자 빛과 비슷했다. 나른하게 퍼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지구와 태양의 관계처럼, 카게야마가 그의 안에서 죽는 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는 저 자신이 또한 한심했다. 이 이상 한심해질 순 없었다. 그 흔한 말 한마디 못했던 카페에서처럼 다시 그럴 순 없다.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히고 시야가 점차 흔들거렸다. 죽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카게야마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말해야 한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와이즈미가 행복해지겠네라고 했던 것처럼, 이건 저의 할 일이다.

오이카와씨, 괜찮아요.”

……토비오.”

죽여주세요. 저를.”

…….”

제가 원해서, 온 거니까요.”

카게야마는 아주 약하게 미소 지었다. 저가 제대로 웃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여느 때의 오이카와였다. 바보구나, 작게 내뱉은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창문 밖으로 들리는 매미 소리보다 약했다.

오이카와씨도요.”

건방지네.”

5년이나 지났는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에 소리를 내어 키스한 뒤, 카게야마의 뒤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찌할 수 없었다. 저도 만져본 적 없는 곳을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만지고 있다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긴장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묘해져서, 카게야마는 그저 눈을 감았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던 몸을 풀고 그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카게야마는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물로 젖어 든 뺨에 다시 물줄기 하나가 서서히 흘렀다.

오이카와씨…….”

입술을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와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의 인상을 찡그린,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면 그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 대신 하고 싶은 말을 카레처럼 혹은 우유빵처럼 삼키고, 장 속에 녹여서, 제 세포 구석구석에 집어넣었다. 제 안의 구성성분인 오이카와 토오루로 남도록. 오이카와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입술은 보드라운 미소를 만드는 게 참 그다웠다.

바보 토비오쨩.”

카게야마는 태양에 녹아내리는 매미를 떠올렸다. 그때 저의 전신을 녹이던 햇빛처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쏟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한 일사병을 앓았다. 이번에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햇볕 아래 분해되어 기름이 번들거리는 우유빵은 썩을 수밖에 없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다.

 

 

 

 

# 7th day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제가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지지하고 천천히 현관문 쪽으로 돌아선 후, 문을 잠그려던 손을 멈칫했다. 현관문을 바라본다. 첫날 갔던 오이카와의 집처럼 인기척은 없다. 카게야마는 문고리에 끼우려던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다. 구름 없는 하늘에는 살인적인 열기를 내뿜는 태양만 강하게 빛났다. 매미 소리는 처음 왔던 날보다 줄어들었다. 많이 죽은 걸까, 햇볕에 녹은 걸까. 어느 쪽이든 무엇이 사실이든, 지금 남아있는 매미도 언젠가 전부 떨어져 죽을 테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 *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는 익숙한 여성이 다시 호들갑스럽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 손님! 어서 오세요! 우유빵 열 개 드릴까요?”

미리 옆에 준비해둔 것 같은 우유빵을 봉지에 담을 준비를 하면서, 여성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 후 천천히 대답했다.

아뇨, 한 개만 주세요.”

어머, 그래요? 의외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 여성은 우유빵 한 개를 솜씨 좋게 봉지에 담았다.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던 여성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어제 말씀드렸던 오이카와 선수요알고 보니 이미 마을을 떠나셨대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알아봤나 봐요.”

그런가요.”

그것도 모르고 어제 손님께 마구 이야기나 하고어휴, 주책이 참. 죄송해요.”

……아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성은 볼을 물들이고 한 번 더 작게 죄송해요.’ 중얼거렸다. 포장한 우유빵 하나를 건네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면 그 열 개 사 가신 분은 누구실까요?”

글쎄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아마도, 오이카와 선수가 아닌우유빵을 무척 좋아하는누군가이리라.

카게야마는 밖으로 나온 후 카페 근처에 그늘을 드리운 나무를 바라봤다. 연한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투명하게 흐르는 여름 공기를 들이마시고, 카게야마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움직였다.

 

 

* * *

 

 

오이카와 집 앞은 어제의 광경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빈터였다. 수많은 카메라 장비도, 기자도, 사람들도 없다. 언뜻 낡은 것처럼 보이는 현관문은 정형외과 의원처럼 몇십 년이고 똑같은 모습일 것만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그 상태 그대로 굳은 채 땅속에 사는 매미처럼 오랜 기간을 기다릴 것이다.

거기, 사람 안 살아요.”

생소한 목소리다. 몸을 돌리면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지겹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훑어보고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살고 있다는 루머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어제 잔뜩 기자들이 들이닥쳤어요. 근데 웬걸, 벌써 이사했대요.”

언제요?”

나야 모르지. 가족은 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는데 혼자만 남아있을 리 없죠. 기자들도 헛다리 짚은 거지, .”

남성은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안 좋게 구기고 가버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돌려 현관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몸을 돌리고 캐리어를 끌면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유빵을 담은 봉지는 눅눅한 바람을 받아 이리저리 흔들린다. 왼쪽으로 반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다시 왼쪽으로…….

 

 

* * *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도로를 거닐면 고생하는 건 캐리어였다. 캐리어가 바닥에서 들렸다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매앰매앰 소리 위에 겹친다. 햇살처럼 투명한 땀이 관자놀이에서 흘렀다. 바닥 위로 오르는 아지랑이, 물결치며 흐르는 습기 가득한 바람, 땅을 짓누르는 여름 구름.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멈춰선 후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 토비오요. 돌아가려고요……. , . 아뇨, . 발목은괜찮아요. 저기감독님.”

, 배구가 하고 싶어요. 작게 말하고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입가 주위가 떨려서 작게 깨물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감독님, ……,”

카게야마는 파들거리던 다리를 굽히고 주저앉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검은 물방울이 툭, 툭 떨어지자마자 스며들었다.

어제, 한 번 죽어서앞으로도앞으로도 저는, 그 사람한테는 없는 사람이라……,

카게야마는 눈을 꼬옥 감았다. 감정의 컵에 담긴 내용물이 넘쳐서 떨어지는 눈물로 형상이 바뀌었다. 전날 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어지러움과 함께 머리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햇볕과 매미 소리. 발목이 다시 욱신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 왜 또 말썽인 것처럼 구는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은 카게야마의 욕심을 탓하는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철저하게 믿었다. 그의 안에서 죽어있을 제 시신을, 오이카와가 깨끗하게 닦아주고 수의를 입혀준 뒤 잿더미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줄 거라는 믿음. 완벽한 죽음이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다시 찾아간 정형외과는 변한 게 없었다. 아마도 개원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한 건 없을 것이다. 빛바랜 백의를 입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 비슷하게 적당한 연배로 보이는 간호사.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와 겨우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낡은 X-ray 기계까지. 5년 뒤도 똑같이 이 모습일 것 같은, 포르말린에 담겨 부패하지 않을 것만 같은 오래된 정형외과 의원. 카게야마는 왜 벌써 왔냐는 의사의 말에 머쓱하게 입술만 삐죽였다. 의사는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며 장난스럽게 말장난을 치다가, 붕대를 풀고 그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진 후 기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세상에, 역시 젊은 청년은 다르네요. 회복이 굉장히 빨라요. 한 일주일은 갈 줄 알았는데 말이죠.”

괜찮은 건가요?”

카게야마는 그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빨리 붕대를 풀고 싶었냐는 의사의 물음은 옳은 말이었다. 붕대가 갑갑하고 불편하다기보다, 로드워크나 근력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 끝에는 배구가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삶의 일부분이다. 의사는 턱살이 두툼하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붓기도 나아지고 통증도 없으며 관절운동도 괜찮아 보인다고는 하지만. 전에 말했듯 염좌라는 건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세요.”

.”

아무리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주사 한 대만 맞고 가요. 알았죠? 무리는 금물입니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이고 스스로 절망하기 마련이에요. 모든 일이 그렇죠.”

…….”

카게야마군처럼 젊은 청년들은 저 자신의 힘으로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의사는 단호하게, 동시에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은 책상 위에 놓인 처방전에 몇 가지 영어단어를 적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억지로 조절하려 하면 제풀에 꺾인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다. 그에 따라 인상을 찌푸린 탓일까,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저젊은이들은 이런 시골에 잘 오지 않으니까, 무슨 연유가 있을까 해서요.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것뿐입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삶에든, 운동에든, 관계에서도요.”

. 감사합니다.”

감사 표현을 해도 될지 조금 망설였으나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검고 푸른 눈동자로 백발이 잔뿌리처럼 일부만 남아있는 그를 바라보면 의사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카게야마가 관계에 무리를 가한 것의 대가는 아마도 오이카와가 치렀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내리며 인사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5th day

 

 

오전 10시에서야 여는 의원을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센 시간대가 되고 만다. 묵직한 여름의 향기가 다시금 대기를 휘돌았다. 카게야마는 아찔하게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만 골라 걸었다. 땀은 이제 신체의 장기처럼 붙어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불쾌한 감각을 자아냈다. 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겨우 10분 거리다. 붕대를 푼 발목은 전날보다 훨씬 매끄럽게 구부러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삐끗하며 비틀거렸다. 더는 절뚝이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절뚝이는 기분이었다.

나무의 푸른끼가 짙다. 이끼처럼 잎사귀를 덮은 빛깔은 빛에 따라 앞, , 양옆으로 흔들린다. 하늘 안에 곱게 갈아 넣은 색깔은 두툼한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 아래에 섰다. 봄이었다면 떨어진 벚꽃잎에 묻혀 흙이 분홍색이었을 텐데. 벚나무를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는 길은, 오이카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붕대를 했을 땐 버거웠던 길이 이제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발을 땅에 대고 몇 번 발목을 천천히 돌리면 수월하게 돌아간다.

 

아아, 미야기에 있을 이유가 없구나.

 

막연히 떠올리자, 카게야마의 마음을 아는 듯 발목이 마른 통증으로 신경을 잘게 긁었다. 발목도 나았고 돌아가서 국내이탈리아대회도 준비해야 한다. 오이카와와 이야기할 염치도 얼굴을 보러 갈 자격도 없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꺼냈다. 주저 없이 번호를 눌렀다.

, 감독님. 저예요. 카게야마입니다. , 죄송합니다. , 돌아가려고요. 일정보다 조금 이르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 때문에 카게야마는 손을 귀에서 잠시 떼어놓았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오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처럼 들려오는 매미 소리만이 귀를 채운다. 카게야마는 제 근처에 떨어진 매미 허물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돌아가게 되면…… 배구가 하고 싶어요.”

 

 

* * *

 

 

가져온 짐은 옷 몇 가지와 혹시나 싶어 챙겨온 배구공, 세면도구 등이 전부였다. 머물었던 기간도 이제야 5일째, 짐이 많을 턱이 없었다. 짐 정리를 몇 분 만에 끝내고 마지막으로 배구공을 가방에 넣고자 방에 들어갔다. 채도가 낮은 벽지와 바닥은 제 방이 처음 생겼던 중학생 때부터 바뀌지 않았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3년과 카라스노 고등학교 3년이 녹아있는 방이었다. 주변 벽보다 색이 덜 찌든 곳은 트레이닝 메뉴를 붙여뒀던 곳이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곳을 매만지다가 오이카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저의 트레이닝 메뉴에 팔 근력 트레이닝이 몇 가지 추가된 날이기도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 이상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 다른 기억을 몇 개 더 꺼내보아도 그는 결코 친절한 선배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그럼에도 그의 서브빛을 모으고 볼의 한 점에 집중한 뒤 찰나를 섬광처럼 내던지듯 던지던 그의 서브는 명백하게 카게야마의 배구를 뒤흔들었다. 그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지.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를 이기지 못한다고 깨달았던 순간. 생애 최초의 절대적인 패배였다. 아오바죠사이와 두 번째 경기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말. 그 어느 때보다도 카게야마를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로, 아니. 오이카와가 줄곧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깨달은 순간.

이걸로 11패야.’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 당시 그의 뺨 어느 부위에 땀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땀방울이 눈꼬리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흘러내리던 모양, 네트 너머에 있는 그의 숨소리, 입가에 맺히던 땀방울.

대학 시절 간간이 만났던 그는 매번 환한 여름처럼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카게야마의 옷만 보고도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곤 했다.

토비오쨩,’

가볍게 공기주머니를 부풀리듯 둥그렇게 이름을 부르던 오이카와. 그와 가끔 갔던 카레 집과 카페는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의 안에도 사금(砂金)처럼 남아있었다.

토비오.’

언제였을까. 카게야마가 이탈리아에 간다고 말했던 날이었을까. 함께 카레를 먹고, 오이카와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듯이 말하다가 카게야마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출국이 언제야? 잘 가, 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은 그를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일모레요.’

그래.’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만히 내리고, 카게야마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바로 이 집 앞에서. 어둑해진 거리를 비추는 연한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부터 전신을 비스듬히 비췄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손을 다시금 꽉 붙잡았다. 제 것이 아닌 온도와 감촉이 낯설었다.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봤다. 고등학교 시절 그 시합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눈빛과 그 흐르던 눈동자의 움직임을 뚜렷이 인식했다. 그 뒤에 오이카와는 뭐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감고 있는 눈동자에 힘을 줬다. 신경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토비오. 죽지 마.’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으면요.’

바보. 그런 게 아니야.’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선 카게야마의 손을 깨끗이 놓았다. 그의 낯선 온기가 떨어져 나가고 미묘하게 남은 잔류 열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걸로 11패야.’

죽지 마.’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트레이닝 메뉴를 붙였던 벽이 보인다. 세월이 흘러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자잘한 자국들이 보였다. 이곳에 카게야마가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핸드폰을 꺼내 다시 번호를 눌렀다. 카게야마는 좀 전에 비해 지나치게 신호음이 길다고 느꼈다.

저예요, 감독님. 카게야마요. . 저기죄송합니다. 역시, 조금 더 있다 갈게요. , 그리고사실…… , 발목도 다쳤거든요. 제가.”

좀 전과 똑같이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있자 온갖 목소리가 저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렸다. 고성, 잔소리, 크게 내지르는 소리가 안 좋은 통화 음질 탓에 지직거리는 소리와 섞였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적어도 저의 잘못은 아니다.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경우는 카게야마도 어찌할 수 없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 죄송해요. 저기…… 그렇게 할게요. .”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문을 바라보면 불그스름한 연기처럼 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카게야마는 입맛을 다셨다. 우유빵이 먹고 싶다.

 

 

* * *

 

 

어머, 손님!”

카게야마가 ‘OPEN’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와 빵 만드는 쪽을 초조하게 번갈아 바라보더니 꽉 묶은 머리 옆을 매만졌다. 말하기 어려운 듯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기, 우유빵이한 개밖에 없어요.”

여성은 선반에 놓여있는 우유빵을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한 개만 남은 우유빵과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럼, 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도로 다물었다.

손님 말고도 10개나 사가신 분이 계셨거든요.”

? 어떤, 어떤 분이

글쎄요,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분이셨어요. 무척 잘생긴 분이셨는데, 물론 손님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여성은 볼을 물들이며 서둘러 말했다. 우유빵을 10, 무척 잘생긴 사람……. 카게야마는 그녀에게서 눈을 피해 우유빵 한 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눈 사이를 좁혔다.

열 개, 사 갔다고요.”

, 열 개…….”

여성은 부끄러운 듯 가로 내렸던 얼굴을 들어 의아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사려고 했던 우유빵이 없어서 화가 난 걸까. 카게야마의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무언가 진한 감동이 서려 있는 듯이 보였다. 우유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게야마는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한 개 남은 거 주세요.”

, 알겠습니다.”

역시 우유빵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걸까. 키도 크고 어느 정도 덩치도 있는 남성인데 귀여운 면이 있네. 윤곽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며 여성은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우유빵 한 개를 손에 들고나오면 불꽃처럼 붉은빛의 태양이 밤의 장막으로 덮이고 있었다. 거뭇하게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으며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제가 직접 빵을 그렇게 많이 사 본 것도 처음인데, 이제야 맛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음식을 사면 자연스레 입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던 카게야마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에게 그 이상의 대상이라는 씁쓸한 자각이기도 했다.

부드럽게 잇모양대로 눌려 들어가는 빵의 감촉, 그 사이로 튀어나온 우유 크림이 점막에 닿아 녹으면서 향기를 풍긴다. 몇 번 씹을수록 우유빵은 카게야마의 입안에서 모양이 변하면서 달콤한 맛을 자아냈다. 땅속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의 베일, 똑같이 제 뿌리 쪽으로 빛을 흡수하는 올리브 빛 나무와 카게야마. 우유빵이 자신의 안에서 녹고 제 몸 곳곳에 퍼져 세포의 구성성분이 되는 걸 느끼며 카게야마는 문득,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을 또 한 입 베어 물으며 눈을 꼬옥 감았다. 정말이지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붕대가 감겨있었던 발목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통증, 심장을 직접 관통하는 이질적인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쪽 발목이 부어도 상관없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미지근한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하다. 눈을 뜨면 물속에 있는 것보다 많은 일조량이 얼굴에 닿았다. 공기가 코를 통해 오간 후에야 지상에 있음을 실감한다. 머리 뒤쪽부터 오금에 이르기까지 땀이 배어 나와 이불보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잠이 덜 깨서 무거운 머리를 들고 상반신도 마저 일으켰다. 햇빛이 창문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듯 들어와 바닥에 꽂혔다. 눈가가 뜨겁고 머리가 멍하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1, 어머니.

 

잘 지내는 거니?

 

카게야마는 잠시 대답을 두고 고민한다. 붕대가 둘린 발목에 그치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미약한 두통과 어지러움까지. 손가락을 키패드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 글자를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발목을 조심하며 방 안을 거닐면 처음 병원에 갔을 때보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전보다 통증도 감소했고 겉으로 보기에도 붓기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체중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카게야마는 저를 따라오는 햇빛을 밝은 아이보리색 커튼으로 가렸다. 속눈썹조차 무거워서 힘들게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여름 기후에 더위를 먹은 걸까, 숨쉬기도 갑갑하고 폐가 충분히 확장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욕실로 향했다. 땀이 식지 않은 축축한 신체가 열을 보관하고 머리를 더욱 달구고 있었다. 미야기의 여름은 병적이었다.

 

 

 

#4th day

 

 

시야에 비치는 모든 나무의 잎과 잎 사이 경계가 흐릿하다. 모자이크처럼 조각난 푸른 입자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그대로 관통하는 햇빛에 찔려 섬광을 내뿜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매미 울음소리에 부딪히면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연 눈동자가 비추는 모든 것이 뜨겁다. 카게야마는 축축한 이마를 훔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 아래에서 나무, 잎사귀, 카게야마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잘 지내는 거니?’ 그 메시지 글자만으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겠지.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이탈리아에서 들었던 쿠니미의 말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죽음까지 몰고 오는 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지식은 없어도 죽음 자체는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절차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비교적 최근이어서 그럴 테지. 카게야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접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죽음이어도 제각기 다른 인상(印象)을 남긴다는 건 묘한 일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 달랐듯, 아버지의 죽음도 부쩍 다르겠지.

카게야마는 제 기억 아래에 남아있는, 사망했을 당시의 할아버지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윤곽을 덮어씌웠다. 파리한 얼굴을 한 채 관 안에 눕혀진 아버지의 시신. 눈과 입을 꾹 닫은 아버지의 몸에는 흰색 수의가 입혀져 있다. 관 속은 머리 주변부터 발끝까지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꽃이 장식하고 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몇 번 훔치더니 결국 얼굴을 가리고 만다. 손가락 사이로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염없이 스며 나온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목소리가 이내 겹쳐지면서 하나의 흐느낌이 되는 것을 카게야마는 듣고 있다. 익숙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어긋나 전혀 다른 음색을 띤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버지의 이마 주름과 청회색 얼굴도 낯설었다. 카게야마는 제 안에서 예고 없이 생각의 방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카게야마에겐 이런 생각을 몰아넣을 방이 없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캉한 뇌 속을 들여다본다. 그의 생각의 가지는 단단한 것부터 금세 부러질 것처럼 얇은 것까지 다양해서 카게야마는 그 아주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수천 개의 방이 급박하게 열린다. 카게야마는 그 하나하나를 생각하다가 활동을 그쳤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오이카와의 집 현관문이 보였다. 이곳으로 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카게야마가 향하는 곳은, 그 몸이 무의식중에 다다르는 곳은 결국 오이카와라는 결론이 우스울 정도로 눈에 보였다.

이미 죽은 자의 뱃속을 몇 번이고 쑤시는 살인자처럼 태양이 대지 위에 녹아버린 몸을 세로로 쪼갰다. 뼈에 직접 소리를 전달하는 매미와 눈동자를 달구는 덥숙한 공기, 두개골을 가르고 연두부처럼 미끈한 뇌를 꺼내 짓이기는 햇볕. 마치 오이카와가 던져서 바닥 위를 뒹굴던 우유빵처럼 몸이 조각나고 해체되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거 같은데. 환상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는 현관문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 문이 열리고 깨진 유리같이 흔들리는 형상의 오이카와가 보였다. 혹은 어제 체육관 앞 벤치에서 꿨던 꿈처럼 망막에 맺힌 상상일지도 몰랐다. 몸이 전부 녹아서 하나의 더러운 기름 덩어리가 된다. 오이카와가 바람에 흐르는 꽃잎처럼 흩어지고, 눈이 감겼다.

 

 

* * *

 

 

……처음 보는 천장. 왼쪽 손등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때문에 손을 들어보면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수액 줄을 따라가 보니 머리맡에 걸린 수액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눈을 뜬 것 같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이카와가 콜 벨을 누르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갈게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온화하게 내려다보는 표정과 카게야마의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이제 괜찮으니까.”

오이카와는 천천히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병원에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는 카게야마와 그 옆에서 지켜보던 오이카와. 그의 집 앞에서 느꼈던 속이 쓰릴 정도의 울렁거림, 의식이 끊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기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다행이에요. 굉장히 회복이 빠르시네요. 간단한 피검사도 했는데 괜찮으셔서, 이만 돌아가셔도 될 거 같아요.”

간호사는 빠르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손등에 꽂힌 바늘을 능숙하게 뽑아냈다. 묵직한 통증이 사라지고 물 흐르듯 이어진 동작 이후에 간호사는 병실을 나섰고, 오이카와도 그 뒤를 이었다.

오이카와씨, 잠깐!”

카게야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닫혔다.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던 때에 잠시 누르고 계세요라고 들었던 말을 이행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밴드 한가운데를 적시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피가 보여도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문을 열자 접수대에서 수납을 하는 오이카와가 보였다.

오이카와씨!”

그를 저지하고자 다리를 내디뎠으나 그대로 무너졌다. 양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약한 어지러움이 겹쳐 다시 일렁이는 시야를 만들어냈다.

괜찮으세요?!”

옆을 지나던 간호사 한 명이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카게야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일사병으로 쓰러지셨거든요.”

일사병?[각주:1]

이런 여름날에는 종종 있어요.”

카게야마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키가 180을 넘은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나 비틀거리다니 꼴사납다.

괜찮습니다. 부축, 안 해주셔도.”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하고 손을 무른 후 벽에 기대섰다. 오이카와는 물빛 반소매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카게야마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더니, 통보하듯이 짧게 말했다.

가자.”

몸을 돌리고 그대로 병원 밖으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보다가 카게야마도 몸을 움직였다.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가 불안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좀 전의 상황을 보고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건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를 쫓아가는 것도 여전히, 카게야마의 몫이다.

 

 

* * *

 

 

끝나지 않는 매미 소리와 달궈진 공기는 여전했다. 가장 열기를 내뿜는 시간인 오후의 태양은 저 자신의 궤도를 따라 둥그렇게 돌고 있었다. 단 두 개뿐인 구름이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과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쓰러지기 전보다 한결 편해진 가슴 속에 숨을 집어넣은 후 천천히 내보냈다. 오이카와가 앞서고, 카게야마가 뒤를 따르는 모습은 병원을 나오고도 계속되었다. 오이카와의 등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건 가히 오랜만이다. 제 기억보다 골격이 두드러진 그의 등은 얼룩덜룩한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전부 흡수하고 있었다. 바지와 겨우 맞닿을 정도로 짧은 물빛 티셔츠가 푸른 잎 사이로 비치는 빛에 흔들리면서, 바다처럼 그물망 무늬를 만들었다. 적당히 멋스럽게 고정된 머리카락, 가늘게 떨어지는 목과 티셔츠에 가려진 두툼한 근육, 그와는 다르게 얇은 팔목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새삼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카게야마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등이 곧은 사람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를 쫓다가 그가 구태여 그늘을 골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더위를 싫어하기 때문인지, 혹은 그 외의 이유인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일수록 입을 다물었다. 그건 때로는 오이카와의 친절이었고, 가끔은 카게야마를 애태우는 성질의 버릇이었다.

더위를 가라앉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바람은 오이카와의 등에서 소멸하고, 그늘에 놓인 그의 등을 비추고자 햇빛은 더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도 햇빛도 전부 오이카와만을 따라다닌다. 눈이 부셨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물론 돈은 토비오쨩이 내겠지? 오이카와씨가 생명을 구해줬는데 말이야.”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을 구해줬다는 건 좀 과장 아닌가 싶어 입술이 튀어나오다가 실제 그가 구해준건 사실이었기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발목에 다시 통증이 배어 나오려던 때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걷는 속도가 비슷해지고 그로 인해 오이카와의 옆모습이 보였다. 홍차 빛 눈동자는 빛을 투명하게 반사해 평소보다 옅은 색소로 빛났다. 카게야마는 잠시 편안해졌던 가슴이 다시 옥죄이는 걸 느꼈다. 열기 때문도, 어지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 * *

 

 

좌석이 총 5개 남짓한 작은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테라스 석이 마련된 공간을 고른 건 오이카와였다. 카페 내부와 유리문으로 통하는 테라스 석에는 수국 화분이 아름드리 놓여있다. 방금 물을 받은 걸까, 푸른색 꽃잎에 이슬처럼 물방울이 맺혀있다.

저는 아이스 커피 한 잔요. , 이쪽은 오렌지 주스로 부탁해요.”

오이카와는 제멋대로 주문한 후 종업원에게 웃어 보였다. 그가 주문할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의 상상 속에서 제멋대로 카레를 주문하던 오이카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테라스 석에서 보이는 거리는 주택가처럼 한적하다. 이처럼 해가 뜨거운 시간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어 작열하는 태양이 그대로 바닥을 지핀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수국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게야마는 입을 열어야할지 고민을 여러 번 하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이제 오이카와의 시선은 카페 주변에 심어진 나무로 옮겨졌다. 센다이는 누가 뭐라 해도 시골이었고, 도시에서 보기 힘든 생생한 빛깔의 잎사귀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재회했을 때처럼 쏘아보듯 날카로운 눈빛이 아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오이카와였다.

아이스 커피, 오렌지 주스 나왔습니다.”

조금 전 오이카와에게서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며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를 흘끔 바라보며 볼을 더더욱 붉힌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구겼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래?”

오이카와는 관심 없다는 듯 금세 대화를 종료했다. 능청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입으로 커피를 마신 후 그의 표정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어.”

이와이즈미씨요?”

아니, 이와쨩이면 이와쨩이라고 했겠지.”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바보,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카게야마는 바보 아니에요, 마저 말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멈춘다.

그 친구는 꽤 잘 살았던 거같아. 집이 무척 컸거든. , 집은 그것과 상관없을지 몰라도 대충 어린아이가 느끼는 게 있잖아.”

카게야마는 그러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관념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집에는 오이카와가 있다. 그에게는 익숙한 정의가 타인에겐 이해받기 힘들다는 걸 카게야마는 어머니가 말해줘서야 알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안 나. 아마 여름방학 때였다고 생각해. 무척 더웠거든. 오늘처럼.”

센다이였나요?”

당연하지. 여기서 태어나고 이곳에서만 살았는걸. , 그래도 너처럼 쓰러질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어.”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장난이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얄밉게 웃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웃음소리였다. 일본, 미야기, 센다이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4일째인데도 오이카와의 모든 것이 매 순간 다르게 느껴졌다. 센다이의 기억은 흙과 공기처럼 오이카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오이카와가 보여주는 익숙한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카게야마를 주조(鑄造)했다. 그와 보냈던 여름의 센다이는 매번 동공이 하얗게 물든 것처럼 눈부셨다.

놀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우연히 저녁까지 먹게 된 날이었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무척 요리를 잘한다고 나한테 자랑한 적이 많았거든.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참 이상하지, 선택이라는 거.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삶이 빚어지니까.”

오이카와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댔다. 마주 보던 눈길을 돌려 다시 풍경을 바라보고, 꿈에서 이야기를 하던 것처럼 일상적인 말투로 이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니 창밖이 깜깜해졌고,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감사하다고 여러 번 인사한 후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왔어.”

오이카와는 어렸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더듬 짚으면서 말했다. 친구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기억, 그것도 어린아이의 시야에서 본 상황인지라 대체로 부정확하고 모호했다. 그런데도 선명한 이미지 몇 개가 등장할 때마다 오이카와는 특별히 신경 쓰며 자세히 묘사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 세 명, 그들이 내민 종이에 쓰여있던 문구. ‘갚지 못할 시 무슨 일이든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세지 못할 정도로 많았던 0의 개수와 그 아래 찍힌 지장. 오고 간 말다툼과 처음 들어보는 험한 말.

그때 난 너무 무서웠는데,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친구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 같아. 누군가의 공포와 증오, 분노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표정을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그 사람들이 간 후에 친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고 있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 미안하다고.”

…….”

알고 보니 그 아이 아버지가 돈을 빌리고 도망쳤다고 하더라. 사업을 시작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그게 실패했다나. 그 아이와 어머니는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얄궂지.”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미소 짓던 얼굴의 근육이 전부 이완됐다. 그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와 누나가 그렇게 되게 할 순 없잖아.”

…….”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오이카와와 얼음물을 마시던 이와이즈미의 모습이 천천히 겹쳐진다. 이와이즈미의 말이 테라스 석 주위를 맴돌았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눈가를 구겼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를 흉내 내어행복해지세요같은 형식적인 말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은 쓸모없는 멍청이였다. 이와이즈미가 하지 못했던 말도, 할 수밖에 없던 말도 하지 못하는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오렌지 주스를 바라보자 동동 떠 있는 얼음이 점차 흐릿해진다. 다시금 머리가 어지럽고 가벼운 두통이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카페 내부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이별 선고였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그래왔듯, 카게야마가 원하는 바를 최소한의 표현으로 채우는 사람이었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아주 작은 틈새도 막지 못하는 부족한 자였다.

손님.”

카게야마의 시야 옆으로 갈색의 정사각형이 보였다. 종업원이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은 네모난 티슈였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제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오렌지 주스에 퐁당퐁당 떨어지고, 그 안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밴드가 붙어있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센다이의 여름 속에 홀로 서 있는 오이카와를 규정짓고, 더러운 붕대를 뭉쳐서 배구가 빠진 그의 빈칸에 조잡하게 쑤셔 넣은 건 카게야마였다. 그런 그가 말할 자격도, 울 자격도 있을까. 저는 그를 제 방식대로 난도질한 만큼 상처 입을 자격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1. 열에 노출되어 심부의 온도가 섭씨 37도에서 40도 사이로 상승한 상태. 어지럼증, 두통, 구역, 즉시 회복되는 실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본문으로]

  




 

세븐데이즈(Seven Days)

 

 

  




 

 

 

  겨우 하루 운동을 쉬었다고 오전 10시 즈음에야 눈을 뜰 카게야마가 아니다.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온 여파 때문이리라. 발목이 욱신거려 밤잠을 설친 탓에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로드 워크는 무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기만 하는 발목을 슬쩍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웃옷을 벗었다. 배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아침 겸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하고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은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었다.

 

 

 

#3rd day

 

 

어디에 가서 식사할까 고민하다가 미야기에 도착 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전단지가 붙어 있던 게 생각났다. 전단지의 약도를 더듬더듬 기억해내 도착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만큼 건물이 깨끗했다. 볼 거라곤 논밭과 주택가, 몇 개 되지 않는 학교밖에 없는데 굳이 언덕 위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낮, 이런 애매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테라스 혹은 창가 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가지를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매미 같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은 귀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카게야마가 입구에서 잠시 멈춰있자 멀리서 키가 작은 종업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창가가 아닌2인용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였다.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메뉴 중에 카레는 단 하나뿐이다. 다행히도 돼지고기 카레였다. 자리를 안내해준 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카레를 주문했다.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당연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이곳 미야기가 더는 제가 아는 곳이 아님을 인지했다. 가게 한쪽에 조그맣게 매달린 벽걸이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하는 뉴스래 봤자 별 다를 게 없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TV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화면 하단에 쓰여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배구계 들썩오이카와 토오루 은퇴?

아직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는데요. 한창 인기를 끌면서 뛰어난 세터로 활약 중이던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몇몇 가까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개인적인 집안 사정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이카와 선수가 소속 중이던 A 팀은 아는 바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은퇴를 승인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남아있던 계약 기간 등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배구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쿠니미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카게야마는 금세 다음 뉴스로 넘어간 TV에서 눈을 뗐다. 주문하신 돼지고기 카레 나왔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종업원은 카게야마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조심스레 놓았다. 카게야마는 앞에 놓인 카레를 잠시 바라봤다. 이탈리아에서도 카레를 먹었다고는 하나, 항상 미야기에서 먹었던 카레 맛이 입 안 어딘가에 맺혀 있었다. 포슬포슬한 밥과 누런 빛깔의 카레를 섞으면 그 사이로 감자와 돼지고기가 보인다. 카게야마는 카레 한 입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카레 향기가 혀끝을 자극하고 익숙한 향신료 맛이 콧속에 가득 찼다. 한입 더 들어 올린 순간 카게야마의 반대쪽 의자에 누군가가 주저앉듯이 앉았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귀에 닿은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자칫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입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짙은 검은색의 양복이 보였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뒤 셔츠는 땀에 적셔져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종업원이 제때 가져온 얼음물을 크게 세 번 들이마신 뒤 이마를 부채질했다. 그의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있다. 이와이즈미가 세게 내려놓은 유리컵은 얼음만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디였지. 외국에서는 잘 적응했고?”

이탈리아요. ……배구, .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시원찮은 대답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의 옷차림과는 달리 카게야마에게도 익숙한 미소였다.

다른 건 아직이라는 말이네.”

이와이즈미는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어렴풋한 눈길로 바라봤다. 여전히 짧게 자른 이와이즈미의 머리는 진한 검은색이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직선적인 눈빛을 피하고 입술을 삐죽이자 그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후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겨진 미간도 익숙하다.

변한 게 없네, 너는.”

카게야마가 그런가요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거뒀다. 종업원이 다시 채워 넣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눈빛을 날카롭게 바꿨다.

오이카와냐?”

…….”

이와이즈미는 대답 없이 눈꺼풀을 내려놓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짜증 난다는 듯 머리 한쪽을 긁었다.

왜 그리 고집이 세냐, 너나 그 녀석이나. 누가 말했어?”

…….”

, 대충 알 거 같긴 하다만. 쿠니미가 킨다이치 둘 중 하나겠지.”

……!”

내가 말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거든.”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카게야마한테 네 입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쿠니미요.”

그럴 거 같았어. 킨다이치는 오이카와를 위해서라도 너한테는 말하지 않겠지.”

……이와이즈미씨.”

오해하지 마. 쿠니미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오이카와를 생각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 그렇다 해도.”

설마 쿠니미가 너한테 말할 줄은 몰랐다만.

이와이즈미는 정말 의외였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자신도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이탈리아가 아닌 이 곳 미야기에 있다는 것부터 쿠니미를 위한 변명은 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전화를 듣고 선택하여 이곳에 왔다. 오이카와로 인해 생긴 손등의 상처가 박동하며 통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앞에 놓인 유리컵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실내는 바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온도였다. 대지를 뒤덮던 여름은 어느 저편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나직이 울리는 보사노바 노랫소리, 땀이 식은 이와이즈미의 이마와 미지근해진 카레.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봤다.

나도 얘기를 들은 건 그 녀석이 이미 결심한 후였어.”

.”

갑자기 낮에 불러제끼길래 평소처럼 시답잖은 얘기겠거니, 짜증 내며 나갔더니 웬 캐리어를 들고나오더라고. 벌써 미야기행 기차도 예약해놓고, 신변정리도 마무리 지은 상태로. 은퇴는 팀 감독한테만 말하고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뭐 감독한테 말한 걸로 이미 끝난 거지.”

이와이즈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듯 카게야마 앞에 놓인 카레에 시선을 두고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만나자더니 배구를 안 하겠다고, 해서 한 대 때려줄까 진심으로 생각했지. 뭐라고 중얼중얼하는데, 그때는 솔직히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오더라. 바보같이 그런 순간 아침에 서에서 봤던 살인사건 용의자 생각이나 하고. , 그럴 땐 희한하게 별 쓸데없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잖아. ,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었나? 하는. 넌 안 그러냐?”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인상을 찌푸리면 이와이즈미는 됐다, 짧게 말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갑자기 그러더라고. ‘그래서, 배구 안 하기로 했어라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게 영 오이카와 그 바보 자식 같지가 않아서 한 마디 해줬지.”

 

그래. 너 이젠 행복해지겠네. 평생 행복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놈이더니, 이제 괜찮을 거 같네.’

 

그랬더니 그냥 웃더라고. 거기서 뭘 말할 수 있겠어. 기차 시간 다 됐다고, 가겠다고 하길래 잘 가라고 했지.”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여름밤처럼 싱싱한 빛깔로 빛나며 이와이즈미만을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저를 탓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이내 허탈하게 웃음 짓고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이 세계 속에 지겨운 더위는 없으나 절대 눈을 피하지 않는 카게야마의 눈빛이 이와이즈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 넌 어떻게 생각해.”

…….”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했어야 된다고 생각해?”

카게야마는 그저 이와이즈미만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 멍청이 오이카와한테, 너한텐 배구밖에 없으니 바보 같은 생각 그만두고 그리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너한테 배구는 그 정도였냐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이렇게 괴로운 듯이 웃는 건 참 낯선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가 끝난 뒤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카게야마는 기억해내려 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네트 너머에서 시선을 교차할 때 그의 눈동자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것만을 기억해냈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런가요.”

이와이즈미는 숨을 얕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떨려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액체였던 카레가 뭉쳐서 식어있었다. 달콤한 냄새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넌 날 나쁜 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요.”

아냐, 상관없어.”

카게야마가 서둘러 대답한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상관없어. 그의 입에서 딱딱한 말이 단단한 어조로 튀어나왔다.

너한테 나쁜 놈으로 보여도 난 별로 상관없거든. 카게야마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

카게야마,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 상황에서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너라면.”

저는……,”

 

 

* * *

 

 

 

카게야마는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를 걸어 올라갔다. 아래로 투명한 냇물이 흐르는 짧은 다리 위, 봄이면 벚꽃으로 풍성한 공원지금은 연두색에서 올리브빛깔까지 다양한 색의 잎사귀로 물들어있었다, 식물 총 100종 내외의 작은 식물원을 지나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보다 더 높은 언덕을 오르면 평소 뛰던 로드워크 코스의 마지막이었다. 발목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었으나 햇볕이 내리쬐는 광선 탓에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왔다. 카게야마는 언덕 위에서 오후의 햇빛에 흠뻑 젖은 마을을 내려다봤다. 언덕 위의 풍향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턱 아래가 간질거려 카게야마는 그쪽에 맺힌 땀방울을 거칠게 닦았다. 오이카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기억하는 건 그의 집뿐인데도 낯선 풍경에 뒤덮이면 그를 찾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를 감싸 안은 미야기는 카게야마를 다시금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카게야마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을 찾은 건 몇 년 만일까. 외양은 바뀐 게 없지만, 바깥에 둔 조경물이 늘어있었다. 5년 전에는 없었던 벤치와 나무가 체육관 입구를 바라보는 형태로 한두 개 놓여있다. 카게야마가 벤치에 앉자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서 악취처럼 매미 소리가 퍼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한 햇볕이 눈두덩을 온통 잡아먹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만약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카게야마였다면. 카게야마는 금세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시작은 쿠니미처럼 갑작스러운 전화겠지.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다. 수신음은 멈추지 않고 울린다. ‘오이카와씨라고 등록해놓은 화면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 바빠?

……아뇨.”

여보세요라고 받지 않은 카게야마도 그답지만, 오이카와의 물음도 꽤 의외였다. 항상 카게야마의 사정과 상관없이 제 용건만 말하던 오이카와가, 입술 사이로 작게 내뱉듯이 묻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문득 그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이카와씨가 카레 사줄까.

. 좋아요.”

카게야마는 전화를 끊고 옷을 서둘러 챙겨입는다. ‘준비하면 나와라고 말한 오이카와는 대체로 늦는 때가 많았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도착했을 때 저가 없다면 이후 평생 오이카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되풀이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고’, ‘무의식적으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러낸 카레 집으로 들어간다. 평소 함께 식사하던 카레 집이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몇 번 헤맨 뒤에야 찾아낸다. 어색하게 한쪽에 자리 잡고 가게에서 나오는 뉴스 라디오를 들으며 입구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이내 오이카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평소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엷게 땀이 밴 피부에 흰 티셔츠와 면바지. 그의 뒤쪽으로 커다란 민트색 캐리어가 따라 들어온다.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바라보고, 오이카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자리 뒤쪽에 두고 오이카와는 턱을 괴며 미소 짓는다.

카레, 시켰어?”

아뇨.”

? 여기 주문이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와 부드럽게 굽힌 눈꼬리. 아무렇지 않게 카게야마 대신 돼지고기 카레를 주문한 뒤 오이카와는 전 됐어요라고 말하고 주문을 끝낸다. 카게야마는 그것에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웃는 낯이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아주 묘하게도 오이카와가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 놓인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아래로 내린 눈꺼풀은 살며시 젖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땀조차도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살포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린 뒤, 마치 주문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배구, 그만하려고.”

…….”

머리 한쪽 끄트머리에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그만두는 이유. 오이카와 토오루가 더는 걷지 않기로 한 길.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나이가 젊다고는 하지만 오래 하기도 했고. , 내 나름대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만큼 했어.”

, 맞아. 킨다이치 얘기 들었어? 이번에 승진했다던데.”

……킨다이치한테 전수나 받아야지. 이제 회사 다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얘기를 귓바퀴 너머로 흘려들으면서, 배구를 하지 않는 오이카와를 상상한다. 오이카와의 서브와 토스는 두 번 다시 발현되지 않는 신기루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카게야마 안에서 여전히 빛을 뿜으며 숨 쉬고 있는 오이카와의 서브는 오로지 제 안에서만 살아있겠지.

그래서, 은퇴는 다음 주쯤에 기사 날 거 같고, 감사합니다.”

주문했던 카게야마의 카레가 나오고 대화는 잠시 중단된다. 오이카와는 먹어, 라며 카게야마에게 카레를 권하고 카게야마는 입안에서 부서지는 카레를 억지로 씹는다. 오이카와는 잠시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웃음을 거두고 홍차빛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본다.

그래서, 미야기로 돌아가려고.”

…….”

카게야마는 잠시 먹는 걸 그치고 오이카와를 마주 본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만 살며시 올린 채 조금 전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자취집도 정리했어. 토비오쨩 다 먹으면 기차 시간 딱 맞을 거 같은데.”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핸드폰의 민트색 케이스는 먼지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는 이 곳카게야마가 있는 곳에는 그 어떤 흔적도 가져가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것조차도 카게야마의 생각에 불과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내려놓았다. 카레와 섞인 밥이 치아 사이로 돌아다닌다.

카레 안 먹어?”

먹어야죠.”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을 뜨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다시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묘한 식감이다. 상상 속이라 그런 걸까, 카레는 무미무취(無味無臭).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카레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깊고 그윽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반복적인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체취가 카레에 묻어 카게야마의 입 안으로 들어간다.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장 속에 골고루 퍼져 오이카와가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통해 저 자신을 분해한다. 오이카와가 남길 것 없이 두고 떠나는 모든 것은 카게야마의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서브, 향내, 홍차 빛 눈동자도 혹은 그의 무언의 감정도……….

오이카와는 이내 살포시 웃는다. 카게야마는 손을 멈췄다. 올라간 입술이 열리고, 하얀 치아가 보였다.

잘 있어. 더럽게 귀여운 토비오쨩.”

뒤에 놓았던 캐리어를 꺼낸 후 오이카와는 계산대로 향한다. 카게야마가 먹고 있는 카레 값을 계산한 후 문을 밀어 연다. 문 위쪽에 달린 종()이 두꺼운 여름 바람 탓에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로 빛이 산란된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입술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저의 입술에 집중한다. 무슨 말을 자아내야 할까.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오른쪽 눈에 들어가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체육관 뒤쪽으로 노을이 깔려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하늘 북쪽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누군가 베어 먹은 것처럼 반 토막 난 달이 불투명하게 걸려있다. 잠시 잠들었던 건지 몸이 벤치에 녹아내린 듯 축 늘어진 채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근처 나무에서는 매미 한 마리만 끊어질 듯 말 듯 울음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카게야마는 눈에 들어간 땀을 닦아내고 끈적이는 몸을 일으켰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기억 속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시야 어딘가에 박혀있다.

 

 

* * *

 

 

하얀 간판은 거뭇한 하늘에 잠겨 언뜻 어두운 하늘색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팻말은 아직 ‘OPEN’ 상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에 있던 여성이 카게야마를 보고 아, 작은 소리를 냈다.

저번에 우유빵 10개 사가신 손님이네요.”

.”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여기서 그렇게 많이 사가시는 분은 처음이라 놀랐어요. 맛있으셨나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집 앞에서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우유빵을 떠올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10개나 가져가셨는데 맛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랑 남편 둘 다 걱정했어요.”

그녀는 흘긋 옆을 바라봤다. 내부가 비쳐 보이는 유리 너머로 남성 한 명이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우유빵 남았나요?”

. 오늘은 방금 나온 건 아니어도 좀 남아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몇 개 드릴까요?”

“10개요.”

여성은 이번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기쁘게 웃었다. 봉지에 들어가는 우유빵 한 개 한 개를 볼 때마다 땅바닥에 짓이겨졌던 우유빵이 떠올랐다.

 

 

* * *

 

 

 

지평선을 감싸는 안개처럼 불그스름한 줄 몇 개가 바닥에 깔려있다.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여도 노을빛은 가라앉는 빛의 대기 속에서 부옇게 남아있었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진 않았어도 여름인걸 고려하면 꽤 늦은 시간일 것이다. 한번 땀으로 푹 젖었다가 눅눅한 바람결에 서서히 마른 티셔츠가 무겁고 거북하다. 오늘 밤은 열대야인 걸까, 오후를 장악했던 습습한 공기가 검은색 티셔츠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를 반대쪽 손으로 옮긴 후 어제와 같이 다시 한번 오이카와의 집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벨을 누르려던 움직임이 멈춘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번 꾹 다물고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제대로 걸려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뒤돌자 오이카와가 짙은 남색과 보라색에 뒤덮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

…….”

카게야마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도 적나라하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뒤 그의 옆을 지나쳐 걸어간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반무테 안경을 끼고 쪽빛 셔츠를 입은 오이카와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다. 카게야마는 저를 지나쳐가는 오이카와를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오이카와가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를 보고 다시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까지 바라본 뒤 몸을 떨었다.

…….”

오이카와는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오이카와의 입이 여전히 굳게 닫힌 걸 보고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오이카와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곤 팔짱을 꼈다. 가늘게 남아있는 노을빛이 가라앉으면서 구름의 경계선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녁이 몰려오기 전에 여러 빛깔로 채색된 하늘이 오이카와의 흰 피부에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두 번 여닫았다. 오이카와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유빵 봉지를 저번처럼 던지지도 않고, 카게야마에게 모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를동정하는 게 아니에요. 오이카와씨와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일본으로 돌아왔어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입을 닫았다.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이 뒷목에 맺힌 땀방울을 싣고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숨이 멈출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깊게 내뱉었다.

그것뿐이에요.”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안경이 콧잔등으로 내려와, 푸른 색조가 섞인 눈동자가 굴절되어 다양한 빛깔로 빛났다. 오이카와는 후,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꿈에서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멍청한 토비오쨩한테 오이카와씨가 친절히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선심 쓰듯이 장난스럽게 말한 오이카와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있지, 동정이 아니라고 하는 네 말이 바로 그거거든. 토비오쨩은 바보야?”

달 꼬리처럼 휘었던 눈동자가 사납게 구겨졌다. 오이카와는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말했지. 죽여버리기 전에…… 찾아오지 말라고. 잘 들어. 너를 죽인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거든. 바보 같은 토비오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가 왼쪽, 오른쪽, 오른쪽을 반 바퀴 돌고 다시 왼쪽천천히 선회하다가 이윽고 멈췄다. 그쳤던 매미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유빵 봉지에 손을 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붕대를 감아놓은 발목이 어두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실낱같던 오렌지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달이 충분히 빛을 뿜기 전 하늘의 장막이 덮이는 시간이었다. 봉지가 움직이던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목 신경섬유 사이에 통증이 퍼졌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보다 낮게, 눈언저리에서 울렸다. 오이카와가 만들었던 손등의 상처,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생긴 염좌. 오이카와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다고, 차가운 빛을 뿌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한 일? 그 이상? 배구를 영원히 못 하게 되는? 혹은 그보다 더한 일? 오이카와의 살인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카게야마의 구체적 절망인 배구를 앗아간다 해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아올 수 있을까. 느긋하게 우유빵을 10개 사서 그의 문고리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두고, 맛있다면 더 사오겠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과연 오이카와는 그랬을까.

카게야마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유일하고도 절대적 절망인 배구또한 오이카와에게도 그러할의 뒤에 남겨지는 게 무엇일지 카게야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게야마가 알 수 없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오이카와는 서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미야기 속에 녹아있었고 빵을 썩힐 만큼 작열하는 태양 빛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처음 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으리라. 카게야마의 속을 후벼 파고, 날카롭게 난도질하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집에 찾아올 동안 심어놓았던 본심을 들쑤셨다.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아득했다. 카게야마는 아찔해지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밤이 구름을 먹어치우고 카게야마의 몸까지 잠식했다. 카게야마는, 저는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오이카와를 멋대로 절망한 사람으로 규정지어놓았던 것인가.










 

세븐데이즈(Seven Days)

 

 




 

부상 때문에 로드워크를 하지 못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못했던 게 언제였을까. 1년 전, 작년 9월 즈음 유럽 챔피언십 결승전이 끝나고였나. 무리하게 리시브한 공을 바로 토스로 연결하느라 발을 접질린 게 원인이었다. 가벼운 염좌기도 했고 결승전이 끝나고 난 뒤라 적당히 쉬면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 2주일 동안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불만스럽게 동료들의 연습을 지켜봤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염좌는 한 번 일어나면 두 번, 세 번 연달아 일어나기 쉽다고 그 당시 단단히 주의받았다. 그 뒤로는 카게야마도 발목에 특히나 주의를 기울였으나, 이건 불가항력이다. 적어도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야야…….”

발목이 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면서 카게야마는 옷을 챙겨입었다. 시간은 오전 930. 미야기에서는 아무리 일찍 여는 의원도 10시부터다. 평소 습관대로 눈을 뜬 건 오전 7시 전후였으나, 그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건 카게야마를 괴롭게 했다. 대충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씻고 나오면 발목은 전날 밤보다 더욱 부어 있었다. 효모를 넣은 빵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발목 한 부위도 붉게 달아올라 발목을 돌리면 찌릿한 통증을 자아냈다. 통증이 박동처럼 퍼질 때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서늘한 눈동자,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카게야마의 귀를 난도질하던 낮은 목소리. 지금의 이 통증은 바로 그 오이카와가 선사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둔 오이카와, 미야기로 돌아온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지갑을 챙겼다. 발 한쪽을 절뚝이면서 문을 나서면 이탈리아의 여름처럼 눈 부신 태양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적어도 이탈리아는 이 정도로 매미가 많지는 않다. 대지를 뒤덮은 것이 태양이라면, 열기로 덥힌 공기를 진동시키는 건 수를 가늠하기 힘든 매미였다. 집에서 겨우 두 발자국 뗐을 뿐인데 목 뒤로 엷게 땀이 배어 나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매미의 무거운 폭음(爆音)이 카게야마를 짓누른다. 마치 미야기의 여름이, 미야기 땅이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것만 같다. 5년 전에는 이곳이 저의 땅이고 제가 숨 쉬는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흐릿한 기억처럼 풍화되었다. 카게야마가 살던 집이 있고, 카라스노 고등학교가 있고, 사카노시타 상점이 있었으나 미야기는 과거의 잔해와 함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돌아가.’

돌아가라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미야기 안에서 카게야마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인 오이카와가 저를 밀어낸다 해도, 카게야마는 가야 했다. 발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오이카와를 선명하게 떠올릴수록 통증이 날카로워졌다.

 

 

#2nd day

 

 

오래 입은 듯 빛바랜 백의를 입은 의사가 컴퓨터 화면에 X-ray 사진을 띄웠다. 정면에서 찍은 것, 옆에서 찍은 것 총 두 개였다. 얇게 뻗은 하얀색 뼈대가 검은 바탕 속에 선명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네요.”

그렇게 말해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의사가 대답을 원하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봤기에 조금 끄덕였다.

그런가요.”

붕대를 감아드릴테니 나흘 뒤에 교환하러 오세요. 많이 아프시면 진통 주사를 좀 놔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의사는 그래요? 의외라는 듯 반문한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의 발목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노르스름한 피부에 붉게 자리 잡은 부위는 오목하니 부어있다.

그나저나 어디 세게 부딪치셨어요? 웬만하면 이 정도는 안 되는데. 인대가 안 찢어진 게 다행이네요.”

.”

운동하신다면서요,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겨주세요. 특히 염좌는 재발하기 쉬우니까. 한 번 멀어진 관계는 수복하기 힘든 것처럼요.”

.”

의사로서는 드문 비유다. 카게야마는 멀어진 관계라는 표현에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오늘만도 벌써 그를 생각한 지 여러 번이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의사와 비슷할 정도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간호사가 볼록 튀어나온 볼살을 동그랗게 모으며 웃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 * *

  


 

붕대로 꽉 죄인 발목은 쉽게 구부러지지 않았다. 간호사는 목발 대여를 권했으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의원을 나왔다. 붕대를 감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 햇빛이 기세를 떨치는 오후였다. 카게야마는 드문드문 이어진 나무 그늘로 걸었다. 여름 바람이 푸르고 창창한 잎사귀를 건드리자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시원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배구 이외의 영역에서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라 해도 한 번 가봤던 길을그것도 몸이 기억하고 있던 길을잊지는 않았다. 벚나무 왼쪽으로 들어간 후 하얀 간판의 빵 가게를 보고 카게야마는 멈춰 섰다. 전날 밤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 상념 때문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빵.

우유빵이 있을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맛일까.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우유빵과 다른 빵이면 어쩌지. 혹은, 어쩌면입맛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숙 달걀을 얹은 돼지고기 카레를 좋아하지만 오이카와는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으니. 중학교 때 언뜻 전해 들은 우유빵에서 다른 음식으로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아는 건 우유빵 하나뿐이다.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다. 붕대를 감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목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곱게 구운 밀가루의 향기와 달콤한 우유 향이 미미하게 풍겨온다. 가게 안은 크게 3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하나는 케이크를 넣어둔 냉장고, 나머지 두 개는 크림빵 종류가 있는 선반과 크루아상 종류가 있는 선반이었다. 잔머리 한 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 한 명이 웃는 낯으로 카게야마를 반겼다. 계산대 옆 공간은 빵 굽는 과정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게 유리로 되어있었다.

우유빵 있나요?”

지금 곧 나올 거예요. 만들어진 건 있는데, 혹시 새로 나온 걸로 가져가실 건가요?”

뭐가 더 맛있나요?”

아무래도 새로 만들어진 거죠.”

그럼 그걸로 주세요.”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성은 계산대와 연결된 빵 굽는 쪽을 바라보며 우유빵 얼마나 걸려요?’ 물었고 그 안에선 곧 있으면요.’ 대답이 들려왔다. 여성은 대화 내용대로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반에 놓인 빵들을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팥빵부터 시작해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브리오슈까지. 아무래도 이탈리아에서 살다 보니 5년간 빵도 꽤 먹어보았으며 적어도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구분할 수준까지는 되었다. 그렇다 해도 빵과 밥,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카게야마는 단연 밥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카레와 먹기에는 밥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은 황토색을 띠는 것도 있었고 옅은 노란색부터 황금색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 위에 하얀 가루가 뿌려진 빵은 설탕 내음을 뿜었다. 카게야마는 벽면에 마련된 좌석을 바라보다가 그 바깥에 흐드러진 큰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가지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달라붙은 푸른 잎을 보이지 않는 햇빛이 쓰다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햇빛은 존재했고, 나뭇잎이 그 존재의 증인이 되었다.

손님, 우유빵 나왔습니다.”

, .”

다시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자 하얀 김을 피우는 우유빵이 가득했다. 안쪽으로 휘감긴 빵 모양이 독특하다.

몇 개 드릴까요? 방금 만들어서 제일 맛있을 거예요.”

“10개 주세요.”

?”

여성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유빵을 담으려던 손이 멈칫한다.

“10개 주세요.”

…….”

 

 

* * *

  


 

작은 빵이어도 10개는 확실히 조금 무겁다. 카게야마는 붕대를 감지 않은 쪽으로 우유빵 봉지를 들고 절뚝이며 걸어갔다.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뜨거우니까 비닐에 안 넣고 종이 봉지에 넣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여성은 정사각형 종이로 우유빵 10개를 각각 감싼 뒤 큰 비닐봉지에 넣었다. 카게야마는 이마에 벌써 흐르기 시작한 땀방울을 천천히 닦아냈다. 매미 소리가 더위를 부추겼다. 5년 동안 이탈리아의 여름에 익숙해진 몸은 눅눅한 습기와 찐득한 공기로 뒤덮인 일본의 여름이 버거웠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둔한 불편감이 붕대 안쪽에서 저릿했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에서 스며 나오는 온기로 손이 노곤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골목길을 꺾었다. 보이는 2층 주택 집 앞에까지 온 다음에야 카게야마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폐 속의 더운 공기를 내보내도 들어오는 건 똑같이 뜨거운 공기였다.

딩동전날과 마찬가지로 벨을 한번 눌렀다. 어제와 같이 문 너머는 조용했다. 카게야마는 조용히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가 집을 비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집에 있을 거라는 직감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문 너머에서, 카게야마라는 걸 알고서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라고. 항상 그의 생각을 추론할 때도 그랬듯이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단지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이카와씨.”

문 너머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른 뒤 우유빵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웃긴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우유빵 사 왔어요.”

방금 만든 거예요. 방금 만든 게 가장 맛있대요.”

…….”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집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앞서 생각했듯 그가 집에 있다는 건 순전히 카게야마의 근거 없는 느낌에 불과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맛있을 때 그가 먹었으면 좋겠다. 아쉬운 건 그것 때문이었다.

두고 갈게요.”

카게야마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어놓으려고 다른 한쪽 손을 마저 든 순간전날 문이 닫혔을 때와 똑같이 무서운 속도로 꽉 닫혔던 공간이 열렸다. 갈귀처럼 튀어나온 흰 손이 카게야마가 들어 올린 손을 낚아챘다. 카게야마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전에 다시 닫힌 문 안쪽에서, 강한 충격이 등과 머리를 가격했다. 문이 떨리면서 세게 울린 마찰음 뒤로 이어진 건 극심한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부딪친 뒤통수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불 꺼진 공간에서 검은 그림자가 카게야마의 가슴과 목 바로 아래 부근에 내려앉았다. 폐 속에 남아있던 숨을 내뱉은 카게야마는 그림자의 허벅지가 내리누르는 압박 탓에 원하는 만큼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좁아진 기도로 들어오는 건 색색이는 목소리뿐이다. 답답한 심장이 떨리면서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좀 전의 충격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그림자를 쳐다보면, 오이카와의 두 눈동자만이 검은 공간 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허벅지로 카게야마를 잡아 눌렀다. 전력질주로 산을 올랐을 때보다 폐가 조여왔다.

.”

오이카와는 사방의 벽이 진동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평소 그의 말투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려고? 나를 비웃으려고?”

무표정했던 얼굴이 몇 번 움직이더니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고, 그는 미소 지었다. 일그러진 눈동자, 미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린 입술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잘난 카게야마 토비오씨가 여기 와서 뭘 어쩌려고?”

, 이카와,”

원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끊어졌다. 성대를 움직이려 하면 그의 아래에 눌린 폐가 찔린 듯이 괴롭다. 숨을 내쉬면서 겨우겨우 이름을 부르면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손을 낚아챘던 손으로 오이카와는 이번엔 검은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앞머리에서 이어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다. 짧은 머리카락을 다섯 손가락 가득 쥐고 피부에서 뜯어낼 것처럼 잡아당긴 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본 오이카와의 피부는 희고 건조했다.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토비오쨩, 너무 멍청해서 일본어도 못 알아듣게 된 거야?”

……오이, 카와

말해, 토비오. 왜 오는 거야.”

……오이카와 씨,”

입술을 둥글게 만들고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그의 체중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 또한 지독한 통증이 되어 카게야마의 목울대를 갉아먹었다. 말해야만 한다, 카게야마는 하얗게 의식이 새는 도중에도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우유빵…… 지금 먹어야, 맛있대요…….”

……….”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안 좋은 표정을 짓더니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던졌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바지의 꺼끌한 감촉이 가슴에서 사라졌다. 급격히 들어오는 산소에 절로 기침이 나온다. 목 졸린 사람처럼 목을 붙잡고 헐떡이는 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카게야마는 일어날 수 있었다. 붕대로 감싼 발을 절뚝이며 일어나자 오이카와가 붕대를 흘겨봤다. 금세 고개를 돌리고 비웃듯이 이마를 찌푸린다.

우유빵이라고?”

. 여기요. 몇 개 사야 할지 몰라서 10개 정도 사 왔어요. 맛있으시면 더 사올게요.”

오이카와는 시선만 아래로 내리고 카게야마가 건네는 봉지를 쳐다봤다.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카게야마의 머리를 쥐어뜯던 손이 이번에는 봉지를 건네받으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 손에 들려있던 우유빵 봉지를 오이카와 쪽으로 조심스레 건네려고 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손이 봉지를 든 카게야마의 손을 튿어내며 우유빵 봉지를 채간 뒤 문을 열어 멀리 던졌다. 카게야마는 어두웠던 방 안에 가득 찬 태양 빛에 눈을 찌푸리며 날아가는 봉지를 바라봤다. 마치 슬로 모션과 같다. 불투명한 봉지는 햇빛을 받아 오색빛깔의 스펙트럼을 빛냈고, 봉지가 천천히 회전하며 우유빵이 하나둘 흩어져 나온다. 보드라운 갈색의 빵 사이 우유 크림이 태양 빛에 빛난다. 찢어진 구름과 청색 하늘, 매미 소리 진동하는 대기 속에서 우유빵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늘 어딘가를 날던 비둘기와 까마귀가 우유빵으로 날아들었다. 매미 소리를 압도하는 괴성을 지르며 그들은 땅에 떨어진 우유빵 조각에 얼굴을 처박고 쪼아댔다. 보이는 건 새의 머리뿐이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멈춰서 있었다. 빛이 비추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우유빵을 잡아챘던 손이 카게야마의 멱살을 잡고 비틀었다. 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이 목이 조여왔다.

잘 들어, 토비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위험한 빛깔로 빛났다. 태양이 더위에 녹아내리면 나타나는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내건 내가 사.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카게야마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카게야마는 답답한 숨을 얕게 내뱉으며 오이카와의 타오르는 눈동자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말하기 어려운 듯 시선을 내렸다. 이내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오이카와는 찢어진 초상화 같다.

다시 오면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내던지듯 밖으로 밀어붙이고 문을 다시 닫았다. 닫힌 문 너머는 조용하다. 갑자기 해방되어 벌떡이는 심장과 폐에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오이카와의 형형하게 빛나는 홍차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몸에 짓눌렸다가 억지로 밀쳐진 다리가 욱신거렸다.

카게야마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널브러진 우유빵 쪽으로 걸어가 엉망이 된 빵을 봉지에 하나둘 집어넣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크림이 손에 묻는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벌써 크림은 지방층이 분리되어 기름이 번득이고 있었다. 손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찌푸렸다. 우유빵을 담는 손등이 붉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봉지를 채갈 때 그의 손에 만든 생채기였다. 핏방울이 몽울몽울 맺혀있던 흔적이 이제는 굳어있다.

발목도 손등도 그가 남긴 흔적투성이였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남긴 건 통증뿐인데도, 카게야마는 통증조차 버거울 정도로 오이카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습니다. (부상은 아닙니다.)

* 세이죠 및 카라스노 캐릭터의 미래 날조, 오이카와 가족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센다이仙台駅 역을 나오면 매미와 빛의 세계였다. 내리쬐는 열기가 지면을 가른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 어딘가에 달려있을 매미떼는 그칠 줄 모르는 폭풍우처럼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얇게 입고 왔다고는 하나 본래 있었던 곳에 비해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이 흡수했던 아지랑이를 분출했다. 카게야마는 검은색 캐리어를 끌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쉬고 내뱉는 한숨이 모두 뜨겁다. 푸르게 빛나는 나뭇잎 사이의 햇빛조차 살을 가를 듯이 날카롭다. 5년 만에 돌아온 일본, 미야기현宮城県은 카게야마의 조각난 기억보다 달랐다.

 

 

 

#1st Day

 

 

 

길고 구불진 길과 곧게 난 주택가를 걸어가다 보면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가 나온다. 벚나무의 왼쪽으로 돌아들어가 다시 걸어가기를 5, 하얀 간판이 달린 빵 가게를 지나카게야마의 기억으로는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홍삼즙 가게였는데, 지난 5년 사이에 바뀐 모양이었다한 번 더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2층 주택 집. 바뀌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집이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갈 자신은 없었으나 다행히도 카게야마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캐리어를 문 근처에 놓아두고 벨을 눌렀다. 이름 팻말은 없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없었다. 카게야마가 기억하기로 오이카와의 집은 오이카와가 있다, 그 외에 생각나는 건 없었다. 카게야마에게 중요한 건 그 하나뿐이었으니, 그의 기억력이 나쁘다며 탓할 수는 없다.

문 너머는 조용했다. 목 뒤로 땀이 흐른다. 한번 멈췄던 매미가 재차 울고 있다. 매미 소리에 맞춰 햇볕이 더욱 열기를 더했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

문을 열고 나온 건 한 명의 남자였다. 거품처럼 가볍게 정돈된 홍차 빛 머리카락과 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눈동자, 햇빛 아래에서 더욱 빛나는 흰 피부. 카게야마가아마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가장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이었다. 이마와 양 관자놀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오이카와가 한 일은, 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을 빛과 같은 속도로 닫는 일이었다. 카게야마 또한 그에 질세라 서둘러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문 사이에서 묵직한 소리가 나고 윽, 고통을 참는 신음이 땀으로 젖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발목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고통이 살을 쪼개더니, 이어지는 둔한 통증이 왼쪽 다리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문 사이로 냉기 담은 눈동자만 내밀고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휴가를 받았어요. 일주일이요.”

그래서.”

오이카와씨를 보러왔어요.”

본인이 들어도 다급한 말투였다. 말소리 사이로 들리는 매미 소리에 귀가 아프다. 발목이 뜨겁게 불타는 것만 같았다. 이 발을 빼면 오이카와는 문을 닫아걸고 두 번 다시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도 바보는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차례 매미 소리가 지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

저랑 얘기해요.”

너랑 할 얘기 없어.”

, 안 치우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중얼거린 뒤 오이카와는 희번득한 눈길로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를 품은 말투였다.

자를지도 몰라.”

카게야마는 척수를 따라 흐른 생존본능에 의해 저도 모르게 발을 빼고 말았다. 그 순간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오싹한 공포 때문에 땀이 온통 식더니 이번엔 식은땀이 스멀거리며 배어 나왔다. 처음 보는 눈동자. 아니, 기억해보면 중학교 때 단 한 번 봤었던. 허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근원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 잔인한 말은 담은 입술. 카게야마의 안에서 지난 기간의 오이카와가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나 이때까지 그를 잊은 적은 없다. 센다이를 떠났던 지난 5년간도 그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카게야마는 5년간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메꿔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등에 녹아있던 식은땀도 증발해버릴 정도로 해가 뜨거웠다.

 

 



 

 

센다이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가는 동안 여러 곳을 지나왔지만 카게야마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바뀐 곳도 많았다. 기억에 남아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는 그대로였다. 시간 탓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몇몇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나타에게 듣기로 남자 배구부는 강호로 남아있었지만 카게야마가 아는 후배는 없었다. 애초에 제 바로 아래 연도의 후배도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적었다. 사카노시타상점 간판은 남아있으나 내부는 비어있다. 우카이 감독은 도쿄에 있는 모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채용되어 그곳에서 남자 배구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사와무라에게 듣기로 유명한 강호교여서 우카이 감독도 꽤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고.

센다이를 떠난 지 5. 24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탈리아로 떠난 지도 똑같이 5년째다. 소속 팀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냈던 5년 사이에 바뀐 장소도 많았지만 사람 또한 장소와 동일하게 가변적인 존재였다. 히나타를 비롯하여 사와무라와 아사히가 실업 배구팀에 소속한 건 그렇다 해도 스가와라가 교사가 된 건 카게야마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동시에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말아, 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심 카게야마는 그가 배구 외에 다른 일이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키타이치 시절의 사람들을 얘기하자면 이와이즈미는 도쿄도 경시청에 있고, 킨다이치와 쿠니미는 각각 다른 현에 있는 일반 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센다이에 아는 사람이라곤 이제 오이카와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인사해도 집에는 인기척이 없다. 카게야마는 불을 켜고 캐리어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5년 전에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방은 짐이 없다는 걸 제외하곤 침대나 책상 모두 그대로였다. 카게야마가 스카우트 제의를 승낙하고 이탈리아로 떠날 때 부모님도 함께 그쪽 직장을 구해 이동했던지라 센다이에 남아있는 건 빈집이었다. 빈집이라 해도 전기와 수도 모두 멀쩡하다.

노후는 일본에서 보내고 싶어.’

그렇게 말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집은 팔지 않고 아직 카게야마가의 소유였으며, 가끔 일본에 돌아오는 어머니가 청소해둔 덕분에 사람이 살 정도의 청결함은 유지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방 내부를 둘러봤다. 남겨놓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로 떠날 때 웬만한 건 버렸고, 물건에 특별한 감정을 두지 않는 카게야마였기에 들고 간 짐도 무척 간소했다. 그 탓에 5년이 지나 집에 돌아와도 무엇 하나 추억할만한 거리가 없다.

캐리어 짐을 정리하면서 카게야마는 일본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뜻하지 않은 일주일의 휴가는 갑작스러웠다. 계기 또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의 거의 1년 반만의 전화. 이탈리아와 일본의 시차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새벽 3시의 전화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그날은 특히나 고된 연습을 했던 날이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잔 날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날에 핸드폰 벨 소리는 못 들었을 테지만 묘하게도 눈이 떠졌다.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와 통화하는 건 여전히 낯선 일이다.

쿠니미지금 새벽 3시야.”

잠긴 목소리를 열심히 가다듬어도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 정도다. 핸드폰 너머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알아. 그래도 전화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어?

없는데…….”

안 그래도 타지 생활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는 안타깝게도 없었다. 만약 부모님이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밥은 매일 사 먹기 일쑤고 빨래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의 소식은 주로 히나타로부터 전해 듣는 내용과 이탈리아 배구잡지에 가끔 나오는 일본 배구 기사가 전부였다. 초기에는 가끔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으로 오이카와 토오루 이름을 검색해보거나 그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몇 번이고 봤었다. 최근에는 검색 한 번 해보지 않은 탓인지 이렇다 할 소식을 듣지 못했다. 히나타와 연락이 닿은 지도 반년이 넘었다. 세계적인 대회를 제외하면 일본과 이탈리아 배구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국내대회 시기도 다르니 그의 기사가 보이지 않아도 단지 그러한 시기상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 선배, 배구 그만뒀어.

…….”

배구 그만뒀어.’

나도 이와이즈미 선배한테 들은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

아버지.

자세히는 모르겠어.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미야기에 있는 건설회사 사장님이셨는데, 대대로 오이카와 가문 회사였나 봐. 오이카와 선배가 실업팀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대표 선발 시합 준비하고 있던 건 알지? 도쿄에 있다가 임종도 못 지키고 가셨나 봐.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 그걸 오이카와 선배가 알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들려오는 목소리가 우묵하게 퍼졌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귀가 가득 차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집중해서 들으려 해도 자꾸만 귓바퀴 뒤로 스쳐 지나가서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더욱 귀에 가까이 댔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목소리에 스며들어 카게야마를 방해했다. 배구 그만뒀어. 그 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건설회사는 안그래도 요 몇 년간 경영난이 있어서 그냥 팔고, 회사 취직하신다고.

.”

쿠니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카게야마, 힘주어 말하는 쿠니미의 목소리는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처럼 단호했고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관처럼 무거웠다. 새어드는 달빛보다 싸늘한 말이 귓속을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는 이제 평생 배구를 안 할 거야.

국가대표가 되지도 않을 거야. 회사원이 될 거야. 나 같은.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삶에서 배구는 사라지고, 그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의 경기가 끝나고 그가 했던 말과 함께.

이걸로 11패야. 너무 우쭐대지 마.”

오이카와가 졸업하고 도쿄로 가는 날 들었던 말과 함께.

따라오지 마, 바보 토비오쨩.”

그는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구부리고 벚꽃잎이 싸르라기 눈처럼 흩어지는 날에 오이카와는 등을 돌리고 떠났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새벽빛이 밝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거리를 따라 아침 로드워크를 다녀온 후 바로 소속팀 감독에게 전화했다. 다짜고짜 일주일 휴가를 달라고 떼를 쓰니 무어라 쓴소리를 강하게 들었지만 완강하게 고집하자 지금까지 못 받은라기보다 안 받은휴가를 전부 포함해서 받은 걸로 합의를 내렸다. 센다이로 가겠다고 하자 도대체 왜?’라고 당연하게도 부모님이 물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을 찾기 힘들었다. 오이카와 때문에? 와달라고 하지도 않은 그의 이름을 댈 정도로 카게야마는 뻔뻔하지 못했다. 사실 센다이에 돌아온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라면 카게야마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왜 돌아온 걸까? 오이카와와 다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욕구의 이유도 찾지 못한 채 무작정 오른 일본행 비행기에서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오이카와를 생각했다. 제 안에 녹아있는 오이카와는 생각 이상으로 농도가 짙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떠오를 정도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기억하고있었다.

카게야마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레 양말을 벗었다. 언뜻 보기에도 불그스름하게 퉁퉁 부어있다. , 짧게 혀를 차고 대충 찬물에 적신 수건을 대었다. 병원은 내일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예전에 딱 한 번 가본 정형외과 의원의 위치를 떠올리고자 노력했다. 침대에 조심스레 눕자 묵은 이불 냄새가 난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이불까지 깨끗이 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불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가웠던 눈동자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저는. 확실하진 않아도 오이카와와 이야기를 나누면 해결될 것이다. 불편하게 내려앉은 응어리도, 쿠니미와 통화한 후부터 부연 머릿속도 전부. 카게야마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저가 일본으로 돌아온 이유 중 가장 뚜렷하고 절망적인 이유를 하나 대라면, 다만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붉은빛을 쏘는 태양은 달과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며 움푹 팬 반달이 뜨고 있다. 12시간이 소요된 비행은 5년 전보다도 힘겨웠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이 중세 시대 존재했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마(睡魔)에 잠식되는 눈꺼풀을 닫으면서, 카게야마는 멀리서 매미 소리가 잦아드는 걸 느꼈다. 지금쯤 카라스노 고등학교 뒷산에는 반딧불이가 풀 사이로 빠져나와 꼬리를 빛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생각해보니,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건 우유빵이었다. 잠들기 전 누구나 흔히 그렇듯 쓸데없는 상념을 되풀이하면서 카게야마는 잠들었다.













LOVERS










새 햇빛을 집안에 맞아들인 지도 오늘로 8일째였다. 카게야마는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노란 바구니에 담았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오이카와의 민트색 티셔츠와 카게야마의 진한 청바지,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수건 등. 두 명이 쓰는 양이라 많지는 않았으나 카게야마 혼자 살던 대학생 초기 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한 사람 분량을 느끼고 만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거두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빤히 바라봤다. 이 바지를 입은 오이카와에게 안겼던 때가 잦다.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옷인지 아닌지, 그 판단 기준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토비오, 아직 멀었어?”

아뇨, 끝났어요.”

주방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 카게야마는 면바지도 바구니에 마저 집어넣고 말했다.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오면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 놓인 식탁에는 벌써 2인용 식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이자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도 고개를 끄덕인 후 들고 있던 바구니를 소파 옆에 놓았다.

오늘은 된장국이랑 연어 카르파쵸, 렌틸콩을 넣은 보리밥과 찹스테이크야. 얼마 전에 찹스테이크 맛있다고 한 게 기억나서.”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이카와가 하는 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식 이름이었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딱히 상관없었다. ‘찹스테이크가 맛있다고 한 기억은 없으나 눈앞에 보이는 고기와 피망, 양파를 섞어 조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은 적은 있다. 나는 토오루씨의 좋아하는 음식이라고는 우유빵밖에 모르는데. 카게야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 한마디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얼굴에 보이는 행복까지도 잊지 않으며 또 요리까지 해내는 오이카와는 정말 대단하다. 나의 말을 그가 기억해준다. 최근 카게야마가 알게 된 행복 중 하나였다.

맛있어?”

. 토오루씨는 안 드세요?”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으며 먹어야지부드럽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오이카와는 꿀을 넣은 홍차처럼 달콤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혀끝에서 달고 짭조름한 맛을 내는 찹스테이크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오이카와는 아,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 물 주는 걸 깜빡했네.”

……!”

형태 좋은 근육이 잡힌 팔을 들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들고 정수기에서 찬물을 떠서 카게야마에게 주기까지. 카게야마는 씹는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한 채 오이카와를 계속 쳐다봤다. 제 옆에 놓인, 눈사람이 그려진 물컵을 만지고도 믿기지 않는다. 차가운 감촉은 현실이었으나, 오이카와가 물을 떠다 준 게 현실이라고? 정수기가 저랑 더 가까워도 항상 물을 뜨는 건 카게야마의 역할이었다. 심지어 카게야마보다 물을 더 자주 마시는 건 오이카와였으니, 밥을 먹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일으키는 건 요리 담당인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 쪽이었다.

토오루씨가 다 먹을 건데 왜 제가 떠야 하냐고요.’

토비오쨩은 내 후배니까.’

몇 번이고 투덜대며 불만을 표했으나 능청스레 내뱉는 오이카와의 말에 입술을 내미는 게 최선이었다. 후배라는 호칭에는 아직도 약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키는 거의 비슷한 지점까지 자랐다 해도 저는 그보다 2년 어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목표 지점이자 이상적 존재였다. 중학교 졸업앨범만 봐도 그렇다.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는 앨범에 적힌 연도보다 카게야마의 앨범이 2년 뒤다. 그러했다.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선배였고, 어떻게 봐도 그를 이길 수 없는 건 카게야마였다.

결국 입을 삐죽 내밀고 갖은 불만을 꿍얼거려도 오이카와에게 물을 떠다 주는 건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떠다 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는 불현듯 불안이 스며들어와 조심스레 오이카와를 흘겨봤다.

왜 그래? 밥 안 먹어?”

아뇨, 먹을 거예요.”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카게야마도 그를 알게 된 지 햇수로만 10년이 넘었다. 어느 정도 위험 수준을 넘으면 카게야마도 무의식중에 느끼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번은 모르겠다, 가 솔직한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다시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입은 실내복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오버핏 형태의 터틀넥이다. 늘어진 소매가 그의 손등을 엄지손가락 아래까지 덮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오른쪽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사탕을 아삭 씹을 때 톡 터지는 달콤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오이카와와 살기 시작한 후로 그의 저런 표정을 보는 건 가끔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수룩한 감정이 귀 주변을 간질이는 건 어찌할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미야기로 한 번 내려오라고 그러시던데.”

, 들었어요.”

토비오한테도 말했어? 나한테만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일부러인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진 티를 냈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오이카와와 연락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카게야마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오이카와하고만 얘기할 리는 없다. 어머니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토비오를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이 첫 번째였다.

토오루씨가 편한 날에 한 번 오라고 하셨어요.”

역시 어머니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도 제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를 집어 올렸다. 아직 연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카게야마의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는 거의 소스만 남은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가운데에 놓인 연어 카르파쵸를 한 입 집어넣었다. 싱싱한 연어의 살결이 입 안에 돌았다.

토오루씨한테, 연락 자주 해요?”

어느 정도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오이카와에게 자주 연락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카게야마와 그다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를 따뜻하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카게야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오이카와를 통해 말할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에 개인적인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렌틸콩을 오물오물 씹으며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밤이 내려앉은 바깥은 조용했다. 1층에 자리한 집치고는 주변이 조용한 편이었다.

최근 전지훈련 어디로 갔다 왔지?”

“Y 현이요. 체육관 시설이 좋았어요.”

, 그곳. 나도 갔었지. 거기 실업팀의 P 세터가 유명하잖아.”

봤어요! 굉장했죠.”

너무 미끼를 잘 무는 거 아냐, 토비오?”

?”

아냐.”

오이카와는 다시 기분이 나빠진 건지 고개를 홱 돌렸다. 카게야마는 한번 갸웃하고 찹스테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열심히 오물거리느라 달아오른 입술로 말하면, 오이카와가 다시 푸핫 웃었다.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가지런하게 먹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되새기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넌 역시 어머니 쪽을 닮았어.”

그런가요?”

. 눈 쪽이 특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가로 손을 뻗어 보들 거리는 눈두덩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촉감이 눈가를 채운다.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쪽을 닮았다는 말을 흔히 들어보지는 않았으나, 오이카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게야마는 심야의 가로등 불빛처럼 말간 빛을 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토오루씨는 아버지를 더 닮은 것 같아요. 말로 하지는 않는다. 어느 부분이?라고 그가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이얗게 물결치는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속눈썹이, 달빛 아래서 특히 다정한 색으로 보이는 홍차 빛 머리카락이.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어는 적고 뜻이 협소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번 헤맸다.

토비오. 목걸이는 잘 메고 있어?”

오이카와는 표정을 고쳐 자못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목을 세로로 긋는 근육을 짚으면서, 그는 온기를 느끼듯이 손가락 다섯 개로 카게야마의 목을 감쌌다.

.”

카게야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얇은 은색 목걸이를 티셔츠 속에서 꺼냈다. 미색 조명등 아래의 은빛이 평소보다 반짝인다. 목걸이에 연결된 반지는 똑같은 은색이었고, 남성용이라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가느다랗게 반지를 감싸는 큐빅이 고급스러운 반지였다. 오이카와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서 손을 거뒀다.

잃어버리지 마.”

안 잃어버려요.”

당신한테 받은 건 무엇 하나, 특히 이건. 카게야마는 양 볼을 찬찬히 물들였다. 오이카와는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의 입을 바라보았다. 또 입가에 뭐가 묻었나 싶어 카게야마는 입 주변을 만지작거렸고, 오이카와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꼬리를 휘면서 웃었다. 누군가가 그의 눈에 초승달을 심기운 것 같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내일?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일감독님이랑 미팅 있는데요.”

그 순간 오이카와가 놀란 듯 눈동자를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멀뚱히 바라봤다. 입이 몇 번 여닫히더니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토비오. 진심이야?”

. 뭔가 위험하다. 카게야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자신의 눈치 없음을 이럴때면 통감하고만다. 처음 오이카와가 내일이라고 특정해서 물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서서히 의심으로 물드는 걸 눈치 보면서 카게야마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무지 기억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꼬물거리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 알아요. 알죠.”

당장 이 순간만은 모면해야 한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일단 입 밖에 냈다. 이런 게 통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만다. 너무도 당연한 귀순에 따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찹스테이크가 순식간에 얹힌 기분이다.

나 토비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싫은데.”

조금 전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냉기가 도는 목소리다. 날카로운 눈으로 카게야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낮은 음조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건 진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해야 한다. 무언가, 어떤 거든. 동시에 안된다. 이 순간 허투루 말했다간 적어도 석 달은 아웃이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더듬으면서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냉정하게 그 입술을 흘겨봤다.

됐어. 기억 안 나면.”

끝이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타임아웃의 종소리가 들렸다.

 

 

⟡ ⟡ ⟡

 

 

토오루씨.”

한 침대 안에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만 쳐다보길 세 시간째였다. 조심스레 불러도 오이카와는 대답도 없다. 연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은 평소보다 기온이 낮았다. 카게야마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시 한번 오이카와를 불렀다.

내일, 중요한 날이에요?”

글쎄. 토비오쨩에게는 엄청 중요한 날이겠지. 무려 감독님이랑 미팅하는 날이니까.”

저녁 식사할 때보다는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말 속에 씨가 박혀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모를 리는 없었다. 오이카와의 넓고 단단한 등이 한번 움직이더니 카게야마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잠시, 저가 날짜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날짜 하나하나에 민감한 오이카와가 미워지기도 했으나 이번은 저가 잘못했겠지.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삐져나온 입술을 밀어 넣고자 애썼다.

오이카와의 생일은 720일이고몇 년 전 까먹었다가 오이카와에게 이 주 동안 괴롭힘당한 후에야 겨우 머리에 입력한 날짜였다, 내 생일은 1222일이고. 두 사람의 생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날 이길래, 카게야마는 세 시간 동안 오이카와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카게야마에게 날짜란 말 그대로 날짜일 뿐이어서, 제 생일은 기쁘고 주변에서 축하를 받는 것도 고맙지만 그건 수많은 날 중 하루에 불과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좋고 특별하다면 특정한 날을 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카게야마에게 하루는 순간이었으며, 순간은 영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한기를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끔뻑거렸다. 머릿속에서 720일과 1222일의 숫자가 부유하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생일보다 중요한 날인가?

……토비오. 정말 모르는 거야?”

힌트도 줬다구? 토오루씨 할 만큼 했어.”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대답 없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하게 들리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카게야마의 코 고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입가에 고이기 시작한 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폭신한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더니 기어코 오이카와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믿기지가 않네, 정말!”

오이카와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카게야마를 강하게 노려봤다. 오이카와로서는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날이다. 카게야마도 꼭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억은 할 줄 알았는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못내 아쉬워서 오이카와는 더욱 둥글게 몸을 말았다.

 

 

⟡ ⟡ ⟡

 

 

카게야마는 살포시 눈을 들었다. 연한 녹색의 이불보가 보였다. 비슷한 색깔의 베개도. 다시 눈을 감고 그곳을 한두 번 손으로 짚어도 있어야 할 사람은 없다. 시각으로나, 촉각으로나 부재(不在)는 명확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이라 안 그래도 푹 꺼진 눈썹 사이가 더욱 좁아졌다.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는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는 먼저 집을 나선 후였다.

성가셔.”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척이나 깊고 풍성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카게야마가 보지 못하는 많은 걸 보고 예상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와 사귀고 함께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와의 인생을 선택한 건 제 인생 중 배구를 시작한 것 다음으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실감한다. 다만, 그것과 실제 삶에서 겪는 자잘 자잘한 충돌은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복잡하고 민감한 생각 회로를 느낄 때면 때로는 성가시고또 때로는, 버겁기도 했다. 예전 사귀던 시절에는 이럴 땐 며칠 안보는 게 상책이었는데. 며칠 안 보면 그만큼 보고 싶어지고, 불필요하게 빈자리를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것만이가장 큰 기쁨이 되고 말아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그를 이해하고자 다짐하곤 했다.

지금은 그와 같은 해결법은 쓸 수 없다. 관계가 변하면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 그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했을 때 어머니가 충고했던 말대로다. 알고 있니, 토비오?

누구나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면 그만큼의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

난 영원히 네 편이겠지만 그 안에서의 고통은 너의 몫이야.’

그래도 손을 놓지는 말렴. 손을 놓지 못해서 그 선택을 한 거잖아?’

맞는 말이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불가피하게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다.

 

 

⟡ ⟡ ⟡

 

 

감독과의 올해 들어 처음 있는 미팅을 마치고 난 후 카게야마답지 않게 서둘러 핸드폰을 들춰보았으나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흔히 보내곤 했던 배고파같은 라인 메시지 한 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겠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

하아…….”

뭐야? 싸웠던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어? 웬 한숨?”

A 감독은 짓궂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아뇨, …….”

굳이 말하면 연락이 없어서 한숨을 쉰 거지만. 굳이 무어라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죄 없는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A 감독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애인이랑 잘 해봐도움 되지 않는 조언과 함께 떠났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켜 A 감독에게 90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카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절로 답답한 기분이 들어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서둘러 풀었다. 기껏, 기껏 결혼해도 이 모양이다.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이해하기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는 되었다 해도 오이카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카게야마에게는 심각하게 난해한 문제였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카페의 통유리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정면에는 꽃가게가 놓여있다. 지나가는 여성 두 명이 온실 안쪽에 놓인 백합을 가리켰다. 꽃집 주인은 흰색 백합을 꺼내 파스텔 색조 포장지로 감싼 후 여성 중 한 명에게 건넸다. 눈꽃이 내려앉은 듯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은 여성은 백합에 코를 묻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은색 목걸이. 목걸이를 조심스레 꺼내면 함께 걸려있는 반지는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잃어버리지 마.’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받은 당일 이후로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본 적 없는 반지를 유심히 바라봤다. 바깥쪽은 세심하게 세공된 건지 매끈한 은빛을 빛냈고, 안쪽은 울퉁불퉁하게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건 숫자와 알파벳이었다. 이탤릭체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 새겨진 건, 아무리 영어에 약한 카게야마도 아는 이름이었다.

 

01. 09 Oikawa Toru

 

평생을 산다 해도 잊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 ⟡ ⟡

 

 

오이카와는 핸드폰에 등록된 유명한 카레 집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화면에 띄웠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오후 8시에 잡아둔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미처 움직이질 않는다. 카게야마가 어떤 날인지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예약 취소를 결심한 오이카와였지만, 감정은 무 자르듯 선을 긋는 생각과는 달랐다.

……멍청이 토비오.”

사귀는 중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비난을 툭 내뱉은 후,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혼하고 1. 오히려 동거할 때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혼은 아주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오이카와는 식장에서 카게야마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안정감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을 때는 서로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제 토비오가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거구나.’

카게야마와 밤에 몸을 얽어맸을 때보다도 더 깊게 카게야마를 피부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아마 앞으로도 평생 겪기는 힘들안위(安慰)를 실감했다. 오이카와에게는, ‘누군가가 평생 자신의 유일하고도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서 옆에 있다.’는 건 배구만큼이나 묘한 의미였다. 더욱이 그 누군가가 토비오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고작 두 살 어릴 뿐인 중학교 후배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누구도 수긍하지 못할 인생을 함께 걸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때의 저 자신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오이카와는 중학교 시절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짧은 앞머리와 작은 몸통, 배구공만 들고 다니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오이카와는 다시금 카게야마가 저의 곁에 있는 게 기적과도 같은 건 아닐까 느낀다. 카게야마가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고오이카와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택한 건 상상 이상으로 오이카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5년 전의 오이카와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까지 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카게야마에게는 연락 한 통 없다. 오이카와는 카레 집 전화번호를 다시 띄웠다. 예약. 취소해야 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자 노렸다는 듯이 카게야마에게 전화가 왔다. 뾰로통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바보라고 등록된 번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도적으로 10초 정도 기다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토오루씨. 어디세요?

일부러인 듯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게 또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대답하지 않았더니 카게야마가 토오루씨?’ 한 번 더 불렀다.

집에 가는 중인데.”

누구누구 씨 덕분에 예약했던 카레 집도 못 가고 말이야.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을 불만은 꾸욱 삼켰다.

집 앞의 M 공원에서 만나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핸드폰 화면에는 총 통화시간 31초만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전날 카게야마가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오이카와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건방지게 먼저 끊은 거야? 선배랑 전화하면서 감히?’

고작 2년 선배였던 걸로 생색내지 말라며 소꿉친구에게 몇 번이고 혼났지만 오이카와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2년이어도, 1년이어도 선배는 선배다. 카게야마는 저보다 2살 연하였으며 그건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생일도 내가 더 먼저고! 어느 모로 보나 카게야마 토비오가 이렇게 건방져도 된다는 법은 세상천지에 없다.

또 우유빵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기만 해봐.”

뻔하지, . 오이카와는 이를 갈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봤자 카게야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그는 오이카와의 손바닥 안이었고, 오이카와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결국 카게야마가 부르는 대로 가고 마는 게 무척 뻔한 두 사람의 관계였다.

 

 

⟡ ⟡ ⟡

 

 

두 사람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M 공원은 평소 두 명의 좋은 산책로였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도, 한여름의 태양이 흙을 달구는 대낮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이곳을 함께 걸었다. 결혼하고 난 후 초기에는 특히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꼭 이곳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꼭 이곳을 걸었고, 약속하지 않아도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그래선지 이른 저녁 시간이어도 M 공원의 내부는 익숙했다.

오이카와는 풀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어선지 꽃은 모두 시들어있고 벌레들도 고요했으나 상록수는 똑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해가 저문 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이런 시간대는 나무들이 초록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옷을 바꿔입는 때였다. 카게야마는 최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상록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었다.

오셨나요.”

오이카와가 가까이 가자 몸을 일으키고 작게 말한 카게야마의 코와 귀가 온통 새빨갛다. 오이카와는 눈을 끔뻑인 뒤 그의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얼음물에 얼린 나무껍질처럼 차가웠다.

뭐야,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한 시간쯤이요.”

나한테 전화한 건 10분 전이잖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카게야마는 시선을 오이카와의 발끝으로 옮겼다. , 이라고 반문하기 전에 카게야마가 손을 들었다. 윗단추 두 개가 풀린 제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빼낸 카게야마는, 달려있던 반지를 꺼낸 후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토비오,”

오이카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카게야마는 딱 들어맞는 반지를 바라보고 입김을 후 내뱉었다. 하얗고 투명한 입김이 두 사람 사이의 온기로 녹아 사라졌다. 오이카와의 왼손 약지에 걸린 차가운 은색 감촉. 오이카와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듯이 놀라며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의 귀와 목, 얼굴이 살며시 물들었다.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소행성처럼 반짝였다.

토오루씨가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결혼할 때.”

카게야마가 왼손으로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찬 공기에 식어있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안쪽에 새겨진 이름이 반대예요’, 제가 말했더니.”

토비오.”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으나 아직 말하지 말라는 듯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더니, 언제나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없는 사이니까 쉽게 잊을 수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둘 다 운동선수인 데다가, 동성혼이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반지를 계속 끼고 다닐 순 없다. 물론 주변 사람의 눈길을 신경 쓸 정도였다면 아예 이 결혼을 선택하지도 않았겠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약속을 맺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았다. 반지와 목걸이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손가락과 거울을 봐야만 비치는 목은 엄연히 되새김질의 정도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다. 두 사람의 약속은 타인보다도 쉽게 허물어지는 토대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1년이 지나 다시 결혼했던 그 날이 되면 그 날만큼은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자고. 서로의 주인을 찾아주는 의미로. 아직, 반지는 서로에게 있다는 뜻으로.”

오이카와는 짙은 보랏빛 하늘 아래 제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추위 때문인지 조금 파래진 입술을 못난 모양으로 내밀었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지만1년이 벌써 지났네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잠시 망설이는 듯 눈동자를 살며시 내렸다가 이내 곧은 표정으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어느새 비슷한 정도의 온도로 따스해져 있었다.

토오루씨랑 결혼하고 1. 솔직히 동거할 때와 다른 점은 잘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가 토오루씨로 달라졌다는 것과 반지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래도, 저와 토오루씨만의 날이 생겼다는 게토오루씨가 주신 반지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 토오루씨가 제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그 목에 걸고 다닌다고 생각하면조금, 흥분돼요…….”

마지막 말을 뭉그러뜨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카게야마를 보고 오이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가 온통 불그스름하다.

뭐야, 그게. 토비오쨩 뭔가 변태 같은 말했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째려보곤 입술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무어라 꿍얼거린다.

그냥, 그렇다고요.”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한번 피식 웃은 후 잠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고요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동이다. 다만 괜찮다. 카게야마가 옆에 있으면 오이카와는 가끔 심장병이 있는 건 아닐까 착각했다.

.”

오이카와는 제 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를 빼내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오이카와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만들어진 반지답게 꼭 들어맞았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같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1년에 한 번은 주인에게 가야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또렷한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다. 카게야마의 깊은 눈동자는 오이카와가 몇 시간이고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신비(神祕)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다시 한번 세게 마주 잡더니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차피 전 항상 토오루씨와 함께 있으니까, 반지도 토오루씨가 갖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언제나 같이 있잖아요.”

조금의 차이를 두고 두 번 대답한 카게야마는 빨간 코에서 보얀 숨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우린 홍차처럼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그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토비오 너, 갈수록 건방져진다.”

? 뭐가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은 후 고개를 돌려 쇄골과 목 사이 연한 살결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우왓?! , 하시는 거예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나려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이카와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이어서 동글 튀어나온 목젖을 앙 깨물자 카게야마가 공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 ,”

느꼈어?”

오이카와가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올린 오이카와를 노려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변태는 그쪽이면서.”

? 한 번 더 해 달라구?”

낮게 속삭이며 오이카와가 야릇하게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물린 목젖이 따끔거린다. 오이카와가 선수 치기 전 그의 움직임을 막듯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찬 기운이 이슬처럼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토오루씨 냄새나요.”

향수 냄새?”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의 온기로 어깨 한쪽이 온통 햇볕에 닿은 듯 뜨거웠다.

토오루씨의 냄새요.”

카게야마가 코를 묻은 채 강하게 들이마셨다. 살포시 눈감은 카게야마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차분히 눈꺼풀을 내렸다. 입꼬리가 보드랍게 올라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토비오쨩밖에 없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근육을 지지한 오이카와의 왼손에서 은색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토비오.”

?”

카레, 먹으러 갈까.”

.”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볼이 반딧불처럼 환하게 빛났고 입가가 꼬물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손으로 문지른 후, 그곳에 입술을 대고 온기를 느꼈다. 딱 적당한 온도로 끓은 카레와 같은 온기였다.

 

넌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 쪽이.’

흐르는 은하수처럼 푸른 눈동자, 소행성처럼 반짝이는 빛깔을 보면서 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지 나는 알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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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아본 바로는 일본 몇몇개의 구에서 승인한, 사실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파트너 제도에서 어느 한 명의
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조항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인게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흡수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부동성은 두 사람에게 맞지 않겠다 싶어
결혼했음에도 성은 그대로입니다 :)





  

** 카게야마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Happy Birthday, Maybe.

  



 

 

다녀올게요.”

, 잠깐만. 토비오. 손수건 챙겼지?”

.”

카게야마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남색 무지의 손수건은 작년 생일 때 그가 선물 받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조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잠깐만, 토비오. 정말 성질도 급하네.”

?”

왜긴 왜야? 오늘 몇 시에 들어오니?”

타박하는 말투였으나 얼굴에는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여성은 카게야마의 가쿠란 윗부분을 몇 번 다듬었다. 가쿠란에 붙어있던 하얗고 까만 먼지가 여성의 손끝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른다.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왼쪽 위에 뒀다가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오이카와 선배랑 만나고 올 건데.”

토오루랑? , 집에 데려오지 않고. 같이 엄마가 만든 케이크 먹자.”

여성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토오루라고 부르는 여성의 탓인지 카게야마는 볼을 살며시 물들였다. 카게야마와 여성이 사는 집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발걸음한 건 적지 않다. 가장 최근은 일주일 전 즈음이다. 그 날 여성은 카게야마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반숙 카레를 만들었고, 오이카와는 동백꽃처럼 환하고 선명하게 웃으며 맛있다고 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세차게 흔들었다.

됐어. 오늘은.”

오늘이니까, 가 아니고?”

여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카게야마는 잠시 다시 생각한 후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됐어. 괜찮아.”

그래, 알았어.”

여성은 카게야마처럼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그 손길을 따라 잠자코 몸을 숙였다. 여성의 가느다란 양팔 안에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가 쏙 담긴다. 여성은 저의 어깨보다 넓은 카게야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게야마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렸다.

토비오. 열일곱 살 생일 축하해.”

.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크겠지? 이제 엄마가 안아주지도 못할 수도 있겠네.”

내가 앉으면 되니까.”

그렇게 작진 않아!”

어쩌라는 걸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머니는 타박하듯이 카게야마의 등을 한번 강하게 때렸다. 어릴 때는 배구공 겨우 들었으면서! 투덜거린 후 카게야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성에게 묻어있는 계란찜의 단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아침밥을 다시 먹는 기분으로 여성의 등에 팔을 둘렀다. 보슬보슬한 밥과 포동거리는 계란찜, 고소한 된장국과 아삭거리는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십칠 년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올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 토비오가 엄마 아들이라 엄마는 정말 행복해.”

…….”

카게야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겨울바람이 카게야마의 등을 둘렀고, 어머니는 따뜻하게 보호하려는 듯이 바람에 휩싸인 넓은 등을 더욱 힘주어 감쌌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다녀와. 생일 축하해.”

여성은 카게야마의 차가워진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그 한쪽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여성의 온기로 촉촉하게 젖어 든 심장이 무거워서 서둘러 발을 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카레랑 케이크 만들어 놓을게. 조심히 다녀와.”

여성은 손을 놓기 아쉬운 듯이 카게야마의 손끝을 조금 세게 쥐었다. 그 손조차 문밖을 나서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며 살며시 놓고, 카게야마가 나간 현관에서 등을 돌렸다. 마음이 분주했다. 평소보다 정성스레 카레를 만들고, 카게야마가 맛있게 먹을 케이크를 구워야 한다. 올해는 레몬 필이 들어간 초콜릿 시트 케이크다. 겉면은 진한 다크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식용 금가루를 몇 개 올린 후 설탕 과자로 만든 작은 배구공을 올려놓으면 끝이다.

 

카게야마 토비오 열일곱 살의 생일은 오늘뿐이다. 여성은 그렇게 생각하면 유독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카라스노 선배들한테 아주 격렬한 축하를 받았나 보지?”

오이카와는 냉소를 지었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는 그의 뺨을 온통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바람 때문에 푸석해진 머리를 한번 거칠게 올리고, 오이카와는 후가느다란 입김을 뱉었다. 카게야마는 그 앞에서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양손 가득 들린 여러 선물 봉투에 꽂혀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치를 몇 번 살피다가 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꾸 못 가게 하셔서.”

그래서, 카라스노 선배들이 그 사랑스러운 후배인 토비오쨩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오이카와씨가 여기서 30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도 못 받게 하고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양손에는 선물 바구니를 들려서 이제야 겨우 내보냈다는 거지? 오이카와씨가 이렇게 추운 영하 5도의 날씨에 가로등 아래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겨우 토비오쨩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이카와는 천천히, 또박또박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살며시 들었던 고개를 푹 숙여 이제는 거의 90도 각도로 몸이 접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와중에도 카게야마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선물 봉투를 보며 몇 번 더 골려줄까 하다가 이내 한숨만 폭 내쉬었다.

됐어. 이런 날 너한테 화내서 뭐하겠어. 이거나 받아.”

? 이게 뭔데요?”

지금 네 양손에 들려있는 걸 보고서도 파악이 안 돼?”

오이카와가 건넨 건 아주 작은 상자였다. 손바닥 안, 핑거 푸드(finger food)마냥 조그만 모양 탓에 카게야마는 처음엔 오이카와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더한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야 카게야마는 손에 들린 짐을 내려놓고 오이카와의 선물을 받아들 수 있었다.

이게 뭔데요?”

눈을 빛내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까맣고 아름다웠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이 달빛 아래에서 고운 빛깔로 빛났고, 오이카와는 그 볼을 한번 쓰다듬으며 달을 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열어봐도 좋아.”

오이카와 선배 앞에서요?”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덧붙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마치 본능과도 같이 오이카와에게 다가서고 그 입에 입술을 마주쳤다. 소금 결정과도 같은 한기가 입술에서 입술 사이로 전달되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살며시 떨어질 때 즈음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카게야마의 뒷목을 조심스레 잡고 당겼다.

…….”

…….”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 키스. 여느 날처럼 지분거리지도 않고, 쪽 소리를 내지도 않고, 마치 그 입술이 있을 자리는 이곳이라는 것처럼 두 사람은 입술의 온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한쪽 손으로 오이카와의 볼을 더듬었다. 차가웠던 살결이 순식간에 보드라운 열기를 흡수한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잠시 뗐다가 오이카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이카와는 심기가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볼에는 왜.”

차가워서요.”

너 때문이잖아.”

그래서예요.”

…….”

그리 기분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핀 뒤 살며시 입술에 키스를 배달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겹쳐진 입술 때문에 카게야마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야 했다. 오이카와의 부석한 앞머리가 눈꼬리를 간지럽힌다.

토비오.”

…….”

선물. 열어봐.”

오이카와는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귓속을 침식했다. 따뜻하고 농밀한 혀가 귓바퀴를 천천히 타고 흘러, 카게야마의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알았으니까, 귀는 하지 마요.”

?”

……어쨌든요.”

카게야마는 험상궂게 노려본 뒤 오이카와가 준 작은 상자를 바라봤다. 연한 민트색 상자에 검은색 리본은 깔끔하다. 겨울에 어울리는 색조였다. 리본을 끌른 후 상자를 열면 달빛에 반사된 은색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그걸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두 눈동자의 방향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뭔데요.”

……저기, 토비오쨩?”

이거,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으로 뒤덮였다. 오이카와는 조금 놀란 것처럼 눈동자가 커져선 카게야마의 낯빛을 살폈다. 오이카와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큐빅이 사선으로 장식된 은색 반지였다.

생일이잖아.”

생일에 왜 저한테 이걸 주시는데요.”

…….”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그렇게 보신다는 건 알아요.”

무슨 소리야?”

카게야마가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그를 부르며 카게야마의 볼을 감쌌으나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드럽지만 완고한 움직임이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녹아있는 두 귀가 붉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오이카와의 옆자리를 스쳐 갔던 여자 선배들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언제나처럼, 그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저를 대하지는 말아주세요…….”

……….”

헤어져도 괜찮으니까, 오이카와 선배한테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있고 싶어요.”

왜 헤어지는 게 되는 건데. 누가 헤어진다고 하는데.”

오이카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카게야마의 왼쪽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의 약지에 은색 반지를 강하게 끼워 넣자 아야, 아파요! 카게야마가 불만을 토로했다.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오이카와는 반 오기로 카게야마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거의 끝까지 들어간 은색 반지는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튼튼한 뼈대에 걸렸다. 은색 반지가 걸린 카게야마의 약지, 그 왼손을 오이카와는 강하게 쥐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닿았던 볼로 끌어당긴 후 손을 감싸듯이 붙잡는다. 눈썹을 올리고 날카롭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오이카와는 내뱉듯이 말했다.

말해두는데, 토비오쨩이 사귀자고 한 거니까. 먼저 시작한 건 너여도 끝내는 건 나야. 알겠어?”

무슨 말이에요?”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는 카게야마 토비오고,”

오이카와는 저가 붙잡은 카게야마의 약지에 소리 내 키스했다.

아니, 내 인생에 토비오쨩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게 더 문제라니까.”

내가 왜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데.”

오이카와는 끝에 거의 화까지 내면서 카게야마의 약지를 작게 깨물었다. 아얏, 반지를 끼울 때와는 다른 형태의 신음이 카게야마의 얇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신음에 만족한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을 지었다.

생일 축하해, 토비오. 내년의 너도 나한테 주면 돼.”

……지금도 오이카와 선배랑 있잖아요.”

그래. 네가 매년 새로 태어날 때마다, 나한테 고백했을 때처럼 내 손을 잡아.”

왜 자꾸 그때 얘기를 하세요.”

토비오가 말한 거니까. 토비오쨩이 말한 건 기억하고 있어.”

오이카와는 설탕을 뿌리듯이 부드럽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아침, 여성과 끌어안았던 기억을 회상했다. 여성과의 기억이 달콤한 향내를 풍긴다면, 오이카와는 그 자체가 달콤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손을 빼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오이카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몇 번 비비적거린 뒤 기댄 채로 잠시 조용히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를 만난 순간부터 오이카와 선배의 토비오예요.”

알아.”

앞으로도요.”

그래.”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진 않지만 또 입술을 내밀고 있겠지. 오이카와는 눈에 선하게 떠올라 그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카게야마의 핀잔 섞인 불만이 딱딱한 오이카와의 어깨에 닿았다.

왜 내가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토비오쨩.”

?”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는 깊고 그윽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보고 있어. 네 입술에 키스하고 있어. 너를 안고 있어.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물론 그의 행동은 더욱 격렬하고 난폭한 때도 잦았다. 오이카와는 입으로는 달콤함을 자아내고 혀로는 열을 돋우는 사람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오이카와의 입술이 강하게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덮쳤다.

오이카와 선배, !”

키스에 연이은, 살이 찢기는 고통에 카게야마는 무심코 오이카와를 밀어냈다. 오이카와의 어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멀어진 곳에는 잇자국으로 낸 상처가 남았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 피가 몽골 올라온 상처가 붉다.

뭐하시는 겁니까!”

반지 같은 거야.”

반지는 끼웠잖아요.”

내가 왜 반지를 줬는지 모른 벌.”

눈처럼 순수하게 웃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상처 난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

어디 저 멀리의, 나와는 상관없는 A 씨 정도였으면 좋았을텐데.”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했다. 본인은 전혀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말하면서, 눈가를 찌푸린 오이카와는 겨울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오이카와 선배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닌 A 씨였다면 좋아했을까요.”

내가 사귀는 건 토비오쨩인걸.”

…….”

카게야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오이카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오이카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꼬리가 불쑥 올라간 채로 카게야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네가 A 씨였다면 좋아했어도 사귀진 않았을 거야.”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기준이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그런다는 건 알아요. 일부러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래? 많이 컸네.”

날카롭게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모래 속을 더듬듯이 헤집었다. 텁텁하고 더운 모래였다. 겨울, 영하의 온도에 사막과도 같은 뜨거운 모래는 눈 끝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를 모르는 A씨가 될 생각은 없다. 그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가 될 생각도 없다. 카게야마는 왼손 약지에 파고든 반지의 압력을 느끼면서, 저가 어쩌면 오이카와에 한해서 욕심쟁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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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일 축하글로 쓰려고 한 게 있었는데 너무 생일과 맞지 않는 글이기도 했고
심하게 제 개인적인 글이라.. 급하게 카게야마를 축하하는(?)글을 썼어요.
여러모로 많이 모자르고 부족한 글이 되었습니다만 카게야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만 있다면
다 괜찮지 않을까요?(아님

오이카와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 사망 소재 있습니다.

- 모브가 주인공입니다만 오이카게입니다.

- 글에 나오는 모든 의학 지식은 의학적 사실 및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전등 몇 개는 약한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교체할 때가 된 건지 계속 깜빡였다.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둘러싸인 방은 조금 추웠다. ?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구석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홀대와 수액. C대 병원 로고가 박혀있는 환자복. 병원? 그 외 몇 가지 단서가 이곳이 병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문, 손잡이가 없는 창문 등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라니? 양쪽 손을 들어 보면, 낯선 굳은살과 손금이 보였다. 내 손이 이랬던가? 아주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방 한쪽에 세면대와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미닫이문이 열렸다.

, 일어나셨나요.”

백의를 걸친 남자 의사 2명과 백의를 걸치지 않은 한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 두 명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둘 중 한 명은 키가 크고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썹 숱이 적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음하며 운을 띄웠고 운을 띄울 때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백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수많은 종류의 펜과 펜 라이트 등이 정돈되지 않고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주머니 아래 명찰을 보니 그의 이름은 하야마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의사는 인자한 미소 때문인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살이 두껍게 쌓인 양쪽 볼과 턱 아래는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힘겹게 셔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남성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깊게 우린 홍차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반짝거리며 그 색을 바꾸었고, 곧게 뻗은 큰 키와 몸에 좋게 붙은 근육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의사 두 명과는 거리를 띄우고 미닫이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의사 둘 중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하야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

그의 말을 무시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원치 않게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지, 아닌지 조금 망설였다. 아주 잘생긴 미남미닫이문 옆에 서 있는이 차분한 표정으로, 동시에 꿰뚫을 것처럼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물빛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 짙은 남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 걸친 코트는 끈이 없고 허벅지까지만 내려오는 얇은 재질이었다.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조합이었다.

하야마는 내 무언(無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고 나를 마주 봤다.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였다.

많이 어지럽진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다른 증상은요?”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이라고 답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의 목소리에 더 큰 의문을 느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성인 남성의 목소리라기보다 조금 가볍고, 원한다면 가성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목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야마는 흡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살이 적은 얼굴 전면에 근육이 경련하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힘겨운 듯 금방 미소를 풀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왼쪽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바라봤다. 수액은 크기가 컸고, 무어라 적혀있었지만 앉아있는 상태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야마는 다시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의 안경이 다시 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뇌 이식 수술이요.”

뇌요?”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꼼꼼히 주변부를 만져보자 무언가 수술 자국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뒤통수에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신경 다발의 이식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12중 추돌 자동차 사고였죠. 당신의 몸은 아주,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가슴 아래쪽이 아주 납작하게 구겨져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만은 온전했죠. 뇌가 살아있으니 숨도 쉬고 있었고요. 기흉과 출혈로 호흡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뇌에 영양을 공급한 건 사실이죠.”

하야마는 말을 마칠 때마다 숨을 고르고 안경테를 올렸다. 나는 남성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하야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자 구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1층 혹은 2층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환의 사이로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계절. 날씨. 기억이 날 듯 말 듯 모호했다. 시린 이의 계절. 하늘로 높게 치솟는 연기의 계절. 바람이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들이대는 계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야마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기존에 뇌사로 사망 시 기증을 원한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에요.”

기증, 수술이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 저기.”

부끄럽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증, 수술, 뇌사 등 단어 자체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들어오기 전 봤었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당신은 젊었고, 수술을 서두른다면 뇌 기능이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말 그대로 몸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씨는 머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을정도로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고, 하야마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는 다른 의사 한 명과 남성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저들과의 눈빛 대화를 끝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빛 눈동자의 남성은 이제 살며시 웃고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가 인사와도 같다는 듯이 남자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현재 당신은 기증자인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쓰고 있습니다. 의족이라 말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의미죠. 뇌 이식 수술 기술은 현재 항생제 및 면역억제제만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하야마는 고개를 강하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그는 얇게, 아주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몇 번 뒤적거렸다. 하야마가 서류를 볼 사이 다른 의사 한 명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언어에 문제가 없으신 걸 보니 뇌 기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함 한 번 알려주시겠습니까.”

성함성함이요?”

성함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성함. 이름. , 나의 이름. 난 누구인가. 내가 누구지. 지금 현재,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이 더러운 기생충은, 뭐지. 심장 고동이 거세지면서 더욱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고조되는 박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대를 튀어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남성의 깊은 눈이 하지 말라는 듯 강한 눈동자로 나를 꽉 붙잡았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제 이름, 말이죠.”

. 그렇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의사 한 명이 천천히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던 하야마도 나를 바라봤다. 모두가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걸걸한 사막처럼 모래알갱이가 씹히는 착각도 들었다. 다만 나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이자 입술이었다.

그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지. 무엇이었을까. 낯선 목소리를 가진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입술과 목을 빌려 이름을 빚었다.

스도 하루나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 강하게 소리를 냈다.

 

 

 

 

 

 

 

Lost in Memory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거의 보름 가까이 신세 진 병원 입구를 나서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하늘의 계절이었다. 지금까지 지냈던 15층 병동을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 병동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야마도 만날 일이 없었다. 외래에서는 카노우 교수님을 만날 테니까당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분이 교수님이란 걸 내가 안 것은, 일주일이 지나 그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였다. 두툼한 잠바를 챙겨 입어도 목이나 허리, 발목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겼다. 스도는 얇은 입김을 새어 보내고 다리를 옮겼다. 남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원 수속 끝났어?”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을 한 그는 첫날과 비슷하게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밝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리는 코트는 그의 큰 키와 퍽 잘 어울렸다. 머리 한쪽을 빗어 넘기고 왁스로 고정한 그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났다.

. 방금요.”

첫날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자주 스도의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스도는 그와 대화를 하며 병원 생활을 적적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대부분은 기억과 관련한 상기 훈련이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의사 몇 명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가지였다.

이름은 스도 하루나, 현재 22살로 미야기 현 K 대학교에 재적 중이었다. K대학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도는 학생증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기에, 스도는 일부러 거울을 보진 않았다. 스도는 기억 훈련을 지속한 뒤 그가 여동생이 한 명 있는 4인 가족의 장남이면서, 2년 전 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그 이후 또 이런 끔찍한 사고에 휘말리다니 운도 없다며 스도는 가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대학을 1년 휴학한 뒤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까.”

남성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넓은 어깨는 사진으로 봤던 그의 코트 위 모습보다 더 넓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항상 사진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 눈동자의 빛깔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스도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발음해서일까. 예쁘고 앙증맞게 들리는 그 이름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스도는 그가 없을 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고는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현재 도쿄에 있는 A대 졸업반 4학년이다. 배구로 유명한 A대 안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인 세터로 꽤 유명한 사람인지 병원에서 스포츠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면 배구란에 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실려 있기도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T대 상대로 압도적 센스 자랑

“A대 배구부 공식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역량 분석

 

스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그가 고교 3년 동안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과 어떤 스파이커와도 금방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걸 스도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는 낯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저가 그의 웃는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도는 입술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만 웃은 뒤 기사 끝쪽에 달린 조막만 한 문구를 보았다.

 

뛰어난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 전격 분석 :: 월간 밸리 다음 호 게재 예정!”

 

지금의 스도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기사였다. 해당 홍보 문구가 달린 월간 밸리가 이번 달 잡지이니 월간 밸리 다음 호에 스도가 원하는 기사가 실릴 예정이었다. 스도는 서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도가 다시 잡지를 뒤적이며 오이카와의 기사를 찾는 순간 적당한 세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콩콩 뛰는 심장 때문에 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을 옷차림치고는 지나치게 얇게 차려입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한번 바라보고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찬바람의 꼬리가 잘린 덕분에, 방은 비슷한 정도의 온기를 유지했다. 오이카와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스도의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스도는 목을 가다듬고 오이카와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어 곱게 접고 입김을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정을 거쳤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부모님, 여동생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천애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신경 써 준 걸까. 몸의 주인이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관계를 그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정의했다.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서 이제 성인이 다 된 마당에, 그것도 뇌사 판정을 받고 다른 사람의 뇌가 이식된심지어 기억마저 다른자의 병문안을 오는 게 평범한 걸까. 그것도 도쿄에서 여기, 미야기까지. 스도는 제가 생각하는 평범에 대한 정의에 자신이 없어졌다. 평범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개인별로 다르니, 오이카와에게 그것이 평범이라면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도는 빛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질 나쁜 사람처럼 웃었다.

기증자를 아는 사람이 오는 건 불쾌한가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스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오이카와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스도의 옆에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홀대에 닿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수액 백이 달려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말없이 지켜봤다. 스도를 찾아오는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스도가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이카와 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알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알고 싶었다. 거울을 보면 보이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어쩐지 금세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처럼 우수를 두르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라.”

어차피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그래. 좋아.”

오이카와는 스도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지못한 듯 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도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그러한 행동이, 저가 거울을 일부러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러다가도 스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심산인 듯 스도만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럴 때면 지금 자신의 얼굴혹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는 오이카와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늦게 온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찬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산스럽게 코트를 벗어 정리하고 면회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미안, 이와쨩이랑 얘기하다 보니.”

…….”

스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한 박자 느리게 ,’ 중얼거리더니 스도의 손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 이와쨩이라는 건 내 소꿉친구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괜찮아요.”

스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사과해야 할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것. 스도는 그 점에 있어 오이카와를 이해하고 싶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토비오쨩이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실제로 오이카와는 때때로 스도를 잘못 부르고 나서 빠르게 정정하곤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 스도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구름 없는 하늘이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달력을 봤을 땐 벌써 한 가을이었다. 줄곧 병실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수 없는 스도는 오이카와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가늠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계절 상관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리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스도는 다시 떠올렸다. 하야마는 여느 때처럼 이젠 짜증 날 지경인 운을 떼더니 약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퇴원합시다. 몸에 있던 찰과상, 외상도 다 없어졌고. 기억이 아직 부정확하지만,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 한 명에게 스도씨 내일모레 퇴원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딱히 퇴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스도는 망설여졌다. 퇴원하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 그는 기생충이었다. 스도는 틈이 나는 대로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이전 몸에 대한 기억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이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도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 토비오씨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죠?”

. 맞아.”

카게야마 토비오씨아니,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실래요? 카게야마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오이카와는 창가에서 눈을 옮겨 스도에게 향했다. 그는 스도의 환자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넌 이제 스도 하루나인걸.”

오이카와씨 말씀대로, 전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이카와씨가 듣기엔 웃긴 소리일지 몰라도, 전 카게야마씨를 알고 싶어요. 알고, 기억하고 싶어요.”

스도는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스도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바심이 커졌다. 지금 오이카와를 잡지 않으면, 그가 영영 스도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도의 병실에 찾아올 때도 그저 방문객이었고, 오이카와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도는 그와 영영 타인이었다.

저 내일모레 퇴원합니다.”

다행이네. 축하해.”

그러니까, 퇴원 날 딱 하루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저를 데리고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세요.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좋아.”

그러지 말고, 부탁드려요! ……?”

좋다고. 데려가 줄게. 단 하루 동안.”

오이카와는 어느새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도중이었다. 스도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심산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빨리 승낙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어안이 빠진 표정에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작게 퇴원 축하해중얼거린 후 밤색 코트를 날리며 나갔다. 스도는 그 뒤로 이틀 내내 오이카와가 데리고 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틀이 지난 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앞에 나오자, 오이카와가 약속대로 서 있었다.

약속 지켰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그는 어쩐지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도는 잡지에서 말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의 다양한 매력에 대해 떠올리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 사이에서 모델처럼 웃다가도, 여름 한 철의 햇빛이 어울리는 소년처럼 웃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스도를 데리고 간 곳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이었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봄고 지역 예선 결승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스도는 어쩌면 난생처음 올지도 모르는 지역 체육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이카와가 놓고 간다한마디 한 뒤에야 체육관 실내로 들어갔다.

TV 같은 곳에서 비춰주는 코트 사이드가 아니라, 한쪽 코트 뒤에 앉자 색다른 시야가 보였다. 스도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스코어는 2 1. N 고교가 이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밀집해서 앉은 곳에서는 응원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호루라기 소리와 선수들이 소리치는 소리, 그 외에 운동화 밑창과 바닥이 마찰하여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도는 체육관 내부에 응집한 공기가 답답했다. 답답한 심장을 죄이는 건 떨림이었다. 스도는 제 쪽에 보이는 N 고교 선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선수들은 모두 공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로 동료와 눈 맞춤을 하고, 감독과도 손가락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인 만큼 좌석은 드문드문 비어있을 뿐 그 외에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스도의 바로 뒤에서도 남자 두 명이 현 상황에 대해 중계를 하고 있었다. 스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터, 리베로, 미들 블로커, 스파이커코트에서 보니 좀 더 잘 알겠네요.”

…….”

오이카와는 스도와 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갑작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몰래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저를, 오이카와는 분명 꿰뚫어 본 것이리라. 스도는 괜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입을 다시금 열었다.

오이카와씨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포츠 잡지나 월간 밸리 같은 걸 병원에서 봤어요. 초보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속공이 성공해서 선수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장면이 보였다. 눈을 굴려 세터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도는 속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저런 역할을 하는구나. 공을 올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누구나 세터에게 공을 보낸다. 중요한 역이구나. 스도는 잡지 어딘가에서 본 코트 위의 지휘자라는 문구를 기억했다. 굉장한 기교를 부리거나 엄청난 음색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가 있음으로써 코트는 새롭게 태어난다. 공을 올리는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시합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스도의 손끝이 간지럽고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분명 배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손끝을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겠지. 스도는 뛰어 내려가 코트 안에 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심한 편두통이 신경을 좀먹었다. 이게 바로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거겠지. 스도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봤다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토비오도 세터였어.”

.”

짜증 나는 천재였지.”

오이카와는 이가 보이게 미소 지었다. 호전적인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댔다. 스도는 저가 병원 간호사에게 졸라서 얻어낸 월간 밸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이름은 월간 밸리 곳곳에 등장했다. 특히 오이카와가 적혀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뛰어난 세터이자 고향이 같은 중학교 선후배 두 사람에 대한 드라마는 흔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유일하다시피 한 월간 밸리 인터뷰는 스도가 가장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식 실업팀 선수도 아니고, 대학 배구팀 선수에게 그런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질문에 아주 간결한 단답으로 응한 카게야마도 대단하다 싶었다. 분명 고집이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많은 분이 원하셨는데요. 카게야마 선수에게 오이카와 선수란?

카게야마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한번 이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배구에서도 저번 시합 때 이겼던 걸로 알고 있고요.

카게야마 항상 저보다 저 앞을 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그 등을 잡을 때면 이기고, 놓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오이카와씨의 등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구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이카와 두 명 모두 이후의 인생이 더 촉망받는 인물이었겠지. 스도는 카게야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가 고집이 세고 목표 의식도 있으며 심지어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에는 매번 제 머리를 이파리 따듯이 똑 떼서 그날의 사고 현장에 도로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폐가 저를 거부하듯 숨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스도는 기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사진으로 보는 카게야마는 거울로 보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든 토비오쨩은 스도한테 몸을 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걸까요.”

오이카와의 어조는 상냥하면서도 냉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N 고의 세터를 쳐다봤다. 시합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2 2, 마지막 세트를 앞둔 상태였다. N고 세터는 몸을 풀며 동료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N고 세터가 한 번 빙긋 웃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

, .”

스도도 몸을 일으켰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는 말로 하지는 않아도 금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스도는 다만 그걸 느끼곤 했다. 카게야마라면 그 이유를 알았을까. 스도가 묻지 못하는 질문이 한두 방울씩 모여 마음속에서 이미 샘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음으로 스도를 데려간 곳은 센다이 기차역仙台駅이었다. 센다이역 내부로 들어갈 때 스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차로 가야 하는 곳인가요?”

걸어갈 수 있으면 기차역으로 데려오지 않아.”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스도는 멋쩍게 대답한 뒤 오이카와의 뒤를 마냥 따라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미야기 출신이나 대학은 도쿄에 재적 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12중 추돌 사고는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겪은 일이었다. , 도쿄역에 가려는 건가. 스도는 제 나름대로 답을 도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이카와가 건넨 기차표는 스도의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을 뿐이었다.

 

미야기현宮城県 센다이역에서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데라역山寺駅까지, 다이토大東산을 지나 약 한 시간 삼십 분. 스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에 탑승한 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도쿄역이 아닌 건 스도에게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데라에 카게야마 토비오와 관련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기차표를 건넨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도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오이카와가 그의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센다이시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아무런 제약 없이 높이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마주 앉아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도 마주 앉은 승객이 보였는데, 승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스도는 그 승객 중 한 명이 N 고의 리베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연달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배구 경기가 떠올랐다. 세터의 움직임과 공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스도는 하나하나를 꼼꼼히 떠올렸다.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창밖을 보다가 곁눈질로만 스도를 마주 봤다.

, 배구는 잘 모르지만.”

스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세터보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하는 건 스도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었다.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스도는 배구 초보자에 불과할 텐데저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우습게 여길 게 분명했다. 스도는 양 귀 끝이 보얀 온기를 띠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스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도는 내가 배구하는 걸 본 적이 있어?”

, 아뇨.”

그렇지?”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감정이 그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배구를 가볍게 논한 건 스도의 잘못이었다. 스도는 잡지에서 얻은 그의 지식으로 감히 카게야마인 것처럼그를 평가한 게 부끄러웠다. 스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지 않자,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위로라도 건네듯 부드럽게 말했다.

토비오쨩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네.”

카게야마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말한 대로야. 짜증 나는 천재.”

엄청 똑똑했나 봐요.”

오히려 반대야. 너무 멍청해서 힘들었다니까.”

스도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는 것에 왠지 모를 짜증이 일었다. 거울로 본 카게야마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족함 없는 얼굴이었고신분증 너머로 본 자신의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렸다오이카와가 표현하는 만큼 멍청해보이진 않았다. 스도가 짜증이 난 듯 눈가를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니야?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보다 멍청한 건 다 알고 있네요.”

말을 마치고 스도보다 더 놀란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스도의 눈을 피한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속으로 있는 힘껏 후회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의 억양, 어조 등 전부 스도에게 어색했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토비오쨩으로 잠시나마 착각이라 해도 된다면한 게 분명했다. 스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스도는 만약 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뭐가?”

토비오쨩이라 부르셔도요. 오이카와씨에게는 토비오쨩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이카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확고하게 선을 그어 놓았던 토비오쨩스도의 경계가 아주 잠시라도 허물어졌던 건 그의 실수였다. 또한 그 실수가 단지 순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님을 그도 스도도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스도.”

오이카와는 긴 공백 끝에 답했지만 스도는 그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나온다면 스도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도는 다만 작게 입을 내밀고 괜찮은데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행동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스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 두 명을 보다가, 그들이 내린 뒤에는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창가와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등성이 보였다. 다음 역인 야마데라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가을 후반부로 접어든 산은 붉고 노란, 때로는 주홍빛의 군집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스도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오른쪽 눈동자 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도는 이 풍경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여행잡지 어딘가에서였겠지. 본인이 한가롭게 여행 잡지나 들춰 볼 만큼 여유로운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산등성 사이의 움푹한 곳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냇물은 햇빛을 받아 시린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은 스도에게 어색했다. 마치 뒤바뀌듯 카게야마 토비오의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스도는 그 사실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눈으로 새하얀 하늘과 구름 안개가 드리운 산, 날 선 냇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오이카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스도에게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먼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스도 또한 그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스도는 입고 있는 잠바를 여몄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웃었다.

추워? 나약하네.”

오이카와씨야말로 코가 빨간데요.”

난 원래 코가 빨개.”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코를 한번 훌쩍였다. 얇은 셔츠에 코트 차림이니 추울 게 분명했다. 산에 올 거였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스도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기차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높게 굽이진 산길과 그 사이사이의 절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절도 언뜻 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꼭대기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춥다고는 하지만 이 계절에 눈이라니 농담이 심했다.

갈까.”

가다뇨?”

저곳. 토비오와 간 적이 있어. 야마데라山寺.”

그 이름 그대로, 산속에 이어지는 절이었다. 오이카와는 놀리듯이 정상까지는 1,000개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야 해. 스도, 괜찮겠어?’ 물었고 스도는 대답 없이 입을 내밀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알 수 없었다. 운동선수이니 그럭저럭 갖춰져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몸이 저를 잘 이끌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계단을 앞서 걷기 시작한 건 오이카와였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행이었지만 1,000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스도는 오르는 중간중간 자신이 올라온 길을 뒤 돌아봤다. 흰 눈덩이가 얼룩처럼 검은 산 주변에 퍼져 있었다. 스도와 오이카와가 내렸던 기차역이 이슬만큼 작게 보였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경련했다. 확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동자는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도는 다시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전 카게야마씨와 뒤바뀐 사람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사잇길로 난 절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직 산 정상의 사원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찬 공기가 온몸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왔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에는 코트가 잘 어울렸다.

제가 생기고 카게야마씨가 사라졌으니까요.”

…….”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오이카와씨 외에 다른 사람이 절 본다면 절 카게야마씨로 볼까요, 스도로 볼까요? 겉모습은 카게야마씨잖아요.”

넌 스도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스도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눈을 닦아놓은 돌계단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한심한데도 닦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카게야마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스도는 지금 느끼는 저의 감정이 맞는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맞든 맞지 않든, 그건 분명 스도의 심장을 쪼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정상에 놓인 정자에는 네모난 상자를 두르듯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마를 가를듯한 추위였다. 오이카와는 죽는소리를 내뱉더니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값비싼 코트가 나무 의자에서 튀어나온 조각에 헤집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도는 깊게 심호흡했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 테두리에 몸을 붙이고 숨을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 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바람 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눈은 이세계(異世界)의 물질 같았다. 산등성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콰 코, 눈 중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스도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선 그는 건조한 시야 안에서 눈처럼 투명했다.

토비오쨩이랑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오이카와씨도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웬 건방진 소리야?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스도의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스도는 말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현하고 산등성을 다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스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스도.”

.”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오이카와는 애원하듯이, 동시에 마치 이뤄지지 않을 걸 부탁하듯이 말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배구를 하라는 부탁은 스도이기에 하는 부탁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스도 하루나이기에. 문득, 스도는 산 사이에 걸친 투명한 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매번 스도를 조용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는 어떤 관계예요?”

중학교 선후배 사이.”

오이카와는 금방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다시 묻냐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이 하얀 입김에 뒤덮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입김은 그 자리에서 녹았다.

아뇨, 그거 말고요.”

스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스도의 눈동자와 겹쳤다. 그의 눈을 빛내고 있는 홍차 빛 눈동자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비추고 있었다. 스도는 바로 그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책에 적힌 문구를 읽듯이 스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가 거울에서 봤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조용했던 눈동자, 저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던 푸른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담기면지독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채색됐다.

 

 

 

 

 

 

미야기 역에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하늘 한쪽에 걸린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푸른색부터 보라색까지의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하늘에 펼쳐졌다. 오이카와는 기차역에서 나와 스도를 마주 보았다. 그는 조금 서툴게 웃었다.

조심히 가.”

스도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스도와 했던 약속을 지킨 그는 두 번 다시 스도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만날 수 있죠?”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스도예요, 아니면 카게야마씨예요?”

오이카와는 안타깝게 웃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이 그의 머리에 닿아 묘한 빛을 자아냈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조금 매만졌다.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가 결국 스도를 마주 봤다. 그는 마치 하야마처럼 운을 뗐다.

짓궂네. 토비오쨩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씨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오이카와씨도 그걸 알고 있고요.”

……갈게.”

오이카와는 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실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봤던 그의 등이었다. 스도는 오렌지빛에 휩싸여 가는 그의 등을 보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어깨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오이카와가 멀어질수록 오렌지빛, 주홍빛 하늘이 번져 땅을 덮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퍼지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못 본 건가. 눈을 한두 번 비비다가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그러지는 차들. 치솟는 불꽃.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살코기가 타는 냄새. 어그러진 모습으로 자동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귀 양옆에서 울려 퍼지면서 스도를 덮쳤다.

아악!”

스도는 그 자리에서 고꾸러졌다. 앞으로 주저앉은 스도는 심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 머리가 아팠다. 심한 통증과 구역질이 위를 덮쳤다. 토하고 싶은데 창자를 한 꺼풀씩 칼로 벗겨내는 것 같은 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강한 빛과 함께 장면 장면이 튀어나왔다. 스도의 피에 젖은 신분증. 오토바이 아래에 깔아뭉개진 청년의 모습. 청년이 쓰고 있던 헬멧 사이로 검붉은 빛 피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와 다리를 적시는 장면. 다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다리의 근육? 하얀, 흩어진 살점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것은? 뇌가 갈고리에 채인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며 스도는 의식을 끊었다.

 

 

 

 

 

 

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몸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하얀 공간이었다. 저 앞에 오이카와가 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얇게 입은 옷차림. 곧 죽어도 멋 부릴 것 같은 그는 여전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카와 주변으로 새하얀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옆을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앞의 사람만 보고 있었다.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쳤고, 저 앞에는 다른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홍차 빛 눈동자에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번의 그는 말이 없었다. 넓은 어깨가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쳐져 있기도 했다. 걸어갈 때마다 오이카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흰 공간 속의 그는 하얗고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걷던 중 천장혹은 하늘이라고 해야 옳을까에서 작은 솜 덩어리가 눈처럼 떨어졌다. 솜사탕을 일부 뜯은 것처럼 엉성한 솜 덩어리는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 솜 덩어리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의 몸에 닿아 녹았다. 그 순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걸어가며 솜 덩어리 하나가 몸에 닿아 녹을 때마다, 하나씩.

웃지 말고.’

오이카와가 서투르게 웃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양팔을 폈다. 팔에 닿아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오이카와가 서서히 명확해졌다. 멈췄던 기억의 시냇물이 소리 없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담갔다.

 

전 오이카와씨를 좋아하는데요.

「…알아.

오이카와씨는요?

글쎄.

「…그렇게 대답하는 거 반칙이에요.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말을 안 하시잖아요.

「…토비오.

 

배구, 계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엇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해.

 

그럼 오이카와씨를 만날 수 있나요?

 

 

 

 

 

 

나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백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셨나요. 괜찮으세요?”

그의 왼쪽 가슴에 명찰이 달려서 흔들거렸다. 하야마라는 이름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펜 라이트를 들어, 내 눈 양쪽을 번갈아가며 비췄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펜 라이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몸 이곳저곳이 아파서 몇 번 뒤척이다가 일으켰다. 방은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에는 C대 병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병원? 왜 병원에? 고개를 갸웃하자 햐아마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서류를 앞뒤로 뒤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가 귀 뒤로 빗어 넘기려는 옆머리가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이에요. 길가에 쓰러졌던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또 기억에 변화가 있으셨나요?”

쓰러졌다고요?”

.”

자동차, 사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함,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안경을 올렸으나 금세 다시 내려갔다. 그는 내가 말하기 전 적어도 열 번은 안경을 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요.”

……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야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종의 발작까지 일어날 것 같은 격양된 움직임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기억? 돌아왔냐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야마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더니 의자에 다시 천천히 앉았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열심인 것 같았다. 낮게 읊조리듯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보이거나, 무언가 환청이 들리거나 하진 않죠? 몸에 변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물감이라든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등

없는 것 같은데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야마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보았다. 숱이 적은 눈썹 아래로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해리성 기억 장애였습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게야마의 입을 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과거나 자기 신분 및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기억장애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의 행세를 하고, 본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중에는 새로운 이름, 직장, 주소 등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요.”

정체성?”

보통 자연적으로 회복합니다만, 기억장애 기간의 일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는 카게야마씨가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리성 둔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스도 하루나라는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가족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도 하루나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물론 그렇죠. 원래 그렇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그러니까, 그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게야마씨는

 

 

끔찍한 사고였다. 카게야마가 통증을 이기고 눈을 뜨자 주변은 불바다와 같았다. 치솟아 오르는 불길, 무언가 타는 냄새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이 귀를 메우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불꽃, 불길이 입을 벌려 차와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어지럽고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야를 둘러보았다. 몇 걸음 앞에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 한 대와 차 한 대에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의 헬멧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카게야마에게까지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는 기어코 구토하고 말았다. 그가 쓰러진 옆으로 피에 젖은 지갑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지갑에 손을 댔는지 카게야마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누군가를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지갑을 열고, 그의 신분증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는 여성과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 작은 여자아이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가족사진이었다. 신분증에는 사진 속 청년이 남성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미야기 현 소재 K 대학교 학생증. , , 하루, 카게야마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문득, 다리로 시선이 향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욱 심해져 절단된 것 같이 타는 통증이 번졌다. 검은 피칠이 된 다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본 다리 주변에는 타고 있는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살점? 벌려진 다리, 뿌연 시야 안에서 헤쳐진 저의 다리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쇠로 만든 종으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머물렀고,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울 것만 같은, 울고 싶은 감정의 불꽃이 심장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병원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씨는 그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도 하루나의 행세요?”

. 자신은 스도 하루나인데, 도대체 왜 자기를 자꾸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부르냐며. 몇 번 과격한 행동도 보였죠. 불안한 심리에서 표현된 행동화(Acting-Out)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타국에 계신 카게야마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격으로 온 오이카와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오이카와씨가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움직였다. 하야마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의 말에 따라 저희는 뇌 이식 수술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쳐서 당신이 스도 하루나처럼 느끼게 만들었죠. 강제로 현실을 들이대는 방법이 성공하리라는 법도 없고, 더 강한 충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다리는 정상이었고 스도 하루나로서의 당신이 회복할수록 다리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신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점뿐이었죠.”

다리. 카게야마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멍을 포함해 아직 피부가 완전히 수복된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하면 매끈한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야마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서류에 무언가 적어나갔다.

퇴원 후 오이카와씨와 외출을 한 당신은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무언가 더 궁금한 건 있나요? 기억에 혼란이 있거나 한 점은요? 기억장애 기간의 기억이 없는 건 정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야마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눈을 있는 힘껏 구기면서까지 웃는 게 정말 기뻐 보였다.

정상, 이라고요?”

카게야마는 따끔거리는 머리 한쪽을 짚었다. 단풍나무 위에 포개져 있던 눈 더미, 골목마다 숨어있던 절과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 조각 조각나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기억해내려 하면 오이카와의 안타까운 미소만 떠올라서 이어지는 조각들을 맞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씨는요?”

하야마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어요.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하야마가 주의를 주었으나 카게야마는 두 다리를 딛고 다시금 일어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외투를 걸치고 카게야마는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어서 가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자꾸만 재촉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웠으나 카게야마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야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씨?”

가야 해요.”

어딜 가시게요? 아직 안 돼요. 인지 사고 검사를 하셔야죠. 어지러우실 텐데.”

가봐야 해요. 오이카와씨를 만나야,”

카게야마씨!”

하야마가 막으려고 했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카게야마는 그저 달렸다. 마침 눈앞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뛰듯이 몸을 구겨 넣고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저 열리기 전에 뛰었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몇 번이고 본 오이카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환의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몸을 바람이 거칠게 덮쳤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절대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한 가닥씩 몸을 휘어 감았다.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데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씨!”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때렸다. 하이얀 솜 덩어리가 한두 개씩 흩날렸다. 어머, 이 시기에 눈?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말을 나누며 하늘 사진을 찍었다. 꿈에서와 달리 회색빛깔 하늘에서 찢긴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눈이 닿아 녹아도,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향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만날 수 없을 거야.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소리치고 싶은 입술이 은색 한숨만 연신 내뿜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엷게 웃음 짓던 그는 드물게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와 겹치고, 그의 손이 카게야마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배구를 하면 만날 수 있어.”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울기보다 미소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배어 나오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 사랑은 배구니까.”

 

 

 

 

 

 

 

 

 

- 해리성 둔주는 실존하는 기억장애입니다만 글 안에서의 내용은 픽션입니다.

- 해리성 둔주의 개념을 참고한 문헌 :

양 수 외(2013). 정신건강간호학. 서울, 현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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