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7 동거

 



 

오이카와 선배네 집은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개인 주택의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고, 현관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화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몇 개 피어있었다. 당겨서 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는 신문을 놓을 수 있는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왼쪽에는 안 쓰는 방이 있었다. 매일 닦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계단을 오르면 발을 내딛는 곳 아래쪽으로 나무 썩는 소리가 들렸다. 삐이, 삐극, 삐걱하는 소리가 끝나고 2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오이카와 선배의 방이었다. 사각으로 접어놓은 이불, 좌식 책상과 옷에 걸린 교복까지, 무엇 하나 오이카와 선배의 향이 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배구공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로서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벽걸이형 달력에 표시되어있던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319, 졸업식. 오이카와 선배의 글씨체가 아닌 그 표시는 가족 중 누군가가 적어놓은 듯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간 날이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달력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젖었다가 마른 흔적까지 생각나는데도, 기억이란 이상한 곳에서 모호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돼, 토비오쨩.’

난 그 말을 듣고 좌식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 할지, 혹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좋을지 잠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손바닥에 차가운 식은땀이 번졌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지금껏 집에 초대한 후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나는 쿠니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초등학교 이후로 오이카와 선배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이와이즈미 선배와 오이카와 선배의 대화로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깨에 멘 에나멜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봤다.

저기,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무언가 소중한 걸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앉아도 돼, 한 번 더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뇌 속의 바람이나 기호에 따라 조금씩 가공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에나멜 가방을 한 손으로 빼서,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계 두 개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서로 어긋난 박자로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조금 머리가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는 양손으로 내 체육복 저지 상의를 벗겼다. 저지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다다미 바닥은 소리 흡수를 잘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내 흰색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비오,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로 이사를 왔다. 걸어서 역까지 8, 역에서 학교까지 30.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며 히나타는 부러워했다. 오이카와 선배와는 가끔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도쿄로 이사 왔다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 오이카와 선배와 같은 대학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었고, 그쪽에서 먼저 스카우트하러 온 걸 보고 츠키시마는 행운이네라고 했다. 성적으로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학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 선배가 없는 2년은 회색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했고, 기쁘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오이카와 선배에 대한 감정은 생각 날 때만 한 번 꺼내보는 상자였다. 가끔가다 기억을 되새기곤 했지만 꿈에 나올 때는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있는 때가 많았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연락을 보내오는 오이카와 선배도 신기루 같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여자 선배와 함께 있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동거를 먼저 시작한 선배라며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아주 드물게 배구를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마다 동거생활의 소소한 팁을 말했다. 프라이팬 하나로 반찬을 세 개 만드는 법, 설거짓거리를 줄이는 방법, 처치 곤란한 채소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 등……. 나는 거의 항상 끼니를 밖에서 때우거나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의외로 살림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밥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대학 내에서 유명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자취하는 집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많은 여자 선배와 사귀었고, 대학 내에서 친구도 많았으며 여전히 배구부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누가 데려다줘야 할 정도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 후에는 애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으며, 평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 해주면서도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는 부드럽게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우와,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이 대학 무섭네.”

네가 조금 유명한 사람이어야지하긴, 2년이면 오래 사귀었네.”

같은 강의실 뒤편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까.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웠다. 강의실 창문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햇볕이 내 뒤로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웠고, 머릿속에선 기억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퍼즐처럼 흩어져 있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세리자와랑 얘기해봐야지.”

그래서? 이제 동거하는 건가?”

우와, 나카지마 불건전해! 오이카와씨는 동거란 말은 모른답니다!”

무슨곧 졸업인데, 결혼하기로 정한 남녀가 뭐하러 따로 사냐고.”

동거는 안 해. 그건 세리자와랑도 얘기 끝난 사항이야.”

오이카와 선배는 시합할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내 오이카와 선배는 가벼운 말투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 만의 비밀이야!’ 작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

발신인은 중학교 때부터의 선배였다.

 

 

왜 안 먹어? 이제 카레 싫어하나?”

오이카와 선배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이카와 선배 앞에는 방금 만든 로제 파스타가 있었다. 카레의 달콤한 향이 코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반질거리는 겉면의 반숙 달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뜨거운 카레 위에서 뒤척였다.

좋아해요.”

근데 왜 안 먹어?”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 속의 오이카와 선배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본 오이카와 선배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그건 오이카와 선배가 결혼하기로 결정 한 세리자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굳이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이카와 선배는 잊을만하면 연락했고, 나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러 나온 건 나였고, 그의 앞에 앉아 카레를 주문한 것도 나였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불러낸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기억도 변형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있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는 아예 기억 자체의 상자를 닫아버린 것인지. 나는 오이카와 선배도 같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도 선명했던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억에는 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바람이 투영된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찰나와 같이 웃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내 귀를 덮고 볼에서 목까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토비오, 우리 같이 살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주 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중학교 때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어린아이였다. 그를 아는 것은 저뿐이라는 기분에 젖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서 시작한 기억을, 그와의 동거로 끝맺는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된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도 그에게 끌리고 있는 채였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그날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에 잘못된 일은 없어.”

일어나야만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이야.”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일어나는 일의, 일어나야만 하는 일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의, 그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동거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면. 아니, 그의 사랑이고 나의 사랑이라면. 내 기억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만 선명한 것도 그러한 일종인 걸까.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이외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외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았다.

저랑 만난 걸 후회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너를 만난 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에는 후회라는 말이 필요 없지.”

오이카와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던 카레 속 반숙 달걀이 저 혼자 터져서, 누런 노란 빛의 달걀 속이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속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서 오이카와 선배와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건 이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일까.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운명의 상대라는 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면 자주 나오는 저 말은, 쉽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상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색이 아주 특별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회색의 세상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 내가 먹고 있는 수프의 색과 아주 단순하게 내 몸의 털이 무슨 색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전부 다 회색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말을 배우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회색 그림책을 내게 사줬다. 그림책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색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지만. 어머니는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을 읽고 한 장 넘겼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아는 회색의 세상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 내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

어느 날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빛깔, 얼음처럼 차갑고 사나운 빛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빛까지. 루시아는 그것이 색깔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시아의 운명의 상대는 소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림책의 문자를 읽어나갔다. 책 속의 루시아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머니는 그림책을 덮고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에 찬 듯 반짝였다.

토오루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루시아에게 소니 같은 사람, 엄마에게 아빠 같은 사람.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내 행복이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가기 전 동거 상대가 데려온 회색 고양이 토토가 가늘게 울었다. 토토의 등을 한두 번 쓰다듬어준 후 작은 코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동거 상대와 머무는 회색 지붕의 건물 3층은 경치가 꽤 좋고, 안방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2인용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동거 상대는 자주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안방에서 토토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이면 직접 만든 카레를 먹고, 회색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그와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고, 루시아가 말했듯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얼마 후 있을 국가대표 결정전을 대비하고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날도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이었다. 나는 그가 없는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동거 상대는 내가 없는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선잠이 드는 날이 늘어갔다.

급해서 대충 챙겨 입고 나온 외투는 초겨울용이었다. 소매 안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색이 없는 세상에서회색을 색이 아니라고 본다면사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바람의 세기와 피부에 와 닿는 온도, 콧속을 한꺼번에 채우는 향기뿐이었다. 봄의 벚꽃과 장미향기, 여름의 턱 끝까지 답답한 열기,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겨울의 회색 눈덩이가 내가 아는 계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실내에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바쁘게 연습과 시합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건 내 동거 상대가 더 심해서, 작년 겨울에는 후드 티에 얇은 조깅팬츠 하나만 입고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하고 와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지독하게 건강한 건지 결국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키스를 한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단 건 답답한 일이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세상은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비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가?”

토비오는 설탕으로 착각해서 소금 범벅이 된 계란말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물었다. 냉장고에 몇 개 있는 남은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고, 수저를 놓은 후 내가 대답했다. 쓰레기통 속에 여전히 시선을 향한 채, 토비오는 내게서 등 돌리고 있었다. 회색 브이넥은 입은 어깨가 넓었다. 똑같이 브이넥을 입은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는 커플티를 입은 상태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커플 옷을 사 입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옷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고 옷장에 따로 보관해도 섞이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체격이 더 큰앞으로도 토비오보다는 항상 더 클내가 옷을 구분해서 다시 넣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거요.”

회색은 보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보인다던데요.”

그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났다. 토비오는 가끔 내가 짜증 낼만 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짜증을 내는 나 또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길 바랐다. 나는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로 토비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토비오는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토비오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여러 가지 말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는 말로 대화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토비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항상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몰랐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

내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토비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토비오의 시선이 식탁 위의 회색 반찬들을 향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토비오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짜증 섞인 말투를 억누르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고, 토비오는 또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가끔 토비오는 내게 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운명의 상대가 아닌, 색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었고 나와 토비오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에게는 가끔 힘이 들었다.

전 오이카와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함께 있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요?”

……토비오.”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토비오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거품처럼 떠올랐다. 회색의 세상이 말로만 듣던 채도를 갖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경험은 나에겐또한 토비오에겐없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나는 중학교 때 토비오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 토비오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비오와 생활하고 있는 3층 동거 집은 회색 일색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색에 대해 떠올렸다. 꿈속에선 너무 많은 색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결국 웃고 마는 나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토비오의 머리색은 무슨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태양 빛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했고 어떨 땐 꽤 그럴싸한 걸 상상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운명의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그쳤다. 나는 그날 밤 회색 이불 안에서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잠이 든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회색 머리에 얼굴을 묻고, 회색 입술에 입을 맞추고 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세상은 회색이었고, 토비오였다.

 

약속장소는 동거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라고 정해져 있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살얼음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리를 조급히 움직였다. 카페의 넓은 통유리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토비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동자에 붙었던 먼지가 하나둘 닦이는 듯 색채가 촛불처럼 드러났다. 카페의 지붕은 황갈색이었고, 하늘에선 색유리를 낀 구름이 눈부시게 새하얀 빛으로 빛났고,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민들레 잎이 무섭도록 노랗게 반짝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한 여성도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박차고 달렸다. 회색 렌즈를 끼듯 한 줌, 두 줌 멀어지는 색채가 아쉽고 덧없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중심을 잃고 몇 번 발을 헛디뎠으나 카페 입구에 몸을 부딪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카페의 입구 문은 회색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점원은 회색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그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토비오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토비오의 앞머리를 몇 번 정돈해준 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루시아가 소니를 만난 순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토비오,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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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특별한 날'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오이카와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매일 2시간에서 3시간정도의 쪽잠을 자는게 습관이 된 탓인지, 꿈을 꾸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나마 가끔 꿈을 꾸면 이미 국화꽃 아래에 누워있는 자들과의 소름끼칠만큼 선명한 기억만 뚝뚝 끊긴 필름처럼 흘러가곤 했다. 그런 꿈을 꾸면 식은땀으로 몸이 식은 뒤에 깨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한 꿈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지나간 일에 대해선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런 그의 성격은 조직을 키우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식어버린 몸을 칼날처럼 깎고 지나가는 새벽바람이 싫었다. 전날 모르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벽바람은, 순백색의 커튼을 거칠게 휘젓고 들어와 오이카와를 휘감았다. 꿈을 꾸고 난 뒤 오이카와는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대립조직과의 회담에서 볼썽사납게 기침하는 꼴이 오이카와 토오루 본인이 생각해도 영 아니었지만 어찌할 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자는 시간을 줄였다. 애초에 모자른 게 오이카와의 시간이었으니, 어느 면으로 보면 효율적이었다.

오이카와는 반쯤 들어올린 눈동자를 옮겨 옆을 바라봤다. 깊게 잠든 얼굴 위, 어느새 길게 자란 검은 앞머리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 아래에 모양 좋게 자리잡은 입술은 얇게 열려 있었다.

앞머리, 자르라고 한 게 벌써 일주일짼데.’

오이카와는 아직 부연 머릿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눈 앞에서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돈했다. 아무리 정돈해도 모래가루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오이카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린애같이 체온이 높은 그를 끌어당겨 안았더니, 식었던 몸에 다시 온기가 뭉근하게 새어올랐다. 귓불이 따끈한 느낌이 좋았다. 오이카와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최근 수면시간은 거의 8시간이었다. 사실 오이카와에게 정해진 수면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자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지금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경우 상황이 달랐다. 내일 핵폭탄이 터지든, 당장 세력싸움이 일어나서 총을 든 자가 뛰어들어오든 그의 수면시간은 8시간이었다. 달리 말하면, 8시간이 지나면 그는 여지없이 눈을 떴다. 그보다 늦게 잠든 오이카와가 눈을 못 뜨고 있어도 그는 오이카와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을 부산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뜨는 생활을 반복한 오이카와의 수면 습관은 이제 완전히 그와 비슷해졌다. 물론 일이 있어 더 늦게 자거나 더 일찍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대체로 비슷했다. 악몽은 매우 드물게 오이카와를 찾아왔다. 꿈속에서 미세하게 풍기던 국화꽃 향기도 점차 옅어졌다. 현실과 악몽의 경계선을 휘청거리던 오이카와는 현실도, 악몽도 아닌 안전장치 안에 자리를 잡았다. 몇 년 전 만났던 안전장치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지만, 이제사 몸에 피를 묻히고 오지 않을 정도의 레벨은 되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보기에는 여전히 건방진 꼬맹이지만.

검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주같은 눈동자에 새벽 햇빛이 닿아 별빛이 단숨에 들어찼다. 몇 번 눈을 깜빡인 검은 눈동자는 이내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이카와씨.”

좋은 아침, 토비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잠에서 깬 약간 멍한 얼굴은 몇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몸도, 키도, 어깨도, 손가락 길이도 달라졌지만 토비오의 표정은 전부 그대로였다. 토비오가 표정으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체온이 높은 카게야마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천천히 그 모양을 따라 문지르듯 쓸어 내려가자, 카게야마는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 중요한 회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나중에. 준비해야지.”

그 말 어제도 들은 것 같은데요.”

.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혼났지.”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저런 표정을 아주 오랜만에 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저런 식으로 바라본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이었다. 그가 아직 오이카와의 한 팔에 가볍게 안길 정도로 작은 몸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꿈을 꿨거든.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꿈.”

오이카와씨는 꿈을 잘도 꾸시네요.”

카게야마는 큰 하품을 했다. 다시 눈이 천천히 감기는 게, 두 번째로 잠들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자지 말라는 듯 그 콧등을 가볍게 꼬집었다. 찌푸린 눈가를 보고 새삼 느꼈다.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건방진 꼬맹이는 하나도 한 변했어. 처음에 너, 나를 완전 이상한 사람 보듯이 본 거 기억나?”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데려가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요.”

수상하다니! 너무해! 어쨌든 따라온 건 토비오쨩이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콧등의 아픔은 짧았고, 폭신한 이불의 감촉은 기분좋았다. 오이카와의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젠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다. 순수하게 기분좋다고 느끼는 머릿속에선 몽롱한 졸음을 향수처럼 지속적으로 뿌리고 있었다.

저도 오이카와씨밖에 없다고 느꼈어요. 그것 뿐이에요.”

뭐가?”

제가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동그란 머리통에 참깨같이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로 조직원도 잠시간 눈을 피하고 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냥 건방진 꼬맹이였던 그를 조직으로 데려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오이카와가 손수 가르쳤다.

테이블 매너, 양복 각 부위의 명칭 및 입는 순서, 화술같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부터 총 잡는 법, 어떤 동맥을 끊어야 가장 빨리 죽는지, 암살도구의 사용법심지어 어느 순간에 그것들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이전 보스에게 11로 배웠던 실력은 카게야마를 가르치면서 발휘됐다. 그렇게 직접 배운 오이카와가 현 보스인 탓이었을까. 딱히 후계자로 키울 생각은 없지만 어디서 데려왔는지도 모를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려든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오이카와의 등 뒤편에서 끊임없이 흘렀다. 카게야마에게 그러한 비난에 대해 들은적이 있냐 물었을 때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갸웃해보일 뿐이었다. 저가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해본적도 없는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그런 점을 보고 조금 웃었다. 후계자라느니, 조직이 어떻다느니, 저 꼬맹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바로 그 때문에 카게야마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토비오, 오늘은 같이 나가야 해.”

회의는 어쩌고요?”

그건 네가 신경쓸 게 아니고. 일어나서 준비해. 사격장으로 갈거니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노란빛이 도는 피부에 새하얀 햇빛이 닿아 평소보다 더 밝아보였다. 오이카와도 몸을 일으키고 샤워실로 걸어들어갔다. 악몽을 꾸면 들리던, 오이카와를 부르는 목소리는 희미한 국화꽃 향기 너머로 점점 멀어졌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다시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보다는 준비가 먼저였다. 샤워실 문을 닫기 전, 카게야마가 옷가지를 챙겨입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등과 배에 어느정도 붙은 마른 근육이 최근 늘었다. 매일 매일은 조금씩 우리 사이에 쌓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도, 그렇지 않은 형태로도. 그것은 벌써 몇 년째 쌓인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몇 발의 총성이 들리고 난 후 카게야마는 헤드셋을 벗었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과녁 안에 정 중앙에 가깝게 세 발이 정확히 꽂혀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눈가를 빛냈다.

기뻐보이네.”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웃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의 과녁을 바라봤다. 조금의 틈도 없이 머리 한가운데, 가슴 한 가운데, 배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기 쉬운 꼬맹이는 오늘부터 사격 연습을 더 늘릴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주름 한줄 없는 셔츠소매를 올린 뒤, 권총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 카게야마를 뒤에서 끌어안는 형태로 섰다.

좀 더 턱을 당겨야지.”

낮게 속삭이고 아직 제 손보다는 굳은살이 적어서 깨끗한 오른손을 감싸 쥐고, 다른 한 팔은 카게야마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굳은 채로 권총을 단단히 잡았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아듣는 것이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오이카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이제는 굳이 저가 일일이 자세를 교정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사격자세는 빈틈없이 아름다웠다. 다만 오늘이었기에, 오이카와는 사격장에 왔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감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 가까이에 입술을 대었다. 아침과 같이 온도가 높은 귓바퀴는 매끈했다. 기억나? 오이카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숨소리로 물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서, 오이카와가 골라준 카게야마의 정장에 주름이 생겼다.

오늘이잖아.”

내가 너한테 처음 사격 가르쳐 준 날.”

몇 년 전 오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 자리에서 가르쳤었다. 총 잡는 법조차 모르는 꼬맹이를 데려다가 오늘과 같이 자세를 잡고, 장전을 하고, 과녁을 노리고 쏘도록 가르쳤다. 오이카와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깊이 묻어두지 않는 오이카와였지만, 카게야마에 대한 기억만큼은 모래시계같이 심장 안에 소복이 쌓여서 은빛 둔덕을 이뤘다. 가끔 카게야마가 다쳐서 돌아오는 날에는 카게야마가 없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 밤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엇을 하며 밤을 보낼까.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보스 실격이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오이카와는 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곤 했다. 언젠가 카게야마를 국화꽃 아래에 눕힐 날이 올까. 보스가 된 순간부터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상상해온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조금 몸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를 갸웃한 것 같았다.

오늘이 그 날 이었어요?”

토비오쨩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억울한 심정이 몰려왔다. 됐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토비오쨩이 이런 아이인것쯤은! 이것저것 꿍얼거리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권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주본 눈동자가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항상, 오이카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준 사격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언제가 처음인지는 몰랐어요.”

전 오늘도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준 건 기억하겠지만내년에 또 말씀해주셔도 까먹을걸요.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줬다는 사실이 중요한거잖아요.”

저한텐 가르쳐주신 그 날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작은 입술은 그렇게 말했었다. 검은 두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를 저의 눈동자에 기록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의 기억을 모래시계처럼 쌓는 건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분명 저 나름대로, 확실하게, 오이카와에 대한 무언가를 쌓고 있었다. 그것은 딱히 오이카와와의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특징적인 형태도 아니었지만 카게야마의 안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아니, 입꼬리가 평소보다 더 올라가있었다. 카게야마는 이제 다시 몸을 돌리고 과녁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권총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양손으로 그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셔츠의 서늘한 감촉이 팔에 달라붙었다.

당분간은 카게야마가 없는 밤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미세하게 화약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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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님 생일 축하드려요!! u//u





오이카게 전력 #5 마츠리(축제)

 

 

 

사방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오른쪽에서는 친구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쪽 조금 위쪽에선 딸을 잘 챙기라고 남편을 다그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에선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뭇게 타버린 밤하늘에선 멀리 북소리가 둥, , 둥 일정한 리듬을 두고 들려왔다. 이 길로 가면 오른쪽에는 타코야끼 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떼자 어깨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하고, 유카타를 입은 소녀는 뛰어가 버렸다. 나와 한, 두 살 정도 차이 날 뿐 같은 나잇대였는데도 눈가에 보드랗게 퍼진 펄 빛 눈화장과 입술에 물든 분홍 꽃잎 색이 낯설었다. 투명한 흰 피부에 보스스 달아오른 볼이, 오늘이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새삼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소녀가 신은 나막신이 따각따각 나무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좁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앞서 걷던 소년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어가 버렸다. 나는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앞이 이곳이 맞는 걸까. ‘이란 말조차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해 있는 키타이치 중학교 배구부는 부원이 많았다. 배구로 유명한 강호교에, 특히나 올해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끄는 시기였다. 예년보다 부원의 수도 많았고, 더 강하고 단단한 팀이 되고자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다 같이 가서 팀워크를 돈독히 하자! 는 목표 자체는 원대하고 좋아 보였다. 할 일이라고는 가끔 모이는 지역 소모임에 참가하는 일 혹은 때때로 폭설이 내리면 소일거리 차원에서 자기 집을 넘어 옆집 눈 치우기가 전부인 시골 마을에서, ‘축제란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카게야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전국대회 영상을 본 이후로 처음 알았고, 사람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두가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자는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학년별로 모여 다니자는 것에 겨우 합의를 봤을 때는 이미 몇몇이 개별활동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한 1학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년 대다수가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킨다이치, 쿠니미와 이곳저곳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고 다녔다. 도쿄나 큰 도시에서는 커다란 불꽃놀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시골인 미야기에서는 작은 불꽃 몇 개가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 게 전부였다. 꽃 모양에 용 모양, 하트모양에 작게는 두 번 연이어 터지는 불꽃도 있다지만 전부 소문에 불과했다. 항상 화려한 불꽃놀이는 먼 나라혹은 먼 지역의얘기였으며,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불꽃놀이는 북소리나 사람들 소리에 가려져 작게 터지는 불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모인 것은 역시나 시골이기 때문이었다. 행사가 별로 없는 시골에서 축제는 공식적인 즐거움의 장이었다.

쿠니미는 타코야끼를 사들었으며, 킨다이치는 금붕어 잡기에 열중했다. 카게야마는 다만 가만히 서서 그들을 구경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기도 했다. 축제에는 가족과 함께 몇 차례 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카게야마는 사람들에 쏠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정신없는 한바탕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올해도 사람이 많기는 여지없이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올해의 축제가 여느 때와는 다르단 것을 알고 있었다.

여우 가면 어때?”

그건 쿠니미지. 카게야마는 이게 더 좋을 거 같다. 까마귀 가면.”

까마귀를 보통 가면으로 만드나. 어울리긴 하네. 킨다이치는 이거 어때? 랫서 팬더 가면.”

랫서 팬더야말로 왜 가면으로 만드는 거야?”

어울리니까 됐잖아.”

우연히 마주친 가면 가게에서 각자 하나씩 사자는 얘기를 꺼낸 건 킨다이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몇몇 가면을 골라든 쿠니미 손에 이끌려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직 정면만 시야에 가득했다. 쿠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를 보고 조금 웃었지만, 쿠니미는 알아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는 사람으로 둔갑해서 마을에 내려온 여우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면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보려면 고개를 평소보다 더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카게야마는 잠시 헤매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너머로 익숙한 머리색이 보였다. 검은 하늘 아래 붉은색으로 퍼지는 전등 불빛 옆에서,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색은 평소보다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진한 바다색에 줄무늬가 들어간 유카타는 썩 잘 어울렸다. 3학년 배구부 선배 몇 명과 이와이즈미 선배, 그 앞에 유카타를 입은 몇몇 여자 선배들이 오이카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뒤편에서 서로 손잡고 가자는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시야 건너편에서 오이카와는 입을 바삐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팔짱을 낀 유카타 소매가 아래로 늘어져서 흰 속살이 드러났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조그맣게 난 두 개의 눈구멍은 오이카와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애초에 옆은 볼 수 없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까마귀 가면 속의 카게야마의 시야는 어두웠고, 고요하고,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만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그랬다고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까마귀 가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몇 번 치이면서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가는 도중,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며 걸음을 멈췄다. 이와이즈미의 곧은 눈동자가 이내 비껴졌다. 그렇구나. 지금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 쿠니미가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우였듯이, 카게야마는 산의 외로움을 피해 도망쳐 온 새끼 까마귀였다. 카게야마는 다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이제 다섯 발자국 앞에 있었다. 유카타가 감싸고 있는 등은 곧게 뻗어 있었고, 코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빛무리를 형성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몰랐다. 그의 등만 보이면 달라붙고, 서브를 가르쳐 달라 조르는 게 일상이었던 카게야마의 본능일지도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까마귀 가면 속에서 저의 숨 쉬는 속도가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두 발자국 앞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면 시야에 오이카와는 없었다. 저 멀리서 둥, , 둥 일정한 속도로 북소리가 들렸다. 북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북 치는 장인이 치고 있는 건 제 심장일지도 몰랐다. 지금 이 축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이카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불꽃놀이인가? 옆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토비오쨩?”

뒤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뒤를 돌아보려던 카게야마는 몸만 조금 떨고, 발을 다시 움직였다.

토비오,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오이카와가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옆에서 왜 생사람 잡냐라며 오이카와의 등을 한 대 강하게 때렸고, 주변 사람들은 토비오?’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야! 그치만 이와쨩! 토비오인걸!”

카게야마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거의 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속도였다. 사람들에 끼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적어도 오이카와 선배만큼이라도. 몸이 조금 더 다부졌다면, 평소에 근력 트레이닝을 열심히 했어야지. 자책하는 목소리와 후회감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북 치는 장인이 두들기는 심장에 차올랐다. 콧속으로 탄내가 스며들어왔다. 멀리서 불꽃을 쏘아 올린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축제는 무언가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 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오이카와 선배를 보지 말 걸,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까마귀 가면을 쓰지 말 걸, 화약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탄내의 정도가 짙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걸.

토비오!”

어깨가 강하게 잡힌 아픔이 카게야마의 전신에 퍼졌다. 겨우 멈춘 양 다리가 후들거렸다. 힘들게 서 있는 몸이 살며시 비틀거리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돌리고 마주 바라봤다.

왜 도망치는 건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좁은 시야는 다시 오이카와로 가득 찼다. 예쁜 홍차 빛 눈동자 위로 작은 땀방울이 한두 방울 걸려있었다. 까마귀 가면 속은 지나치게 더웠고, 숨소리가 엉망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왜 알아보는 건데요.”

?”

오이카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잔뜩 어긋난 호흡에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오이카와는 당황스러웠다. 너무 세게 잡은 건가, 어깨에 실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왜 알아보는 건데요. 까마귀 가면, 썼는데…….”

아니, 토비오쨩이잖아?”

그러니까, 왜 알아보냐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원망이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까마귀 가면을 벗겼다. 손길이 지나치게 상냥해서, 카게야마는 한차례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고 싶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어떤 표정인데요.”

못난이 표정.”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땀으로 눅눅하게 젖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좋게 말해도 쓰다듬는다고는 할 수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내가 어떻게 설명해? 토비오쨩은 그냥 토비오쨩이잖아? 머리를 짧게 잘랐어도 토비오고, 하복을 입든 동복을 입든 사복을 입든 토비오고, 까마귀 가면을 써도 토비오고.”

축제로 앞뒤가 안보이고 꽉꽉 막힌 곳에서 만나도요?”

.”

북 치는 장인이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북소리도 뚝 끊겼다. 축제 소리는 저 멀리 멀어지고, 콧속으로 끝도 없이 들어오던 탄내는 점차 사라졌다. 카게야마의 시야는 다시 넓어졌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수많은 사람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뒤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써 끝났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왼쪽 조금 위쪽에선 저쪽 타코야끼가 더 맛있다며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오이카와는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 있든 오이카와였다. 여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도, 멋진 유카타를 입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그렇듯.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까마귀 가면을 다시 받았다. ‘써봤자 소용없다니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안 쓸 거예요. 안 써도 괜찮으니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천천히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처음 들었던 일정한 리듬 그대로였다.











오이카게 전력 #4 발렌타인 데이

 

 




 

겨울 끝자락에는 항상 달콤한 향이 머물렀다. TV나 길거리 현수막에는 달콤한 사랑을 전하라는 문구로 가득 찼다. 달콤하다는 건, 콧속을 따끔하게 채우는 겨울 구름 냄새보다 더 따스한 걸까. 어머니가 자주 보던 드라마 속 커플은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그렇게나 따뜻한 거냐고 묻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몸은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놔두고 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친 겨울바람의 기승 속에서 연습하면서 몸을 데우는 것과는 또 다른 걸까. 어머니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토비오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을 스가와라 선배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알아?”

알아요. 화이트데이랑 반대되는 말이죠? 화이트랑 반대면 블랙 아니에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기는 츠키시마를 한껏 의식하면서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츠키시마는 또 코웃음 칠 뿐이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생글 웃더니, 목도리를 여미며 말했다.

, 반대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 날에 주는 물건이 뭐인진 알고 있어?”

, 알아요. 초콜릿이랑, 사탕이잖아요.”

잠시간 머릿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릿이었는지, 사탕이었는지 고민을 거쳤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며칠간 떠들썩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높은 옥타브의 재잘거림이 생각났다. 결국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는 거로 결론이 났던가. 수제가 역시 좋다느니, 진심이 담겼다느니. 초콜릿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수제라면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걸까. 가게에서 파는 걸 사면 진심이 아닌 걸까.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가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네. , 맞아. 곧 있으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설명하려고 준비했다가 필요가 없어진 걸 알았는지 잔뜩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뱉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이 하얗고, 또 서늘했다. 왜 발렌타인 데이가 이 차가운 겨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달콤한 향내가 뜯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덕지덕지 붙은 계절이 좋을 텐데. 하필 2, 겨울 끝자락이 날카로운 이빨을 사람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이 때가 아니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난 몇 년간 나와 상관없던 날에 대한 생각이 물에 풀린 물감처럼 점점이 퍼졌다. 구태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 선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가 어떤 날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은 올해도 세이죠의 부실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아니, 어쩌면 올해는 많이 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이 받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만인에게 초콜릿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었다.

카게야마는 받을 사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짓궂은 얼굴로 왕님은 얼굴만은 꽤 인기 많으니까라고 했지만, 항상 츠키시마가 말하는 얼굴만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짜증 나니까 한번 째려봤다. 초콜릿은 어머니에게서 받는 게 전부였다. 올해가 어떨지는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는 걸까, 받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기에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말하든 일반적이진 않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일반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한 명이 꼭 무언가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이런 날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낯설었다.

받아야 하는 건지,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뭘 줘야 할지도요.”

줄 사람은 있는 거야?”

스가와라 선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걷던 히나타나 다이치 선배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설명을 요구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 카게야마, 무슨 소리야? 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히나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줄 게 있다면 줄 사람이 있는 거고, 줄 게 없다면 없는 거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과 무언가가 다르단 건 알겠는데, 어디에서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맹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한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준비한 초콜릿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수제는커녕, 가게에서 톡 치면 쏟아 내릴 정도로 수많은 양의 초콜릿을 쌓아올린 곳에서 젠가를 하듯이 하나를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겠지만실제로 여자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만드는 아이가 몇 있는 것 같았다어쨌든 오이카와 선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게 초콜릿 기대한다는 둥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면 키스해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손을 잡고 싶으면 말없이 내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듯 이상한 관계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괜찮았다.

, 어쨌든. 줄 사람이 있든 없든 그건 카게야마의 문제고. 올해 다들 하나씩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요! 저도요!”

스가와라 선배가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고, 히나타는 내게 향했던 눈을 돌려 땅에서 휙 뛰어올랐다. 스가와라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웃었다. 입꼬리가 얇게 올라가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볼이 말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

 

 

오늘도 춥네. 토비오, 목도리 정말 안 해도 괜찮아?”

, 괜찮아요. 목에 뭔가 닿는 게 싫어서.”

그 말 몇 번이고 들었지만, 용케 감기에도 안 걸리네. 몸은 진짜 건강하다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풋 웃으면서 목도리를 더 강하게 묶었다. 맵시 좋게 묶인 목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서 형태를 만들고, 오이카와 선배는 왼쪽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쇼핑백 끈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상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하트 모양에 랩핑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고, 포장지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얘기하던 초콜릿 중에 몇 번이고 들었던 유명 상표의 포장지도 보였다. 쇼핑백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오이카와 선배는 그저 웃으면서 부실에 남은 건 내일 가져가려고.’ 중얼거렸다.

한 개 먹을래?”

그걸 왜 제가 먹어요.”

맛있잖아.”

오이카와 선배한테 준 거잖아요. 저한테가 아니라.”

그럼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한테 주는 걸로.”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단순한 말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생각하고 마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이카와 선배가 강제로 내 입에 각진 사각형의 초콜릿 한 개를 입에 집어넣은 까닭도 있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입안 양쪽에서 조금씩 묻어난 침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혀끝에 진한 단맛이 퍼지고, 코에서 초콜릿 향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선배는 볼을 물들이며 웃더니, 손가락에 조금 묻어나온 초콜릿을 살며시 핥았다. 붉은 혀와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코와 입을 침식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맛과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초콜릿이 오이카와 선배의 윗입술 끝자락에 묻었다. 흰 피부는 한겨울 날씨에 보들보들하고 투명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좋아요.”

……?”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는 초콜릿을 핥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입에서 전부 녹은 초콜릿은 아쉬운 단 맛만 남기고 약간의 까슬 거리는 쓴맛이 입 점막을 긁었다.

그거 지금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되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이해하는가. 내 말에 등장도 하지 않은 키스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토비오쨩은 내 손가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상아조각처럼 자리 잡은 손톱은 분홍색 조약돌 같았다.

손가락은그것도, 좋지만. 입술이 좋아요. 예쁘잖아요.”

예쁘다고?”

. 오이카와 선배한테 초콜릿을 주는 여자들은, 어쩌면.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지 않았을까요.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먹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사 오는 게 좋았을지도요. 발렌타인 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러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토비오 역시 지금 키스해달라고 하는 거지?”

제 말 제대로 들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키스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조금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 선배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알았으니까, 토비오. 초콜릿 한 개 더 먹어.”

싫다고 말하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안에 침투해 온 초콜릿의 단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맛있어? 오이카와 선배는 달콤함이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 쇼콜라티에 되고 싶다던 아이였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오이카와 선배는 쇼핑백 안의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웃는 얼굴이 귀엽고, 이 아이는 보조개가 귀여워. 이 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얘는 어깨선이 동그랗게 퍼져서 참 예쁜 애야. 방금 줬던 초콜릿을 만드는 아이는 말했듯이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들고. 토비오,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 모든 사람을 기억할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은 알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원하는 토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기억 회로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는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의 일을 가끔 말할 때면 아무리 나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그 여자아이들도 모두 오이카와 선배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속 방 하나가 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울진 않지만.

, 이 아이들은 그렇게나 귀엽고 나에게 초콜릿까지 주잖아? 토비오가 말했듯이 난 달콤한 걸 좋아하고.”

.”

그래도 난, 초콜릿 한 조각 주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토비오가 좋아. 토비오를 좋아하는 거야. 내 입술이 좋다는 토비오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토비오의 귀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끌어안고 싶어.”

…….”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잖아? 토비오, 초콜릿 맛있었어?”

……저기, .”

다행이네.”

오이카와 선배는 살며시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입안의 초콜릿은 다시 순식간에 녹아 혀끝을 아찔한 단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려는 여자아이의 추억은 내 입술 안에서 녹았다. 그 뒤에 애매하게 남은 쓴맛이 조금 견디기 힘들어서, 오이카와 선배의 손을 먼저 잡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마주 잡아준 손에서는 방금 먹은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오이카게 전력  #3  안경

 

 




눈이 마주치고, 눈을 한번 깜빡였다. 깜빡, 하고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 인화된 사진 속 오이카와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기는 눈을 닮았다고 하던가, 눈이 사진기를 닮았다고 하던가. 무엇이 먼저든 간에, 눈은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구나하고 납득하고마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씨를 담아내기에는, 그렇다. 눈으로는 부족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진기 1개로조차도. 수십 개의 사진기가 오이카와씨를 감싸는 풍경을 상상했다. 눈부신 섬광이 몇 차례 지나가고 잠시 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나면 오히려 그 사진은 물먹은 듯 흐려지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생각은 신경전달의 다발로 뚝뚝 끊기며 전달되다가 이윽고 온전히 끊겼다. 오이카와씨가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다시 깜빡이고 마주 보자, 오이카와씨는 내 앞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이카와씨 뒤편은 큰 통유리였다. 넓은 카페 안의 구석진 자리는 항상 우리가 앉는 자리였다. 유리를 등지고 앉은 의자 옆에는 키가 큰 인조 산세베리아가 넓은 잎가지를 퍼뜨리고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석진 카페 안쪽 자리의, 흰색 둥근 화분으로 가려진 의자 안쪽에 앉아서 오이카와씨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뒤편의 통유리에는 석양이 몰려드는 거리를 몇몇 사람이 분주히 걸어갔다. 낮이 잠기고 붉은 바다에 삼켜지는 이 시각 즈음의 오이카와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쁘셨나요.”

오이카와씨가 끼고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보고 말했다. 오이카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수 없는 안경이야.”

그럼 왜,”

토비오한테도 선물해줬잖아. 방금, 안경.”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이카와씨와 똑같은 검은색 뿔테 안경이 손에 들려있었다. 언제 받은 건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진기와 눈에 대한 생각을 하기 이전일 것이다. 아이스티를 주문하기 전이던가, 그 이후던가. 오른쪽에 놓인 아이스티 속 각진 얼음은 4개 정도 둥둥 떠서 아이스티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안경을 들어 올려 코에 걸쳤다. 귀 옆에 닿은 감각이 서늘했다. 오이카와씨가 보이고, 오이카와씨가 쓰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 너머의 안경, 그 안경의 짧은 수평선 너머의 오이카와씨는 웃음을 참는 듯 이상한 표정이었다.

안 어울려.”

무슨 상관이에요알고 있어요.”

선글라스를 쓴 적이 있다. 아오바죠사이로 가고, 오이카와씨를 만나고 금방 벗어버렸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웃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연기처럼 흘러다니는 사람이었다. 고정된 이미지도, 형태도 없이 녹아내린 채로 흘러다니는 오이카와씨는 내게 안경을 건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형상이 부서지는 오이카와씨를 이 안경으로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가르쳐줘요, 오이카와 선배. 어릴 적처럼 마냥 물어보는 곳에 답이 오리란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씨도 가르치는 것은 적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를 대상으로는.

안경을 다시 벗으려고 손을 들었다.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손끝은 벗는 방법에서도 한참을 방황했다. 안경을 어찌 쓰고 벗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진은 찍는 법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눈을 깜빡여 대상을 뇌 속에 전기처럼 박아 넣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중학교 시절 그 방법을 알려준 건 오이카와씨였다. 정확히 말한 건 오이카와씨의 배구, 서브였다. 뇌 속에 무언가를 찍어놓고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입이 말랐다. 좋은 선생이 되진 못하는 오이카와씨는 안경을 어설프게 벗는 내 손끝을 잡고 잠시간 소리 내어 웃었다.

벗지 마. 쓰고 있어.”

왜요. 답답하다고요.”

있잖아. 토비오.”

안경에 닿아있던 내 양손을 잡아 테이블에 단단히 고정한 오이카와씨는 몸을 기울였다. 오이카와씨 뒤쪽 통유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씨의 눈동자와 속눈썹, 가는 눈썹이 전부였다. 눈의 움직임에 따라 흰 볼과 깨끗한 코끝,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보였으나 이윽고 나는 오이카와씨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몇 가지 할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말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결국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스티 속 얼음이 모두 녹을지도, 같은 생각이 가끔 튀어 오르는 것만큼 의미 없었다.

눈동자는 영혼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니까,”

오이카와씨의 속눈썹이 가까이 다가왔다. 둔탁한 플라스틱 제제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경이 조금 내려앉았다. 안경끼리 부딪치는 순간, 오이카와씨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옅은 홍차 빛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을 마주 본다는 건,”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안경끼리의 마찰음이 빗소리처럼 간간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오이카와씨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오이카와씨에게 잡혀있던 양손은 어느새 그와 마주 잡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그가 새겨졌다. 찰칵, 셔터음이 들리면 머릿속 필름은 돌아가고 언젠가 인화할 때를 기다린다. 머릿속 사진 폴더는 오이카와씨로 가득했지만, 무엇 하나 초점이 맞는 사진이 없었다.

영혼을 마주 본다는 뜻인지도 몰라.”

오이카와씨는 눈을 천천히 뜨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안경 너머에서, 속눈썹끼리 키스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그에 맞춰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마주보는 눈동자 사이에서 시야는 흐려졌다. 오이카와씨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영혼이라는 것도 결국 눈동자에 갇혀 있는 거니까,”

초점이 흐린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는 눈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경 너머의 눈동자, 또 그 눈동자 너머의 영혼, 영혼 안의 안경 속에서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사진기가 비추는 섬광이 지나고 나면 오이카와씨는 전부 녹아내려 머릿속 폴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몇 단계의 프리즘을 거친 뒤의 오이카와씨가 거꾸로 된 사진일지, 반쪽이 잘린 사진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짧고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오이카와씨의 영혼은 극히 단시간이기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영혼도 눈동자라는 프리즘을 지나면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영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주 봤다. 속눈썹끼리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눈을 마주쳤다. 코끝이 서로 맞닿을 지점까지 온다면, 영혼끼리 닿아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의 거리였다. 안경 너머라 해도,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셔터 소리가 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왔다. 오이카와씨의 입술 감촉이 새겨져 있는 사진이었다.












오이카게

너를 사랑한다는 것 01








너를 만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는 사람만 가는 편집샵에서 평소 사고 싶었던 재킷을 사고, 조금 이르지만 초겨울 용으로 부드러운 털로 짜인 갈색 목도리를 샀다.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목도리도 하나 손에 들었다. 가게 밖에는 몇몇 사람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지나간 여자 두 명은 군청색 털모자를 세트로 쓰고 있었다. 입술이 붉었다. 나는 그 여자들 뒤에 자리를 잡고 몇 명의 행인으로 이루어진 기류에 몸을 맡겼다. 가을에서 겨울로 지나가는 계절의 자리에는 낡은 낙엽 잎만 몇 개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목도리 두 개가 담긴 갈색 봉투를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잡고, 얇은 코트를 반대쪽 손에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정의는 아주 모호했다. 나에게는 지나간 계절만큼이나 의미 없던 시간들이 너에게는 세상 마지막 날보다도 중요한 날이었을지도 몰랐다. 나의 계절에서 네가 없던 시간의 축은 일그러져 아주 빠르고도 천천히, 때로는 거꾸로 흐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하루라는 날은 지나갔다. 시간이란 그랬다. 시침이 없든 분침이 없든 혹은 그 두 개가 모두 존재하지 않아도 의식 없이 흘러가는 게 시간이었다.

앞서 걷던 여자 두 명이 오른쪽 골목길로 발을 틀었다. 유명한 호텔의 애프터눈 티세트 광고 간판이 골목길 앞에 서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다르트류가 프린팅된 종이는 그냥 보기에도 고급 재질이었다. 3단 트레이 앞에는 흰색에 선이 예쁘게 자리 잡은 도자기와 찻잔이 놓여있었다. 찻잔 안의 홍차가 김이라도 오를 듯 선명한 빛깔이었다. 군청색 털모자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따라 들어간 뻔한 다리를 멈추고 다시 다른 대열에 끼어들었다. 거리 양쪽에 놓인 건물은 3층 건물도 있었고 10층 건물도 있었다. 얼마 전 모 유명 가수가 공연했다던 넓은 콘서트홀도 있는 곳이었고, 동네 구멍가게 수준으로 물건 몇 가지만 들여놓은 슈퍼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너를 만나기로 한 곳은 한 블록 넘어서 테라스가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초겨울 바람이 바닥을 때리고 낙엽 몇 개가 팔랑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얼마 전 머리를 자른 뒤로 뒷목이 서늘해서, 방금 산 목도리를 한번 둘렀다. 코트는 손에 들고서 목도리만 두른 모습이 내가 봐도 우스울 것 같았다. 넌 웃지 않겠지만, 조금 이상하게 쳐다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여름 한낮이었다. 손으로 가려도 각진 햇볕이 머리를 덮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야기에서 30분에 한 번씩만 버스가 오는 버스정류장이었다. 처음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때에 만들어졌던 버스정류장은 페인트칠 한 곳이 군데군데 벗겨져 시커먼 회반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몇 년 전 새로 단 유리 천장은 햇빛을 끌어모아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뒤편 나무그늘에서 자라기 시작한 담쟁이 넝쿨이 언제인지 모르게 뒤편 기둥 반 이상을 휘돌아 감쌌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으면 으레 그렇듯, 버스를 탈 일도 없는데 괜스레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차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오지 않는 너에 대한 생각이 더위로 눌린 의식 안에 수북이 쌓였다.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확신으로 가기까지는 이 자리에 나올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기대라는 품목이 심장에 남아있던 것 같다. 기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덧없는 믿음이 버스 한두 대가 지나갈 때마다 여름 태양에 스러져갔다. 핸드폰을 두고 나온 건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약속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의 축은 가끔씩 흔들거렸고, 그날따라 지구 전체가 누워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씨."

네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언제인지 모르게 나는 얼 풋 잠이 들어 있었다. 꿈일까, 현실일까 확신이 들지 않는 경계에서 나는 서 있었고 그건 꿈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너는 검은색 티셔츠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포시 열린 입술 사이에서 약한 한숨이 나왔다. 네 뜨거운 손이 맞닿아있는 어깨가 다른 조직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토비오."

잠긴 목소리였다. 네 이름의 운을 떼고서부터 제 박동을 찾지 못하는 심장이 강한 햇볕에 짓눌려 찬찬히 속도를 되찾았다. 카게야마 뒤편으로 버스가 한 대 멈췄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자고 있는 한 여성만이 유일한 승객이었다. 버스 출입문이 느릿하게 열리는 걸 너와 내가 바라봤다. 잠시간의 시간적 간극이 지나고 버스 문이 다시 닫혔다. 몇 차례 바닥을 긁는 시동 소리가 나더니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창문에 기대고 있던 여성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찰나는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르는 척하려 했던 사실은 네 눈동자 안에 있었다. 바람 한편 때문에 흔들린 담쟁이 넝쿨의 버서석거리는 소리가, 기대라는 의미 없던 믿음이 애초에 가졌던 확신으로 바뀌는 소리 같았다. 생각이 갈음하는 한 장면에서는 소리도 운을 띄워주는 법이다.

"문자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핸드폰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

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너와 나 모두 알고 있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고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이 몇 번 왕복했다. 유리 천장이 모아 내린 햇빛이 닿아 네 뺨을 비추고 또 빛났다. 너는 닫혀 있던 입을 몇 번 여닫은 후, 다시 열었다. 나는 입을 열어야만 했다. 눌린 배 안에 힘을 주고, 잠긴 목에서 버서석 거리는 소리라도 내야 했다. 알 수 없는 책임감은 어디서 오는 거였을까. 어쩌면 난 그제야 내가 너보다 2년 선배라는 사실을 억지로 인식한 걸지도 몰랐다.

"헤어지자고?"

"……."

너는 약간 놀란 듯 어깨에 둔 손을 조금 떨었다. 열렸던 입이 다시 닫혔다. 긍정하는 데에는 말 한마디보다 행동 하나가 더 진실을 담고 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게는 더욱이 그랬다. 확신은 순간 진실로 바뀌어 빠른 뇌내 변환을 거쳤다. 어깨에 놓여있던 네 손을 잡았다. 너에게 닿은 부분만 다른 조직으로 변했다. 시간의 축은 다시 조금씩 어긋나,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다시 혼란을 자아냈다. 다만 가로젓지 않는 네 얼굴은 진실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오이카와씨."

너는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왜 네게 그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또 왜 네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밟힌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연스레 내게 속해 있었던 애정의 조각은 몸에서 떨어져나와 제 자리를 찾아갔다. 너는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이 되어있었다. 사랑의 말미를 끊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나의 손이 더이상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지나간 버스를 떠올렸다. 30분에 한 번씩 버스가 온다고 해도, 같은 버스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새삼 지나치게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숨이 끊길 듯 아픈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내가 들은 너의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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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조그맣게 등을 말면 한 마리의 작은 곰이 되진 않을까 착각할 정도로 아기 같은 몸이었다. 한 팔에 폭 들어오는 어깨, 깨물면 말랑말랑한 떡처럼 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보드라운 귀, 건포도 알처럼 작은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맸다.

배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랐을 것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두 입술이 작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첫인상은 작다인형 같다였다. 굳이 무언가를 더 붙인다면, 오이카와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지.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얏호, 토비오쨩안녕, 이라고 말하려는데. 왜 그런 표정인 거야?”

양 볼에 불만 주머니를 가득 담은 햄스터보다는 무서운 표정인카게야마가 배구공을 들고 소리도 없이 오이카와 옆으로 다가왔다. 배구공 너머의 작은 포도알 같은 눈동자 두 개가 오이카와를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가르쳐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그보다 뭘 말하는 건지 제대로 말해줄래?”

거짓말쟁이.”

토비오쨩, 오이카와씨는 팬클럽 여자아이들에게 맹세코 거짓말은 안 하거든? 네가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 ‘우유 빵 사다 주면 토스 요령 가르쳐주는걸. 역시 너였구나! 부실에서 자고 있을 때 우유 빵 얼굴에 던지고 간 녀석이!”

오이카와는 이제야 범인을 찾았다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잔뜩 헤집었다. 카게야마는 얼마간 오이카와의 공격을 받더니 입이 불뚝 튀어나왔다.

그치만! 오이카와 선배 자주 말하잖아요. ‘우유 빵 사면 알려주지라고.”

너한텐 말한 적 없는데.”

…….”

그 말이 사실인지라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입을 쭉 내밀고 강한 호소가 담긴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이런 흐름은 이미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토비오쨩한텐 가르쳐 줄 생각 없으니까. 애초에 가르쳐 줄 의무도 없고, 네가 말하는 요령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연습도 없이 요령이나 배워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게 비겁한 거 아니야? 토비오쨩 말로는 연습, 연습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겁한 행동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

……,”

카게야마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 울먹울먹 물이 스며들더니,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방울을 뚝 떨어뜨릴 것 같이 아래 속눈썹에 물방울이 가득 고였다. 이런, 큰일 났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배구공을 들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카게야마는 버려진 새끼 곰 같았다. 우두커니 서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걸 참는 게 한계인 작은 중학교 1학년생은 결국 1학년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후배 좀 괴롭히지 마라.”

카게야마를 피해서 구석진 자리로 온 오이카와 옆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비난하는 것도, 타이르는 것도 아니라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낮게 내뱉은 말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후배 괴롭히는 거 아니야. 토비오쨩만 괴롭힌다고.”

카게야마도 후배잖아. 네가 뭣 때문에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방금 그건 오히려 네가 더 비겁한 거 아니냐. 꼴사나운 모습 보이면 내가 패버린다.”

이와쨩 진짜 누구 편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연습이나 해라, 바보카와.”

이와이즈미의 날카로운 말투에 네네. 입술에만 겉도는 말을 가볍게 내뱉고, 오이카와는 가까이 있는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비겁하고, 유치한 건 자신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다른 부원에 비해서 달성하고 있는 엄청난 연습량이나, 연습에 있어 중학교 1학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진지한 태도 등. 적어도 그에게 연습에 있어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건 이 많은 부원 중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짜증 난다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공을 들어 올렸다.

귀엽지도 않고, 인상도 더럽고, 툭하면 귀찮게 굴고. 하나도, 하나도

하나도 맘에 안 들어. 숨을 참고 던진 공은 궤도를 크게 벗어나 체육관 귀퉁이에 꽂혔다. 오이카와는 다시 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이 싫었다.

넌 다르구나.”

오이카와는 언젠가 들었던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에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감독은 오이카와를 개인적으로 불러다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다르구나. 그래서 많이 힘들었을 거야. 언젠가 배구가 즐겁지 않은 시기도 올 텐데, 그래도 계속할 수 있겠니?”

힘든 연습은 지금도 싫어하고요,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은 건 제 탓이 아닌데도 자꾸 뭐라고 하는 선배들도 싫고요, 땀으로 몸이 끈적해지는 것도 싫어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너와 비슷한 사람은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가 볼 때, 너 같은 애가 이 세계에 적진 않거든. 단지 같은 세터로서 네가 어떤 입장인지 네 자신만큼 이해할 수 있는 애가 있을진 모르겠다만. 이 배구계에 한 명쯤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외롭지만은 않지?”

너무 일찍 만난 건 아닐까요, 감독님. 오이카와는 인상을 구겼다. 방금 던진 공은 아슬아슬하게 아웃라인을 넘어섰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도 저와 비슷하다는 걸. 어쩌면, 많은 면이. 또 어쩌면, 많은 면이 다를지도 몰랐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남으로서 저에 대해서 더 깨달은 점이 많았다. 아마 전에 오이카와와 대화를 나눴던 감독이 지금 카게야마를 만난다면, ‘넌 다른 존재구나.’ 정도를 말할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또한 카게야마를 감독으로서 만난다면 그렇게 말했겠지.

필요 없는데 말야. 오이카와는 겨우 원하는 궤도로 날아간 공을 보면서 천천히 미소 지었다. 필요 없었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하고, 어떤 부분을 가르쳐주면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그런 눈은 필요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건 너무나도 잔혹하고적어도 오이카와에게는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카레를 좋아하고, 만두를 두 볼 빵빵하게 채우고 오물거리는 그 작은 아이는 오이카와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아이였다. 또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존재였다. 오이카와는 침을 삼켰다. 쳐다보는 눈빛도 싫었다. 동그란 눈동자를 빛내며 저한테 찾아와 가르쳐주세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입이 싫었다. 바보같이 곧이곧대로 들으며, 저가 해내는 모든 일을 아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작은 머리통이 싫었다.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을 거니까.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공을 다시 한 번 들어 올렸다. 이건 거야. ‘오이카와 토오루의 거라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작은 어깨가 놀란 듯 조금 들썩이더니,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배구부에 입부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飛雄)라니, 독특한 이름이네.”

연습이 끝나고 어쩌다 우연히 둘이서 돌아가게 된 날, 벚꽃잎이 카펫처럼 깔린 길을 걸으면서 오이카와는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그 정도의 말만 하고선, 카게야마는 다시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주 쓰는 한자는 아니었다. 남자애 이름으로 친다면야, 뭐 강해 보이니까 좋지만.

귀엽지 않잖아.”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눈썹도 구부린 채.

이름이 귀여울 필요는 없잖아요.”

중요한 문제거든? , 쨩 붙이면 귀엽지 않을까? 어때, 토비오쨩?”

이상해요.”

잔말말고. 토비오쨩은 조금 귀엽게 들리네. 새끼 다람쥐 같고.”

쨩만 붙였다고 그런 느낌이 들진 않는데요.”

넌 항상 말 한마디가 더 많다니까. 건방진 토비오쨩.”

벚꽃잎이 하롱하롱 떨어져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른 봄날치고 새가 높이 나는 푸근한 날씨였다. 카게야마는 입꼬리를 꾸물거리면서 볼을 슬며시 물들였다. 귀 끝이 벚꽃처럼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건가.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은 어깨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여서,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싶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힐 정도로 불어오자, 벚꽃잎의 홍수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동그란 접시 모양의 구름 사이사이에 벚꽃잎이 하늘거리며 흘러다녔다. 귀 끝이 붉어진 카게야마 토비오가 귀여웠던 봄 첫날이었다.




-

오이카게 전력 첫 글이 정말 이상해서..죄송합니다...ㅇ<-<

오이카게 안티 아니에요.. 오이카게 쵱컾입니다.. 지각한데다가 이런..글을...ㅠ.ㅠ..


두 사람의 첫만남은 꽤 좋지 않았을 거 같고, 카게야마랑 오이카와 서로에게 좋든 나쁘든 자극을 주는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생의 토비오는 좀 더 감정을 숨길 줄 몰랐을거같고, 오이카와는 사고가 어린 중딩이었을거같네요.

그런 두 사람도 봄날처럼 따스한 날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요. 그냥 그런 생각에서 나온 글입니다. 하하..:D

다음전력은 좀 더..열심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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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Ring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 약지는 쉬질 않았다. 중학교 시절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부터, 작은 반지는 거기서 빠지질 않았다. 반지의 종류, 어떤 형태, 혹은 박힌 보석의 모양이 바뀌는 날은 있어도 약지가 비어있는 날은 없었다. 연습할 때 반지는 잠깐 모습을 감췄다가, 연습이 끝나고 여자친구와 만나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반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조그만 걸 그렇게 잃어버리지도 않고 용케 뺐다 꼈다 한다고 감탄도 했다. 테이핑도 손수 정성스레 묶는 섬세함이 거기서 드러나는 걸까, 반지는 깨끗하게 보관되었다가 다시 손가락 안에 자리 잡았다.

 

그게, 그렇잖아요.”

 

오이카와 선배의 길고 가느다란, 손톱이 잘 정돈된 약지에는 항상 예쁜 모양의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오이카와 선배는 그 반지를 다시 끼웠다. 몇 번이고 손을 여기저기 들었다 놨다 하며 반지가 빛을 반사하고 반짝이는 모습을 줄곧 바라봤다.

 

누구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그 손가락이 쉬는 건 아주 잠깐의 기간뿐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면 거짓말같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선 반지가 사라졌다. 오이카와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는 일종의 증거였다. 가설을 입증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물적 증거였다.

 

생각하잖아요. 누구라도. , 정말 좋아하는구나. 여자친구.”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가 아주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시합이 끝난 후, 오이카와 선배는 한동안 새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단순한 변덕 정도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날을 새는 것보다 달을 세는 게 더 빨라질 무렵 그 자리가 비어있는 게 당연한 때가 천천히 찾아왔다. 그 사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는 반지가 남아있던 자국이 스르르 없어지고, 대신 선명한 테이핑 자국만 남아있게 되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내가, 남자인 내가, 오이카와 선배와 사귀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어땠냐고요?”

. 반지 받았을 때요. 전 그게 제일 궁금하네요.”

화났어요.”

화가 났다고요?”

.”

 

토비오쨩, 이거.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오이카와 선배는 입을 열었다. 갈색 각설탕 2개를 졸인 목소리였다. 달콤하고, 입 끝에서 녹아버리는 목소리. 내 손을 천천히 가져가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은 목소리보다도 조심스러웠다. 사귈까, 라는 애매한 말로 사귀기 시작한 지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365일하고 3시간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 날은 사귀고 나서 1년째였다.

이게 뭔데요.

생애 처음 태어나서 모르는 척이란 걸 해봤다.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구부러진 눈썹 형태에서 이미 오이카와 선배는 눈치챈 모양이었겠지만. 김빠진다는 듯이 웃더니 무슨 표정이 그래? 핀잔을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골랐다고. 아무래도, 남자용으로 2개는 없더라. 사이즈 조정을 좀 한 것뿐이고, 한번 껴보는 게 제일 좋을걸. 입술을 움직이며 혼자서 열심히 설명하는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멍한 귀 뒤편에서 울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반지를 소중하다는 듯이 들어 올려서, 내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우려 했다.

하지 마세요. 개미 소리도 이보단 크겠다. 자학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대신 손가락을 움츠렸다.

토비오?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에 들린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비슷하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과 비슷했다. 어쩌면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몰랐다. 반지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 몇 번이고 바뀌었던, 지독히도 가벼웠던 그 반지들과 같은 색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하잖아요. 너무하다고? 자꾸 억울한 감정이 들어 이상하게 눈이 시큰했다. 멍청아, 이런 데서 이상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머릿속 카게야마 토비오가 뭐라뭐라 말하는데도 웅얼거리는 물소리로 바뀌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하다고요. 하나도, 오이카와 선배가 아주 조금도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안 하는 건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되잖아요. 언젠가, ―…헤어지는 건알고, 있으니까.

아니, 토비오. 지금 무슨 소린데?

반지 얘기하고 있잖아요.

반지가 왜 헤어지는 얘기가 되는 건데?

반지니까요.

아니, 무슨 소리냐니까!

 

왜 웃으세요?”

아니,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알 거 같아요. 카게야마씨가 왜 그랬는지. 반지는 증거였으니까요.”

오이카와 선배는 몰랐어요. 저도 몰랐죠. 저희 둘 다 몰랐어요. 서로에게 무슨 의미인지.”

 

헤어지면 뺄 거잖아요. 뺏다가, 사귀면 새로 끼고, 다시 헤어지면 반지는 없어지고. 그런 과정 중 하나일 뿐인 거잖아요. 저도, 그냥 결국 똑같이.

뭐가 불만인 건데.

반지가 빠지면 저희는 헤어지는 거잖아요. 헤어지면, 반지는 빠지고. 그럼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은 다시 반지를 끼울 테고, 전 그냥 버린 반지나 가지고 있겠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이카와는 드물게 진지하게 화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붉게 물든 카게야마의 눈가를 훑었다. 부드럽게 잡았던 손에 힘을 주고선, 꽉 잡힌 카게야마의 왼손을 앙 깨물었다.

아얏! 날카로운 목소리를 흘린 카게야마는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겨우 그런 생각 때문에, 이 오이카와씨가 주는 반지를 거절해?

꽉 깨문 자국을 지나, 반지가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꼭 들어맞았다. 주문 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에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결국, 제 손가락에 들어가고 말았다. 언젠가 손가락에서 빠질 날만 기다리는 증거’.

이제 두 번 다시 반지는 안 살 거니까. 그걸로 끝이야.

그게 무슨 말인데요.

, 오이카와씨 왼손 약지에 끼워. 빨리.

거의 반강제로 오이카와의 약지에 세트로 만들어진 반지를 끼우고 난 뒤, 카게야마는 거의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최악이다. 하필 1년 된 날에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연애에 무지한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1년째 되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는 걸. 적어도, 이런 걸 하는 날은 아니잖아. 입 밖으로 당장에라도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만족스럽다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면서 반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내 왼손 약지는 이걸로 끝이니까.

?

이제 반지는 죽을 때까지 이거 하나뿐이라고. 비싼 거로 사서 다행이지, 녹슬 때까지 끼고 다녀야 하니까.

무슨 말인데요.

이해 못하겠냐고, 바보야.

오이카와 선배는 눈꽃이 닿아 녹는 것처럼, 순간의 키스를 하고선 다시금 웃어 보였다. 흰 눈처럼 새하얀 미소였다.

 

또 웃으시네요.”

두 사람이 귀엽잖아요. 전 제 아내랑 그렇게 재밌게 연애해본 적은 없거든요. 애초에 아내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죄송해요. 제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죠.”

괜찮아요. ‘재미나게 연애하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 . , 죄송해요. ‘주례얘기였죠? 좋아요.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 그 반지가 그거에요? 평생 하나뿐이라는 반지.”

. 결혼식 때도 이걸로 할 거라네요.”

오이카와씨나 카게야마씨나 정말, 엄청난 고집쟁이 같네요.”

워낙에 배구란 게 포기하면 지는 경기라서요.”

멋지네요. 두 사람 다. 약간 낡은 반지여도, 그 반지가 부러울 정도로요.”








-

키루님 생일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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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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