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과 마법사







 

다녀 왔습니다.”

카게야마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꽉 조여 맸던 운동화 끈을 풀기보다, 손으로 직접 운동화 뒤쪽을 누르며 신발을 벗었다. 연습이 끝난 건 오후 8시 반. 생각보다도 늦은 시각이었다. 며칠 전 비가 온 뒤 갑작스레 차가워진 바람 한가운데를 걷다가, 카게야마는 반년 전부터 사는 동거 집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다녀왔다고 고하는 건 아직 낯설고, 조금은 낯간지럽기도 했다. 매번 말하게 되는 건 억지로 만든 버릇이었다. 그가 가끔 내킬 때 말해주는 어서 와를 듣기 위해 만든 고집이었다.

“Trick or treat!”

신발장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불쑥 검은 물체가 시야를 가렸다. 초점을 맞추고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 생긴 모자였다. 표면이 전부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별가루가 뿌려져 있었지만, 만지면 전부 손에 묻어나올 것 같이 생긴 싸구려 모자. 모자의 모양을 따라 찬찬히 훑어보면 독특한 모양이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챙이 넓게 벌려진 모자는 언젠가 봤던 것 같은 마법사의그래, 마법사 모자였다. 모자 안쪽에는 가격 태그가 아직 붙어있었는데, 크게 ‘200이라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모자 옆으로 시선을 비껴 보내자 동거인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입술 끝이 묘한 모양으로 올라가고, 그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반년 전부터 함께 사는 동거인이자, 그의 연인본인 말로는 사귀어 주고 있는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평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Trick or treat’라니까? , 어서.”

오이카와는 모자를 제 몸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다른 한 손을 쑥 내밀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는 굳은살과 긁힌 상처 자국이 가득했고, 손바닥에는 곧은 손금 몇 개가 줄지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과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저건. 영어라는 건 알겠는데.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줄 알면서 말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 생각하니 작은 짜증이 일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귀찮은 얼굴을 하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온 손이 오이카와의 온기와 입맞춤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쳐 내더니,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진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얏! 뭐예요, 갑자기!”

간식 없지? 그럼 벌을 받아야지.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기어들어 와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 거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조금 전의 그의 미소는 온 데 간데없었다. 오이카와는 이마를 연신 문지르는 카게야마의 머리에 마법사 모자를 푹 눌러 씌우더니 자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가려진 시야를 보상하고자 마법사 모자를 고쳐 썼다. 오이카와가 있는 거실 왼쪽의 부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와.”

…….”

무어라 해주고 싶은 말을 눌러 삼켰다. 이제는 또 앞선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부르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신발을 마저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흰색의 2인용 소파가 정면으로 보였다.

거실부터 침실 및 욕실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가 선택한 색상의 벽지와 가구들이었는데, 오이카와의 취향은 평소 카게야마가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인테리어 전반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올리던 밝고 빛나는 색조가 아닌, 화이트 앤 블랙의(가끔 그레이가 섞인) 침착하고 단정한 색조였다. 가구들도 단순한 점과 선, 면의 조합과도 같이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동거 생활에 쓸 가구를 고르러 유명 가구 매장에 가서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보며, 그때도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씨 사고 싶은 것 사세요.’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오이카와는 찬찬히 웃으며 대답했다. 카게야마도 그 대답 뒤에는 입술을 다물고 묵묵히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지켜봤다. 오이카와가 부엌의 아일랜드 카운터에 놓을 의자로 온통 검은색의 바 스툴(bar stool)을 고른 뒤,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내뱉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랑 살면 이래도 될 것 같아서.’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가구를 고르든, 어떤 색조의 벽지로 방을 덮든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그와 달리 매우 신중히 색상과 디자인을 꼼꼼히 따졌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카게야마와는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산 물건 중 가장 밝고 투명한 색상은 연한 물빛과도 같은 민트색이었다. 그건 두 사람용으로 산 더블베드를 덮을 침대 이불이었다. 100% 솜이불에 적당한 두께로, 아침에 추위를 타는 카게야마와 밤에 추위를 타는 오이카와 모두 만족하고 잘 수 있는 적당한 온기를 선사했다. 카게야마는 왜 침대 이불만 그리 밝은 색상을 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그 민트색 이불만은 특별한 무언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왜 침대 이불이어야만 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토비오. 이리 와 봐.”

오이카와는 마법사 모자를 쓰고 부엌 근처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게야마를 불러들였다. 싱크대가 있는 안쪽 카운터와 평소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소인바 스툴이 놓여있는바깥쪽 아일랜드 카운터 2개까지 제외하고, 나머지 카운터 2개에 전부 호박이 가득했다. 아니, 호박. 호박이 맞나? 저 넓고 큰 모양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호박 중 하나를 들어 올리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었다. 호박은 오이카와의 얼굴 2개 크기였다. 그가 작은 얼굴의 소유자라 해도, 호박이 큰 건 사실이었다.

오늘 할로윈이잖아. 마침 늙은 호박이 세일해서, 몇 개 사와 버렸지.”

할로윈, 할로윈이요?”

뭐야, 알고 있었어?”

일부러인 기색이 역력하게, 오이카와는 눈썹을 들었다. ‘토비오쨩 의외네라며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기억을 더듬었다. 돌이켜보니, ‘마법사 모자를 본 건 할로윈을 주제로 한 TV 애니메이션에서였다. 그 안에서 한 마법사는 할로윈을 무척 좋아해서, 마법을 이용해 모든 마을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365일 매일을 할로윈 날로 지정했다. 그랬더니 사탕을 줄 어른이 없어 장난을 일삼고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어린아이로 변한) 마을 사람들을 보며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아아, 그래서 아까 현관에서. 카게야마는 왼쪽 위로 눈동자를 돌린 뒤 조심스레 말했다.

아이로 변해서 사탕을 받아내지 못하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날이죠?”

뭐야, 그 어딘가에서 주워온 듯한 인상은? 대충 비슷하긴 하네.”

오이카와는 낮게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발을 옮겨 호박에 둘러싸인 오이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보리 빛 조명 아래 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여러 가지 괴물이나 징그러운 인물로 분장해서 ’trick or treat‘라고 말하며 달콤한 과자 같은 걸 받는 날이야. 달콤한 걸 안주면, 장난을 치겠다는 말이지. 마침 호박도 있으니까, 잭 오 랜턴(Jack-o'-lantern)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너도 도와, 토비오.”

잭 오 랜턴……이 뭐예요?”

호박에 유령의 가면을 씌우는 거야. 잭이라는 유령에 관련된 얘기가 있다지만,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호박에 모양을 새긴 뒤 거기에 불을 피우면 완성이지.”

다시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니,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의 사람들은 모두 오싹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마법을 부린 마법사, 드라큘라, 늑대의 분장 등생각해보니 모든 날이 할로윈 날로 바뀌고 난 뒤 마법사는 마법을 부려 마을 전체를 장식하는데, 유독 호박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났다. 왜 호박이었을까, 그때도 조금 의문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 끝난 후 왜 호박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지만, 배구 경기가 시작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까지 떠올리고 카게야마는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만드는데요?”

먼저 호박 겉면에 얼굴 도안을 그린 뒤 위를 덮개처럼 잘라내고 호박 속을 파낼 거야. 도안을 따라 칼로 도려낸 뒤 그 안에 촛불을 넣으면 완성. 이것 봐, 초도 사 왔어. 작고 귀엽지?”

오이카와는 부엌 한쪽에 있던 작은 캔들을 카게야마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사과 향이 나는 바닐라 색의 손바닥만 한 캔들, 다른 하나는 깊고 아늑한 꽃향기가 나는 브라운 색의 캔들이었다. 오이카와는 기대되는 듯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런 작고 예쁜(?)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미 호박 겉면에 그려진 도안 두 개의 사악하고 악랄해 보이는카게야마는 오이카와씨랑 닮았네요라고 한소리 했다가 또 딱밤 한 대를 벌었다표정과는 좋게 말해도 부조화였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더해 딱밤 한 대를 더 벌 필요는 없으니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먼저 위부터 떼어내면 되는 거죠? 이 모양 따라서요?”

맞아. 손가락 조심해야 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내민 손에 칼을 쥐여주면서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홍차 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서 전날 밤의 저가 보이는 듯해, 카게야마는 물들기 시작한 얼굴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칼은 오이카와가 평소 쓰는 칼보다는 작고, 주로 과일을 깎을 때 쓰는 용도 같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예쁜 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가 칼을 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주로 부엌은 오이카와의 영역이다 보니, 카게야마는 가끔 그를 도와줄 때 빼고는 칼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세터로서 손가락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이카와는 어떻게 요리를 잘하는 걸까. 그가 만들면 포크 카레도 각별한 맛이 났다. 생각하니 또 먹고 싶어져, 카게야마는 내일 저녁은 카레로 부탁해볼까 생각하면서 호박에 손을 댔다.

!”

단단해!

!”

칼에 힘을 주고 강하게 밀어 넣자 그제야 약간 칼날이 흠집을 내고 들어갔다. 됐다! 조금 기쁜 마음까지 들면서 카게야마는 작업을 계속했다.

! , , 흐읏!”

……저기 토비오쨩. 열심인 건 좋지만, 이상한 소리 내는 건 그만둬줄래?”

! , ?”

카게야마는 몰두하느라 어느새 이마에 작게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뾰로통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그 검은 눈동자가 저를 곧게 바라보는 걸 느낀 뒤 한숨을 작게 뱉었다.

아냐됐어. 토비오쨩이 바보인 게 하루 이틀인가.”

왜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바보라고 합니까.”

카게야마는 뚱하게 내뱉곤 다시 칼을 고쳐 들었다. 오이카와가 거슬려한다고 생각했는지 전보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회색 빛깔의 테이블과, 검은 의자, 아이보리빛 조명 아래의 카게야마는 이제 어느 정도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반년 전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와 같은 대학으로 진학한 뒤 저에게 고백하고, 함께 살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저 중학교 선후배에 불과하던 관계가 어떻게 이리 빨리 변모하게 되었는지 묘한 일이었다. 카게야마에게 먼저 동거를 권한 건 오이카와였다. ‘같이 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동거 집을 같이 알아본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오이카와가 말없이 건넨 열쇠를 카게야마가 받아든 게 전부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무슨 열쇠예요?’라고 묻거나, 받아들지 않았다면 그와의 동거는 시작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한 번 보고, 그가 내민 열쇠를 보고, 봄날의 햇빛에 부서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그 열쇠를 받아들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동거는 그때부터였다.

오이카와는 한번 눈을 깜빡였다. 호박의 속을 파내 호박 속을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에 남김없이 담고, 눈과 코와 입 모양을 따라 칼을 댔다. 눈앞의 호박이 남김없이 잭 오 랜턴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이 호박의 씨를 뿌릴 때 농부는 이것이 잭 오 랜턴이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도매상은? 마트 주인은? 이 호박 자신은? 호박의 자아를 생각하기에 이르자 오이카와는 오른쪽 입술 끝을 올리며 웃고 말았다. 무언가 큰 운명의 섭리를 따지는 것도 좋지만, 결국 어찌할 도리 없이 그리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다 됐어?”

!”

카게야마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나름대로 자신 있다는 듯 자랑스럽게 저가 들고 있던 호박을 내미는 꼴이 영 어린아이 같았다. 아직 머리에 쓰고 있는 마법사 모자도 한몫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호박을 바라보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삐뚤빼뚤한 눈과 코, 입은 약간 징그러운 모양으로 일그러져있고어찌 말하면 할로윈에 적합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크게 웃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시늉까지 보였다.

이게 뭐야? 주인 닮아서 못생겨도 너무 심하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 어떻길래요?”

또 지기 싫어서 욱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흘겨보는 게, 정말 꼬맹이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호박을 카게야마의 호박 옆에 두었다. 바로 옆에 두니 큰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오이카와의 호박은 본래 호박에 그려놓았던 도안에서 조금 빠져나갔을 뿐 거의 도안 형태 그대로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배를 잡으면서 과장스럽게 웃었다. 이런 시답잖은 일에서 힘의 차이를 느끼는 건 카게야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토라져 있지만 말고. , 불 붙일게. 토비오는 전등을 꺼.”

오이카와는 달랠 마음이 없는 것처럼 평소의 어조로 말했다. 오이카와가 얼마 전 길 가는 길에 받았던 싸구려 라이터로 캔들 두 개에 불을 붙이자, 카게야마는 뭐라 꿍얼거리며 거실과 부엌 불을 껐다. 테이블 위에 있는 두 개의 캔들 주변으로 아주 작고 뽀얀 온기의 이글루가 생겼다.

오이카와가 캔들 두 개를 들고, 각각의 호박에 집어넣자 은은한 불빛이 호박에 난 얼굴 구멍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젊고 잘생긴 잭 오 랜턴과 그 친구이면서 가장 사악한 잭 오 랜턴이 놀러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평소에 드나드는 부엌인데도, 불을 끄고 이 작은 두 명의 이웃을 초대한 것만으로도 생소한 감각이 피어나다니 신기했다. 카게야마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사과 향이랑 꽃향기 좋지?”

오이카와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런 미소가 낯설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캔들의 푸근한 주홍빛을 받는 그의 얼굴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뒤덮였다.

향기는 잘 모르겠어요. 타는 냄새는 나는데.”

카게야마는 그다지 코가 좋지 못했다. 캔들이 들어있는 잭 오 랜턴의 머리 쪽에 코를 대고 킁킁, 하며 카게야마가 말했다. ‘위험하니까 그런 짓 하지 말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강하게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이 다시 순간적으로 바뀌어 카게야마를 뜨거운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이 남은 호박 속은 어떻게 되나요?”

씨를 솎아낸 뒤 꿀하고 견과류 조금이랑, 설탕과 졸여서 오븐에 구울 거야. 맛있겠지?”

……카레는요?”

세상에는 카레 외에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다는 걸 이젠 좀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듣는 것만으로도 맛있어 보이지만, 카레는 각별하다. 카게야마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잭 오 랜턴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조용히 흔들리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고 불빛을 계속 바라보면,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 두 개의 뚜껑을 덮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토비오는 할로윈 분장을 한다면, 뭐가 좋아?”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 카게야마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마을 사람들의 분장을 떠올렸다. 드라큘라와 마법사 말고는 정확히 명칭도 모르는 분장이 대부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분장들의 명칭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녹아있는 화이트 앤 블랙 톤의 방 안에서 호박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카게야마는 작게 툭 내뱉었다.

호박……?”

잭 오 랜턴 말하는 거야? 의외네.”

오이카와는 눈썹을 올렸다. 오이카와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듯 금방 눈을 돌렸지만 카게야마는 저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말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말 없는 공기가 카게야마의 목젖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냥, 어디서든눈에 띄니까요.”

실제로 카게야마의 기억 속 애니메이션에서도 가장 많은 건 잭 오 랜턴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대답에 놀란 듯 잠깐 눈동자를 크게 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만 카게야마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오이카와의 미소였다.

그렇구나. 넌 정말 카게야마 토비오야.”

무슨 말이에요?”

오이카와는 원하지 않는 말을 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한 뒤 저가 만든 잭 오 랜턴에게로 향한 오이카와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어디서든 눈에 띄니까라니. 카게야마 토비오만 할 수 있는 대답이네.”

그냥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

또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오이카와는 미소를 거두고 그랬겠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작은 캔들 안에 투명한 촛농이 고였다. 그제야 풍겨오는 연한 꽃향기에 카게야마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카게야마가 아는 꽃이라고는 오이카와가 전에 대학 입학 축하한다며정작 입학식이 지나고 한 달 뒤였다선물해준 작고 청초한 백합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그 향기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 유일하게 있는 꽃에 대한 기억을 오이카와가 새겼다는 점이 부끄럽고 간지러웠다.

난 마법사가 되고 싶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카게야마는 TV 애니메이션 속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마법은 없잖아요.”

그것은 만화 속의 이야기였다. 유령도 없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만,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허무맹랑한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유령이나 마법사나 같은 것일까? 카게야마는 어릴 적 기억 속의, 후회하며 마을이 넘치도록 눈물을 흘리던 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오이카와를 대입시켜보려고 노력하던 중,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뺏어 썼다.

마법은 있는걸.”

없어요.”

아냐, 있어. 토비오쨩한테 마법 걸어 볼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카게야마는 반쯤 질렸다는 얼굴로 해보시던가요. 조롱 조로 내뱉었다. 오이카와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후회하지 마. 토비오쨩은 이제 10초 이내에 오이카와씨한테 키스를 합니다.”

?!”

.”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얇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깊은 온기가 쌓인 속눈썹, 오이카와의 보들 거리는 머리 위에 가볍게 씌워진 마법사의 모자. 흡사 어느 동화책의 젊은 미남 마법사와 같은 모양새였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자신의 입술을 겹쳤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보드라운 분홍빛으로 빛나며 눈앞에 있었다.

키스할 줄 알고? 오이카와의 노림수였다. 고개를 피한 채 잭 오 랜턴만 열심히 들여다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흘끔흘끔 오이카와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다가, 항상 본인이 원하는 페이스로 이끌어가던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이건 기회다 싶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임에도, 오이카와의 속눈썹이 움직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눈을 감으며 가볍게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 작은 입맞춤 소리가 캔들 불빛 사이로 흘러내렸다. 오이카와는 가늘게 눈을 떠 입술만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결국 또 이것이 오이카와의 속셈임을 알고, 저가 넘어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신음을 내며 그의 허리를 팔로 세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숨소리가 달콤하게 콧잔등을 스치고, 타액이 흘러넘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입술을 떼어냈다.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작게 카게야마의 입술 내부에 가득 찼다.

거봐, 마법은 있지?”

겨우 들릴 정도의 속삭임만 한숨에 섞어 보낸 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가장 얇은 피부와 가장 얇은 피부를 맞댈 뿐인데도, 몸 안쪽부터 머리까지 저릿한 달콤함에 숨이 벅찼다. 오이카와의 온기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계속 이렇게 둘 수도 없고. 이제 정리하고 호박요리 해서 먹을까?”

오이카와가 잭 오 랜턴의 캔들 불빛을 후 불어 껐다. 방 안 속이 고요한 적막 및 남아있는 향흔으로 가득 찼다. 풍성한 꽃향기는 무언가 안타까운 향흔만을 남겼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더듬었다.

오이카와씨는 마법사가 되면 어떤 마법을 부리고 싶으세요?”

마법?”

. 단 하나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요.”

오이카와는 당분간 답이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형태를 그려가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형태의 머리카락, 각이 좋은 얼굴형과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까지. 그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낯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의 마법. 토비오가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동거를 시작할 무렵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카게야마에게 열쇠를 건네던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 열쇠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단 어떤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물(聖物)을 받는 듯했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열쇠를 받아든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조금 강하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그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으스러질 듯 강하게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뼈가 모두 부서져 제 속을 낱낱이 찌른다면, 그의 뜨거운 피로 적셔진다면 카게야마의 아침도 그리 차갑지마는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열고 다시 닫았다. 오이카와와 겹쳤던 입술의 감촉이 입술 신경에 남아 있었다. 저를 그렇게 자신에게 침식하게 하고, 정작 본인에게는 그 어떤 마법도 기대하지 않는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에게만 마법사였다.

카게야마는 울며 후회하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마법사 모자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가라앉을 정도로 울던 그는 왜 자신은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았을까.

카게야마 토비오가 생각건대, 그는 사탕을 받고 싶은 어른이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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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징님 생일 축하해요 ('v' ♥

  * 월간 오이카게 3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내일, 오늘

 

 

  




 

좋아해요. 저와 사귀어주세요.”

미안,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오이카와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난감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웃으면,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욱 형용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놓은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그런가요……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미안해.”

 

오이카와는 이어지는 질문이 불편했다. 말을 마치지 못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화제가 지겨웠고, ‘미안해다시 한 번 천천히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렸다. 연습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닦은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는 것만큼 익숙하고 정해진 일이었다. 고백을 받는 일. 타인의 호의를 구체화한 언어로 전달받는 일. 다른 점은 오이카와의 대답뿐이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교정 뒤뜰 길 주변에는 버려진 쓰레기가 몇몇 개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거의 먹지도 않고 버려진 빵 부스러기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쁘게 포장되어 전달된 호의를 살짝 맛보고 길바닥에 버린 꼴이었다. 버려진 사랑을 쓰레기라고 명명하는 건 오이카와 본인도 지나치다고 느꼈으나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오이카와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까.

춘추복 안쪽으로 바람이 서늘하게 치고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쓰레기 몇 개가 나뒹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이카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자친구를 좋아하세요?”

 

점심시간 도중이었다. 며칠 찬바람만 불다가 유달리 따뜻한 날이었고, 오이카와는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가던 길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우유를 먹고 있던 카게야마를 만나, ‘우유만 먹는다고 키 안 큰다?’ 장난기 섞인 인사를 건넨 뒤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했다. 카게야마는 우유를 쪽 빨더니, 쪼그라든 우유 팩을 들고 물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냐고? 당연하지오이카와의 입이 뻐끔거리는 걸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보고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도 아니었고, 오이카와의 대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금붕어처럼 몇 번 움직이던 입술을 닫았고, 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만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결국 그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다시 돌려준 후, 며칠 안 가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것까지 기억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 날과 비슷하게 따뜻한 날이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뜻했으나 동시에 몇몇 곳을 따갑게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고, 체육복을 입고 있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연습에 늦어 뛰어가고 있던 건지 짧은 앞머리 사이로 이슬같이 투명한 땀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도 지금 가세요?”

토비오쨩이야말로 1학년이 이렇게 늦게 가도 되는 거야? 더 일찍 가서 공 닦고 체육관 청소하고 있지는 못하고.”

종례가, 늦게 끝나서.”

 

목을 움츠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게야마를 지나친 후, 오이카와는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작은 발을 힘차게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에서 기대를 품은 듯 상기된 목소리가 흘렀다.

 

오이카와 선배,”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이어질 말이 나오기 전에 일부러 심술 맞은 투로 말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샐쭉 내밀었다. 항상 하고 싶은 말혹은 하지 못한 말의 반 이상을 담고 있는 건 카게야마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할 거야. 해도 토비오쨩한테는 안 알려줘.”

괜찮아요. 옆에서 보기만 할게요.”

 

오이카와가 서브 연습을 한다는 말에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몇 마디 말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릴 때 오이카와가 몇 번 향했던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햇빛을 등지고 음영 진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그 입술에 대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는 사이 또 오이카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가 저를 말없이 바라보는 건 그런 표시였다. 카게야마는 지금껏 다른 이가 내비치는 그러한 표시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달랐다. 되도록 오이카와는 웃어주길 바랐다. 체육관 안의 불빛도, 햇빛도 전부 흡수해 밝게 빛나는 그의 미소를 카게야마는 예쁘다고 느끼곤 했다. 그 미소가 저에게만 향하지 않는 걸 안 뒤로, 그는 어쩌면 카게야마를 타인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말과 표정에 집중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그의 어떤 말에 기분이 상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일방적인 불쾌에 맞부딪쳤다. 카게야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저 재촉하듯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 선배!”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등에 대고.

 

 

* * *

 

 

 

예정된 연습 시합이 곧이었다. 평소의 리시브, 서브 연습에 더해 부내 모의 시합도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연습 사이의 짤막한 휴식시간이었고, 오이카와는 선 채로 땀을 닦고 있었다. 같은 스타팅 멤버인 K가 놀리듯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 쟤 또 왔다.”

 

K가 고개를 까딱이는 곳으로 오이카와도 눈길을 돌렸다. 며칠 전 고백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체육관 창문 너머로 연습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와 보얀 얼굴이 약간 붉었다. 오이카와는 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손에 빤히 잡힐 듯 보이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 감정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건, 오이카와가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불만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긴 후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3학년에서 나름 귀엽다고 소문난 애잖아? 여자친구 있는데도 좋대?”

 

또 다른 동료인 A가 물을 마시다 말고 K와 오이카와의 근처로 왔다. AK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아직도 몰랐냐,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1학년 신입생이랑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진짜? 오래갈 줄 알았더니.”

 

오이카와가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실 동안 AK는 오이카와의 지난 여자 친구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그 모든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었고, 오이카와는 창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를 주시했다. 예쁜 미인상이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검고 긴 머리카락, 뽀얗고 하얀 피부. 굳이 말하면 오이카와의 취향이었고, 그녀가 고백하며 건넸던 쿠키는 맛있어 보였고받지도 않고 물렀지만좋았지만. 어째서일까.

오이카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이 다시 시작된다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머리에 붙은 땀을 덜어내며 생각했다. 왜 저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자신은 있다. 어릴 적부터 시선을 끌었던 얼굴에 그 어느 것도 대충 하지 않는 성격, 오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좋은 인상에 대한 자신. 거기에 배구까지 잘하니, 인기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좋아한다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금세 허물어질 정도로 옅은 인상에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 여자아이와 사귀면 즐거웠고, 재밌기도 했고, 그 아이들이 베푸는 사랑에 오이카와는 뿌듯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즐겁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들이 주는 사랑을 즐겼고, 그 사랑이 쉽게 떠나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본디 무의식 아래에서 사람에게 영원한 건 없었다. 카게야마의 한 마디가 있기 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연애는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묻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거짓말이 싫었고,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그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었고, 거절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아이들을 떠올리며 저가 그들을 좋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 그만! 오이카와씨 이제 배구에만 집중할 거니까! 너희도 진지하게 연습하라고?”

이제 와서 오이카와가 그런 말을 해봤자

그치?”

너무하잖아!”

 

AK의 장난 섞인 웃음에 오이카와는 우는 시늉을 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연습으로 다시 능숙하게 이끌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 그에 맞춰 행동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하면 인간관계는 능사였다. 오이카와는 연애를 할 무렵, 저가 친구들과 여자친구를 다른 존재로 대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점이 없었다.

 

 

* * *

 

 

오이카와가 연습을 하려고 공 하나를 들었을 때였다. 카게야마가 아기 병아리처럼 쪼르르 달려와 오이카와의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빛내며 서 있는 모습이 아기 새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못 본 척 공에 집중했다.

 

오이카와 선배.”

, .”

 

이어질 말은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지겹게 반복될 실랑이에 벌써 지친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작은 동물을 내쫓을 때처럼 쉿, 쉿 잇사이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카게야마는 불만을 양 볼에 가득 물고 부풀렸다.

 

그런 행동 하면 고양이한테 미움받는대요.”

잘됐네. 토비오쨩이라는 성가신 고양이한테 미움받으면 참 좋겠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로서는 드물게 큰 의사 표현이었다.

 

아뇨, 저 말고 고양이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저리 가라니까. 오이카와씨 이제 연습해야 돼. 연습 방해하면 나쁜 어린이지요?”

 

아이를 타이르듯 어르는 목소리로 대화를 끝맺은 후 오이카와는 손에 들린 공을 한 번 돌렸다. 카게야마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선배 몇몇의 화두에 오른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시선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 선배. 쳐다보고 있는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공에 이마를 맞대었다. 항상 서브 전에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서브 준비 자세에 들어가면 카게야마는 보통 숨을 죽이고 그 존재를 지우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그녀와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살짝 홍차 빛 눈동자를 들어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 연습에 방해돼?”

그런 건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앞머리가 흔들렸고,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체육관 조명과는 상관없이 빛나면서 오이카와를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친구 안 하시나요?”

 

오이카와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가 깊은 의미 없이 말했다는 것은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저를 몰아가는 착각이 일었다.

 

글쎄. 지금은 아니어도, 마음이 바뀌어서 사귈 지도.”

마음이 바뀌나요?”

당연하지. 바뀌지 않는 마음이란 없어.”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공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이마에 대었던 공을 떼어내고,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돌렸다. 착잡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배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안 바뀌는걸요.”

 

카게야마는 알 수 없다는 듯 고민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가 쪽으로 올린 뒤, 머릿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한 번 흘겨본 뒤 그에게로 다가갔다. 줄어드는 거리에 비례하며 점점 커지는 오이카와의 신체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움츠렸다.

 

그건 다르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쉽게 바뀌니까. 방해 그만하고 안 가면 토비오쨩 괴롭힌다?”

, 서브 가르쳐 주세요.”

카게야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오이카와 선배 방해 그만하라고.”

오이카와 선배, 죄송합니다.”

 

오이카와의 눈빛이 다른 빛깔로 바뀐 걸 눈치챈 킨다이치와 쿠니미 두 사람이 카게야마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카게야마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했으나 두 사람은 팔을 놓지 않았다. 두 명보다 키가 작은 카게야마의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지겨운 찰거머리야. 오이카와는 속 언저리에서 솔솔 풍겨오는 짜증에 입술을 씹었다. 공을 들어 올렸다. 체육관 조명이 전부 공 한 점에 모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이란 쉽게 허물어진다. 금세 빛을 잃는다. 잘 만들어진 타르트가 바닥에 떨어지면 한순간에 모양이 망가지듯이, 사랑이란 그러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화학작용이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활처럼 굽혔다가, 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손바닥에 전달된 충격이 전기와도 같았다. 팔 전체가 후들거리며 끝에 이어지는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작년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헤어진 이후 다른 남자와 함께 복도를 걷다가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자신감, 충족감. 오이카와는 그가 누구를 사귀든, 어떻게 지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렇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와 사귀기 전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옳았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는 없어지기 마련이고,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좋아하고 사랑해줄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사랑은 그중에서도 달콤함이 제일 짧았다. 이와이즈미와 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기에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는 관계였고, 그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영원하지 않은 관계일지라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이즈미와의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별로, 사랑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저가 조금은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모든 걸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고, 그런 확신이 들어 관계의 온전한 만족을 포기 하고 마는 저 자신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번 리시브 연습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연습은 종료될 예정이었다. 오이카와는 익은 토마토 빛으로 물드는 창가를 보면서, 그 여자아이가 아직도 서 있는 걸 바라봤다. 노을과 같이 붉은 볼이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곱게 빗어놓았던 머리카락 끝부분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잠시 울고 온 걸까, 눈동자가 붉었다. 혹은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는 그녀가 안타까웠고, 달려가 울고 있는 그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뿌리가 사랑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자신. 자연스레 누구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사랑은 종이로 만든 케이크였다.

 

 

* * *

 

 

가끔 비가 오는 날이 이어졌다. 맑게 갰나 싶다가도 찌푸린 구름이 모여 부슬부슬 얇은 비를 뿌렸고, 몸에 닿는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틀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친 날이었다. 연습시합에서 키타가와 제1중학교가 21로 이긴 뒤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체육관 창문으로 보이던 그녀가 안 보인지 일 주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오지 않게 된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팀 동료들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저 관심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창밖으로 그 여자아이가 보인 건 아주 흔한 우연이었다. 오이카와가 서 있는 2층 복도의 창밖은 1층 뒷문 근처였고, 그녀는 검도부 주장과 함께 있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던 미소 대신 볼을 파스텔 색조로 물들인 미소가 보였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교복 치마를 힘겹게 꼭 쥐고 있던 손은 검도부 주장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 사귀고 있구나. 그럼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야 할, 이루어져야 할 일의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후련함까지 느꼈다. 억지로 침수시켜놓았던 죄책감이 멀리 날아가 버린 상쾌함이었다. 조금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앞을 보자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 토비오가 평소보다 기대감에 찬 눈동자로 뛰어왔다. 체육복이 든 에나멜 가방을 보니 연습에 가는 도중인 것 같았다. 무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오이카와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저거 봐.”

 

오이카와는 창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쏙 내밀었고,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에 두 사람이 비쳤다.

 

뭐가요?”

저기 저 여자애.”

……?”

 

카게야마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그 입이 열리려다가 다시 닫히고, 입꼬리를 꼬물거리는 것이 영.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해.”

, 런게, 아니고

 

오이카와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카게야마는 몇 번 말을 더듬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적중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토비오쨩, 진짜 심각하네. 그때 토비오쨩이 말했잖아? 이번엔 여자친구로 안 하냐고

그랬었나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때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제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눈가를 구겼다. 생각해 보면 카게야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사랑 관과, 마음의 불변성에 대한 주제 같은 건.

 

저 선배가 왜요?”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느니, 그때 토비오쨩이 건방진 말을 하면서 이 오이카와 선배를 가르치려 들었잖아? 저거 봐, 다 변하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저런 거야.”

저 선배가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했나요?”

그랬, .”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고백은 받았으나, 오이카와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 체육관 창문에서 바라봤으나 실제 어땠는지 오이카와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더 모를 일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바뀌지 않는 좋아도 있는 걸요.”

토비오쨩은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래.”

 

오이카와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보폭을 넓혀 카게야마보다 앞섰다. 평소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얹은, 가벼이 여기는 어조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렇게 입만 삐죽 내밀다간 언젠가 입 삐죽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그걸로 또 놀릴 생각을 여러 가지 해보았다.

 

몰라도, 제대로 좋아하고 있어요. 오이카와 선배요.”

?!!”

 

다리가 휘청,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갈 뻔했으나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쳐다보자 작은 체구가 계단에 멈춰 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러세요?”

, , 좋아, 좋아한, 다고?”

 

한심하게도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방금까지 삐죽이고 있던 작은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배구도, 카레도,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도 좋아해요.”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다. 배구나, 카레 같은 좋아’. 심지어 그것도 서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동시에 그 작은 머리 위를 꾹 눌러주고 싶었다. 감히 오이카와씨를 서브로만 평가해? 실제 오이카와가 머리를 누른 것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인상을 안 좋게 찌푸렸다.

 

가끔, 괴롭힐 땐 싫을 때도 있지만그래도 좋아해요. 처음부터 똑같은 걸요.”

 

처음부터, 오이카와의 존재와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순간적인 기분의 흔들림과는 별개로 쭉.

아니, 아니 아니.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배구나 카레와 같은 좋아라니까. 그럼에도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제대로 된 좋아였다. 카게야마가 아마 앞으로도 쭉 좋아할 배구와 카레. 가끔 지칠 때는 있어도, 질리고 싫어질 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카게야마에게 사랑일 배구나 카레와 동일하다고. 동일하다고.

 

근데 그거 서브잖아?!”

?”

 

카게야마는 반문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가, 지금은 흰 피부를 붉은 거품처럼 몽글 물 들이고. 오이카와는 역시 이상했다. 가끔, 아니 혹은 자주.

 

 

* * *

 

 

토비오쨩, 집에 같이 갈까?”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굽혀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등 뒤에 섰다.

 

너 이 자식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아니, 아니라니까? 이와쨩,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무서워. 그냥 같이 가는 것뿐이니까?”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이즈미가 눈빛으로 넌지시 괜찮은지 의향을 물었으나 카게야마가 알아챌 리 없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있던 이와이즈미를 벗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전 소리가 났다.

 

가는 길에 만두 사줄까?”

!”

먹는 걸로 꼬셔서 뭐하려고?”

아니, 이와쨩 왜 그런 생각만 하는 건데. 늦었으니까 바래다주는 거라고?”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빛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가자, 이를 보이며 웃은 뒤 앞서 걸었다. 가방을 고쳐 맨 등이 카게야마보다 두 뼘 정도 컸다. 걸친 재킷에는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고 바라봤던 등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물들이면서 뒤를 쫓았다. 뒤따라오는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있었다.

 

 

, 뜨거우니까.”

감사합니다!”

 

만두를 한 개씩 사 들고 걸어가는 길목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점점이 퍼진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윤곽을 비췄다. 오이카와는 만두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카게야마의 볼에 닿아 촉촉이 젖는 걸 보면서, 작게 물었다.

 

토비오쨩은 집이 어디야?”

저기요.”

 

카게야마가 가리킨 곳은 골목 안쪽 주택가의 한 지점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나 거리상 멀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카게야마의 발음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가깝네.”

오이카와 선배는요?”

거기서 15분 더 걸어가야 해.”

가깝네요.”

가까운 거야?”

못 만나는 거리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끄덕였다. 말로는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느덧 만두를 한입에 다 넣고 양쪽 볼 주머니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을 열면 만두가 튀어나오려는지 작은 입을 양손으로 누르면서 입안을 열심히 움직였다. 햄스터 같은걸, 오이카와는 생각하면서 카게야마 입술 옆에 붙은 만두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

 

말로 하지 못한 당황이 카게야마의 얼굴에 번졌다. 입을 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손가락을 떼지 못하고 왜 그런 걸 먹어요라는 눈빛만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양팔을 잡아 끌어당긴 뒤, 보이는 작고 모양 좋은 귀에 속삭였다.

 

토비오쨩은 내가 서브 평생 안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할 거야?”

 

온기를 담고 있는 입김이 귓속의 솜털을 간지럽히자, 물감이 퍼지듯 귓바퀴를 따라 귀 전체가 천천히 붉어졌다. 귓불을 조금 세게 꼬집으면서,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토비오쨩 귀 붉어졌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가를 찌푸린 뒤 만두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작은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귀로 옮겼다. 작은 주먹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방해했다.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노려보면서, 카게야마는 작게 투덜거렸다.

 

지금도 안 가르쳐 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 카게야마의 말에 동조할 일이 잦았다. 카게야마와 그만큼 많이 마주 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갸우뚱하는 고개, 불만이 담긴 눈동자, 삐죽 내민 입술 모두 지금의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카게야마의 저러한 버릇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제 귀를 감싸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맞잡고,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몇 번 주물렀다. 아기같이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냥,

 

그럼 오이카와 선배가 싫어지지 않겠어?”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내렸다. 흘러내린 가로등 불빛이 검은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가라앉았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고요한 적막이 카게야마의 입술 끝에 잠시간 머물렀다. 비가 그친 뒤 물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맞잡은 손 사이를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지금껏 저와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여자친구, 이제는 싫어진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렸다. 이와이즈미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오이카와는 제가 생각하는 온전한 이해와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없는 거라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이랑 달라질 게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까요?”

 

카게야마는 고민을 마친 듯 눈동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푸른, 별 몇 조각이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 중 한 가지였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고, 서브는가르쳐주시면 좋겠지만 안 가르쳐 주는 건 지금도 똑같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달라지잖아. 내가 언제까지 대단한 선수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순히 토비오쨩이 나에 대한 마음이 훅 바뀔지도 모르고?”

 

오이카와는 그런 말을 하는 저가 이상했다. 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까지혹은 언제 즈음. 오이카와는 저를 좋아하냐고 집요하게 물었던 지금까지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 바뀌어요.”

 

카게야마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앞선 질문보다도 망설임이 없었다. 입술에 만두 부스러기를 붙인 꼬맹이가 당돌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불룩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장담해? 토비오쨩 미래 보고 왔어? 아직 꼬꼬마가 그렇게 책임도 못 질 말 막 하면 안 되는데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들어 카게야마의 이마를 꾹 눌렀다. 카게야마의 인상 쓴 얼굴이 뒤로 밀렸다가 다시 되돌아오자, 그 이마에 붉은 점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붉은 이마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양손을 잡힌 상태였다.

 

미래는 모르지만지금은 안 바뀌는 걸요. 지금은 어제였고, 그저께였으니까, 내일이나 모레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매일 매일 지나면 결국 안 바뀌는 거잖아요.”

토비오쨩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안 해?”

? 해요. 내일 저녁 메뉴는 카레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내일이면 오이카와 선배가 미워질지도 모르잖아?”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건 전부 지금이랑은 상관없는 얘기인 거 같아요. 빨리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오늘 저녁도 카레인데.”

 

카게야마는 이야기가 지겨운지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저의 집 쪽으로 틀려는 걸 오이카와가 제지했다.

 

요 녀석, 선배가 얘기하는데! 그리고 너희 집은 매일 저녁이 카레냐! 얼마나 좋아 하는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당겼다. 찹쌀떡처럼 죽 늘어나 카게야마의 입이 벌려졌다. 우우, 아하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작은 손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고 말았다. 늘어난 볼을 놔주고, 머리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밤이 녹아, 카게야마의 우주 같은 눈동자와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집에 가야지. 토비오쨩은 어린아이니까.”

…….”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을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 홍차 빛 눈동자와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봤다.

 

?”

, 오이카와 선배만큼 대단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

, 고마워?”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지만, 이상한 칭찬에 이상한 대답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머리 위를 쓰다듬던 오이카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별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서, 유성군처럼 떨어지는 별똥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면이 뒤집힌 것처럼 몰려드는 어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밤하늘이 오이카와의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달 웅덩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카게야마 주변으로.

 

어머니가 그랬어요. 그 선배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구 선수가 더 잘하지는 않냐고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에게 대단한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인걸요. 앞으로도 계속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제 손바닥까지 적셔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뜨거움이 전달되고 제 심장이 눅진하게 녹고 있는 걸 느꼈다. 카게야마가 뜨거웠다. 종이 케이크가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진짜 생크림과 과일로 덮이고 있었다.

 

토비오쨩그렇게 칭찬해도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건데.”

.”

 

카게야마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전기가 한 차례 몸을 돌고 오이카와의 시야를 흔들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토비오쨩의 좋아는 어느 정도 오래 갈 것 같네. 어느 정도는.”

진짜예요. 자신 있어요.”

 

무슨 자신인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빛나는 눈동자를 손으로 한번 훑었다. 속눈썹, 눈꼬리까지 달빛을 한바닥 머금은 눈동자를. 오이카와의 머리 위에 뜬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람개비처럼 오이카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천천히, 조금 빠르게.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온통 카게야마가 흩뿌려놓은 별 가루로 가득했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내렸다. 양 볼이 마주 잡은 카게야마의 손만큼 뜨거웠다. 이끌리듯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키스하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꼭 잡았다.

 

한입에 집어넣은 카게야마의 케이크는 의외로 잊지 못할 맛이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월간 오이카게 합작 홈의 편집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Love Actually








  소리 없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퐁당, 퐁당 액체가 물과 만나 작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그 파도는 변기 벽에 부딪혀 스러졌다.

  “우, …윽. 하아, 하아… 욱.”

  변기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타는 듯한 목을 타고 올라온 건 노란 신물이었다.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부여잡고 꼭꼭 짜내는 위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물과 섞인 침 몇 방울이 이미 더러운 변기 물에 떨어졌고, 오이카와는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와 찌릿한 코를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으나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표정. 공을 들고 서 있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박제된 나비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입과 코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다시 울렁거렸으나 오이카와는 손 한 번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카게야마는 돌고 돌았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오이카와 선배” 낮게 말한 뒤 오이카와에게 공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한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이카와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서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코 안을 깨끗이 씻어내자 하얀 덩어리와 침, 일부의 노란 신물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전부 쓸려 내려가면 될 일이다. 내장 구석구석에 붙은 토기(吐氣)도, 머릿속에 박제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내려앉았다. 세상이 하얗게 번지는 것이,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뿌옇고 제 모습조차 흐릿한데도, 머릿속 카게야마는 속눈썹 한 올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는 공을 매만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자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자리로 휙 가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만, 오이카와는 길게 바라봤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빛을 냈다. 오이카와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가락을 댔다. 며칠 전 병원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심전도검사, X-ray 등 몇몇 기초적인 검사 및 활력 징후까지 확인했으나 오이카와에게 이상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극히 건강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박동을 느꼈다. 뚝, 뚝뚝뚝, 뚝뚝뚝. 끊어질 듯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빠른 맥박이 이어졌다. 누가 만져 보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심장이 과도하게 팽창해, 폐를 짓누르는 탓일까. 혹은 여름 특유의 짭조름하고 답답한 공기 때문일까. 숨쉬기가 힘들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찮냐.”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가?”

  매만지던 공을 몇 번 바닥에 내려쳤다. 오늘도 해야 할 연습이 많았다.

  “네 표정 장난 아냐.”


  “또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서는 걱정 끼가 묻어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좋은 친구지만, 오이카와는 가끔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건, 이미 생긴 구멍을 후벼 파 넓히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그저 웃어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 하든 소용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브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심장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살을 찌르는 직사광선이 온통 저에게로 모이고, 등이 탈 것처럼 뜨거운 태양 탓에 다시 숨이 막혔다. 후, 후우. 들이쉬고, 내뱉고. 억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과도한 심박 수와 산소가 부족한 뇌 때문에 다시 토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바라봤다.


  연습 전 마셨던 스포츠 드링크가 그대로 나왔다. 연한 소다 빛깔의 좋아하는 음료수였는데.

  “하아….”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변기 물을 내렸다. 심한 심박동으로 울렁거림을 느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현재 오이카와가 겪는 증상이었다. 오이카와는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심장병’을 검색했다. 심계항진, 부정맥, 심근경색, 협심증 등…… 오이카와가 느끼는 증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심장의 고통,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건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처음 들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서브를 가르쳐 주세요.”

  어떤 부탁 조도, 애원하는 말투도 아니고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왜?”

  오이카와는 화가 나 있었다. 선배로서 응당 후배보다 침착하고 후배를 이끌어줘야 한다, 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와이즈미가 들으면 다르지 않다 말하더라도 오이카와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배우고 싶어요.”

  “관심 없어.”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붙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 뒤뜰에 울렸다. 뒤뜰에 심긴 나무의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 먼지처럼 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이카와의 머리가 울렸다. 손발이 조금 떨리면서 식은땀이 등 뒤로 배어 나와, 오이카와는 약한 오한을 느꼈다. 다리, 발목, 복부, 귀 뒤 등 여기저기에서 박동치는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로 인해, 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초원과도 같이 넓은 평원에는 보랏빛 풀이 번져 있었다. 깊은 밤과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 풀빛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차가웠다. 폐가 찢기듯 차가운 공기 탓에 오이카와는 꿈인데도 목이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느꼈다. 저 앞 초원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실루엣만으로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공을 들고 서 있었다. 흰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에 짧은 앞머리. 동그란 눈동자까지, 오이카와가 아는 카게야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빛도 없는 검은 꿈 안에서, 카게야마의 주변에만 반딧불이 몇 마리가 떠돌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카게야마의 말간 이마와 노란 빛깔의 팔, 흰 운동화까지 비췄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입을 연 카게야마의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뒤 그 몸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넘어진 카게야마의 아래로 보랏빛 풀이 흩날리고, 흰 티셔츠는 이슬방울에 젖어들었다. 카게야마 주변의 반딧불이는 흩어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흰색 가루가 총총히 박힌 검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을 힘주어 눌렀다. 배구공을 놀리는 오이카와의 악력이 결코 서툴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괴롭지 않은 듯 오이카와를 두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에 맞닿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보드라웠다. 톡 오른 복숭앗빛 입술이 기억 속에 떠올랐고, 제 손 아래에 짓눌린 게 그 입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이카와의 허리 주변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이 맞닿았고, 카게야마의 심장과 오이카와의 심장이 한 소리로 박동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제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유성우 무리가 소리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고, 초원의 밤은 광활한 우주와 같이 별의 죽음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왜?”

  오이카와는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야.”

  보랏빛 풀이 누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초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왜 나야. 왜 너고, 왜 나야. 어째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에 맞춰 오이카와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슬이 묻어 머리카락이 젖어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수술용 칼이 들려있었다.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에 대고 조심스레 긁자, 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선이 생기고 그 안으로 솜털이 오른 속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토기가 밀려왔다. 동시에 기대감도 있었다. 이 칼이 저 자신에게 닿기 전에 해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도 들었다. 오이카와는 실선 사이에 손을 넣고 흰 티셔츠를 벌렸다.

  카게야마의 폭신한 살결에 닿고, 조금 힘을 주어 칼을 내리그으면 말랑거리는 젤리처럼 피부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술용 칼에 달라붙는 피부조직을 떼어내면, 노란 빛깔의 동글동글한 지방과 갈비뼈 위에 겹쳐진 엷은 핑크 빛의 근육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총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어 나오는 장막 액과 혈액이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를 적셨다. 점점이 퍼지는 붉은 꽃잎이 카게야마의 가슴에서부터 퍼졌다. 근육에 손을 대보면 강한 박동이 갈비뼈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는 호흡곤란 때문에, 오이카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칼을 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렸다.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기분 나쁜 꿈이었다.




  “너 연습 할 수 있겠어?”

  “완전 괜찮다니까. 이와쨩 자꾸 왜 그러실까.”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은 뒤 체육복으로마저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놈이 말은 잘하네. 이와이즈미는 옷을 대충 구겨 접고 사물함에 넣었다. 새벽 2시에 오이카와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는 ‘혹시 자?’ 한 마디였다. 아침에 그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요 며칠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를 만나면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도 자주 있는 모습이었다.

  “이와쨩?”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탈의실 입구에 서서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이와이즈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서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미 아주 옛날 일이었다.

  ‘누구야, 쟤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던데. 이름이 독특했어. 카게… 뭐였지.’

  ‘카게야마 토비오쨩.’

  ‘알면서 물어본 거냐!’

  말 그대로 첫 만남 때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꽤 길게,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이카와의 그런 눈빛은 이와이즈미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었다. 오이카와가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부원이 연습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넓은 체육관이 사람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등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작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수많은 인원 사이에서 작고 검은 머리통이 오이카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꿈을 기억해냈다. 꿈에서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풀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인사가 마저 끝나기 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의 입술에서, 항상 다른 부원의 이름만 오가던 입술에서 저의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눈동자를 크게 뜬 뒤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다음 경기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료수, 주문하러 가자.”

  다음 경기용 음료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미리 정해놓은 매장에서 직접 공수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더더욱 연습 시간에 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부르자, 카게야마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공을 바라보고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이후 네, 작게 대답한 뒤 저가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공을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손이 꿈에서보다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육관의 2층 창문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카게야마의 볼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성우도 검은 밤도, 낮의 햇빛도 카게야마 주변을 돌고 돌았다. 카게야마는 지나치게 빛나는 존재였다.



  파란 하늘, 한두 번씩 울리다가 멈추고 다시 일제히 이어지는 매미 소리가 더웠다. 팔에 닿은 공기가 끈적거렸고, 눈에 닿는 초록이 부셨다. 길가에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바닥에는 매미 허물과 떨어져 죽은 매미 사체 한두 개가 보였다. 하수구 주변에는 진물이 번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서 걷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작은 볼이 더위 탓인지 조금 붉었다. 보폭 차 때문에 오이카와가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에서 네 걸음을 걸어야 하는 카게야마의 발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가슴을 새가 쫀 듯 강한 흉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시야에 현기증이 맺혔다. 올라가는 심박동과 여름의 습습한 공기가 기도를 눌렀고, 다시 호흡곤란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서브, 옆에서 연습하는 거 봐도 될까요.”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돼.”

  오이카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조금 충격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야.”

  꿈에서 물었던 말이었다. 왜 오이카와여야만 하는가. 왜 카게야마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왔고, 왜 오이카와는 그의 2년 선배이며, 왜 오이카와의 서브여야 하는가. 옆에서 걷던 카게야마가 재빨리 다리를 굴려 오이카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졌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보면 가슴이 뛰니까요.”

  “가슴이 뛴다고?”

  “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작은 손은 꿈에서 오이카와가 갈랐던 카게야마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 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세어 보았다. 뚝, 뚝뚝뚝… 지나치게 빨랐다.

  “어떻게 뛰는데?”

  “네?”

  “가슴이, 어떻게 뛰냐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고민하듯 머리를 갸우뚱해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어. 두근두근… 하고요? 오이카와 선배가 서브를 치려고 뛰어오르면, 체육관 안의 빛이 전부 오이카와 선배한테 모여서, 약간 눈이 부시니까 눈을 세게 뜨고 봐야 해요.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움직이고, 공 소리가 울리고 나면 가슴이 뛰어요. 강하게.”

  매미가 울고 있는 공기 속에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갔다. 그 속에 또, 카게야마의 심장 고동이 함께. 오이카와는 꿈에서처럼 손을 대지 않아도, 가슴을 맞닿지 않아도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빛 볼, 동그란 어깨에 떨어지는 태양 빛은 카게야마의 색과 섞여 부드러운 여름의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의 검은 밤, 아니 짙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는 오이카와를 담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공을 들고 있던, 꿈에 나왔던 카게야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낮에, 나무 한 그루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마주칠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박동치던 심장은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심장은 거짓말쟁이인 오이카와를 심하게 힐책하고, 오이카와의 전신을 뒤흔들어 놨으며, 카게야마의 앞에서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오이카와는 테이핑 되어 있는 검지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그곳에 오이카와의 심장이 있었다.


  "여기가 멈추면, 가르쳐줄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겹치고, 코끝의 한숨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보다 뜨거웠다. 질식해서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 심장이 그렇게도 소리친다면, 오이카와도 평생 거짓말쟁이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멈추면, 토비오쨩이 원하는 거 전부 줄게."

  그때까지는, 심장이 오이카와에게 굴복하기 전까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줄 이유'가 없었다.

  달콤한 한숨 한 번까지도.




  * HAPPY BIRTHDAY TORU!






다시 태어난 여름








카게야마는 꿈을 꿨다.

 

바닷속에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고, 보석같이 작고 파란 물고기 떼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지며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카게야마는 나신으로 바닷속에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이 기분 좋아 눈을 살포시 감았다. 볼과 가슴, 허리에는 보드라운 물의 손길이 닿는 듯하면 떨어졌다.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로 카게야마는 멈춰 있었다. 바다 위쪽으로 약한 바람이 불었고, 가끔 물살이 흔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언뜻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건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작은 드럼 소리가 들리는 재즈 음악이었고, 아버지가 즐겨 듣는 건 오래된 팝송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음악을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물방울 소리, 찌잉 머리를 달구는 햇볕의 뜨거움,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잠꾸러기 토비오쨩.”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오이카와가 샐쭉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듯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우린 홍차와 같이 예쁜 색의 머리카락, 형태 좋은 눈동자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조금 붉었다. 카게야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그나, 방금 잠에서 깬 카게야마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꿈에서 나신인 이유가 이거였나.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꿈 때문에, 카게야마는 의도치 않게 조금 웃었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웃어?”

지금 몇 시예요?”

일어나서 오이카와씨 얼굴을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옆에 있는 시계를 보시던가요.”

 

고개를 돌리니 작은 탁상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830.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가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행지에서 오이카와씨 혼자 밥 먹게 하려는 거야?”

아뇨, 배가 고프시다면야

됐고, 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이카와는 데구르르 표정을 바꾸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단단한 근육의 조합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에 맞춰 상체를 올렸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벗어나 왼쪽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나신 뒤쪽으로 투명한 통유리 창문 2, 그 너머로 하얀 베란다가 보였다. 아침의 태양 빛을 받아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연초록과 하늘색을 섞어놓은 바다는 지평선과 맞닿아 뿌연 경계선까지 뻗어있었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하얀 베란다까지 온통 새하얀 숙소는 커다란 배구공 안에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갈 거야?”

 

오이카와는 하얀 반소매 셔츠에 속이 비치는 민트색 칠 부 카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아색 면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뇨, 일어났어요. 그냥

 

꿈을 꿨어요. 뒷말을 삼키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기댔다. 오이카와의 숨소리에 따라 솟았다 가라앉는 오이카와의 배가 기분이 좋았다.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나왔던가, 안 나왔던가. 바다가 나왔단 건 기억이 나는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뱃속에서 낮은음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얼른 가자. 나도 배고파.”

 

오이카와는 어루만지던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부축하듯 톡톡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파도치는 소리가 시계 소리 사이사이로 들렸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바다를 보러 온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

 

 

남쪽 섬에 가자고 얘기를 꺼낸 건 오이카와였다. 기간은 719일부터 21일까지,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로 이틀. 3일의 여행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야기를 벗어나고 어디에 도쿄가 있는지, 오사카 혹은 삿포로가 있는지 등 지리에는 무심했다.

 

일본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라, .’

 

오이카와는 질렸다는 식으로 카게야마를 걱정스레 쳐다봤고, 카게야마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로 응수했다. 오이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야.”

?”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권 준비해놔.”

?”

외국이라고.”

 

설마 생애 첫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남쪽 섬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남쪽 섬인지, 위도 및 경도는 몇 도이며 어떤 문화가 있는지 등. 카게야마가 여행지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건 영어를 쓰는 나라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여권을 찍기 위해 갔던 사진관에서, 좀 더 웃으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던 사진사를 떠올렸다. 30분을 들여가며 힘들게 찍은 여권사진을 보고 오이카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찍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여권 사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찍었다고 하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 앳돼 보였다.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여권과, 카게야마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여권에는 같은 마크가 찍혀있었다. 새삼 카게야마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어를 쓰는 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와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다는 식으로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에, 같이 여행이라니. 얼마나 복 받은 건지 알라고,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호텔 1, 바닷가가 보이는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석에 앉았다. 6층 위, 같은 자리에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숙소가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연청빛 바다가 보이는 자리였다. 짚을 엮어 만든 듯 곳곳에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는 의자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선택한 자리에 앉고 바다를 바라봤다. 머릿속 바다보다도 에메랄드빛이 진했다. 연둣빛 바다가 흔들리고, 레스토랑에서 보아도 속이 비쳐 보이는 바닷속에는 암갈색 바위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물고기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지, 전날 저녁에 보였던 파란색에서 형광 노란색, 장미처럼 붉은색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백색과 상아색이 섞인 해안가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 무리가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 파라솔을 펴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 무리,카게야마가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쨩.”

 

어느새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앞에는 망고주스가 놓여있었다. 크고 투박한 얼음 두세 개가 동동 떠 있는 유리잔은 노란 빛깔로 채워져 있었고, 같이 나온 망고 1개는 반으로 잘려서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없어?”

 

떠보는 듯이 묘한 웃음을 띄우고,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고막 안을 채웠다. 카게야마는 오늘이 여행 둘째 날인 걸 떠올렸다.

 

생일, 축하해요.”

, 고마워.”

 

오이카와는 그제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자리한 입술에는 망고 주스가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도 앞에 있는 망고 주스를 한 입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밥 먹으면 바다를 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집에 가도 생각날 것 같다며?”

오늘 태어난 오이카와 선배랑 같이 보고 싶어요. 어제의 오이카와 선배랑 오늘의 오이카와 선배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네. 28년 전 난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오이카와 선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토비오쨩은 태어났겠지. 2년 뒤에.”

그러면 혼자서 이곳에 앉아있을까요. 혼자서 바다를 보면서.”

평행 세계의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만약의 이야기예요.”

글쎄. 그렇다면 토비오쨩은 방금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망고 주스를 시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숙소에 묵지도 않았겠지.”

 

카게야마는 그런 자신을 상상했다. 이 숙소에 묵지 않고, 바다를 보러 가지 않고, 망고 주스를 먹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 조건은 단지, 오이카와가 없다는 것뿐인데.

 

 

오이카와 선배가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바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오이카와 선배가 없었다면, 바다가 저런 색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망고 주스가 이렇게 달다는 것도. 아주 많이, 몰랐을 거예요.”

나도 몰랐을 거야. 토비오쨩이 망고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파도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똑같네요. 카게야마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

 

 

오이카와는 신발을 벗었다. 하와이안 꽃이 그려져 있는 샌들 한 짝을 손에 들고, 희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앞을 보면 오이카와의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바닷가를 향해 난 야자수 나무 그늘은 백사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파라솔을 펼친 몇 사람들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다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봤던 것보다 선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물살이 몰려드는 소리, 백사장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손톱만 한 물고기 몇 마리, 속눈썹을 무겁게 누르는 햇볕

 

바람이 기분 좋아.”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디건을 벗은 그는 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목을 타고 흐른 땀 몇 줄기가 셔츠 윗자락을 적셨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예쁜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

 

카게야마는 끄덕이며 대답한 후 오이카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볍게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와있는 이 여행에 대해서, 바다에 대해서, 오이카와의 생일에 대해서, 카게야마를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게 작은 심장 안에 꼭꼭 담겨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건 짤막한 단어 몇 마디였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선배.”

토비오?”

그냥, 다행이에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 선배여서.”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저보다 2년 먼저, 배구를 하는 사람으로.”

, 고마워.”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깊숙이 굽히며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 뒤로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렸다. 하얀 파도 빛깔과 오르는 물거품, 오이카와의 오뚝한 콧방울의 땀 몇 방울이 투명했다.

카게야마는 꿈을 기억해냈다. 바닷속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오이카와와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간 물고기와 남쪽 섬의 태양에 대해서도. 모두 오이카와가 태어났기에, 이곳에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카게야마는 웃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백사장 모랫바닥에서 열이 올라, 그 열이 오이카와의 몸을 돌아, 살아있는 온기로 카게야마에게 전해졌다. 카게야마를 울리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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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입니다 ㅠㅠ
멋진 합작 홈페이지는 여기 ▶ http://gywjd1555.wixsite.com/merrysummer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신 치리님 감사합니다!! >.<











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편집은 월간 오이카게 주최님이 쓰신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 미약한 쿠니카게 요소가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장면은 희뿌옇게 먼지처럼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그 단계를 3단계로 분류하고 천천히 상기시켰다. 어느 위치에 서고, 손가락의 굽히는 정도, 어느 순간에 다리를 올려야 하는지 깊게 생각한 뒤 다시금 눈을 들었다. 배구공의 오밀조밀한 매듭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돋움을 하고,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이미지를 눈앞에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였다.





Kill Your Darlings





  “―목요일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잊지 말고. 아, 이거 내일까지 적어와야 한다? 진로희망조사서.”


  손에 들린 15x10cm, 두께 약 5mm에 해당하는 종이를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봤다. 이름, 반, 번호, 희망 고등학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아직 ‘진로’라는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마지막 시기에 한 번 만났던 그 종이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채 잠깐의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정확히 두 번 접어, 교탁까지 걸어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3학년, C반, 오이카와 토오루까지 적은 뒤 손을 멈췄다. 몇 번 나눴던 대화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느 학교 갈 거야?’

  ‘어느 학교로 가시나요?’

  ‘오이카와, 고등학교도 대학 못지않게 중요해.’


  같은 3학년 친구들, 이제 부에 들어온 지 갓 1년이 되어가는 1학년 후배들, 코치에게 각각 들었던 말이다. ‘어느’ 학교에 갈 건지― 저러한 말 뒤에는 항상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 배구부도 유명하니까.’


  오이카와는 찝찔한 얼굴로 입가를 굽실거렸다. 중학교 3년은 배구가 전부인 기간이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체육대회 때는 일부러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항상 중요한 건 배구였고, 오이카와는 배구보다 더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오바죠사이 아니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가방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었다. 옆 반인지라 종례가 끝나면 오이카와의 반에 들러 함께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종이를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와쨩은 이미 냈어? 진로조사서.”

  “당연하지. 그런 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까먹을걸. 특히 오이카와 너는.”

  “특히라는 말 뒤는 이해할 수 없는걸. 뭐, 실제로 이런 건 가방에서 구겨지기 일쑤지만. 뭐라고 적었는데?”

  “아오바죠사이.”

  “아니, 칸이 세 개잖아?”

  “한 개밖에 안 썼어.”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와쨩이야. 오이카와는 몇 번 달깍달깍 시끄럽게 볼펜을 괴롭히더니, 반쯤 열려있는 가방에 종이와 함께 집어넣었다. 지금 쓰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이와이즈미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연습이 금방 시작될 터였다. 주장, 부주장인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시라토리자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레 내뱉었다. 종이의 가장 위 칸에 적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시라토리자와학원이라.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네, 생각했다. 


  “이와쨩은 왜 아오바죠사이야?”

  “…선배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그곳 배구가 맘에 드니까.”

  “배구가 맘에 들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이와쨩, 나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이카와는 핀잔을 들은 아이처럼 볼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화를 억누른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흘겨본 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그건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이카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애매하게 마음을 깊게 드리우고 있던 안개가 수증기가 되어 가슴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이미 우시지마에게 추천이 들어간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시라토리자와에서 추천이 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전날 연습 중에 떠올랐던 장면이 다시금 축축한 심장에서 살아났다.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은 느릿느릿하게 재생되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말한 ‘잘하는’ 배구가 어떤 배구인지, 누구의 배구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단계에서, 지금 있는 그 어떤 고등학교에도 그러한 배구가 없는 단계에서 진로희망조사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못내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는 계단을 몇 개씩이고 뛰어 내려갔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하얀 배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얇은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는 깨끗한 글씨로 적힌 ‘카게야마’가 수로 박혀있었고, 짧게 올라간 반바지 아래에는 솜털이 막 빠진 반질한 살결의 두 다리가 생채기도 없이 뻗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조그만 이마를 꾹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갸우뚱한 채 오이카와를 말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조금 짧아진 앞머리 때문에 이마가 평소보다 잘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가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건넸다. 배구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작아서, 그 끝의 손톱은 모래알로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토비오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점프 서브, 알려주세―”

  “대답할 가치도 없네.”


  오이카와는 마저 듣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포기하지도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와서는 다시금 공을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가슴을 다시 툭, 친 배구공이 괜스레 거슬렸다.


  “서브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에게 들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판이 기억났다.

  주변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긴 하지, 그 성격이면.

  코치는 이따금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오이카와와 둘만 있을 때 꺼내곤 했다.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거예요? 가끔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보고 그 기분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못하고 코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주장이니까.

  오이카와는 배구부 주장이고, 카게야마 선배니까. 왜 코치는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오이카와에게 하는가. 코치가 개인적으로 학생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카게야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도 굳이 물어볼 것 없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른 존재였고, 그건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부류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한 뒤에 세대 교체할 사람으로서 내정해두었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오이카와 만큼의 친화력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왜 토스가 아니고?”

  “네?”

  “말해봐, 토비오쨩. 왜 토스가 아니고 서브인데?”

  “…서브를 가장 잘하는 건 오이카와 선배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오이카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쯤은 빤히 보였다.


  “토스를 가장 잘하는 건 내가 아닌가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카게야마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밀었던 배구공을 천천히 끌어당겨 다시 제 품에 가둔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난 알아, 토비오쨩.”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부드러운 목 뒤를 가볍게 쓸면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오이카와의 형체는 흔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거. 누가 가장 토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난 알아.”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동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내듯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조바심 때문에 퇴출당했던 그 시합,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타로 내보냈었다. 2학년 세터인 니카이도 있는데, 왜 카게야마냐며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높았다. 당연히 카게야마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2학년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잘하니까.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들어가야 팀이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코치는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니카이보다, 그때의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가 더 잘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세터로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네트 앞쪽에 섰다. 세터의 위치였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는 1학년 후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 던져주지 않을래? 혹시 괜찮으면.”


  1학년 후배는 잠시 당황하더니 공 바구니를 끌고 온 뒤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 하나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도 선명하게 그 날의 시합이 떠올랐다. 그 날 카게야마의 위치, 어떤 곳을 시선으로 훑는지, 누구를 쳐다보는지,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이카와는 일련의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한 뒤, 발돋움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이 흘러가는 토스 전 단계에서는 배구공의 매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이 방금 봤던 카게야마의 손처럼 보이는 환상을 느꼈다.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오이카와는 제 안에서 비웃는 듯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건 그냥 흉내쟁이잖아. 오이카와는 입술을 씹었다. 오이카와가 하고 싶었던 배구는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자체에 있었다.

  세터로서 하고 싶었던 토스를 상상하는 건, 동시에 자신이 한낱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




  “오이카와 선배처럼은 못 뛸걸.”

  “…알아.”


  쿠니미가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꾸물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근처 지역체육관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오이카와처럼 높은 점프력과 강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키타이치 중학교에 들어가고 오이카와의 서브를 본 뒤로, 몇 번 이렇게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으나 기억 속 그 점프 서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서브 자세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옆에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카게야마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배구부 연습이 끝나서까지 집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가끔 ‘못할걸’의 말만 툭툭 던졌다.


  “오이카와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잖아.”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곁눈질로 보고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해?”

  “…왜 안 가르쳐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저번에 오이카와 선배가 그랬어. ‘왜 토스가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오이카와 선배가 자긴 다 알고 있다고 말했고,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걸.”

  “카게야마, 너 영어 시간에 졸았지?”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깨서 수업을 들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가 봐도 체육계 소년이었고, 쿠니미는 주변으로부터 배구부여서 의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쿠니미는 다만 그런 편견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Kill Your Darlings’이란 말이 있어. 공부해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공부해보라고. 너랑 오이카와 선배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요 근래 서브 연습 대신 토스 연습이 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서브를 보며 받았던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오이카와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서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듯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배구가 어정쩡한 상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좋은 형태든 나쁜 형태든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서로가 만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감하고, 아주 작은 신경학적 신호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숨소리조차도 겹치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 탓이 아니었다. 이미 모른척하기에는 서로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




  “카게야마가 최근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한다던데.”


  반쯤 장난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에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더라.”

  “지역 체육관에서 혼자 한다던데. 네가 안 가르쳐주니까 몸 달았나 보지?”


  비아냥거리며 툭툭 오이카와의 어깨를 치는 친구에게 피식 웃어준 뒤 오이카와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카게야마나, 가르쳐주지 않고 요즘 토스 연습에 매진하는 오이카와에 대한 건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던가. 다만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 건 조금 상쾌했다. 그래서였는지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 한 명과 서둘러 헤어진 뒤 지역 체육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브 연습을 하는 카게야마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그룹, 멀리서 3대 3으로 배구연습을 하는 아주머니 그룹이 보였고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더 다가가지 않고 체육관 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공을 올리고, 높이 뛰고, 공을 내려치는 일련의 과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니, 선명한 것 그 이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저 과정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3단계로 나눠서 기억해놓은 저 과정은 오이카와의 서브 과정이었다. 


  “…바보 아냐?”


  픽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입을 가렸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제 서브를 흉내내고 있는 카게야마나, 카게야마의 토스를 상상하며 제 토스 자세를 비트는 오이카와나. 모든 것이 바보 같았고, 왜 카게야마와 저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바벨탑과 같이 쌓고 있던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토스가 모래성처럼 바닥부터 허물어졌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게야마의 서브가 어긋날 때마다, 그 서브 뒤편으로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꿈에서보다도 선명했던 카게야마의 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자세도, 위치도 전부 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녹아내려서, 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등을 돌렸다. 

  넌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어, 토비오. 형태도 없는 내 그림자만 따라가면서 흉내쟁이로 살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해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그림자를 부숴주러 올게.

  오이카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구름이 말갛게 빛나고,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거리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배구가 하고 싶었다. 또한, 간만에 서브 연습을 하고 싶었다. 반에서 오이카와만 제출하지 못한 진로희망조사서에 쓸 내용도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구를 하고 싶었다.




**




  “이와쨩, 이거 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내밀었다. 1순위부터 3순위까지,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똑같은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


  이와이즈미는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 읽었다. 배시시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종이를 정확히 2번 접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갈 거야. 이번엔 꼭 우시와카쨩 이길 거라고. 아, 토비오쨩도.”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는 어쩌고?”

  “아, 그건 됐어. 하고 싶은 거 바뀌었으니까.”

  “가벼운 남자네, 이거.”

  “이와쨩, 한 마디 많다고!”


  오이카와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가슴 통증이 그 눈동자와 함께 찾아올 때면, 오이카와는 다시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를 봤던, 그 영겁의 삶도 가치 없어질 만큼 무섭게 아름답던 순간을.










-


** 사망소재 주의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괴롭지 않게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서둘러 지나면서 생각을 털었다. 뛰어가는 오이카와의 옆으로 외제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잠시 주춤한 뒤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을 좋게 떠나는 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었다. 서점에는 요즘에서 안락사에 대한 책이 즐비해 있다. TV를 몇 번 돌려보면 여러 가지 죽음의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죽음, 사고 현장의 사망자 통계,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좋게 헤어지는 방법 등

오이카와는 드라마 속 배우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빗속을 뛰어가면서 그 표정을 조심스레 흉내 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단 건 알 수 있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봤다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발아래에서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튀겼다. 저번 주에 산 새 구두가 몹쓸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라는 글자가 왼쪽 귀 언저리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양 귀에 이어폰을 낀 듯 그 이름은 금세 머리 전체에 퍼져 카게야마와 연관된 몇 가지가 줄줄이 낚여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그중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이미 부유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했다.

 

 

**

 

 

잘 모르겠어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다는 말은 카게야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한쪽 입 끝을 오므리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작은 식탁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카게야마를 다리 사이에 끼면 어제 세탁한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조금 달콤한 솜사탕 향, 오이카와의 취향이었다.

생각해야지. 이후의 일.”

고집부리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 건 오이카와씨잖아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오이카와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가늘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요 근래 입에 제대로 대는 것이 없었다.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면 장골능이 오이카와의 허리에 닿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단단한 근육을 짓누르고, 카게야마는 약간 오이카와에게 기대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플라스틱 식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두른 카게야마의 팔을 풀고 얇은 팔을 덮는 티셔츠의 소매를 올렸다. 두 개로 곧게 뻗은 뼈는 보기에 좋았다.

요새 많이 건방져졌다? 이 오이카와씨한테 그런 말도 하고.”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제 팔을 힘겹게 빼냈다. 앞서 목에 둘렀던 팔을 재차 허리 뒤로 둘렀다. 검은 고양이 같았다. 두 검은 눈동자가 동그라니 떠서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고, 얇은 몸을 오이카와에게 천천히 부비적댔다.

지낸 시간 보다 이후의 시간이 더 길잖아.”

오이카와는 쓴맛을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방금 마신 커피는 평소보다 씁쓸했고, 평소 사던 원두가 아닌 걸 이제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매달린 팔이 힘겹게 풀리려고 해서, 오이카와는 그 허리를 더욱 지탱했다. 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갖다 대자 모난 뼈가 잡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전 상관없어요.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쟁이인지는 몰라도, 전 지금 정도면 됐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실핏줄을 닮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오이카와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물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식탁에 내려놓자, 플라스틱 식탁은 버겁다는 듯 날 선 소리를 냈다. 엉덩이 밑에 갖다 댄 손에는 카게야마의 청바지 촉감이 까슬하게 닿았다. 뒷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천천히 만지자, 카게야마는 하지 말라는 듯 오이카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지금은 언젠가 사라지잖아. 네가 말한 지금은 이미 방금 전이 됐고, 몇 분이 지나면 예전이 되고,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잖아.”

전 언제나 지금이에요. 지금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하는 건 항상 오이카와씨였죠.”

오이카와는 부정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솜사탕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티셔츠에 코를 묻으면서도, 당장 내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는 친선 경기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누나의 생일이었다. 이후를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간은 항상 어느 정도 어긋나있었고, 오이카와는 그러한 시간의 틈에 답답하면서도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제 오이카와와 싸운 일도, 내일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지금의 그에겐 두 팔에 남겨진 오이카와의 단단한 허리로도 충분했다.

버릇인걸.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말해줄래? 그러니까, 난 준비하고 싶은 거야. 헤어지는 준비는 일이 닥치고 나서 하면 늦으니까.”

만남과 이별은 하나였고, 일맥상통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맺어진 인연은 어디로 가든 이별로 통했고, 오이카와는 이 만남을 맺은 것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지점을 카게야마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끊는 건 카게야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집불통인 점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고개를 피하고 오이카와의 허리에만 들러붙고 있었다. 무겁게 누르는 카게야마의 뼈가 아팠다. 부엌의 통유리로 짙게 들어오는 햇볕이 등에 닿아 피부 사이사이로 땀이 한두 방울 맺혔다.

오이카와씨는 너무 뒷일까지 생각하시네요.”

카게야마는 불만인 듯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강하게 안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튀어나와 오이카와를 곳곳이 찔렀다. 이별하기까지의 아픔이었다.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 태양 빛에 오이카와의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먹먹한 목이 씁쓸했다. 식탁 위에 올려졌던 커피잔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고집을 부리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 아세요?”

그건 단어와 형용사의 조합이잖아. 말이 아니야.”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요. 죽음이란 건 제각기 다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준비는 닥치고 나서 해도 괜찮다고요. 항상 어긋났던 것들도 그때가 되면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는 않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피했다. 카게야마의 앞에서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입을 다물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마주 잡았던 손을 카게야마가 풀고 난 뒤에, 시간이 어긋난 채로 남는 건 오이카와였다. 좋은 죽음의 뒤에 새로이 기억을 덧입혀야 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그 준비를 하고 싶었다. 뒷일을 항상 미리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딱딱한 뼈를 만졌다. 튀어나온 팔꿈치 뼈, 아래팔뼈, 엉덩이 아래쪽의 몽글한 뼈, 톡 튀어나온 귀 아래쪽 턱뼈까지. 카게야마는 왜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냐며 비죽 웃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항상 왜 그렇게 어긋났을까 하고 생각할 지도요.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같이 지낸 시간도 길고, 의외로 저랑 오이카와씨는 닮았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오이카와씨를 누구랑 닮았다고 하는 거야. 전혀 다르잖아. 난 토비오처럼 어둡지도 않은걸.”

항상 조금씩 어긋났던 시간이 그때가 되면 마침 마주쳐서,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카게야마의 현재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오이카와에게 옮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단단히 짜증이 난 듯 오이카와의 목 언저리를 꽉 깨물었다.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촉촉한 감촉이 새로운 감각이 되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카게야마의 혀는 말캉거렸고, 솜사탕 향을 머금은 듯 조금 달달했다.

나쁜 버릇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나, 항상 이별을 생각하는 거나.”

버릇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한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가 생각하는 것과 카게야마의 생각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의 서브 모습을 찍은 비디오가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나치게 닮은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났었다. 그가 카게야마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는 점에서 더욱 싫증을 느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매사 어긋나는 것도, 조금의 취향도 겹치지 않는 것도, 전부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처럼, 좋은 이별이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오이카와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가끔 오이카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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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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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여성 주의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뱉었다. 검은 벚꽃의 향기가 머릿속에서 아롱아롱 떨어지고, 빛을 흘리고, 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나는 그날따라 너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꿨다. 나는 칠흑 벚꽃 잎 아래에 있었고, 너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입에 벚꽃 잎이 가득 들어찼다. 입속 점막에는 간지러운 벚꽃 잎 무더기가, 마른 혀끝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코 밖으로는 역한 꽃내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가 검은 태양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헉헉댔다. 나를 구해줘,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나약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는 아주 잠깐 가엾은 갓난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이젠 잊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목이 아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눈물 한 방울들이 벚꽃 잎 한 가지로 변해 발밑에 쌓였다. 눈물로 만들어진 하얀 벚꽃 잎을 발로 짓이기고, 입속의 벚꽃 잎들을 게워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꿈꿨어?”

.”

울고 있어.”

알아.”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낮게 떠서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찝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을 품에 안았다. 땀 냄새나, 그녀가 작게 내뱉은 불만은 귀 깊숙한 곳에 몽우리져 체내의 물방울이 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열었다.

꽃 폈어?”

한두 개라면.”

분홍색이야?”

분홍 벚나무라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분홍 벚꽃 잎을 떠올렸다. 너와 본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후회하세요?’

뭐를?’

저랑 꽃놀이 온 거요.’

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게 너라는 존재는 어렵고, 또 모호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에 대한 거라면 허벅지 안쪽의 별 모양 점에 대해서도 아는데, 나는 네가 어제 자른 손톱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네가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데, 네 안이 어떤 물질로 가득 차있는지도 몰랐다. 나와 너는 그런 상태로 함께하고 있었다.

꽃놀이, 오고 싶지 않았어?’

꽃이란 거 잘 모르니까요.’

벚꽃은 알잖아.’

오이카와씨가 아는 것만큼 알지는 못해요.’

나도 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벚꽃은 벚나무에서 열린다는 것, 향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한차례 강하게 불면 참기 힘든 꽃내음이 난다는 것, 떨어져서 발밑에 쌓여도 더럽지 않다는 것 정도. 너에 대한 것보다도, 나는 꽃에 대해 자세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건 가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회하는 거야? 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벚꽃은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꽃이 지는 걸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서서,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서로 아는 거라곤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너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나였고, 끄덕인 건 너였다. ‘후회하냐고 물어야 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는 건 나였고 대답하는 건 너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손톱 하나의 형태까지도 모르는 나는 대답이라는 질문이 어려웠다. 대답해줘, 토비오. 그렇게 말하면 너는 고민하다가도, 나를 조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럼, 후회하는 거야?’

선택한 건 저인걸요.’

너는 고개를 내리깔고 아래에 쌓인 벚꽃 잎들을 바라봤다. 목이 빠져라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몇몇 커플들이 너의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벚꽃 잎들이 네 아래에 형태 없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있었다. 눈가 끝이 엷게 붉어진 게 보였다. 숨을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다. 네가 내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후회만큼, 나는 너에게 입을 다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네가 오이카와씨,’라고 부른 말 뒤편에 삼켜버린 말 만큼, 나는 너를 안아줄 의무가 있었다. 설령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대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무 뒤편에 철저히 숨었다.

봄이란 건 후회의 계절이잖아.’

봄이요?’

. 작년엔 그러지 말걸, 올해 초반엔 왜 그랬을까, 뭐 그런 것들.’

오이카와씨도 후회란 걸 하나요.’

원망 섞인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에선 귀엽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토비오, 너는 다시 바닥을 바라봤다. 꽃을 보러 와서 바닥만 보는 너는 참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게 바른 거야, 나는 생각했다. 꽃이란 건 결국 지는 게 최종 형태니까, 네가 꽃을 가장 바르게 보고 있는 거야. 벚꽃을 보러 온 사람 중 오직 너만이 벚꽃을 가장 그 형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 발아래에 묻힌 벚꽃 잎들을 떠올렸다. 처음 네가 나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날, 나는 내 심장이 네 발아래 짓이겨지는 상상을 했다. 꽃은 지고, 떨어져서, 밟히는 게 가장 올바른 꽃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쯤은 한다고. 그런 걸 먹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날 받아들이지 말걸, 키스하지 말걸,’

오이카와씨.’

좋아하지 말걸,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밤, 내 앞에서 손톱을 깎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였던 것들을 그 어딘가에 버리면서 너는 무슨 상상을 할까. 한 번쯤, 너는 내가 없는 너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나는 그런 밤이면 눈 끝이 붉은 너를 안고, 어두운 침대로 끌어들였다. 검은 벚꽃 잎이 너를 덮고 나를 덮어 그 방안에 가득 차면, 네 뒤편에 쌓인 후회에 깨끗이 포장된 한 개의 상자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토비오.’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너는 대답했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기어코 너의 눈에서 나온 물 한 방울이 나는 무겁고 또 버거워서 어깨를 툭 떨구고 싶었다. 나는 항상 대답을 네게로 미뤘고, 너는 내 이름 뒤에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고 내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네가 손톱을 버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였을, 그 수많은 좋아하지 말걸의 후회들이 발아래에 쌓였다. 오늘도 네게서 호롱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나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살아났어?’

품 안의 그녀가 낮게 물었다. 땀이 식은 등허리에 고통이 뚝뚝 끊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손톱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벚꽃을 보고, 밤에는 손톱을 자르자. 나는 눈을 작게 내리깔고 손톱을 자르던혹은 꽃의 홍수를 바라보던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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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1

 

오이카와 선배와 만나는 날이었다.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붉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는 작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옆에서 큰 농사를 짓는 한 노부부의 물길이 벽돌 옆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라스노 고교 앞에만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공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까, 반질반질한 회반죽이 그대로 굳은 느낌이었다.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은 태양은 어울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손에 들린 우유빵이 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늦었잖아.”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내뱉은 입의 주변에는 우유빵 조각이 붙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가, 여느 때와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지나가던 카라스노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 힐끔거리며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여학생에게 살포시 미소 짓자, 그 두 명은 꺄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선배를 기다리게 하다니, 토비오쨩 안 되겠네.”

오이카와 선배는 남은 우유빵 한 입을 내게 내밀며, ‘하고 말했다. 조금만 입을 벌리면 바로 쏙 들어올 것 같은 우유빵을 살며시 밀고, 됐어요. 하며 인상을 구부렸다.

귀염성 없네, 정말.”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중얼거리고 남은 우유빵은 전부 제 입에 넣어버렸다. 입가 끝에 묻은 우유빵 조각을 손으로 훑어 삼킨 뒤, 오이카와 선배는 작게 웃었다.

갈까.”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끝에서 지고 있는 하늘 안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짙은 하늘색의 그라데이션이 구름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걸어가는 동안 우유빵 봉지를 작게 접어 딱지를 만들었다. 작은 딱지를 몇 번 손에서 굴리더니, 이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옆모습에 짙은 분홍빛의 그라데이션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의 얼굴과 같이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고 있어.”

오이카와 선배는요?”

글쎄, 어떤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오이카와 선배는 장난치는 듯이 미소 짓더니,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감정이 담긴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토비오쨩이 귀여운 여자아이였다면 좋아했을지도.”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몰래 쳐다봤던 여학생 두 명을 떠올렸다. 길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에,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어깨가 동그랬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 아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손을 흔들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선 얘기 끝난 거야?’ 되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젊었을 적 어머니와 같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양털과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러 많은 남자 선배들이 여자 배구부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토스를 올리려고 팔을 드는 순간, 내 손가락이 유달리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지금 있는 곳은 카라스노 고교 여자 배구부였다. 체육관 바깥쪽에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빛깔의 태양을 보고 난 그제야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남자 선배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카게야마가 여길 보고 있어.”

역시 귀엽네. 저번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귀여운데.”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발꼬리에 쌓여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난 귀여운 여자애구나. ‘귀엽다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푸른 태양의 세상에서 나는 귀여운 여자애였다.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리려고 가볍게 뛰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렸다.

 

 

토비오쨩, 만두 먹을래?”

오이카와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기만두를 내밀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받아들고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들면 짙은 보라색의 하늘이 구름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색깔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 입가에 묻은 만두 조각을 손으로 훑어다가, 자기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듯한실제로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적이 없다달콤한 행동, 목소리, 말투. 이 꿈속에서 난 오이카와 선배보다 훨씬 작아서, 나를 바라보고자 고개를 약간 숙인 행동까지. 오이카와 선배에게 나는 여자애로 보이고 있었다. 푸른 태양, 보랏빛 구름과 존재할 리 없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의 세계 안에서 오이카와 선배는 설탕 시럽처럼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조금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서, 다시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고민하는 듯 음낮은 목소리를 내며 오이카와 선배는 눈가를 좁혔다. 만두를 들고 있는 내 오른손을 이끌더니, 남은 만두 한입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고 오이카와 선배는 웃어 보였다. 만두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손가락 하나에 가볍게 키스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이지, 토비오쨩이.”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떨어뜨린 뒤,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흘러내려 갔다.

만약, 말이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가 아쉬워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이 배구를 안 했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배구 안 하는 토비오쨩을.

오이카와 선배가 살며시 깨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푸른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3

꿈을 꿨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1학년, 주변에서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애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카게야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 선배들이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배구부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간에는 카라스노 고교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이카와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오바죠사이라는 고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세터, 키타이치 중학교 시절의 나의 토스, 지금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푸른 태양이 일그러져 바닥에 녹아내렸다. 보랏빛 하늘 아래 카게야마 토비오와, 푸른색 태양조각이 흩어져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깨물었던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오쨩.”

 

눈을 떴다. 침대 안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울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1학년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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