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novel > 하이큐!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Blindness Love  (2) 2016.06.02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0) 2016.05.03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3) 2016.04.04
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0) 2016.03.24
오이카게 전력 #7 동거  (0) 2016.03.06

* 모브여성 주의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뱉었다. 검은 벚꽃의 향기가 머릿속에서 아롱아롱 떨어지고, 빛을 흘리고, 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나는 그날따라 너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꿨다. 나는 칠흑 벚꽃 잎 아래에 있었고, 너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입에 벚꽃 잎이 가득 들어찼다. 입속 점막에는 간지러운 벚꽃 잎 무더기가, 마른 혀끝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코 밖으로는 역한 꽃내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가 검은 태양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헉헉댔다. 나를 구해줘,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나약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는 아주 잠깐 가엾은 갓난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이젠 잊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목이 아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눈물 한 방울들이 벚꽃 잎 한 가지로 변해 발밑에 쌓였다. 눈물로 만들어진 하얀 벚꽃 잎을 발로 짓이기고, 입속의 벚꽃 잎들을 게워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꿈꿨어?”

.”

울고 있어.”

알아.”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낮게 떠서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찝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을 품에 안았다. 땀 냄새나, 그녀가 작게 내뱉은 불만은 귀 깊숙한 곳에 몽우리져 체내의 물방울이 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열었다.

꽃 폈어?”

한두 개라면.”

분홍색이야?”

분홍 벚나무라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분홍 벚꽃 잎을 떠올렸다. 너와 본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후회하세요?’

뭐를?’

저랑 꽃놀이 온 거요.’

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게 너라는 존재는 어렵고, 또 모호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에 대한 거라면 허벅지 안쪽의 별 모양 점에 대해서도 아는데, 나는 네가 어제 자른 손톱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네가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데, 네 안이 어떤 물질로 가득 차있는지도 몰랐다. 나와 너는 그런 상태로 함께하고 있었다.

꽃놀이, 오고 싶지 않았어?’

꽃이란 거 잘 모르니까요.’

벚꽃은 알잖아.’

오이카와씨가 아는 것만큼 알지는 못해요.’

나도 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벚꽃은 벚나무에서 열린다는 것, 향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한차례 강하게 불면 참기 힘든 꽃내음이 난다는 것, 떨어져서 발밑에 쌓여도 더럽지 않다는 것 정도. 너에 대한 것보다도, 나는 꽃에 대해 자세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건 가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회하는 거야? 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벚꽃은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꽃이 지는 걸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서서,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서로 아는 거라곤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너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나였고, 끄덕인 건 너였다. ‘후회하냐고 물어야 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는 건 나였고 대답하는 건 너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손톱 하나의 형태까지도 모르는 나는 대답이라는 질문이 어려웠다. 대답해줘, 토비오. 그렇게 말하면 너는 고민하다가도, 나를 조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럼, 후회하는 거야?’

선택한 건 저인걸요.’

너는 고개를 내리깔고 아래에 쌓인 벚꽃 잎들을 바라봤다. 목이 빠져라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몇몇 커플들이 너의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벚꽃 잎들이 네 아래에 형태 없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있었다. 눈가 끝이 엷게 붉어진 게 보였다. 숨을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다. 네가 내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후회만큼, 나는 너에게 입을 다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네가 오이카와씨,’라고 부른 말 뒤편에 삼켜버린 말 만큼, 나는 너를 안아줄 의무가 있었다. 설령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대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무 뒤편에 철저히 숨었다.

봄이란 건 후회의 계절이잖아.’

봄이요?’

. 작년엔 그러지 말걸, 올해 초반엔 왜 그랬을까, 뭐 그런 것들.’

오이카와씨도 후회란 걸 하나요.’

원망 섞인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에선 귀엽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토비오, 너는 다시 바닥을 바라봤다. 꽃을 보러 와서 바닥만 보는 너는 참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게 바른 거야, 나는 생각했다. 꽃이란 건 결국 지는 게 최종 형태니까, 네가 꽃을 가장 바르게 보고 있는 거야. 벚꽃을 보러 온 사람 중 오직 너만이 벚꽃을 가장 그 형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 발아래에 묻힌 벚꽃 잎들을 떠올렸다. 처음 네가 나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날, 나는 내 심장이 네 발아래 짓이겨지는 상상을 했다. 꽃은 지고, 떨어져서, 밟히는 게 가장 올바른 꽃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쯤은 한다고. 그런 걸 먹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날 받아들이지 말걸, 키스하지 말걸,’

오이카와씨.’

좋아하지 말걸,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밤, 내 앞에서 손톱을 깎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였던 것들을 그 어딘가에 버리면서 너는 무슨 상상을 할까. 한 번쯤, 너는 내가 없는 너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나는 그런 밤이면 눈 끝이 붉은 너를 안고, 어두운 침대로 끌어들였다. 검은 벚꽃 잎이 너를 덮고 나를 덮어 그 방안에 가득 차면, 네 뒤편에 쌓인 후회에 깨끗이 포장된 한 개의 상자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토비오.’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너는 대답했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기어코 너의 눈에서 나온 물 한 방울이 나는 무겁고 또 버거워서 어깨를 툭 떨구고 싶었다. 나는 항상 대답을 네게로 미뤘고, 너는 내 이름 뒤에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고 내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네가 손톱을 버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였을, 그 수많은 좋아하지 말걸의 후회들이 발아래에 쌓였다. 오늘도 네게서 호롱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나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살아났어?’

품 안의 그녀가 낮게 물었다. 땀이 식은 등허리에 고통이 뚝뚝 끊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손톱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벚꽃을 보고, 밤에는 손톱을 자르자. 나는 눈을 작게 내리깔고 손톱을 자르던혹은 꽃의 홍수를 바라보던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novel > 하이큐!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0) 2016.05.03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0) 2016.04.18
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0) 2016.03.24
오이카게 전력 #7 동거  (0) 2016.03.06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4) 2016.02.23




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1

 

오이카와 선배와 만나는 날이었다.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붉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는 작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옆에서 큰 농사를 짓는 한 노부부의 물길이 벽돌 옆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라스노 고교 앞에만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공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까, 반질반질한 회반죽이 그대로 굳은 느낌이었다.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은 태양은 어울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손에 들린 우유빵이 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늦었잖아.”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내뱉은 입의 주변에는 우유빵 조각이 붙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가, 여느 때와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지나가던 카라스노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 힐끔거리며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여학생에게 살포시 미소 짓자, 그 두 명은 꺄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선배를 기다리게 하다니, 토비오쨩 안 되겠네.”

오이카와 선배는 남은 우유빵 한 입을 내게 내밀며, ‘하고 말했다. 조금만 입을 벌리면 바로 쏙 들어올 것 같은 우유빵을 살며시 밀고, 됐어요. 하며 인상을 구부렸다.

귀염성 없네, 정말.”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중얼거리고 남은 우유빵은 전부 제 입에 넣어버렸다. 입가 끝에 묻은 우유빵 조각을 손으로 훑어 삼킨 뒤, 오이카와 선배는 작게 웃었다.

갈까.”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끝에서 지고 있는 하늘 안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짙은 하늘색의 그라데이션이 구름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걸어가는 동안 우유빵 봉지를 작게 접어 딱지를 만들었다. 작은 딱지를 몇 번 손에서 굴리더니, 이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옆모습에 짙은 분홍빛의 그라데이션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의 얼굴과 같이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고 있어.”

오이카와 선배는요?”

글쎄, 어떤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오이카와 선배는 장난치는 듯이 미소 짓더니,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감정이 담긴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토비오쨩이 귀여운 여자아이였다면 좋아했을지도.”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몰래 쳐다봤던 여학생 두 명을 떠올렸다. 길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에,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어깨가 동그랬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 아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손을 흔들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선 얘기 끝난 거야?’ 되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젊었을 적 어머니와 같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양털과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러 많은 남자 선배들이 여자 배구부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토스를 올리려고 팔을 드는 순간, 내 손가락이 유달리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지금 있는 곳은 카라스노 고교 여자 배구부였다. 체육관 바깥쪽에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빛깔의 태양을 보고 난 그제야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남자 선배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카게야마가 여길 보고 있어.”

역시 귀엽네. 저번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귀여운데.”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발꼬리에 쌓여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난 귀여운 여자애구나. ‘귀엽다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푸른 태양의 세상에서 나는 귀여운 여자애였다.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리려고 가볍게 뛰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렸다.

 

 

토비오쨩, 만두 먹을래?”

오이카와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기만두를 내밀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받아들고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들면 짙은 보라색의 하늘이 구름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색깔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 입가에 묻은 만두 조각을 손으로 훑어다가, 자기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듯한실제로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적이 없다달콤한 행동, 목소리, 말투. 이 꿈속에서 난 오이카와 선배보다 훨씬 작아서, 나를 바라보고자 고개를 약간 숙인 행동까지. 오이카와 선배에게 나는 여자애로 보이고 있었다. 푸른 태양, 보랏빛 구름과 존재할 리 없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의 세계 안에서 오이카와 선배는 설탕 시럽처럼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조금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서, 다시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고민하는 듯 음낮은 목소리를 내며 오이카와 선배는 눈가를 좁혔다. 만두를 들고 있는 내 오른손을 이끌더니, 남은 만두 한입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고 오이카와 선배는 웃어 보였다. 만두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손가락 하나에 가볍게 키스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이지, 토비오쨩이.”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떨어뜨린 뒤,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흘러내려 갔다.

만약, 말이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가 아쉬워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이 배구를 안 했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배구 안 하는 토비오쨩을.

오이카와 선배가 살며시 깨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푸른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3

꿈을 꿨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1학년, 주변에서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애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카게야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 선배들이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배구부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간에는 카라스노 고교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이카와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오바죠사이라는 고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세터, 키타이치 중학교 시절의 나의 토스, 지금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푸른 태양이 일그러져 바닥에 녹아내렸다. 보랏빛 하늘 아래 카게야마 토비오와, 푸른색 태양조각이 흩어져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깨물었던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오쨩.”

 

눈을 떴다. 침대 안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울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1학년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novel > 하이큐!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0) 2016.04.18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3) 2016.04.04
오이카게 전력 #7 동거  (0) 2016.03.06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4) 2016.02.23
오이카게 전력 #5 마츠리(축제)  (0) 2016.02.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