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7 동거

 



 

오이카와 선배네 집은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개인 주택의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고, 현관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화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몇 개 피어있었다. 당겨서 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는 신문을 놓을 수 있는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왼쪽에는 안 쓰는 방이 있었다. 매일 닦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계단을 오르면 발을 내딛는 곳 아래쪽으로 나무 썩는 소리가 들렸다. 삐이, 삐극, 삐걱하는 소리가 끝나고 2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오이카와 선배의 방이었다. 사각으로 접어놓은 이불, 좌식 책상과 옷에 걸린 교복까지, 무엇 하나 오이카와 선배의 향이 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배구공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로서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벽걸이형 달력에 표시되어있던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319, 졸업식. 오이카와 선배의 글씨체가 아닌 그 표시는 가족 중 누군가가 적어놓은 듯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간 날이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달력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젖었다가 마른 흔적까지 생각나는데도, 기억이란 이상한 곳에서 모호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돼, 토비오쨩.’

난 그 말을 듣고 좌식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 할지, 혹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좋을지 잠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손바닥에 차가운 식은땀이 번졌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지금껏 집에 초대한 후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나는 쿠니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초등학교 이후로 오이카와 선배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이와이즈미 선배와 오이카와 선배의 대화로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깨에 멘 에나멜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봤다.

저기,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무언가 소중한 걸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앉아도 돼, 한 번 더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뇌 속의 바람이나 기호에 따라 조금씩 가공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에나멜 가방을 한 손으로 빼서,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계 두 개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서로 어긋난 박자로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조금 머리가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는 양손으로 내 체육복 저지 상의를 벗겼다. 저지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다다미 바닥은 소리 흡수를 잘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내 흰색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비오,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로 이사를 왔다. 걸어서 역까지 8, 역에서 학교까지 30.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며 히나타는 부러워했다. 오이카와 선배와는 가끔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도쿄로 이사 왔다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 오이카와 선배와 같은 대학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었고, 그쪽에서 먼저 스카우트하러 온 걸 보고 츠키시마는 행운이네라고 했다. 성적으로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학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 선배가 없는 2년은 회색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했고, 기쁘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오이카와 선배에 대한 감정은 생각 날 때만 한 번 꺼내보는 상자였다. 가끔가다 기억을 되새기곤 했지만 꿈에 나올 때는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있는 때가 많았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연락을 보내오는 오이카와 선배도 신기루 같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여자 선배와 함께 있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동거를 먼저 시작한 선배라며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아주 드물게 배구를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마다 동거생활의 소소한 팁을 말했다. 프라이팬 하나로 반찬을 세 개 만드는 법, 설거짓거리를 줄이는 방법, 처치 곤란한 채소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 등……. 나는 거의 항상 끼니를 밖에서 때우거나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의외로 살림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밥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대학 내에서 유명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자취하는 집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많은 여자 선배와 사귀었고, 대학 내에서 친구도 많았으며 여전히 배구부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누가 데려다줘야 할 정도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 후에는 애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으며, 평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 해주면서도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는 부드럽게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우와,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이 대학 무섭네.”

네가 조금 유명한 사람이어야지하긴, 2년이면 오래 사귀었네.”

같은 강의실 뒤편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까.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웠다. 강의실 창문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햇볕이 내 뒤로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웠고, 머릿속에선 기억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퍼즐처럼 흩어져 있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세리자와랑 얘기해봐야지.”

그래서? 이제 동거하는 건가?”

우와, 나카지마 불건전해! 오이카와씨는 동거란 말은 모른답니다!”

무슨곧 졸업인데, 결혼하기로 정한 남녀가 뭐하러 따로 사냐고.”

동거는 안 해. 그건 세리자와랑도 얘기 끝난 사항이야.”

오이카와 선배는 시합할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내 오이카와 선배는 가벼운 말투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 만의 비밀이야!’ 작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

발신인은 중학교 때부터의 선배였다.

 

 

왜 안 먹어? 이제 카레 싫어하나?”

오이카와 선배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이카와 선배 앞에는 방금 만든 로제 파스타가 있었다. 카레의 달콤한 향이 코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반질거리는 겉면의 반숙 달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뜨거운 카레 위에서 뒤척였다.

좋아해요.”

근데 왜 안 먹어?”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 속의 오이카와 선배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본 오이카와 선배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그건 오이카와 선배가 결혼하기로 결정 한 세리자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굳이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이카와 선배는 잊을만하면 연락했고, 나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러 나온 건 나였고, 그의 앞에 앉아 카레를 주문한 것도 나였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불러낸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기억도 변형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있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는 아예 기억 자체의 상자를 닫아버린 것인지. 나는 오이카와 선배도 같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도 선명했던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억에는 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바람이 투영된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찰나와 같이 웃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내 귀를 덮고 볼에서 목까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토비오, 우리 같이 살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주 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중학교 때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어린아이였다. 그를 아는 것은 저뿐이라는 기분에 젖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서 시작한 기억을, 그와의 동거로 끝맺는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된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도 그에게 끌리고 있는 채였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그날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에 잘못된 일은 없어.”

일어나야만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이야.”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일어나는 일의, 일어나야만 하는 일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의, 그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동거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면. 아니, 그의 사랑이고 나의 사랑이라면. 내 기억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만 선명한 것도 그러한 일종인 걸까.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이외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외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았다.

저랑 만난 걸 후회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너를 만난 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에는 후회라는 말이 필요 없지.”

오이카와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던 카레 속 반숙 달걀이 저 혼자 터져서, 누런 노란 빛의 달걀 속이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속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서 오이카와 선배와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건 이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일까.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운명의 상대라는 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면 자주 나오는 저 말은, 쉽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상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색이 아주 특별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회색의 세상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 내가 먹고 있는 수프의 색과 아주 단순하게 내 몸의 털이 무슨 색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전부 다 회색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말을 배우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회색 그림책을 내게 사줬다. 그림책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색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지만. 어머니는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을 읽고 한 장 넘겼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아는 회색의 세상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 내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

어느 날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빛깔, 얼음처럼 차갑고 사나운 빛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빛까지. 루시아는 그것이 색깔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시아의 운명의 상대는 소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림책의 문자를 읽어나갔다. 책 속의 루시아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머니는 그림책을 덮고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에 찬 듯 반짝였다.

토오루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루시아에게 소니 같은 사람, 엄마에게 아빠 같은 사람.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내 행복이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가기 전 동거 상대가 데려온 회색 고양이 토토가 가늘게 울었다. 토토의 등을 한두 번 쓰다듬어준 후 작은 코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동거 상대와 머무는 회색 지붕의 건물 3층은 경치가 꽤 좋고, 안방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2인용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동거 상대는 자주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안방에서 토토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이면 직접 만든 카레를 먹고, 회색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그와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고, 루시아가 말했듯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얼마 후 있을 국가대표 결정전을 대비하고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날도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이었다. 나는 그가 없는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동거 상대는 내가 없는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선잠이 드는 날이 늘어갔다.

급해서 대충 챙겨 입고 나온 외투는 초겨울용이었다. 소매 안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색이 없는 세상에서회색을 색이 아니라고 본다면사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바람의 세기와 피부에 와 닿는 온도, 콧속을 한꺼번에 채우는 향기뿐이었다. 봄의 벚꽃과 장미향기, 여름의 턱 끝까지 답답한 열기,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겨울의 회색 눈덩이가 내가 아는 계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실내에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바쁘게 연습과 시합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건 내 동거 상대가 더 심해서, 작년 겨울에는 후드 티에 얇은 조깅팬츠 하나만 입고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하고 와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지독하게 건강한 건지 결국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키스를 한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단 건 답답한 일이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세상은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비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가?”

토비오는 설탕으로 착각해서 소금 범벅이 된 계란말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물었다. 냉장고에 몇 개 있는 남은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고, 수저를 놓은 후 내가 대답했다. 쓰레기통 속에 여전히 시선을 향한 채, 토비오는 내게서 등 돌리고 있었다. 회색 브이넥은 입은 어깨가 넓었다. 똑같이 브이넥을 입은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는 커플티를 입은 상태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커플 옷을 사 입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옷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고 옷장에 따로 보관해도 섞이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체격이 더 큰앞으로도 토비오보다는 항상 더 클내가 옷을 구분해서 다시 넣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거요.”

회색은 보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보인다던데요.”

그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났다. 토비오는 가끔 내가 짜증 낼만 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짜증을 내는 나 또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길 바랐다. 나는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로 토비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토비오는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토비오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여러 가지 말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는 말로 대화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토비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항상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몰랐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

내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토비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토비오의 시선이 식탁 위의 회색 반찬들을 향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토비오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짜증 섞인 말투를 억누르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고, 토비오는 또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가끔 토비오는 내게 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운명의 상대가 아닌, 색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었고 나와 토비오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에게는 가끔 힘이 들었다.

전 오이카와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함께 있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요?”

……토비오.”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토비오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거품처럼 떠올랐다. 회색의 세상이 말로만 듣던 채도를 갖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경험은 나에겐또한 토비오에겐없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나는 중학교 때 토비오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 토비오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비오와 생활하고 있는 3층 동거 집은 회색 일색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색에 대해 떠올렸다. 꿈속에선 너무 많은 색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결국 웃고 마는 나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토비오의 머리색은 무슨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태양 빛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했고 어떨 땐 꽤 그럴싸한 걸 상상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운명의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그쳤다. 나는 그날 밤 회색 이불 안에서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잠이 든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회색 머리에 얼굴을 묻고, 회색 입술에 입을 맞추고 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세상은 회색이었고, 토비오였다.

 

약속장소는 동거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라고 정해져 있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살얼음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리를 조급히 움직였다. 카페의 넓은 통유리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토비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동자에 붙었던 먼지가 하나둘 닦이는 듯 색채가 촛불처럼 드러났다. 카페의 지붕은 황갈색이었고, 하늘에선 색유리를 낀 구름이 눈부시게 새하얀 빛으로 빛났고,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민들레 잎이 무섭도록 노랗게 반짝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한 여성도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박차고 달렸다. 회색 렌즈를 끼듯 한 줌, 두 줌 멀어지는 색채가 아쉽고 덧없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중심을 잃고 몇 번 발을 헛디뎠으나 카페 입구에 몸을 부딪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카페의 입구 문은 회색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점원은 회색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그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토비오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토비오의 앞머리를 몇 번 정돈해준 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루시아가 소니를 만난 순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토비오,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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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특별한 날'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오이카와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매일 2시간에서 3시간정도의 쪽잠을 자는게 습관이 된 탓인지, 꿈을 꾸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나마 가끔 꿈을 꾸면 이미 국화꽃 아래에 누워있는 자들과의 소름끼칠만큼 선명한 기억만 뚝뚝 끊긴 필름처럼 흘러가곤 했다. 그런 꿈을 꾸면 식은땀으로 몸이 식은 뒤에 깨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한 꿈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지나간 일에 대해선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런 그의 성격은 조직을 키우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식어버린 몸을 칼날처럼 깎고 지나가는 새벽바람이 싫었다. 전날 모르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벽바람은, 순백색의 커튼을 거칠게 휘젓고 들어와 오이카와를 휘감았다. 꿈을 꾸고 난 뒤 오이카와는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대립조직과의 회담에서 볼썽사납게 기침하는 꼴이 오이카와 토오루 본인이 생각해도 영 아니었지만 어찌할 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자는 시간을 줄였다. 애초에 모자른 게 오이카와의 시간이었으니, 어느 면으로 보면 효율적이었다.

오이카와는 반쯤 들어올린 눈동자를 옮겨 옆을 바라봤다. 깊게 잠든 얼굴 위, 어느새 길게 자란 검은 앞머리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 아래에 모양 좋게 자리잡은 입술은 얇게 열려 있었다.

앞머리, 자르라고 한 게 벌써 일주일짼데.’

오이카와는 아직 부연 머릿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눈 앞에서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정돈했다. 아무리 정돈해도 모래가루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오이카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린애같이 체온이 높은 그를 끌어당겨 안았더니, 식었던 몸에 다시 온기가 뭉근하게 새어올랐다. 귓불이 따끈한 느낌이 좋았다. 오이카와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최근 수면시간은 거의 8시간이었다. 사실 오이카와에게 정해진 수면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자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지금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경우 상황이 달랐다. 내일 핵폭탄이 터지든, 당장 세력싸움이 일어나서 총을 든 자가 뛰어들어오든 그의 수면시간은 8시간이었다. 달리 말하면, 8시간이 지나면 그는 여지없이 눈을 떴다. 그보다 늦게 잠든 오이카와가 눈을 못 뜨고 있어도 그는 오이카와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을 부산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뜨는 생활을 반복한 오이카와의 수면 습관은 이제 완전히 그와 비슷해졌다. 물론 일이 있어 더 늦게 자거나 더 일찍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대체로 비슷했다. 악몽은 매우 드물게 오이카와를 찾아왔다. 꿈속에서 미세하게 풍기던 국화꽃 향기도 점차 옅어졌다. 현실과 악몽의 경계선을 휘청거리던 오이카와는 현실도, 악몽도 아닌 안전장치 안에 자리를 잡았다. 몇 년 전 만났던 안전장치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지만, 이제사 몸에 피를 묻히고 오지 않을 정도의 레벨은 되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보기에는 여전히 건방진 꼬맹이지만.

검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주같은 눈동자에 새벽 햇빛이 닿아 별빛이 단숨에 들어찼다. 몇 번 눈을 깜빡인 검은 눈동자는 이내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이카와씨.”

좋은 아침, 토비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잠에서 깬 약간 멍한 얼굴은 몇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몸도, 키도, 어깨도, 손가락 길이도 달라졌지만 토비오의 표정은 전부 그대로였다. 토비오가 표정으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체온이 높은 카게야마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천천히 그 모양을 따라 문지르듯 쓸어 내려가자, 카게야마는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 중요한 회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나중에. 준비해야지.”

그 말 어제도 들은 것 같은데요.”

.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혼났지.”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저런 표정을 아주 오랜만에 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저런 식으로 바라본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이었다. 그가 아직 오이카와의 한 팔에 가볍게 안길 정도로 작은 몸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꿈을 꿨거든.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꿈.”

오이카와씨는 꿈을 잘도 꾸시네요.”

카게야마는 큰 하품을 했다. 다시 눈이 천천히 감기는 게, 두 번째로 잠들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자지 말라는 듯 그 콧등을 가볍게 꼬집었다. 찌푸린 눈가를 보고 새삼 느꼈다.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건방진 꼬맹이는 하나도 한 변했어. 처음에 너, 나를 완전 이상한 사람 보듯이 본 거 기억나?”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데려가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누가 봐도 수상하다고요.”

수상하다니! 너무해! 어쨌든 따라온 건 토비오쨩이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콧등의 아픔은 짧았고, 폭신한 이불의 감촉은 기분좋았다. 오이카와의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젠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다. 순수하게 기분좋다고 느끼는 머릿속에선 몽롱한 졸음을 향수처럼 지속적으로 뿌리고 있었다.

저도 오이카와씨밖에 없다고 느꼈어요. 그것 뿐이에요.”

뭐가?”

제가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동그란 머리통에 참깨같이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로 조직원도 잠시간 눈을 피하고 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냥 건방진 꼬맹이였던 그를 조직으로 데려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오이카와가 손수 가르쳤다.

테이블 매너, 양복 각 부위의 명칭 및 입는 순서, 화술같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부터 총 잡는 법, 어떤 동맥을 끊어야 가장 빨리 죽는지, 암살도구의 사용법심지어 어느 순간에 그것들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이전 보스에게 11로 배웠던 실력은 카게야마를 가르치면서 발휘됐다. 그렇게 직접 배운 오이카와가 현 보스인 탓이었을까. 딱히 후계자로 키울 생각은 없지만 어디서 데려왔는지도 모를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려든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오이카와의 등 뒤편에서 끊임없이 흘렀다. 카게야마에게 그러한 비난에 대해 들은적이 있냐 물었을 때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갸웃해보일 뿐이었다. 저가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해본적도 없는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그런 점을 보고 조금 웃었다. 후계자라느니, 조직이 어떻다느니, 저 꼬맹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바로 그 때문에 카게야마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토비오, 오늘은 같이 나가야 해.”

회의는 어쩌고요?”

그건 네가 신경쓸 게 아니고. 일어나서 준비해. 사격장으로 갈거니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노란빛이 도는 피부에 새하얀 햇빛이 닿아 평소보다 더 밝아보였다. 오이카와도 몸을 일으키고 샤워실로 걸어들어갔다. 악몽을 꾸면 들리던, 오이카와를 부르는 목소리는 희미한 국화꽃 향기 너머로 점점 멀어졌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다시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보다는 준비가 먼저였다. 샤워실 문을 닫기 전, 카게야마가 옷가지를 챙겨입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등과 배에 어느정도 붙은 마른 근육이 최근 늘었다. 매일 매일은 조금씩 우리 사이에 쌓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도, 그렇지 않은 형태로도. 그것은 벌써 몇 년째 쌓인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몇 발의 총성이 들리고 난 후 카게야마는 헤드셋을 벗었다.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과녁 안에 정 중앙에 가깝게 세 발이 정확히 꽂혀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눈가를 빛냈다.

기뻐보이네.”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웃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의 과녁을 바라봤다. 조금의 틈도 없이 머리 한가운데, 가슴 한 가운데, 배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기 쉬운 꼬맹이는 오늘부터 사격 연습을 더 늘릴게 분명했다. 오이카와는 주름 한줄 없는 셔츠소매를 올린 뒤, 권총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 카게야마를 뒤에서 끌어안는 형태로 섰다.

좀 더 턱을 당겨야지.”

낮게 속삭이고 아직 제 손보다는 굳은살이 적어서 깨끗한 오른손을 감싸 쥐고, 다른 한 팔은 카게야마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굳은 채로 권총을 단단히 잡았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아듣는 것이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오이카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이제는 굳이 저가 일일이 자세를 교정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사격자세는 빈틈없이 아름다웠다. 다만 오늘이었기에, 오이카와는 사격장에 왔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감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 가까이에 입술을 대었다. 아침과 같이 온도가 높은 귓바퀴는 매끈했다. 기억나? 오이카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숨소리로 물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서, 오이카와가 골라준 카게야마의 정장에 주름이 생겼다.

오늘이잖아.”

내가 너한테 처음 사격 가르쳐 준 날.”

몇 년 전 오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 자리에서 가르쳤었다. 총 잡는 법조차 모르는 꼬맹이를 데려다가 오늘과 같이 자세를 잡고, 장전을 하고, 과녁을 노리고 쏘도록 가르쳤다. 오이카와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깊이 묻어두지 않는 오이카와였지만, 카게야마에 대한 기억만큼은 모래시계같이 심장 안에 소복이 쌓여서 은빛 둔덕을 이뤘다. 가끔 카게야마가 다쳐서 돌아오는 날에는 카게야마가 없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 밤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엇을 하며 밤을 보낼까.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보스 실격이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오이카와는 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곤 했다. 언젠가 카게야마를 국화꽃 아래에 눕힐 날이 올까. 보스가 된 순간부터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상상해온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조금 몸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를 갸웃한 것 같았다.

오늘이 그 날 이었어요?”

토비오쨩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억울한 심정이 몰려왔다. 됐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토비오쨩이 이런 아이인것쯤은! 이것저것 꿍얼거리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권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주본 눈동자가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항상, 오이카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준 사격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언제가 처음인지는 몰랐어요.”

전 오늘도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준 건 기억하겠지만내년에 또 말씀해주셔도 까먹을걸요.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가르쳐줬다는 사실이 중요한거잖아요.”

저한텐 가르쳐주신 그 날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작은 입술은 그렇게 말했었다. 검은 두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를 저의 눈동자에 기록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의 기억을 모래시계처럼 쌓는 건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분명 저 나름대로, 확실하게, 오이카와에 대한 무언가를 쌓고 있었다. 그것은 딱히 오이카와와의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특징적인 형태도 아니었지만 카게야마의 안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아니, 입꼬리가 평소보다 더 올라가있었다. 카게야마는 이제 다시 몸을 돌리고 과녁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권총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양손으로 그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셔츠의 서늘한 감촉이 팔에 달라붙었다.

당분간은 카게야마가 없는 밤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미세하게 화약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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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님 생일 축하드려요!! 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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