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5 마츠리(축제)

 

 

 

사방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오른쪽에서는 친구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쪽 조금 위쪽에선 딸을 잘 챙기라고 남편을 다그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에선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뭇게 타버린 밤하늘에선 멀리 북소리가 둥, , 둥 일정한 리듬을 두고 들려왔다. 이 길로 가면 오른쪽에는 타코야끼 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떼자 어깨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하고, 유카타를 입은 소녀는 뛰어가 버렸다. 나와 한, 두 살 정도 차이 날 뿐 같은 나잇대였는데도 눈가에 보드랗게 퍼진 펄 빛 눈화장과 입술에 물든 분홍 꽃잎 색이 낯설었다. 투명한 흰 피부에 보스스 달아오른 볼이, 오늘이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새삼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소녀가 신은 나막신이 따각따각 나무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좁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앞서 걷던 소년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어가 버렸다. 나는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앞이 이곳이 맞는 걸까. ‘이란 말조차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해 있는 키타이치 중학교 배구부는 부원이 많았다. 배구로 유명한 강호교에, 특히나 올해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끄는 시기였다. 예년보다 부원의 수도 많았고, 더 강하고 단단한 팀이 되고자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다 같이 가서 팀워크를 돈독히 하자! 는 목표 자체는 원대하고 좋아 보였다. 할 일이라고는 가끔 모이는 지역 소모임에 참가하는 일 혹은 때때로 폭설이 내리면 소일거리 차원에서 자기 집을 넘어 옆집 눈 치우기가 전부인 시골 마을에서, ‘축제란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카게야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전국대회 영상을 본 이후로 처음 알았고, 사람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두가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자는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학년별로 모여 다니자는 것에 겨우 합의를 봤을 때는 이미 몇몇이 개별활동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한 1학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년 대다수가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킨다이치, 쿠니미와 이곳저곳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고 다녔다. 도쿄나 큰 도시에서는 커다란 불꽃놀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시골인 미야기에서는 작은 불꽃 몇 개가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 게 전부였다. 꽃 모양에 용 모양, 하트모양에 작게는 두 번 연이어 터지는 불꽃도 있다지만 전부 소문에 불과했다. 항상 화려한 불꽃놀이는 먼 나라혹은 먼 지역의얘기였으며,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불꽃놀이는 북소리나 사람들 소리에 가려져 작게 터지는 불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모인 것은 역시나 시골이기 때문이었다. 행사가 별로 없는 시골에서 축제는 공식적인 즐거움의 장이었다.

쿠니미는 타코야끼를 사들었으며, 킨다이치는 금붕어 잡기에 열중했다. 카게야마는 다만 가만히 서서 그들을 구경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기도 했다. 축제에는 가족과 함께 몇 차례 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카게야마는 사람들에 쏠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정신없는 한바탕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올해도 사람이 많기는 여지없이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올해의 축제가 여느 때와는 다르단 것을 알고 있었다.

여우 가면 어때?”

그건 쿠니미지. 카게야마는 이게 더 좋을 거 같다. 까마귀 가면.”

까마귀를 보통 가면으로 만드나. 어울리긴 하네. 킨다이치는 이거 어때? 랫서 팬더 가면.”

랫서 팬더야말로 왜 가면으로 만드는 거야?”

어울리니까 됐잖아.”

우연히 마주친 가면 가게에서 각자 하나씩 사자는 얘기를 꺼낸 건 킨다이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몇몇 가면을 골라든 쿠니미 손에 이끌려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직 정면만 시야에 가득했다. 쿠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를 보고 조금 웃었지만, 쿠니미는 알아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는 사람으로 둔갑해서 마을에 내려온 여우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면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보려면 고개를 평소보다 더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카게야마는 잠시 헤매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너머로 익숙한 머리색이 보였다. 검은 하늘 아래 붉은색으로 퍼지는 전등 불빛 옆에서,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색은 평소보다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진한 바다색에 줄무늬가 들어간 유카타는 썩 잘 어울렸다. 3학년 배구부 선배 몇 명과 이와이즈미 선배, 그 앞에 유카타를 입은 몇몇 여자 선배들이 오이카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뒤편에서 서로 손잡고 가자는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시야 건너편에서 오이카와는 입을 바삐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팔짱을 낀 유카타 소매가 아래로 늘어져서 흰 속살이 드러났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조그맣게 난 두 개의 눈구멍은 오이카와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애초에 옆은 볼 수 없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까마귀 가면 속의 카게야마의 시야는 어두웠고, 고요하고,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만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그랬다고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까마귀 가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몇 번 치이면서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가는 도중,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며 걸음을 멈췄다. 이와이즈미의 곧은 눈동자가 이내 비껴졌다. 그렇구나. 지금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 쿠니미가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우였듯이, 카게야마는 산의 외로움을 피해 도망쳐 온 새끼 까마귀였다. 카게야마는 다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이제 다섯 발자국 앞에 있었다. 유카타가 감싸고 있는 등은 곧게 뻗어 있었고, 코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빛무리를 형성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몰랐다. 그의 등만 보이면 달라붙고, 서브를 가르쳐 달라 조르는 게 일상이었던 카게야마의 본능일지도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까마귀 가면 속에서 저의 숨 쉬는 속도가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두 발자국 앞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면 시야에 오이카와는 없었다. 저 멀리서 둥, , 둥 일정한 속도로 북소리가 들렸다. 북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북 치는 장인이 치고 있는 건 제 심장일지도 몰랐다. 지금 이 축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이카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불꽃놀이인가? 옆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토비오쨩?”

뒤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뒤를 돌아보려던 카게야마는 몸만 조금 떨고, 발을 다시 움직였다.

토비오,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오이카와가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옆에서 왜 생사람 잡냐라며 오이카와의 등을 한 대 강하게 때렸고, 주변 사람들은 토비오?’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야! 그치만 이와쨩! 토비오인걸!”

카게야마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거의 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속도였다. 사람들에 끼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적어도 오이카와 선배만큼이라도. 몸이 조금 더 다부졌다면, 평소에 근력 트레이닝을 열심히 했어야지. 자책하는 목소리와 후회감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북 치는 장인이 두들기는 심장에 차올랐다. 콧속으로 탄내가 스며들어왔다. 멀리서 불꽃을 쏘아 올린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축제는 무언가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 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오이카와 선배를 보지 말 걸,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까마귀 가면을 쓰지 말 걸, 화약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탄내의 정도가 짙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걸.

토비오!”

어깨가 강하게 잡힌 아픔이 카게야마의 전신에 퍼졌다. 겨우 멈춘 양 다리가 후들거렸다. 힘들게 서 있는 몸이 살며시 비틀거리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돌리고 마주 바라봤다.

왜 도망치는 건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좁은 시야는 다시 오이카와로 가득 찼다. 예쁜 홍차 빛 눈동자 위로 작은 땀방울이 한두 방울 걸려있었다. 까마귀 가면 속은 지나치게 더웠고, 숨소리가 엉망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왜 알아보는 건데요.”

?”

오이카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잔뜩 어긋난 호흡에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오이카와는 당황스러웠다. 너무 세게 잡은 건가, 어깨에 실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왜 알아보는 건데요. 까마귀 가면, 썼는데…….”

아니, 토비오쨩이잖아?”

그러니까, 왜 알아보냐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원망이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까마귀 가면을 벗겼다. 손길이 지나치게 상냥해서, 카게야마는 한차례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고 싶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어떤 표정인데요.”

못난이 표정.”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땀으로 눅눅하게 젖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좋게 말해도 쓰다듬는다고는 할 수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내가 어떻게 설명해? 토비오쨩은 그냥 토비오쨩이잖아? 머리를 짧게 잘랐어도 토비오고, 하복을 입든 동복을 입든 사복을 입든 토비오고, 까마귀 가면을 써도 토비오고.”

축제로 앞뒤가 안보이고 꽉꽉 막힌 곳에서 만나도요?”

.”

북 치는 장인이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북소리도 뚝 끊겼다. 축제 소리는 저 멀리 멀어지고, 콧속으로 끝도 없이 들어오던 탄내는 점차 사라졌다. 카게야마의 시야는 다시 넓어졌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수많은 사람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뒤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써 끝났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왼쪽 조금 위쪽에선 저쪽 타코야끼가 더 맛있다며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오이카와는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 있든 오이카와였다. 여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도, 멋진 유카타를 입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그렇듯.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까마귀 가면을 다시 받았다. ‘써봤자 소용없다니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안 쓸 거예요. 안 써도 괜찮으니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천천히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처음 들었던 일정한 리듬 그대로였다.











오이카게 전력 #4 발렌타인 데이

 

 




 

겨울 끝자락에는 항상 달콤한 향이 머물렀다. TV나 길거리 현수막에는 달콤한 사랑을 전하라는 문구로 가득 찼다. 달콤하다는 건, 콧속을 따끔하게 채우는 겨울 구름 냄새보다 더 따스한 걸까. 어머니가 자주 보던 드라마 속 커플은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그렇게나 따뜻한 거냐고 묻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몸은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놔두고 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친 겨울바람의 기승 속에서 연습하면서 몸을 데우는 것과는 또 다른 걸까. 어머니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토비오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을 스가와라 선배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알아?”

알아요. 화이트데이랑 반대되는 말이죠? 화이트랑 반대면 블랙 아니에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기는 츠키시마를 한껏 의식하면서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츠키시마는 또 코웃음 칠 뿐이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생글 웃더니, 목도리를 여미며 말했다.

, 반대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 날에 주는 물건이 뭐인진 알고 있어?”

, 알아요. 초콜릿이랑, 사탕이잖아요.”

잠시간 머릿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릿이었는지, 사탕이었는지 고민을 거쳤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며칠간 떠들썩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높은 옥타브의 재잘거림이 생각났다. 결국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는 거로 결론이 났던가. 수제가 역시 좋다느니, 진심이 담겼다느니. 초콜릿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수제라면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걸까. 가게에서 파는 걸 사면 진심이 아닌 걸까.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가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네. , 맞아. 곧 있으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설명하려고 준비했다가 필요가 없어진 걸 알았는지 잔뜩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뱉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이 하얗고, 또 서늘했다. 왜 발렌타인 데이가 이 차가운 겨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달콤한 향내가 뜯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덕지덕지 붙은 계절이 좋을 텐데. 하필 2, 겨울 끝자락이 날카로운 이빨을 사람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이 때가 아니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난 몇 년간 나와 상관없던 날에 대한 생각이 물에 풀린 물감처럼 점점이 퍼졌다. 구태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 선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가 어떤 날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은 올해도 세이죠의 부실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아니, 어쩌면 올해는 많이 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이 받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만인에게 초콜릿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었다.

카게야마는 받을 사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짓궂은 얼굴로 왕님은 얼굴만은 꽤 인기 많으니까라고 했지만, 항상 츠키시마가 말하는 얼굴만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짜증 나니까 한번 째려봤다. 초콜릿은 어머니에게서 받는 게 전부였다. 올해가 어떨지는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는 걸까, 받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기에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말하든 일반적이진 않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일반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한 명이 꼭 무언가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이런 날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낯설었다.

받아야 하는 건지,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뭘 줘야 할지도요.”

줄 사람은 있는 거야?”

스가와라 선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걷던 히나타나 다이치 선배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설명을 요구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 카게야마, 무슨 소리야? 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히나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줄 게 있다면 줄 사람이 있는 거고, 줄 게 없다면 없는 거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과 무언가가 다르단 건 알겠는데, 어디에서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맹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한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준비한 초콜릿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수제는커녕, 가게에서 톡 치면 쏟아 내릴 정도로 수많은 양의 초콜릿을 쌓아올린 곳에서 젠가를 하듯이 하나를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겠지만실제로 여자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만드는 아이가 몇 있는 것 같았다어쨌든 오이카와 선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게 초콜릿 기대한다는 둥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면 키스해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손을 잡고 싶으면 말없이 내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듯 이상한 관계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괜찮았다.

, 어쨌든. 줄 사람이 있든 없든 그건 카게야마의 문제고. 올해 다들 하나씩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요! 저도요!”

스가와라 선배가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고, 히나타는 내게 향했던 눈을 돌려 땅에서 휙 뛰어올랐다. 스가와라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웃었다. 입꼬리가 얇게 올라가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볼이 말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

 

 

오늘도 춥네. 토비오, 목도리 정말 안 해도 괜찮아?”

, 괜찮아요. 목에 뭔가 닿는 게 싫어서.”

그 말 몇 번이고 들었지만, 용케 감기에도 안 걸리네. 몸은 진짜 건강하다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풋 웃으면서 목도리를 더 강하게 묶었다. 맵시 좋게 묶인 목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서 형태를 만들고, 오이카와 선배는 왼쪽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쇼핑백 끈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상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하트 모양에 랩핑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고, 포장지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얘기하던 초콜릿 중에 몇 번이고 들었던 유명 상표의 포장지도 보였다. 쇼핑백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오이카와 선배는 그저 웃으면서 부실에 남은 건 내일 가져가려고.’ 중얼거렸다.

한 개 먹을래?”

그걸 왜 제가 먹어요.”

맛있잖아.”

오이카와 선배한테 준 거잖아요. 저한테가 아니라.”

그럼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한테 주는 걸로.”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단순한 말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생각하고 마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이카와 선배가 강제로 내 입에 각진 사각형의 초콜릿 한 개를 입에 집어넣은 까닭도 있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입안 양쪽에서 조금씩 묻어난 침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혀끝에 진한 단맛이 퍼지고, 코에서 초콜릿 향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선배는 볼을 물들이며 웃더니, 손가락에 조금 묻어나온 초콜릿을 살며시 핥았다. 붉은 혀와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코와 입을 침식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맛과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초콜릿이 오이카와 선배의 윗입술 끝자락에 묻었다. 흰 피부는 한겨울 날씨에 보들보들하고 투명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좋아요.”

……?”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는 초콜릿을 핥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입에서 전부 녹은 초콜릿은 아쉬운 단 맛만 남기고 약간의 까슬 거리는 쓴맛이 입 점막을 긁었다.

그거 지금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되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이해하는가. 내 말에 등장도 하지 않은 키스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토비오쨩은 내 손가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상아조각처럼 자리 잡은 손톱은 분홍색 조약돌 같았다.

손가락은그것도, 좋지만. 입술이 좋아요. 예쁘잖아요.”

예쁘다고?”

. 오이카와 선배한테 초콜릿을 주는 여자들은, 어쩌면.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지 않았을까요.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먹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사 오는 게 좋았을지도요. 발렌타인 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러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토비오 역시 지금 키스해달라고 하는 거지?”

제 말 제대로 들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키스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조금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 선배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알았으니까, 토비오. 초콜릿 한 개 더 먹어.”

싫다고 말하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안에 침투해 온 초콜릿의 단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맛있어? 오이카와 선배는 달콤함이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 쇼콜라티에 되고 싶다던 아이였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오이카와 선배는 쇼핑백 안의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웃는 얼굴이 귀엽고, 이 아이는 보조개가 귀여워. 이 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얘는 어깨선이 동그랗게 퍼져서 참 예쁜 애야. 방금 줬던 초콜릿을 만드는 아이는 말했듯이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들고. 토비오,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 모든 사람을 기억할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은 알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원하는 토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기억 회로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는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의 일을 가끔 말할 때면 아무리 나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그 여자아이들도 모두 오이카와 선배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속 방 하나가 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울진 않지만.

, 이 아이들은 그렇게나 귀엽고 나에게 초콜릿까지 주잖아? 토비오가 말했듯이 난 달콤한 걸 좋아하고.”

.”

그래도 난, 초콜릿 한 조각 주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토비오가 좋아. 토비오를 좋아하는 거야. 내 입술이 좋다는 토비오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토비오의 귀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끌어안고 싶어.”

…….”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잖아? 토비오, 초콜릿 맛있었어?”

……저기, .”

다행이네.”

오이카와 선배는 살며시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입안의 초콜릿은 다시 순식간에 녹아 혀끝을 아찔한 단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려는 여자아이의 추억은 내 입술 안에서 녹았다. 그 뒤에 애매하게 남은 쓴맛이 조금 견디기 힘들어서, 오이카와 선배의 손을 먼저 잡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마주 잡아준 손에서는 방금 먹은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오이카게 전력  #3  안경

 

 




눈이 마주치고, 눈을 한번 깜빡였다. 깜빡, 하고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 인화된 사진 속 오이카와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기는 눈을 닮았다고 하던가, 눈이 사진기를 닮았다고 하던가. 무엇이 먼저든 간에, 눈은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구나하고 납득하고마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씨를 담아내기에는, 그렇다. 눈으로는 부족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진기 1개로조차도. 수십 개의 사진기가 오이카와씨를 감싸는 풍경을 상상했다. 눈부신 섬광이 몇 차례 지나가고 잠시 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나면 오히려 그 사진은 물먹은 듯 흐려지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생각은 신경전달의 다발로 뚝뚝 끊기며 전달되다가 이윽고 온전히 끊겼다. 오이카와씨가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다시 깜빡이고 마주 보자, 오이카와씨는 내 앞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이카와씨 뒤편은 큰 통유리였다. 넓은 카페 안의 구석진 자리는 항상 우리가 앉는 자리였다. 유리를 등지고 앉은 의자 옆에는 키가 큰 인조 산세베리아가 넓은 잎가지를 퍼뜨리고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석진 카페 안쪽 자리의, 흰색 둥근 화분으로 가려진 의자 안쪽에 앉아서 오이카와씨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뒤편의 통유리에는 석양이 몰려드는 거리를 몇몇 사람이 분주히 걸어갔다. 낮이 잠기고 붉은 바다에 삼켜지는 이 시각 즈음의 오이카와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쁘셨나요.”

오이카와씨가 끼고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보고 말했다. 오이카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수 없는 안경이야.”

그럼 왜,”

토비오한테도 선물해줬잖아. 방금, 안경.”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이카와씨와 똑같은 검은색 뿔테 안경이 손에 들려있었다. 언제 받은 건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진기와 눈에 대한 생각을 하기 이전일 것이다. 아이스티를 주문하기 전이던가, 그 이후던가. 오른쪽에 놓인 아이스티 속 각진 얼음은 4개 정도 둥둥 떠서 아이스티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안경을 들어 올려 코에 걸쳤다. 귀 옆에 닿은 감각이 서늘했다. 오이카와씨가 보이고, 오이카와씨가 쓰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 너머의 안경, 그 안경의 짧은 수평선 너머의 오이카와씨는 웃음을 참는 듯 이상한 표정이었다.

안 어울려.”

무슨 상관이에요알고 있어요.”

선글라스를 쓴 적이 있다. 아오바죠사이로 가고, 오이카와씨를 만나고 금방 벗어버렸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웃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연기처럼 흘러다니는 사람이었다. 고정된 이미지도, 형태도 없이 녹아내린 채로 흘러다니는 오이카와씨는 내게 안경을 건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형상이 부서지는 오이카와씨를 이 안경으로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가르쳐줘요, 오이카와 선배. 어릴 적처럼 마냥 물어보는 곳에 답이 오리란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씨도 가르치는 것은 적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를 대상으로는.

안경을 다시 벗으려고 손을 들었다.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손끝은 벗는 방법에서도 한참을 방황했다. 안경을 어찌 쓰고 벗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진은 찍는 법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눈을 깜빡여 대상을 뇌 속에 전기처럼 박아 넣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중학교 시절 그 방법을 알려준 건 오이카와씨였다. 정확히 말한 건 오이카와씨의 배구, 서브였다. 뇌 속에 무언가를 찍어놓고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입이 말랐다. 좋은 선생이 되진 못하는 오이카와씨는 안경을 어설프게 벗는 내 손끝을 잡고 잠시간 소리 내어 웃었다.

벗지 마. 쓰고 있어.”

왜요. 답답하다고요.”

있잖아. 토비오.”

안경에 닿아있던 내 양손을 잡아 테이블에 단단히 고정한 오이카와씨는 몸을 기울였다. 오이카와씨 뒤쪽 통유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씨의 눈동자와 속눈썹, 가는 눈썹이 전부였다. 눈의 움직임에 따라 흰 볼과 깨끗한 코끝,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보였으나 이윽고 나는 오이카와씨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몇 가지 할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말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결국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스티 속 얼음이 모두 녹을지도, 같은 생각이 가끔 튀어 오르는 것만큼 의미 없었다.

눈동자는 영혼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니까,”

오이카와씨의 속눈썹이 가까이 다가왔다. 둔탁한 플라스틱 제제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경이 조금 내려앉았다. 안경끼리 부딪치는 순간, 오이카와씨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옅은 홍차 빛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을 마주 본다는 건,”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안경끼리의 마찰음이 빗소리처럼 간간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오이카와씨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오이카와씨에게 잡혀있던 양손은 어느새 그와 마주 잡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그가 새겨졌다. 찰칵, 셔터음이 들리면 머릿속 필름은 돌아가고 언젠가 인화할 때를 기다린다. 머릿속 사진 폴더는 오이카와씨로 가득했지만, 무엇 하나 초점이 맞는 사진이 없었다.

영혼을 마주 본다는 뜻인지도 몰라.”

오이카와씨는 눈을 천천히 뜨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안경 너머에서, 속눈썹끼리 키스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그에 맞춰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마주보는 눈동자 사이에서 시야는 흐려졌다. 오이카와씨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영혼이라는 것도 결국 눈동자에 갇혀 있는 거니까,”

초점이 흐린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는 눈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경 너머의 눈동자, 또 그 눈동자 너머의 영혼, 영혼 안의 안경 속에서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사진기가 비추는 섬광이 지나고 나면 오이카와씨는 전부 녹아내려 머릿속 폴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몇 단계의 프리즘을 거친 뒤의 오이카와씨가 거꾸로 된 사진일지, 반쪽이 잘린 사진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짧고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오이카와씨의 영혼은 극히 단시간이기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영혼도 눈동자라는 프리즘을 지나면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영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주 봤다. 속눈썹끼리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눈을 마주쳤다. 코끝이 서로 맞닿을 지점까지 온다면, 영혼끼리 닿아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의 거리였다. 안경 너머라 해도,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셔터 소리가 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왔다. 오이카와씨의 입술 감촉이 새겨져 있는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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