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네가

 

 

 

 

 

연이어 내린 비로 공기 중에 수분이 가득했다. 카게야마는 창문을 열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너져 내릴 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보슬비로 바뀌어있었다. 젖은 냄새가 났다. 킁킁, 카게야마는 몇 번 소리 내어 비 냄새를 맡은 뒤 고개를 들었다. 검회색 구름이 온통 뒤덮인 하늘은 가느다란 실을 뚝뚝 끊어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안개에 그대로 노출된 머리카락이 수분을 머금고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토비오쨩? 비 다 들어오잖아.”

오이카와가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흰색 브이넥에 주름진 청바지, 집에서의 그는 지나치게 바깥 모습과는 달랐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안경까지 쓰고,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며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를 읽는 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 오는 날은 싫어, 머리가 맘에 안 드니까라고 했던 오이카와는 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넘긴 채였다. 쉬는 날이어도 머리 세팅은 반드시 했으면서. 비가 오는 날의 오이카와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일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커피 테이블에 올려둔 코코아에서 나는 달콤한 향내가 거실 전체에 퍼져서, 비 냄새 사이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비 냄새는 싫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돌렸던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향한 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토비오쨩?’ 낮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빗소리 뒤로 넘겨버린 채.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곳은 작은 임대주택이었다. 아직 대학생 신분인 카게야마 대신 오이카와 명의로 된 집. ‘같이 살까라고, 오이카와는 그 날 우산 아래에서 말했었다. 오늘같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 비에 쫄딱 젖어서 조그만 구멍가게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오늘과 같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같이 살까, 토비오쨩.”

그 날 오이카와가 그 말을 건넨 건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와 눈이 마주치면 무심코 데려오고 마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그 날 카게야마를 만나버렸기에, 카게야마와 같이 사는 걸까. 카게야마는 비에 젖은 강아지와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걸까. 오이카와를 만나버리면, 카게야마는 그런 눈을 하고 마는 것일까. 서로가 어찌할 수 없었던 걸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보면 그런 눈을 하는 것도, 오이카와가 그런 눈을 한 카게야마를 보면 데려올 수밖에 없는 것도. 서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결국은.

오이카와는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카게야마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집안일은 반반씩이니까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벌써 반년. 오이카와는 여전히 카게야마와 같이 살고 있다. 카게야마는 비 오는 날이면 거울을 들여다봤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난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에 비친 저를 아주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저에게 오이카와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조금도 모르는 오이카와와도 같이.

무슨 생각해?”

뒤에서 큰 손이 뻗어와 제 입술을 톡 치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둘러 뒤를 바라보면 오이카와가 속 끝까지 훑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카게야마의 정면에는 흰색 브이넥 사이로 보이는 쇄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날 자신이 남겼던 붉은 자국이 여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걸 알고서 브이넥을 입은 게 분명하다. 성격 나쁜 건 변하질 않는군,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투둑, 툭 짧은 빗줄기가 창가에 떨어져 맑은소리를 냈다. 창 아래에는 꽃이 그려진 우산을 쓴 여고생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저러면 다 젖어버릴 텐데. 그런데도 강아지는 좋다고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코코아의 달콤한 냄새, 비 냄새, 오이카와의 향수 냄새가 났다. 보드라운 입술이 뒷목 선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

뿔테안경의 테두리가 귀 뒤편을 간지럽혔다. , 쪽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내려가던 오이카와는 손을 올려 창틀을 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창문, 닫는 게 좋지 않아?”

오이카와가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예쁜 손가락이 흘러 창문에 닿는 것을 보고,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창문 바깥, 아래층에서 키우는 화초에서 조그만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달팽이의 표면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오면. 저 달팽이는 저렇게 기어가는 걸까. 보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면서.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는 곳에 뭉근하게 열이 올랐다. 속눈썹이 무거웠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것을 견디면서,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

오이카와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착한 몸의 허리 부근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의 향수가 아닌, 그의 냄새. 그의 피부에서 나는 냄새는 카게야마의 침샘을 자극했다.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삼킨 뒤,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제가 달팽이로 변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달팽이?”

. 강아지나, 고양이나, 토끼같이 귀여운 동물이 아니라. 달팽이 같은 거요. , 지렁이여도 좋구요.”

토비오쨩, 달팽이야?”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게야마에게 눈을 맞췄다. 뒤돌아있던 카게야마도 창가에서 몸을 떼어내고, 오이카와에게로 돌아섰다. 약간 거세진 빗줄기가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에 후두둑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브이넥을 꽉 붙잡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달팽이가 되고 싶은 거야?”

…….”

카게야마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틀었다.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잠시간 카게야마를 바라보더니, 글쎄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빗소리가 들렸다. 비는 연이어 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비를 타고 건너온 바람결에 흔들흔들 움직였다.

휙 버려버릴지도.”

, 이요?”

. 휙 하고. 달팽이로 변한 토비오쨩을 바깥으로 버려버릴지도.”

그런가요.”

아무렇지 않게, 여러 여자를 울렸던 웃는 얼굴로 말하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슬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던져지면 더는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시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오이카와의 브이넥도, 주름진 청바지도, 저 익숙지 않은 까만 뿔테안경도, 홍차 빛 눈동자도, 쉬는 날이면 약간은 무장 해제되는 그의 모습도. 모두,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평생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있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창가에 서 있느라 온통 식어버린 입술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부드럽게 누르는 손가락은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그런데도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카게야마를 다루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허락해줄게. 배고파하는 것 같으면 양배추 한 쪼가리는 건네줄 수 있어. 비바람이 심하면 아주 잠깐이지만 집 안에 있는 것도 허락해줄게.”

달팽이인데도요?”

달팽이여도. 토비오쨩이잖아?”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요?”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 비에 쫄딱 젖은 토비오쨩이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징그러운 건 질색이니까, 징그럽게 생긴 달팽이여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때, 오이카와씨 친절하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허리 뒤로 손을 두른 뒤,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그의 피부에만 닿으면 카게야마는 열이 올랐다. 전신이 그의 냄새를 기억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화학작용과도 같이. 카게야마에게 있어서의 오이카와는, 오이카와가 평생 가도 모르는 존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어떤 존재인지,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봐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친 저가 어떨지. 그래도, 아주 조금. 카게야마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이카와에게 저는, 어쩌면.

카게야마는 이제 슬며시 열이 오른 팔을 들어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의 등에 대고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의 쇄골에 입술을 묻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도 보통 달팽이 이상은 되는 것 같네요.”

보통 달팽이면 버리긴커녕 창문에서 떨어뜨릴 거야. 징그럽잖아.”

착하다기보단 잔인한 거 같은데요.”

징그럽잖아.”

어린아이같이 투덜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속에 녹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무거웠던 눈꺼풀을 그제야 내려놓았다. 뜨끈뜨끈한 눈가가 기분 좋았다. 빗소리가 다시 약해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숨을 들이켰다. 젖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코코아의 향기도 났다. 오이카와와 사는 집의 향기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집.









-

* 오이카와의 브이넥, 검은 뿔테안경 이미지는 히징님이 언젠가 그렸던 오이카와에게서...

  키루님, 예월님과 함께한 오이카게 '결혼식' 키워드 조각 글입니다.
    제가 너무 많이 늦어버려서..ㅠㅠㅠ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 기다려주신 키루님, 예월님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려요 ㅠㅠㅠ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OO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소리에 카게야마는 살며시 눈을 떴다. 쏟아 들어오는 햇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 열린 창문으로, 커튼의 결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식어버린 몸에 툭 하니 떨어졌다. 그대로 내려앉은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떤 뒤 허리께에 흘러내린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올렸다. 드러난 발목을 쓰다듬는 손길이 그곳에 있었다.


토비오쨩, 같이 안 갈래?”

간질이는 듯 복사뼈 아래를 문지르는 손길을 다른 쪽 발로 툭 쳐 내린 뒤, 베개에 얼굴을 더욱 묻었다. 아직 졸린걸요, 밤새 못 자게 한 게 누군데. 말로 하지 못한 원망을 아릿한 아픔이 퍼지는 허리 아래로 내려놓은 뒤, 대답을 삼켰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손을 놓더니 재차 부산스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고, 닫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소리. 쉬는 날 오전 10시의 고요한 햇살은 침대를 그대로 비췄다. 묵직한 허리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며 몸을 뒤척이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바람을 타고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같이 갈까?” 

…….”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 아직 잠이 마저 깨지 않은 머리를 베개에 부빈 뒤, 카게야마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가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홍차 빛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으며, 흰 와이셔츠가 눈부시게 빛났다. 와이셔츠에 가려진 단단한 가슴이 머릿속에 떠올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부터 몸이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이 부드러운 옆모습이 햇빛을 받아 말간 빛을 띠었다. 긴 속눈썹, 그 아래로 이어지는 매끈한 흰 피부, 도드라진 부드러운 입술까지. 몰캉한 복숭아 같던 그 입술을 떠올리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뭐하러 가요, 결혼식인데.”

그것도 오이카와씨랑. 말하지 못한 대답을 꿀꺽 삼켰다. 삼킨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뱃속으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뭐하러 가요. 오이카와씨랑. 뭐하러 가요. 결혼식에. 뭐하러 가요. 우리 둘이. 남자 둘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목울대를 울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가지 말까? 모처럼 쉬는 날인데. 토비오랑 있을까.”

오이카와의 손이 흘러서 카게야마를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 손길만 닿으면 예민해지는 목 뒤를 지나, 벌써 열이 오르려고 하는 어깨뼈를 가볍게 톡톡 쳤다. 그대로 이불을 걷어내리더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키스를 도드라진 어깨뼈에 떨어뜨렸다. 어깨에서부터 퍼지는 온기에 몸이 떨렸다. 다른 곳까지 속속들이 들어오는 오이카와의 온기가 아플 정도로 뜨거웠다. 그대로 오이카와의 손이 척추 선을 곰곰이 짚어내려 가더니, 엉덩이골까지 가볍게 문질렀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오이카와에게로 시선을 향하자, 장난스러운 표정의 오이카와는 전날 밤 카게야마를 괴롭히던 오이카와의 모습 딱 그대로였다. 언제까지고 당해낼 수가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날카롭게 째려봤다.

빨리 가시죠? 꼭 가야 된다고 일주일 전부터 그랬잖아요. 소속 배구팀 에이스인 사람의 결혼식이라면서요.”

같이 가자. 카레 사줄게.”

키득거리며 귀를 녹일 듯이 흘러들어오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결국 다시금 베개에 묻었던 고개를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오이카와가 얼른 준비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항상, 매번. 당신에게는 이길 수가 없는 걸까. 배구도, 그 무엇 하나도. 당신을 이겨본 기억이 없다. 난 항상 당신 앞에서는 약자다.

 

 

◆ ◆

 

 

시끌벅적했던 교회를 빠져나와 얼마간 길을 걸으면, 적막한 고요가 가득했다. 꼭 밥을 먹고 가라는 신랑의 말을 듣기 좋게 거절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면서, 발을 움직여 먼저 빠져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였다. 결혼식이 행해진 교회는마치 외국 교회처럼조그마한 시골 구석진 곳, 나무가 무성한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주변은 모든 것이 그림처럼 빛나고 있었다. 날이 더웠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나무, , 햇빛, 간간이 부는 낮은 바람. 오직 그뿐이었다. 찌르르, 높은 새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쏟아내리는 햇살이 머리에 그대로 흡수돼서, 이곳저곳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토비오쨩.”

약간의 현기증이 일 무렵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면 교회 입구에서 오이카와가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 그대로 햇빛 아래에 서더니, 손 가리개를 만들며 위를 올려다봤다. “이런 날 결혼하다니, 행복하겠네.” “그러게요.”

작게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도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는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다. 옆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말이 없는 시간이 길게 지나갔다. 가끔 부는 바람에 나무가 부스스 흔들렸다.


토비오도 결혼하고 싶어?”

오이카와가 시선을 낮게 내리깐 채 말했다. 입술에 걸려있던 미소는 사라져있었다. 결혼. 사람과 사람 간의 결합, 그 단순한 의미 이상의 무언가. 그것이 만약 영원한 사랑이란 의미라면, 그렇다면.

카게야마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비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거운 목 안에서 울컥 무언가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 내려놓은 시야 안, 그 안에선 보이지 않는 오이카와가 부드럽게 물었다. 일렁이는 감정 하나하나가 카게야마의 뜨거운 몸을 한 번씩 흔들고 지나갔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입술을 열었다가, 달싹이며 다시 다물었다. 열기로 가득한 공기 가운데 퍼지는 건 긴 한숨뿐이었다.

,” 오이카와씨도, 알고 있으면서. 꼭 그렇게 묻는,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묻는 당신은. 정말이지 짓궂은 사람이다.

전 결혼 안 해요.”

아까운걸. 얼굴도 나름 괜찮고, 오이카와씨보단 별로지만. 배구 선수로 활약도 하고 있고, 나보단 못하지만. 달려드는 여자들도 많잖아? 나보다는 적지만.”

어쩌라는 거야. 울컥 솟아오른 짜증에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려 쏘아붙였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요?” 오이카와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더운 날씨 때문일까, 흰 피부가 피어오른 열 때문에 분홍빛을 띠었다.

난 토비오가 있잖아.” 몸을 치고 지나갔던 감정 하나가 다시 한 번 카게야마를 휘감았다. 시계 초침이 흐르듯 일정한 박자로 뛰던 심장 리듬이 한 박자 빨라졌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얼굴에 열이 모이는 것이 저도 느껴져서, 고개를 숙이고만 싶었다. 더운 날씨 탓이었다. 열이 피어오르는 것도, 고개를 숙이면 목덜미가 뜨거워지니까 숙일 수 없는 것도. 모두 날씨 때문이었다. 눈앞의 오이카와가 아니라.

저도 오이카와씨가 있는 걸요.”

우리 둘 다 바보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찡그리면서 웃더니 카게야마의 축축한 손을 꼭 잡았다. 오이카와의 손은 불에 달군 듯이 뜨거웠다. 어깨가 떨릴 정도로 뜨거운 그 손을 놓칠 뻔하자, 오이카와가 더욱 강하게 잡아왔다. 홍차 빛 눈동자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오이카와에게서 약간의 땀 냄새가 났다. 찌르르 울려 퍼지는 새소리, 여느 때보다 더욱 불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카게야마는 그 눈조차도 피할 수가 없었다. 뒤편에 있는 교회 안에서 세차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로 얼굴을 갖다대고, 핥아 올리듯이 혀를 굴리는 키스를 한 뒤 귓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내보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영원히 사랑하는 걸 맹세합니까?”


카게야마는 온몸을 간질이는 감각에 어깨를 떨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차오르는 물덩이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오이카와가 일렁거리며 햇살 사이에서 빛났다.

맹세합니다.” 오이카와가 선선한 바람결의 끝에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로 제 입술을 겹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오이카와의 분홍빛 입술이 촉촉이 젖어들어 있었다.

오이카와씨는요?”

난 토비오쨩이 있으니까,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걸?”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이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지금 장난하나. “, 그러십니까. 놓아드릴 테니 얼마든지 결혼하시죠.” 어깨를 비틀며 빠져나가려는 카게야마를 더욱 품에 옭아매면서 오이카와가 키득거렸다. 그대로 뜨거운 손을 올리더니, 엷게 땀이 밴 카게야마의 얇은 목 뒤를 한번 훑었다.

내가 안 놓아줄 건데.”

다시 한 번 겹친 입술이, 이번에는 지독히도 달콤했다. 오이카와의 향기, 옅게 나는 땀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었다.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오이카와가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맹세할게. 죽을 때까지.” 오이카와의 단단한 가슴안에 카게야마가 폭 싸여 들어갔다.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인데도, 손을 돌려 그 등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등에도 희미하게 땀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눈꼬리에 물주머니가 한 덩어리 쌓여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아슬아슬 매달려있었다. 가슴이, 심장이, 온몸이 뜨거워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요, 말뿐이라는 거. 내일이면 또, 오이카와씨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오늘만큼은. 오늘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사랑을 맹세한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전신의 물이 증발할 정도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와의 하루뿐인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