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징님(@phantom_hj)과 한문장 연성하기 '나는 아직도 당신이 어렵다.' (호칭 변경 가능) 첫문장 맡았어요!! >.<
    히징님의 세계 최고 오이카게 만화는 이쪽입니닷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524C335545CE290D









와르르 무너져 내린 하늘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빗줄기가 거칠게 우산에 붙어왔다. 오이카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우산을 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때리는 비바람이 거셌다. 아침에는 맑았는데, 입술을 씹으면서 생각해봤자 몰아치는 폭우에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우산으로 머리는 겨우 가렸지만 덮치듯이 불어온 빗줄기는 온몸을 흠뻑 적셨다.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는 오이카와의 눈앞에 현관문이 보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함께 사는 집. 2층 주택을 싸게 구한 건 더 없는 행운이었다. 여기저기 낡았다거나, 이런 비 오는 날 가끔 물이 새는 걸 빼면 아쉬울 것 없는 집이었다. 겨우 도착했네,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2층 베란다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시야 속에서 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멈춰선 뒤, 입을 벙긋거리며 하얀 한숨만 토해냈다.

지금, 잘못 본 거 아니지? 눈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광경에, 짙은 회색빛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오이카와는 고개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다리를 조금 전보다 거칠게 움직이자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 물방울들이 다시 첨벙거리며 솟아올랐다. 다 젖어버린 손에 들려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 때문에 버스럭버스럭 소리를 냈다.

 

✤ ✤

 

토비오! 빨래!”

 

외치면서 들어온 오이카와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거실에서 월간 밸리 잡지를 읽고 있던 카게야마가 눈을 들어 올리자마자 오이카와는 사라져있었다. 오이카와씨, 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카게야마도 몸을 일으켰다. 계단이 물 얼룩으로 가득이었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양말이 젖지 않게 얼룩들을 피하며 발을 내디뎠다. 기껏 청소 다 해뒀더니. 꿍얼거리면서 계단을 모두 오르자, 오이카와는 2층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빗물이 잔뜩 물든 옷가지를 걷어들이고 있었다. 이미 젖어버린 오이카와의 셔츠와 바지에 한 차례 물벼락이 쏟아졌다.

오이카와씨?!”

비 오는데 왜 빨래를 여기에 널어놔?!”

오이카와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빗줄기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옆에 개켜놓았던 수건 한 장을 들어 그 머리에 허겁지겁 엎었다.

오이카와씨가 빨래 널라고 하고 나가셨잖아요!”

비가 오면 당연히 걷어놔야지!”

갑자기 쏟아질 줄 저도 몰랐다고요!”

오이카와는 베란다 옆에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젖어버린 빨래들을 던져놓고선, 제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 떨리면서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깊은 한숨을 내뱉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보였다. 머리에 붙어있던 물기를 모두 머금은 수건 사이로, 축 늘어진 홍차 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열린 채로 남아있는 베란다 문 너머, 눈에 보일정도로 선명한 빗줄기가 연이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투둑, . 베란다 문에,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쑥날쑥 들려왔다. 오이카와의 전신에서 풍기는 축축한 비 냄새가 작은 2층 방 안에 훅 퍼졌다. 금속같이 차가웠던 손이 카게야마의 온기를 받아 서서히 열을 띠었다. 젖은 셔츠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카게야마의 귓속에 울렸다.

진짜, 토비오. 정말이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동골동골 맺힌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난 네가. 나는 아직도 네가 어렵다.

 

 

 

 

 

 

 

 

 

 

30년이 지나도

 

 

 

 

 

 

 

 

 

샤워를 방금 끝내 보송보송 열이 오르는 몸은 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휘파람을 불면서, 저녁 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봉지에 손을 넣어 재료를 꺼내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오이카와는 아까와 같이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보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토비오, 뭐 해줄까? 저녁.”

카레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묻자 카게야마는 읽던 잡지를 거칠게 내려놓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은 별이 담긴 듯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알았어.”

오이카와는 손을 움직여 봉지 속의 카레 루를 꺼냈다. 이어서 나오는 것은 고기, 당근, 양파, 감자누가 봐도 카레 재료였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달걀 두 개까지 꺼내면, 머릿속에 있는 레시피의 재료로 빠진 것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갈 때까지 볶았다. 2인분으로 샀던 냄비를 찬장에서 꺼내 볶은 재료들을 넣고, 익숙한 양만큼 물을 채워 넣으면 밑준비는 완성이었다. 그 안에 방금 사 온 카레 루를 조심조심 넣고 불을 올리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포크커틀릿으로 만들 돼지고기 등심을 다듬고 있자, 등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달걀도 올려주실 거에요?”

내키면.”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티셔츠 끝자락을 붙든 손이 컸다. 중학교 때에는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어깨에 턱 괴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네. 오이카와는 기억 속의 카게야마를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매달린 채로 고기를 다듬는 손길을 뚫어질 듯이 바라봤다. 강하게 뻗어오는 시선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한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몇 번이나 만들어줬잖아? 이제와서 다를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봐.”

오이카와씨가 만들어주는 카레는 매번 다른걸요. 매일매일 다른 맛이 나요.”

카게야마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말에, 오이카와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카게야마의 시선은 그대로 돼지고기에 고정된 채였다.

뭐야, 맛없던 적도 있어?”

똑같은 레시피인데 매일매일 다른 맛이라니.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레시피만을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었기에, 오이카와의 요리실력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의 등에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강하게 도리질 쳤다. 꾸욱 꾸욱 눌리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푸핫,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벌이라는 의미로 쓰다듬던 목 뒤를 찰싹, 가볍게 때렸다. 카게야마는 아야,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고개를 갸웃해 보인 카게야마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날따라 조금씩 느낌이 달라요. 어떨 땐 뭐랄까, 행복해지는 맛이고. 어떨 땐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고. 어떨 땐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쳤다. 입은 그대로 열려있는데, 들리는 건 불에 올려놓았던 카레가 잘게 끓는 소리뿐이었다. 오이카와는 한번 가볍게 숨을 들이킨 후, 어떨 땐?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떨 땐 매일 먹고 싶어요.”

매이일~?”

오이카와는 대놓고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카게야마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려 다시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씨는 매일 카레는 싫어.”

전 좋은걸요!”

카게야마는 어깻죽지 사이에 머리를 갖다 대더니, 꾸욱 꾸욱. 오이카와의 상체가 약간 밀릴 정도로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깨에서 느꼈던 간지러움이 살살살 등에 모이자 오이카와는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토비오, 그만하라니까.”

오이카와는 고기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제 등에 매달려있던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돌려서 그 얼굴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오이카와의 팔이 카게야마의 허리에 둘려 있었다. 티셔츠 너머로 단단한, 그래도 아직은 얇게 잡힌 근육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씨에 비하면 아직은 한참 멀었다니까. 오이카와는 눈을 얇게 뜨고, 카게야마의 살짝 열려있는 입술에 닿을 뿐인 키스를 했다. , 가벼운 소리가 나기 전에 눈을 감았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채 떨어지기 전에 살포시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민트 색의 티셔츠를 붙들고 있는, 오이카와의 가슴께에 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까지 굳어있는 그 손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잡은 뒤 오이카와는 입술 간의 좁은 사이를 메우듯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얼굴을 틀어 더욱 깊숙이 혀를 집어넣고, 침이 고인 카게야마의 혀 밑을 훑었다.

,

얼굴을 새로 겹칠 때마다 젖은 소리가 귀에 촉촉하게 젖어 붙었다. 그 사이사이 섞여나오는 카게야마의 비음에, 오이카와는 혀가 녹을 것 같은 달콤함을 느끼며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간의 키스가 지난 뒤, 오이카와는 동그랗게 붉어진 카게야마의 눈가를 매만졌다.

카레, 다 끓겠다.”

오이카와가 말랑말랑한 귓불을 꼬집으며 흘려 넣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그럼 허리 놔주세요.”

카게야마의 볼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귓가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키득거렸다.

.”

오이카와는 솜털이 보들보들 남아있는 귓바퀴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다시 입술로 옮겨 카게야마의 입 안쪽으로 혀를 돌렸다. 입천장을 쓸 듯이 긁고, 몰캉한 볼 안쪽도 간질이자 카게야마가 헐떡이는 신음을 흘렸다. 불 위에 올려둔 카레에서 폭폭폭 끓는 소리가 났다. 뇌 속을 녹이는 달콤한 입술에서 겨우 얼굴을 뗀 후, 오이카와는 타액이 묻어있는 입술을 다셨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르르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그 상태 그대로 제 얼굴을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묻더니, 다시 꾸욱꾸욱. 머리를 비비면서 밀어왔다. 이번에는 자연스레 솟아나는 웃음에, 오이카와는 다시 미소 지으면서 카게야마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 달짝지근한 카레 냄새가 부엌 공기를 가득 메웠다.

 



✤ ✤

 



조그마한 2인용 목제 식탁은 둘이서 고른 물건이었다. 가구 같은 건 잘 모르겠다는 카게야마를 외국에서 들어온 유명한 가구점으로 이끈 건 오이카와였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성이 좋은 걸 몇 개 오이카와가 먼저 고른 후 그 안에서 카게야마가 고르게 했다. 안 그러면 가구점에서 죽치고 앉아서 땀만 뻘뻘 흘리는 카게야마를 평생 기다릴 게 뻔하니까. 당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골라 온 몇 개의 후보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간 고민하더니, 정사각형 모양에 백색에 가까운 상아색의 목제 식탁을 골랐다. 왜 이걸로 골랐느냐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그냥요. 가장 오이카와씨랑 어울리니까? 그렇게 대답한 건, 아직도 의문이지만.

오이카와는 민트 색의 식탁보가 깔린 양쪽 측면에 카레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았다. 방금 튀겨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크커틀릿을 얹고, 완숙이 되지 않게 신경 쓴 반숙 달걀을 올리면 음식 자체는 완성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샐러드를 투명한 볼에 담고, 레몬 갈릭 드레싱을 살짝 뿌리면 평소의 저녁밥이었다. 마지막으로 물 두 잔을 정수기에서 받은 뒤 접시 옆에 두면, 작은 목제 식탁은 꽉 들어찼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부르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금세 다물었다. 상아색 식탁 한가운데에는 연한 초록빛의 로즈마리 화분이 놓여있었다. 3일 전 카게야마가 먹을 수 있대요, 하면서 갑자기 사온 허브 화분이었다.

아니, 먹을 수는 있지만?’ 오이카와는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꿀꺽 삼킨 후, 손을 들어 로즈마리 화분을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로즈마리 잎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문지르던 손을 들어 가만히 코에 갖다 대면, 언젠가 맡았던 아로마 향초같이 노곤한 향기가 슬그머니 묻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손을 내리고, 다시 카게야마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읽는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소파에 앉아있는데도 꿋꿋이 다리를 올리고, 특정 부분을 읽을 때면 미간을 좁히면서 표정이 험악해지는 버릇. 눈이 반짝이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몰입한 모습에,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토비오, 밥 먹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가면, 카게야마는 귀를 쫑긋 세우고 돌아봤다. 방금까지 빛나던 눈동자가 더욱 밝기를 더하더니, 읽고 있던 월간 밸리를 던지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눈앞에서 스르르 연기가 오르는 카레를 보고선, 카게야마는 진정되지 않는 모양새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오이카와도 마주 보듯이 자리에 앉은 뒤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잠시간 가만히 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숟가락을 들더니, 카레를 한 움큼 퍼올렸다. 아앙크게 벌린 입안으로 카레 한 움큼이 푹 들어가는 걸 보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입가 구석에 카레 소스를 잔뜩 묻히는 것을 바라봤다. 한 입 넣었는데도 벌써 묻다니. 한숨이 나오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아직도 그래서 넌 어떡하냐, 진짜.”

약간의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장난스레 내뱉은 뒤, 또 한 입을 넣으려는 카게야마의 턱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 입꼬리에 묻어있는 묽은 금빛의 카레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쓸고, 손가락을 끌어 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만히 혀에 갖다 대고 맛을 음미하면, 오이카와의 기억 속 그 맛 그대로였다.

, 맛있네. 역시 내가 만든 카레야.”

오이카와는 뿌듯한 듯이 미소 지으며 자기 몫의 카레를 한 입 떴다. 그대로 집어넣으려고 조그마한 입을 벌리자, 카게야마의 눈빛이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먼 곳을 보는 듯이 멍하게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눈치채고, 오이카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콧망울에 닿을 듯이 모락모락 오르던 카레 김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깊은 카레 향이 목제 테이블 안에 가득했다.

?”

오이카와는 말없이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미소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의 입 주변은 아까와는 달리 깨끗했다. 그 입이 슬며시 닫혔다가, 오물거린 뒤 다시 열리는 것을 오이카와는 가만히 지켜봤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오이카와씨가 만든 카레는 30년이 지나도 이 맛이겠죠?”

오이카와는 머릿속이 잠시간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 끝에 걸어놓았던 미소를 내려놓았다. 뒷골이 슬쩍 당기는 것을 느끼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손을 아로쥐어 주먹을 꾹 쥐었다.

토비오, 너 나한테 30년이나 카레만 만들게 할 셈이야?”

카게야마는 물음으로 대답한 오이카와에게 누가 봐도 놀랐다는 얼굴로 엇,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안 만들어 주실 건가요?”

연이어 이어진 질문에 오이카와는 하아깊은 한숨을 내쉰 뒤, 주먹 쥐었던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무거운 두통이 눈 바로 위에서 뚝뚝 떨어졌다.

저기 있지, 토비오. 너 말야

오이카와는 입을 연 채로,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눈을 낮게 내리깔자, 푸근한 열기가 오르는 카레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한 오리지널 레시피. 바삭하게 튀긴 포크커틀릿, 그 위에 올린 반숙 계란. 전부 오이카와의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자다가 일어나도 대답할 수 있는 레시피. 혀끝에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맛.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오이카와를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조금 전의 카게야마와 같이 입을 다물고, 얼마간 우물거리다가 다시 열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약하게 들리면 어쩌지, 조금 걱정하면서.

있지, 토비오쨩. 나 벌써 스물일곱 살이잖아? 마음의 나이는 스무 살이지만. 토비오는 스물다섯 살이고.”

마음의 나이, 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죠.”

카게야마는 의문의 눈초리로 미간을 좁히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걸쭉하게 흰 쌀밥 위를 덮고 있는 카레를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밥과 카레가 섞이면서, 고운 빛깔이 촉촉하게 빛났다. 테이블 위의 전등에서 부드러운 크림색의 빛이 부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토비오는 언제까지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인걸까.”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요?”

카레를 휘저을 때마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연기가 뭉텅이로 터져 나와 조용한 공기 속에 퍼졌다. 오이카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로즈마리를 흘끗 곁눈질했다. 연초록색 잎들이 싱싱했다. 오이카와는 약간의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뽑아냈다.

카레도 언젠가는 식고. 로즈마리도, 언젠가는 말라죽을거고. 그렇게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이 집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토비오도

오이카와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 입이 이번에는 열리지 않았다. 꾹 다문 입술을 입안으로 당긴 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번 갸웃, 해 보이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기어코 팔짱까지 낀 카게야마의 관자놀이에 연하게 땀이 배었다. 눈에 안 보이는 증기가 피쉭 피쉭 머리 위로 몰려나오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입을 툭 내밀더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저기무슨 뜻이에요?”

하아, 하하

오이카와는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단념이 섞인 한숨을 흘린 후, 휘젓던 카레를 숟가락으로 한 입 떴다.

아냐, 됐어. 카레나 먹자.”

오이카와씨는 항상 어려운 말만 하시네요.”

오이카와가 눈을 들자, 카게야마는 조용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오이카와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전등에서 떨어지는 불빛이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흩어졌다. 오이카와는 다른 존재를 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끼는 동시에 저 아래 쪽으로 접어넣은 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저 안 어린데요. 스물다섯인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흐응? 코를 울린 뒤 눈썹을 씰룩이더니 카게야마의 깨끗한 입 주변을 가리켰다.

입가에 묻히면서 먹는 토비오는 아무리 커도 어린애랍니다.”

…….”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노려보듯 오이카와를 치켜봤다. 오이카와가 이겼다라는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는 다시 차분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전 어려운 말은 잘 몰라요. 오이카와씨가 하는 말 대부분은 어려운 말이니까, 대부분은 잘 몰라요. 그래도 그건 알아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눈앞의 카레로 향했다.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어느새 잦아든 오이카와의 카레는, 아직도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1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저한테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는 건 알아요.”

오이카와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곧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아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조금 기울이더니, 어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 때의 카게야마였다.

,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오이카와씨는 언제나 제 옆에 있으실거잖아요? 믿고 있거든요, 오이카와씨를.”

입가가 시큰거릴 정도로 달큼한 카레의 향기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얼풋 로즈마리 향이 나는 듯했다. 코 안쪽이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로 가득차서 머리가 약간 몽롱해졌다. 오이카와는 입가를 몇 번 달싹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저 뱃속까지 내려갈 듯이 아래쪽을 향해 고동치고 있었다. 흰 볼이 열기로 인해 따끔거릴 정도로 붉어진 게 느껴졌다. 뜨거운 카레의 맛이 그 볼에 닿아 훅훅 퍼졌다. 입을 열면 그 열기가 한꺼번에 후욱 빠져나올 것 같아 오이카와는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나랑 같이, 계속 이대로 있고 싶어? 토비오.”

카게야마는 짜증이 톡 올라온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봤다. 인상나쁜 눈매의 끝이 엷게 물들어 있었다.

꼭 말해야 해요?”

.”

오이카와는 심장으로부터 열이 전달된 손을 들어, 다홍빛으로 물든 그 눈꼬리에 가만히 갖다 댔다. 카게야마는 제 볼에 닿은 오이카와의 손에 가볍게 기대면서 시선을 틀었다. 우주가 담긴 눈동자 끝이, 여름날 잘 익은 체리처럼 더욱 붉어졌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의 열기와 카게야마의 볼에 담긴 따스함이 뭉근한 열을 만들어냈다.

전 그냥, 오이카와씨가조금만 더 저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걸?”

제가 오이카와씨를 그저,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요.”

믿고 있다고?”

카게야마가 틀었던 시선을 돌려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의 속을 훑어, 저 끝까지 꿰뚫어보는 눈동자였다. 저에게 고백할 때도 카게야마는 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겉모습, 행동, 말투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향한 눈동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카게야마의 저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임을 실감했다.

. 30년 뒤의 일은 몰라요. 제가 어떻게 될지,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그저 배구를 계속하리란 것뿐이에요. 근데 오이카와씨는 믿을 수 있어요. 30년 뒤에도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고. 오이카와씨는, 그때도 제 얼굴을 잡고. 키스, 해 주실 거라고.”

잠시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던 카게야마는, 다시 얼굴을 고쳐 들었다.

이 집이 아니어도 돼요. 로즈마리 화분이 있는, 이 테이블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냥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의 카레면 돼요.”

오이카와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아, 목덜미를 붙잡힌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따뜻해진 심장에 머리가 적응하지 못해, 여기저기서 치직치직 불꽃이 타는 느낌이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전부 익어서 녹아내린 뇌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과도한 열로 인해, 카게야마의 볼에 대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한 땀으로 가득했다. 가슴을 그대로 부여 잡힌 듯한 괴로움에 발끝까지 쥐가 난 듯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에 닿았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토비오.”

제대로 말로 나오고 있는 걸까.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인 건 아닐까. 입술이 작게 떨리면서, 오이카와는 눅눅하게 익어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머릿속에서 부옇게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낯익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말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는 너무 알기 쉽다면서요?”

불만이 담긴 입술이 튀어나오더니, 카레를 한 입 떠서 제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따스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오이카와도 금빛 카레를 담았던 숟가락을 들어 입안에 넣었다. 코끝에만 가득했던 카레 향이 입안 곳곳에 퍼졌다. 토비오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레시피는, 누가 쿡 찔러도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 30년이 지난 뒤에도 잊을 수는 없겠지. 오이카와는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올라간 입꼬리를 보더니, 카게야마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또 저 비웃으려고 그러죠?”

푸핫, 아니야.”

됐어요. 익숙하니까.”

불퉁한 얼굴로 반숙 달걀과 함께 카레를 입에 넣고, 카게야마는 쩝쩝 소리가 나게 씹었다. 오이카와는 하핫,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난 아직도 네가 어려워. 가끔은.”

전 항상 오이카와씨가 어려운데요.”

그건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안 어리거든요?!”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감싸듯이 잡았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단단한 손은 오이카와가 전부 감쌀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오이카와는 스물다섯 살 남자의 손을 확인하듯 가만히 쓰다듬었다.

. 알아. 알고 있어, 토비오에 대해선 전부.”

그런데도, 난 아직도 네가 가끔 무서워질 정도로 어려울 때가 있어. 내가 알 지도 못 하는 곳에 조용히 스며들어서, 넌 가끔 툭 튀어나오거든. 난 몰랐던 네가. 오이카와는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이사이로 열이 퍼지자, 카게야마도 몸을 오이카와에게로 기울인 후 속눈썹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감긴 눈두덩이 전등 빛을 받아 보드라운 색을 띠고 있었다. , 가벼운 소리가 퍼지며 서로의 입술이 닿자마자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가늘게 뜬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다시 키스를 떨어뜨렸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숨소리만 퍼지는 공기 속에 간간이 들렸다. 코끝으로 달콤한 카레 향에 섞인 카게야마의 냄새가 스치고 지나갔다.

“30년 뒤에도, 카레 먹고 싶어?”

낮게 물으며 간지럽히듯이 콧망울에 키스하자,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뜬 뒤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볼덩이를 말갛게 붉혔다.

. 오이카와씨의 카레요.”

카게야마에게서부터 얽어오는 혀가 뜨겁고, 물컹하고, 또 전기가 오를 정도로 달았다. 익숙한 카레 맛이 타액에 속속들이 녹아들어 풍미를 더했다. 맞잡은 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이 들어갔다. 30년 뒤에도 네 손이 똑같이 따스하다면, 그렇다면.

 

, 만들어줄 수는 있어. 카레쯤이야. 30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 란오님의 생일 기념 짧게 끄적인 글입니다!!
   * 란오님 생일 축하드려요!!!! >////<






[오이카게] 눈치 없는 후배

 

 

 

 

번쩍하는 섬광이 하늘을 찢고 지나갔다. 그 뒤를 잇는 거대한 천둥소리가 지면을 흔들었다.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여름날의 장마는 매번 심했지만, 이번 해에는 유달리 강렬하게 퍼부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회색의 시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거세게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살풍경해서, 세상 끝날에라도 서있는 기분을 자아냈다. 이제 겨우 오후 5시인데도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리저리 튀어 오른 머리를 짜증스레 매만지며 체육관을 나섰다. 아침에 챙겼다고 생각했던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집 안 신발장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정하게 학교까지 데리러 오는 부모는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는 포기하고 가방을 머리에 단단히 이었다. 겨우 머리만 감쌀 수 있는 가방은 이미 눅눅한 습도에 축 늘어져있었다.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는 굳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꿍얼거렸다. 한 시간 일찍 가버린 이와이즈미는 우산을 쓰고 여유롭게 갔으리라. 그 때에는 오이카와도 우산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이와이즈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뒤적이니 언제나 쓰고 다니던 민트 색 우산이 없었다. , 가볍게 혀를 차며 오이카와는 다리를 박차 검은 공간에 몸을 던졌다. 얼굴을 때리는, 몸을 때리는 매서운 빗줄기가 따가웠다. 막을 새도 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비바람에 오이카와는 가방을 잡고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입안에 고이는 젖은 먹구름의 맛은 축축했다. 가볍게 입술을 핥고 발을 열심히 움직였다. 교복으로 안 갈아입길 잘했다, 오이카와는 가빠오는 숨을 느끼며 생각했다. 비록 세이죠의 새하얀 저지는 더럽혀질지언정, 저지는 항상 빨 수 있으니까. 발 끝자락에 스며든 검은 흙탕물을 보면 조금 불쾌해질 것 같지만, 뭐 그 정도야.

 

◆ ◆

 

오이카와는 눈앞에 보이는 처마 끝에 급하게 몸을 우겨넣었다. 평소 이와이즈미,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즐겨 들르던 작은 가게였다. 가게 주인인 할머니는 지병인 무릎통증 때문에 비가 오면 가게를 열지 않곤 했다. 애초부터 이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빗줄기가 나아지길 기다릴 예정이었다. 온 몸이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젖어있었다. 가방으로 겨우 가린 머리카락도 세찬 바람에 의해 잔뜩 젖어서, 그 끝에 종모양의 물방울을 톡톡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흘린 뒤 어깨며 머리카락을 털었다. 몸 구석구석 싸인 비의 장막을 덜기에 소용은 없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불쾌감만이라도 덜고 싶었다. 속눈썹 끝에 맺힌 물방울이 간지러워서 눈을 감았더니, 볼 언저리로 또륵 흘렀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빗소리만이 들렸다. 파도소리가 끝도 없이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젖은 공기, 흔들리는 진동, 몰려드는 한기. 언제쯤 그치는 걸까. 멈추지 않는 물소리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검은 시야검은 시야였다. 아니, 빗줄기로 채워진 검은 공간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질이 그곳에 있었다. 익숙한 검은색 저지였다. 낯익은 몸이었다.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몸통이 아닌 제대로 된 고등학생의 몸이었다. 이제는 시선의 방향이 퍽 비슷한 몸이기도 했다. 검은 색 우산을 쓰고, 검은 색 저지를 입고, 검은 색 가방을 매고, 검은 색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뭘까, 검은 사신일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뭐해,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야말로 이런 곳에서 뭐하세요?”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약간 음영이 진 얼굴은 험악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매번 저런 표정을 지었다. 짜증을 내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단순히 ?’라는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보면 몰라? 우산 없어서 쫄딱 젖었잖아. 여기서 잠깐 기다릴거야.”

, 오늘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하던데요.”

카게야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이카와를 꼼꼼히 바라봤다. 젖어서 가라앉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흙탕물이 이리저리 튄 발끝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검은 색 일색이라 젖은 티도 나지 않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욱한 심정이 들었다. 상쾌함이라고는 일점도 없는 음울한, 말 그대로 찌그러진 비구름에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나도 알거든? 잠깐 빗줄기가 약해질때까지만이야.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옷 다 젖었는데요. 바람도 거칠고. 춥지 않으세요?”

또 한 번, 갸웃거린 카게야마는 우산을 든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하나하나 생각이 눈에 보이는 번거로운 후배였다. 오이카와는 그 눈에 빤히 보이는 움직임에 시선을 사선으로 틀어 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면 눈이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 귀 안에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카게야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다시 시선을 맞추자 카게야마는 한 발자국 다가와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선 짙은 파랑 빛이었던 눈동자가, 검은 하늘 아래에선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우산.”

필요 없어.”

오이카와는 조급하게 내뱉었다. 차갑게 떨궈낼 요량으로 낮게 내뱉었으나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도 없는 후배는 이런 때에도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제 생각은 하나하나 눈에 박힐 정도로 보이게 만들어놓고선, 오이카와가 던지는 비언어적인 표현은 하나도 알아먹질 못하는 짜증나는 후배였다. 카게야마가 가까워져서일까, 그의 검은 우산에 퍼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커졌다. 투둑 툭 간헐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계속되는 바람소리. 거칠게 처마 안으로도 노나드는 빗줄기는 오이카와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바람이 거칠었다.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 그럼, 갈게요.”

그래. 얼른 가라니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내리더니 그 길로 뛰어가 버렸다. 찰박 찰박, 촉촉한 물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메꿨다. 오이카와는 괜시리 짜증이 났다. 자신에 대해서, 카게야마에 대해서. 중학교 때 제 등을 지칠 줄 모르고 쫓아다니던 카게야마는 더이상 없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옆에 서서, 같이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 , 다시 혀를 차면서 머리를 털었다. 처마로 들어온 비 때문이었을까, 젖은 머리에서 아까와 같이 다시 물방울이 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이카와가 전하고자하는 생각은 못 알아먹는 후배였다. 건방진 녀석, 항상 하던 말을 머릿속에서 툭 내뱉은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먹구름이 하늘 안에 빼곡히 차들어 있었다. 저게 다 투명한 흰색으로 돌아오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걸까. 굳게 닫힌 가게 셔터에 몸을 기댄 뒤 길게 한숨을 뱉었다. 몰려드는 피로감과 끝도 없는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뛰어오는 소리. 뛰어오는 소리? 오이카와는 다시 정면으로 시야를 돌렸다. 검은 사신이 오이카와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건, 밝은 갈색의우산이었다. 사신은 아까와 비슷한 거리까지 오더니 몸을 굽혀 숨을 가다듬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오이, 카와 선배

, 토비오쨩?! 뭐 하러 다시 온 거야?”

이거요!”

처마 밑으로 내민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밝은 갈색의 우산.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 안에서, 유일하게 을 가진 존재였다. 오이카와는 우산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에서 새끼손톱만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라니. 항상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좀 더 심했다. 아니, 모든 것이 빤했다. 제 감정 따위, 생각 따위 숨기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후배 녀석.

이거 뭐? 우산이잖아.”

오이카와는 애써 넘겼다. 받아야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걸 위해 카게야마가 다시 온 것조차도, 오이카와는. 모든 건 오이카와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속속들이 보였음에도 오이카와는 눈을 가렸다.

우산, 쓰세요. 저희 집에서 가져온 거에요. 가지셔도 되니까 안 돌려주셔도 돼요.”

아니, 됐다니까? 왜 내가 너희 집 우산을 받아야하는데?”

저 집 문을 열어두고 와서요. 얼른 돌아가야 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들린 채 그 길로 다시 뛰어가 버렸다. 서서히 사라지는 검은 사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더 이상 눈을 가릴 수 없었다. 손에 들린 우산이 묘하게 무거웠다. 무거워서, 떨어뜨릴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꼭 감쌌다. 메마른 우산이, 물기가 녹아있는 오이카와의 두 손 안에서 젖어 들어갔다. 항상 검은색 우산만 들고 다니는 카게야마가, 밝은 색의 우산을 고르고. 집 문도 열어둔 채, 온 몸이 젖어가면서. 오이카와에게 검은 사신은, 건방진 후배는 정말이지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온갖 정보를 들이붓는 귀찮은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 위에는 흘러내릴 물방울이 없었다. 그런데도 볼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톡톡 튀는 별사탕이 목구멍에 잔뜩 걸린 느낌이었다.

더럽게 귀여운 후배 녀석.”

별사탕이 하나씩 터져서 목이 따끔거렸다. 볼은 간질간질, 목은 따끔따끔. 손 안에서 우산이 자꾸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우산을 펼쳤다. 둥그렇게 퍼지는 밝은 갈색의 우산이, 누군가의 머리통을 떠올려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우산을 들어 머리 위에 썼다. 새하얀 저지가 갈색 빛에 물들었다. 약간 어두운 색이 더해진 그 저지는, 마치 검은 빛에 감싸인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킁, 코를 훔치며 거센 빗줄기 속으로 발을 옮겼다.






당신이 없는 세계

 

 

 

가끔 생각해요. 당신이 없는 세계를.

그러면, 항상.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니까.

금방 생각을 멈춰버리곤 해요.

 

 

 

 

 

 

 

 


오이카와 선배가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말은 어딘가 왜곡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땅으로 가라앉거나 하늘로 솟을 수 있을까. ‘어딘가에 있다라는 말은 쓸 수 있어도 사라졌다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라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언제나 조금은 말에 대해 망설였으므로, 이번에도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오이카와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망설였던 마음 그대로 그는 말하기 전, 매번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옳은 걸까. 오이카와 선배가 그저, 그저. 옆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타인의 말을 빌렸다. 카게야마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타인의 말을.

그 자식, 사라졌어.”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돌을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낮의 역 앞 카페는 붐비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아 간단한 브런치를 먹으러 온 직장인들과 주중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커플들로 꽉 들어찼다. 그날은 날이 좋았다. 선명한 태양이 2월 중반의 차가운 바람을 슬쩍 잠재우고, 구름조각이 그저 밝게 빛나는 태양을 커튼 치듯 드리우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사라졌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포크 카레를 휘적거리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사라..졌다고요?”

그래. 깨끗이. 말 그대로 자국 하나 남김없이.”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했던 아파트에, 오이카와가 돌아오지 않게 된 지 3일이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바람과 같은 남자였다. 어느 날 훌쩍 사라져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카게야마는 조금의 불안함과 허전함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혼자인 밤, 침대에 누워 그저 뒤척거리다 아침을 맞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매번 제대로, 아파트로 돌아오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어느새 적응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시간이 언제인지는 몰랐다. 낮일 때도 있었고, 새벽녘일 때도 있었고, 한밤중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항상 아파트로 돌아왔다. 카게야마가 있고, 자신이 누울 자리가 있는 침대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돌아오는 날이면 그때까지 겪었던 무수한 밤의 쓰라림을 잊곤 했다. 그는 돌아오는 날은 다정했다. 아니, 오이카와는 항상 다정했다. 그런데도 카게야마는 그가 돌아오는 날에는 특히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애틋함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든 카게야마는 이제 그가 훌쩍 사라지는 것에 더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돌아올 테니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 성에 차면 돌아와서, 카게야마를 안고, 부드럽게 키스하며 다녀왔어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이카와가 사라지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옆에 있어준다는, 언제나 절대적인 진리만으로 충분했다. 카게야마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이번도. 분명 제 성에 차면 어느샌가 돌아와서, 자고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는 3일의 밤을 보내며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슬쩍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걱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를. 카게야마가 없는 오이카와를.

 

소속 팀 감독이랑 코치한테도 미리 말해뒀더라. 팀원들에겐 몰래, 얼마간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감독이 그 기간은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글쎄요라고만. 정말이지, 그 바보는 아무리 나이가 차도 철이 안 든다니까.”

 

고등학교 때 시작한 둘의 관계는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 오이카와 27세 카게야마 25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럭저럭 8년이다. 더 이상은 어린애처럼 훌쩍 모험을 떠날 나이가 아니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던 눈길을 거둬 거리로 돌렸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옆에 오이카와가 없어도 세상은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저도, 연락이 안 된 지 3일째에요. 그저 항상 있는 방랑벽이 도졌다고 생각했는데, 팀원도 모두 어디 갔는지 모르더라고요. 항상 조금은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이었는데. 쪽지라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넌지시 말해두던가, 아니면 조그만 사진 한 장이라도. 그런데 이번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카게야마는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없단 걸 알았을 때의 소름이 몰려드는 것 같아 몸을 작게 떨었다. 여지를 남겨두는 남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그런 남자였다. LA로 갈 때는 LA의 야경사진을, 홍콩으로 갈 때는 팀원에게 잔뜩 쇼핑하고 올 거야라고 말하고. 카게야마는 어느새 익숙해지곤 했다. 오이카와가 주는 여지에. 행방의 조각에. 그래서, 더욱.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던 조각에 심장이 두근거릴 때였다. 이와이즈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바보카와 어딨는지 혹시 알고 있어?”

 

일단, 오이카와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 내용을 확인해봤어. 그런데 아무것도, 기차표 하나 안 긁었더라. 철저하게. 무슨 돈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네.”

짚이는 곳에 연락해보고, 찾아다녀 봐도 없어요. 어디에도, 없어요. 그냥 정말로이와이즈미 선배 말대로 사라진것 같은. 사라진 걸까요, 오이카와 선배는.”

일단 나도 전력으로 찾아보고 있어. 너도 너무 고생하진 말고, 천천히 찾아보자. 분명 그 바보 자식은 어디선가 농땡이 피우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말 되네요.”

 

 

* *

 

 

피곤한 날이었다. 낮에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그 후로 다시 돌아가 오후 연습을 마치고. 언제나 가보던 대로 오이카와가 자주 가는 카페, 술집을 모두 들렀지만. 오늘도 허탕이었다. 카게야마는 한숨이 되지 못한 입김을 뱉으며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파트 내부는 쌀랑했다. 차가운 내부 공기가 카게야마의 이미 식어버린 볼을 다시 한 번 건드리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그 공기가. 차가웠다, 오이카와가 없는 방이. 오이카와의 살결을 느끼고, 체온을 나눈 지 3일이 지나있었다. 이전에는 오이카와가 아무리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차갑지 않았다.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믿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조각이, 이제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목마름을 자꾸만 채워 넣고 있었다.

 

어디로 갔냐고요멍청이.”

 

카게야마는 유일하게 자주 내뱉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파트 신발장에 주저앉아, 팔을 돌려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묻었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당신이. 그저 3일 보지 않았는데도, 그 얼굴을 잊을 것만 같아. 내 기억 속 당신의 실체를 보고, 만지고, 키스하고 싶은데. 왜 당신은 내 기억 속에서만 숨 쉬고 있는지. 기억이라는 주머니가 저도 모르게 해져서, 전부 빠져나가 버릴까봐.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가 더 이상 자신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못할까 봐. 카게야마는 두려웠다. 오직 그것만이 두려웠다.

 

 

 





 

 

그 날은 오이카와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함께 트레이닝을 할 때 가끔 들렀던 24시 카페도, 주말 저녁 함께 마셨던 술집도. 오이카와의 흔적은 없었다. 이미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그가 없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날 밤잠을 설쳤다. 오이카와가 없는 침대가 그날따라 유난히 삐걱거렸다. 끼익, 끼익. 침대는 낡은 스프링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슬며시 볼을 매만졌다. 차가웠다. 오이카와는 손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녀왔어, 토비오.’

역시 토비오 옆이 제일 좋아. 제일, 따뜻해. 기분 좋아.’

 

아직도 그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한데. 어느새 당신이 없는 세계는 흐려지고 있었다. 당신과 트레이닝하던 길에서 자주 만났던 강아지도, 항상 장을 보곤 했던 슈퍼의 판매원도. 모두 카게야마를 그저 지나쳐갈 뿐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카게야마와 달리 매번 안녕하세요하며 밝게 인사하는 당신이 없는 세상은 그저, 그저 색이 바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는 빈자리를 매만지다가, 꼬옥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유달리 찬 볼을 덮고자, 이불을 잔뜩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살풋, 잠이 들었다.

 

 

* *

 

 

꿈을 꿨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왔던 카페였다. 그 날과 같이 선명한 태양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태양이 높게 뜬 거로 봐서 오후 2시쯤인 것 같았다. 날은 2월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따뜻했고, 카페 내의 모든 사람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주말인 걸까, 사람이 많이도 붐볐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와 앉았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포크 카레, 반대편에는 커피 한잔이 놓여있었다.

무슨 꿈인 걸까. 꿈이란 걸 알고 꾸는 꿈,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카게야마는 언젠가 스가와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자각몽을 많이 꾼다고 했었다. 자각몽의 좋은 점은, 꿈인 걸 알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점이라고. 카게야마는 평소 꿈을 자주 꾸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좋은 점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주말 날씨는 기분 좋았다. 요즘 매일 추웠으니까.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눈가에 퍼지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받아들였다.

 

뭐야? 중요한 거래처라더니웬 꼬맹이야?”

 

번쩍. 엄청난 기세로 눈이 떠졌다. 기억 속에서만 들렸던 목소리였다.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의, 오이카와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 선배?”

 

눈앞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블랙 수트를 입고 앉아있었다. 그는 더운 건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머리를 헤집어 넘겼다. 하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투명했다. 이렇게 따스한 날이다. 저 옷으로 안 더운 게 이상하다. 저런 정장 차림은 처음 보지만 몇 번이고 눈에 담고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오이카와는 항상 가벼운 티셔츠를 선호했으니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카게야마는 눈을 부릅떴다.

 

선배?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는데? 이름은 어떻게 알아?”

 

오이카와는 커피를 조심스레 홀짝이더니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날카로운 눈동자는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는 다정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었다. 그의 이런 눈동자는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걷어붙인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이 단단했다.

저기, 에요. 카게야마 토비오. 저기

 

오이카와는 새로운 장난에 취미를 들인 걸지도 몰랐다. 가끔 이상한 설정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부터 토비오는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이런 것 등등. 이와이즈미는 변태 같은 장난이라며 혀를 찼지만, 자신은 그렇게 싫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는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척하기, 뭐 그런.

 

카게야마 토비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만? 근데 전혀 모르겠는데. 너 같은 후배가 있었나?”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아까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눈동자가, 이것이 설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몸이 식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자각몽이라고, 자신이 꿈이라는 걸 알고 꾸는 꿈이 있어.’

 

그랬었다. 자신은 꿈을 꾸고 있었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카게야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포크 카레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나, 명확한데. 무엇하나 손에 잡힐 것만 같은데, 눈앞의 오이카와는 꿈이었다.

날이 따뜻했다. 카게야마는 마음을 고쳤다. 이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얘기만이라도 하고 싶다. 그 목소리만이라도 새기고 싶다. 더는 기억의 조각이 흩어지지 않게

 

처음뵙겠습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저기괜찮다면 얘기를 해도 좋을까요.”

…….”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 헤집었던 머리는 어느새 정돈되어 있었다. 팔짱을 낀 손의 손가락이 탁탁, 그 단단한 팔뚝을 건드렸다. 그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평가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불쾌한 사람. 오이카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한번 감겼다가, 다시 떴다. 오이카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좋아. 재밌을 것 같으니까. 난 오이카와 토오루. 27살에 HQ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어. 참고로 너에 대해서는나도 한 마디 밖에 못하겠네. 처음 뵙겠습니다.”

 

27, 증권회사. 눈앞의 오이카와, 꿈속의 오이카와는 배구선수가 아니었다. 저 단단한 팔뚝으로 봐서는 운동 하나쯤은 할 것 같은데. 눈앞의 그는 검은 수트를 입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싫어하던 옷을.

 

운동 같은 건 안 하시나요? 좋아하는 음식은요?”

뭐야? 이거 무슨 선이야? 얘기 하자더니 그런 거 물어보려고 한 거야?”

 

오이카와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너무 앞서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인 것 같지만, 오이카와가 아닌 남자. 그가 얼마나 오이카와와 비슷한지 알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기억의 조각을 찾길 바랐다.

 

, 좋아. 운동은 딱히 안 하고 있어. 웨이트 트레이닝은 자주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빵.”

 

이내 선심 쓰듯 눈가를 가늘게 뜨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추가로 말해주자면, 우유빵은 우유 그리고 빵이 아니니까. 엄연한 우유빵이라는 빵의 종류니까. 다음에 사 올 생각 있으면 기억해둬.”

 

누가 사다 준다고 했나.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게야마도 그에 이끌리듯 포크 카레를 입에 옮겼다. 맛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갔던 카페의 포크 카레 맛이었다. 웨이트 트레이닝. 그래서 그렇게 팔뚝이나 어깨가 단단했던 건가. 오이카와 선배도 웨이트 트레이닝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원래 트레이닝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카게야마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눈앞의 오이카와도 분명, 그럴 것이다.

 

중학교는어디 나오셨어요? 고등학교는요?”

진짜 선보는 기분인데. 계속 나만 질문받는 것도 억울하지 않아? 그럼 토비오쨩은? 취미는 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오이카와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투명한 유리 테이블에 팔을 두고 턱을 괴었다.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만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눈앞에서 홍차 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슬며시 부는 바람에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당신은 내 기억 속의 오이카와인데도. 이미 몇 년이고 알고 지냈을, 그런 걸 질문하는 당신이.

 

배구를 하고 있어요. 배구선수입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반숙 달걀을 얹은 포크 카레.”

뭐야, 그거. 엄청 자세한데?”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따뜻한 공기를 타고 흘러와 카게야마의 귓속에서 퍼졌다. 이 목소리가 좋았다. 지금도, 좋다. 오랜만에 듣는 오이카와의 웃음소리에 카게야마의 속이 먹먹해졌다. 여전히 아프다. 그가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럼 중학교는? 고등학교는?”

 

카게야마가 물었던 걸 마치 처음인 양 묻는 오이카와의 미소가 눈에 서렸다. 카페는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테라스는 거리의 소리까지 더해져 더욱 소란스러웠다. 자동차 소리, 웃음소리,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까지. 그런데도 오이카와의 소리는 귀에 닿았다. 카게야마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오이카와의 소리만이 들렸다.

 

배구를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중학교는 배구부가 유명한 키타가와 제일 중학교로 들어갔어요. 고등학교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요.”

우와, 키타가와? 거기 들어본 것 같아.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서? 지금 배구 선수 하고 있으면 잘하겠네? 인터..하이였나? 미안, 도통 스포츠엔 관심이 없어서. 거기서 우승도 해봤어?”

 

오이카와의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이카와는 꽤 흥미가 돋은 듯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이 댔다. 정갈하게 갖추어진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말끔한 회사원의 얼굴. 그는 인터하이조차 모른다. 그 여름, 우리의 시합도.

 

인터하이에선

, 미안. 나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얘기, 즐거웠어.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네. 만날 수 있으면.”

 

카게야마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고, 남겨놨던 커피를 한번에 쭈욱 들이켰다. 눈앞에서 오이카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사라지려하는 오이카와를 보고 몸을 서둘러 일으켰다. 두려웠다. , 그가 사라져버린다.

또 나를 두고

 

..오이카와 선아니, 오이카와씨!”

미안, 정말 급해서. 가볼게.”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을 하고 손을 올리며 미안포즈를 짓는 그는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돌린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급하게 몸을 움직인 카게야마 덕분에 테이블이 크게 덜거덕거렸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포크 카레가 조금 흘러넘쳤다. 카게야마의 눈에 포크 카레는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의 오이카와에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함께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곳에서.”

……좋아. 대신, 마음이 내키면.”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내 카게야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빼낸 오이카와가 걸음을 서둘렀다. 등을 돌리고 잰걸음으로 가버리는 오이카와의 등을 카게야마는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검은 수트가 반짝이는 햇빛을 받아 연하게 빛났다. 그리고 제 손을 한번 바라봤다. 만졌다. 오이카와를, 만질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의 손이었다.

 

오이카와의 손은, 따뜻했다.



 

 

 

 

 

 

눈을 뜬 곳은 침대 안이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침대 옆 협탁에서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쳐놓고 잔 탓일까, 방안은 아직도 어둑하니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앞에 카페, 그 빛나던 햇빛, 김이 오르던 포크 카레, 커피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손을 뻗어, 오이카와가 없는 침대 옆 빈자리를 툭툭 쳤다. 침대는 차가웠다. 그리고 다시 뻗었던 손을 거둬,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볼은 신기하게도, 따뜻했다.

 

 

* *

 

 

오이카와 선배는 아직 못 찾았어?

. 철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없어. 행방을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전부터 이상한 곳에 집착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그래. 장난 하나를 치려고 일주일 동안이나 말도 안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킨다이치가 핸드폰 건너편에서 멋쩍은 듯 말을 흐렸다. 그걸 왜 네가 부끄러워하냐고.

 

오이카와가 사라진 지 2주 하고도 3. 13일에는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왔고, 오늘은 킨다이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희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냐. 이와이즈미는 그 뒤로 메일만 몇 통 보낼 뿐 그다지 연락이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여기저기로 오이카와의 행방을 알아보는 중인 것 같았다. 카게야마도 그랬듯이, 이와이즈미가 보내는 메일도 모두 진척 없음을 나타내는 내용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러한 상황에 조바심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의 감정은 조바심이나, 당황, 초조 등.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슬펐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러한 두려움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실제 했던 오이카와가, 그저 기억 속의 오이카와가 되어버리는 것. 만질 수 없고, 끌어안을 수 없고, 그의 품에 안길 수 없다. 카게야마의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아무튼, 어딜 가더라도 꼭 돌아오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웃는 얼굴로 모두~ 걱정 많이 했어~?’이러면서 돌아올 거야. 그럼 또 이와이즈미 선배가 한 대 때리지 않을까. ‘바보카와, 어디 갔다 이제 기어들어 오냐!!’라면서.

. 그러게.”

 

킨다이치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흉내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 서툰 흉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부터 다정한 킨다이치였다. 말로 하진 않지만, 꼬박꼬박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는 쿠니미와 말은 서툴지만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킨다이치.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더욱,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 끝이 없던 사랑. 그 끝이 없던,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카게야마는 바닥을 모르는 애정을 느끼고 가끔 몸을 떨었다. 그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다. 더 없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내 옆에 없어. 내 기억 속에서만 웃고 있어. 그런데도, 오이카와가 없는 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 *

 

 

오늘도 있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포크 카레? 정말 좋아하나 보네.”

.”

 

오이카와는 재킷을 의자 뒤편에 걸치고, 의자를 끌어다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애초에 의자가 2개뿐인 2인용 테이블은 성인 남자 두 명이 앉자 꽉 들어찼다. 오이카와는 낮게 한숨을 내뱉고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꿈속의 오이카와를 만난 건 이번으로 4번째였다. 꾸는 꿈마다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카페에 있었지만 오이카와가 나오지 않아 허탕 치는 날도 있었고. 그저 부유물같이 오이카와가, 오이카와와 함께한 추억이 떠도는 꿈을 꾼 적도 있다. 그럼에도, 꾸준히. 꿈속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는 날은 확실히 있었다.

꿈속의 카페는 언제나 붐볐다. 모든 사람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매우 즐거워 보이는 단란한 가족의 테이블도 여러 곳 있었다. 마치 봄날과 같은 날씨. 따뜻했다. 오이카와가 나오는 꿈을 꿀 때면, 매일 밤 추위에 떨며 잠드는 카게야마도 기분 좋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난방을 틀어도 방안은 따뜻해지지 않았는데. 시린 발을 이불에 싸매도 그토록 추웠는데. 어째서 이 꿈속은 이다지도 따뜻한 걸까. 어째서, 항상이 사람 옆은 따뜻한 걸까.

 

그렇게 맛있나? 어디, 나도 한 번 먹어볼까.”

,”

 

카게야마가 말릴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포크 카레를 한가득 떠서 합,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카게야마는 자신의 몫이 꽤 많이 줄어든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의미로 눈가를 구기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는지 안 보는지 응, 응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내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 맛있긴 하네. 조금 달긴 하지만.”

여기 엄청 많이 퍼간 자국 보여요? 완전 구멍 파였어요.”

쩨쩨하게 그런 거로 생색내기야? 이쪽은 바쁜데도 일부러 시간 내고 있는데.”

 

카게야마의 삐죽 튀어나온 입에서 나오는 불만을 들은 오이카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풀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 손사래를 치며 툭, 오이카와가 퍼먹은 자리를 가리키는 카게야마의 손을 쳐냈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손이 힘없이 테이블 너머로 날아가서, 카게야마는 또다시 입술을 내밀며 손을 거뒀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 그것이 꿈속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의 기억 속 오이카와보다 어린아이 같았다. 장난의 정도는 덜했지만 자잘한 장난이 많았다. 그러고선 꼭,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눈가를 접고, 입꼬리를 익살스럽게 올리고, 홍차 빛 눈동자를 굴리며.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카게야마를 바라본다. 그 미소는 기억 속 오이카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기억 속 오이카와는 이렇게 미소 짓지 않았다. 좀 더 깊은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다. 보고 있으면 그에 빠져들어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미소. 그저 카게야마를 끌어들여서, ‘토비오부드럽게 부르고. ‘토비오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토비오’.

 

그 얘기 해줘. 나 닮은 사람 얘기.”

멍하니 머릿속 오이카와를 재생하고 있자, 눈앞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을 톡 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몸은 카게야마에게로 기울어있었다. 화제에 관심을 보이는 그의 표현방식이었다.

 

? , 들어도 괜찮아요? 지루하잖아요.”

아냐, 안 지루해. 재밌다니까?”

……….”

 

거짓말. 저번에 하품하는 거 다 봤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온 걸 카게야마는 꿀꺽 집어삼켰다. 이 말을 하면 어린아이 같은 이 사람은 또 삐질 게 분명했다. 저번에는 삐져서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카게야마가 꽤 곤욕을 치렀다. 한번 이렇게 재촉하기 시작하면 얘기를 안 해줘도 삐지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어느새 턱을 괴고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를 들을 때면 그는 항상 이런 자세를 취했다.

항상.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하루에 한 번은 꼬옥 끌어안고, 매일 아침 잘 잤어?’ 인사해주고. 가끔 장난을 치는 일은 있어도, 결코 장난으로 네가 싫어라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꿈속의 오이카와는 응,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동자가 상상을 하는 듯 조금 먼 곳을 바라봤다. 꿈속의 오이카와에게 기억 속 오이카와 얘기를 하는 것은 이걸로 3번째였다.

 

근데 처음에 왜 오이카와 선배라고 한 거야?’

혹시 누구로 착각한 거 아냐? 나랑 엄청 닮은 사람. 그것도, 성이 똑같은.’

재밌을 것 같은데. 한번 얘기해봐.’

 

두 번째 만났을 때 가볍게 내뱉은 그의 말에 카게야마는 잠시 그대로 굳어있었다. 말해도 괜찮은 걸까. 어쩐지 꿈속의 오이카와에게 기억 속 오이카와의 존재를 알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신은 없었다.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말하면, 말해버리면. 이 사람도 떠나가는 건 아닐까.

역시 이름까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 이외는 조금씩 말을 내뱉자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몇 년이고 옆에 있던 상대였다. 사랑한 상대였다. 기억이라는 주머니에서 꺼내서 가져오는 오이카와의 존재는 너무나도 알싸하니 달콤하면서도, 약간 빛이 바래 있었다. 간혹 기억이 애매한 때도 있었다. 애초에 카게야마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추억담을 나눌 때도, 오이카와가 기억의 빈 구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해주곤 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채워줄 수 없었다. 그저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테라스의 2인용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자신의 얘기에 집중해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홍차 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잘 웃고, 상냥하고. 옛날부터 주변에서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었어요.”

, 그거. 나랑 똑같네.”

……. 배구도 굉장히 능숙하고. 서브가특히나. 그 서브를 배우고 싶어서, 중학교 때 그 뒤를 그냥 쫄래쫄래 따라다녔죠.”

 

오이카와의 가벼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내뱉었다.

 

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진학했는데, 시합에서 만났어요. 시합 때 제대로 지고 나서, 다음에는 이겨주겠다고. 꼭 이겨주겠다고 다짐했어요.”

헤에정말 배구 잘했나 보네. 현직 배구 선수를 이길 정도면.”

. 현 내에서, 최고의 세터였죠. 지금도 제게는 최고이고.”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보며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기억 속 오이카와에게는 한 번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부끄러웠고, 뭔가 조금 간질거렸으니까. 항상 자신의 마음의 첫 번째는 오이카와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 등을 따라잡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은 뒤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손등을 슬쩍 매만졌다.

 

귀엽네, 토비오.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 지금도, 여전히.”

같은 얼굴에, 같은 이름에,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한테도 반하는 거 아냐?”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내뱉은 말에 카게야마는 웃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두려웠다. 기억 속 오이카와 대신, 꿈속 오이카와가 채워가는 주머니가. 눈앞의 오이카와에게 말할수록 기억 속 오이카와가 빠져나가서, 꿈속 오이카와로 채워진다. 말하지 않으면 될 텐데. 하지만 그러면 또, 당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당신과의 기억이 흩어지고 만다. 카게야마는 괴로웠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저 눈동자를 보며 얘기하고 싶다.

 

토비오, 토비오? 또 생각하고 있는 거야?”

, . 죄송합니다.”

됐어. ‘오이카와 선배에 대해서지? , 가끔 생각에 빠진 토비오의 얼굴을 뜯어보는 것도 재밌지만.”

얼굴너무 빤히 보지 마세요.”

? 귀여운데. 토비오쨩, 의외로 예쁜 얼굴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오이카와는 손을 매만지던 곳에서 더욱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이 카게야마의 볼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또한 장난이리라.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뒤로 당기며 피할 수 없었다. 날이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연하게 불이 지폈다. 포크 카레가 너무 달았던 탓일까, 입안에 단맛이 슬며시 퍼졌다

귀여워,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순간적이나마,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고 카게야마만을 바라봤다. 그 홍차 빛 눈동자가 아주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꼬옥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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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책의 일부입니다. 샘플도 아니고... 음.. 더이상 팔 생각은 없지만 전체를 공개하기엔
  넘 부끄러워서... 수정해서 케스 ? 카게른 ? 때 판매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엄청난 수정을 가할 예정입니다. (아마도...)
  지금 내용도 좀 수정할 부분이 보이는데(내용이 아닌 글씨 간격이나 기타 등등..) 귀찮아서... 죄송합니다......ㅠㅠ...흑...

오이카게 교류회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ㅠㅠㅠ 오이카게는 역시 세계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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