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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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산 찻잔의 가장자리는 얼마 전 깨뜨려서 이가 나가 있었다.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꽃무늬의 딱 꽃잎 자리였다. 희고 깨끗한 배경에 민트색으로 모양 좋게 꽃이 그려져 있는 찻잔은 오이카와가 사온 물건이었다. 찻잔을 꺼내들다 말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가 나간 찻잔을 도로 제자리에 놓은 뒤, 재차 이미 꺼내놓은 티포트로 눈을 돌렸다. 찻잔과 세트로 맞췄던 티포트에도 민트색의 꽃무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꽃이 타고 올라오는 듯한 무늬는 티포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티포트 뚜껑에는,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얇은 실금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실금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티포트에도 군데군데 금이 새겨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질린듯한 표정으로 티포트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는 Made in Italy 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 깊게 파인 자국이 나 있었다. 뭘 어떻게 하면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조용한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포트와 찻잔 모두, 일주일 전 사 왔을 때 보였던 깨끗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뭘 어떻게 설거지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오이카와는 티포트와 찻잔 모두 조심스레 다시 집어넣었다. 달그락거리며 제자리에 자리를 잡은 티포트와 찻잔이 이상하게 추레해 보였다. 입술을 씹었다. 오후에 마시려고 기껏 준비해놓았던 향 좋은 커피도 다시 들여놓았다. 수북이 쌓였던 오후의 여유가 한 줌 바람에 흐트러졌다. 부엌 옆에 조그맣게 난 창에서는 햇빛이 흘러들어와 포근한 온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컵 하나를 들고 물로 한번 씻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런 날씨에는 미지근한 물도 차갑게 느껴지는 법이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손끝을 가볍게 털고, 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 얼음을 몇 개 동동 띄웠다. 속 끝에서 밀려 올라오는 짜증에 찬물을 들이붓듯이, 오이카와는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 시절 후배와 동거를 시작한 지 반년이었다. 고작 반년이었다. 아니, 반년이나 되어있었다. 왜 내가 토비오따위랑오이카와는 다시 입술을 씹었다. 촉촉하게 물이 묻은 입술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혀를 따라 얼음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상처가 나 있는 입안 점막이 따끔거렸다. 거친 키스 탓이다. 생긴 건 깔끔하게 생기고선, 그 꼬맹이는 하는 짓 하나하나 당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선 식탁 의자에 대충 앉았다. 엉덩이를 내리기만 하면 뒤에서 감아오던 손길은 오늘은 없었다. 얼음을 씹으면 씹을수록 얼음 조각이 상처 난 점막을 콕콕 찔렀다. 찔끔찔끔 느껴지는 아픔은, 제 입술을 휘어잡으면서 삼킬 듯이 키스하던 토비오를 떠올리게 했다. 오이카와는 남은 물을 전부 들이켰다. 빈 컵에는 몇 방울의 물이 바닥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난방이 돌지 않는 방 안에는 시린 한기가 천장까지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벼운 스웨터만 걸친 몸을 떨었다. 토비오가 없을 때의 집은 사람이 없는 집같이 냉랭했다. 그렇게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집으로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애초에 오이카와는 이곳을 이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년 전부터 그에게 이곳은 토비오가 있는 곳에 불과했다. 제 몸이 이곳으로 돌아와도, 밤이면 이 집에 있는 침대에서 몸을 부대껴도 매번 이곳에 있는 저가 낯선 오이카와였다.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질린다는 건 어디에 질린단 말이었을까. 반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상조차 모호했다. 동거를 시작한 것도 토비오가 귀찮게 굴어서였다. 토비오를 안고 나서 집으로 가는 오이카와에게 귀찮지 않냐며, 그냥 같이 살아요. 혼자 살기엔 넓은 집이니까. 귀를 붉히면서 그렇게 말한 건 토비오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인 것밖에 없었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정을 두지 말자고 정한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만든 것도, 집이 아닌 장소로 대하자고 정한 것도, 토비오가 없는 이곳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것도 오이카와였다. 언제든지 토비오떠날 수 있는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씨, 우리 해요.”

뭔 소리야, 이 꼬맹아.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오이카와는 제 가슴팍에 들러붙은 토비오를 힘들여 떼어냈다.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와 같이 볼을 붉힌 고등학생의 얼굴을 하고선, 이 꼬맹이는 가끔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토비오는 이마를 찌푸리고선 오이카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일부러 열기를 담은 한숨을 근육 선을 따라 흘려보내면서, 토비오는 낮게 말했다.

겨우 2살 차이잖아요. 엄마 젖 더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나한테는 꼬맹이야. 당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초저녁부터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건 싫어.”

태양도 멀쩡히 떠 있는 시간대였다. 가을이라 날이 저무는 게 빠르다고는 해도 오후 5시 반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몸을 밀착하고 있는 두 명의 옆에선 석양빛이 붉게 바닥을 물들였다. 넓은 베란다 바깥에서 홍차 빛으로 물든 석양이 스멀스멀 저물고 있었다. 토비오는 한번 밖을 바라본 후,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뭐라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딱 어린애였다.

꿍얼거리지 말고.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 난 이따가 나갈 거니까.”

오이카와는 제 복근을 만지기 시작한 토비오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단단한 손목을 힘주어 잡자, 토비오의 손이 아쉬운 듯이 복근에서 떨어져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디 가는데요?”

말했잖아. 여자친구 친구들이랑 만난다고.”

늦게 오나요?”

늦게 올 거야.”

자고 올 거에요?”

…….”

자고 와요?”

토비오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검고 푸른 눈동자는 중학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오이카와만 담고 있는 눈동자를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가렸다. 가린 손을 꼭 잡은 토비오는, 얼굴을 움직여 오이카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토비오와 키스를 하고 나면 입술이나 입안 어딘가에는 꼭 상처가 나곤 했다. 왜일까, 오이카와는 알지 못했다. 거친 키스 때문이겠지. 그래서일까, 상처가 따끔거릴 때면 토비오가 떠올랐다. 대답이 없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토비오는 몇 번이고 훔쳤다. 조용한 거실에서 촉촉한 소리를 울리면서, 한번 떼었던 복근에 다시 손을 옮겼다. 근육의 모양새를 따라 손가락이 흐르고, 그 손이 이윽고 바지 버클에 닿았을 때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귀를 꼬집었다.

아얏,”

그만하라고. 밤늦게는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거에요?”

돌아올 거야.”

알았어요.”

토비오는 다시 한 번 키스하곤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가 닿았던 곳이 화끈거렸다. 석양은 금세 져버린 걸까. 베란다에는 수명이 다해 깜빡이는 전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깜빡, 깜빡. 그 움직임에 따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으면 토비오의 입술의 감촉이 살아나서, 혀끝으로 입술을 한번 훑었다. 눈을 뜨면 차가운 베란다에서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약속은 저녁 8. 곧 있으면 나갈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비어있는 컵에 다시 가득 물을 담았다. 속이 탔다. 감기에 걸리려나, 목에 뭐가 걸린 듯 불쾌한 이물감이 들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 이력을 살펴보면 여자친구의 이름이 가득했다. 토비오와는 몇 시까지 들어갈게.’ 같은 일상적인 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돌아올게.’ 한 마디면 충분했다. 서로가 그랬다. 돌아올게요, 토비오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제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토비오는 어디에 있든지 돌아올 것이다. 오이카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전 얼음 때문에 안 그래도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더 깊어진 느낌에, 이번에는 얼음을 조심스레 녹였다. 동그란 얼음을 혀로 굴리자 그때마다 차가운 물덩이가 입안에 고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토비오와 키스할 때처럼 입안에 고인 액체를 삼켰다.

키스도 해본 적 없는 거예요?

여자친구의 친구가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서 취했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키스는커녕 잠자리도 안 한 걸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여자친구를 포함한 친구들 모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소중한걸요, 아껴주고 싶어요. 어딘가의 바람둥이가 입에 담을 법한 대사를 흘린 뒤, 여자친구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젖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키스도, 잠자리도 모두 하고 있어요. 토비오랑. ,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여자친구의 갈색빛 눈동자가 좋았다.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 평소엔 여드름 하나 없는 피부인데 웃을 때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사귄 지도 꽤 됐지, 이제 1년이던가. 오이카와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건 토비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토비오는 오이카와에게 단 하나만 물었다.

오이카와씨는 제 거 맞죠?”

뭐라는 거야.”

제 거 맞잖아요. 그쵸?”

그러더니 당돌하게 입술박치기를 해오는 토비오를 반강제로 떼어놓은 뒤,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누구 것도 아닌데. 애초에 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아무 사이가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여기에 있잖아요. 지금 저랑.”

토비오 웅변학원 다녔어? 꼬맹이가 별의별 말을 다 하게 됐네.”

웅변이 뭐에요?”

……….”

 

여자친구랑은 하지 않는 키스와 잠자리를 토비오와 하고, 집도 아닌 이곳에 가장 맘에 드는 티포트와 찻잔을 두고, 토비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히터도 안 틀고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뭐 하자는 건지.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어찌하고 싶은 걸까.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도, 해가 지고 또 달이 뜨면 오이카와는 이곳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토비오를 안고, 그 입술에 키스하고 밥을 같이 먹고. 좋아하는 건 여자친구였다. 소중하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오이카와의 몸을 만지고 그 귓속에 혀를 집어넣는 것도 토비오였다.

뭘 하고 싶은 걸까.’

중학교 시절 후배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자기는. 맘에 드는 찻잔과 티포트를 설거지하다가 박살 내는 후배와 왜 여태껏 같이 살고 있는 걸까. 둘의 관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올게.’ 한마디만 하지 않으면 이 집도 아무 쓸모 없는 허물이 된다. 그런데도 오이카와와 토비오는 동거를 하고 있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이카와가 생각하기에, 저와 토비오의 관계는 다 마신 컵 속의 물 한 방울이었다. 서로 간에 나눌 것이 조금도 없는데도 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물 한 방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제 증발할지 모른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컵 속의 물 몇 방울은 말끔히 사라져있을 게 분명하다. 그 몇 방울의 물을 구하며 키스를 하고, 타액을 넘기고, 밤을 보내고 나면 질려버릴지도. 그때까지만은 토비오와 함께여도 좋으리라. 가끔 수컷처럼 욕망의 눈동자를 번뜩이는 녀석의 놀이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어가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는 토비오를 기다렸다. 왜 하필 토비오일까, 그건 오이카와가 굳이 묻지 않는 질문이었다.















바다에 빠져버릴까.

 

 

 

 

 

 

 

 

 

바다라는 건 무섭잖아.”

왜요?”

가끔은 잡아먹힐 거 같거든.”

 

- 시원한 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0월 말의 모호한 날씨에 바다라니, 애초부터 이상했다. 추운 것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약간 쌀쌀한,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날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이카와씨의 제안이었다.

바다에 갈까.’

그 말만 들어도 코끝에 소금 냄새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혀끝에 퍽퍽하게 소금이 묻었다. 왜요? 반문해봤자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에 나와.’ 라고 통보식으로 말할 게 뻔한 사람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씨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좋아 혰지만, 예쁜 옷을 구경하거나 희귀한 소품들을 사 모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 간다고 한다면, 글쎄. 바다를 구경한다기보다 예쁜 색을 띠는 조개를 모으거나, 근처 음식점에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빙수를 사 먹거나. 그 정도의 소일거리만 하고 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끔 오이카와씨는 바다에 가자고 조르곤 했다.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파도나, 귀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갈매기 소리 등바닷가에 서 있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운동화 속 양말까지 다 젖을 정도로 물속에 잠긴 적이 있지만, 이렇다 할 물놀이를 한 적은 딱히 없었다. 어쩌다 가게 된 동네 풀장에선 그렇게도 장난을 쳤으면서, 바다에선 오이카와씨는 점잖은 어른이 되었다. 애초에 저를 제외하고 보면 장난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째서 저에게만 그리도 짓궂은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바다는 오이카와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특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언뜻 동그란 지평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평상시와 달리, 슬쩍 물빛을 띠었다. 바다에 가자. 그렇게 말할 때의 오이카와는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오전 10.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가려니, 작년의 바닷바람을 떠올리고 다시 겉옷을 바꿔 입었다. 그대로 신발을 신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비오, 잠깐만.”

.”

어머니가 목도리를 들고 서 있었다. 검은색의, 털실로 짠 목도리. 끝 매듭의 올이 서툴게 묶여있었다. 몸을 돌려 마주 보자 어머니가 빙긋 웃어 보였다.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침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안을 휘어잡는 날씨였다. 어머니 양 볼에 말갛게 홍조 빛이 돌았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은, 다음 주인데요.”

, 알고 있어. 어제저녁에 완성했거든. 얼른 주고 싶어서.”

말간 볼을 소소하게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내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아직 새것의 섬유 냄새가 남아있는 털실이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털실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 따뜻한 온감이 퍼졌다.

. 잘 어울려.”

……, 감사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감사인사를 내뱉을 땐 입을 삐죽이게 된다. 어릴 적에 자주 지적받던 나쁜 버릇이었지만, 어머니는 이제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웃으며 대답해주곤 했다. 그 덕분일까. 한 박자 늦지만, 제대로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입이 되었다. 목도리에 파묻힌 탓에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일 축하해다시 말했다.

올해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네.”

올해12월인데요.”

바보. 생일부터가 내년인 거야.”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볼을 한번 쓰다듬었다. 차갑고 주름진 손끝이 부드럽게 볼을 왕복했다. 검은 눈동자 끝을 조금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다시 천천히 미소 지었다. 30. 나이의 앞자리에 3이 붙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저 카게야마 토비오일 뿐인데. 이걸 그 사람은 벌써 2년 전에 겪은 걸까. 그 사람 생일 때는 어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같이 보냈는데도, 그와는 벌써 몇 년이나. 몇 년이나앞자리 숫자가 1일 때를 넘어, 2일 때를 지나, 3일 때인 지금에 와서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거리에 있었고,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는가 하면 숨 막히게 뜨거운 스킨십을 할 때도 있었다. 30살이 훌쩍 넘은 그도 여전히 내겐 오이카와씨일 뿐인데. 나이가 들면 관계는 언젠가 변하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있는 감정도.

다녀올게요.”

목도리는 따뜻했다. 늦지 말고, 라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대답은 벌써 몇 년째 들어온 대답이었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볼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까슬까슬하던 손끝이 떠올라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늦잖아.”

오이카와씨야말로 집 앞이라고만 했지, 집 앞 카페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어쨌든. 늦었으니까, 토비오가 커피 사.”

오이카와씨는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앞에 나와 보니 평소에 기다리던 장소에 오이카와가 없는 걸 알고서, 급히 연락했다가 이런저런 골목길을 찾아보느라 고생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애초에 애매하게 집 앞이 아닌 카페라고 했으면 헤맬 일도 없고, 늦을 일도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가 마시던 커피는 거의 다 마신 뒤라 바닥이 보였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카페 안은 포근한 온기와 초콜릿 시럽 향기가 가득했다. 이른 시간의 카페는 손님이 별로 없는 터라 오이카와를 몰래 훔쳐보는 여성들도 없었다. 밝은 갈색빛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오이카와는 어딘가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조금 더 짧게 잘라 정돈된 머리는 카페의 브라운 조명에도 부드러운 홍차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는 제가 먹던 초콜릿 케이크의 마지막 한입을 내 입에 쑥 집어넣더니, ‘토비오쨩도 먹었으니까, 공범.’ 툭 내뱉었다. 입안에 퍼지는 촉촉한 단맛을 느끼면서 무슨 공범이요? 물었더니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였다.

초콜릿 케이크 살인사건.”

뭐라는 건지.

 

 

 

전철을 타고 1시간 반, 버스를 갈아타서 2시간. 도보로 걸어서 20분을 지나고 나면, 길 건너로 넓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걸어오는 동안 잔뜩 식은 몸을 바닷바람이 동그랗게 휘감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손에는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입속에서는 아직도 초콜릿 향기가 남아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짠맛, 혀끝에 맺힌 단맛. 바람이 센 탓에 눈동자 끝에 망울망울 달린 눈물까지. 최악이었다.

무슨 생각해?”

모래사장 한가운데까지 걸어오고 난 뒤, 오이카와씨는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 차가운 귀를 매만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순간 스치고 이내 오이카와 손에 있는 온기가 귓바퀴를 통해 이동했다. 오이카와의 손에도 남아있던 습기가 귓불에 닿아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심장이 펌프질했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몸을 덮쳐 손끝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마침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요.”

맞춰 볼까? 오이카와씨 생각했지?”

……

저런 말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몇 년 동안 배운-라기보다 이와이즈미씨에게 배운-방법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채 연신 파도만 바라보고 있자, 오이카와씨는 문지르던 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건방져.”

이내 귀에서 손을 뗀 오이카와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흐렸다. 몇 가지의 물감을 섞은 듯한 회색 하늘에는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파도, 젖어드는 모래가루, 가끔 풍기는 참기 힘든 소금 냄새. 몇 번이고 오이카와와 왔던 바다였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얀 거품이 일다가 가라앉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이질감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 다음 주인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맑은 홍차 빛 눈동자는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흰 피부가 바닷바람을 맞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32년이랑, 30. 겨우 2년이네.”

겨우 2. 겨우 2년인데도, 그는 항상 지나치게 컸다. 그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2년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오이카와 씨만큼 자라면, 오이카와는 이미 그만큼 앞서 걷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이카와의 등은 영원히 내 앞에 존재했다. 그런 2년을 앞서 보내고 있는 오이카와는 33살이 되는 내년 1, 배구선수로서 은퇴한다. 33. 운동선수로서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였다. 선수 생명은 길어봤자 30대 후반까지니까. ‘나이라는 숫자 앞에 3이 붙은 시점에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도 30살이 된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리라. 그는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국가 대표 세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생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허리 문제로 받고 있던 물리치료는 은퇴 후에도 받는 듯했다. 이렇다 하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높은 강도로 오래 지속한 운동 때문인 것을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은퇴하는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보여도, 그쯤은.

 

바다는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집어삼킬 거 같잖아. 통째로.”

오이카와는 쓴 초콜릿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바람이 한차례 불어 모래사장이 흔들거렸다. 눈앞에 흩날리는 모래가루가 싫어서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중 제일 큰 파도가 밀어닥쳐 와, 운동화 코끝까지 젖었다.

젖어봤자 운동화 코끝인데요.”

그렇게 방심하다간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힌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열기를 품은 손 두 개가 만나 얽히고, 매만지다가, 이내 마주 잡았다. 기분 좋은 온기가 주머니 속에 가득했다. 딱 손 두 개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그 주머니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하게 뭉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세게, 조금 힘껏. 그 대신 그의 단단한 손을 꽉 붙잡았다.

토비오쨩. 몇 년까지 있을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이고 같이 있었는걸요.”

내일이면 헤어지게 될지도? 갑자기 오이카와씨가 사라지거나, 토비오쨩이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애초부터 약속 없는 관계였으니까.”

약속은커녕, 그 어느 것으로도 묶이지 않은 관계였다. 그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잡고 있는 이 손도, 어느 한 쪽이 풀어버리면 다시 붙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나도. ‘그럼, 안녕.’ 중학교 졸업식 날 들었던 그 말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걸로 아예 끝일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벚꽃 잎 피어있는 봄날은 아닐지라도, 안녕이란 말은 머릿속에 그 장면을 자동 재생했다. 그곳이 푸른 바다가 피어있는 바닷가라 할지라도, 안녕은 그대로 안녕이었다.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지금까지처럼 하루하루 계속될지도 모르죠.”

있지, 토비오쨩. 같이 바다에 빠져버릴까.”

싫어요. 춥잖아요.”

거절의 이유가 그거야?”

올해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어머니가 그랬는걸요.”

……. 그러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토비오쨩은 착한 어린이니까.”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찬바람 사이에서 미소가 슬쩍 흐려졌다가,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르게 굽은 호물선이 작은 얼굴에 피었다. 립밤을 열심히 바르는 오이카와의 입술은 겨울에도 얇은 주름이 예쁘게 남아있었다.

바다에 빠지면 잡아먹히는 거 아니었나요.”

잡아먹히는 게 나을지도, 라는 생각을 했거든.”

이대로 잡아먹히면너도, 나도. 전부 바다 탓으로 하면 되잖아. 바다, ..에서. 토비오쨩이랑

오이카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향한 시선 끝에는 젖은 모래가 어느샌가 말라 있었다. 사이로 빼꼼, 작은 조개가 묻혀있었다. 오이카와가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이젠 거의 아플 정도의 악력이 심장까지 조이는 느낌이었다. 바다 안에서, 오이카와씨랑. 이것도 저것도 모두 바다 탓으로 하고 빠져버리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퇴도, 나이도 없는 바닷속에서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다른 세상인 것처럼 산다면. 시간이 지나 점점 흐려질 것들을 걱정하지 않은 채바뀌지 않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오이카와씨의 숨소리, 눈동자, 흰 피부, 목소리 같은. 생각만 해도 목 끝까지 뜨거워지는 오이카와씨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2년뿐인걸요. 저도 금세 32살이 될 거에요.”

그럼 난 34살이잖아!”

그땐 저도 금세 34살이 되니까요.”

36.”

“2년씩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2년뿐인걸요.”

“2

오이카와는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2년이라,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눈을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의 경계는 하늘과 맞닿아 뿌옇게 흔들거렸다.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는 항상 이질감을 주었다. 이 바다에 빠진다면, 말 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히고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세찬 바람 소리만 가끔 이명처럼 들렸다. 추웠다. 지독하게 추웠다. 오이카와와 연결된 손을 제외한, 전신이. 바다는 춥잖아요, 우리 바다는 피하는 거로 해요. 가끔 찾아와서 몰려드는 파도를 보고, 예쁜 조개를 찾아서 줍고, 여름에는 얼얼한 빙수를 먹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2년은 금방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약속 없이 그저 질질 끌고 있는 이 관계도 어느 정도는 약속이란 게 생길지도 몰랐다. 굳이 말로 하는 게 아닌, 지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놓지 않고 있는 손처럼. 그때가 오면 바다엔 더는 오기도 싫어질지도 몰라요. ‘바다에 빠지자고? 싫어, 춥잖아라고 오이카와씨가 먼저 말할지도 몰라요. 그때쯤엔그때쯤엔, 말로 하는 약속을 해요. 그땐 저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이카와씨. 저랑 사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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