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어서 시작한 글. 하지만 여전히 지루함 주의만...

* 키타이치 시절의 오이카와랑 카게야마입니다.









연애를 가르쳐 주세요.


 

 


 

지독한 겨울이었다. 아프고 아파서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조그만 볼 안을 맴돌고 나간 바람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아팠다. 이곳저곳이 아팠다. 후우 내뱉는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추워?” 근처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돌렸다. 습관과도 같았다.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눈을 맞추고, 한번 깜빡. 그림으로 그린 듯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도 습관인 걸까,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진득하니 녹아내린 설탕이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니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이카와는 짙은 남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덜미에 두른 목도리의 색이 썩 예뻤다. 올리브색, 이라고 하나. 저런 걸. 카게야마는 제 목에 둘린 검은색 목도리를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내쉰 입김을 한번 바라본 뒤, 오이카와가 손을 잡았다. 꺼끌거리는 손바닥. 오늘도 이 손에서 몇 번이고 그림 같은 서브가 쏟아져 나왔다. 살며시, 마주 잡으면. 오이카와는 저 달과 같이 눈을 굽혔다. 차갑네. 중얼거리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모르고 시작한 연애는 힘겨웠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감정의 정의도 제대로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고민이 될 즈음, 오이카와가 말했다. “토비오쨩, 나랑 연애할래?” 연애가 뭐에요? 묻는 나에게 오이카와씨는 그저 웃어 보였다.

연애? 연애는 있잖아

 

무슨 생각해?” 눈을 들어 앞을 봤다. 오이카와가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 . 무슨 생각하고 있어? 찌릿하게 등을 훑는 듯한 시선. 말끔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저를 비웃는 듯했다. 오이카와씨를 눈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시선을 틀었다. 어두운 길 가운데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약했다. 빛이 바람에 서서히 흔들거렸다. 그만하세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기어코 내뱉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그렇게 다가오는 거.” 결국 완성되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 오이카와는 목울대를 울리며 소리를 냈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까. 귀가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시리고, 아픈 귀가 그대로 얼어서 떨어져서. 오이카와의 목소리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녹는 귀를 바라보면 카게야마는 무슨 생각이 들까. 그 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까. 오이카와의 목소리로 녹는다면, 그렇다면.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이 아직도 차가웠다. “손잡고 있는 거 싫어?” 오이카와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밤이 그의 눈에 녹아있었다. 입김을 내뱉는 입술이, 보드라워 보여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늘로 두 번째였다. 머릿속에선 아뇨, 라는 말이 맴도는데. 정작 나오는 건 고갯짓뿐이었다. 그 대신 손을 꽉 맞잡았다. 오이카와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안 그래도 쪼그라든 폐에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 천천히 내뱉었다.

 

토비오쨩. 우리 연애한 지 벌써 한 달이네.” 오이카와는 몸을 다시 되돌리더니 앞서 걸어나갔다. 그의 손에 이끌리듯 카게야마가 몸을 움직였다. 타박, 타박.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길 끝에 놓여있는 좁은 길가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붙을 만한 너비였다. 어깨에 닿은 오이카와의 단단한 팔. 옆모습조차도 다시 보게 만드는 사람. 진한 홍차 빛의 눈동자에는 카게야마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저 시선 끝에 있는 건 무엇일까. 카게야마는 가로등 불빛이 부서지는 한가운데서 그런 것만 생각했다. “한 달, 이네요.” 그 말을 나지막이 따라 한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찬 바람에 몇 번이고 한 심호흡 때문일까. 떨리는 목소리가 힘겨웠다. 오이카와가 낮게 웃었다. 묘한 웃음소리였다. 카게야마와 둘이 있을 때만 내던 그의 목소리. 뱃속을 훑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 해보니까 어때?” “연애요?” “. 어땠어? 오이카와씨랑 보낸 한 달.” “, 모르겠어요.” “연애를?” “…….” 카게야마는 숨을 참았다. 거리에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연애를. 모르겠어요. 오이카와씨와의 연애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꾸욱 잡았다. 저릿하게 퍼지는 아픔에 읏,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건 달 뿐인데. 밤이 길었다. 아플 정도로 길었다. 밤이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뱀처럼 타고 올라왔다. 그 목소리로, 눈길로, 손으로, 달콤하게 끌어안는 몸으로. 오이카와가 손을 끌어당겨서 카게야마는 그 몸에 폭 안겼다. 오이카와에게 안긴 카게야마의 몸이 떨렸다. 오이카와에게 안기는 감각은 푸근하면서도 싸늘했다. 그 긴 팔이 카게야마의 등을 낚아채듯 감싸 안았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의 남색 코트뿐이었다. 눌린 팔 안에서 숨이 막혀왔다. 시야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카게야마는 그냥 눈을 감았다. “토비오쨩. 나 좋아해?” “아시잖아요.” “. 알면서 묻는 거야.” “좋아, 해요. 잘 모르겠지만. 좋아해요.” “뭐야, 그거?”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오이카와에게 낚아채여서, 갈고리로 뜯기듯이.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물어봤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과 같이, 졸졸졸 흘러 넣었다. 나 좋아해, 토비오쨩? 그 말을 들으면 온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카게야마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오이카와가 끌어당기는 대로. 좋아해?

 

. 나도,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토비오쨩.” “거짓말하지 마세요.” “우와, 너무한다. 오이카와씨 의심하는 거야?” “믿는다고 해도, 거짓말이니까요. 거짓말은 믿기 싫어요. 믿어봤자 거짓말이잖아요. 서브 알려주겠다는 오이카와씨 말처럼.” “으응오이카와씨 거짓말은 안 하는데? 항상 진심이야. 서브는 알려주지 않을 거니까 싫다고 말하는 거고,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말하고.” 졸졸졸 흘러들어오는 말의 물방울은 귀 안을 가득 메웠다. ,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가 거짓말 잘한다는 거. 쿠니미한테 캐러멜 사탕 사준다고 해놓고 우유빵 사주고, 이와이즈미씨한테 안 한다고 말해놓고 사귀지도 않는 여자 선배랑 키스하고. 저랑 연애한다고 해놓고, 저를 먹어버릴 생각만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사실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거짓말은 믿지 않거든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도릿짓했다.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턱을 두었다. 무거워진 머리에 카게야마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나 이렇게 신뢰가 없었어? 토비오쨩, 나 좋아한다면서 안 믿어주고. 오이카와씨 서운한데?” “믿는 거랑 좋아하는 건 다르잖아요. 좋아하지만 오이카와씨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나 좋아해? 토비오쨩.” “왜 자꾸 물어봐요. 좋아한다니까요?” “나랑 하는 연애, 좋아?” “모르겠어요.”

 

오이카와와 하는 연애부터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애초에 얘기했던 것은 한 달 뿐이었다. 우리 한 달만 연애해볼까? 그 한 달이 지나면 뭐가 있는 걸까. 자신에게 짜증만 내던 오이카와가 눈에 띄게 상냥해진 것은 연애하기로 한 때부터였다. 토비오쨩, 다정한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의 달콤한 목소리. 설탕을 졸이면 그런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걸까. 정성스레 모양이 예쁜 각설탕만 골라서, 몇 시간이고 졸인 시럽의 맛. 한 달이 지나면, 한 달이 지나면. 카게야마는 매일 밤 그것만을 생각했다. 왜 한 달일까? 한 달이 지나면 더는 오이카와씨의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걸까? 한 달이 지나면오이카와는 더는 카게야마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 ✤ ✤

 

 

카게야마, 이거. 네 거지?” 이름이 불려서 고개를 돌린 곳에는 쿠니미가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검은색 목도리가 낯익었다. 이미 많은 부원이 옷을 갈아입고 나간 한적한 부실에서, 손이 느려서 여태 나가지 못한 카게야마에게 쿠니미가 말했다. “저기 떨어져 있던데.” 쿠니미의 손이 오이카와의 사물함 근처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전날 오이카와가 멋대로 뺏어간 목도리였다. 카게야마의 집 앞에서 헤어질 때. 오이카와가 씨익 웃으면서.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니까, 오이카와씨한테 상 하나만 줘. 카게야마의 붉어진 귀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달콤한 감각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퍼졌다. 앗 하는 사이에 목덜미는 생경한 바람으로 뒤덮였다. 다 지나지 않은 겨울의 알싸함이 뒷목까지 덮쳤다. 그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에 카게야마는 뒷덜미를 매만졌다. 쿠니미가 뭐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끄덕,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뻗었다. 쿠니미에게서 건네받은 목도리는 차가웠다.

고마워.” “오이카와 선배랑 요즘 뭐 하고 지내는 거야?” “?” “요즘 묘하게 잘 지내잖아. 특히 둘만 있을 때.” “…….”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목도리를 잡은 후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목도리를 따라서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쿠니미에게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쿠니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적. 조용해진 부실. 이미 쿠니미와 카게야마를 빼곤 모두 돌아간 후였다. 킨다이치가 밖에서 쿠니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돌아가는 것이 요즘의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카게야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즈음 카게야마의 옆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그것도 한 달째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한 달, 연애해볼까. 했을 때부터 날을 세었다. 어째서일까.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로 며칠째. 저절로 계산이 됐다. 그것이 오늘로 꼭 한 달이었다. 오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 달 전만 같았다. “그래. 알았어.”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목도리에서 손을 놓았다. 쿠니미의 손이 떨어진 목도리가 무거웠다. “내일 보자.” “. 내일 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쿠니미는 부실을 나갔다. 덜컥, 문고리 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귀 안에서 울렸다. 오이카와의 달콤한 물방울로 가득 찼던 귀는 어느새 말라버려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고, 시린 공기 속에서 얼어서 떨어지면. 오이카와는 그 귀에 속삭여줄까. 귀를 녹여줄까. 형태도 사라질 정도로, 달콤한 시럽으로 녹여줄까. 카게야마는 목도리를 둘렀다. 귀까지 덮이게 꼭꼭 싸매고, 그 목도리에 고개를 묻었다. 오이카와의 냄새.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나던 냄새가 카게야마를 채웠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좋아해요. 말하면 말할수록 떨어져 나가는 귀가 아픈데. 또 말하지 않고는 못 버티니까. 카게야마는 눈을 꼬옥 감고, 다시 뜨고. 몸을 움직였다. 밖에서 오이카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카게야마를 기다리지 않는 오이카와가.

 

 

✤ ✤ ✤

 

 

체육관 밖은 한산했다. 오후 연습이 끝나고, 손이 느린 카게야마가 나오면 항상 이랬다.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동아리 홍보지가 벽에서 바람결에 파라락 흔들렸다. 목도리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후,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흘러내린 가방을 다시 고쳐매고, 목도리를 여미고, 발을 내디뎠다. 체육관 근처, 교사(校舍)에서는 또 떨어진 곳이 한곳 있었다. 크게 자란 고목(古木) 아래가 그곳이었다. 키타이치 중이 자랑하는 그 나무는 500년도 더 됐다고 하던데. 카게야마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한 숫자는 쥐약이었다. 오이카와와 연애한 한 달은, 그렇게도 잊히지 않았는데. 여름에는 꽤 장관이 펼쳐지는 그 나무 아래는 여자 선배들이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큰 잎이 그늘을 만들고, 햇볕에게서도.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가려주었다. 결국에는 다 보이는데도, 여자 선배들은 뭐만 하면 그렇게 그곳을 찾아갔다. 겨울이어서, 잎이 모두 사라진 가지 아래는 오늘도 여전히. 그 옆을 지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 선배였다. 이와이즈미가 언젠가 했던 말이, 카게야마의 귀에 떨어졌다. “바보카와, 너 아무 여자하고나 키스하고 다니지 마.” “어어? 이와쨩 혹시 봤어? 몰래 훔쳐보다니 변태!”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여기저기 이상한 짓하고 다니지 마.” “으응알았어. 슬프지만!”

거짓말쟁이. 오이카와는 거짓말쟁이였다. 거짓말은 믿지 않았다. 믿어봤자 진실이 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믿고 싶어도, 진실이 되길 원해도, 한 달을 믿어도 거짓말이니까.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이 달과 같이 휘었다. 오이카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모르는 여자 선배와 고목 아래에서 키스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그저 바닥을 보면서 지나갔다. 귀가 시렸다. 떨어질 것만 같았다. 떨어져서, 툭 하고 떨어져서. 오이카와가 녹여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썩어버릴 텐데.

 

 

✤ ✤ ✤

 

 

토비오쨩.” 뒤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습관이었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한번 깜빡. 오이카와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트는 두르지 않고, 목덜미에 덮여있는 올리브색 목도리는 흐트러져있었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시간이었다. 정갈하게 자리 잡은 코를 한번 훔치더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오이카와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이 불어서 카게야마는 눈을 한번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폭 안았다. 눈앞에 오이카와의 셔츠만이 보였다. 가만히 숨을 쉬면 오이카와의 냄새. “오늘, 한 달째잖아.” “.” “그러니까 이제 연애 끝. 그렇지?” “.” “있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연애.” “…….”

연애. 연애인 걸까. 이런 게 연애인 걸까. 카게야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리끝에서 퍼졌다. 밤이 되면 또,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몸을 감아온다. 발끝에서 시작해서, , 가슴, 귓속까지. 이게 연애인 걸까. “연애는, 이상한 거 같아요.” “이상해?” “. 오이카와씨랑 하는 연애는, 이상해요.” “흐음. 그게 토비오쨩의 결론이야?” “그럼 오이카와씨는 어떠신데요?” “연애?” “. 오이카와씨의 연애는 어떠신데요.” 오이카와는 푸핫, 거칠게 부는 바람과 같이 웃더니 카게야마의 몸을 떼어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거친 손길에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흔들거렸다. 눈을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면. 어둑해지기 시작한 저녁 속으로 오이카와의 미소가 녹아들었다. 있잖아, 토비오쨩. 연애는그 입이 예쁘게 움직였다. 아까 여자 선배가 닿았던, 그 입술. 예쁜 분홍빛 입술이 카게야마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연애는 중독이야.” 중독. “하면 할수록 빠져들거든. 연애 자체에.”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 연애 자체에 사랑을 하는 거야. 연애 자체는 좋아할 수 있거든.” 대상은 상관없이. “그러니까, 있지. 토비오쨩. 나랑 연애할래?” 오이카와는 슬며시 카게야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람에 차가워졌던 카게야마의 이마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그것을 보고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웃어보였다. 당신의 입술은 독이었다. 내 몸을 옭아매고, 저 깊은 곳까지 떨어뜨리면서. 이곳도 저곳도 모두 녹아버려. 당신의 목소리는 독이었다.

한 달만 저를 사랑해주시는 건가요.” “한 달만 너를 바라보는 거야. 그리고 또 한 달, 또 한 달. 연애는 중독이니까, 하다 보면 토비오쨩과의 연애에만 빠져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오이카와씨는 거짓말쟁이인 거에요.” “? 너무하네. 오이카와씨는 항상 진실만 말한다니까? 진짜야.” “거짓말쟁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몸에 안겼다. 그 팔을 돌려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교복끼리 닿았다. 밤이 내리깔렸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좋아해, 토비오쨩.” , 떨어졌다. 귀가 떨어졌다. “나도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오이카와의 손톱에 긁혀서, 미소에 긁혀서 오늘도.

적어도 카게야마의 몸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진 할 수 있는 연애였다. 이렇게 또 한 달,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녹아내려 간다.









[오이카게] 오이카와의 벚꽃

*하이큐 글전력 주제 : 벚꽃 참여했습니다.

*지루함 주의입니다..

 

 

 

꽃놀이란 말을 처음 알았을 때. 카게야마는 정말로 꽃을 가지고 노는 놀이인 줄 알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꽃과 놀이라는 말의 결합이 의아했다. 꽃으로는 어떻게 놀면 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꽃놀이 갈까?” 라고 했었던 날은, 정말로. 카게야마의 안에서 꽃놀이라는 말이 이질적인 단어가 될 정도로 고민했었다. 저로서는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오이카와에게 답을 얻고자 찾아갔으나, 돌아온 대답은 맥빠질 정도로. 오이카와는 방금 핀 꽃처럼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바보, 벚꽃 보러 가는 것뿐이야.”

벚꽃. 벚꽃. 그 말을 되풀이할 때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이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 찼다. 벚꽃은 분홍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막상 떠오르는 것은 분홍색 일색이었다. 정면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아닌, 고스란히 퍼지는 햇볕. 따뜻한 공기 가운데에 퍼지는 약간은 차가운 바람. 그곳에 흩날리는 벚꽃잎들. 바람이 불 때마다 폭풍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퍼붓는 벚꽃잎의 홍수는 아름다운 공포였다. 모두 떨어지면 결국에는 엉성한 나무만이 남을 뿐이었다. 나무는 아주 짧은 순간 모두의 눈빛을 끈 뒤에, 결국에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나머지는 아주 긴, 긴 겨울 뿐이었다. 벚나무에게는 벚꽃잎이 없는 자신이란,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카게야마는 그걸 보는 것이 싫었다. 꺾일 때를 놓쳐버린 고목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는 져버리는 꽃잎. 언젠가는 사라져버리는 봄. 그런데도, 벚나무는 어째서. 매번 그다지도 꽃잎을 내버리는지. 제 몸을 모두 소멸시키려는 듯이. 그때만큼은 벚나무가 무서워 보일 정도로, 카게야마에게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모양은 무서운 신기루였다.

 

그래서일까, 오이카와와 가는 꽃놀이는 조금 두려웠다. 어쩌면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앞에서 모두 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그런 장면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이카와와 바라본 벚나무, 순식간에 바람이 몰아쳐서, 모두 떨어진 벚꽃잎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머리에도, 땅에도, 공기 중에도 온통 벚꽃잎으로만 가득해서. 그때 오이카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카게야마는 그것이 무서웠다. 오이카와는 어쩌면, 벚꽃잎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그 뒤엔 긴, 긴 겨울을 오이카와 혼자 보낼지도 몰랐다. 벚나무는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했다.

 

 

✤ ✤ ✤

 

 

, 아직 남아있네.”

그러게요.”

연습으로 바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서로 학교도 다르고, 연습시간도 달랐다. 같은 것은 둘 다 연습을 빠지진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겨우 잡은 시간은 벚꽃 만개기보다도 꽤 늦은 시기였다. 벚나무가 그득하니 늘어선 공원은 없지만,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공터는 그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어느 정도 떨어진 벚꽃잎이 바닥에서 흥건히 분홍빛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꽃의 잔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가 제 몸을 흔들어댔는지 알게 해줬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빈틈없이 피어있는 벚꽃 사이로 포근한 햇살이 쏟아졌다. 따스한 날이었다. 가쿠란을 입고 있는 몸이 조금 더웠다. 오이카와는 이미 세이죠의 재킷을 벗은 상태였다.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 연한 바람에 조금씩 흔들 흔들거렸다. 그 사이로 물 흐르듯 흐르는 벚꽃잎이, 한 방울. 두 방울. 오이카와 주변으로 떨어졌다.

 

덥지 않아? 가쿠란.”

조금, 덥네요.”

오이카와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항상 깔끔한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목 부근의 단추뿐만이 아닌, 나머지의 단추도 모두 풀었다. 그런 뒤 오이카와가 했듯이 가쿠란을 벗어 팔에 걸쳤다. 짙은 검은색의 가쿠란에 떨어진 벚꽃잎이 묘하게 눈에 띄었다.

토비오.”

.”

나 내일 졸업식인데.”

알아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오이카와는 졸업하고. 도쿄의 대학으로 가버린다. 어긋나기만 했던 시간을 겨우 맞췄더니 다시 어긋나버린다. 뭐가 아쉬운 걸까. 카게야마는 그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없는 미야기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없는 인터하이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제 영역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카게야마의 미간을 좁혔다.

 

뭘 안다는 거야.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내뱉은 뒤 미소 지었다. 화려한 얼굴에 꽃과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벚나무와 같은 사람. 당신을 보면 눈이 부셔서 모두 넋을 놓고 바라보지만, 무대 아래의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미소를 바라볼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도 결국에는 똑같으면서. 무대 위의 모습만을 바라보는 건 카게야마도 같았다. 온통 빛으로 가득 찬 등만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항상 큰 존재였다. 그가 서브를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벚꽃잎 폭풍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눈부셔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붙잡고 싶어서, 분홍색 시야 사이로 손을 내뻗으면 오이카와는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도쿄로 갈 거니까.”

.”

절대 따라오지 마. 알았지?”

……왜요.”

그러라면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거야. 여전히 귀엽지 않은 녀석이네.”

오이카와는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다. 따스한 햇볕으로 상기된 두 볼이 붉었다. 카게야마의 얼굴 또한 붉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가 뜨거웠고, 오이카와는 그 열을 느끼는 듯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봤다. 좁혀진 미간으로 인해 험상궂은 얼굴이 오롯이 오이카와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내뱉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놓여있는 오이카와의 손에 한 방울, 벚꽃잎이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봤다. 카게야마에게는 보이지 않는 벚꽃잎이 떨어질 듯 말 듯 흔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모아 그 벚꽃잎을 다시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다. 흔들, 흔들. 그 새끼손톱만 한 잎이 빙글빙글 돌면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어넣은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뭐하시는 거에요?”

? 벚꽃잎은 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오이카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떨어지기 위해 몽우리가 맺히고, 떨어지기 위해 꽃이 피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셔츠를 가만히 붙잡았다. 카게야마가 상상했던 그대로, 어쩐지 오이카와가 사라질 것 같아서.

도쿄로 가면 영영 안 오실 건가요?”

. 안 올 거야.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는.”

그렇게 혼자서 어디까지 가시려구요?”

글쎄. 다 떨어질 때까지?”

오이카와는 피식 웃음 지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놓였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손이 가르는 공간 사이로 벚꽃잎이 흩어졌다. 세찬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벚나무는 또 한 차례 벚꽃을 제 몸에서 깎아냈다.

오이카와가 셔츠를 붙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떼어내고, 그 몸을 돌릴 때까지. 카게야마는 울렁거리는 가슴에 어지러웠다. 언젠가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의 등이 분홍빛 시야 사이로 보이고, 오이카와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아직도 그 등이 커 보이는데. 당신은 아직도, 내게는 봄인데.

따라, 갈 거에요.”

…….”

따라갈 거라구요. 도쿄. 그러니까, 그때까지. 혼자 멋대로 사라지지 마세요. 기다리셔야 돼요.”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몸은 아직도 벚꽃잎을 내뿜고 있었다. 언젠가 져버릴 때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가만히 혼자서. 카게야마가 없는 도쿄에서, 그는 길고 긴 겨울을 보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조급하게 내뱉었다.

도쿄는 더 벚꽃이 많죠? , 같이 보러 가요. 꽃놀이. 그때는 오이카와 선배 시간에 맞출게요. 그러니까또 같이 가요.”

 


, 같이. 당신과 벚꽃을 보고 싶어요. 그때는, 당신의 손을 잡을 테니까. 나만 두고 져버리지 않게, 붙잡고 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길고 긴 겨울을오이카와의 겨울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오이카게] 봄비를 닮은 사람

 

 

 

 

오랜만에 맞는 봄비였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봄비는 3월 막바지에야 겨우 내리기 시작해서 겨울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바람을 잠재웠다. 부슬비라고 하던가, 이런 비를. 카게야마는 복슬복슬 흐르는 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검은 우산 아래서의 까맣던 손이, 확 노래지면서 비를 맞게 되었다. 손에 와 닿는 감촉도 없이 젖어갔다. 서서히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하는 손을 다시 끌어당겨 우산 아래로 옮겼다. 젖어버린 손을 타고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줄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연하게 부는 바람은 카게야마의 귀 뒷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

 

카게야마는 툭 내뱉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빗줄기 안에서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우산 안에서 맴돌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몸을 적시는 봄비. 누군가와 닮았다, 는 생각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조그맣게 보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글몽글하게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있어서 봄비는 생소한 존재였다. 아니, 생소하다기보다낯선 느낌이었다. 무섭게 쏟아내리는 소나기나, 여름의 끝없는 장마 같은 장대비나, 겨울의 거친 바람 속의 흩날리는 비가 아닌. 소리도 없이 몸을 적시는 봄비는 낯설었다. 모 아니면 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실한 카게야마에게는 낯설고. 또 어려웠다. 항상 봄비를 맞이할 때면 누군가가 생각났다. 벌써 이런 봄비 아래에서 그 사람을 생각한 것도 몇 년째였다. 이제는 조금 알 법도 한데여전히 어려운 그 사람은 카게야마에게 수수께끼였다. 눈앞에 흐르는, 느낌조차 없이 젖어드는 봄비와 같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에게 하나의 답 없는 문제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

 

비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등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세이죠 교복을 입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눈가는 찡그리고 웃으며 서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빗줄기 건너로 보이는 오이카와는 약간의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벌써 약간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우산을 꼭 잡았다. 검은색 우산이 약한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뭐해? 가만히 서서.”

여기서, 기다리라고.”

여기 말고 저기. 저쪽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카게야마가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멋들어진 카페가 눈에 보였다. ‘멋들어진이란 표현은 오이카와에게 배운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게 무엇이냐고 오이카와에게 반문했지만 오이카와는 저런 걸 말하는 거야라며 카페를 가리켰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말에 있어서는 오이카와가 더 능숙했기 때문에 그런 거냐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카페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 들어서면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사실 오이카와는 어디에 서 있어도 풍경을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사람이었다.

 

뭔가 저런 데 혼자 있는 건 거북해서요.”

하핫, 그런 무서운 표정 짓고 있으면 당연히 그렇지.”

뭐라고요?”

, . 인상 쓰지 말라니까? 인상만 안 쓰면 꽤 괜찮은 얼굴인데 말이야.”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우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연한 민트색의 우산은 세이죠 교복과도 어울려 오이카와의 흰 피부를 더욱 드러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의 우산 아래에 오이카와의 흰 손이 불쑥 들어왔다. 우산과 우산이 겹쳐 비가 묻지 않은 그 흰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오이카와가 픽 웃었다.

 

, 안 잡아?”

밖이잖아요.”

, 어때?”

 

오이카와는 으쓱하면서 그저 공기 중에 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잡았다. 우산끼리 맞부딪쳐 어느 정도의 충격이 우산을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으로 전해졌다. 오이카와의 무게였다. 약간 버거운 느낌이 들면서도 기분 좋은 무거움. 눈앞의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이 뜨거웠다. 부슬거리며 내리던 비는 어느새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봄비란 그런 것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시작되고, 저도 모르는 새에 그치고. 그러면서도 어느새 봄비에 함빡 젖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 ✤ ✤

 

 

카페 안에선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딸랑가벼운 종소리에 종업원들은 고개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카페 내부는 많이 북적이진 않았다. 다만 봄비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자주 앉는 그 자리만 고집하는 오이카와를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는 어디든 똑같을 텐데도, 오이카와는 매번 그 자리에 가 앉곤 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기억하려고라고 대답했다. 무얼 기억하고자 한 걸까. 오이카와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카게야마도 그에 대해서는 짚이는 점이 있었다. 정해진 자리에서 보는 오이카와는 약간 빛이 났다. 약간 노란 전등불빛이 몸에 닿아 부서져 흰빛을 뿜어냈다. 카페라떼를 마시는 손가락의 움직임, 눈의 움직임. 가볍게 내렸던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볼 때의 그 얼굴. 카게야마는 그 모든 것들을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모두 저 자리에서만 오이카와를 마주 본 덕이었다. 어쩌면 오이카와도 그런 의미였을지도 몰랐다. 그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지고, 주변의 풍경에 녹아드는 그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에게도 카게야마가 그런 모습일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토비오쨩은 언제나 먹던 거지? 나도 그걸로 주문했어.”

왜 항상 마시던 카페라떼 아니구요?”

비오니까. 가끔은 좋잖아.”

비가 오면좋은 건가요?”

. 비가 오면 같은 걸 마시고 싶잖아.”

…….”

 

카게야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얼굴에 볼그랗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운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오이카와는 자리에 앉더니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항상 보던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의자 뒤편은 통유리라서 밖이 그대로 보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로 비치는 가느다란 빗줄기에 눈이 갔다. 봄비는봄비는, 오이카와를 닮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봄비를 닮았어요.”

?”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말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놀란 것은 카게야마였다. , 하는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숙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말이야? 반문하며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길지 않아 카게야마의 얼굴이 다 가려지지 않은 것이 카게야마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오이카와는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어느새 좁아진 미간을 흰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머리가 밀리는 느낌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마주봤다. ? 말해봐, 토비오쨩.

 

저기, 그러니까.”

.”

봄비는, 언제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잖아요. 그칠 때도 그렇고.”

.”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런 기척도 없고. 그래서 괜찮나 보다, 하고 발을 내디디면 순식간에 젖어버려요. 봄비로. 전부.”

, 그렇네.”

 

오이카와는 약간의 웃음기를 지우고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빠질 만한 말을 내뱉었나 고민해봤지만 아무런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지 오이카와는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해도 되는 걸까, 하면 안 되는 걸까. 카게야마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등 뒤로 흐르던 봄비가 그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빗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눈에 얇게 봄비가 다시 보였다. 멈춘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적시고, 나무를 적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우산 위로 떨어져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오이카와 선배도. 어느 순간 저를 적셔서 이것도 저것도 다 오이카와 선배로 만들어버리니까. 저도 모르는 새에 모두 흠뻑 젖어서 말릴 틈도 없이 오이카와 선배로 가득 차버려서. 봄비를 닮았구나, 하고.”

…….”

 

오이카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조심조심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폈다. 화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알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던 머리가 순간 새하얘졌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하얀 피부가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입술, , 이마까지. 그 작은 흰 얼굴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카게야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오이카와는 갑자기 짜증을 부렸다.

 

으아아, 정말이지! 토비오쨩 진짜 바보야?”

, ?”

 

갑작스레 욕을 얻어먹은 카게야마는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한 번 머리가 새하얘졌다. 오이카와가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테이블에 풀썩 엎어졌다. 부드러운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가 보였다. 보송보송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는 만지면 너무도 부드러워 이 세상의 감촉이 아닌 느낌을 느끼게 했다.

 

바보 토비오쨩. 날 또 죽이려고?”

, 뭘 죽여요?”

맨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는 툭툭 내뱉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까 봤던 붉어진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잡고, 저도 몰랐지만. 어째선지 키스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제 얼굴에도 확확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째선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생각한 것을 오이카와에게 그대로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보드랍게 퍼지는 머리카락은 예쁜 빛을 띠었다. 빛이 부서져, 반짝반짝.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길을 느끼는 건지 머리를 살짝 틀어 옆얼굴을 보였다. 정갈한 옆모습이 카게야마의 눈길을 끌었다. 그 자세 그대로, 눈길만을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움찔, 몸이 떨렸다. 그 홍차 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신기한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의 볼은 약간 발그랗게 물들어 있었다.

 

토비오쨩, 건방져졌어.”

제가요?”

. 중학교 때보다, .”

, 런가요. 아니, 중학교 때도 건방지진 않았어요!”

 

카게야마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오이카와는 그에 화내는 기색도 없이 생글 웃어 보였다. 예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붉은 입술이 분홍빛 볼에 어울렸다.

 

너도봄비야.”

?”

봄비라구.”

…….”

 

카게야마는 아까 오이카와가 했듯이 서서히 얼굴이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이내 푹.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번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마주 볼 수 없었다. 심장이 이상한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밖에선, 오이카와 건너편에선. 벌써 그친 봄비가 햇볕을 받아 바닥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맑은 햇살, 바닥을 적신 비. 마치 당신처럼.

 

토비오쨩, 나 봐봐.”

싫어요

? 고개 들어보라니까?”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서서히 눈을 들었다. 오이카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다. 어딜 가나 풍경이 되는 사람이다. 햇살 아래에서도, 빗줄기 아래에서도, ‘멋들어진카페에서도. 그 풍경 속에 젖어드는 게 자신이 되길 바랐다. 온통 오이카와로 젖어서, 그 안에 살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이카와도.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에 놓였던 카게야마의 손을 깍지껴서 맞잡아, 쭉 자신에게로 당겼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몸이 오이카와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그대로, 오이카와는 가볍게 카게야마의 입술에 키스했다. 스칠 뿐인 키스였다. 바로 앞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코가 스쳐서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달콤한 향기였다. 약간의 민트향도 섞인, 오이카와의 냄새. 카게야마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따스한 기운이 그 안에서 피어났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바라보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도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생크림같이 말랑한 입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이카와도 또한,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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