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데이즈(Seven Days)

 

 

  




 

 

 

  겨우 하루 운동을 쉬었다고 오전 10시 즈음에야 눈을 뜰 카게야마가 아니다. 급하게 일본으로 돌아온 여파 때문이리라. 발목이 욱신거려 밤잠을 설친 탓에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로드 워크는 무리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기만 하는 발목을 슬쩍 바라보고 카게야마는 웃옷을 벗었다. 배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아침 겸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하고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은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이었다.

 

 

 

#3rd day

 

 

어디에 가서 식사할까 고민하다가 미야기에 도착 후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스 정류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전단지가 붙어 있던 게 생각났다. 전단지의 약도를 더듬더듬 기억해내 도착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만큼 건물이 깨끗했다. 볼 거라곤 논밭과 주택가, 몇 개 되지 않는 학교밖에 없는데 굳이 언덕 위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낮, 이런 애매한 시간에도 사람들은 테라스 혹은 창가 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가지를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매미 같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은 귀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카게야마가 입구에서 잠시 멈춰있자 멀리서 키가 작은 종업원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해준창가가 아닌2인용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였다.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메뉴 중에 카레는 단 하나뿐이다. 다행히도 돼지고기 카레였다. 자리를 안내해준 종업원이 떠나기 전에 카레를 주문했다.

고개를 들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다. 당연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이곳 미야기가 더는 제가 아는 곳이 아님을 인지했다. 가게 한쪽에 조그맣게 매달린 벽걸이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 시간에 하는 뉴스래 봤자 별 다를 게 없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TV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화면 하단에 쓰여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배구계 들썩오이카와 토오루 은퇴?

아직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는데요. 한창 인기를 끌면서 뛰어난 세터로 활약 중이던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몇몇 가까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개인적인 집안 사정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이카와 선수가 소속 중이던 A 팀은 아는 바가 없으며, 오이카와 선수의 은퇴를 승인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남아있던 계약 기간 등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배구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쿠니미가 말한 게 이거였구나.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카게야마는 금세 다음 뉴스로 넘어간 TV에서 눈을 뗐다. 주문하신 돼지고기 카레 나왔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종업원은 카게야마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조심스레 놓았다. 카게야마는 앞에 놓인 카레를 잠시 바라봤다. 이탈리아에서도 카레를 먹었다고는 하나, 항상 미야기에서 먹었던 카레 맛이 입 안 어딘가에 맺혀 있었다. 포슬포슬한 밥과 누런 빛깔의 카레를 섞으면 그 사이로 감자와 돼지고기가 보인다. 카게야마는 카레 한 입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카레 향기가 혀끝을 자극하고 익숙한 향신료 맛이 콧속에 가득 찼다. 한입 더 들어 올린 순간 카게야마의 반대쪽 의자에 누군가가 주저앉듯이 앉았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귀에 닿은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자칫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입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짙은 검은색의 양복이 보였다. 느슨하게 묶은 넥타이 뒤 셔츠는 땀에 적셔져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종업원이 제때 가져온 얼음물을 크게 세 번 들이마신 뒤 이마를 부채질했다. 그의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있다. 이와이즈미가 세게 내려놓은 유리컵은 얼음만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디였지. 외국에서는 잘 적응했고?”

이탈리아요. ……배구, .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시원찮은 대답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의 옷차림과는 달리 카게야마에게도 익숙한 미소였다.

다른 건 아직이라는 말이네.”

이와이즈미는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어렴풋한 눈길로 바라봤다. 여전히 짧게 자른 이와이즈미의 머리는 진한 검은색이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직선적인 눈빛을 피하고 입술을 삐죽이자 그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긴 후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겨진 미간도 익숙하다.

변한 게 없네, 너는.”

카게야마가 그런가요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거뒀다. 종업원이 다시 채워 넣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눈빛을 날카롭게 바꿨다.

오이카와냐?”

…….”

이와이즈미는 대답 없이 눈꺼풀을 내려놓은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을 내쉬곤 짜증 난다는 듯 머리 한쪽을 긁었다.

왜 그리 고집이 세냐, 너나 그 녀석이나. 누가 말했어?”

…….”

, 대충 알 거 같긴 하다만. 쿠니미가 킨다이치 둘 중 하나겠지.”

……!”

내가 말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거든.”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치 카게야마한테 네 입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쿠니미요.”

그럴 거 같았어. 킨다이치는 오이카와를 위해서라도 너한테는 말하지 않겠지.”

……이와이즈미씨.”

오해하지 마. 쿠니미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오이카와를 생각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 그렇다 해도.”

설마 쿠니미가 너한테 말할 줄은 몰랐다만.

이와이즈미는 정말 의외였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자신도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이탈리아가 아닌 이 곳 미야기에 있다는 것부터 쿠니미를 위한 변명은 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전화를 듣고 선택하여 이곳에 왔다. 오이카와로 인해 생긴 손등의 상처가 박동하며 통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앞에 놓인 유리컵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실내는 바깥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온도였다. 대지를 뒤덮던 여름은 어느 저편의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나직이 울리는 보사노바 노랫소리, 땀이 식은 이와이즈미의 이마와 미지근해진 카레.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봤다.

나도 얘기를 들은 건 그 녀석이 이미 결심한 후였어.”

.”

갑자기 낮에 불러제끼길래 평소처럼 시답잖은 얘기겠거니, 짜증 내며 나갔더니 웬 캐리어를 들고나오더라고. 벌써 미야기행 기차도 예약해놓고, 신변정리도 마무리 지은 상태로. 은퇴는 팀 감독한테만 말하고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뭐 감독한테 말한 걸로 이미 끝난 거지.”

이와이즈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듯 카게야마 앞에 놓인 카레에 시선을 두고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만나자더니 배구를 안 하겠다고, 해서 한 대 때려줄까 진심으로 생각했지. 뭐라고 중얼중얼하는데, 그때는 솔직히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오더라. 바보같이 그런 순간 아침에 서에서 봤던 살인사건 용의자 생각이나 하고. , 그럴 땐 희한하게 별 쓸데없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잖아. ,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었나? 하는. 넌 안 그러냐?”

카게야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인상을 찌푸리면 이와이즈미는 됐다, 짧게 말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근데 갑자기 그러더라고. ‘그래서, 배구 안 하기로 했어라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게 영 오이카와 그 바보 자식 같지가 않아서 한 마디 해줬지.”

 

그래. 너 이젠 행복해지겠네. 평생 행복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놈이더니, 이제 괜찮을 거 같네.’

 

그랬더니 그냥 웃더라고. 거기서 뭘 말할 수 있겠어. 기차 시간 다 됐다고, 가겠다고 하길래 잘 가라고 했지.”

…….”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여름밤처럼 싱싱한 빛깔로 빛나며 이와이즈미만을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저를 탓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이내 허탈하게 웃음 짓고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이 세계 속에 지겨운 더위는 없으나 절대 눈을 피하지 않는 카게야마의 눈빛이 이와이즈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 넌 어떻게 생각해.”

…….”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했어야 된다고 생각해?”

카게야마는 그저 이와이즈미만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 멍청이 오이카와한테, 너한텐 배구밖에 없으니 바보 같은 생각 그만두고 그리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너한테 배구는 그 정도였냐고?”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이렇게 괴로운 듯이 웃는 건 참 낯선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가 끝난 뒤 이와이즈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카게야마는 기억해내려 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네트 너머에서 시선을 교차할 때 그의 눈동자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것만을 기억해냈다.

난 그렇게 못해. 적어도 난 그러면 안 되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런가요.”

이와이즈미는 숨을 얕게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떨려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액체였던 카레가 뭉쳐서 식어있었다. 달콤한 냄새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넌 날 나쁜 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요.”

아냐, 상관없어.”

카게야마가 서둘러 대답한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상관없어. 그의 입에서 딱딱한 말이 단단한 어조로 튀어나왔다.

너한테 나쁜 놈으로 보여도 난 별로 상관없거든. 카게야마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

카게야마,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 상황에서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너라면.”

저는……,”

 

 

* * *

 

 

 

카게야마는 고등학교 시절 이용했던 로드워크 코스를 걸어 올라갔다. 아래로 투명한 냇물이 흐르는 짧은 다리 위, 봄이면 벚꽃으로 풍성한 공원지금은 연두색에서 올리브빛깔까지 다양한 색의 잎사귀로 물들어있었다, 식물 총 100종 내외의 작은 식물원을 지나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보다 더 높은 언덕을 오르면 평소 뛰던 로드워크 코스의 마지막이었다. 발목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었으나 햇볕이 내리쬐는 광선 탓에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왔다. 카게야마는 언덕 위에서 오후의 햇빛에 흠뻑 젖은 마을을 내려다봤다. 언덕 위의 풍향계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턱 아래가 간질거려 카게야마는 그쪽에 맺힌 땀방울을 거칠게 닦았다. 오이카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기억하는 건 그의 집뿐인데도 낯선 풍경에 뒤덮이면 그를 찾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를 감싸 안은 미야기는 카게야마를 다시금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카게야마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을 찾은 건 몇 년 만일까. 외양은 바뀐 게 없지만, 바깥에 둔 조경물이 늘어있었다. 5년 전에는 없었던 벤치와 나무가 체육관 입구를 바라보는 형태로 한두 개 놓여있다. 카게야마가 벤치에 앉자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서 악취처럼 매미 소리가 퍼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한 햇볕이 눈두덩을 온통 잡아먹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만약 오이카와가 불러낸 게 카게야마였다면. 카게야마는 금세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시작은 쿠니미처럼 갑작스러운 전화겠지.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한다. 수신음은 멈추지 않고 울린다. ‘오이카와씨라고 등록해놓은 화면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 바빠?

……아뇨.”

여보세요라고 받지 않은 카게야마도 그답지만, 오이카와의 물음도 꽤 의외였다. 항상 카게야마의 사정과 상관없이 제 용건만 말하던 오이카와가, 입술 사이로 작게 내뱉듯이 묻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문득 그가 평소와는 다른, 아주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이카와씨가 카레 사줄까.

. 좋아요.”

카게야마는 전화를 끊고 옷을 서둘러 챙겨입는다. ‘준비하면 나와라고 말한 오이카와는 대체로 늦는 때가 많았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도착했을 때 저가 없다면 이후 평생 오이카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되풀이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느꼈고’, ‘무의식적으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러낸 카레 집으로 들어간다. 평소 함께 식사하던 카레 집이 아니어서 카게야마는 몇 번 헤맨 뒤에야 찾아낸다. 어색하게 한쪽에 자리 잡고 가게에서 나오는 뉴스 라디오를 들으며 입구를 초조하게 바라본다. 이내 오이카와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평소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엷게 땀이 밴 피부에 흰 티셔츠와 면바지. 그의 뒤쪽으로 커다란 민트색 캐리어가 따라 들어온다. 카게야마는 캐리어를 바라보고, 오이카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아무렇지 않게 캐리어를 자리 뒤쪽에 두고 오이카와는 턱을 괴며 미소 짓는다.

카레, 시켰어?”

아뇨.”

? 여기 주문이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와 부드럽게 굽힌 눈꼬리. 아무렇지 않게 카게야마 대신 돼지고기 카레를 주문한 뒤 오이카와는 전 됐어요라고 말하고 주문을 끝낸다. 카게야마는 그것에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웃는 낯이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반짝인다. 카게야마는 아주 묘하게도 오이카와가 이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이카와는 제 앞에 놓인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신다. 아래로 내린 눈꺼풀은 살며시 젖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땀조차도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살포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린 뒤, 마치 주문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배구, 그만하려고.”

…….”

머리 한쪽 끄트머리에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그만두는 이유. 오이카와 토오루가 더는 걷지 않기로 한 길.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나이가 젊다고는 하지만 오래 하기도 했고. , 내 나름대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만큼 했어.”

, 맞아. 킨다이치 얘기 들었어? 이번에 승진했다던데.”

……킨다이치한테 전수나 받아야지. 이제 회사 다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얘기를 귓바퀴 너머로 흘려들으면서, 배구를 하지 않는 오이카와를 상상한다. 오이카와의 서브와 토스는 두 번 다시 발현되지 않는 신기루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카게야마 안에서 여전히 빛을 뿜으며 숨 쉬고 있는 오이카와의 서브는 오로지 제 안에서만 살아있겠지.

그래서, 은퇴는 다음 주쯤에 기사 날 거 같고, 감사합니다.”

주문했던 카게야마의 카레가 나오고 대화는 잠시 중단된다. 오이카와는 먹어, 라며 카게야마에게 카레를 권하고 카게야마는 입안에서 부서지는 카레를 억지로 씹는다. 오이카와는 잠시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웃음을 거두고 홍차빛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본다.

그래서, 미야기로 돌아가려고.”

…….”

카게야마는 잠시 먹는 걸 그치고 오이카와를 마주 본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만 살며시 올린 채 조금 전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자취집도 정리했어. 토비오쨩 다 먹으면 기차 시간 딱 맞을 거 같은데.”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핸드폰의 민트색 케이스는 먼지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는 이 곳카게야마가 있는 곳에는 그 어떤 흔적도 가져가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것조차도 카게야마의 생각에 불과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내려놓았다. 카레와 섞인 밥이 치아 사이로 돌아다닌다.

카레 안 먹어?”

먹어야죠.”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을 뜨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다시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묘한 식감이다. 상상 속이라 그런 걸까, 카레는 무미무취(無味無臭).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카레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이 깊고 그윽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반복적인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체취가 카레에 묻어 카게야마의 입 안으로 들어간다. 식도를 타고 위를 지나, 장 속에 골고루 퍼져 오이카와가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통해 저 자신을 분해한다. 오이카와가 남길 것 없이 두고 떠나는 모든 것은 카게야마의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서브, 향내, 홍차 빛 눈동자도 혹은 그의 무언의 감정도……….

오이카와는 이내 살포시 웃는다. 카게야마는 손을 멈췄다. 올라간 입술이 열리고, 하얀 치아가 보였다.

잘 있어. 더럽게 귀여운 토비오쨩.”

뒤에 놓았던 캐리어를 꺼낸 후 오이카와는 계산대로 향한다. 카게야마가 먹고 있는 카레 값을 계산한 후 문을 밀어 연다. 문 위쪽에 달린 종()이 두꺼운 여름 바람 탓에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로 빛이 산란된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입술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저의 입술에 집중한다. 무슨 말을 자아내야 할까.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오른쪽 눈에 들어가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센다이시체육관 뒤쪽으로 노을이 깔려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하늘 북쪽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누군가 베어 먹은 것처럼 반 토막 난 달이 불투명하게 걸려있다. 잠시 잠들었던 건지 몸이 벤치에 녹아내린 듯 축 늘어진 채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근처 나무에서는 매미 한 마리만 끊어질 듯 말 듯 울음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카게야마는 눈에 들어간 땀을 닦아내고 끈적이는 몸을 일으켰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기억 속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시야 어딘가에 박혀있다.

 

 

* * *

 

 

하얀 간판은 거뭇한 하늘에 잠겨 언뜻 어두운 하늘색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팻말은 아직 ‘OPEN’ 상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에 있던 여성이 카게야마를 보고 아, 작은 소리를 냈다.

저번에 우유빵 10개 사가신 손님이네요.”

.”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여기서 그렇게 많이 사가시는 분은 처음이라 놀랐어요. 맛있으셨나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집 앞에서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우유빵을 떠올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10개나 가져가셨는데 맛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랑 남편 둘 다 걱정했어요.”

그녀는 흘긋 옆을 바라봤다. 내부가 비쳐 보이는 유리 너머로 남성 한 명이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우유빵 남았나요?”

. 오늘은 방금 나온 건 아니어도 좀 남아있어요.”

그걸로 주세요.”

몇 개 드릴까요?”

“10개요.”

여성은 이번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기쁘게 웃었다. 봉지에 들어가는 우유빵 한 개 한 개를 볼 때마다 땅바닥에 짓이겨졌던 우유빵이 떠올랐다.

 

 

* * *

 

 

 

지평선을 감싸는 안개처럼 불그스름한 줄 몇 개가 바닥에 깔려있다.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여도 노을빛은 가라앉는 빛의 대기 속에서 부옇게 남아있었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진 않았어도 여름인걸 고려하면 꽤 늦은 시간일 것이다. 한번 땀으로 푹 젖었다가 눅눅한 바람결에 서서히 마른 티셔츠가 무겁고 거북하다. 오늘 밤은 열대야인 걸까, 오후를 장악했던 습습한 공기가 검은색 티셔츠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를 반대쪽 손으로 옮긴 후 어제와 같이 다시 한번 오이카와의 집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벨을 누르려던 움직임이 멈춘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번 꾹 다물고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었다. 제대로 걸려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뒤돌자 오이카와가 짙은 남색과 보라색에 뒤덮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

…….”

카게야마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도 적나라하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뒤 그의 옆을 지나쳐 걸어간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반무테 안경을 끼고 쪽빛 셔츠를 입은 오이카와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다. 카게야마는 저를 지나쳐가는 오이카와를 따라 눈을 움직이다가, 오이카와가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를 보고 다시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까지 바라본 뒤 몸을 떨었다.

…….”

오이카와는 감정을 담지 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오이카와의 입이 여전히 굳게 닫힌 걸 보고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오이카와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곤 팔짱을 꼈다. 가늘게 남아있는 노을빛이 가라앉으면서 구름의 경계선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녁이 몰려오기 전에 여러 빛깔로 채색된 하늘이 오이카와의 흰 피부에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한두 번 여닫았다. 오이카와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유빵 봉지를 저번처럼 던지지도 않고, 카게야마에게 모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를동정하는 게 아니에요. 오이카와씨와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일본으로 돌아왔어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입을 닫았다.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이 뒷목에 맺힌 땀방울을 싣고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숨이 멈출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깊게 내뱉었다.

그것뿐이에요.”

조심스레 고개를 들면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안경이 콧잔등으로 내려와, 푸른 색조가 섞인 눈동자가 굴절되어 다양한 빛깔로 빛났다. 오이카와는 후,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꿈에서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멍청한 토비오쨩한테 오이카와씨가 친절히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거야. 선심 쓰듯이 장난스럽게 말한 오이카와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있지, 동정이 아니라고 하는 네 말이 바로 그거거든. 토비오쨩은 바보야?”

달 꼬리처럼 휘었던 눈동자가 사납게 구겨졌다. 오이카와는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말했지. 죽여버리기 전에…… 찾아오지 말라고. 잘 들어. 너를 죽인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거든. 바보 같은 토비오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고리에 걸린 우유빵 봉지가 왼쪽, 오른쪽, 오른쪽을 반 바퀴 돌고 다시 왼쪽천천히 선회하다가 이윽고 멈췄다. 그쳤던 매미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우유빵 봉지에 손을 댔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붕대를 감아놓은 발목이 어두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실낱같던 오렌지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달이 충분히 빛을 뿜기 전 하늘의 장막이 덮이는 시간이었다. 봉지가 움직이던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목 신경섬유 사이에 통증이 퍼졌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보다 낮게, 눈언저리에서 울렸다. 오이카와가 만들었던 손등의 상처,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생긴 염좌. 오이카와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다고, 차가운 빛을 뿌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지금보다 더한 일? 그 이상? 배구를 영원히 못 하게 되는? 혹은 그보다 더한 일? 오이카와의 살인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카게야마의 구체적 절망인 배구를 앗아간다 해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찾아올 수 있을까. 느긋하게 우유빵을 10개 사서 그의 문고리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두고, 맛있다면 더 사오겠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과연 오이카와는 그랬을까.

카게야마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유일하고도 절대적 절망인 배구또한 오이카와에게도 그러할의 뒤에 남겨지는 게 무엇일지 카게야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게야마가 알 수 없는 그 절망의 한가운데에 오이카와는 서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미야기 속에 녹아있었고 빵을 썩힐 만큼 작열하는 태양 빛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처음 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으리라. 카게야마의 속을 후벼 파고, 날카롭게 난도질하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집에 찾아올 동안 심어놓았던 본심을 들쑤셨다.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아득했다. 카게야마는 아찔해지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밤이 구름을 먹어치우고 카게야마의 몸까지 잠식했다. 카게야마는, 저는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오이카와를 멋대로 절망한 사람으로 규정지어놓았던 것인가.










 

세븐데이즈(Seven Days)

 

 




 

부상 때문에 로드워크를 하지 못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못했던 게 언제였을까. 1년 전, 작년 9월 즈음 유럽 챔피언십 결승전이 끝나고였나. 무리하게 리시브한 공을 바로 토스로 연결하느라 발을 접질린 게 원인이었다. 가벼운 염좌기도 했고 결승전이 끝나고 난 뒤라 적당히 쉬면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 2주일 동안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불만스럽게 동료들의 연습을 지켜봤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염좌는 한 번 일어나면 두 번, 세 번 연달아 일어나기 쉽다고 그 당시 단단히 주의받았다. 그 뒤로는 카게야마도 발목에 특히나 주의를 기울였으나, 이건 불가항력이다. 적어도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야야…….”

발목이 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면서 카게야마는 옷을 챙겨입었다. 시간은 오전 930. 미야기에서는 아무리 일찍 여는 의원도 10시부터다. 평소 습관대로 눈을 뜬 건 오전 7시 전후였으나, 그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건 카게야마를 괴롭게 했다. 대충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씻고 나오면 발목은 전날 밤보다 더욱 부어 있었다. 효모를 넣은 빵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발목 한 부위도 붉게 달아올라 발목을 돌리면 찌릿한 통증을 자아냈다. 통증이 박동처럼 퍼질 때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서늘한 눈동자,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카게야마의 귀를 난도질하던 낮은 목소리. 지금의 이 통증은 바로 그 오이카와가 선사한 것이었다. 배구를 그만둔 오이카와, 미야기로 돌아온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지갑을 챙겼다. 발 한쪽을 절뚝이면서 문을 나서면 이탈리아의 여름처럼 눈 부신 태양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적어도 이탈리아는 이 정도로 매미가 많지는 않다. 대지를 뒤덮은 것이 태양이라면, 열기로 덥힌 공기를 진동시키는 건 수를 가늠하기 힘든 매미였다. 집에서 겨우 두 발자국 뗐을 뿐인데 목 뒤로 엷게 땀이 배어 나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매미의 무거운 폭음(爆音)이 카게야마를 짓누른다. 마치 미야기의 여름이, 미야기 땅이 카게야마를 거부하는 것만 같다. 5년 전에는 이곳이 저의 땅이고 제가 숨 쉬는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흐릿한 기억처럼 풍화되었다. 카게야마가 살던 집이 있고, 카라스노 고등학교가 있고, 사카노시타 상점이 있었으나 미야기는 과거의 잔해와 함께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돌아가.’

돌아가라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미야기 안에서 카게야마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인 오이카와가 저를 밀어낸다 해도, 카게야마는 가야 했다. 발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오이카와를 선명하게 떠올릴수록 통증이 날카로워졌다.

 

 

#2nd day

 

 

오래 입은 듯 빛바랜 백의를 입은 의사가 컴퓨터 화면에 X-ray 사진을 띄웠다. 정면에서 찍은 것, 옆에서 찍은 것 총 두 개였다. 얇게 뻗은 하얀색 뼈대가 검은 바탕 속에 선명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네요.”

그렇게 말해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의사가 대답을 원하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봤기에 조금 끄덕였다.

그런가요.”

붕대를 감아드릴테니 나흘 뒤에 교환하러 오세요. 많이 아프시면 진통 주사를 좀 놔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의사는 그래요? 의외라는 듯 반문한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의 발목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노르스름한 피부에 붉게 자리 잡은 부위는 오목하니 부어있다.

그나저나 어디 세게 부딪치셨어요? 웬만하면 이 정도는 안 되는데. 인대가 안 찢어진 게 다행이네요.”

.”

운동하신다면서요,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겨주세요. 특히 염좌는 재발하기 쉬우니까. 한 번 멀어진 관계는 수복하기 힘든 것처럼요.”

.”

의사로서는 드문 비유다. 카게야마는 멀어진 관계라는 표현에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만다. 오늘만도 벌써 그를 생각한 지 여러 번이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의사와 비슷할 정도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간호사가 볼록 튀어나온 볼살을 동그랗게 모으며 웃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 * *

  


 

붕대로 꽉 죄인 발목은 쉽게 구부러지지 않았다. 간호사는 목발 대여를 권했으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젓고 의원을 나왔다. 붕대를 감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 햇빛이 기세를 떨치는 오후였다. 카게야마는 드문드문 이어진 나무 그늘로 걸었다. 여름 바람이 푸르고 창창한 잎사귀를 건드리자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시원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배구 이외의 영역에서 기억력이 안 좋은 카게야마라 해도 한 번 가봤던 길을그것도 몸이 기억하고 있던 길을잊지는 않았다. 벚나무 왼쪽으로 들어간 후 하얀 간판의 빵 가게를 보고 카게야마는 멈춰 섰다. 전날 밤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 상념 때문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빵.

우유빵이 있을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맛일까. 혹시 그가 좋아하는 우유빵과 다른 빵이면 어쩌지. 혹은, 어쩌면입맛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숙 달걀을 얹은 돼지고기 카레를 좋아하지만 오이카와는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었으니. 중학교 때 언뜻 전해 들은 우유빵에서 다른 음식으로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게야마가 아는 건 우유빵 하나뿐이다.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다. 붕대를 감은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OPEN’ 팻말이 달린 하얀 목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곱게 구운 밀가루의 향기와 달콤한 우유 향이 미미하게 풍겨온다. 가게 안은 크게 3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하나는 케이크를 넣어둔 냉장고, 나머지 두 개는 크림빵 종류가 있는 선반과 크루아상 종류가 있는 선반이었다. 잔머리 한 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 한 명이 웃는 낯으로 카게야마를 반겼다. 계산대 옆 공간은 빵 굽는 과정을 밖에서 바라볼 수 있게 유리로 되어있었다.

우유빵 있나요?”

지금 곧 나올 거예요. 만들어진 건 있는데, 혹시 새로 나온 걸로 가져가실 건가요?”

뭐가 더 맛있나요?”

아무래도 새로 만들어진 거죠.”

그럼 그걸로 주세요.”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성은 계산대와 연결된 빵 굽는 쪽을 바라보며 우유빵 얼마나 걸려요?’ 물었고 그 안에선 곧 있으면요.’ 대답이 들려왔다. 여성은 대화 내용대로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반에 놓인 빵들을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팥빵부터 시작해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브리오슈까지. 아무래도 이탈리아에서 살다 보니 5년간 빵도 꽤 먹어보았으며 적어도 바게트와 크루아상을 구분할 수준까지는 되었다. 그렇다 해도 빵과 밥,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카게야마는 단연 밥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카레와 먹기에는 밥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은 황토색을 띠는 것도 있었고 옅은 노란색부터 황금색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 위에 하얀 가루가 뿌려진 빵은 설탕 내음을 뿜었다. 카게야마는 벽면에 마련된 좌석을 바라보다가 그 바깥에 흐드러진 큰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가지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달라붙은 푸른 잎을 보이지 않는 햇빛이 쓰다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햇빛은 존재했고, 나뭇잎이 그 존재의 증인이 되었다.

손님, 우유빵 나왔습니다.”

, .”

다시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자 하얀 김을 피우는 우유빵이 가득했다. 안쪽으로 휘감긴 빵 모양이 독특하다.

몇 개 드릴까요? 방금 만들어서 제일 맛있을 거예요.”

“10개 주세요.”

?”

여성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유빵을 담으려던 손이 멈칫한다.

“10개 주세요.”

…….”

 

 

* * *

  


 

작은 빵이어도 10개는 확실히 조금 무겁다. 카게야마는 붕대를 감지 않은 쪽으로 우유빵 봉지를 들고 절뚝이며 걸어갔다.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뜨거우니까 비닐에 안 넣고 종이 봉지에 넣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여성은 정사각형 종이로 우유빵 10개를 각각 감싼 뒤 큰 비닐봉지에 넣었다. 카게야마는 이마에 벌써 흐르기 시작한 땀방울을 천천히 닦아냈다. 매미 소리가 더위를 부추겼다. 5년 동안 이탈리아의 여름에 익숙해진 몸은 눅눅한 습기와 찐득한 공기로 뒤덮인 일본의 여름이 버거웠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둔한 불편감이 붕대 안쪽에서 저릿했으나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우유빵 봉지에서 스며 나오는 온기로 손이 노곤하게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골목길을 꺾었다. 보이는 2층 주택 집 앞에까지 온 다음에야 카게야마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폐 속의 더운 공기를 내보내도 들어오는 건 똑같이 뜨거운 공기였다.

딩동전날과 마찬가지로 벨을 한번 눌렀다. 어제와 같이 문 너머는 조용했다. 카게야마는 조용히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가 집을 비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집에 있을 거라는 직감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문 너머에서, 카게야마라는 걸 알고서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라고. 항상 그의 생각을 추론할 때도 그랬듯이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단지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이카와씨.”

문 너머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른 뒤 우유빵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웃긴 행동이었다. 오이카와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우유빵 사 왔어요.”

방금 만든 거예요. 방금 만든 게 가장 맛있대요.”

…….”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정말 집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앞서 생각했듯 그가 집에 있다는 건 순전히 카게야마의 근거 없는 느낌에 불과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맛있을 때 그가 먹었으면 좋겠다. 아쉬운 건 그것 때문이었다.

두고 갈게요.”

카게야마가 문고리에 우유빵 봉지를 걸어놓으려고 다른 한쪽 손을 마저 든 순간전날 문이 닫혔을 때와 똑같이 무서운 속도로 꽉 닫혔던 공간이 열렸다. 갈귀처럼 튀어나온 흰 손이 카게야마가 들어 올린 손을 낚아챘다. 카게야마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전에 다시 닫힌 문 안쪽에서, 강한 충격이 등과 머리를 가격했다. 문이 떨리면서 세게 울린 마찰음 뒤로 이어진 건 극심한 통증이었다.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부딪친 뒤통수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불 꺼진 공간에서 검은 그림자가 카게야마의 가슴과 목 바로 아래 부근에 내려앉았다. 폐 속에 남아있던 숨을 내뱉은 카게야마는 그림자의 허벅지가 내리누르는 압박 탓에 원하는 만큼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좁아진 기도로 들어오는 건 색색이는 목소리뿐이다. 답답한 심장이 떨리면서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좀 전의 충격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그림자를 쳐다보면, 오이카와의 두 눈동자만이 검은 공간 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허벅지로 카게야마를 잡아 눌렀다. 전력질주로 산을 올랐을 때보다 폐가 조여왔다.

.”

오이카와는 사방의 벽이 진동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평소 그의 말투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려고? 나를 비웃으려고?”

무표정했던 얼굴이 몇 번 움직이더니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고, 그는 미소 지었다. 일그러진 눈동자, 미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린 입술로 오이카와는 웃어 보였다.

잘난 카게야마 토비오씨가 여기 와서 뭘 어쩌려고?”

, 이카와,”

원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끊어졌다. 성대를 움직이려 하면 그의 아래에 눌린 폐가 찔린 듯이 괴롭다. 숨을 내쉬면서 겨우겨우 이름을 부르면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손을 낚아챘던 손으로 오이카와는 이번엔 검은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앞머리에서 이어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기세다. 짧은 머리카락을 다섯 손가락 가득 쥐고 피부에서 뜯어낼 것처럼 잡아당긴 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이마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본 오이카와의 피부는 희고 건조했다.

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토비오쨩, 너무 멍청해서 일본어도 못 알아듣게 된 거야?”

……오이, 카와

말해, 토비오. 왜 오는 거야.”

……오이카와 씨,”

입술을 둥글게 만들고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그의 체중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 또한 지독한 통증이 되어 카게야마의 목울대를 갉아먹었다. 말해야만 한다, 카게야마는 하얗게 의식이 새는 도중에도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우유빵…… 지금 먹어야, 맛있대요…….”

……….”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안 좋은 표정을 짓더니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던졌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바지의 꺼끌한 감촉이 가슴에서 사라졌다. 급격히 들어오는 산소에 절로 기침이 나온다. 목 졸린 사람처럼 목을 붙잡고 헐떡이는 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카게야마는 일어날 수 있었다. 붕대로 감싼 발을 절뚝이며 일어나자 오이카와가 붕대를 흘겨봤다. 금세 고개를 돌리고 비웃듯이 이마를 찌푸린다.

우유빵이라고?”

. 여기요. 몇 개 사야 할지 몰라서 10개 정도 사 왔어요. 맛있으시면 더 사올게요.”

오이카와는 시선만 아래로 내리고 카게야마가 건네는 봉지를 쳐다봤다.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카게야마의 머리를 쥐어뜯던 손이 이번에는 봉지를 건네받으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 손에 들려있던 우유빵 봉지를 오이카와 쪽으로 조심스레 건네려고 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손이 봉지를 든 카게야마의 손을 튿어내며 우유빵 봉지를 채간 뒤 문을 열어 멀리 던졌다. 카게야마는 어두웠던 방 안에 가득 찬 태양 빛에 눈을 찌푸리며 날아가는 봉지를 바라봤다. 마치 슬로 모션과 같다. 불투명한 봉지는 햇빛을 받아 오색빛깔의 스펙트럼을 빛냈고, 봉지가 천천히 회전하며 우유빵이 하나둘 흩어져 나온다. 보드라운 갈색의 빵 사이 우유 크림이 태양 빛에 빛난다. 찢어진 구름과 청색 하늘, 매미 소리 진동하는 대기 속에서 우유빵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늘 어딘가를 날던 비둘기와 까마귀가 우유빵으로 날아들었다. 매미 소리를 압도하는 괴성을 지르며 그들은 땅에 떨어진 우유빵 조각에 얼굴을 처박고 쪼아댔다. 보이는 건 새의 머리뿐이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멈춰서 있었다. 빛이 비추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우유빵을 잡아챘던 손이 카게야마의 멱살을 잡고 비틀었다. 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이 목이 조여왔다.

잘 들어, 토비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위험한 빛깔로 빛났다. 태양이 더위에 녹아내리면 나타나는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린다.

내건 내가 사. 두 번 다시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오지 마.”

카게야마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카게야마는 답답한 숨을 얕게 내뱉으며 오이카와의 타오르는 눈동자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말하기 어려운 듯 시선을 내렸다. 이내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오이카와는 찢어진 초상화 같다.

다시 오면 죽여버릴지도 몰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내던지듯 밖으로 밀어붙이고 문을 다시 닫았다. 닫힌 문 너머는 조용하다. 갑자기 해방되어 벌떡이는 심장과 폐에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오이카와의 형형하게 빛나는 홍차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몸에 짓눌렸다가 억지로 밀쳐진 다리가 욱신거렸다.

카게야마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널브러진 우유빵 쪽으로 걸어가 엉망이 된 빵을 봉지에 하나둘 집어넣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크림이 손에 묻는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에 벌써 크림은 지방층이 분리되어 기름이 번득이고 있었다. 손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눈 사이를 찌푸렸다. 우유빵을 담는 손등이 붉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봉지를 채갈 때 그의 손에 만든 생채기였다. 핏방울이 몽울몽울 맺혀있던 흔적이 이제는 굳어있다.

발목도 손등도 그가 남긴 흔적투성이였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남긴 건 통증뿐인데도, 카게야마는 통증조차 버거울 정도로 오이카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습니다. (부상은 아닙니다.)

* 세이죠 및 카라스노 캐릭터의 미래 날조, 오이카와 가족설정 날조가 있습니다.

 

 


 

세븐데이즈(Seven Days)

 

 

 

 

 

 

센다이仙台駅 역을 나오면 매미와 빛의 세계였다. 내리쬐는 열기가 지면을 가른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 어딘가에 달려있을 매미떼는 그칠 줄 모르는 폭풍우처럼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얇게 입고 왔다고는 하나 본래 있었던 곳에 비해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스팔트 바닥이 흡수했던 아지랑이를 분출했다. 카게야마는 검은색 캐리어를 끌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쉬고 내뱉는 한숨이 모두 뜨겁다. 푸르게 빛나는 나뭇잎 사이의 햇빛조차 살을 가를 듯이 날카롭다. 5년 만에 돌아온 일본, 미야기현宮城県은 카게야마의 조각난 기억보다 달랐다.

 

 

 

#1st Day

 

 

 

길고 구불진 길과 곧게 난 주택가를 걸어가다 보면 표지판 역할을 하는 큰 벚나무가 나온다. 벚나무의 왼쪽으로 돌아들어가 다시 걸어가기를 5, 하얀 간판이 달린 빵 가게를 지나카게야마의 기억으로는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홍삼즙 가게였는데, 지난 5년 사이에 바뀐 모양이었다한 번 더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2층 주택 집. 바뀌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집이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갈 자신은 없었으나 다행히도 카게야마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캐리어를 문 근처에 놓아두고 벨을 눌렀다. 이름 팻말은 없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없었다. 카게야마가 기억하기로 오이카와의 집은 오이카와가 있다, 그 외에 생각나는 건 없었다. 카게야마에게 중요한 건 그 하나뿐이었으니, 그의 기억력이 나쁘다며 탓할 수는 없다.

문 너머는 조용했다. 목 뒤로 땀이 흐른다. 한번 멈췄던 매미가 재차 울고 있다. 매미 소리에 맞춰 햇볕이 더욱 열기를 더했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

문을 열고 나온 건 한 명의 남자였다. 거품처럼 가볍게 정돈된 홍차 빛 머리카락과 그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눈동자, 햇빛 아래에서 더욱 빛나는 흰 피부. 카게야마가아마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가장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이었다. 이마와 양 관자놀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오이카와가 한 일은, 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을 빛과 같은 속도로 닫는 일이었다. 카게야마 또한 그에 질세라 서둘러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문 사이에서 묵직한 소리가 나고 윽, 고통을 참는 신음이 땀으로 젖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발목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고통이 살을 쪼개더니, 이어지는 둔한 통증이 왼쪽 다리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문 사이로 냉기 담은 눈동자만 내밀고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휴가를 받았어요. 일주일이요.”

그래서.”

오이카와씨를 보러왔어요.”

본인이 들어도 다급한 말투였다. 말소리 사이로 들리는 매미 소리에 귀가 아프다. 발목이 뜨겁게 불타는 것만 같았다. 이 발을 빼면 오이카와는 문을 닫아걸고 두 번 다시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카게야마도 바보는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차례 매미 소리가 지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

저랑 얘기해요.”

너랑 할 얘기 없어.”

, 안 치우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중얼거린 뒤 오이카와는 희번득한 눈길로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기를 품은 말투였다.

자를지도 몰라.”

카게야마는 척수를 따라 흐른 생존본능에 의해 저도 모르게 발을 빼고 말았다. 그 순간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오싹한 공포 때문에 땀이 온통 식더니 이번엔 식은땀이 스멀거리며 배어 나왔다. 처음 보는 눈동자. 아니, 기억해보면 중학교 때 단 한 번 봤었던. 허나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근원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 잔인한 말은 담은 입술. 카게야마의 안에서 지난 기간의 오이카와가 느린 속도로 흘러갔다.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나 이때까지 그를 잊은 적은 없다. 센다이를 떠났던 지난 5년간도 그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카게야마는 5년간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메꿔야만 했다.

카게야마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등에 녹아있던 식은땀도 증발해버릴 정도로 해가 뜨거웠다.

 

 



 

 

센다이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가는 동안 여러 곳을 지나왔지만 카게야마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바뀐 곳도 많았다. 기억에 남아있던 카라스노 고등학교는 그대로였다. 시간 탓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몇몇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나타에게 듣기로 남자 배구부는 강호로 남아있었지만 카게야마가 아는 후배는 없었다. 애초에 제 바로 아래 연도의 후배도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적었다. 사카노시타상점 간판은 남아있으나 내부는 비어있다. 우카이 감독은 도쿄에 있는 모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채용되어 그곳에서 남자 배구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사와무라에게 듣기로 유명한 강호교여서 우카이 감독도 꽤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고.

센다이를 떠난 지 5. 24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탈리아로 떠난 지도 똑같이 5년째다. 소속 팀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냈던 5년 사이에 바뀐 장소도 많았지만 사람 또한 장소와 동일하게 가변적인 존재였다. 히나타를 비롯하여 사와무라와 아사히가 실업 배구팀에 소속한 건 그렇다 해도 스가와라가 교사가 된 건 카게야마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동시에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말아, 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심 카게야마는 그가 배구 외에 다른 일이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키타이치 시절의 사람들을 얘기하자면 이와이즈미는 도쿄도 경시청에 있고, 킨다이치와 쿠니미는 각각 다른 현에 있는 일반 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센다이에 아는 사람이라곤 이제 오이카와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인사해도 집에는 인기척이 없다. 카게야마는 불을 켜고 캐리어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5년 전에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방은 짐이 없다는 걸 제외하곤 침대나 책상 모두 그대로였다. 카게야마가 스카우트 제의를 승낙하고 이탈리아로 떠날 때 부모님도 함께 그쪽 직장을 구해 이동했던지라 센다이에 남아있는 건 빈집이었다. 빈집이라 해도 전기와 수도 모두 멀쩡하다.

노후는 일본에서 보내고 싶어.’

그렇게 말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집은 팔지 않고 아직 카게야마가의 소유였으며, 가끔 일본에 돌아오는 어머니가 청소해둔 덕분에 사람이 살 정도의 청결함은 유지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방 내부를 둘러봤다. 남겨놓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로 떠날 때 웬만한 건 버렸고, 물건에 특별한 감정을 두지 않는 카게야마였기에 들고 간 짐도 무척 간소했다. 그 탓에 5년이 지나 집에 돌아와도 무엇 하나 추억할만한 거리가 없다.

캐리어 짐을 정리하면서 카게야마는 일본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뜻하지 않은 일주일의 휴가는 갑작스러웠다. 계기 또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의 거의 1년 반만의 전화. 이탈리아와 일본의 시차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새벽 3시의 전화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그날은 특히나 고된 연습을 했던 날이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잔 날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날에 핸드폰 벨 소리는 못 들었을 테지만 묘하게도 눈이 떠졌다.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와 통화하는 건 여전히 낯선 일이다.

쿠니미지금 새벽 3시야.”

잠긴 목소리를 열심히 가다듬어도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 정도다. 핸드폰 너머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알아. 그래도 전화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어?

없는데…….”

안 그래도 타지 생활에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는 안타깝게도 없었다. 만약 부모님이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밥은 매일 사 먹기 일쑤고 빨래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아는 오이카와의 소식은 주로 히나타로부터 전해 듣는 내용과 이탈리아 배구잡지에 가끔 나오는 일본 배구 기사가 전부였다. 초기에는 가끔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으로 오이카와 토오루 이름을 검색해보거나 그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몇 번이고 봤었다. 최근에는 검색 한 번 해보지 않은 탓인지 이렇다 할 소식을 듣지 못했다. 히나타와 연락이 닿은 지도 반년이 넘었다. 세계적인 대회를 제외하면 일본과 이탈리아 배구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국내대회 시기도 다르니 그의 기사가 보이지 않아도 단지 그러한 시기상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 선배, 배구 그만뒀어.

…….”

배구 그만뒀어.’

나도 이와이즈미 선배한테 들은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

아버지.

자세히는 모르겠어. 오이카와 선배 아버지가 미야기에 있는 건설회사 사장님이셨는데, 대대로 오이카와 가문 회사였나 봐. 오이카와 선배가 실업팀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대표 선발 시합 준비하고 있던 건 알지? 도쿄에 있다가 임종도 못 지키고 가셨나 봐. 알고 보니 몇 년 전부터 지병이 있었다던데, 그걸 오이카와 선배가 알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들려오는 목소리가 우묵하게 퍼졌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귀가 가득 차서 쿠니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집중해서 들으려 해도 자꾸만 귓바퀴 뒤로 스쳐 지나가서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더욱 귀에 가까이 댔다. 보글거리는 소리가 목소리에 스며들어 카게야마를 방해했다. 배구 그만뒀어. 그 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하다.

실업팀에서 나오고 배구도 집도 정리하고 센다이로 돌아갔어. 건설회사는 안그래도 요 몇 년간 경영난이 있어서 그냥 팔고, 회사 취직하신다고.

.”

쿠니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카게야마, 힘주어 말하는 쿠니미의 목소리는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처럼 단호했고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관처럼 무거웠다. 새어드는 달빛보다 싸늘한 말이 귓속을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는 이제 평생 배구를 안 할 거야.

국가대표가 되지도 않을 거야. 회사원이 될 거야. 나 같은.

오이카와가 배구를 하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삶에서 배구는 사라지고, 그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아오바죠사이와 카라스노의 경기가 끝나고 그가 했던 말과 함께.

이걸로 11패야. 너무 우쭐대지 마.”

오이카와가 졸업하고 도쿄로 가는 날 들었던 말과 함께.

따라오지 마, 바보 토비오쨩.”

그는 웃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구부리고 벚꽃잎이 싸르라기 눈처럼 흩어지는 날에 오이카와는 등을 돌리고 떠났다.

카게야마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새벽빛이 밝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거리를 따라 아침 로드워크를 다녀온 후 바로 소속팀 감독에게 전화했다. 다짜고짜 일주일 휴가를 달라고 떼를 쓰니 무어라 쓴소리를 강하게 들었지만 완강하게 고집하자 지금까지 못 받은라기보다 안 받은휴가를 전부 포함해서 받은 걸로 합의를 내렸다. 센다이로 가겠다고 하자 도대체 왜?’라고 당연하게도 부모님이 물었으나 이렇다 할 대답을 찾기 힘들었다. 오이카와 때문에? 와달라고 하지도 않은 그의 이름을 댈 정도로 카게야마는 뻔뻔하지 못했다. 사실 센다이에 돌아온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라면 카게야마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왜 돌아온 걸까? 오이카와와 다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욕구의 이유도 찾지 못한 채 무작정 오른 일본행 비행기에서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오이카와를 생각했다. 제 안에 녹아있는 오이카와는 생각 이상으로 농도가 짙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떠오를 정도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기억하고있었다.

카게야마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레 양말을 벗었다. 언뜻 보기에도 불그스름하게 퉁퉁 부어있다. , 짧게 혀를 차고 대충 찬물에 적신 수건을 대었다. 병원은 내일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예전에 딱 한 번 가본 정형외과 의원의 위치를 떠올리고자 노력했다. 침대에 조심스레 눕자 묵은 이불 냄새가 난다.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이불까지 깨끗이 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불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눈을 감고 조금 전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가웠던 눈동자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저는. 확실하진 않아도 오이카와와 이야기를 나누면 해결될 것이다. 불편하게 내려앉은 응어리도, 쿠니미와 통화한 후부터 부연 머릿속도 전부. 카게야마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저가 일본으로 돌아온 이유 중 가장 뚜렷하고 절망적인 이유를 하나 대라면, 다만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붉은빛을 쏘는 태양은 달과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며 움푹 팬 반달이 뜨고 있다. 12시간이 소요된 비행은 5년 전보다도 힘겨웠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이 중세 시대 존재했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마(睡魔)에 잠식되는 눈꺼풀을 닫으면서, 카게야마는 멀리서 매미 소리가 잦아드는 걸 느꼈다. 지금쯤 카라스노 고등학교 뒷산에는 반딧불이가 풀 사이로 빠져나와 꼬리를 빛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생각해보니,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건 우유빵이었다. 잠들기 전 누구나 흔히 그렇듯 쓸데없는 상념을 되풀이하면서 카게야마는 잠들었다.













LOVERS










새 햇빛을 집안에 맞아들인 지도 오늘로 8일째였다. 카게야마는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노란 바구니에 담았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오이카와의 민트색 티셔츠와 카게야마의 진한 청바지,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수건 등. 두 명이 쓰는 양이라 많지는 않았으나 카게야마 혼자 살던 대학생 초기 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한 사람 분량을 느끼고 만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거두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빤히 바라봤다. 이 바지를 입은 오이카와에게 안겼던 때가 잦다.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옷인지 아닌지, 그 판단 기준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토비오, 아직 멀었어?”

아뇨, 끝났어요.”

주방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 카게야마는 면바지도 바구니에 마저 집어넣고 말했다.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오면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 놓인 식탁에는 벌써 2인용 식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이자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도 고개를 끄덕인 후 들고 있던 바구니를 소파 옆에 놓았다.

오늘은 된장국이랑 연어 카르파쵸, 렌틸콩을 넣은 보리밥과 찹스테이크야. 얼마 전에 찹스테이크 맛있다고 한 게 기억나서.”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이카와가 하는 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식 이름이었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딱히 상관없었다. ‘찹스테이크가 맛있다고 한 기억은 없으나 눈앞에 보이는 고기와 피망, 양파를 섞어 조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은 적은 있다. 나는 토오루씨의 좋아하는 음식이라고는 우유빵밖에 모르는데. 카게야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 한마디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얼굴에 보이는 행복까지도 잊지 않으며 또 요리까지 해내는 오이카와는 정말 대단하다. 나의 말을 그가 기억해준다. 최근 카게야마가 알게 된 행복 중 하나였다.

맛있어?”

. 토오루씨는 안 드세요?”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으며 먹어야지부드럽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오이카와는 꿀을 넣은 홍차처럼 달콤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혀끝에서 달고 짭조름한 맛을 내는 찹스테이크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오이카와는 아,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 물 주는 걸 깜빡했네.”

……!”

형태 좋은 근육이 잡힌 팔을 들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들고 정수기에서 찬물을 떠서 카게야마에게 주기까지. 카게야마는 씹는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한 채 오이카와를 계속 쳐다봤다. 제 옆에 놓인, 눈사람이 그려진 물컵을 만지고도 믿기지 않는다. 차가운 감촉은 현실이었으나, 오이카와가 물을 떠다 준 게 현실이라고? 정수기가 저랑 더 가까워도 항상 물을 뜨는 건 카게야마의 역할이었다. 심지어 카게야마보다 물을 더 자주 마시는 건 오이카와였으니, 밥을 먹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일으키는 건 요리 담당인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 쪽이었다.

토오루씨가 다 먹을 건데 왜 제가 떠야 하냐고요.’

토비오쨩은 내 후배니까.’

몇 번이고 투덜대며 불만을 표했으나 능청스레 내뱉는 오이카와의 말에 입술을 내미는 게 최선이었다. 후배라는 호칭에는 아직도 약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키는 거의 비슷한 지점까지 자랐다 해도 저는 그보다 2년 어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목표 지점이자 이상적 존재였다. 중학교 졸업앨범만 봐도 그렇다.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는 앨범에 적힌 연도보다 카게야마의 앨범이 2년 뒤다. 그러했다.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선배였고, 어떻게 봐도 그를 이길 수 없는 건 카게야마였다.

결국 입을 삐죽 내밀고 갖은 불만을 꿍얼거려도 오이카와에게 물을 떠다 주는 건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떠다 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는 불현듯 불안이 스며들어와 조심스레 오이카와를 흘겨봤다.

왜 그래? 밥 안 먹어?”

아뇨, 먹을 거예요.”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카게야마도 그를 알게 된 지 햇수로만 10년이 넘었다. 어느 정도 위험 수준을 넘으면 카게야마도 무의식중에 느끼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번은 모르겠다, 가 솔직한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다시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입은 실내복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오버핏 형태의 터틀넥이다. 늘어진 소매가 그의 손등을 엄지손가락 아래까지 덮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오른쪽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사탕을 아삭 씹을 때 톡 터지는 달콤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오이카와와 살기 시작한 후로 그의 저런 표정을 보는 건 가끔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수룩한 감정이 귀 주변을 간질이는 건 어찌할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미야기로 한 번 내려오라고 그러시던데.”

, 들었어요.”

토비오한테도 말했어? 나한테만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일부러인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진 티를 냈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오이카와와 연락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카게야마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오이카와하고만 얘기할 리는 없다. 어머니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토비오를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이 첫 번째였다.

토오루씨가 편한 날에 한 번 오라고 하셨어요.”

역시 어머니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도 제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를 집어 올렸다. 아직 연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카게야마의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는 거의 소스만 남은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가운데에 놓인 연어 카르파쵸를 한 입 집어넣었다. 싱싱한 연어의 살결이 입 안에 돌았다.

토오루씨한테, 연락 자주 해요?”

어느 정도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오이카와에게 자주 연락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카게야마와 그다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를 따뜻하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카게야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오이카와를 통해 말할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에 개인적인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렌틸콩을 오물오물 씹으며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밤이 내려앉은 바깥은 조용했다. 1층에 자리한 집치고는 주변이 조용한 편이었다.

최근 전지훈련 어디로 갔다 왔지?”

“Y 현이요. 체육관 시설이 좋았어요.”

, 그곳. 나도 갔었지. 거기 실업팀의 P 세터가 유명하잖아.”

봤어요! 굉장했죠.”

너무 미끼를 잘 무는 거 아냐, 토비오?”

?”

아냐.”

오이카와는 다시 기분이 나빠진 건지 고개를 홱 돌렸다. 카게야마는 한번 갸웃하고 찹스테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열심히 오물거리느라 달아오른 입술로 말하면, 오이카와가 다시 푸핫 웃었다.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가지런하게 먹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되새기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넌 역시 어머니 쪽을 닮았어.”

그런가요?”

. 눈 쪽이 특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가로 손을 뻗어 보들 거리는 눈두덩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촉감이 눈가를 채운다.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쪽을 닮았다는 말을 흔히 들어보지는 않았으나, 오이카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게야마는 심야의 가로등 불빛처럼 말간 빛을 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토오루씨는 아버지를 더 닮은 것 같아요. 말로 하지는 않는다. 어느 부분이?라고 그가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이얗게 물결치는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속눈썹이, 달빛 아래서 특히 다정한 색으로 보이는 홍차 빛 머리카락이.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어는 적고 뜻이 협소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번 헤맸다.

토비오. 목걸이는 잘 메고 있어?”

오이카와는 표정을 고쳐 자못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목을 세로로 긋는 근육을 짚으면서, 그는 온기를 느끼듯이 손가락 다섯 개로 카게야마의 목을 감쌌다.

.”

카게야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얇은 은색 목걸이를 티셔츠 속에서 꺼냈다. 미색 조명등 아래의 은빛이 평소보다 반짝인다. 목걸이에 연결된 반지는 똑같은 은색이었고, 남성용이라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가느다랗게 반지를 감싸는 큐빅이 고급스러운 반지였다. 오이카와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서 손을 거뒀다.

잃어버리지 마.”

안 잃어버려요.”

당신한테 받은 건 무엇 하나, 특히 이건. 카게야마는 양 볼을 찬찬히 물들였다. 오이카와는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의 입을 바라보았다. 또 입가에 뭐가 묻었나 싶어 카게야마는 입 주변을 만지작거렸고, 오이카와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꼬리를 휘면서 웃었다. 누군가가 그의 눈에 초승달을 심기운 것 같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내일?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일감독님이랑 미팅 있는데요.”

그 순간 오이카와가 놀란 듯 눈동자를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멀뚱히 바라봤다. 입이 몇 번 여닫히더니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토비오. 진심이야?”

. 뭔가 위험하다. 카게야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자신의 눈치 없음을 이럴때면 통감하고만다. 처음 오이카와가 내일이라고 특정해서 물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서서히 의심으로 물드는 걸 눈치 보면서 카게야마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무지 기억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꼬물거리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 알아요. 알죠.”

당장 이 순간만은 모면해야 한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일단 입 밖에 냈다. 이런 게 통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만다. 너무도 당연한 귀순에 따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찹스테이크가 순식간에 얹힌 기분이다.

나 토비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싫은데.”

조금 전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냉기가 도는 목소리다. 날카로운 눈으로 카게야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낮은 음조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건 진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해야 한다. 무언가, 어떤 거든. 동시에 안된다. 이 순간 허투루 말했다간 적어도 석 달은 아웃이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더듬으면서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냉정하게 그 입술을 흘겨봤다.

됐어. 기억 안 나면.”

끝이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타임아웃의 종소리가 들렸다.

 

 

⟡ ⟡ ⟡

 

 

토오루씨.”

한 침대 안에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만 쳐다보길 세 시간째였다. 조심스레 불러도 오이카와는 대답도 없다. 연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은 평소보다 기온이 낮았다. 카게야마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시 한번 오이카와를 불렀다.

내일, 중요한 날이에요?”

글쎄. 토비오쨩에게는 엄청 중요한 날이겠지. 무려 감독님이랑 미팅하는 날이니까.”

저녁 식사할 때보다는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말 속에 씨가 박혀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모를 리는 없었다. 오이카와의 넓고 단단한 등이 한번 움직이더니 카게야마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잠시, 저가 날짜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날짜 하나하나에 민감한 오이카와가 미워지기도 했으나 이번은 저가 잘못했겠지.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삐져나온 입술을 밀어 넣고자 애썼다.

오이카와의 생일은 720일이고몇 년 전 까먹었다가 오이카와에게 이 주 동안 괴롭힘당한 후에야 겨우 머리에 입력한 날짜였다, 내 생일은 1222일이고. 두 사람의 생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날 이길래, 카게야마는 세 시간 동안 오이카와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카게야마에게 날짜란 말 그대로 날짜일 뿐이어서, 제 생일은 기쁘고 주변에서 축하를 받는 것도 고맙지만 그건 수많은 날 중 하루에 불과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좋고 특별하다면 특정한 날을 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카게야마에게 하루는 순간이었으며, 순간은 영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한기를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끔뻑거렸다. 머릿속에서 720일과 1222일의 숫자가 부유하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생일보다 중요한 날인가?

……토비오. 정말 모르는 거야?”

힌트도 줬다구? 토오루씨 할 만큼 했어.”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대답 없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하게 들리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카게야마의 코 고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입가에 고이기 시작한 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폭신한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더니 기어코 오이카와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믿기지가 않네, 정말!”

오이카와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카게야마를 강하게 노려봤다. 오이카와로서는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날이다. 카게야마도 꼭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억은 할 줄 알았는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못내 아쉬워서 오이카와는 더욱 둥글게 몸을 말았다.

 

 

⟡ ⟡ ⟡

 

 

카게야마는 살포시 눈을 들었다. 연한 녹색의 이불보가 보였다. 비슷한 색깔의 베개도. 다시 눈을 감고 그곳을 한두 번 손으로 짚어도 있어야 할 사람은 없다. 시각으로나, 촉각으로나 부재(不在)는 명확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이라 안 그래도 푹 꺼진 눈썹 사이가 더욱 좁아졌다.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는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는 먼저 집을 나선 후였다.

성가셔.”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척이나 깊고 풍성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카게야마가 보지 못하는 많은 걸 보고 예상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와 사귀고 함께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와의 인생을 선택한 건 제 인생 중 배구를 시작한 것 다음으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실감한다. 다만, 그것과 실제 삶에서 겪는 자잘 자잘한 충돌은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복잡하고 민감한 생각 회로를 느낄 때면 때로는 성가시고또 때로는, 버겁기도 했다. 예전 사귀던 시절에는 이럴 땐 며칠 안보는 게 상책이었는데. 며칠 안 보면 그만큼 보고 싶어지고, 불필요하게 빈자리를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것만이가장 큰 기쁨이 되고 말아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그를 이해하고자 다짐하곤 했다.

지금은 그와 같은 해결법은 쓸 수 없다. 관계가 변하면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 그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했을 때 어머니가 충고했던 말대로다. 알고 있니, 토비오?

누구나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면 그만큼의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

난 영원히 네 편이겠지만 그 안에서의 고통은 너의 몫이야.’

그래도 손을 놓지는 말렴. 손을 놓지 못해서 그 선택을 한 거잖아?’

맞는 말이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불가피하게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다.

 

 

⟡ ⟡ ⟡

 

 

감독과의 올해 들어 처음 있는 미팅을 마치고 난 후 카게야마답지 않게 서둘러 핸드폰을 들춰보았으나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흔히 보내곤 했던 배고파같은 라인 메시지 한 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겠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

하아…….”

뭐야? 싸웠던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어? 웬 한숨?”

A 감독은 짓궂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아뇨, …….”

굳이 말하면 연락이 없어서 한숨을 쉰 거지만. 굳이 무어라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죄 없는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A 감독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애인이랑 잘 해봐도움 되지 않는 조언과 함께 떠났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켜 A 감독에게 90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카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절로 답답한 기분이 들어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서둘러 풀었다. 기껏, 기껏 결혼해도 이 모양이다.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이해하기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는 되었다 해도 오이카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카게야마에게는 심각하게 난해한 문제였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카페의 통유리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정면에는 꽃가게가 놓여있다. 지나가는 여성 두 명이 온실 안쪽에 놓인 백합을 가리켰다. 꽃집 주인은 흰색 백합을 꺼내 파스텔 색조 포장지로 감싼 후 여성 중 한 명에게 건넸다. 눈꽃이 내려앉은 듯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은 여성은 백합에 코를 묻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은색 목걸이. 목걸이를 조심스레 꺼내면 함께 걸려있는 반지는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잃어버리지 마.’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받은 당일 이후로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본 적 없는 반지를 유심히 바라봤다. 바깥쪽은 세심하게 세공된 건지 매끈한 은빛을 빛냈고, 안쪽은 울퉁불퉁하게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건 숫자와 알파벳이었다. 이탤릭체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 새겨진 건, 아무리 영어에 약한 카게야마도 아는 이름이었다.

 

01. 09 Oikawa Toru

 

평생을 산다 해도 잊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 ⟡ ⟡

 

 

오이카와는 핸드폰에 등록된 유명한 카레 집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화면에 띄웠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오후 8시에 잡아둔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미처 움직이질 않는다. 카게야마가 어떤 날인지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예약 취소를 결심한 오이카와였지만, 감정은 무 자르듯 선을 긋는 생각과는 달랐다.

……멍청이 토비오.”

사귀는 중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비난을 툭 내뱉은 후,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혼하고 1. 오히려 동거할 때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혼은 아주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오이카와는 식장에서 카게야마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안정감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을 때는 서로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제 토비오가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거구나.’

카게야마와 밤에 몸을 얽어맸을 때보다도 더 깊게 카게야마를 피부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아마 앞으로도 평생 겪기는 힘들안위(安慰)를 실감했다. 오이카와에게는, ‘누군가가 평생 자신의 유일하고도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서 옆에 있다.’는 건 배구만큼이나 묘한 의미였다. 더욱이 그 누군가가 토비오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고작 두 살 어릴 뿐인 중학교 후배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누구도 수긍하지 못할 인생을 함께 걸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때의 저 자신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오이카와는 중학교 시절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짧은 앞머리와 작은 몸통, 배구공만 들고 다니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오이카와는 다시금 카게야마가 저의 곁에 있는 게 기적과도 같은 건 아닐까 느낀다. 카게야마가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고오이카와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택한 건 상상 이상으로 오이카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5년 전의 오이카와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까지 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카게야마에게는 연락 한 통 없다. 오이카와는 카레 집 전화번호를 다시 띄웠다. 예약. 취소해야 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자 노렸다는 듯이 카게야마에게 전화가 왔다. 뾰로통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바보라고 등록된 번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도적으로 10초 정도 기다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토오루씨. 어디세요?

일부러인 듯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게 또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대답하지 않았더니 카게야마가 토오루씨?’ 한 번 더 불렀다.

집에 가는 중인데.”

누구누구 씨 덕분에 예약했던 카레 집도 못 가고 말이야.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을 불만은 꾸욱 삼켰다.

집 앞의 M 공원에서 만나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핸드폰 화면에는 총 통화시간 31초만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전날 카게야마가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오이카와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건방지게 먼저 끊은 거야? 선배랑 전화하면서 감히?’

고작 2년 선배였던 걸로 생색내지 말라며 소꿉친구에게 몇 번이고 혼났지만 오이카와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2년이어도, 1년이어도 선배는 선배다. 카게야마는 저보다 2살 연하였으며 그건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생일도 내가 더 먼저고! 어느 모로 보나 카게야마 토비오가 이렇게 건방져도 된다는 법은 세상천지에 없다.

또 우유빵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기만 해봐.”

뻔하지, . 오이카와는 이를 갈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봤자 카게야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그는 오이카와의 손바닥 안이었고, 오이카와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결국 카게야마가 부르는 대로 가고 마는 게 무척 뻔한 두 사람의 관계였다.

 

 

⟡ ⟡ ⟡

 

 

두 사람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M 공원은 평소 두 명의 좋은 산책로였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도, 한여름의 태양이 흙을 달구는 대낮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이곳을 함께 걸었다. 결혼하고 난 후 초기에는 특히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꼭 이곳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꼭 이곳을 걸었고, 약속하지 않아도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그래선지 이른 저녁 시간이어도 M 공원의 내부는 익숙했다.

오이카와는 풀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어선지 꽃은 모두 시들어있고 벌레들도 고요했으나 상록수는 똑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해가 저문 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이런 시간대는 나무들이 초록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옷을 바꿔입는 때였다. 카게야마는 최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상록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었다.

오셨나요.”

오이카와가 가까이 가자 몸을 일으키고 작게 말한 카게야마의 코와 귀가 온통 새빨갛다. 오이카와는 눈을 끔뻑인 뒤 그의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얼음물에 얼린 나무껍질처럼 차가웠다.

뭐야,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한 시간쯤이요.”

나한테 전화한 건 10분 전이잖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카게야마는 시선을 오이카와의 발끝으로 옮겼다. , 이라고 반문하기 전에 카게야마가 손을 들었다. 윗단추 두 개가 풀린 제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빼낸 카게야마는, 달려있던 반지를 꺼낸 후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토비오,”

오이카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카게야마는 딱 들어맞는 반지를 바라보고 입김을 후 내뱉었다. 하얗고 투명한 입김이 두 사람 사이의 온기로 녹아 사라졌다. 오이카와의 왼손 약지에 걸린 차가운 은색 감촉. 오이카와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듯이 놀라며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의 귀와 목, 얼굴이 살며시 물들었다.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소행성처럼 반짝였다.

토오루씨가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결혼할 때.”

카게야마가 왼손으로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찬 공기에 식어있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안쪽에 새겨진 이름이 반대예요’, 제가 말했더니.”

토비오.”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으나 아직 말하지 말라는 듯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더니, 언제나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없는 사이니까 쉽게 잊을 수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둘 다 운동선수인 데다가, 동성혼이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반지를 계속 끼고 다닐 순 없다. 물론 주변 사람의 눈길을 신경 쓸 정도였다면 아예 이 결혼을 선택하지도 않았겠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약속을 맺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았다. 반지와 목걸이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손가락과 거울을 봐야만 비치는 목은 엄연히 되새김질의 정도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다. 두 사람의 약속은 타인보다도 쉽게 허물어지는 토대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1년이 지나 다시 결혼했던 그 날이 되면 그 날만큼은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자고. 서로의 주인을 찾아주는 의미로. 아직, 반지는 서로에게 있다는 뜻으로.”

오이카와는 짙은 보랏빛 하늘 아래 제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추위 때문인지 조금 파래진 입술을 못난 모양으로 내밀었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지만1년이 벌써 지났네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잠시 망설이는 듯 눈동자를 살며시 내렸다가 이내 곧은 표정으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어느새 비슷한 정도의 온도로 따스해져 있었다.

토오루씨랑 결혼하고 1. 솔직히 동거할 때와 다른 점은 잘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가 토오루씨로 달라졌다는 것과 반지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래도, 저와 토오루씨만의 날이 생겼다는 게토오루씨가 주신 반지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 토오루씨가 제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그 목에 걸고 다닌다고 생각하면조금, 흥분돼요…….”

마지막 말을 뭉그러뜨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카게야마를 보고 오이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가 온통 불그스름하다.

뭐야, 그게. 토비오쨩 뭔가 변태 같은 말했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째려보곤 입술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무어라 꿍얼거린다.

그냥, 그렇다고요.”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한번 피식 웃은 후 잠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고요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동이다. 다만 괜찮다. 카게야마가 옆에 있으면 오이카와는 가끔 심장병이 있는 건 아닐까 착각했다.

.”

오이카와는 제 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를 빼내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오이카와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만들어진 반지답게 꼭 들어맞았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같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1년에 한 번은 주인에게 가야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또렷한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다. 카게야마의 깊은 눈동자는 오이카와가 몇 시간이고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신비(神祕)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다시 한번 세게 마주 잡더니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차피 전 항상 토오루씨와 함께 있으니까, 반지도 토오루씨가 갖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언제나 같이 있잖아요.”

조금의 차이를 두고 두 번 대답한 카게야마는 빨간 코에서 보얀 숨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우린 홍차처럼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그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토비오 너, 갈수록 건방져진다.”

? 뭐가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은 후 고개를 돌려 쇄골과 목 사이 연한 살결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우왓?! , 하시는 거예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나려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이카와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이어서 동글 튀어나온 목젖을 앙 깨물자 카게야마가 공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 ,”

느꼈어?”

오이카와가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올린 오이카와를 노려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변태는 그쪽이면서.”

? 한 번 더 해 달라구?”

낮게 속삭이며 오이카와가 야릇하게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물린 목젖이 따끔거린다. 오이카와가 선수 치기 전 그의 움직임을 막듯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찬 기운이 이슬처럼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토오루씨 냄새나요.”

향수 냄새?”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의 온기로 어깨 한쪽이 온통 햇볕에 닿은 듯 뜨거웠다.

토오루씨의 냄새요.”

카게야마가 코를 묻은 채 강하게 들이마셨다. 살포시 눈감은 카게야마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차분히 눈꺼풀을 내렸다. 입꼬리가 보드랍게 올라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토비오쨩밖에 없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근육을 지지한 오이카와의 왼손에서 은색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토비오.”

?”

카레, 먹으러 갈까.”

.”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볼이 반딧불처럼 환하게 빛났고 입가가 꼬물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손으로 문지른 후, 그곳에 입술을 대고 온기를 느꼈다. 딱 적당한 온도로 끓은 카레와 같은 온기였다.

 

넌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 쪽이.’

흐르는 은하수처럼 푸른 눈동자, 소행성처럼 반짝이는 빛깔을 보면서 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지 나는 알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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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아본 바로는 일본 몇몇개의 구에서 승인한, 사실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파트너 제도에서 어느 한 명의
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조항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인게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흡수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부동성은 두 사람에게 맞지 않겠다 싶어
결혼했음에도 성은 그대로입니다 :)





  

** 카게야마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Happy Birthday, Maybe.

  



 

 

다녀올게요.”

, 잠깐만. 토비오. 손수건 챙겼지?”

.”

카게야마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남색 무지의 손수건은 작년 생일 때 그가 선물 받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조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잠깐만, 토비오. 정말 성질도 급하네.”

?”

왜긴 왜야? 오늘 몇 시에 들어오니?”

타박하는 말투였으나 얼굴에는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여성은 카게야마의 가쿠란 윗부분을 몇 번 다듬었다. 가쿠란에 붙어있던 하얗고 까만 먼지가 여성의 손끝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른다.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왼쪽 위에 뒀다가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오이카와 선배랑 만나고 올 건데.”

토오루랑? , 집에 데려오지 않고. 같이 엄마가 만든 케이크 먹자.”

여성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토오루라고 부르는 여성의 탓인지 카게야마는 볼을 살며시 물들였다. 카게야마와 여성이 사는 집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발걸음한 건 적지 않다. 가장 최근은 일주일 전 즈음이다. 그 날 여성은 카게야마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반숙 카레를 만들었고, 오이카와는 동백꽃처럼 환하고 선명하게 웃으며 맛있다고 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세차게 흔들었다.

됐어. 오늘은.”

오늘이니까, 가 아니고?”

여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카게야마는 잠시 다시 생각한 후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됐어. 괜찮아.”

그래, 알았어.”

여성은 카게야마처럼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그 손길을 따라 잠자코 몸을 숙였다. 여성의 가느다란 양팔 안에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가 쏙 담긴다. 여성은 저의 어깨보다 넓은 카게야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게야마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렸다.

토비오. 열일곱 살 생일 축하해.”

.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크겠지? 이제 엄마가 안아주지도 못할 수도 있겠네.”

내가 앉으면 되니까.”

그렇게 작진 않아!”

어쩌라는 걸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머니는 타박하듯이 카게야마의 등을 한번 강하게 때렸다. 어릴 때는 배구공 겨우 들었으면서! 투덜거린 후 카게야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성에게 묻어있는 계란찜의 단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아침밥을 다시 먹는 기분으로 여성의 등에 팔을 둘렀다. 보슬보슬한 밥과 포동거리는 계란찜, 고소한 된장국과 아삭거리는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십칠 년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올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 토비오가 엄마 아들이라 엄마는 정말 행복해.”

…….”

카게야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겨울바람이 카게야마의 등을 둘렀고, 어머니는 따뜻하게 보호하려는 듯이 바람에 휩싸인 넓은 등을 더욱 힘주어 감쌌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다녀와. 생일 축하해.”

여성은 카게야마의 차가워진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그 한쪽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여성의 온기로 촉촉하게 젖어 든 심장이 무거워서 서둘러 발을 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카레랑 케이크 만들어 놓을게. 조심히 다녀와.”

여성은 손을 놓기 아쉬운 듯이 카게야마의 손끝을 조금 세게 쥐었다. 그 손조차 문밖을 나서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며 살며시 놓고, 카게야마가 나간 현관에서 등을 돌렸다. 마음이 분주했다. 평소보다 정성스레 카레를 만들고, 카게야마가 맛있게 먹을 케이크를 구워야 한다. 올해는 레몬 필이 들어간 초콜릿 시트 케이크다. 겉면은 진한 다크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식용 금가루를 몇 개 올린 후 설탕 과자로 만든 작은 배구공을 올려놓으면 끝이다.

 

카게야마 토비오 열일곱 살의 생일은 오늘뿐이다. 여성은 그렇게 생각하면 유독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카라스노 선배들한테 아주 격렬한 축하를 받았나 보지?”

오이카와는 냉소를 지었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는 그의 뺨을 온통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바람 때문에 푸석해진 머리를 한번 거칠게 올리고, 오이카와는 후가느다란 입김을 뱉었다. 카게야마는 그 앞에서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양손 가득 들린 여러 선물 봉투에 꽂혀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치를 몇 번 살피다가 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꾸 못 가게 하셔서.”

그래서, 카라스노 선배들이 그 사랑스러운 후배인 토비오쨩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오이카와씨가 여기서 30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도 못 받게 하고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양손에는 선물 바구니를 들려서 이제야 겨우 내보냈다는 거지? 오이카와씨가 이렇게 추운 영하 5도의 날씨에 가로등 아래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겨우 토비오쨩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이카와는 천천히, 또박또박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살며시 들었던 고개를 푹 숙여 이제는 거의 90도 각도로 몸이 접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와중에도 카게야마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선물 봉투를 보며 몇 번 더 골려줄까 하다가 이내 한숨만 폭 내쉬었다.

됐어. 이런 날 너한테 화내서 뭐하겠어. 이거나 받아.”

? 이게 뭔데요?”

지금 네 양손에 들려있는 걸 보고서도 파악이 안 돼?”

오이카와가 건넨 건 아주 작은 상자였다. 손바닥 안, 핑거 푸드(finger food)마냥 조그만 모양 탓에 카게야마는 처음엔 오이카와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더한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야 카게야마는 손에 들린 짐을 내려놓고 오이카와의 선물을 받아들 수 있었다.

이게 뭔데요?”

눈을 빛내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까맣고 아름다웠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이 달빛 아래에서 고운 빛깔로 빛났고, 오이카와는 그 볼을 한번 쓰다듬으며 달을 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열어봐도 좋아.”

오이카와 선배 앞에서요?”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덧붙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마치 본능과도 같이 오이카와에게 다가서고 그 입에 입술을 마주쳤다. 소금 결정과도 같은 한기가 입술에서 입술 사이로 전달되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살며시 떨어질 때 즈음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카게야마의 뒷목을 조심스레 잡고 당겼다.

…….”

…….”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 키스. 여느 날처럼 지분거리지도 않고, 쪽 소리를 내지도 않고, 마치 그 입술이 있을 자리는 이곳이라는 것처럼 두 사람은 입술의 온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한쪽 손으로 오이카와의 볼을 더듬었다. 차가웠던 살결이 순식간에 보드라운 열기를 흡수한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잠시 뗐다가 오이카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이카와는 심기가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볼에는 왜.”

차가워서요.”

너 때문이잖아.”

그래서예요.”

…….”

그리 기분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핀 뒤 살며시 입술에 키스를 배달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겹쳐진 입술 때문에 카게야마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야 했다. 오이카와의 부석한 앞머리가 눈꼬리를 간지럽힌다.

토비오.”

…….”

선물. 열어봐.”

오이카와는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귓속을 침식했다. 따뜻하고 농밀한 혀가 귓바퀴를 천천히 타고 흘러, 카게야마의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알았으니까, 귀는 하지 마요.”

?”

……어쨌든요.”

카게야마는 험상궂게 노려본 뒤 오이카와가 준 작은 상자를 바라봤다. 연한 민트색 상자에 검은색 리본은 깔끔하다. 겨울에 어울리는 색조였다. 리본을 끌른 후 상자를 열면 달빛에 반사된 은색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그걸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두 눈동자의 방향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뭔데요.”

……저기, 토비오쨩?”

이거,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으로 뒤덮였다. 오이카와는 조금 놀란 것처럼 눈동자가 커져선 카게야마의 낯빛을 살폈다. 오이카와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큐빅이 사선으로 장식된 은색 반지였다.

생일이잖아.”

생일에 왜 저한테 이걸 주시는데요.”

…….”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그렇게 보신다는 건 알아요.”

무슨 소리야?”

카게야마가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그를 부르며 카게야마의 볼을 감쌌으나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드럽지만 완고한 움직임이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녹아있는 두 귀가 붉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오이카와의 옆자리를 스쳐 갔던 여자 선배들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언제나처럼, 그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저를 대하지는 말아주세요…….”

……….”

헤어져도 괜찮으니까, 오이카와 선배한테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있고 싶어요.”

왜 헤어지는 게 되는 건데. 누가 헤어진다고 하는데.”

오이카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카게야마의 왼쪽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의 약지에 은색 반지를 강하게 끼워 넣자 아야, 아파요! 카게야마가 불만을 토로했다.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오이카와는 반 오기로 카게야마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거의 끝까지 들어간 은색 반지는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튼튼한 뼈대에 걸렸다. 은색 반지가 걸린 카게야마의 약지, 그 왼손을 오이카와는 강하게 쥐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닿았던 볼로 끌어당긴 후 손을 감싸듯이 붙잡는다. 눈썹을 올리고 날카롭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오이카와는 내뱉듯이 말했다.

말해두는데, 토비오쨩이 사귀자고 한 거니까. 먼저 시작한 건 너여도 끝내는 건 나야. 알겠어?”

무슨 말이에요?”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는 카게야마 토비오고,”

오이카와는 저가 붙잡은 카게야마의 약지에 소리 내 키스했다.

아니, 내 인생에 토비오쨩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게 더 문제라니까.”

내가 왜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데.”

오이카와는 끝에 거의 화까지 내면서 카게야마의 약지를 작게 깨물었다. 아얏, 반지를 끼울 때와는 다른 형태의 신음이 카게야마의 얇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신음에 만족한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을 지었다.

생일 축하해, 토비오. 내년의 너도 나한테 주면 돼.”

……지금도 오이카와 선배랑 있잖아요.”

그래. 네가 매년 새로 태어날 때마다, 나한테 고백했을 때처럼 내 손을 잡아.”

왜 자꾸 그때 얘기를 하세요.”

토비오가 말한 거니까. 토비오쨩이 말한 건 기억하고 있어.”

오이카와는 설탕을 뿌리듯이 부드럽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아침, 여성과 끌어안았던 기억을 회상했다. 여성과의 기억이 달콤한 향내를 풍긴다면, 오이카와는 그 자체가 달콤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손을 빼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오이카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몇 번 비비적거린 뒤 기댄 채로 잠시 조용히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를 만난 순간부터 오이카와 선배의 토비오예요.”

알아.”

앞으로도요.”

그래.”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진 않지만 또 입술을 내밀고 있겠지. 오이카와는 눈에 선하게 떠올라 그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카게야마의 핀잔 섞인 불만이 딱딱한 오이카와의 어깨에 닿았다.

왜 내가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토비오쨩.”

?”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는 깊고 그윽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보고 있어. 네 입술에 키스하고 있어. 너를 안고 있어.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물론 그의 행동은 더욱 격렬하고 난폭한 때도 잦았다. 오이카와는 입으로는 달콤함을 자아내고 혀로는 열을 돋우는 사람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오이카와의 입술이 강하게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덮쳤다.

오이카와 선배, !”

키스에 연이은, 살이 찢기는 고통에 카게야마는 무심코 오이카와를 밀어냈다. 오이카와의 어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멀어진 곳에는 잇자국으로 낸 상처가 남았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 피가 몽골 올라온 상처가 붉다.

뭐하시는 겁니까!”

반지 같은 거야.”

반지는 끼웠잖아요.”

내가 왜 반지를 줬는지 모른 벌.”

눈처럼 순수하게 웃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상처 난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

어디 저 멀리의, 나와는 상관없는 A 씨 정도였으면 좋았을텐데.”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했다. 본인은 전혀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말하면서, 눈가를 찌푸린 오이카와는 겨울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오이카와 선배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닌 A 씨였다면 좋아했을까요.”

내가 사귀는 건 토비오쨩인걸.”

…….”

카게야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오이카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오이카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꼬리가 불쑥 올라간 채로 카게야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네가 A 씨였다면 좋아했어도 사귀진 않았을 거야.”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기준이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그런다는 건 알아요. 일부러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래? 많이 컸네.”

날카롭게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모래 속을 더듬듯이 헤집었다. 텁텁하고 더운 모래였다. 겨울, 영하의 온도에 사막과도 같은 뜨거운 모래는 눈 끝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를 모르는 A씨가 될 생각은 없다. 그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가 될 생각도 없다. 카게야마는 왼손 약지에 파고든 반지의 압력을 느끼면서, 저가 어쩌면 오이카와에 한해서 욕심쟁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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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일 축하글로 쓰려고 한 게 있었는데 너무 생일과 맞지 않는 글이기도 했고
심하게 제 개인적인 글이라.. 급하게 카게야마를 축하하는(?)글을 썼어요.
여러모로 많이 모자르고 부족한 글이 되었습니다만 카게야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만 있다면
다 괜찮지 않을까요?(아님

오이카와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 사망 소재 있습니다.

- 모브가 주인공입니다만 오이카게입니다.

- 글에 나오는 모든 의학 지식은 의학적 사실 및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전등 몇 개는 약한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교체할 때가 된 건지 계속 깜빡였다.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둘러싸인 방은 조금 추웠다. ?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구석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홀대와 수액. C대 병원 로고가 박혀있는 환자복. 병원? 그 외 몇 가지 단서가 이곳이 병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문, 손잡이가 없는 창문 등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라니? 양쪽 손을 들어 보면, 낯선 굳은살과 손금이 보였다. 내 손이 이랬던가? 아주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방 한쪽에 세면대와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미닫이문이 열렸다.

, 일어나셨나요.”

백의를 걸친 남자 의사 2명과 백의를 걸치지 않은 한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 두 명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둘 중 한 명은 키가 크고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썹 숱이 적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음하며 운을 띄웠고 운을 띄울 때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백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수많은 종류의 펜과 펜 라이트 등이 정돈되지 않고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주머니 아래 명찰을 보니 그의 이름은 하야마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의사는 인자한 미소 때문인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살이 두껍게 쌓인 양쪽 볼과 턱 아래는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힘겹게 셔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남성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깊게 우린 홍차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반짝거리며 그 색을 바꾸었고, 곧게 뻗은 큰 키와 몸에 좋게 붙은 근육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의사 두 명과는 거리를 띄우고 미닫이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의사 둘 중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하야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

그의 말을 무시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원치 않게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지, 아닌지 조금 망설였다. 아주 잘생긴 미남미닫이문 옆에 서 있는이 차분한 표정으로, 동시에 꿰뚫을 것처럼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물빛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 짙은 남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 걸친 코트는 끈이 없고 허벅지까지만 내려오는 얇은 재질이었다.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조합이었다.

하야마는 내 무언(無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고 나를 마주 봤다.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였다.

많이 어지럽진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다른 증상은요?”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이라고 답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의 목소리에 더 큰 의문을 느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성인 남성의 목소리라기보다 조금 가볍고, 원한다면 가성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목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야마는 흡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살이 적은 얼굴 전면에 근육이 경련하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힘겨운 듯 금방 미소를 풀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왼쪽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바라봤다. 수액은 크기가 컸고, 무어라 적혀있었지만 앉아있는 상태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야마는 다시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의 안경이 다시 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뇌 이식 수술이요.”

뇌요?”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꼼꼼히 주변부를 만져보자 무언가 수술 자국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뒤통수에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신경 다발의 이식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12중 추돌 자동차 사고였죠. 당신의 몸은 아주,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가슴 아래쪽이 아주 납작하게 구겨져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만은 온전했죠. 뇌가 살아있으니 숨도 쉬고 있었고요. 기흉과 출혈로 호흡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뇌에 영양을 공급한 건 사실이죠.”

하야마는 말을 마칠 때마다 숨을 고르고 안경테를 올렸다. 나는 남성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하야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자 구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1층 혹은 2층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환의 사이로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계절. 날씨. 기억이 날 듯 말 듯 모호했다. 시린 이의 계절. 하늘로 높게 치솟는 연기의 계절. 바람이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들이대는 계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야마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기존에 뇌사로 사망 시 기증을 원한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에요.”

기증, 수술이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 저기.”

부끄럽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증, 수술, 뇌사 등 단어 자체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들어오기 전 봤었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당신은 젊었고, 수술을 서두른다면 뇌 기능이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말 그대로 몸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씨는 머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을정도로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고, 하야마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는 다른 의사 한 명과 남성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저들과의 눈빛 대화를 끝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빛 눈동자의 남성은 이제 살며시 웃고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가 인사와도 같다는 듯이 남자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현재 당신은 기증자인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쓰고 있습니다. 의족이라 말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의미죠. 뇌 이식 수술 기술은 현재 항생제 및 면역억제제만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하야마는 고개를 강하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그는 얇게, 아주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몇 번 뒤적거렸다. 하야마가 서류를 볼 사이 다른 의사 한 명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언어에 문제가 없으신 걸 보니 뇌 기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함 한 번 알려주시겠습니까.”

성함성함이요?”

성함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성함. 이름. , 나의 이름. 난 누구인가. 내가 누구지. 지금 현재,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이 더러운 기생충은, 뭐지. 심장 고동이 거세지면서 더욱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고조되는 박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대를 튀어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남성의 깊은 눈이 하지 말라는 듯 강한 눈동자로 나를 꽉 붙잡았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제 이름, 말이죠.”

. 그렇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의사 한 명이 천천히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던 하야마도 나를 바라봤다. 모두가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걸걸한 사막처럼 모래알갱이가 씹히는 착각도 들었다. 다만 나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이자 입술이었다.

그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지. 무엇이었을까. 낯선 목소리를 가진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입술과 목을 빌려 이름을 빚었다.

스도 하루나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 강하게 소리를 냈다.

 

 

 

 

 

 

 

Lost in Memory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거의 보름 가까이 신세 진 병원 입구를 나서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하늘의 계절이었다. 지금까지 지냈던 15층 병동을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 병동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야마도 만날 일이 없었다. 외래에서는 카노우 교수님을 만날 테니까당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분이 교수님이란 걸 내가 안 것은, 일주일이 지나 그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였다. 두툼한 잠바를 챙겨 입어도 목이나 허리, 발목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겼다. 스도는 얇은 입김을 새어 보내고 다리를 옮겼다. 남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원 수속 끝났어?”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을 한 그는 첫날과 비슷하게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밝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리는 코트는 그의 큰 키와 퍽 잘 어울렸다. 머리 한쪽을 빗어 넘기고 왁스로 고정한 그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났다.

. 방금요.”

첫날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자주 스도의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스도는 그와 대화를 하며 병원 생활을 적적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대부분은 기억과 관련한 상기 훈련이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의사 몇 명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가지였다.

이름은 스도 하루나, 현재 22살로 미야기 현 K 대학교에 재적 중이었다. K대학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도는 학생증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기에, 스도는 일부러 거울을 보진 않았다. 스도는 기억 훈련을 지속한 뒤 그가 여동생이 한 명 있는 4인 가족의 장남이면서, 2년 전 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그 이후 또 이런 끔찍한 사고에 휘말리다니 운도 없다며 스도는 가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대학을 1년 휴학한 뒤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까.”

남성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넓은 어깨는 사진으로 봤던 그의 코트 위 모습보다 더 넓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항상 사진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 눈동자의 빛깔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스도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발음해서일까. 예쁘고 앙증맞게 들리는 그 이름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스도는 그가 없을 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고는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현재 도쿄에 있는 A대 졸업반 4학년이다. 배구로 유명한 A대 안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인 세터로 꽤 유명한 사람인지 병원에서 스포츠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면 배구란에 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실려 있기도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T대 상대로 압도적 센스 자랑

“A대 배구부 공식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역량 분석

 

스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그가 고교 3년 동안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과 어떤 스파이커와도 금방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걸 스도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는 낯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저가 그의 웃는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도는 입술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만 웃은 뒤 기사 끝쪽에 달린 조막만 한 문구를 보았다.

 

뛰어난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 전격 분석 :: 월간 밸리 다음 호 게재 예정!”

 

지금의 스도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기사였다. 해당 홍보 문구가 달린 월간 밸리가 이번 달 잡지이니 월간 밸리 다음 호에 스도가 원하는 기사가 실릴 예정이었다. 스도는 서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도가 다시 잡지를 뒤적이며 오이카와의 기사를 찾는 순간 적당한 세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콩콩 뛰는 심장 때문에 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을 옷차림치고는 지나치게 얇게 차려입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한번 바라보고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찬바람의 꼬리가 잘린 덕분에, 방은 비슷한 정도의 온기를 유지했다. 오이카와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스도의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스도는 목을 가다듬고 오이카와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어 곱게 접고 입김을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정을 거쳤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부모님, 여동생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천애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신경 써 준 걸까. 몸의 주인이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관계를 그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정의했다.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서 이제 성인이 다 된 마당에, 그것도 뇌사 판정을 받고 다른 사람의 뇌가 이식된심지어 기억마저 다른자의 병문안을 오는 게 평범한 걸까. 그것도 도쿄에서 여기, 미야기까지. 스도는 제가 생각하는 평범에 대한 정의에 자신이 없어졌다. 평범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개인별로 다르니, 오이카와에게 그것이 평범이라면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도는 빛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질 나쁜 사람처럼 웃었다.

기증자를 아는 사람이 오는 건 불쾌한가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스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오이카와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스도의 옆에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홀대에 닿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수액 백이 달려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말없이 지켜봤다. 스도를 찾아오는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스도가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이카와 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알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알고 싶었다. 거울을 보면 보이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어쩐지 금세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처럼 우수를 두르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라.”

어차피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그래. 좋아.”

오이카와는 스도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지못한 듯 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도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그러한 행동이, 저가 거울을 일부러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러다가도 스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심산인 듯 스도만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럴 때면 지금 자신의 얼굴혹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는 오이카와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늦게 온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찬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산스럽게 코트를 벗어 정리하고 면회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미안, 이와쨩이랑 얘기하다 보니.”

…….”

스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한 박자 느리게 ,’ 중얼거리더니 스도의 손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 이와쨩이라는 건 내 소꿉친구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괜찮아요.”

스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사과해야 할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것. 스도는 그 점에 있어 오이카와를 이해하고 싶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토비오쨩이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실제로 오이카와는 때때로 스도를 잘못 부르고 나서 빠르게 정정하곤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 스도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구름 없는 하늘이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달력을 봤을 땐 벌써 한 가을이었다. 줄곧 병실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수 없는 스도는 오이카와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가늠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계절 상관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리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스도는 다시 떠올렸다. 하야마는 여느 때처럼 이젠 짜증 날 지경인 운을 떼더니 약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퇴원합시다. 몸에 있던 찰과상, 외상도 다 없어졌고. 기억이 아직 부정확하지만,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 한 명에게 스도씨 내일모레 퇴원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딱히 퇴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스도는 망설여졌다. 퇴원하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 그는 기생충이었다. 스도는 틈이 나는 대로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이전 몸에 대한 기억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이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도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 토비오씨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죠?”

. 맞아.”

카게야마 토비오씨아니,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실래요? 카게야마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오이카와는 창가에서 눈을 옮겨 스도에게 향했다. 그는 스도의 환자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넌 이제 스도 하루나인걸.”

오이카와씨 말씀대로, 전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이카와씨가 듣기엔 웃긴 소리일지 몰라도, 전 카게야마씨를 알고 싶어요. 알고, 기억하고 싶어요.”

스도는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스도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바심이 커졌다. 지금 오이카와를 잡지 않으면, 그가 영영 스도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도의 병실에 찾아올 때도 그저 방문객이었고, 오이카와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도는 그와 영영 타인이었다.

저 내일모레 퇴원합니다.”

다행이네. 축하해.”

그러니까, 퇴원 날 딱 하루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저를 데리고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세요.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좋아.”

그러지 말고, 부탁드려요! ……?”

좋다고. 데려가 줄게. 단 하루 동안.”

오이카와는 어느새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도중이었다. 스도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심산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빨리 승낙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어안이 빠진 표정에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작게 퇴원 축하해중얼거린 후 밤색 코트를 날리며 나갔다. 스도는 그 뒤로 이틀 내내 오이카와가 데리고 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틀이 지난 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앞에 나오자, 오이카와가 약속대로 서 있었다.

약속 지켰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그는 어쩐지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도는 잡지에서 말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의 다양한 매력에 대해 떠올리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 사이에서 모델처럼 웃다가도, 여름 한 철의 햇빛이 어울리는 소년처럼 웃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스도를 데리고 간 곳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이었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봄고 지역 예선 결승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스도는 어쩌면 난생처음 올지도 모르는 지역 체육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이카와가 놓고 간다한마디 한 뒤에야 체육관 실내로 들어갔다.

TV 같은 곳에서 비춰주는 코트 사이드가 아니라, 한쪽 코트 뒤에 앉자 색다른 시야가 보였다. 스도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스코어는 2 1. N 고교가 이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밀집해서 앉은 곳에서는 응원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호루라기 소리와 선수들이 소리치는 소리, 그 외에 운동화 밑창과 바닥이 마찰하여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도는 체육관 내부에 응집한 공기가 답답했다. 답답한 심장을 죄이는 건 떨림이었다. 스도는 제 쪽에 보이는 N 고교 선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선수들은 모두 공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로 동료와 눈 맞춤을 하고, 감독과도 손가락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인 만큼 좌석은 드문드문 비어있을 뿐 그 외에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스도의 바로 뒤에서도 남자 두 명이 현 상황에 대해 중계를 하고 있었다. 스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터, 리베로, 미들 블로커, 스파이커코트에서 보니 좀 더 잘 알겠네요.”

…….”

오이카와는 스도와 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갑작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몰래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저를, 오이카와는 분명 꿰뚫어 본 것이리라. 스도는 괜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입을 다시금 열었다.

오이카와씨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포츠 잡지나 월간 밸리 같은 걸 병원에서 봤어요. 초보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속공이 성공해서 선수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장면이 보였다. 눈을 굴려 세터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도는 속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저런 역할을 하는구나. 공을 올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누구나 세터에게 공을 보낸다. 중요한 역이구나. 스도는 잡지 어딘가에서 본 코트 위의 지휘자라는 문구를 기억했다. 굉장한 기교를 부리거나 엄청난 음색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가 있음으로써 코트는 새롭게 태어난다. 공을 올리는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시합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스도의 손끝이 간지럽고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분명 배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손끝을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겠지. 스도는 뛰어 내려가 코트 안에 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심한 편두통이 신경을 좀먹었다. 이게 바로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거겠지. 스도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봤다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토비오도 세터였어.”

.”

짜증 나는 천재였지.”

오이카와는 이가 보이게 미소 지었다. 호전적인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댔다. 스도는 저가 병원 간호사에게 졸라서 얻어낸 월간 밸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이름은 월간 밸리 곳곳에 등장했다. 특히 오이카와가 적혀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뛰어난 세터이자 고향이 같은 중학교 선후배 두 사람에 대한 드라마는 흔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유일하다시피 한 월간 밸리 인터뷰는 스도가 가장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식 실업팀 선수도 아니고, 대학 배구팀 선수에게 그런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질문에 아주 간결한 단답으로 응한 카게야마도 대단하다 싶었다. 분명 고집이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많은 분이 원하셨는데요. 카게야마 선수에게 오이카와 선수란?

카게야마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한번 이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배구에서도 저번 시합 때 이겼던 걸로 알고 있고요.

카게야마 항상 저보다 저 앞을 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그 등을 잡을 때면 이기고, 놓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오이카와씨의 등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구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이카와 두 명 모두 이후의 인생이 더 촉망받는 인물이었겠지. 스도는 카게야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가 고집이 세고 목표 의식도 있으며 심지어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에는 매번 제 머리를 이파리 따듯이 똑 떼서 그날의 사고 현장에 도로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폐가 저를 거부하듯 숨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스도는 기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사진으로 보는 카게야마는 거울로 보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든 토비오쨩은 스도한테 몸을 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걸까요.”

오이카와의 어조는 상냥하면서도 냉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N 고의 세터를 쳐다봤다. 시합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2 2, 마지막 세트를 앞둔 상태였다. N고 세터는 몸을 풀며 동료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N고 세터가 한 번 빙긋 웃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

, .”

스도도 몸을 일으켰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는 말로 하지는 않아도 금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스도는 다만 그걸 느끼곤 했다. 카게야마라면 그 이유를 알았을까. 스도가 묻지 못하는 질문이 한두 방울씩 모여 마음속에서 이미 샘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음으로 스도를 데려간 곳은 센다이 기차역仙台駅이었다. 센다이역 내부로 들어갈 때 스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차로 가야 하는 곳인가요?”

걸어갈 수 있으면 기차역으로 데려오지 않아.”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스도는 멋쩍게 대답한 뒤 오이카와의 뒤를 마냥 따라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미야기 출신이나 대학은 도쿄에 재적 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12중 추돌 사고는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겪은 일이었다. , 도쿄역에 가려는 건가. 스도는 제 나름대로 답을 도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이카와가 건넨 기차표는 스도의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을 뿐이었다.

 

미야기현宮城県 센다이역에서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데라역山寺駅까지, 다이토大東산을 지나 약 한 시간 삼십 분. 스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에 탑승한 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도쿄역이 아닌 건 스도에게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데라에 카게야마 토비오와 관련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기차표를 건넨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도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오이카와가 그의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센다이시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아무런 제약 없이 높이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마주 앉아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도 마주 앉은 승객이 보였는데, 승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스도는 그 승객 중 한 명이 N 고의 리베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연달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배구 경기가 떠올랐다. 세터의 움직임과 공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스도는 하나하나를 꼼꼼히 떠올렸다.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창밖을 보다가 곁눈질로만 스도를 마주 봤다.

, 배구는 잘 모르지만.”

스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세터보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하는 건 스도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었다.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스도는 배구 초보자에 불과할 텐데저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우습게 여길 게 분명했다. 스도는 양 귀 끝이 보얀 온기를 띠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스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도는 내가 배구하는 걸 본 적이 있어?”

, 아뇨.”

그렇지?”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감정이 그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배구를 가볍게 논한 건 스도의 잘못이었다. 스도는 잡지에서 얻은 그의 지식으로 감히 카게야마인 것처럼그를 평가한 게 부끄러웠다. 스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지 않자,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위로라도 건네듯 부드럽게 말했다.

토비오쨩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네.”

카게야마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말한 대로야. 짜증 나는 천재.”

엄청 똑똑했나 봐요.”

오히려 반대야. 너무 멍청해서 힘들었다니까.”

스도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는 것에 왠지 모를 짜증이 일었다. 거울로 본 카게야마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족함 없는 얼굴이었고신분증 너머로 본 자신의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렸다오이카와가 표현하는 만큼 멍청해보이진 않았다. 스도가 짜증이 난 듯 눈가를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니야?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보다 멍청한 건 다 알고 있네요.”

말을 마치고 스도보다 더 놀란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스도의 눈을 피한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속으로 있는 힘껏 후회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의 억양, 어조 등 전부 스도에게 어색했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토비오쨩으로 잠시나마 착각이라 해도 된다면한 게 분명했다. 스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스도는 만약 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뭐가?”

토비오쨩이라 부르셔도요. 오이카와씨에게는 토비오쨩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이카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확고하게 선을 그어 놓았던 토비오쨩스도의 경계가 아주 잠시라도 허물어졌던 건 그의 실수였다. 또한 그 실수가 단지 순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님을 그도 스도도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스도.”

오이카와는 긴 공백 끝에 답했지만 스도는 그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나온다면 스도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도는 다만 작게 입을 내밀고 괜찮은데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행동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스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 두 명을 보다가, 그들이 내린 뒤에는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창가와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등성이 보였다. 다음 역인 야마데라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가을 후반부로 접어든 산은 붉고 노란, 때로는 주홍빛의 군집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스도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오른쪽 눈동자 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도는 이 풍경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여행잡지 어딘가에서였겠지. 본인이 한가롭게 여행 잡지나 들춰 볼 만큼 여유로운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산등성 사이의 움푹한 곳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냇물은 햇빛을 받아 시린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은 스도에게 어색했다. 마치 뒤바뀌듯 카게야마 토비오의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스도는 그 사실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눈으로 새하얀 하늘과 구름 안개가 드리운 산, 날 선 냇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오이카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스도에게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먼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스도 또한 그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스도는 입고 있는 잠바를 여몄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웃었다.

추워? 나약하네.”

오이카와씨야말로 코가 빨간데요.”

난 원래 코가 빨개.”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코를 한번 훌쩍였다. 얇은 셔츠에 코트 차림이니 추울 게 분명했다. 산에 올 거였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스도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기차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높게 굽이진 산길과 그 사이사이의 절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절도 언뜻 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꼭대기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춥다고는 하지만 이 계절에 눈이라니 농담이 심했다.

갈까.”

가다뇨?”

저곳. 토비오와 간 적이 있어. 야마데라山寺.”

그 이름 그대로, 산속에 이어지는 절이었다. 오이카와는 놀리듯이 정상까지는 1,000개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야 해. 스도, 괜찮겠어?’ 물었고 스도는 대답 없이 입을 내밀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알 수 없었다. 운동선수이니 그럭저럭 갖춰져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몸이 저를 잘 이끌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계단을 앞서 걷기 시작한 건 오이카와였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행이었지만 1,000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스도는 오르는 중간중간 자신이 올라온 길을 뒤 돌아봤다. 흰 눈덩이가 얼룩처럼 검은 산 주변에 퍼져 있었다. 스도와 오이카와가 내렸던 기차역이 이슬만큼 작게 보였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경련했다. 확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동자는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도는 다시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전 카게야마씨와 뒤바뀐 사람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사잇길로 난 절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직 산 정상의 사원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찬 공기가 온몸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왔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에는 코트가 잘 어울렸다.

제가 생기고 카게야마씨가 사라졌으니까요.”

…….”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오이카와씨 외에 다른 사람이 절 본다면 절 카게야마씨로 볼까요, 스도로 볼까요? 겉모습은 카게야마씨잖아요.”

넌 스도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스도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눈을 닦아놓은 돌계단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한심한데도 닦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카게야마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스도는 지금 느끼는 저의 감정이 맞는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맞든 맞지 않든, 그건 분명 스도의 심장을 쪼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정상에 놓인 정자에는 네모난 상자를 두르듯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마를 가를듯한 추위였다. 오이카와는 죽는소리를 내뱉더니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값비싼 코트가 나무 의자에서 튀어나온 조각에 헤집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도는 깊게 심호흡했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 테두리에 몸을 붙이고 숨을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 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바람 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눈은 이세계(異世界)의 물질 같았다. 산등성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콰 코, 눈 중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스도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선 그는 건조한 시야 안에서 눈처럼 투명했다.

토비오쨩이랑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오이카와씨도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웬 건방진 소리야?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스도의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스도는 말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현하고 산등성을 다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스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스도.”

.”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오이카와는 애원하듯이, 동시에 마치 이뤄지지 않을 걸 부탁하듯이 말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배구를 하라는 부탁은 스도이기에 하는 부탁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스도 하루나이기에. 문득, 스도는 산 사이에 걸친 투명한 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매번 스도를 조용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는 어떤 관계예요?”

중학교 선후배 사이.”

오이카와는 금방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다시 묻냐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이 하얀 입김에 뒤덮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입김은 그 자리에서 녹았다.

아뇨, 그거 말고요.”

스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스도의 눈동자와 겹쳤다. 그의 눈을 빛내고 있는 홍차 빛 눈동자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비추고 있었다. 스도는 바로 그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책에 적힌 문구를 읽듯이 스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가 거울에서 봤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조용했던 눈동자, 저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던 푸른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담기면지독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채색됐다.

 

 

 

 

 

 

미야기 역에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하늘 한쪽에 걸린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푸른색부터 보라색까지의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하늘에 펼쳐졌다. 오이카와는 기차역에서 나와 스도를 마주 보았다. 그는 조금 서툴게 웃었다.

조심히 가.”

스도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스도와 했던 약속을 지킨 그는 두 번 다시 스도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만날 수 있죠?”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스도예요, 아니면 카게야마씨예요?”

오이카와는 안타깝게 웃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이 그의 머리에 닿아 묘한 빛을 자아냈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조금 매만졌다.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가 결국 스도를 마주 봤다. 그는 마치 하야마처럼 운을 뗐다.

짓궂네. 토비오쨩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씨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오이카와씨도 그걸 알고 있고요.”

……갈게.”

오이카와는 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실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봤던 그의 등이었다. 스도는 오렌지빛에 휩싸여 가는 그의 등을 보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어깨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오이카와가 멀어질수록 오렌지빛, 주홍빛 하늘이 번져 땅을 덮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퍼지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못 본 건가. 눈을 한두 번 비비다가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그러지는 차들. 치솟는 불꽃.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살코기가 타는 냄새. 어그러진 모습으로 자동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귀 양옆에서 울려 퍼지면서 스도를 덮쳤다.

아악!”

스도는 그 자리에서 고꾸러졌다. 앞으로 주저앉은 스도는 심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 머리가 아팠다. 심한 통증과 구역질이 위를 덮쳤다. 토하고 싶은데 창자를 한 꺼풀씩 칼로 벗겨내는 것 같은 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강한 빛과 함께 장면 장면이 튀어나왔다. 스도의 피에 젖은 신분증. 오토바이 아래에 깔아뭉개진 청년의 모습. 청년이 쓰고 있던 헬멧 사이로 검붉은 빛 피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와 다리를 적시는 장면. 다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다리의 근육? 하얀, 흩어진 살점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것은? 뇌가 갈고리에 채인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며 스도는 의식을 끊었다.

 

 

 

 

 

 

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몸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하얀 공간이었다. 저 앞에 오이카와가 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얇게 입은 옷차림. 곧 죽어도 멋 부릴 것 같은 그는 여전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카와 주변으로 새하얀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옆을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앞의 사람만 보고 있었다.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쳤고, 저 앞에는 다른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홍차 빛 눈동자에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번의 그는 말이 없었다. 넓은 어깨가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쳐져 있기도 했다. 걸어갈 때마다 오이카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흰 공간 속의 그는 하얗고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걷던 중 천장혹은 하늘이라고 해야 옳을까에서 작은 솜 덩어리가 눈처럼 떨어졌다. 솜사탕을 일부 뜯은 것처럼 엉성한 솜 덩어리는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 솜 덩어리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의 몸에 닿아 녹았다. 그 순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걸어가며 솜 덩어리 하나가 몸에 닿아 녹을 때마다, 하나씩.

웃지 말고.’

오이카와가 서투르게 웃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양팔을 폈다. 팔에 닿아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오이카와가 서서히 명확해졌다. 멈췄던 기억의 시냇물이 소리 없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담갔다.

 

전 오이카와씨를 좋아하는데요.

「…알아.

오이카와씨는요?

글쎄.

「…그렇게 대답하는 거 반칙이에요.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말을 안 하시잖아요.

「…토비오.

 

배구, 계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엇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해.

 

그럼 오이카와씨를 만날 수 있나요?

 

 

 

 

 

 

나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백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셨나요. 괜찮으세요?”

그의 왼쪽 가슴에 명찰이 달려서 흔들거렸다. 하야마라는 이름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펜 라이트를 들어, 내 눈 양쪽을 번갈아가며 비췄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펜 라이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몸 이곳저곳이 아파서 몇 번 뒤척이다가 일으켰다. 방은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에는 C대 병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병원? 왜 병원에? 고개를 갸웃하자 햐아마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서류를 앞뒤로 뒤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가 귀 뒤로 빗어 넘기려는 옆머리가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이에요. 길가에 쓰러졌던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또 기억에 변화가 있으셨나요?”

쓰러졌다고요?”

.”

자동차, 사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함,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안경을 올렸으나 금세 다시 내려갔다. 그는 내가 말하기 전 적어도 열 번은 안경을 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요.”

……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야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종의 발작까지 일어날 것 같은 격양된 움직임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기억? 돌아왔냐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야마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더니 의자에 다시 천천히 앉았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열심인 것 같았다. 낮게 읊조리듯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보이거나, 무언가 환청이 들리거나 하진 않죠? 몸에 변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물감이라든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등

없는 것 같은데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야마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보았다. 숱이 적은 눈썹 아래로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해리성 기억 장애였습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게야마의 입을 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과거나 자기 신분 및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기억장애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의 행세를 하고, 본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중에는 새로운 이름, 직장, 주소 등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요.”

정체성?”

보통 자연적으로 회복합니다만, 기억장애 기간의 일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는 카게야마씨가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리성 둔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스도 하루나라는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가족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도 하루나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물론 그렇죠. 원래 그렇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그러니까, 그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게야마씨는

 

 

끔찍한 사고였다. 카게야마가 통증을 이기고 눈을 뜨자 주변은 불바다와 같았다. 치솟아 오르는 불길, 무언가 타는 냄새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이 귀를 메우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불꽃, 불길이 입을 벌려 차와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어지럽고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야를 둘러보았다. 몇 걸음 앞에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 한 대와 차 한 대에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의 헬멧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카게야마에게까지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는 기어코 구토하고 말았다. 그가 쓰러진 옆으로 피에 젖은 지갑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지갑에 손을 댔는지 카게야마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누군가를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지갑을 열고, 그의 신분증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는 여성과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 작은 여자아이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가족사진이었다. 신분증에는 사진 속 청년이 남성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미야기 현 소재 K 대학교 학생증. , , 하루, 카게야마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문득, 다리로 시선이 향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욱 심해져 절단된 것 같이 타는 통증이 번졌다. 검은 피칠이 된 다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본 다리 주변에는 타고 있는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살점? 벌려진 다리, 뿌연 시야 안에서 헤쳐진 저의 다리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쇠로 만든 종으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머물렀고,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울 것만 같은, 울고 싶은 감정의 불꽃이 심장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병원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씨는 그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도 하루나의 행세요?”

. 자신은 스도 하루나인데, 도대체 왜 자기를 자꾸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부르냐며. 몇 번 과격한 행동도 보였죠. 불안한 심리에서 표현된 행동화(Acting-Out)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타국에 계신 카게야마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격으로 온 오이카와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오이카와씨가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움직였다. 하야마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의 말에 따라 저희는 뇌 이식 수술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쳐서 당신이 스도 하루나처럼 느끼게 만들었죠. 강제로 현실을 들이대는 방법이 성공하리라는 법도 없고, 더 강한 충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다리는 정상이었고 스도 하루나로서의 당신이 회복할수록 다리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신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점뿐이었죠.”

다리. 카게야마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멍을 포함해 아직 피부가 완전히 수복된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하면 매끈한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야마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서류에 무언가 적어나갔다.

퇴원 후 오이카와씨와 외출을 한 당신은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무언가 더 궁금한 건 있나요? 기억에 혼란이 있거나 한 점은요? 기억장애 기간의 기억이 없는 건 정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야마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눈을 있는 힘껏 구기면서까지 웃는 게 정말 기뻐 보였다.

정상, 이라고요?”

카게야마는 따끔거리는 머리 한쪽을 짚었다. 단풍나무 위에 포개져 있던 눈 더미, 골목마다 숨어있던 절과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 조각 조각나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기억해내려 하면 오이카와의 안타까운 미소만 떠올라서 이어지는 조각들을 맞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씨는요?”

하야마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어요.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하야마가 주의를 주었으나 카게야마는 두 다리를 딛고 다시금 일어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외투를 걸치고 카게야마는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어서 가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자꾸만 재촉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웠으나 카게야마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야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씨?”

가야 해요.”

어딜 가시게요? 아직 안 돼요. 인지 사고 검사를 하셔야죠. 어지러우실 텐데.”

가봐야 해요. 오이카와씨를 만나야,”

카게야마씨!”

하야마가 막으려고 했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카게야마는 그저 달렸다. 마침 눈앞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뛰듯이 몸을 구겨 넣고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저 열리기 전에 뛰었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몇 번이고 본 오이카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환의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몸을 바람이 거칠게 덮쳤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절대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한 가닥씩 몸을 휘어 감았다.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데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씨!”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때렸다. 하이얀 솜 덩어리가 한두 개씩 흩날렸다. 어머, 이 시기에 눈?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말을 나누며 하늘 사진을 찍었다. 꿈에서와 달리 회색빛깔 하늘에서 찢긴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눈이 닿아 녹아도,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향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만날 수 없을 거야.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소리치고 싶은 입술이 은색 한숨만 연신 내뿜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엷게 웃음 짓던 그는 드물게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와 겹치고, 그의 손이 카게야마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배구를 하면 만날 수 있어.”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울기보다 미소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배어 나오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 사랑은 배구니까.”

 

 

 

 

 

 

 

 

 

- 해리성 둔주는 실존하는 기억장애입니다만 글 안에서의 내용은 픽션입니다.

- 해리성 둔주의 개념을 참고한 문헌 :

양 수 외(2013). 정신건강간호학. 서울, 현문사.

  





잭과 마법사







 

다녀 왔습니다.”

카게야마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꽉 조여 맸던 운동화 끈을 풀기보다, 손으로 직접 운동화 뒤쪽을 누르며 신발을 벗었다. 연습이 끝난 건 오후 8시 반. 생각보다도 늦은 시각이었다. 며칠 전 비가 온 뒤 갑작스레 차가워진 바람 한가운데를 걷다가, 카게야마는 반년 전부터 사는 동거 집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다녀왔다고 고하는 건 아직 낯설고, 조금은 낯간지럽기도 했다. 매번 말하게 되는 건 억지로 만든 버릇이었다. 그가 가끔 내킬 때 말해주는 어서 와를 듣기 위해 만든 고집이었다.

“Trick or treat!”

신발장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기도 전에, 불쑥 검은 물체가 시야를 가렸다. 초점을 맞추고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 생긴 모자였다. 표면이 전부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별가루가 뿌려져 있었지만, 만지면 전부 손에 묻어나올 것 같이 생긴 싸구려 모자. 모자의 모양을 따라 찬찬히 훑어보면 독특한 모양이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챙이 넓게 벌려진 모자는 언젠가 봤던 것 같은 마법사의그래, 마법사 모자였다. 모자 안쪽에는 가격 태그가 아직 붙어있었는데, 크게 ‘200이라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모자 옆으로 시선을 비껴 보내자 동거인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입술 끝이 묘한 모양으로 올라가고, 그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반년 전부터 함께 사는 동거인이자, 그의 연인본인 말로는 사귀어 주고 있는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평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Trick or treat’라니까? , 어서.”

오이카와는 모자를 제 몸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다른 한 손을 쑥 내밀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는 굳은살과 긁힌 상처 자국이 가득했고, 손바닥에는 곧은 손금 몇 개가 줄지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과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저건. 영어라는 건 알겠는데.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줄 알면서 말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 생각하니 작은 짜증이 일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귀찮은 얼굴을 하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온 손이 오이카와의 온기와 입맞춤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쳐 내더니,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진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얏! 뭐예요, 갑자기!”

간식 없지? 그럼 벌을 받아야지.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기어들어 와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 거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조금 전의 그의 미소는 온 데 간데없었다. 오이카와는 이마를 연신 문지르는 카게야마의 머리에 마법사 모자를 푹 눌러 씌우더니 자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가려진 시야를 보상하고자 마법사 모자를 고쳐 썼다. 오이카와가 있는 거실 왼쪽의 부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와.”

…….”

무어라 해주고 싶은 말을 눌러 삼켰다. 이제는 또 앞선 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부르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신발을 마저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흰색의 2인용 소파가 정면으로 보였다.

거실부터 침실 및 욕실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가 선택한 색상의 벽지와 가구들이었는데, 오이카와의 취향은 평소 카게야마가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인테리어 전반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떠올릴 때 함께 떠올리던 밝고 빛나는 색조가 아닌, 화이트 앤 블랙의(가끔 그레이가 섞인) 침착하고 단정한 색조였다. 가구들도 단순한 점과 선, 면의 조합과도 같이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것이 많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동거 생활에 쓸 가구를 고르러 유명 가구 매장에 가서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보며, 그때도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씨 사고 싶은 것 사세요.’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오이카와는 찬찬히 웃으며 대답했다. 카게야마도 그 대답 뒤에는 입술을 다물고 묵묵히 그가 고르는 가구들을 지켜봤다. 오이카와가 부엌의 아일랜드 카운터에 놓을 의자로 온통 검은색의 바 스툴(bar stool)을 고른 뒤,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내뱉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랑 살면 이래도 될 것 같아서.’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가구를 고르든, 어떤 색조의 벽지로 방을 덮든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그와 달리 매우 신중히 색상과 디자인을 꼼꼼히 따졌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카게야마와는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산 물건 중 가장 밝고 투명한 색상은 연한 물빛과도 같은 민트색이었다. 그건 두 사람용으로 산 더블베드를 덮을 침대 이불이었다. 100% 솜이불에 적당한 두께로, 아침에 추위를 타는 카게야마와 밤에 추위를 타는 오이카와 모두 만족하고 잘 수 있는 적당한 온기를 선사했다. 카게야마는 왜 침대 이불만 그리 밝은 색상을 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도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그 민트색 이불만은 특별한 무언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왜 침대 이불이어야만 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토비오. 이리 와 봐.”

오이카와는 마법사 모자를 쓰고 부엌 근처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게야마를 불러들였다. 싱크대가 있는 안쪽 카운터와 평소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소인바 스툴이 놓여있는바깥쪽 아일랜드 카운터 2개까지 제외하고, 나머지 카운터 2개에 전부 호박이 가득했다. 아니, 호박. 호박이 맞나? 저 넓고 큰 모양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호박 중 하나를 들어 올리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었다. 호박은 오이카와의 얼굴 2개 크기였다. 그가 작은 얼굴의 소유자라 해도, 호박이 큰 건 사실이었다.

오늘 할로윈이잖아. 마침 늙은 호박이 세일해서, 몇 개 사와 버렸지.”

할로윈, 할로윈이요?”

뭐야, 알고 있었어?”

일부러인 기색이 역력하게, 오이카와는 눈썹을 들었다. ‘토비오쨩 의외네라며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기억을 더듬었다. 돌이켜보니, ‘마법사 모자를 본 건 할로윈을 주제로 한 TV 애니메이션에서였다. 그 안에서 한 마법사는 할로윈을 무척 좋아해서, 마법을 이용해 모든 마을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들고 365일 매일을 할로윈 날로 지정했다. 그랬더니 사탕을 줄 어른이 없어 장난을 일삼고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어린아이로 변한) 마을 사람들을 보며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아아, 그래서 아까 현관에서. 카게야마는 왼쪽 위로 눈동자를 돌린 뒤 조심스레 말했다.

아이로 변해서 사탕을 받아내지 못하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드는 날이죠?”

뭐야, 그 어딘가에서 주워온 듯한 인상은? 대충 비슷하긴 하네.”

오이카와는 낮게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발을 옮겨 호박에 둘러싸인 오이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보리 빛 조명 아래 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여러 가지 괴물이나 징그러운 인물로 분장해서 ’trick or treat‘라고 말하며 달콤한 과자 같은 걸 받는 날이야. 달콤한 걸 안주면, 장난을 치겠다는 말이지. 마침 호박도 있으니까, 잭 오 랜턴(Jack-o'-lantern)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너도 도와, 토비오.”

잭 오 랜턴……이 뭐예요?”

호박에 유령의 가면을 씌우는 거야. 잭이라는 유령에 관련된 얘기가 있다지만,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호박에 모양을 새긴 뒤 거기에 불을 피우면 완성이지.”

다시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니,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의 사람들은 모두 오싹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마법을 부린 마법사, 드라큘라, 늑대의 분장 등생각해보니 모든 날이 할로윈 날로 바뀌고 난 뒤 마법사는 마법을 부려 마을 전체를 장식하는데, 유독 호박이 많이 보였던 기억이 났다. 왜 호박이었을까, 그때도 조금 의문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 끝난 후 왜 호박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지만, 배구 경기가 시작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까지 떠올리고 카게야마는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만드는데요?”

먼저 호박 겉면에 얼굴 도안을 그린 뒤 위를 덮개처럼 잘라내고 호박 속을 파낼 거야. 도안을 따라 칼로 도려낸 뒤 그 안에 촛불을 넣으면 완성. 이것 봐, 초도 사 왔어. 작고 귀엽지?”

오이카와는 부엌 한쪽에 있던 작은 캔들을 카게야마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사과 향이 나는 바닐라 색의 손바닥만 한 캔들, 다른 하나는 깊고 아늑한 꽃향기가 나는 브라운 색의 캔들이었다. 오이카와는 기대되는 듯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런 작고 예쁜(?)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이미 호박 겉면에 그려진 도안 두 개의 사악하고 악랄해 보이는카게야마는 오이카와씨랑 닮았네요라고 한소리 했다가 또 딱밤 한 대를 벌었다표정과는 좋게 말해도 부조화였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더해 딱밤 한 대를 더 벌 필요는 없으니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먼저 위부터 떼어내면 되는 거죠? 이 모양 따라서요?”

맞아. 손가락 조심해야 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내민 손에 칼을 쥐여주면서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홍차 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서 전날 밤의 저가 보이는 듯해, 카게야마는 물들기 시작한 얼굴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칼은 오이카와가 평소 쓰는 칼보다는 작고, 주로 과일을 깎을 때 쓰는 용도 같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예쁜 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가 칼을 드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주로 부엌은 오이카와의 영역이다 보니, 카게야마는 가끔 그를 도와줄 때 빼고는 칼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세터로서 손가락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이카와는 어떻게 요리를 잘하는 걸까. 그가 만들면 포크 카레도 각별한 맛이 났다. 생각하니 또 먹고 싶어져, 카게야마는 내일 저녁은 카레로 부탁해볼까 생각하면서 호박에 손을 댔다.

!”

단단해!

!”

칼에 힘을 주고 강하게 밀어 넣자 그제야 약간 칼날이 흠집을 내고 들어갔다. 됐다! 조금 기쁜 마음까지 들면서 카게야마는 작업을 계속했다.

! , , 흐읏!”

……저기 토비오쨩. 열심인 건 좋지만, 이상한 소리 내는 건 그만둬줄래?”

! , ?”

카게야마는 몰두하느라 어느새 이마에 작게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뾰로통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그 검은 눈동자가 저를 곧게 바라보는 걸 느낀 뒤 한숨을 작게 뱉었다.

아냐됐어. 토비오쨩이 바보인 게 하루 이틀인가.”

왜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바보라고 합니까.”

카게야마는 뚱하게 내뱉곤 다시 칼을 고쳐 들었다. 오이카와가 거슬려한다고 생각했는지 전보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회색 빛깔의 테이블과, 검은 의자, 아이보리빛 조명 아래의 카게야마는 이제 어느 정도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반년 전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와 같은 대학으로 진학한 뒤 저에게 고백하고, 함께 살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저 중학교 선후배에 불과하던 관계가 어떻게 이리 빨리 변모하게 되었는지 묘한 일이었다. 카게야마에게 먼저 동거를 권한 건 오이카와였다. ‘같이 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동거 집을 같이 알아본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오이카와가 말없이 건넨 열쇠를 카게야마가 받아든 게 전부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무슨 열쇠예요?’라고 묻거나, 받아들지 않았다면 그와의 동거는 시작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한 번 보고, 그가 내민 열쇠를 보고, 봄날의 햇빛에 부서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그 열쇠를 받아들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동거는 그때부터였다.

오이카와는 한번 눈을 깜빡였다. 호박의 속을 파내 호박 속을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에 남김없이 담고, 눈과 코와 입 모양을 따라 칼을 댔다. 눈앞의 호박이 남김없이 잭 오 랜턴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이 호박의 씨를 뿌릴 때 농부는 이것이 잭 오 랜턴이 되리라고 생각했을까? 혹은 도매상은? 마트 주인은? 이 호박 자신은? 호박의 자아를 생각하기에 이르자 오이카와는 오른쪽 입술 끝을 올리며 웃고 말았다. 무언가 큰 운명의 섭리를 따지는 것도 좋지만, 결국 어찌할 도리 없이 그리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습기까지 했다.

 

 

다 됐어?”

!”

카게야마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나름대로 자신 있다는 듯 자랑스럽게 저가 들고 있던 호박을 내미는 꼴이 영 어린아이 같았다. 아직 머리에 쓰고 있는 마법사 모자도 한몫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호박을 바라보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삐뚤빼뚤한 눈과 코, 입은 약간 징그러운 모양으로 일그러져있고어찌 말하면 할로윈에 적합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크게 웃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시늉까지 보였다.

이게 뭐야? 주인 닮아서 못생겨도 너무 심하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 어떻길래요?”

또 지기 싫어서 욱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흘겨보는 게, 정말 꼬맹이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호박을 카게야마의 호박 옆에 두었다. 바로 옆에 두니 큰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오이카와의 호박은 본래 호박에 그려놓았던 도안에서 조금 빠져나갔을 뿐 거의 도안 형태 그대로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배를 잡으면서 과장스럽게 웃었다. 이런 시답잖은 일에서 힘의 차이를 느끼는 건 카게야마에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토라져 있지만 말고. , 불 붙일게. 토비오는 전등을 꺼.”

오이카와는 달랠 마음이 없는 것처럼 평소의 어조로 말했다. 오이카와가 얼마 전 길 가는 길에 받았던 싸구려 라이터로 캔들 두 개에 불을 붙이자, 카게야마는 뭐라 꿍얼거리며 거실과 부엌 불을 껐다. 테이블 위에 있는 두 개의 캔들 주변으로 아주 작고 뽀얀 온기의 이글루가 생겼다.

오이카와가 캔들 두 개를 들고, 각각의 호박에 집어넣자 은은한 불빛이 호박에 난 얼굴 구멍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젊고 잘생긴 잭 오 랜턴과 그 친구이면서 가장 사악한 잭 오 랜턴이 놀러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평소에 드나드는 부엌인데도, 불을 끄고 이 작은 두 명의 이웃을 초대한 것만으로도 생소한 감각이 피어나다니 신기했다. 카게야마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사과 향이랑 꽃향기 좋지?”

오이카와가 부드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이런 미소가 낯설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캔들의 푸근한 주홍빛을 받는 그의 얼굴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뒤덮였다.

향기는 잘 모르겠어요. 타는 냄새는 나는데.”

카게야마는 그다지 코가 좋지 못했다. 캔들이 들어있는 잭 오 랜턴의 머리 쪽에 코를 대고 킁킁, 하며 카게야마가 말했다. ‘위험하니까 그런 짓 하지 말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강하게 들어 올렸다. 그의 표정이 다시 순간적으로 바뀌어 카게야마를 뜨거운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이 남은 호박 속은 어떻게 되나요?”

씨를 솎아낸 뒤 꿀하고 견과류 조금이랑, 설탕과 졸여서 오븐에 구울 거야. 맛있겠지?”

……카레는요?”

세상에는 카레 외에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다는 걸 이젠 좀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듣는 것만으로도 맛있어 보이지만, 카레는 각별하다. 카게야마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잭 오 랜턴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조용히 흔들리는 불빛이 눈길을 끌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고 불빛을 계속 바라보면,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 두 개의 뚜껑을 덮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토비오는 할로윈 분장을 한다면, 뭐가 좋아?”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 카게야마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마을 사람들의 분장을 떠올렸다. 드라큘라와 마법사 말고는 정확히 명칭도 모르는 분장이 대부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분장들의 명칭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녹아있는 화이트 앤 블랙 톤의 방 안에서 호박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카게야마는 작게 툭 내뱉었다.

호박……?”

잭 오 랜턴 말하는 거야? 의외네.”

오이카와는 눈썹을 올렸다. 오이카와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듯 금방 눈을 돌렸지만 카게야마는 저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말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말 없는 공기가 카게야마의 목젖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냥, 어디서든눈에 띄니까요.”

실제로 카게야마의 기억 속 애니메이션에서도 가장 많은 건 잭 오 랜턴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대답에 놀란 듯 잠깐 눈동자를 크게 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만 카게야마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오이카와의 미소였다.

그렇구나. 넌 정말 카게야마 토비오야.”

무슨 말이에요?”

오이카와는 원하지 않는 말을 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한 뒤 저가 만든 잭 오 랜턴에게로 향한 오이카와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어디서든 눈에 띄니까라니. 카게야마 토비오만 할 수 있는 대답이네.”

그냥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

또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오이카와는 미소를 거두고 그랬겠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작은 캔들 안에 투명한 촛농이 고였다. 그제야 풍겨오는 연한 꽃향기에 카게야마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카게야마가 아는 꽃이라고는 오이카와가 전에 대학 입학 축하한다며정작 입학식이 지나고 한 달 뒤였다선물해준 작고 청초한 백합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그 향기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 유일하게 있는 꽃에 대한 기억을 오이카와가 새겼다는 점이 부끄럽고 간지러웠다.

난 마법사가 되고 싶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잭 오 랜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걸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카게야마는 TV 애니메이션 속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마법은 없잖아요.”

그것은 만화 속의 이야기였다. 유령도 없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만, 있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허무맹랑한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유령이나 마법사나 같은 것일까? 카게야마는 어릴 적 기억 속의, 후회하며 마을이 넘치도록 눈물을 흘리던 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얼굴에 오이카와를 대입시켜보려고 노력하던 중,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뺏어 썼다.

마법은 있는걸.”

없어요.”

아냐, 있어. 토비오쨩한테 마법 걸어 볼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카게야마는 반쯤 질렸다는 얼굴로 해보시던가요. 조롱 조로 내뱉었다. 오이카와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후회하지 마. 토비오쨩은 이제 10초 이내에 오이카와씨한테 키스를 합니다.”

?!”

.”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얇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깊은 온기가 쌓인 속눈썹, 오이카와의 보들 거리는 머리 위에 가볍게 씌워진 마법사의 모자. 흡사 어느 동화책의 젊은 미남 마법사와 같은 모양새였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자신의 입술을 겹쳤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보드라운 분홍빛으로 빛나며 눈앞에 있었다.

키스할 줄 알고? 오이카와의 노림수였다. 고개를 피한 채 잭 오 랜턴만 열심히 들여다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흘끔흘끔 오이카와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다가, 항상 본인이 원하는 페이스로 이끌어가던 오이카와를 떠올리고 이건 기회다 싶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임에도, 오이카와의 속눈썹이 움직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눈을 감으며 가볍게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 작은 입맞춤 소리가 캔들 불빛 사이로 흘러내렸다. 오이카와는 가늘게 눈을 떠 입술만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결국 또 이것이 오이카와의 속셈임을 알고, 저가 넘어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신음을 내며 그의 허리를 팔로 세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숨소리가 달콤하게 콧잔등을 스치고, 타액이 흘러넘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입술을 떼어냈다. 오이카와의 웃음소리가 작게 카게야마의 입술 내부에 가득 찼다.

거봐, 마법은 있지?”

겨우 들릴 정도의 속삭임만 한숨에 섞어 보낸 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가장 얇은 피부와 가장 얇은 피부를 맞댈 뿐인데도, 몸 안쪽부터 머리까지 저릿한 달콤함에 숨이 벅찼다. 오이카와의 온기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계속 이렇게 둘 수도 없고. 이제 정리하고 호박요리 해서 먹을까?”

오이카와가 잭 오 랜턴의 캔들 불빛을 후 불어 껐다. 방 안 속이 고요한 적막 및 남아있는 향흔으로 가득 찼다. 풍성한 꽃향기는 무언가 안타까운 향흔만을 남겼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더듬었다.

오이카와씨는 마법사가 되면 어떤 마법을 부리고 싶으세요?”

마법?”

. 단 하나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요.”

오이카와는 당분간 답이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형태를 그려가고 있었다. 조금 독특한 형태의 머리카락, 각이 좋은 얼굴형과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까지. 그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낯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의 마법. 토비오가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동거를 시작할 무렵의 오이카와가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카게야마에게 열쇠를 건네던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그 열쇠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단 어떤 것도 알 수 없었지만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에서 무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물(聖物)을 받는 듯했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열쇠를 받아든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조금 강하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그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으스러질 듯 강하게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뼈가 모두 부서져 제 속을 낱낱이 찌른다면, 그의 뜨거운 피로 적셔진다면 카게야마의 아침도 그리 차갑지마는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열고 다시 닫았다. 오이카와와 겹쳤던 입술의 감촉이 입술 신경에 남아 있었다. 저를 그렇게 자신에게 침식하게 하고, 정작 본인에게는 그 어떤 마법도 기대하지 않는 오이카와는, 분명 카게야마에게만 마법사였다.

카게야마는 울며 후회하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마법사 모자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가라앉을 정도로 울던 그는 왜 자신은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았을까.

카게야마 토비오가 생각건대, 그는 사탕을 받고 싶은 어른이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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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징님 생일 축하해요 ('v' ♥

  * 월간 오이카게 3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내일, 오늘

 

 

  




 

좋아해요. 저와 사귀어주세요.”

미안,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오이카와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난감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웃으면,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욱 형용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놓은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그런가요……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미안해.”

 

오이카와는 이어지는 질문이 불편했다. 말을 마치지 못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화제가 지겨웠고, ‘미안해다시 한 번 천천히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렸다. 연습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닦은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는 것만큼 익숙하고 정해진 일이었다. 고백을 받는 일. 타인의 호의를 구체화한 언어로 전달받는 일. 다른 점은 오이카와의 대답뿐이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교정 뒤뜰 길 주변에는 버려진 쓰레기가 몇몇 개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거의 먹지도 않고 버려진 빵 부스러기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쁘게 포장되어 전달된 호의를 살짝 맛보고 길바닥에 버린 꼴이었다. 버려진 사랑을 쓰레기라고 명명하는 건 오이카와 본인도 지나치다고 느꼈으나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오이카와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까.

춘추복 안쪽으로 바람이 서늘하게 치고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쓰레기 몇 개가 나뒹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이카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자친구를 좋아하세요?”

 

점심시간 도중이었다. 며칠 찬바람만 불다가 유달리 따뜻한 날이었고, 오이카와는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가던 길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우유를 먹고 있던 카게야마를 만나, ‘우유만 먹는다고 키 안 큰다?’ 장난기 섞인 인사를 건넨 뒤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했다. 카게야마는 우유를 쪽 빨더니, 쪼그라든 우유 팩을 들고 물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냐고? 당연하지오이카와의 입이 뻐끔거리는 걸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보고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도 아니었고, 오이카와의 대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금붕어처럼 몇 번 움직이던 입술을 닫았고, 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만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결국 그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다시 돌려준 후, 며칠 안 가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것까지 기억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 날과 비슷하게 따뜻한 날이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뜻했으나 동시에 몇몇 곳을 따갑게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고, 체육복을 입고 있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연습에 늦어 뛰어가고 있던 건지 짧은 앞머리 사이로 이슬같이 투명한 땀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도 지금 가세요?”

토비오쨩이야말로 1학년이 이렇게 늦게 가도 되는 거야? 더 일찍 가서 공 닦고 체육관 청소하고 있지는 못하고.”

종례가, 늦게 끝나서.”

 

목을 움츠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게야마를 지나친 후, 오이카와는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작은 발을 힘차게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에서 기대를 품은 듯 상기된 목소리가 흘렀다.

 

오이카와 선배,”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이어질 말이 나오기 전에 일부러 심술 맞은 투로 말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샐쭉 내밀었다. 항상 하고 싶은 말혹은 하지 못한 말의 반 이상을 담고 있는 건 카게야마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할 거야. 해도 토비오쨩한테는 안 알려줘.”

괜찮아요. 옆에서 보기만 할게요.”

 

오이카와가 서브 연습을 한다는 말에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몇 마디 말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릴 때 오이카와가 몇 번 향했던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햇빛을 등지고 음영 진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그 입술에 대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는 사이 또 오이카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가 저를 말없이 바라보는 건 그런 표시였다. 카게야마는 지금껏 다른 이가 내비치는 그러한 표시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달랐다. 되도록 오이카와는 웃어주길 바랐다. 체육관 안의 불빛도, 햇빛도 전부 흡수해 밝게 빛나는 그의 미소를 카게야마는 예쁘다고 느끼곤 했다. 그 미소가 저에게만 향하지 않는 걸 안 뒤로, 그는 어쩌면 카게야마를 타인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말과 표정에 집중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그의 어떤 말에 기분이 상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일방적인 불쾌에 맞부딪쳤다. 카게야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저 재촉하듯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 선배!”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등에 대고.

 

 

* * *

 

 

 

예정된 연습 시합이 곧이었다. 평소의 리시브, 서브 연습에 더해 부내 모의 시합도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연습 사이의 짤막한 휴식시간이었고, 오이카와는 선 채로 땀을 닦고 있었다. 같은 스타팅 멤버인 K가 놀리듯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 쟤 또 왔다.”

 

K가 고개를 까딱이는 곳으로 오이카와도 눈길을 돌렸다. 며칠 전 고백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체육관 창문 너머로 연습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와 보얀 얼굴이 약간 붉었다. 오이카와는 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손에 빤히 잡힐 듯 보이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 감정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건, 오이카와가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불만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긴 후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3학년에서 나름 귀엽다고 소문난 애잖아? 여자친구 있는데도 좋대?”

 

또 다른 동료인 A가 물을 마시다 말고 K와 오이카와의 근처로 왔다. AK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아직도 몰랐냐,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1학년 신입생이랑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진짜? 오래갈 줄 알았더니.”

 

오이카와가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실 동안 AK는 오이카와의 지난 여자 친구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그 모든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었고, 오이카와는 창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를 주시했다. 예쁜 미인상이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검고 긴 머리카락, 뽀얗고 하얀 피부. 굳이 말하면 오이카와의 취향이었고, 그녀가 고백하며 건넸던 쿠키는 맛있어 보였고받지도 않고 물렀지만좋았지만. 어째서일까.

오이카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이 다시 시작된다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머리에 붙은 땀을 덜어내며 생각했다. 왜 저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자신은 있다. 어릴 적부터 시선을 끌었던 얼굴에 그 어느 것도 대충 하지 않는 성격, 오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좋은 인상에 대한 자신. 거기에 배구까지 잘하니, 인기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좋아한다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금세 허물어질 정도로 옅은 인상에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 여자아이와 사귀면 즐거웠고, 재밌기도 했고, 그 아이들이 베푸는 사랑에 오이카와는 뿌듯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즐겁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들이 주는 사랑을 즐겼고, 그 사랑이 쉽게 떠나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본디 무의식 아래에서 사람에게 영원한 건 없었다. 카게야마의 한 마디가 있기 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연애는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묻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거짓말이 싫었고,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그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었고, 거절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아이들을 떠올리며 저가 그들을 좋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 그만! 오이카와씨 이제 배구에만 집중할 거니까! 너희도 진지하게 연습하라고?”

이제 와서 오이카와가 그런 말을 해봤자

그치?”

너무하잖아!”

 

AK의 장난 섞인 웃음에 오이카와는 우는 시늉을 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연습으로 다시 능숙하게 이끌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 그에 맞춰 행동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하면 인간관계는 능사였다. 오이카와는 연애를 할 무렵, 저가 친구들과 여자친구를 다른 존재로 대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점이 없었다.

 

 

* * *

 

 

오이카와가 연습을 하려고 공 하나를 들었을 때였다. 카게야마가 아기 병아리처럼 쪼르르 달려와 오이카와의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빛내며 서 있는 모습이 아기 새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못 본 척 공에 집중했다.

 

오이카와 선배.”

, .”

 

이어질 말은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지겹게 반복될 실랑이에 벌써 지친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작은 동물을 내쫓을 때처럼 쉿, 쉿 잇사이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카게야마는 불만을 양 볼에 가득 물고 부풀렸다.

 

그런 행동 하면 고양이한테 미움받는대요.”

잘됐네. 토비오쨩이라는 성가신 고양이한테 미움받으면 참 좋겠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로서는 드물게 큰 의사 표현이었다.

 

아뇨, 저 말고 고양이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저리 가라니까. 오이카와씨 이제 연습해야 돼. 연습 방해하면 나쁜 어린이지요?”

 

아이를 타이르듯 어르는 목소리로 대화를 끝맺은 후 오이카와는 손에 들린 공을 한 번 돌렸다. 카게야마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선배 몇몇의 화두에 오른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시선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 선배. 쳐다보고 있는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공에 이마를 맞대었다. 항상 서브 전에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서브 준비 자세에 들어가면 카게야마는 보통 숨을 죽이고 그 존재를 지우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그녀와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살짝 홍차 빛 눈동자를 들어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 연습에 방해돼?”

그런 건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앞머리가 흔들렸고,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체육관 조명과는 상관없이 빛나면서 오이카와를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친구 안 하시나요?”

 

오이카와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가 깊은 의미 없이 말했다는 것은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저를 몰아가는 착각이 일었다.

 

글쎄. 지금은 아니어도, 마음이 바뀌어서 사귈 지도.”

마음이 바뀌나요?”

당연하지. 바뀌지 않는 마음이란 없어.”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공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이마에 대었던 공을 떼어내고,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돌렸다. 착잡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배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안 바뀌는걸요.”

 

카게야마는 알 수 없다는 듯 고민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가 쪽으로 올린 뒤, 머릿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한 번 흘겨본 뒤 그에게로 다가갔다. 줄어드는 거리에 비례하며 점점 커지는 오이카와의 신체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움츠렸다.

 

그건 다르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쉽게 바뀌니까. 방해 그만하고 안 가면 토비오쨩 괴롭힌다?”

, 서브 가르쳐 주세요.”

카게야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오이카와 선배 방해 그만하라고.”

오이카와 선배, 죄송합니다.”

 

오이카와의 눈빛이 다른 빛깔로 바뀐 걸 눈치챈 킨다이치와 쿠니미 두 사람이 카게야마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카게야마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했으나 두 사람은 팔을 놓지 않았다. 두 명보다 키가 작은 카게야마의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지겨운 찰거머리야. 오이카와는 속 언저리에서 솔솔 풍겨오는 짜증에 입술을 씹었다. 공을 들어 올렸다. 체육관 조명이 전부 공 한 점에 모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이란 쉽게 허물어진다. 금세 빛을 잃는다. 잘 만들어진 타르트가 바닥에 떨어지면 한순간에 모양이 망가지듯이, 사랑이란 그러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화학작용이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활처럼 굽혔다가, 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손바닥에 전달된 충격이 전기와도 같았다. 팔 전체가 후들거리며 끝에 이어지는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작년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헤어진 이후 다른 남자와 함께 복도를 걷다가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자신감, 충족감. 오이카와는 그가 누구를 사귀든, 어떻게 지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렇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와 사귀기 전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옳았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는 없어지기 마련이고,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좋아하고 사랑해줄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사랑은 그중에서도 달콤함이 제일 짧았다. 이와이즈미와 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기에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는 관계였고, 그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영원하지 않은 관계일지라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이즈미와의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별로, 사랑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저가 조금은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모든 걸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고, 그런 확신이 들어 관계의 온전한 만족을 포기 하고 마는 저 자신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번 리시브 연습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연습은 종료될 예정이었다. 오이카와는 익은 토마토 빛으로 물드는 창가를 보면서, 그 여자아이가 아직도 서 있는 걸 바라봤다. 노을과 같이 붉은 볼이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곱게 빗어놓았던 머리카락 끝부분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잠시 울고 온 걸까, 눈동자가 붉었다. 혹은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는 그녀가 안타까웠고, 달려가 울고 있는 그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뿌리가 사랑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자신. 자연스레 누구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사랑은 종이로 만든 케이크였다.

 

 

* * *

 

 

가끔 비가 오는 날이 이어졌다. 맑게 갰나 싶다가도 찌푸린 구름이 모여 부슬부슬 얇은 비를 뿌렸고, 몸에 닿는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틀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친 날이었다. 연습시합에서 키타가와 제1중학교가 21로 이긴 뒤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체육관 창문으로 보이던 그녀가 안 보인지 일 주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오지 않게 된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팀 동료들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저 관심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창밖으로 그 여자아이가 보인 건 아주 흔한 우연이었다. 오이카와가 서 있는 2층 복도의 창밖은 1층 뒷문 근처였고, 그녀는 검도부 주장과 함께 있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던 미소 대신 볼을 파스텔 색조로 물들인 미소가 보였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교복 치마를 힘겹게 꼭 쥐고 있던 손은 검도부 주장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 사귀고 있구나. 그럼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야 할, 이루어져야 할 일의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후련함까지 느꼈다. 억지로 침수시켜놓았던 죄책감이 멀리 날아가 버린 상쾌함이었다. 조금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앞을 보자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 토비오가 평소보다 기대감에 찬 눈동자로 뛰어왔다. 체육복이 든 에나멜 가방을 보니 연습에 가는 도중인 것 같았다. 무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오이카와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저거 봐.”

 

오이카와는 창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쏙 내밀었고,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에 두 사람이 비쳤다.

 

뭐가요?”

저기 저 여자애.”

……?”

 

카게야마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그 입이 열리려다가 다시 닫히고, 입꼬리를 꼬물거리는 것이 영.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해.”

, 런게, 아니고

 

오이카와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카게야마는 몇 번 말을 더듬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적중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토비오쨩, 진짜 심각하네. 그때 토비오쨩이 말했잖아? 이번엔 여자친구로 안 하냐고

그랬었나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때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제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눈가를 구겼다. 생각해 보면 카게야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사랑 관과, 마음의 불변성에 대한 주제 같은 건.

 

저 선배가 왜요?”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느니, 그때 토비오쨩이 건방진 말을 하면서 이 오이카와 선배를 가르치려 들었잖아? 저거 봐, 다 변하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저런 거야.”

저 선배가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했나요?”

그랬, .”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고백은 받았으나, 오이카와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 체육관 창문에서 바라봤으나 실제 어땠는지 오이카와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더 모를 일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바뀌지 않는 좋아도 있는 걸요.”

토비오쨩은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래.”

 

오이카와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보폭을 넓혀 카게야마보다 앞섰다. 평소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얹은, 가벼이 여기는 어조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렇게 입만 삐죽 내밀다간 언젠가 입 삐죽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그걸로 또 놀릴 생각을 여러 가지 해보았다.

 

몰라도, 제대로 좋아하고 있어요. 오이카와 선배요.”

?!!”

 

다리가 휘청,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갈 뻔했으나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쳐다보자 작은 체구가 계단에 멈춰 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러세요?”

, , 좋아, 좋아한, 다고?”

 

한심하게도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방금까지 삐죽이고 있던 작은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배구도, 카레도,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도 좋아해요.”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다. 배구나, 카레 같은 좋아’. 심지어 그것도 서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동시에 그 작은 머리 위를 꾹 눌러주고 싶었다. 감히 오이카와씨를 서브로만 평가해? 실제 오이카와가 머리를 누른 것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인상을 안 좋게 찌푸렸다.

 

가끔, 괴롭힐 땐 싫을 때도 있지만그래도 좋아해요. 처음부터 똑같은 걸요.”

 

처음부터, 오이카와의 존재와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순간적인 기분의 흔들림과는 별개로 쭉.

아니, 아니 아니.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배구나 카레와 같은 좋아라니까. 그럼에도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제대로 된 좋아였다. 카게야마가 아마 앞으로도 쭉 좋아할 배구와 카레. 가끔 지칠 때는 있어도, 질리고 싫어질 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카게야마에게 사랑일 배구나 카레와 동일하다고. 동일하다고.

 

근데 그거 서브잖아?!”

?”

 

카게야마는 반문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가, 지금은 흰 피부를 붉은 거품처럼 몽글 물 들이고. 오이카와는 역시 이상했다. 가끔, 아니 혹은 자주.

 

 

* * *

 

 

토비오쨩, 집에 같이 갈까?”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굽혀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등 뒤에 섰다.

 

너 이 자식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아니, 아니라니까? 이와쨩,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무서워. 그냥 같이 가는 것뿐이니까?”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이즈미가 눈빛으로 넌지시 괜찮은지 의향을 물었으나 카게야마가 알아챌 리 없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있던 이와이즈미를 벗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전 소리가 났다.

 

가는 길에 만두 사줄까?”

!”

먹는 걸로 꼬셔서 뭐하려고?”

아니, 이와쨩 왜 그런 생각만 하는 건데. 늦었으니까 바래다주는 거라고?”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빛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가자, 이를 보이며 웃은 뒤 앞서 걸었다. 가방을 고쳐 맨 등이 카게야마보다 두 뼘 정도 컸다. 걸친 재킷에는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고 바라봤던 등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물들이면서 뒤를 쫓았다. 뒤따라오는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있었다.

 

 

, 뜨거우니까.”

감사합니다!”

 

만두를 한 개씩 사 들고 걸어가는 길목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점점이 퍼진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윤곽을 비췄다. 오이카와는 만두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카게야마의 볼에 닿아 촉촉이 젖는 걸 보면서, 작게 물었다.

 

토비오쨩은 집이 어디야?”

저기요.”

 

카게야마가 가리킨 곳은 골목 안쪽 주택가의 한 지점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나 거리상 멀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카게야마의 발음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가깝네.”

오이카와 선배는요?”

거기서 15분 더 걸어가야 해.”

가깝네요.”

가까운 거야?”

못 만나는 거리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끄덕였다. 말로는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느덧 만두를 한입에 다 넣고 양쪽 볼 주머니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을 열면 만두가 튀어나오려는지 작은 입을 양손으로 누르면서 입안을 열심히 움직였다. 햄스터 같은걸, 오이카와는 생각하면서 카게야마 입술 옆에 붙은 만두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

 

말로 하지 못한 당황이 카게야마의 얼굴에 번졌다. 입을 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손가락을 떼지 못하고 왜 그런 걸 먹어요라는 눈빛만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양팔을 잡아 끌어당긴 뒤, 보이는 작고 모양 좋은 귀에 속삭였다.

 

토비오쨩은 내가 서브 평생 안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할 거야?”

 

온기를 담고 있는 입김이 귓속의 솜털을 간지럽히자, 물감이 퍼지듯 귓바퀴를 따라 귀 전체가 천천히 붉어졌다. 귓불을 조금 세게 꼬집으면서,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토비오쨩 귀 붉어졌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가를 찌푸린 뒤 만두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작은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귀로 옮겼다. 작은 주먹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방해했다.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노려보면서, 카게야마는 작게 투덜거렸다.

 

지금도 안 가르쳐 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 카게야마의 말에 동조할 일이 잦았다. 카게야마와 그만큼 많이 마주 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갸우뚱하는 고개, 불만이 담긴 눈동자, 삐죽 내민 입술 모두 지금의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카게야마의 저러한 버릇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제 귀를 감싸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맞잡고,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몇 번 주물렀다. 아기같이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냥,

 

그럼 오이카와 선배가 싫어지지 않겠어?”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내렸다. 흘러내린 가로등 불빛이 검은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가라앉았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고요한 적막이 카게야마의 입술 끝에 잠시간 머물렀다. 비가 그친 뒤 물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맞잡은 손 사이를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지금껏 저와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여자친구, 이제는 싫어진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렸다. 이와이즈미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오이카와는 제가 생각하는 온전한 이해와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없는 거라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이랑 달라질 게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까요?”

 

카게야마는 고민을 마친 듯 눈동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푸른, 별 몇 조각이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 중 한 가지였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고, 서브는가르쳐주시면 좋겠지만 안 가르쳐 주는 건 지금도 똑같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달라지잖아. 내가 언제까지 대단한 선수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순히 토비오쨩이 나에 대한 마음이 훅 바뀔지도 모르고?”

 

오이카와는 그런 말을 하는 저가 이상했다. 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까지혹은 언제 즈음. 오이카와는 저를 좋아하냐고 집요하게 물었던 지금까지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 바뀌어요.”

 

카게야마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앞선 질문보다도 망설임이 없었다. 입술에 만두 부스러기를 붙인 꼬맹이가 당돌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불룩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장담해? 토비오쨩 미래 보고 왔어? 아직 꼬꼬마가 그렇게 책임도 못 질 말 막 하면 안 되는데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들어 카게야마의 이마를 꾹 눌렀다. 카게야마의 인상 쓴 얼굴이 뒤로 밀렸다가 다시 되돌아오자, 그 이마에 붉은 점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붉은 이마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양손을 잡힌 상태였다.

 

미래는 모르지만지금은 안 바뀌는 걸요. 지금은 어제였고, 그저께였으니까, 내일이나 모레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매일 매일 지나면 결국 안 바뀌는 거잖아요.”

토비오쨩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안 해?”

? 해요. 내일 저녁 메뉴는 카레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내일이면 오이카와 선배가 미워질지도 모르잖아?”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건 전부 지금이랑은 상관없는 얘기인 거 같아요. 빨리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오늘 저녁도 카레인데.”

 

카게야마는 이야기가 지겨운지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저의 집 쪽으로 틀려는 걸 오이카와가 제지했다.

 

요 녀석, 선배가 얘기하는데! 그리고 너희 집은 매일 저녁이 카레냐! 얼마나 좋아 하는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당겼다. 찹쌀떡처럼 죽 늘어나 카게야마의 입이 벌려졌다. 우우, 아하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작은 손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고 말았다. 늘어난 볼을 놔주고, 머리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밤이 녹아, 카게야마의 우주 같은 눈동자와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집에 가야지. 토비오쨩은 어린아이니까.”

…….”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을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 홍차 빛 눈동자와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봤다.

 

?”

, 오이카와 선배만큼 대단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

, 고마워?”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지만, 이상한 칭찬에 이상한 대답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머리 위를 쓰다듬던 오이카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별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서, 유성군처럼 떨어지는 별똥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면이 뒤집힌 것처럼 몰려드는 어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밤하늘이 오이카와의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달 웅덩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카게야마 주변으로.

 

어머니가 그랬어요. 그 선배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구 선수가 더 잘하지는 않냐고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에게 대단한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인걸요. 앞으로도 계속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제 손바닥까지 적셔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뜨거움이 전달되고 제 심장이 눅진하게 녹고 있는 걸 느꼈다. 카게야마가 뜨거웠다. 종이 케이크가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진짜 생크림과 과일로 덮이고 있었다.

 

토비오쨩그렇게 칭찬해도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건데.”

.”

 

카게야마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전기가 한 차례 몸을 돌고 오이카와의 시야를 흔들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토비오쨩의 좋아는 어느 정도 오래 갈 것 같네. 어느 정도는.”

진짜예요. 자신 있어요.”

 

무슨 자신인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빛나는 눈동자를 손으로 한번 훑었다. 속눈썹, 눈꼬리까지 달빛을 한바닥 머금은 눈동자를. 오이카와의 머리 위에 뜬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람개비처럼 오이카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천천히, 조금 빠르게.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온통 카게야마가 흩뿌려놓은 별 가루로 가득했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내렸다. 양 볼이 마주 잡은 카게야마의 손만큼 뜨거웠다. 이끌리듯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키스하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꼭 잡았다.

 

한입에 집어넣은 카게야마의 케이크는 의외로 잊지 못할 맛이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월간 오이카게 합작 홈의 편집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Love Actually








  소리 없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퐁당, 퐁당 액체가 물과 만나 작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그 파도는 변기 벽에 부딪혀 스러졌다.

  “우, …윽. 하아, 하아… 욱.”

  변기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타는 듯한 목을 타고 올라온 건 노란 신물이었다.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부여잡고 꼭꼭 짜내는 위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물과 섞인 침 몇 방울이 이미 더러운 변기 물에 떨어졌고, 오이카와는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와 찌릿한 코를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으나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표정. 공을 들고 서 있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박제된 나비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입과 코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다시 울렁거렸으나 오이카와는 손 한 번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카게야마는 돌고 돌았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오이카와 선배” 낮게 말한 뒤 오이카와에게 공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한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이카와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서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코 안을 깨끗이 씻어내자 하얀 덩어리와 침, 일부의 노란 신물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전부 쓸려 내려가면 될 일이다. 내장 구석구석에 붙은 토기(吐氣)도, 머릿속에 박제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내려앉았다. 세상이 하얗게 번지는 것이,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뿌옇고 제 모습조차 흐릿한데도, 머릿속 카게야마는 속눈썹 한 올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는 공을 매만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자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자리로 휙 가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만, 오이카와는 길게 바라봤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빛을 냈다. 오이카와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가락을 댔다. 며칠 전 병원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심전도검사, X-ray 등 몇몇 기초적인 검사 및 활력 징후까지 확인했으나 오이카와에게 이상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극히 건강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박동을 느꼈다. 뚝, 뚝뚝뚝, 뚝뚝뚝. 끊어질 듯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빠른 맥박이 이어졌다. 누가 만져 보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심장이 과도하게 팽창해, 폐를 짓누르는 탓일까. 혹은 여름 특유의 짭조름하고 답답한 공기 때문일까. 숨쉬기가 힘들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찮냐.”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가?”

  매만지던 공을 몇 번 바닥에 내려쳤다. 오늘도 해야 할 연습이 많았다.

  “네 표정 장난 아냐.”


  “또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서는 걱정 끼가 묻어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좋은 친구지만, 오이카와는 가끔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건, 이미 생긴 구멍을 후벼 파 넓히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그저 웃어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 하든 소용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브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심장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살을 찌르는 직사광선이 온통 저에게로 모이고, 등이 탈 것처럼 뜨거운 태양 탓에 다시 숨이 막혔다. 후, 후우. 들이쉬고, 내뱉고. 억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과도한 심박 수와 산소가 부족한 뇌 때문에 다시 토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바라봤다.


  연습 전 마셨던 스포츠 드링크가 그대로 나왔다. 연한 소다 빛깔의 좋아하는 음료수였는데.

  “하아….”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변기 물을 내렸다. 심한 심박동으로 울렁거림을 느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현재 오이카와가 겪는 증상이었다. 오이카와는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심장병’을 검색했다. 심계항진, 부정맥, 심근경색, 협심증 등…… 오이카와가 느끼는 증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심장의 고통,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건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처음 들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서브를 가르쳐 주세요.”

  어떤 부탁 조도, 애원하는 말투도 아니고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왜?”

  오이카와는 화가 나 있었다. 선배로서 응당 후배보다 침착하고 후배를 이끌어줘야 한다, 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와이즈미가 들으면 다르지 않다 말하더라도 오이카와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배우고 싶어요.”

  “관심 없어.”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붙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 뒤뜰에 울렸다. 뒤뜰에 심긴 나무의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 먼지처럼 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이카와의 머리가 울렸다. 손발이 조금 떨리면서 식은땀이 등 뒤로 배어 나와, 오이카와는 약한 오한을 느꼈다. 다리, 발목, 복부, 귀 뒤 등 여기저기에서 박동치는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로 인해, 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초원과도 같이 넓은 평원에는 보랏빛 풀이 번져 있었다. 깊은 밤과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 풀빛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차가웠다. 폐가 찢기듯 차가운 공기 탓에 오이카와는 꿈인데도 목이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느꼈다. 저 앞 초원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실루엣만으로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공을 들고 서 있었다. 흰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에 짧은 앞머리. 동그란 눈동자까지, 오이카와가 아는 카게야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빛도 없는 검은 꿈 안에서, 카게야마의 주변에만 반딧불이 몇 마리가 떠돌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카게야마의 말간 이마와 노란 빛깔의 팔, 흰 운동화까지 비췄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입을 연 카게야마의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뒤 그 몸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넘어진 카게야마의 아래로 보랏빛 풀이 흩날리고, 흰 티셔츠는 이슬방울에 젖어들었다. 카게야마 주변의 반딧불이는 흩어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흰색 가루가 총총히 박힌 검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을 힘주어 눌렀다. 배구공을 놀리는 오이카와의 악력이 결코 서툴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괴롭지 않은 듯 오이카와를 두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에 맞닿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보드라웠다. 톡 오른 복숭앗빛 입술이 기억 속에 떠올랐고, 제 손 아래에 짓눌린 게 그 입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이카와의 허리 주변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이 맞닿았고, 카게야마의 심장과 오이카와의 심장이 한 소리로 박동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제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유성우 무리가 소리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고, 초원의 밤은 광활한 우주와 같이 별의 죽음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왜?”

  오이카와는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야.”

  보랏빛 풀이 누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초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왜 나야. 왜 너고, 왜 나야. 어째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에 맞춰 오이카와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슬이 묻어 머리카락이 젖어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수술용 칼이 들려있었다.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에 대고 조심스레 긁자, 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선이 생기고 그 안으로 솜털이 오른 속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토기가 밀려왔다. 동시에 기대감도 있었다. 이 칼이 저 자신에게 닿기 전에 해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도 들었다. 오이카와는 실선 사이에 손을 넣고 흰 티셔츠를 벌렸다.

  카게야마의 폭신한 살결에 닿고, 조금 힘을 주어 칼을 내리그으면 말랑거리는 젤리처럼 피부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술용 칼에 달라붙는 피부조직을 떼어내면, 노란 빛깔의 동글동글한 지방과 갈비뼈 위에 겹쳐진 엷은 핑크 빛의 근육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총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어 나오는 장막 액과 혈액이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를 적셨다. 점점이 퍼지는 붉은 꽃잎이 카게야마의 가슴에서부터 퍼졌다. 근육에 손을 대보면 강한 박동이 갈비뼈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는 호흡곤란 때문에, 오이카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칼을 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렸다.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기분 나쁜 꿈이었다.




  “너 연습 할 수 있겠어?”

  “완전 괜찮다니까. 이와쨩 자꾸 왜 그러실까.”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은 뒤 체육복으로마저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놈이 말은 잘하네. 이와이즈미는 옷을 대충 구겨 접고 사물함에 넣었다. 새벽 2시에 오이카와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는 ‘혹시 자?’ 한 마디였다. 아침에 그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요 며칠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를 만나면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도 자주 있는 모습이었다.

  “이와쨩?”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탈의실 입구에 서서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이와이즈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서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미 아주 옛날 일이었다.

  ‘누구야, 쟤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던데. 이름이 독특했어. 카게… 뭐였지.’

  ‘카게야마 토비오쨩.’

  ‘알면서 물어본 거냐!’

  말 그대로 첫 만남 때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꽤 길게,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이카와의 그런 눈빛은 이와이즈미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었다. 오이카와가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부원이 연습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넓은 체육관이 사람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등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작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수많은 인원 사이에서 작고 검은 머리통이 오이카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꿈을 기억해냈다. 꿈에서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풀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인사가 마저 끝나기 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의 입술에서, 항상 다른 부원의 이름만 오가던 입술에서 저의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눈동자를 크게 뜬 뒤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다음 경기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료수, 주문하러 가자.”

  다음 경기용 음료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미리 정해놓은 매장에서 직접 공수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더더욱 연습 시간에 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부르자, 카게야마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공을 바라보고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이후 네, 작게 대답한 뒤 저가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공을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손이 꿈에서보다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육관의 2층 창문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카게야마의 볼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성우도 검은 밤도, 낮의 햇빛도 카게야마 주변을 돌고 돌았다. 카게야마는 지나치게 빛나는 존재였다.



  파란 하늘, 한두 번씩 울리다가 멈추고 다시 일제히 이어지는 매미 소리가 더웠다. 팔에 닿은 공기가 끈적거렸고, 눈에 닿는 초록이 부셨다. 길가에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바닥에는 매미 허물과 떨어져 죽은 매미 사체 한두 개가 보였다. 하수구 주변에는 진물이 번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서 걷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작은 볼이 더위 탓인지 조금 붉었다. 보폭 차 때문에 오이카와가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에서 네 걸음을 걸어야 하는 카게야마의 발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가슴을 새가 쫀 듯 강한 흉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시야에 현기증이 맺혔다. 올라가는 심박동과 여름의 습습한 공기가 기도를 눌렀고, 다시 호흡곤란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서브, 옆에서 연습하는 거 봐도 될까요.”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돼.”

  오이카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조금 충격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야.”

  꿈에서 물었던 말이었다. 왜 오이카와여야만 하는가. 왜 카게야마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왔고, 왜 오이카와는 그의 2년 선배이며, 왜 오이카와의 서브여야 하는가. 옆에서 걷던 카게야마가 재빨리 다리를 굴려 오이카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졌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보면 가슴이 뛰니까요.”

  “가슴이 뛴다고?”

  “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작은 손은 꿈에서 오이카와가 갈랐던 카게야마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 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세어 보았다. 뚝, 뚝뚝뚝… 지나치게 빨랐다.

  “어떻게 뛰는데?”

  “네?”

  “가슴이, 어떻게 뛰냐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고민하듯 머리를 갸우뚱해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어. 두근두근… 하고요? 오이카와 선배가 서브를 치려고 뛰어오르면, 체육관 안의 빛이 전부 오이카와 선배한테 모여서, 약간 눈이 부시니까 눈을 세게 뜨고 봐야 해요.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움직이고, 공 소리가 울리고 나면 가슴이 뛰어요. 강하게.”

  매미가 울고 있는 공기 속에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갔다. 그 속에 또, 카게야마의 심장 고동이 함께. 오이카와는 꿈에서처럼 손을 대지 않아도, 가슴을 맞닿지 않아도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빛 볼, 동그란 어깨에 떨어지는 태양 빛은 카게야마의 색과 섞여 부드러운 여름의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의 검은 밤, 아니 짙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는 오이카와를 담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공을 들고 있던, 꿈에 나왔던 카게야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낮에, 나무 한 그루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마주칠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박동치던 심장은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심장은 거짓말쟁이인 오이카와를 심하게 힐책하고, 오이카와의 전신을 뒤흔들어 놨으며, 카게야마의 앞에서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오이카와는 테이핑 되어 있는 검지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그곳에 오이카와의 심장이 있었다.


  "여기가 멈추면, 가르쳐줄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겹치고, 코끝의 한숨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보다 뜨거웠다. 질식해서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 심장이 그렇게도 소리친다면, 오이카와도 평생 거짓말쟁이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멈추면, 토비오쨩이 원하는 거 전부 줄게."

  그때까지는, 심장이 오이카와에게 굴복하기 전까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줄 이유'가 없었다.

  달콤한 한숨 한 번까지도.




  * HAPPY BIRTHDAY TORU!






다시 태어난 여름








카게야마는 꿈을 꿨다.

 

바닷속에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고, 보석같이 작고 파란 물고기 떼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지며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카게야마는 나신으로 바닷속에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이 기분 좋아 눈을 살포시 감았다. 볼과 가슴, 허리에는 보드라운 물의 손길이 닿는 듯하면 떨어졌다.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로 카게야마는 멈춰 있었다. 바다 위쪽으로 약한 바람이 불었고, 가끔 물살이 흔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언뜻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건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작은 드럼 소리가 들리는 재즈 음악이었고, 아버지가 즐겨 듣는 건 오래된 팝송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음악을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물방울 소리, 찌잉 머리를 달구는 햇볕의 뜨거움,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잠꾸러기 토비오쨩.”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오이카와가 샐쭉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듯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우린 홍차와 같이 예쁜 색의 머리카락, 형태 좋은 눈동자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조금 붉었다. 카게야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그나, 방금 잠에서 깬 카게야마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꿈에서 나신인 이유가 이거였나.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꿈 때문에, 카게야마는 의도치 않게 조금 웃었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웃어?”

지금 몇 시예요?”

일어나서 오이카와씨 얼굴을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옆에 있는 시계를 보시던가요.”

 

고개를 돌리니 작은 탁상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830.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가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행지에서 오이카와씨 혼자 밥 먹게 하려는 거야?”

아뇨, 배가 고프시다면야

됐고, 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이카와는 데구르르 표정을 바꾸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단단한 근육의 조합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에 맞춰 상체를 올렸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벗어나 왼쪽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나신 뒤쪽으로 투명한 통유리 창문 2, 그 너머로 하얀 베란다가 보였다. 아침의 태양 빛을 받아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연초록과 하늘색을 섞어놓은 바다는 지평선과 맞닿아 뿌연 경계선까지 뻗어있었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하얀 베란다까지 온통 새하얀 숙소는 커다란 배구공 안에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갈 거야?”

 

오이카와는 하얀 반소매 셔츠에 속이 비치는 민트색 칠 부 카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아색 면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뇨, 일어났어요. 그냥

 

꿈을 꿨어요. 뒷말을 삼키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기댔다. 오이카와의 숨소리에 따라 솟았다 가라앉는 오이카와의 배가 기분이 좋았다.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나왔던가, 안 나왔던가. 바다가 나왔단 건 기억이 나는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뱃속에서 낮은음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얼른 가자. 나도 배고파.”

 

오이카와는 어루만지던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부축하듯 톡톡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파도치는 소리가 시계 소리 사이사이로 들렸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바다를 보러 온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

 

 

남쪽 섬에 가자고 얘기를 꺼낸 건 오이카와였다. 기간은 719일부터 21일까지,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로 이틀. 3일의 여행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야기를 벗어나고 어디에 도쿄가 있는지, 오사카 혹은 삿포로가 있는지 등 지리에는 무심했다.

 

일본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라, .’

 

오이카와는 질렸다는 식으로 카게야마를 걱정스레 쳐다봤고, 카게야마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로 응수했다. 오이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야.”

?”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권 준비해놔.”

?”

외국이라고.”

 

설마 생애 첫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남쪽 섬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남쪽 섬인지, 위도 및 경도는 몇 도이며 어떤 문화가 있는지 등. 카게야마가 여행지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건 영어를 쓰는 나라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여권을 찍기 위해 갔던 사진관에서, 좀 더 웃으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던 사진사를 떠올렸다. 30분을 들여가며 힘들게 찍은 여권사진을 보고 오이카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찍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여권 사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찍었다고 하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 앳돼 보였다.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여권과, 카게야마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여권에는 같은 마크가 찍혀있었다. 새삼 카게야마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어를 쓰는 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와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다는 식으로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에, 같이 여행이라니. 얼마나 복 받은 건지 알라고,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호텔 1, 바닷가가 보이는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석에 앉았다. 6층 위, 같은 자리에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숙소가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연청빛 바다가 보이는 자리였다. 짚을 엮어 만든 듯 곳곳에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는 의자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선택한 자리에 앉고 바다를 바라봤다. 머릿속 바다보다도 에메랄드빛이 진했다. 연둣빛 바다가 흔들리고, 레스토랑에서 보아도 속이 비쳐 보이는 바닷속에는 암갈색 바위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물고기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지, 전날 저녁에 보였던 파란색에서 형광 노란색, 장미처럼 붉은색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백색과 상아색이 섞인 해안가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 무리가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 파라솔을 펴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 무리,카게야마가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쨩.”

 

어느새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앞에는 망고주스가 놓여있었다. 크고 투박한 얼음 두세 개가 동동 떠 있는 유리잔은 노란 빛깔로 채워져 있었고, 같이 나온 망고 1개는 반으로 잘려서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없어?”

 

떠보는 듯이 묘한 웃음을 띄우고,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고막 안을 채웠다. 카게야마는 오늘이 여행 둘째 날인 걸 떠올렸다.

 

생일, 축하해요.”

, 고마워.”

 

오이카와는 그제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자리한 입술에는 망고 주스가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도 앞에 있는 망고 주스를 한 입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밥 먹으면 바다를 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집에 가도 생각날 것 같다며?”

오늘 태어난 오이카와 선배랑 같이 보고 싶어요. 어제의 오이카와 선배랑 오늘의 오이카와 선배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네. 28년 전 난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오이카와 선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토비오쨩은 태어났겠지. 2년 뒤에.”

그러면 혼자서 이곳에 앉아있을까요. 혼자서 바다를 보면서.”

평행 세계의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만약의 이야기예요.”

글쎄. 그렇다면 토비오쨩은 방금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망고 주스를 시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숙소에 묵지도 않았겠지.”

 

카게야마는 그런 자신을 상상했다. 이 숙소에 묵지 않고, 바다를 보러 가지 않고, 망고 주스를 먹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 조건은 단지, 오이카와가 없다는 것뿐인데.

 

 

오이카와 선배가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바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오이카와 선배가 없었다면, 바다가 저런 색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망고 주스가 이렇게 달다는 것도. 아주 많이, 몰랐을 거예요.”

나도 몰랐을 거야. 토비오쨩이 망고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파도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똑같네요. 카게야마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

 

 

오이카와는 신발을 벗었다. 하와이안 꽃이 그려져 있는 샌들 한 짝을 손에 들고, 희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앞을 보면 오이카와의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바닷가를 향해 난 야자수 나무 그늘은 백사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파라솔을 펼친 몇 사람들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다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봤던 것보다 선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물살이 몰려드는 소리, 백사장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손톱만 한 물고기 몇 마리, 속눈썹을 무겁게 누르는 햇볕

 

바람이 기분 좋아.”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디건을 벗은 그는 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목을 타고 흐른 땀 몇 줄기가 셔츠 윗자락을 적셨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예쁜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

 

카게야마는 끄덕이며 대답한 후 오이카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볍게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와있는 이 여행에 대해서, 바다에 대해서, 오이카와의 생일에 대해서, 카게야마를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게 작은 심장 안에 꼭꼭 담겨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건 짤막한 단어 몇 마디였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선배.”

토비오?”

그냥, 다행이에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 선배여서.”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저보다 2년 먼저, 배구를 하는 사람으로.”

, 고마워.”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깊숙이 굽히며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 뒤로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렸다. 하얀 파도 빛깔과 오르는 물거품, 오이카와의 오뚝한 콧방울의 땀 몇 방울이 투명했다.

카게야마는 꿈을 기억해냈다. 바닷속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오이카와와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간 물고기와 남쪽 섬의 태양에 대해서도. 모두 오이카와가 태어났기에, 이곳에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카게야마는 웃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백사장 모랫바닥에서 열이 올라, 그 열이 오이카와의 몸을 돌아, 살아있는 온기로 카게야마에게 전해졌다. 카게야마를 울리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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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입니다 ㅠㅠ
멋진 합작 홈페이지는 여기 ▶ http://gywjd1555.wixsite.com/merrysummer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신 치리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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