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사망소재 주의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괴롭지 않게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서둘러 지나면서 생각을 털었다. 뛰어가는 오이카와의 옆으로 외제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잠시 주춤한 뒤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을 좋게 떠나는 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었다. 서점에는 요즘에서 안락사에 대한 책이 즐비해 있다. TV를 몇 번 돌려보면 여러 가지 죽음의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죽음, 사고 현장의 사망자 통계,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좋게 헤어지는 방법 등

오이카와는 드라마 속 배우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빗속을 뛰어가면서 그 표정을 조심스레 흉내 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단 건 알 수 있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봤다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발아래에서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튀겼다. 저번 주에 산 새 구두가 몹쓸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라는 글자가 왼쪽 귀 언저리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양 귀에 이어폰을 낀 듯 그 이름은 금세 머리 전체에 퍼져 카게야마와 연관된 몇 가지가 줄줄이 낚여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그중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이미 부유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했다.

 

 

**

 

 

잘 모르겠어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다는 말은 카게야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한쪽 입 끝을 오므리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작은 식탁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카게야마를 다리 사이에 끼면 어제 세탁한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조금 달콤한 솜사탕 향, 오이카와의 취향이었다.

생각해야지. 이후의 일.”

고집부리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 건 오이카와씨잖아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오이카와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가늘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요 근래 입에 제대로 대는 것이 없었다.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면 장골능이 오이카와의 허리에 닿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단단한 근육을 짓누르고, 카게야마는 약간 오이카와에게 기대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플라스틱 식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두른 카게야마의 팔을 풀고 얇은 팔을 덮는 티셔츠의 소매를 올렸다. 두 개로 곧게 뻗은 뼈는 보기에 좋았다.

요새 많이 건방져졌다? 이 오이카와씨한테 그런 말도 하고.”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제 팔을 힘겹게 빼냈다. 앞서 목에 둘렀던 팔을 재차 허리 뒤로 둘렀다. 검은 고양이 같았다. 두 검은 눈동자가 동그라니 떠서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고, 얇은 몸을 오이카와에게 천천히 부비적댔다.

지낸 시간 보다 이후의 시간이 더 길잖아.”

오이카와는 쓴맛을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방금 마신 커피는 평소보다 씁쓸했고, 평소 사던 원두가 아닌 걸 이제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매달린 팔이 힘겹게 풀리려고 해서, 오이카와는 그 허리를 더욱 지탱했다. 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갖다 대자 모난 뼈가 잡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전 상관없어요.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쟁이인지는 몰라도, 전 지금 정도면 됐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실핏줄을 닮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오이카와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물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식탁에 내려놓자, 플라스틱 식탁은 버겁다는 듯 날 선 소리를 냈다. 엉덩이 밑에 갖다 댄 손에는 카게야마의 청바지 촉감이 까슬하게 닿았다. 뒷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천천히 만지자, 카게야마는 하지 말라는 듯 오이카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지금은 언젠가 사라지잖아. 네가 말한 지금은 이미 방금 전이 됐고, 몇 분이 지나면 예전이 되고,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잖아.”

전 언제나 지금이에요. 지금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하는 건 항상 오이카와씨였죠.”

오이카와는 부정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솜사탕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티셔츠에 코를 묻으면서도, 당장 내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는 친선 경기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누나의 생일이었다. 이후를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간은 항상 어느 정도 어긋나있었고, 오이카와는 그러한 시간의 틈에 답답하면서도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제 오이카와와 싸운 일도, 내일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지금의 그에겐 두 팔에 남겨진 오이카와의 단단한 허리로도 충분했다.

버릇인걸.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말해줄래? 그러니까, 난 준비하고 싶은 거야. 헤어지는 준비는 일이 닥치고 나서 하면 늦으니까.”

만남과 이별은 하나였고, 일맥상통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맺어진 인연은 어디로 가든 이별로 통했고, 오이카와는 이 만남을 맺은 것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지점을 카게야마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끊는 건 카게야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집불통인 점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고개를 피하고 오이카와의 허리에만 들러붙고 있었다. 무겁게 누르는 카게야마의 뼈가 아팠다. 부엌의 통유리로 짙게 들어오는 햇볕이 등에 닿아 피부 사이사이로 땀이 한두 방울 맺혔다.

오이카와씨는 너무 뒷일까지 생각하시네요.”

카게야마는 불만인 듯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강하게 안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튀어나와 오이카와를 곳곳이 찔렀다. 이별하기까지의 아픔이었다.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 태양 빛에 오이카와의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먹먹한 목이 씁쓸했다. 식탁 위에 올려졌던 커피잔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고집을 부리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 아세요?”

그건 단어와 형용사의 조합이잖아. 말이 아니야.”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요. 죽음이란 건 제각기 다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준비는 닥치고 나서 해도 괜찮다고요. 항상 어긋났던 것들도 그때가 되면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는 않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피했다. 카게야마의 앞에서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입을 다물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마주 잡았던 손을 카게야마가 풀고 난 뒤에, 시간이 어긋난 채로 남는 건 오이카와였다. 좋은 죽음의 뒤에 새로이 기억을 덧입혀야 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그 준비를 하고 싶었다. 뒷일을 항상 미리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딱딱한 뼈를 만졌다. 튀어나온 팔꿈치 뼈, 아래팔뼈, 엉덩이 아래쪽의 몽글한 뼈, 톡 튀어나온 귀 아래쪽 턱뼈까지. 카게야마는 왜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냐며 비죽 웃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항상 왜 그렇게 어긋났을까 하고 생각할 지도요.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같이 지낸 시간도 길고, 의외로 저랑 오이카와씨는 닮았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오이카와씨를 누구랑 닮았다고 하는 거야. 전혀 다르잖아. 난 토비오처럼 어둡지도 않은걸.”

항상 조금씩 어긋났던 시간이 그때가 되면 마침 마주쳐서,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카게야마의 현재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오이카와에게 옮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단단히 짜증이 난 듯 오이카와의 목 언저리를 꽉 깨물었다.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촉촉한 감촉이 새로운 감각이 되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카게야마의 혀는 말캉거렸고, 솜사탕 향을 머금은 듯 조금 달달했다.

나쁜 버릇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나, 항상 이별을 생각하는 거나.”

버릇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한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가 생각하는 것과 카게야마의 생각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의 서브 모습을 찍은 비디오가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나치게 닮은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났었다. 그가 카게야마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는 점에서 더욱 싫증을 느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매사 어긋나는 것도, 조금의 취향도 겹치지 않는 것도, 전부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처럼, 좋은 이별이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오이카와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가끔 오이카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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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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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여성 주의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뱉었다. 검은 벚꽃의 향기가 머릿속에서 아롱아롱 떨어지고, 빛을 흘리고, 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나는 그날따라 너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꿨다. 나는 칠흑 벚꽃 잎 아래에 있었고, 너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입에 벚꽃 잎이 가득 들어찼다. 입속 점막에는 간지러운 벚꽃 잎 무더기가, 마른 혀끝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코 밖으로는 역한 꽃내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가 검은 태양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헉헉댔다. 나를 구해줘,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나약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는 아주 잠깐 가엾은 갓난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이젠 잊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목이 아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눈물 한 방울들이 벚꽃 잎 한 가지로 변해 발밑에 쌓였다. 눈물로 만들어진 하얀 벚꽃 잎을 발로 짓이기고, 입속의 벚꽃 잎들을 게워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꿈꿨어?”

.”

울고 있어.”

알아.”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낮게 떠서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찝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을 품에 안았다. 땀 냄새나, 그녀가 작게 내뱉은 불만은 귀 깊숙한 곳에 몽우리져 체내의 물방울이 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열었다.

꽃 폈어?”

한두 개라면.”

분홍색이야?”

분홍 벚나무라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분홍 벚꽃 잎을 떠올렸다. 너와 본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후회하세요?’

뭐를?’

저랑 꽃놀이 온 거요.’

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게 너라는 존재는 어렵고, 또 모호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에 대한 거라면 허벅지 안쪽의 별 모양 점에 대해서도 아는데, 나는 네가 어제 자른 손톱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네가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데, 네 안이 어떤 물질로 가득 차있는지도 몰랐다. 나와 너는 그런 상태로 함께하고 있었다.

꽃놀이, 오고 싶지 않았어?’

꽃이란 거 잘 모르니까요.’

벚꽃은 알잖아.’

오이카와씨가 아는 것만큼 알지는 못해요.’

나도 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벚꽃은 벚나무에서 열린다는 것, 향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한차례 강하게 불면 참기 힘든 꽃내음이 난다는 것, 떨어져서 발밑에 쌓여도 더럽지 않다는 것 정도. 너에 대한 것보다도, 나는 꽃에 대해 자세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건 가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회하는 거야? 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벚꽃은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꽃이 지는 걸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서서,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서로 아는 거라곤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너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나였고, 끄덕인 건 너였다. ‘후회하냐고 물어야 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는 건 나였고 대답하는 건 너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손톱 하나의 형태까지도 모르는 나는 대답이라는 질문이 어려웠다. 대답해줘, 토비오. 그렇게 말하면 너는 고민하다가도, 나를 조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럼, 후회하는 거야?’

선택한 건 저인걸요.’

너는 고개를 내리깔고 아래에 쌓인 벚꽃 잎들을 바라봤다. 목이 빠져라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몇몇 커플들이 너의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벚꽃 잎들이 네 아래에 형태 없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있었다. 눈가 끝이 엷게 붉어진 게 보였다. 숨을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다. 네가 내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후회만큼, 나는 너에게 입을 다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네가 오이카와씨,’라고 부른 말 뒤편에 삼켜버린 말 만큼, 나는 너를 안아줄 의무가 있었다. 설령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대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무 뒤편에 철저히 숨었다.

봄이란 건 후회의 계절이잖아.’

봄이요?’

. 작년엔 그러지 말걸, 올해 초반엔 왜 그랬을까, 뭐 그런 것들.’

오이카와씨도 후회란 걸 하나요.’

원망 섞인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에선 귀엽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토비오, 너는 다시 바닥을 바라봤다. 꽃을 보러 와서 바닥만 보는 너는 참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게 바른 거야, 나는 생각했다. 꽃이란 건 결국 지는 게 최종 형태니까, 네가 꽃을 가장 바르게 보고 있는 거야. 벚꽃을 보러 온 사람 중 오직 너만이 벚꽃을 가장 그 형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 발아래에 묻힌 벚꽃 잎들을 떠올렸다. 처음 네가 나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날, 나는 내 심장이 네 발아래 짓이겨지는 상상을 했다. 꽃은 지고, 떨어져서, 밟히는 게 가장 올바른 꽃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쯤은 한다고. 그런 걸 먹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날 받아들이지 말걸, 키스하지 말걸,’

오이카와씨.’

좋아하지 말걸,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밤, 내 앞에서 손톱을 깎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였던 것들을 그 어딘가에 버리면서 너는 무슨 상상을 할까. 한 번쯤, 너는 내가 없는 너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나는 그런 밤이면 눈 끝이 붉은 너를 안고, 어두운 침대로 끌어들였다. 검은 벚꽃 잎이 너를 덮고 나를 덮어 그 방안에 가득 차면, 네 뒤편에 쌓인 후회에 깨끗이 포장된 한 개의 상자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토비오.’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너는 대답했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기어코 너의 눈에서 나온 물 한 방울이 나는 무겁고 또 버거워서 어깨를 툭 떨구고 싶었다. 나는 항상 대답을 네게로 미뤘고, 너는 내 이름 뒤에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고 내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네가 손톱을 버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였을, 그 수많은 좋아하지 말걸의 후회들이 발아래에 쌓였다. 오늘도 네게서 호롱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나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살아났어?’

품 안의 그녀가 낮게 물었다. 땀이 식은 등허리에 고통이 뚝뚝 끊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손톱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벚꽃을 보고, 밤에는 손톱을 자르자. 나는 눈을 작게 내리깔고 손톱을 자르던혹은 꽃의 홍수를 바라보던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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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1

 

오이카와 선배와 만나는 날이었다.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붉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는 작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옆에서 큰 농사를 짓는 한 노부부의 물길이 벽돌 옆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라스노 고교 앞에만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공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까, 반질반질한 회반죽이 그대로 굳은 느낌이었다.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은 태양은 어울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손에 들린 우유빵이 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늦었잖아.”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내뱉은 입의 주변에는 우유빵 조각이 붙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가, 여느 때와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지나가던 카라스노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 힐끔거리며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여학생에게 살포시 미소 짓자, 그 두 명은 꺄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선배를 기다리게 하다니, 토비오쨩 안 되겠네.”

오이카와 선배는 남은 우유빵 한 입을 내게 내밀며, ‘하고 말했다. 조금만 입을 벌리면 바로 쏙 들어올 것 같은 우유빵을 살며시 밀고, 됐어요. 하며 인상을 구부렸다.

귀염성 없네, 정말.”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중얼거리고 남은 우유빵은 전부 제 입에 넣어버렸다. 입가 끝에 묻은 우유빵 조각을 손으로 훑어 삼킨 뒤, 오이카와 선배는 작게 웃었다.

갈까.”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끝에서 지고 있는 하늘 안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짙은 하늘색의 그라데이션이 구름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걸어가는 동안 우유빵 봉지를 작게 접어 딱지를 만들었다. 작은 딱지를 몇 번 손에서 굴리더니, 이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옆모습에 짙은 분홍빛의 그라데이션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의 얼굴과 같이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고 있어.”

오이카와 선배는요?”

글쎄, 어떤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오이카와 선배는 장난치는 듯이 미소 짓더니,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감정이 담긴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토비오쨩이 귀여운 여자아이였다면 좋아했을지도.”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몰래 쳐다봤던 여학생 두 명을 떠올렸다. 길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에,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어깨가 동그랬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 아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손을 흔들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선 얘기 끝난 거야?’ 되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젊었을 적 어머니와 같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양털과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러 많은 남자 선배들이 여자 배구부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토스를 올리려고 팔을 드는 순간, 내 손가락이 유달리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지금 있는 곳은 카라스노 고교 여자 배구부였다. 체육관 바깥쪽에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빛깔의 태양을 보고 난 그제야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남자 선배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카게야마가 여길 보고 있어.”

역시 귀엽네. 저번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귀여운데.”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발꼬리에 쌓여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난 귀여운 여자애구나. ‘귀엽다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푸른 태양의 세상에서 나는 귀여운 여자애였다.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리려고 가볍게 뛰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렸다.

 

 

토비오쨩, 만두 먹을래?”

오이카와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기만두를 내밀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받아들고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들면 짙은 보라색의 하늘이 구름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색깔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 입가에 묻은 만두 조각을 손으로 훑어다가, 자기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듯한실제로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적이 없다달콤한 행동, 목소리, 말투. 이 꿈속에서 난 오이카와 선배보다 훨씬 작아서, 나를 바라보고자 고개를 약간 숙인 행동까지. 오이카와 선배에게 나는 여자애로 보이고 있었다. 푸른 태양, 보랏빛 구름과 존재할 리 없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의 세계 안에서 오이카와 선배는 설탕 시럽처럼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조금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서, 다시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고민하는 듯 음낮은 목소리를 내며 오이카와 선배는 눈가를 좁혔다. 만두를 들고 있는 내 오른손을 이끌더니, 남은 만두 한입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고 오이카와 선배는 웃어 보였다. 만두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손가락 하나에 가볍게 키스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이지, 토비오쨩이.”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떨어뜨린 뒤,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흘러내려 갔다.

만약, 말이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가 아쉬워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이 배구를 안 했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배구 안 하는 토비오쨩을.

오이카와 선배가 살며시 깨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푸른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3

꿈을 꿨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1학년, 주변에서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애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카게야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 선배들이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배구부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간에는 카라스노 고교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이카와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오바죠사이라는 고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세터, 키타이치 중학교 시절의 나의 토스, 지금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푸른 태양이 일그러져 바닥에 녹아내렸다. 보랏빛 하늘 아래 카게야마 토비오와, 푸른색 태양조각이 흩어져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깨물었던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오쨩.”

 

눈을 떴다. 침대 안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울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1학년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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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7 동거

 



 

오이카와 선배네 집은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개인 주택의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고, 현관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화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몇 개 피어있었다. 당겨서 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는 신문을 놓을 수 있는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왼쪽에는 안 쓰는 방이 있었다. 매일 닦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계단을 오르면 발을 내딛는 곳 아래쪽으로 나무 썩는 소리가 들렸다. 삐이, 삐극, 삐걱하는 소리가 끝나고 2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오이카와 선배의 방이었다. 사각으로 접어놓은 이불, 좌식 책상과 옷에 걸린 교복까지, 무엇 하나 오이카와 선배의 향이 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배구공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로서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벽걸이형 달력에 표시되어있던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319, 졸업식. 오이카와 선배의 글씨체가 아닌 그 표시는 가족 중 누군가가 적어놓은 듯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간 날이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달력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젖었다가 마른 흔적까지 생각나는데도, 기억이란 이상한 곳에서 모호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돼, 토비오쨩.’

난 그 말을 듣고 좌식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 할지, 혹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좋을지 잠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손바닥에 차가운 식은땀이 번졌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지금껏 집에 초대한 후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나는 쿠니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초등학교 이후로 오이카와 선배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이와이즈미 선배와 오이카와 선배의 대화로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깨에 멘 에나멜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봤다.

저기,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무언가 소중한 걸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앉아도 돼, 한 번 더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뇌 속의 바람이나 기호에 따라 조금씩 가공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에나멜 가방을 한 손으로 빼서,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계 두 개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서로 어긋난 박자로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조금 머리가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는 양손으로 내 체육복 저지 상의를 벗겼다. 저지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다다미 바닥은 소리 흡수를 잘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내 흰색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비오,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로 이사를 왔다. 걸어서 역까지 8, 역에서 학교까지 30.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며 히나타는 부러워했다. 오이카와 선배와는 가끔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도쿄로 이사 왔다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 오이카와 선배와 같은 대학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었고, 그쪽에서 먼저 스카우트하러 온 걸 보고 츠키시마는 행운이네라고 했다. 성적으로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학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 선배가 없는 2년은 회색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했고, 기쁘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오이카와 선배에 대한 감정은 생각 날 때만 한 번 꺼내보는 상자였다. 가끔가다 기억을 되새기곤 했지만 꿈에 나올 때는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있는 때가 많았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연락을 보내오는 오이카와 선배도 신기루 같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여자 선배와 함께 있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동거를 먼저 시작한 선배라며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아주 드물게 배구를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마다 동거생활의 소소한 팁을 말했다. 프라이팬 하나로 반찬을 세 개 만드는 법, 설거짓거리를 줄이는 방법, 처치 곤란한 채소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 등……. 나는 거의 항상 끼니를 밖에서 때우거나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의외로 살림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밥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대학 내에서 유명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자취하는 집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많은 여자 선배와 사귀었고, 대학 내에서 친구도 많았으며 여전히 배구부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누가 데려다줘야 할 정도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 후에는 애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으며, 평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 해주면서도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는 부드럽게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우와,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이 대학 무섭네.”

네가 조금 유명한 사람이어야지하긴, 2년이면 오래 사귀었네.”

같은 강의실 뒤편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까.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웠다. 강의실 창문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햇볕이 내 뒤로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웠고, 머릿속에선 기억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퍼즐처럼 흩어져 있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세리자와랑 얘기해봐야지.”

그래서? 이제 동거하는 건가?”

우와, 나카지마 불건전해! 오이카와씨는 동거란 말은 모른답니다!”

무슨곧 졸업인데, 결혼하기로 정한 남녀가 뭐하러 따로 사냐고.”

동거는 안 해. 그건 세리자와랑도 얘기 끝난 사항이야.”

오이카와 선배는 시합할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내 오이카와 선배는 가벼운 말투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 만의 비밀이야!’ 작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

발신인은 중학교 때부터의 선배였다.

 

 

왜 안 먹어? 이제 카레 싫어하나?”

오이카와 선배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이카와 선배 앞에는 방금 만든 로제 파스타가 있었다. 카레의 달콤한 향이 코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반질거리는 겉면의 반숙 달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뜨거운 카레 위에서 뒤척였다.

좋아해요.”

근데 왜 안 먹어?”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 속의 오이카와 선배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본 오이카와 선배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그건 오이카와 선배가 결혼하기로 결정 한 세리자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굳이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이카와 선배는 잊을만하면 연락했고, 나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러 나온 건 나였고, 그의 앞에 앉아 카레를 주문한 것도 나였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불러낸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기억도 변형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있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는 아예 기억 자체의 상자를 닫아버린 것인지. 나는 오이카와 선배도 같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도 선명했던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억에는 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바람이 투영된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찰나와 같이 웃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내 귀를 덮고 볼에서 목까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토비오, 우리 같이 살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주 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중학교 때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어린아이였다. 그를 아는 것은 저뿐이라는 기분에 젖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서 시작한 기억을, 그와의 동거로 끝맺는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된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도 그에게 끌리고 있는 채였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그날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에 잘못된 일은 없어.”

일어나야만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이야.”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일어나는 일의, 일어나야만 하는 일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의, 그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동거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면. 아니, 그의 사랑이고 나의 사랑이라면. 내 기억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만 선명한 것도 그러한 일종인 걸까.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이외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외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았다.

저랑 만난 걸 후회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너를 만난 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에는 후회라는 말이 필요 없지.”

오이카와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던 카레 속 반숙 달걀이 저 혼자 터져서, 누런 노란 빛의 달걀 속이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속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서 오이카와 선배와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건 이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일까.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운명의 상대라는 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면 자주 나오는 저 말은, 쉽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상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색이 아주 특별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회색의 세상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 내가 먹고 있는 수프의 색과 아주 단순하게 내 몸의 털이 무슨 색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전부 다 회색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말을 배우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회색 그림책을 내게 사줬다. 그림책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색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지만. 어머니는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을 읽고 한 장 넘겼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아는 회색의 세상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 내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

어느 날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빛깔, 얼음처럼 차갑고 사나운 빛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빛까지. 루시아는 그것이 색깔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시아의 운명의 상대는 소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림책의 문자를 읽어나갔다. 책 속의 루시아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머니는 그림책을 덮고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에 찬 듯 반짝였다.

토오루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루시아에게 소니 같은 사람, 엄마에게 아빠 같은 사람.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내 행복이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가기 전 동거 상대가 데려온 회색 고양이 토토가 가늘게 울었다. 토토의 등을 한두 번 쓰다듬어준 후 작은 코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동거 상대와 머무는 회색 지붕의 건물 3층은 경치가 꽤 좋고, 안방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2인용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동거 상대는 자주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안방에서 토토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이면 직접 만든 카레를 먹고, 회색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그와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고, 루시아가 말했듯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얼마 후 있을 국가대표 결정전을 대비하고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날도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이었다. 나는 그가 없는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동거 상대는 내가 없는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선잠이 드는 날이 늘어갔다.

급해서 대충 챙겨 입고 나온 외투는 초겨울용이었다. 소매 안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색이 없는 세상에서회색을 색이 아니라고 본다면사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바람의 세기와 피부에 와 닿는 온도, 콧속을 한꺼번에 채우는 향기뿐이었다. 봄의 벚꽃과 장미향기, 여름의 턱 끝까지 답답한 열기,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겨울의 회색 눈덩이가 내가 아는 계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실내에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바쁘게 연습과 시합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건 내 동거 상대가 더 심해서, 작년 겨울에는 후드 티에 얇은 조깅팬츠 하나만 입고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하고 와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지독하게 건강한 건지 결국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키스를 한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단 건 답답한 일이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세상은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비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가?”

토비오는 설탕으로 착각해서 소금 범벅이 된 계란말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물었다. 냉장고에 몇 개 있는 남은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고, 수저를 놓은 후 내가 대답했다. 쓰레기통 속에 여전히 시선을 향한 채, 토비오는 내게서 등 돌리고 있었다. 회색 브이넥은 입은 어깨가 넓었다. 똑같이 브이넥을 입은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는 커플티를 입은 상태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커플 옷을 사 입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옷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고 옷장에 따로 보관해도 섞이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체격이 더 큰앞으로도 토비오보다는 항상 더 클내가 옷을 구분해서 다시 넣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거요.”

회색은 보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보인다던데요.”

그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났다. 토비오는 가끔 내가 짜증 낼만 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짜증을 내는 나 또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길 바랐다. 나는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로 토비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토비오는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토비오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여러 가지 말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는 말로 대화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토비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항상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몰랐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

내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토비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토비오의 시선이 식탁 위의 회색 반찬들을 향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토비오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짜증 섞인 말투를 억누르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고, 토비오는 또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가끔 토비오는 내게 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운명의 상대가 아닌, 색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었고 나와 토비오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에게는 가끔 힘이 들었다.

전 오이카와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함께 있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요?”

……토비오.”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토비오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거품처럼 떠올랐다. 회색의 세상이 말로만 듣던 채도를 갖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경험은 나에겐또한 토비오에겐없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나는 중학교 때 토비오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 토비오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비오와 생활하고 있는 3층 동거 집은 회색 일색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색에 대해 떠올렸다. 꿈속에선 너무 많은 색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결국 웃고 마는 나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토비오의 머리색은 무슨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태양 빛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했고 어떨 땐 꽤 그럴싸한 걸 상상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운명의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그쳤다. 나는 그날 밤 회색 이불 안에서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잠이 든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회색 머리에 얼굴을 묻고, 회색 입술에 입을 맞추고 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세상은 회색이었고, 토비오였다.

 

약속장소는 동거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라고 정해져 있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살얼음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리를 조급히 움직였다. 카페의 넓은 통유리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토비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동자에 붙었던 먼지가 하나둘 닦이는 듯 색채가 촛불처럼 드러났다. 카페의 지붕은 황갈색이었고, 하늘에선 색유리를 낀 구름이 눈부시게 새하얀 빛으로 빛났고,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민들레 잎이 무섭도록 노랗게 반짝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한 여성도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박차고 달렸다. 회색 렌즈를 끼듯 한 줌, 두 줌 멀어지는 색채가 아쉽고 덧없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중심을 잃고 몇 번 발을 헛디뎠으나 카페 입구에 몸을 부딪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카페의 입구 문은 회색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점원은 회색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그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토비오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토비오의 앞머리를 몇 번 정돈해준 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루시아가 소니를 만난 순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토비오,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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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5 마츠리(축제)

 

 

 

사방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오른쪽에서는 친구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쪽 조금 위쪽에선 딸을 잘 챙기라고 남편을 다그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에선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뭇게 타버린 밤하늘에선 멀리 북소리가 둥, , 둥 일정한 리듬을 두고 들려왔다. 이 길로 가면 오른쪽에는 타코야끼 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떼자 어깨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하고, 유카타를 입은 소녀는 뛰어가 버렸다. 나와 한, 두 살 정도 차이 날 뿐 같은 나잇대였는데도 눈가에 보드랗게 퍼진 펄 빛 눈화장과 입술에 물든 분홍 꽃잎 색이 낯설었다. 투명한 흰 피부에 보스스 달아오른 볼이, 오늘이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새삼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소녀가 신은 나막신이 따각따각 나무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좁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앞서 걷던 소년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어가 버렸다. 나는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앞이 이곳이 맞는 걸까. ‘이란 말조차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해 있는 키타이치 중학교 배구부는 부원이 많았다. 배구로 유명한 강호교에, 특히나 올해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끄는 시기였다. 예년보다 부원의 수도 많았고, 더 강하고 단단한 팀이 되고자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다 같이 가서 팀워크를 돈독히 하자! 는 목표 자체는 원대하고 좋아 보였다. 할 일이라고는 가끔 모이는 지역 소모임에 참가하는 일 혹은 때때로 폭설이 내리면 소일거리 차원에서 자기 집을 넘어 옆집 눈 치우기가 전부인 시골 마을에서, ‘축제란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카게야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전국대회 영상을 본 이후로 처음 알았고, 사람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두가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자는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학년별로 모여 다니자는 것에 겨우 합의를 봤을 때는 이미 몇몇이 개별활동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한 1학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년 대다수가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킨다이치, 쿠니미와 이곳저곳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고 다녔다. 도쿄나 큰 도시에서는 커다란 불꽃놀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시골인 미야기에서는 작은 불꽃 몇 개가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 게 전부였다. 꽃 모양에 용 모양, 하트모양에 작게는 두 번 연이어 터지는 불꽃도 있다지만 전부 소문에 불과했다. 항상 화려한 불꽃놀이는 먼 나라혹은 먼 지역의얘기였으며,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불꽃놀이는 북소리나 사람들 소리에 가려져 작게 터지는 불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모인 것은 역시나 시골이기 때문이었다. 행사가 별로 없는 시골에서 축제는 공식적인 즐거움의 장이었다.

쿠니미는 타코야끼를 사들었으며, 킨다이치는 금붕어 잡기에 열중했다. 카게야마는 다만 가만히 서서 그들을 구경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기도 했다. 축제에는 가족과 함께 몇 차례 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카게야마는 사람들에 쏠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정신없는 한바탕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올해도 사람이 많기는 여지없이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올해의 축제가 여느 때와는 다르단 것을 알고 있었다.

여우 가면 어때?”

그건 쿠니미지. 카게야마는 이게 더 좋을 거 같다. 까마귀 가면.”

까마귀를 보통 가면으로 만드나. 어울리긴 하네. 킨다이치는 이거 어때? 랫서 팬더 가면.”

랫서 팬더야말로 왜 가면으로 만드는 거야?”

어울리니까 됐잖아.”

우연히 마주친 가면 가게에서 각자 하나씩 사자는 얘기를 꺼낸 건 킨다이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몇몇 가면을 골라든 쿠니미 손에 이끌려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직 정면만 시야에 가득했다. 쿠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를 보고 조금 웃었지만, 쿠니미는 알아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는 사람으로 둔갑해서 마을에 내려온 여우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면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보려면 고개를 평소보다 더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카게야마는 잠시 헤매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너머로 익숙한 머리색이 보였다. 검은 하늘 아래 붉은색으로 퍼지는 전등 불빛 옆에서,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색은 평소보다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진한 바다색에 줄무늬가 들어간 유카타는 썩 잘 어울렸다. 3학년 배구부 선배 몇 명과 이와이즈미 선배, 그 앞에 유카타를 입은 몇몇 여자 선배들이 오이카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뒤편에서 서로 손잡고 가자는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시야 건너편에서 오이카와는 입을 바삐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팔짱을 낀 유카타 소매가 아래로 늘어져서 흰 속살이 드러났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조그맣게 난 두 개의 눈구멍은 오이카와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애초에 옆은 볼 수 없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까마귀 가면 속의 카게야마의 시야는 어두웠고, 고요하고,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만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그랬다고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까마귀 가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몇 번 치이면서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가는 도중,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며 걸음을 멈췄다. 이와이즈미의 곧은 눈동자가 이내 비껴졌다. 그렇구나. 지금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 쿠니미가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우였듯이, 카게야마는 산의 외로움을 피해 도망쳐 온 새끼 까마귀였다. 카게야마는 다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이제 다섯 발자국 앞에 있었다. 유카타가 감싸고 있는 등은 곧게 뻗어 있었고, 코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빛무리를 형성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몰랐다. 그의 등만 보이면 달라붙고, 서브를 가르쳐 달라 조르는 게 일상이었던 카게야마의 본능일지도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까마귀 가면 속에서 저의 숨 쉬는 속도가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두 발자국 앞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면 시야에 오이카와는 없었다. 저 멀리서 둥, , 둥 일정한 속도로 북소리가 들렸다. 북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북 치는 장인이 치고 있는 건 제 심장일지도 몰랐다. 지금 이 축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이카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불꽃놀이인가? 옆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토비오쨩?”

뒤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뒤를 돌아보려던 카게야마는 몸만 조금 떨고, 발을 다시 움직였다.

토비오,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오이카와가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옆에서 왜 생사람 잡냐라며 오이카와의 등을 한 대 강하게 때렸고, 주변 사람들은 토비오?’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야! 그치만 이와쨩! 토비오인걸!”

카게야마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거의 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속도였다. 사람들에 끼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적어도 오이카와 선배만큼이라도. 몸이 조금 더 다부졌다면, 평소에 근력 트레이닝을 열심히 했어야지. 자책하는 목소리와 후회감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북 치는 장인이 두들기는 심장에 차올랐다. 콧속으로 탄내가 스며들어왔다. 멀리서 불꽃을 쏘아 올린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축제는 무언가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 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오이카와 선배를 보지 말 걸,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까마귀 가면을 쓰지 말 걸, 화약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탄내의 정도가 짙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걸.

토비오!”

어깨가 강하게 잡힌 아픔이 카게야마의 전신에 퍼졌다. 겨우 멈춘 양 다리가 후들거렸다. 힘들게 서 있는 몸이 살며시 비틀거리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돌리고 마주 바라봤다.

왜 도망치는 건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좁은 시야는 다시 오이카와로 가득 찼다. 예쁜 홍차 빛 눈동자 위로 작은 땀방울이 한두 방울 걸려있었다. 까마귀 가면 속은 지나치게 더웠고, 숨소리가 엉망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왜 알아보는 건데요.”

?”

오이카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잔뜩 어긋난 호흡에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오이카와는 당황스러웠다. 너무 세게 잡은 건가, 어깨에 실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왜 알아보는 건데요. 까마귀 가면, 썼는데…….”

아니, 토비오쨩이잖아?”

그러니까, 왜 알아보냐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원망이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까마귀 가면을 벗겼다. 손길이 지나치게 상냥해서, 카게야마는 한차례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고 싶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어떤 표정인데요.”

못난이 표정.”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땀으로 눅눅하게 젖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좋게 말해도 쓰다듬는다고는 할 수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내가 어떻게 설명해? 토비오쨩은 그냥 토비오쨩이잖아? 머리를 짧게 잘랐어도 토비오고, 하복을 입든 동복을 입든 사복을 입든 토비오고, 까마귀 가면을 써도 토비오고.”

축제로 앞뒤가 안보이고 꽉꽉 막힌 곳에서 만나도요?”

.”

북 치는 장인이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북소리도 뚝 끊겼다. 축제 소리는 저 멀리 멀어지고, 콧속으로 끝도 없이 들어오던 탄내는 점차 사라졌다. 카게야마의 시야는 다시 넓어졌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수많은 사람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뒤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써 끝났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왼쪽 조금 위쪽에선 저쪽 타코야끼가 더 맛있다며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오이카와는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 있든 오이카와였다. 여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도, 멋진 유카타를 입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그렇듯.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까마귀 가면을 다시 받았다. ‘써봤자 소용없다니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안 쓸 거예요. 안 써도 괜찮으니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천천히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처음 들었던 일정한 리듬 그대로였다.











오이카게 전력 #4 발렌타인 데이

 

 




 

겨울 끝자락에는 항상 달콤한 향이 머물렀다. TV나 길거리 현수막에는 달콤한 사랑을 전하라는 문구로 가득 찼다. 달콤하다는 건, 콧속을 따끔하게 채우는 겨울 구름 냄새보다 더 따스한 걸까. 어머니가 자주 보던 드라마 속 커플은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그렇게나 따뜻한 거냐고 묻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몸은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놔두고 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친 겨울바람의 기승 속에서 연습하면서 몸을 데우는 것과는 또 다른 걸까. 어머니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토비오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을 스가와라 선배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알아?”

알아요. 화이트데이랑 반대되는 말이죠? 화이트랑 반대면 블랙 아니에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기는 츠키시마를 한껏 의식하면서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츠키시마는 또 코웃음 칠 뿐이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생글 웃더니, 목도리를 여미며 말했다.

, 반대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 날에 주는 물건이 뭐인진 알고 있어?”

, 알아요. 초콜릿이랑, 사탕이잖아요.”

잠시간 머릿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릿이었는지, 사탕이었는지 고민을 거쳤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며칠간 떠들썩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높은 옥타브의 재잘거림이 생각났다. 결국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는 거로 결론이 났던가. 수제가 역시 좋다느니, 진심이 담겼다느니. 초콜릿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수제라면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걸까. 가게에서 파는 걸 사면 진심이 아닌 걸까.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가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네. , 맞아. 곧 있으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설명하려고 준비했다가 필요가 없어진 걸 알았는지 잔뜩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뱉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이 하얗고, 또 서늘했다. 왜 발렌타인 데이가 이 차가운 겨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달콤한 향내가 뜯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덕지덕지 붙은 계절이 좋을 텐데. 하필 2, 겨울 끝자락이 날카로운 이빨을 사람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이 때가 아니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난 몇 년간 나와 상관없던 날에 대한 생각이 물에 풀린 물감처럼 점점이 퍼졌다. 구태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 선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가 어떤 날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은 올해도 세이죠의 부실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아니, 어쩌면 올해는 많이 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이 받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만인에게 초콜릿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었다.

카게야마는 받을 사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짓궂은 얼굴로 왕님은 얼굴만은 꽤 인기 많으니까라고 했지만, 항상 츠키시마가 말하는 얼굴만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짜증 나니까 한번 째려봤다. 초콜릿은 어머니에게서 받는 게 전부였다. 올해가 어떨지는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는 걸까, 받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기에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말하든 일반적이진 않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일반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한 명이 꼭 무언가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이런 날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낯설었다.

받아야 하는 건지,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뭘 줘야 할지도요.”

줄 사람은 있는 거야?”

스가와라 선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걷던 히나타나 다이치 선배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설명을 요구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 카게야마, 무슨 소리야? 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히나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줄 게 있다면 줄 사람이 있는 거고, 줄 게 없다면 없는 거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과 무언가가 다르단 건 알겠는데, 어디에서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맹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한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준비한 초콜릿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수제는커녕, 가게에서 톡 치면 쏟아 내릴 정도로 수많은 양의 초콜릿을 쌓아올린 곳에서 젠가를 하듯이 하나를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겠지만실제로 여자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만드는 아이가 몇 있는 것 같았다어쨌든 오이카와 선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게 초콜릿 기대한다는 둥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면 키스해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손을 잡고 싶으면 말없이 내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듯 이상한 관계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괜찮았다.

, 어쨌든. 줄 사람이 있든 없든 그건 카게야마의 문제고. 올해 다들 하나씩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요! 저도요!”

스가와라 선배가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고, 히나타는 내게 향했던 눈을 돌려 땅에서 휙 뛰어올랐다. 스가와라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웃었다. 입꼬리가 얇게 올라가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볼이 말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

 

 

오늘도 춥네. 토비오, 목도리 정말 안 해도 괜찮아?”

, 괜찮아요. 목에 뭔가 닿는 게 싫어서.”

그 말 몇 번이고 들었지만, 용케 감기에도 안 걸리네. 몸은 진짜 건강하다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풋 웃으면서 목도리를 더 강하게 묶었다. 맵시 좋게 묶인 목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서 형태를 만들고, 오이카와 선배는 왼쪽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쇼핑백 끈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상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하트 모양에 랩핑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고, 포장지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얘기하던 초콜릿 중에 몇 번이고 들었던 유명 상표의 포장지도 보였다. 쇼핑백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오이카와 선배는 그저 웃으면서 부실에 남은 건 내일 가져가려고.’ 중얼거렸다.

한 개 먹을래?”

그걸 왜 제가 먹어요.”

맛있잖아.”

오이카와 선배한테 준 거잖아요. 저한테가 아니라.”

그럼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한테 주는 걸로.”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단순한 말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생각하고 마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이카와 선배가 강제로 내 입에 각진 사각형의 초콜릿 한 개를 입에 집어넣은 까닭도 있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입안 양쪽에서 조금씩 묻어난 침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혀끝에 진한 단맛이 퍼지고, 코에서 초콜릿 향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선배는 볼을 물들이며 웃더니, 손가락에 조금 묻어나온 초콜릿을 살며시 핥았다. 붉은 혀와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코와 입을 침식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맛과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초콜릿이 오이카와 선배의 윗입술 끝자락에 묻었다. 흰 피부는 한겨울 날씨에 보들보들하고 투명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좋아요.”

……?”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는 초콜릿을 핥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입에서 전부 녹은 초콜릿은 아쉬운 단 맛만 남기고 약간의 까슬 거리는 쓴맛이 입 점막을 긁었다.

그거 지금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되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이해하는가. 내 말에 등장도 하지 않은 키스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토비오쨩은 내 손가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상아조각처럼 자리 잡은 손톱은 분홍색 조약돌 같았다.

손가락은그것도, 좋지만. 입술이 좋아요. 예쁘잖아요.”

예쁘다고?”

. 오이카와 선배한테 초콜릿을 주는 여자들은, 어쩌면.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지 않았을까요.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먹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사 오는 게 좋았을지도요. 발렌타인 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러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토비오 역시 지금 키스해달라고 하는 거지?”

제 말 제대로 들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키스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조금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 선배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알았으니까, 토비오. 초콜릿 한 개 더 먹어.”

싫다고 말하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안에 침투해 온 초콜릿의 단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맛있어? 오이카와 선배는 달콤함이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 쇼콜라티에 되고 싶다던 아이였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오이카와 선배는 쇼핑백 안의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웃는 얼굴이 귀엽고, 이 아이는 보조개가 귀여워. 이 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얘는 어깨선이 동그랗게 퍼져서 참 예쁜 애야. 방금 줬던 초콜릿을 만드는 아이는 말했듯이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들고. 토비오,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 모든 사람을 기억할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은 알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원하는 토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기억 회로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는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의 일을 가끔 말할 때면 아무리 나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그 여자아이들도 모두 오이카와 선배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속 방 하나가 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울진 않지만.

, 이 아이들은 그렇게나 귀엽고 나에게 초콜릿까지 주잖아? 토비오가 말했듯이 난 달콤한 걸 좋아하고.”

.”

그래도 난, 초콜릿 한 조각 주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토비오가 좋아. 토비오를 좋아하는 거야. 내 입술이 좋다는 토비오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토비오의 귀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끌어안고 싶어.”

…….”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잖아? 토비오, 초콜릿 맛있었어?”

……저기, .”

다행이네.”

오이카와 선배는 살며시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입안의 초콜릿은 다시 순식간에 녹아 혀끝을 아찔한 단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려는 여자아이의 추억은 내 입술 안에서 녹았다. 그 뒤에 애매하게 남은 쓴맛이 조금 견디기 힘들어서, 오이카와 선배의 손을 먼저 잡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마주 잡아준 손에서는 방금 먹은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오이카게 전력  #3  안경

 

 




눈이 마주치고, 눈을 한번 깜빡였다. 깜빡, 하고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 인화된 사진 속 오이카와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기는 눈을 닮았다고 하던가, 눈이 사진기를 닮았다고 하던가. 무엇이 먼저든 간에, 눈은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구나하고 납득하고마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씨를 담아내기에는, 그렇다. 눈으로는 부족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진기 1개로조차도. 수십 개의 사진기가 오이카와씨를 감싸는 풍경을 상상했다. 눈부신 섬광이 몇 차례 지나가고 잠시 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나면 오히려 그 사진은 물먹은 듯 흐려지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생각은 신경전달의 다발로 뚝뚝 끊기며 전달되다가 이윽고 온전히 끊겼다. 오이카와씨가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다시 깜빡이고 마주 보자, 오이카와씨는 내 앞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이카와씨 뒤편은 큰 통유리였다. 넓은 카페 안의 구석진 자리는 항상 우리가 앉는 자리였다. 유리를 등지고 앉은 의자 옆에는 키가 큰 인조 산세베리아가 넓은 잎가지를 퍼뜨리고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석진 카페 안쪽 자리의, 흰색 둥근 화분으로 가려진 의자 안쪽에 앉아서 오이카와씨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뒤편의 통유리에는 석양이 몰려드는 거리를 몇몇 사람이 분주히 걸어갔다. 낮이 잠기고 붉은 바다에 삼켜지는 이 시각 즈음의 오이카와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쁘셨나요.”

오이카와씨가 끼고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보고 말했다. 오이카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수 없는 안경이야.”

그럼 왜,”

토비오한테도 선물해줬잖아. 방금, 안경.”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이카와씨와 똑같은 검은색 뿔테 안경이 손에 들려있었다. 언제 받은 건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진기와 눈에 대한 생각을 하기 이전일 것이다. 아이스티를 주문하기 전이던가, 그 이후던가. 오른쪽에 놓인 아이스티 속 각진 얼음은 4개 정도 둥둥 떠서 아이스티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안경을 들어 올려 코에 걸쳤다. 귀 옆에 닿은 감각이 서늘했다. 오이카와씨가 보이고, 오이카와씨가 쓰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 너머의 안경, 그 안경의 짧은 수평선 너머의 오이카와씨는 웃음을 참는 듯 이상한 표정이었다.

안 어울려.”

무슨 상관이에요알고 있어요.”

선글라스를 쓴 적이 있다. 아오바죠사이로 가고, 오이카와씨를 만나고 금방 벗어버렸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웃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연기처럼 흘러다니는 사람이었다. 고정된 이미지도, 형태도 없이 녹아내린 채로 흘러다니는 오이카와씨는 내게 안경을 건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형상이 부서지는 오이카와씨를 이 안경으로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가르쳐줘요, 오이카와 선배. 어릴 적처럼 마냥 물어보는 곳에 답이 오리란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씨도 가르치는 것은 적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를 대상으로는.

안경을 다시 벗으려고 손을 들었다.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손끝은 벗는 방법에서도 한참을 방황했다. 안경을 어찌 쓰고 벗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진은 찍는 법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눈을 깜빡여 대상을 뇌 속에 전기처럼 박아 넣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중학교 시절 그 방법을 알려준 건 오이카와씨였다. 정확히 말한 건 오이카와씨의 배구, 서브였다. 뇌 속에 무언가를 찍어놓고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입이 말랐다. 좋은 선생이 되진 못하는 오이카와씨는 안경을 어설프게 벗는 내 손끝을 잡고 잠시간 소리 내어 웃었다.

벗지 마. 쓰고 있어.”

왜요. 답답하다고요.”

있잖아. 토비오.”

안경에 닿아있던 내 양손을 잡아 테이블에 단단히 고정한 오이카와씨는 몸을 기울였다. 오이카와씨 뒤쪽 통유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씨의 눈동자와 속눈썹, 가는 눈썹이 전부였다. 눈의 움직임에 따라 흰 볼과 깨끗한 코끝,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보였으나 이윽고 나는 오이카와씨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몇 가지 할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말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결국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스티 속 얼음이 모두 녹을지도, 같은 생각이 가끔 튀어 오르는 것만큼 의미 없었다.

눈동자는 영혼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니까,”

오이카와씨의 속눈썹이 가까이 다가왔다. 둔탁한 플라스틱 제제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경이 조금 내려앉았다. 안경끼리 부딪치는 순간, 오이카와씨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옅은 홍차 빛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을 마주 본다는 건,”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안경끼리의 마찰음이 빗소리처럼 간간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오이카와씨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오이카와씨에게 잡혀있던 양손은 어느새 그와 마주 잡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그가 새겨졌다. 찰칵, 셔터음이 들리면 머릿속 필름은 돌아가고 언젠가 인화할 때를 기다린다. 머릿속 사진 폴더는 오이카와씨로 가득했지만, 무엇 하나 초점이 맞는 사진이 없었다.

영혼을 마주 본다는 뜻인지도 몰라.”

오이카와씨는 눈을 천천히 뜨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안경 너머에서, 속눈썹끼리 키스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그에 맞춰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마주보는 눈동자 사이에서 시야는 흐려졌다. 오이카와씨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영혼이라는 것도 결국 눈동자에 갇혀 있는 거니까,”

초점이 흐린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는 눈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경 너머의 눈동자, 또 그 눈동자 너머의 영혼, 영혼 안의 안경 속에서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사진기가 비추는 섬광이 지나고 나면 오이카와씨는 전부 녹아내려 머릿속 폴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몇 단계의 프리즘을 거친 뒤의 오이카와씨가 거꾸로 된 사진일지, 반쪽이 잘린 사진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짧고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오이카와씨의 영혼은 극히 단시간이기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영혼도 눈동자라는 프리즘을 지나면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영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주 봤다. 속눈썹끼리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눈을 마주쳤다. 코끝이 서로 맞닿을 지점까지 온다면, 영혼끼리 닿아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의 거리였다. 안경 너머라 해도,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셔터 소리가 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왔다. 오이카와씨의 입술 감촉이 새겨져 있는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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