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너를 사랑한다는 것 01








너를 만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는 사람만 가는 편집샵에서 평소 사고 싶었던 재킷을 사고, 조금 이르지만 초겨울 용으로 부드러운 털로 짜인 갈색 목도리를 샀다.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목도리도 하나 손에 들었다. 가게 밖에는 몇몇 사람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지나간 여자 두 명은 군청색 털모자를 세트로 쓰고 있었다. 입술이 붉었다. 나는 그 여자들 뒤에 자리를 잡고 몇 명의 행인으로 이루어진 기류에 몸을 맡겼다. 가을에서 겨울로 지나가는 계절의 자리에는 낡은 낙엽 잎만 몇 개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목도리 두 개가 담긴 갈색 봉투를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잡고, 얇은 코트를 반대쪽 손에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정의는 아주 모호했다. 나에게는 지나간 계절만큼이나 의미 없던 시간들이 너에게는 세상 마지막 날보다도 중요한 날이었을지도 몰랐다. 나의 계절에서 네가 없던 시간의 축은 일그러져 아주 빠르고도 천천히, 때로는 거꾸로 흐르기도 했지만 대체로 하루라는 날은 지나갔다. 시간이란 그랬다. 시침이 없든 분침이 없든 혹은 그 두 개가 모두 존재하지 않아도 의식 없이 흘러가는 게 시간이었다.

앞서 걷던 여자 두 명이 오른쪽 골목길로 발을 틀었다. 유명한 호텔의 애프터눈 티세트 광고 간판이 골목길 앞에 서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다르트류가 프린팅된 종이는 그냥 보기에도 고급 재질이었다. 3단 트레이 앞에는 흰색에 선이 예쁘게 자리 잡은 도자기와 찻잔이 놓여있었다. 찻잔 안의 홍차가 김이라도 오를 듯 선명한 빛깔이었다. 군청색 털모자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따라 들어간 뻔한 다리를 멈추고 다시 다른 대열에 끼어들었다. 거리 양쪽에 놓인 건물은 3층 건물도 있었고 10층 건물도 있었다. 얼마 전 모 유명 가수가 공연했다던 넓은 콘서트홀도 있는 곳이었고, 동네 구멍가게 수준으로 물건 몇 가지만 들여놓은 슈퍼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너를 만나기로 한 곳은 한 블록 넘어서 테라스가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초겨울 바람이 바닥을 때리고 낙엽 몇 개가 팔랑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얼마 전 머리를 자른 뒤로 뒷목이 서늘해서, 방금 산 목도리를 한번 둘렀다. 코트는 손에 들고서 목도리만 두른 모습이 내가 봐도 우스울 것 같았다. 넌 웃지 않겠지만, 조금 이상하게 쳐다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여름 한낮이었다. 손으로 가려도 각진 햇볕이 머리를 덮었다. 만나기로 한 곳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야기에서 30분에 한 번씩만 버스가 오는 버스정류장이었다. 처음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때에 만들어졌던 버스정류장은 페인트칠 한 곳이 군데군데 벗겨져 시커먼 회반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몇 년 전 새로 단 유리 천장은 햇빛을 끌어모아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뒤편 나무그늘에서 자라기 시작한 담쟁이 넝쿨이 언제인지 모르게 뒤편 기둥 반 이상을 휘돌아 감쌌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으면 으레 그렇듯, 버스를 탈 일도 없는데 괜스레 차 한 대 보이지 않는 차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오지 않는 너에 대한 생각이 더위로 눌린 의식 안에 수북이 쌓였다.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확신으로 가기까지는 이 자리에 나올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기대라는 품목이 심장에 남아있던 것 같다. 기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덧없는 믿음이 버스 한두 대가 지나갈 때마다 여름 태양에 스러져갔다. 핸드폰을 두고 나온 건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약속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의 축은 가끔씩 흔들거렸고, 그날따라 지구 전체가 누워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씨."

네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언제인지 모르게 나는 얼 풋 잠이 들어 있었다. 꿈일까, 현실일까 확신이 들지 않는 경계에서 나는 서 있었고 그건 꿈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너는 검은색 티셔츠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포시 열린 입술 사이에서 약한 한숨이 나왔다. 네 뜨거운 손이 맞닿아있는 어깨가 다른 조직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토비오."

잠긴 목소리였다. 네 이름의 운을 떼고서부터 제 박동을 찾지 못하는 심장이 강한 햇볕에 짓눌려 찬찬히 속도를 되찾았다. 카게야마 뒤편으로 버스가 한 대 멈췄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자고 있는 한 여성만이 유일한 승객이었다. 버스 출입문이 느릿하게 열리는 걸 너와 내가 바라봤다. 잠시간의 시간적 간극이 지나고 버스 문이 다시 닫혔다. 몇 차례 바닥을 긁는 시동 소리가 나더니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창문에 기대고 있던 여성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찰나는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르는 척하려 했던 사실은 네 눈동자 안에 있었다. 바람 한편 때문에 흔들린 담쟁이 넝쿨의 버서석거리는 소리가, 기대라는 의미 없던 믿음이 애초에 가졌던 확신으로 바뀌는 소리 같았다. 생각이 갈음하는 한 장면에서는 소리도 운을 띄워주는 법이다.

"문자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핸드폰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

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너와 나 모두 알고 있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고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이 몇 번 왕복했다. 유리 천장이 모아 내린 햇빛이 닿아 네 뺨을 비추고 또 빛났다. 너는 닫혀 있던 입을 몇 번 여닫은 후, 다시 열었다. 나는 입을 열어야만 했다. 눌린 배 안에 힘을 주고, 잠긴 목에서 버서석 거리는 소리라도 내야 했다. 알 수 없는 책임감은 어디서 오는 거였을까. 어쩌면 난 그제야 내가 너보다 2년 선배라는 사실을 억지로 인식한 걸지도 몰랐다.

"헤어지자고?"

"……."

너는 약간 놀란 듯 어깨에 둔 손을 조금 떨었다. 열렸던 입이 다시 닫혔다. 긍정하는 데에는 말 한마디보다 행동 하나가 더 진실을 담고 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게는 더욱이 그랬다. 확신은 순간 진실로 바뀌어 빠른 뇌내 변환을 거쳤다. 어깨에 놓여있던 네 손을 잡았다. 너에게 닿은 부분만 다른 조직으로 변했다. 시간의 축은 다시 조금씩 어긋나,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다시 혼란을 자아냈다. 다만 가로젓지 않는 네 얼굴은 진실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오이카와씨."

너는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왜 네게 그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또 왜 네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밟힌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연스레 내게 속해 있었던 애정의 조각은 몸에서 떨어져나와 제 자리를 찾아갔다. 너는 나와는 관계없는 타인이 되어있었다. 사랑의 말미를 끊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나의 손이 더이상 네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지나간 버스를 떠올렸다. 30분에 한 번씩 버스가 온다고 해도, 같은 버스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새삼 지나치게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숨이 끊길 듯 아픈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내가 들은 너의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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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조그맣게 등을 말면 한 마리의 작은 곰이 되진 않을까 착각할 정도로 아기 같은 몸이었다. 한 팔에 폭 들어오는 어깨, 깨물면 말랑말랑한 떡처럼 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보드라운 귀, 건포도 알처럼 작은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맸다.

배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랐을 것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두 입술이 작았다.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첫인상은 작다인형 같다였다. 굳이 무언가를 더 붙인다면, 오이카와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지.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얏호, 토비오쨩안녕, 이라고 말하려는데. 왜 그런 표정인 거야?”

양 볼에 불만 주머니를 가득 담은 햄스터보다는 무서운 표정인카게야마가 배구공을 들고 소리도 없이 오이카와 옆으로 다가왔다. 배구공 너머의 작은 포도알 같은 눈동자 두 개가 오이카와를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가르쳐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그보다 뭘 말하는 건지 제대로 말해줄래?”

거짓말쟁이.”

토비오쨩, 오이카와씨는 팬클럽 여자아이들에게 맹세코 거짓말은 안 하거든? 네가 멋대로 생각한 거잖아. ‘우유 빵 사다 주면 토스 요령 가르쳐주는걸. 역시 너였구나! 부실에서 자고 있을 때 우유 빵 얼굴에 던지고 간 녀석이!”

오이카와는 이제야 범인을 찾았다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잔뜩 헤집었다. 카게야마는 얼마간 오이카와의 공격을 받더니 입이 불뚝 튀어나왔다.

그치만! 오이카와 선배 자주 말하잖아요. ‘우유 빵 사면 알려주지라고.”

너한텐 말한 적 없는데.”

…….”

그 말이 사실인지라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입을 쭉 내밀고 강한 호소가 담긴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이런 흐름은 이미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토비오쨩한텐 가르쳐 줄 생각 없으니까. 애초에 가르쳐 줄 의무도 없고, 네가 말하는 요령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연습도 없이 요령이나 배워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게 비겁한 거 아니야? 토비오쨩 말로는 연습, 연습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겁한 행동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

……,”

카게야마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 울먹울먹 물이 스며들더니,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방울을 뚝 떨어뜨릴 것 같이 아래 속눈썹에 물방울이 가득 고였다. 이런, 큰일 났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배구공을 들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카게야마는 버려진 새끼 곰 같았다. 우두커니 서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걸 참는 게 한계인 작은 중학교 1학년생은 결국 1학년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후배 좀 괴롭히지 마라.”

카게야마를 피해서 구석진 자리로 온 오이카와 옆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비난하는 것도, 타이르는 것도 아니라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낮게 내뱉은 말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후배 괴롭히는 거 아니야. 토비오쨩만 괴롭힌다고.”

카게야마도 후배잖아. 네가 뭣 때문에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방금 그건 오히려 네가 더 비겁한 거 아니냐. 꼴사나운 모습 보이면 내가 패버린다.”

이와쨩 진짜 누구 편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연습이나 해라, 바보카와.”

이와이즈미의 날카로운 말투에 네네. 입술에만 겉도는 말을 가볍게 내뱉고, 오이카와는 가까이 있는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비겁하고, 유치한 건 자신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다른 부원에 비해서 달성하고 있는 엄청난 연습량이나, 연습에 있어 중학교 1학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진지한 태도 등. 적어도 그에게 연습에 있어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건 이 많은 부원 중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짜증 난다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공을 들어 올렸다.

귀엽지도 않고, 인상도 더럽고, 툭하면 귀찮게 굴고. 하나도, 하나도

하나도 맘에 안 들어. 숨을 참고 던진 공은 궤도를 크게 벗어나 체육관 귀퉁이에 꽂혔다. 오이카와는 다시 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이 싫었다.

넌 다르구나.”

오이카와는 언젠가 들었던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에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감독은 오이카와를 개인적으로 불러다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다르구나. 그래서 많이 힘들었을 거야. 언젠가 배구가 즐겁지 않은 시기도 올 텐데, 그래도 계속할 수 있겠니?”

힘든 연습은 지금도 싫어하고요,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은 건 제 탓이 아닌데도 자꾸 뭐라고 하는 선배들도 싫고요, 땀으로 몸이 끈적해지는 것도 싫어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너와 비슷한 사람은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가 볼 때, 너 같은 애가 이 세계에 적진 않거든. 단지 같은 세터로서 네가 어떤 입장인지 네 자신만큼 이해할 수 있는 애가 있을진 모르겠다만. 이 배구계에 한 명쯤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외롭지만은 않지?”

너무 일찍 만난 건 아닐까요, 감독님. 오이카와는 인상을 구겼다. 방금 던진 공은 아슬아슬하게 아웃라인을 넘어섰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도 저와 비슷하다는 걸. 어쩌면, 많은 면이. 또 어쩌면, 많은 면이 다를지도 몰랐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남으로서 저에 대해서 더 깨달은 점이 많았다. 아마 전에 오이카와와 대화를 나눴던 감독이 지금 카게야마를 만난다면, ‘넌 다른 존재구나.’ 정도를 말할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또한 카게야마를 감독으로서 만난다면 그렇게 말했겠지.

필요 없는데 말야. 오이카와는 겨우 원하는 궤도로 날아간 공을 보면서 천천히 미소 지었다. 필요 없었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부족하고, 어떤 부분을 가르쳐주면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는지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그런 눈은 필요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건 너무나도 잔혹하고적어도 오이카와에게는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카레를 좋아하고, 만두를 두 볼 빵빵하게 채우고 오물거리는 그 작은 아이는 오이카와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아이였다. 또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존재였다. 오이카와는 침을 삼켰다. 쳐다보는 눈빛도 싫었다. 동그란 눈동자를 빛내며 저한테 찾아와 가르쳐주세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입이 싫었다. 바보같이 곧이곧대로 들으며, 저가 해내는 모든 일을 아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작은 머리통이 싫었다.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을 거니까.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공을 다시 한 번 들어 올렸다. 이건 거야. ‘오이카와 토오루의 거라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작은 어깨가 놀란 듯 조금 들썩이더니,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배구부에 입부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飛雄)라니, 독특한 이름이네.”

연습이 끝나고 어쩌다 우연히 둘이서 돌아가게 된 날, 벚꽃잎이 카펫처럼 깔린 길을 걸으면서 오이카와는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그 정도의 말만 하고선, 카게야마는 다시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주 쓰는 한자는 아니었다. 남자애 이름으로 친다면야, 뭐 강해 보이니까 좋지만.

귀엽지 않잖아.”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눈썹도 구부린 채.

이름이 귀여울 필요는 없잖아요.”

중요한 문제거든? , 쨩 붙이면 귀엽지 않을까? 어때, 토비오쨩?”

이상해요.”

잔말말고. 토비오쨩은 조금 귀엽게 들리네. 새끼 다람쥐 같고.”

쨩만 붙였다고 그런 느낌이 들진 않는데요.”

넌 항상 말 한마디가 더 많다니까. 건방진 토비오쨩.”

벚꽃잎이 하롱하롱 떨어져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른 봄날치고 새가 높이 나는 푸근한 날씨였다. 카게야마는 입꼬리를 꾸물거리면서 볼을 슬며시 물들였다. 귀 끝이 벚꽃처럼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건가.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은 어깨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여서,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싶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힐 정도로 불어오자, 벚꽃잎의 홍수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동그란 접시 모양의 구름 사이사이에 벚꽃잎이 하늘거리며 흘러다녔다. 귀 끝이 붉어진 카게야마 토비오가 귀여웠던 봄 첫날이었다.




-

오이카게 전력 첫 글이 정말 이상해서..죄송합니다...ㅇ<-<

오이카게 안티 아니에요.. 오이카게 쵱컾입니다.. 지각한데다가 이런..글을...ㅠ.ㅠ..


두 사람의 첫만남은 꽤 좋지 않았을 거 같고, 카게야마랑 오이카와 서로에게 좋든 나쁘든 자극을 주는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생의 토비오는 좀 더 감정을 숨길 줄 몰랐을거같고, 오이카와는 사고가 어린 중딩이었을거같네요.

그런 두 사람도 봄날처럼 따스한 날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요. 그냥 그런 생각에서 나온 글입니다. 하하..:D

다음전력은 좀 더..열심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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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Ring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 약지는 쉬질 않았다. 중학교 시절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부터, 작은 반지는 거기서 빠지질 않았다. 반지의 종류, 어떤 형태, 혹은 박힌 보석의 모양이 바뀌는 날은 있어도 약지가 비어있는 날은 없었다. 연습할 때 반지는 잠깐 모습을 감췄다가, 연습이 끝나고 여자친구와 만나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반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조그만 걸 그렇게 잃어버리지도 않고 용케 뺐다 꼈다 한다고 감탄도 했다. 테이핑도 손수 정성스레 묶는 섬세함이 거기서 드러나는 걸까, 반지는 깨끗하게 보관되었다가 다시 손가락 안에 자리 잡았다.

 

그게, 그렇잖아요.”

 

오이카와 선배의 길고 가느다란, 손톱이 잘 정돈된 약지에는 항상 예쁜 모양의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오이카와 선배는 그 반지를 다시 끼웠다. 몇 번이고 손을 여기저기 들었다 놨다 하며 반지가 빛을 반사하고 반짝이는 모습을 줄곧 바라봤다.

 

누구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그 손가락이 쉬는 건 아주 잠깐의 기간뿐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면 거짓말같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선 반지가 사라졌다. 오이카와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는 일종의 증거였다. 가설을 입증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물적 증거였다.

 

생각하잖아요. 누구라도. , 정말 좋아하는구나. 여자친구.”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가 아주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시합이 끝난 후, 오이카와 선배는 한동안 새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단순한 변덕 정도겠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날을 새는 것보다 달을 세는 게 더 빨라질 무렵 그 자리가 비어있는 게 당연한 때가 천천히 찾아왔다. 그 사이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는 반지가 남아있던 자국이 스르르 없어지고, 대신 선명한 테이핑 자국만 남아있게 되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내가, 남자인 내가, 오이카와 선배와 사귀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어땠냐고요?”

. 반지 받았을 때요. 전 그게 제일 궁금하네요.”

화났어요.”

화가 났다고요?”

.”

 

토비오쨩, 이거.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오이카와 선배는 입을 열었다. 갈색 각설탕 2개를 졸인 목소리였다. 달콤하고, 입 끝에서 녹아버리는 목소리. 내 손을 천천히 가져가서,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은 목소리보다도 조심스러웠다. 사귈까, 라는 애매한 말로 사귀기 시작한 지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365일하고 3시간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 날은 사귀고 나서 1년째였다.

이게 뭔데요.

생애 처음 태어나서 모르는 척이란 걸 해봤다.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구부러진 눈썹 형태에서 이미 오이카와 선배는 눈치챈 모양이었겠지만. 김빠진다는 듯이 웃더니 무슨 표정이 그래? 핀잔을 늘어놓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골랐다고. 아무래도, 남자용으로 2개는 없더라. 사이즈 조정을 좀 한 것뿐이고, 한번 껴보는 게 제일 좋을걸. 입술을 움직이며 혼자서 열심히 설명하는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멍한 귀 뒤편에서 울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반지를 소중하다는 듯이 들어 올려서, 내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우려 했다.

하지 마세요. 개미 소리도 이보단 크겠다. 자학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대신 손가락을 움츠렸다.

토비오?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에 들린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비슷하다. 오이카와 선배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과 비슷했다. 어쩌면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몰랐다. 반지는 다 거기서 거기니까. 몇 번이고 바뀌었던, 지독히도 가벼웠던 그 반지들과 같은 색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하잖아요. 너무하다고? 자꾸 억울한 감정이 들어 이상하게 눈이 시큰했다. 멍청아, 이런 데서 이상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머릿속 카게야마 토비오가 뭐라뭐라 말하는데도 웅얼거리는 물소리로 바뀌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하다고요. 하나도, 오이카와 선배가 아주 조금도 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안 하는 건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되잖아요. 언젠가, ―…헤어지는 건알고, 있으니까.

아니, 토비오. 지금 무슨 소린데?

반지 얘기하고 있잖아요.

반지가 왜 헤어지는 얘기가 되는 건데?

반지니까요.

아니, 무슨 소리냐니까!

 

왜 웃으세요?”

아니,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알 거 같아요. 카게야마씨가 왜 그랬는지. 반지는 증거였으니까요.”

오이카와 선배는 몰랐어요. 저도 몰랐죠. 저희 둘 다 몰랐어요. 서로에게 무슨 의미인지.”

 

헤어지면 뺄 거잖아요. 뺏다가, 사귀면 새로 끼고, 다시 헤어지면 반지는 없어지고. 그런 과정 중 하나일 뿐인 거잖아요. 저도, 그냥 결국 똑같이.

뭐가 불만인 건데.

반지가 빠지면 저희는 헤어지는 거잖아요. 헤어지면, 반지는 빠지고. 그럼 오이카와 선배의 왼손은 다시 반지를 끼울 테고, 전 그냥 버린 반지나 가지고 있겠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이카와는 드물게 진지하게 화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붉게 물든 카게야마의 눈가를 훑었다. 부드럽게 잡았던 손에 힘을 주고선, 꽉 잡힌 카게야마의 왼손을 앙 깨물었다.

아얏! 날카로운 목소리를 흘린 카게야마는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겨우 그런 생각 때문에, 이 오이카와씨가 주는 반지를 거절해?

꽉 깨문 자국을 지나, 반지가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꼭 들어맞았다. 주문 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에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결국, 제 손가락에 들어가고 말았다. 언젠가 손가락에서 빠질 날만 기다리는 증거’.

이제 두 번 다시 반지는 안 살 거니까. 그걸로 끝이야.

그게 무슨 말인데요.

, 오이카와씨 왼손 약지에 끼워. 빨리.

거의 반강제로 오이카와의 약지에 세트로 만들어진 반지를 끼우고 난 뒤, 카게야마는 거의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최악이다. 하필 1년 된 날에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연애에 무지한 카게야마도 알고 있었다. 1년째 되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는 걸. 적어도, 이런 걸 하는 날은 아니잖아. 입 밖으로 당장에라도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만족스럽다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면서 반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내 왼손 약지는 이걸로 끝이니까.

?

이제 반지는 죽을 때까지 이거 하나뿐이라고. 비싼 거로 사서 다행이지, 녹슬 때까지 끼고 다녀야 하니까.

무슨 말인데요.

이해 못하겠냐고, 바보야.

오이카와 선배는 눈꽃이 닿아 녹는 것처럼, 순간의 키스를 하고선 다시금 웃어 보였다. 흰 눈처럼 새하얀 미소였다.

 

또 웃으시네요.”

두 사람이 귀엽잖아요. 전 제 아내랑 그렇게 재밌게 연애해본 적은 없거든요. 애초에 아내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죄송해요. 제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죠.”

괜찮아요. ‘재미나게 연애하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 . , 죄송해요. ‘주례얘기였죠? 좋아요.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 그 반지가 그거에요? 평생 하나뿐이라는 반지.”

. 결혼식 때도 이걸로 할 거라네요.”

오이카와씨나 카게야마씨나 정말, 엄청난 고집쟁이 같네요.”

워낙에 배구란 게 포기하면 지는 경기라서요.”

멋지네요. 두 사람 다. 약간 낡은 반지여도, 그 반지가 부러울 정도로요.”








-

키루님 생일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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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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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산 찻잔의 가장자리는 얼마 전 깨뜨려서 이가 나가 있었다.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꽃무늬의 딱 꽃잎 자리였다. 희고 깨끗한 배경에 민트색으로 모양 좋게 꽃이 그려져 있는 찻잔은 오이카와가 사온 물건이었다. 찻잔을 꺼내들다 말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가 나간 찻잔을 도로 제자리에 놓은 뒤, 재차 이미 꺼내놓은 티포트로 눈을 돌렸다. 찻잔과 세트로 맞췄던 티포트에도 민트색의 꽃무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꽃이 타고 올라오는 듯한 무늬는 티포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티포트 뚜껑에는,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얇은 실금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실금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티포트에도 군데군데 금이 새겨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질린듯한 표정으로 티포트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는 Made in Italy 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 깊게 파인 자국이 나 있었다. 뭘 어떻게 하면오이카와는 혀를 찼다. 조용한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티포트와 찻잔 모두, 일주일 전 사 왔을 때 보였던 깨끗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뭘 어떻게 설거지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오이카와는 티포트와 찻잔 모두 조심스레 다시 집어넣었다. 달그락거리며 제자리에 자리를 잡은 티포트와 찻잔이 이상하게 추레해 보였다. 입술을 씹었다. 오후에 마시려고 기껏 준비해놓았던 향 좋은 커피도 다시 들여놓았다. 수북이 쌓였던 오후의 여유가 한 줌 바람에 흐트러졌다. 부엌 옆에 조그맣게 난 창에서는 햇빛이 흘러들어와 포근한 온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컵 하나를 들고 물로 한번 씻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런 날씨에는 미지근한 물도 차갑게 느껴지는 법이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손끝을 가볍게 털고, 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 얼음을 몇 개 동동 띄웠다. 속 끝에서 밀려 올라오는 짜증에 찬물을 들이붓듯이, 오이카와는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 시절 후배와 동거를 시작한 지 반년이었다. 고작 반년이었다. 아니, 반년이나 되어있었다. 왜 내가 토비오따위랑오이카와는 다시 입술을 씹었다. 촉촉하게 물이 묻은 입술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혀를 따라 얼음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상처가 나 있는 입안 점막이 따끔거렸다. 거친 키스 탓이다. 생긴 건 깔끔하게 생기고선, 그 꼬맹이는 하는 짓 하나하나 당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히고선 식탁 의자에 대충 앉았다. 엉덩이를 내리기만 하면 뒤에서 감아오던 손길은 오늘은 없었다. 얼음을 씹으면 씹을수록 얼음 조각이 상처 난 점막을 콕콕 찔렀다. 찔끔찔끔 느껴지는 아픔은, 제 입술을 휘어잡으면서 삼킬 듯이 키스하던 토비오를 떠올리게 했다. 오이카와는 남은 물을 전부 들이켰다. 빈 컵에는 몇 방울의 물이 바닥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난방이 돌지 않는 방 안에는 시린 한기가 천장까지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벼운 스웨터만 걸친 몸을 떨었다. 토비오가 없을 때의 집은 사람이 없는 집같이 냉랭했다. 그렇게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집으로 만든 건 오이카와였다. 애초에 오이카와는 이곳을 이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년 전부터 그에게 이곳은 토비오가 있는 곳에 불과했다. 제 몸이 이곳으로 돌아와도, 밤이면 이 집에 있는 침대에서 몸을 부대껴도 매번 이곳에 있는 저가 낯선 오이카와였다.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질린다는 건 어디에 질린단 말이었을까. 반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상조차 모호했다. 동거를 시작한 것도 토비오가 귀찮게 굴어서였다. 토비오를 안고 나서 집으로 가는 오이카와에게 귀찮지 않냐며, 그냥 같이 살아요. 혼자 살기엔 넓은 집이니까. 귀를 붉히면서 그렇게 말한 건 토비오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인 것밖에 없었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정을 두지 말자고 정한 건 오이카와였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만든 것도, 집이 아닌 장소로 대하자고 정한 것도, 토비오가 없는 이곳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것도 오이카와였다. 언제든지 토비오떠날 수 있는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씨, 우리 해요.”

뭔 소리야, 이 꼬맹아.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오이카와는 제 가슴팍에 들러붙은 토비오를 힘들여 떼어냈다.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와 같이 볼을 붉힌 고등학생의 얼굴을 하고선, 이 꼬맹이는 가끔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토비오는 이마를 찌푸리고선 오이카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일부러 열기를 담은 한숨을 근육 선을 따라 흘려보내면서, 토비오는 낮게 말했다.

겨우 2살 차이잖아요. 엄마 젖 더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나한테는 꼬맹이야. 당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초저녁부터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건 싫어.”

태양도 멀쩡히 떠 있는 시간대였다. 가을이라 날이 저무는 게 빠르다고는 해도 오후 5시 반은 아직 밝은 낮이었다. 거실 소파에서 몸을 밀착하고 있는 두 명의 옆에선 석양빛이 붉게 바닥을 물들였다. 넓은 베란다 바깥에서 홍차 빛으로 물든 석양이 스멀스멀 저물고 있었다. 토비오는 한번 밖을 바라본 후,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뭐라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딱 어린애였다.

꿍얼거리지 말고.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 난 이따가 나갈 거니까.”

오이카와는 제 복근을 만지기 시작한 토비오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단단한 손목을 힘주어 잡자, 토비오의 손이 아쉬운 듯이 복근에서 떨어져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디 가는데요?”

말했잖아. 여자친구 친구들이랑 만난다고.”

늦게 오나요?”

늦게 올 거야.”

자고 올 거에요?”

…….”

자고 와요?”

토비오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검고 푸른 눈동자는 중학교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오이카와만 담고 있는 눈동자를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가렸다. 가린 손을 꼭 잡은 토비오는, 얼굴을 움직여 오이카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토비오와 키스를 하고 나면 입술이나 입안 어딘가에는 꼭 상처가 나곤 했다. 왜일까, 오이카와는 알지 못했다. 거친 키스 때문이겠지. 그래서일까, 상처가 따끔거릴 때면 토비오가 떠올랐다. 대답이 없는 오이카와의 입술을 토비오는 몇 번이고 훔쳤다. 조용한 거실에서 촉촉한 소리를 울리면서, 한번 떼었던 복근에 다시 손을 옮겼다. 근육의 모양새를 따라 손가락이 흐르고, 그 손이 이윽고 바지 버클에 닿았을 때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귀를 꼬집었다.

아얏,”

그만하라고. 밤늦게는 돌아올 테니까.”

돌아올 거에요?”

돌아올 거야.”

알았어요.”

토비오는 다시 한 번 키스하곤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가 닿았던 곳이 화끈거렸다. 석양은 금세 져버린 걸까. 베란다에는 수명이 다해 깜빡이는 전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깜빡, 깜빡. 그 움직임에 따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으면 토비오의 입술의 감촉이 살아나서, 혀끝으로 입술을 한번 훑었다. 눈을 뜨면 차가운 베란다에서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약속은 저녁 8. 곧 있으면 나갈 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비어있는 컵에 다시 가득 물을 담았다. 속이 탔다. 감기에 걸리려나, 목에 뭐가 걸린 듯 불쾌한 이물감이 들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 이력을 살펴보면 여자친구의 이름이 가득했다. 토비오와는 몇 시까지 들어갈게.’ 같은 일상적인 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돌아올게.’ 한 마디면 충분했다. 서로가 그랬다. 돌아올게요, 토비오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제 입으로 내게 그렇게 말한다면, 토비오는 어디에 있든지 돌아올 것이다. 오이카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전 얼음 때문에 안 그래도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더 깊어진 느낌에, 이번에는 얼음을 조심스레 녹였다. 동그란 얼음을 혀로 굴리자 그때마다 차가운 물덩이가 입안에 고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토비오와 키스할 때처럼 입안에 고인 액체를 삼켰다.

키스도 해본 적 없는 거예요?

여자친구의 친구가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서 취했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키스는커녕 잠자리도 안 한 걸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여자친구를 포함한 친구들 모두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소중한걸요, 아껴주고 싶어요. 어딘가의 바람둥이가 입에 담을 법한 대사를 흘린 뒤, 여자친구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젖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키스도, 잠자리도 모두 하고 있어요. 토비오랑. ,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여자친구의 갈색빛 눈동자가 좋았다.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 평소엔 여드름 하나 없는 피부인데 웃을 때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사귄 지도 꽤 됐지, 이제 1년이던가. 오이카와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건 토비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토비오는 오이카와에게 단 하나만 물었다.

오이카와씨는 제 거 맞죠?”

뭐라는 거야.”

제 거 맞잖아요. 그쵸?”

그러더니 당돌하게 입술박치기를 해오는 토비오를 반강제로 떼어놓은 뒤,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누구 것도 아닌데. 애초에 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아무 사이가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여기에 있잖아요. 지금 저랑.”

토비오 웅변학원 다녔어? 꼬맹이가 별의별 말을 다 하게 됐네.”

웅변이 뭐에요?”

……….”

 

여자친구랑은 하지 않는 키스와 잠자리를 토비오와 하고, 집도 아닌 이곳에 가장 맘에 드는 티포트와 찻잔을 두고, 토비오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히터도 안 틀고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뭐 하자는 건지.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어찌하고 싶은 걸까. 질리면 언제든지 떠나버릴 거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도, 해가 지고 또 달이 뜨면 오이카와는 이곳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토비오를 안고, 그 입술에 키스하고 밥을 같이 먹고. 좋아하는 건 여자친구였다. 소중하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오이카와의 몸을 만지고 그 귓속에 혀를 집어넣는 것도 토비오였다.

뭘 하고 싶은 걸까.’

중학교 시절 후배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자기는. 맘에 드는 찻잔과 티포트를 설거지하다가 박살 내는 후배와 왜 여태껏 같이 살고 있는 걸까. 둘의 관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올게.’ 한마디만 하지 않으면 이 집도 아무 쓸모 없는 허물이 된다. 그런데도 오이카와와 토비오는 동거를 하고 있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이카와가 생각하기에, 저와 토비오의 관계는 다 마신 컵 속의 물 한 방울이었다. 서로 간에 나눌 것이 조금도 없는데도 같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물 한 방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제 증발할지 모른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컵 속의 물 몇 방울은 말끔히 사라져있을 게 분명하다. 그 몇 방울의 물을 구하며 키스를 하고, 타액을 넘기고, 밤을 보내고 나면 질려버릴지도. 그때까지만은 토비오와 함께여도 좋으리라. 가끔 수컷처럼 욕망의 눈동자를 번뜩이는 녀석의 놀이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어가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오이카와는 토비오를 기다렸다. 왜 하필 토비오일까, 그건 오이카와가 굳이 묻지 않는 질문이었다.















바다에 빠져버릴까.

 

 

 

 

 

 

 

 

 

바다라는 건 무섭잖아.”

왜요?”

가끔은 잡아먹힐 거 같거든.”

 

- 시원한 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0월 말의 모호한 날씨에 바다라니, 애초부터 이상했다. 추운 것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약간 쌀쌀한,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날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이카와씨의 제안이었다.

바다에 갈까.’

그 말만 들어도 코끝에 소금 냄새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혀끝에 퍽퍽하게 소금이 묻었다. 왜요? 반문해봤자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에 나와.’ 라고 통보식으로 말할 게 뻔한 사람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씨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좋아 혰지만, 예쁜 옷을 구경하거나 희귀한 소품들을 사 모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 간다고 한다면, 글쎄. 바다를 구경한다기보다 예쁜 색을 띠는 조개를 모으거나, 근처 음식점에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빙수를 사 먹거나. 그 정도의 소일거리만 하고 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끔 오이카와씨는 바다에 가자고 조르곤 했다.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파도나, 귀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갈매기 소리 등바닷가에 서 있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운동화 속 양말까지 다 젖을 정도로 물속에 잠긴 적이 있지만, 이렇다 할 물놀이를 한 적은 딱히 없었다. 어쩌다 가게 된 동네 풀장에선 그렇게도 장난을 쳤으면서, 바다에선 오이카와씨는 점잖은 어른이 되었다. 애초에 저를 제외하고 보면 장난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째서 저에게만 그리도 짓궂은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바다는 오이카와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특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언뜻 동그란 지평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평상시와 달리, 슬쩍 물빛을 띠었다. 바다에 가자. 그렇게 말할 때의 오이카와는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오전 10.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가려니, 작년의 바닷바람을 떠올리고 다시 겉옷을 바꿔 입었다. 그대로 신발을 신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비오, 잠깐만.”

.”

어머니가 목도리를 들고 서 있었다. 검은색의, 털실로 짠 목도리. 끝 매듭의 올이 서툴게 묶여있었다. 몸을 돌려 마주 보자 어머니가 빙긋 웃어 보였다.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침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안을 휘어잡는 날씨였다. 어머니 양 볼에 말갛게 홍조 빛이 돌았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은, 다음 주인데요.”

, 알고 있어. 어제저녁에 완성했거든. 얼른 주고 싶어서.”

말간 볼을 소소하게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내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아직 새것의 섬유 냄새가 남아있는 털실이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털실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 따뜻한 온감이 퍼졌다.

. 잘 어울려.”

……, 감사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감사인사를 내뱉을 땐 입을 삐죽이게 된다. 어릴 적에 자주 지적받던 나쁜 버릇이었지만, 어머니는 이제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웃으며 대답해주곤 했다. 그 덕분일까. 한 박자 늦지만, 제대로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입이 되었다. 목도리에 파묻힌 탓에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일 축하해다시 말했다.

올해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네.”

올해12월인데요.”

바보. 생일부터가 내년인 거야.”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볼을 한번 쓰다듬었다. 차갑고 주름진 손끝이 부드럽게 볼을 왕복했다. 검은 눈동자 끝을 조금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다시 천천히 미소 지었다. 30. 나이의 앞자리에 3이 붙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저 카게야마 토비오일 뿐인데. 이걸 그 사람은 벌써 2년 전에 겪은 걸까. 그 사람 생일 때는 어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같이 보냈는데도, 그와는 벌써 몇 년이나. 몇 년이나앞자리 숫자가 1일 때를 넘어, 2일 때를 지나, 3일 때인 지금에 와서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거리에 있었고,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는가 하면 숨 막히게 뜨거운 스킨십을 할 때도 있었다. 30살이 훌쩍 넘은 그도 여전히 내겐 오이카와씨일 뿐인데. 나이가 들면 관계는 언젠가 변하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있는 감정도.

다녀올게요.”

목도리는 따뜻했다. 늦지 말고, 라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대답은 벌써 몇 년째 들어온 대답이었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볼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까슬까슬하던 손끝이 떠올라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늦잖아.”

오이카와씨야말로 집 앞이라고만 했지, 집 앞 카페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어쨌든. 늦었으니까, 토비오가 커피 사.”

오이카와씨는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앞에 나와 보니 평소에 기다리던 장소에 오이카와가 없는 걸 알고서, 급히 연락했다가 이런저런 골목길을 찾아보느라 고생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애초에 애매하게 집 앞이 아닌 카페라고 했으면 헤맬 일도 없고, 늦을 일도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가 마시던 커피는 거의 다 마신 뒤라 바닥이 보였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카페 안은 포근한 온기와 초콜릿 시럽 향기가 가득했다. 이른 시간의 카페는 손님이 별로 없는 터라 오이카와를 몰래 훔쳐보는 여성들도 없었다. 밝은 갈색빛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오이카와는 어딘가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조금 더 짧게 잘라 정돈된 머리는 카페의 브라운 조명에도 부드러운 홍차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는 제가 먹던 초콜릿 케이크의 마지막 한입을 내 입에 쑥 집어넣더니, ‘토비오쨩도 먹었으니까, 공범.’ 툭 내뱉었다. 입안에 퍼지는 촉촉한 단맛을 느끼면서 무슨 공범이요? 물었더니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였다.

초콜릿 케이크 살인사건.”

뭐라는 건지.

 

 

 

전철을 타고 1시간 반, 버스를 갈아타서 2시간. 도보로 걸어서 20분을 지나고 나면, 길 건너로 넓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걸어오는 동안 잔뜩 식은 몸을 바닷바람이 동그랗게 휘감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손에는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입속에서는 아직도 초콜릿 향기가 남아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짠맛, 혀끝에 맺힌 단맛. 바람이 센 탓에 눈동자 끝에 망울망울 달린 눈물까지. 최악이었다.

무슨 생각해?”

모래사장 한가운데까지 걸어오고 난 뒤, 오이카와씨는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 차가운 귀를 매만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순간 스치고 이내 오이카와 손에 있는 온기가 귓바퀴를 통해 이동했다. 오이카와의 손에도 남아있던 습기가 귓불에 닿아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심장이 펌프질했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몸을 덮쳐 손끝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마침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요.”

맞춰 볼까? 오이카와씨 생각했지?”

……

저런 말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몇 년 동안 배운-라기보다 이와이즈미씨에게 배운-방법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채 연신 파도만 바라보고 있자, 오이카와씨는 문지르던 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건방져.”

이내 귀에서 손을 뗀 오이카와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흐렸다. 몇 가지의 물감을 섞은 듯한 회색 하늘에는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파도, 젖어드는 모래가루, 가끔 풍기는 참기 힘든 소금 냄새. 몇 번이고 오이카와와 왔던 바다였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얀 거품이 일다가 가라앉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이질감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 다음 주인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맑은 홍차 빛 눈동자는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흰 피부가 바닷바람을 맞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32년이랑, 30. 겨우 2년이네.”

겨우 2. 겨우 2년인데도, 그는 항상 지나치게 컸다. 그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2년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오이카와 씨만큼 자라면, 오이카와는 이미 그만큼 앞서 걷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이카와의 등은 영원히 내 앞에 존재했다. 그런 2년을 앞서 보내고 있는 오이카와는 33살이 되는 내년 1, 배구선수로서 은퇴한다. 33. 운동선수로서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였다. 선수 생명은 길어봤자 30대 후반까지니까. ‘나이라는 숫자 앞에 3이 붙은 시점에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도 30살이 된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리라. 그는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국가 대표 세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생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허리 문제로 받고 있던 물리치료는 은퇴 후에도 받는 듯했다. 이렇다 하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높은 강도로 오래 지속한 운동 때문인 것을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은퇴하는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보여도, 그쯤은.

 

바다는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집어삼킬 거 같잖아. 통째로.”

오이카와는 쓴 초콜릿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바람이 한차례 불어 모래사장이 흔들거렸다. 눈앞에 흩날리는 모래가루가 싫어서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중 제일 큰 파도가 밀어닥쳐 와, 운동화 코끝까지 젖었다.

젖어봤자 운동화 코끝인데요.”

그렇게 방심하다간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힌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열기를 품은 손 두 개가 만나 얽히고, 매만지다가, 이내 마주 잡았다. 기분 좋은 온기가 주머니 속에 가득했다. 딱 손 두 개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그 주머니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하게 뭉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세게, 조금 힘껏. 그 대신 그의 단단한 손을 꽉 붙잡았다.

토비오쨩. 몇 년까지 있을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이고 같이 있었는걸요.”

내일이면 헤어지게 될지도? 갑자기 오이카와씨가 사라지거나, 토비오쨩이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애초부터 약속 없는 관계였으니까.”

약속은커녕, 그 어느 것으로도 묶이지 않은 관계였다. 그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잡고 있는 이 손도, 어느 한 쪽이 풀어버리면 다시 붙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나도. ‘그럼, 안녕.’ 중학교 졸업식 날 들었던 그 말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걸로 아예 끝일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벚꽃 잎 피어있는 봄날은 아닐지라도, 안녕이란 말은 머릿속에 그 장면을 자동 재생했다. 그곳이 푸른 바다가 피어있는 바닷가라 할지라도, 안녕은 그대로 안녕이었다.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지금까지처럼 하루하루 계속될지도 모르죠.”

있지, 토비오쨩. 같이 바다에 빠져버릴까.”

싫어요. 춥잖아요.”

거절의 이유가 그거야?”

올해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어머니가 그랬는걸요.”

……. 그러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토비오쨩은 착한 어린이니까.”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찬바람 사이에서 미소가 슬쩍 흐려졌다가,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르게 굽은 호물선이 작은 얼굴에 피었다. 립밤을 열심히 바르는 오이카와의 입술은 겨울에도 얇은 주름이 예쁘게 남아있었다.

바다에 빠지면 잡아먹히는 거 아니었나요.”

잡아먹히는 게 나을지도, 라는 생각을 했거든.”

이대로 잡아먹히면너도, 나도. 전부 바다 탓으로 하면 되잖아. 바다, ..에서. 토비오쨩이랑

오이카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향한 시선 끝에는 젖은 모래가 어느샌가 말라 있었다. 사이로 빼꼼, 작은 조개가 묻혀있었다. 오이카와가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이젠 거의 아플 정도의 악력이 심장까지 조이는 느낌이었다. 바다 안에서, 오이카와씨랑. 이것도 저것도 모두 바다 탓으로 하고 빠져버리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퇴도, 나이도 없는 바닷속에서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다른 세상인 것처럼 산다면. 시간이 지나 점점 흐려질 것들을 걱정하지 않은 채바뀌지 않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오이카와씨의 숨소리, 눈동자, 흰 피부, 목소리 같은. 생각만 해도 목 끝까지 뜨거워지는 오이카와씨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2년뿐인걸요. 저도 금세 32살이 될 거에요.”

그럼 난 34살이잖아!”

그땐 저도 금세 34살이 되니까요.”

36.”

“2년씩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2년뿐인걸요.”

“2

오이카와는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2년이라,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눈을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의 경계는 하늘과 맞닿아 뿌옇게 흔들거렸다.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는 항상 이질감을 주었다. 이 바다에 빠진다면, 말 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히고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세찬 바람 소리만 가끔 이명처럼 들렸다. 추웠다. 지독하게 추웠다. 오이카와와 연결된 손을 제외한, 전신이. 바다는 춥잖아요, 우리 바다는 피하는 거로 해요. 가끔 찾아와서 몰려드는 파도를 보고, 예쁜 조개를 찾아서 줍고, 여름에는 얼얼한 빙수를 먹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2년은 금방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약속 없이 그저 질질 끌고 있는 이 관계도 어느 정도는 약속이란 게 생길지도 몰랐다. 굳이 말로 하는 게 아닌, 지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놓지 않고 있는 손처럼. 그때가 오면 바다엔 더는 오기도 싫어질지도 몰라요. ‘바다에 빠지자고? 싫어, 춥잖아라고 오이카와씨가 먼저 말할지도 몰라요. 그때쯤엔그때쯤엔, 말로 하는 약속을 해요. 그땐 저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이카와씨. 저랑 사귈래요?”

















Tell me, Please don’t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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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eyama side

 

 

키스란 건 뭘까. 언제 하는 걸까. kiss. 케이아이에스에스. 사전을 뒤져보면, ‘키스, 입맞춤, 뽀뽀라는데. 아니, 물론 맞는 말이지만. 카게야마는 묻었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구겨진 인상은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교실 내에 가득 차오른 질척한 습기가 머리카락에 들러붙었다. 며칠 전부터 울기 시작한 매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을 젖히며 울어댔다. 매미가 한번 울 때마다 뒷목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미지근한 땀이 귀 뒤로 한줄기 흐르는 걸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책상의 네모난 공간 안에는 답답한 열기와 습기가 그득했다. 무거웠던 눈꺼풀을 내리면, 다시금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뭘까. , 어째서. 오이카와씨는 나에게 키스한 걸까. 오이카와는 그 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도 찾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찾아왔기에 성립된 관계였다. 나를 놀리고자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충분히 놀려준 이상 오이카와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찾아올 일도, 필요도 없겠지. 그래서였다. 오이카와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찾아가지 않는 건. 엎드린 카게야마의 뒤통수에 직사광선이 내리 쬈다. 머릿속이 다시 천천히 익어갔다. 몽롱한 의식이 카게야마를 뒤덮고, 그 날의 감촉이 떠올랐다. 조금 촉촉했던 오이카와의 입술, 땀이 송골 맺힌 보드라운 코끝이 맞닿은 느낌. 오이카와의 입술이 떨어진 뒤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매미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는 것 외에는.

뭐였을까. 카게야마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뭐였을까, 오이카와씨의 수수께끼는. 정답이 무엇이었을까. 장난이었는걸, 뭘 그렇게 진지해? 왜 키스했냐고 물으면 오이카와는 그렇게 대답할 게 뻔했다. 분명 또 풋, 하고 일부러 보여주듯이 비웃으면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마에 묻었던 땀방울이 팔에 질척하게 번졌다. 카게야마가 뱉은 숨이 그대로 책상에 닿아서, 이미 충분히 오른 열기를 더했다. 괜스레 머리에 열이 올랐다. 뜨거운 이마가 간질간질했다.

그만하자. 낮게 숨을 내뱉었다. 치아 끝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보드라운 귓바퀴의 감촉도, 입술에 남아있는 그 온기도, 모두 그만하자.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했고, 난 이번에도 당한 거고. 그냥 그걸로 끝인 거지. 오이카와씨랑은. 그냥 그걸로. 카게야마는 뜨끈해진 이마, 습기를 몰고 온 낮은 바람,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던 손이 이상하게 뜨거워져서, 열기를 잠재우고자 주먹을 쥐었다. 의식 안에서, 태양 빛이 부서지며 닿았던 홍차 빛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건방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방진 토비오쨩. 성격 나쁜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식이죠.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남겨진 사람은 어찌 되든중학교 때도, 난 당신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

다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거. 날 놀리려는 거. 날 가지고 놀려는 거. 그런데도 당신에게 할 말이라고는 왜 저한테 키스했어요?’라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난 아직도 여전히,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걸까. 잠의 호수로 빠져드는 의식 너머에서, 매미 소리가 울렸다. 그 날 울었던 매미일까, 한 마리가 줄기차게 울어댔다. 뜨거웠던 오이카와의 손, 뜨거운 입술, 이상하게 두근거리던 가슴. 죽을 것만 같던 숨 막힘.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정도로.

 

 

 

 

 

 

 

 

Oikage side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날이 맑았다. 비 오기 전의 어찌할 바 없는 더위가 하늘 끝부터 땅 아래까지 차곡차곡 가득했다. 여름의 낮은 뭉게구름은 몇 조각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칼날같이 직선으로 내리꽂는 태양을 막을 것은 없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이 햇빛을 흠뻑 받아 선명한 노란빛으로 빛났다. 그래서였다, 카라스노 고교 앞엔 노란빛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날과 같이, 교문 앞에서 선연한 태양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카게야마가 저 멀리서 나오는 것을 보고 첫날과 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후배는 첫날과는 달리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오이카와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날이 길어진 탓에 그때와 달리 노을이 지려면 아직 한참이라는 듯 태양은 더 진하게 타오르며 더위를 흩뿌렸다.

안녕,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놀리듯이 웃으며 말하자, 카게야마는 모래 씹은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용건도 끝났는데 왜 오셨어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꿍얼꿍얼 내뱉더니 그대로 오이카와를 지나가려는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또 뜨거웠다.

나랑 데이트할래?”

인사를 건네듯 가볍게 물어본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뜬 뒤 내뱉었다.

데이트요?”

. 데이트.”

요모조모 따져보면 역시나 잘생긴 그 얼굴 안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그날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피어올랐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뭐하러요?”

싫어?”

됐어요. 어차피 선배 명령이겠죠.”

오이카와는 싱긋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손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꽉 잡았다. 오이카와의 손에 있는 굳은살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두 손이 강하게 밀착했다.

갈까.”

오이카와의 모습이 그날과는 달랐다. 이상하게 깔끔한 목소리, 마치 옆에서 꺅꺅거리는 여자애들에게나 보여줄 것 같은 싱그러운 미소. 뭘까. 카게야마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래 봤자 카게야마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놀리려는 목적도 달성했고, 더는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을 텐데. 오이카와는 무얼 하려는 걸까.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카게야마와. 왜 키스했어요? 다시 혀까지 올라온 말을 카게야마는 꿀꺽 삼켰다. 쓴맛이 났다.

 

 

지독한 여름 때문이었을까, 카페에는 한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땀으로 젖은 몸을 순식간에 식혔다. 갑자기 몰려드는 한기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면서,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쪽으로 홍차 빛 눈동자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해지자구?”

피식피식 웃으면서. 카게야마의 안에 첫날의 기억이 지나갔다. 오이카와와의 첫날. 변덕스러운 그가 찾아왔던 첫날과 같이, 그는 또다시 반복하려는 걸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카게야마는 무언가 결정한 듯 오이카와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솔직해지자구요. 오이카와씨가 원하는 대로 절 놀렸으니까, 이제 다 없던 일로 해요. 키스도, 손을 잡았던 것도, 데이트도.”

카게야마가 툭툭 토하듯이 내뱉었다. 이상하게 명치 깊숙한 곳이 욱신거렸다. 태양이 몸을 찌르던 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무언가가 콕콕 박혔다. 오이카와가 이끌었던 손, 입술의 감촉, 왠지 그게 다. 여름날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습기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도 사라지는 걸까. 아지랑이와 같이 사라지는 걸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시선을 비껴 내려가더니 마찬가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흰 피부가 전등 빛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오이카와는 흐리게 웃고 있었다. , 솔직해지자.

있잖아,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손을 끌어, 그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채웠다. 깍지 낀 두 손이 선선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포근한 열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마주 보자, 그 홍차 빛 눈동자가 카게야마의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순식간에 빛났다. 솔직해지자.

있지, 토비오쨩. 나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이요?”

엄청 두근거렸거든. 그때.”

그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굽히고, 얼굴을 틀어 밀착하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귓가에 닿은 입술에서 나온 그의 한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한기 도는 전신에 뜨거운 한숨이 퍼질 정도로 가까이. 카게야마의 몸이 움찔 떨리면서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오이카와가 깍지 낀 손을 당겨 제지했다. 귓속에 숨을 불어넣듯이, 숨소리만으로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눈앞에 있는 오이카와의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내가 났다.

토비오쨩이 깨물었을 때.”

이어진 통증에 카게야마는 앗, 낮게 내뱉었다. 급하게 손을 들어 귀를 가리고 뒤로 몸을 빼자, 오이카와도 좁혔던 거리를 되돌렸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씹은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 예쁜 치열이 저의 귓바퀴에 와 닿았다는 사실이 무의식중에 점점 확실해져서, 귀에서 시작한 통증이 전신으로 아찔하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또 놀리시려는 거에요? 짜증스럽게 내뱉으려던 입술을 카게야마는 다시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흰 피부가 희미한 열로 붉어져 있었다. 카페의 조명은 상아빛으로 흘러내리는데, 오이카와는 그 아래에서 더 붉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온이 올랐다. 36.7도로 이루어져 있는 체내의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지금도, 두근거리거든. 엄청.”

오이카와는 마주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제 심장에 갖다 댔다. 일정한 박자로 조금의 쉼도 없이 뛰어오르는 펄떡임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제 손도 똑같이 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마저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다른 한 손이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슬며시 닿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 아래에서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두근대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게도.

토비오쨩도 두근대고 있네.”

오이카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도 거짓말, 했지?”

카게야마가 말라붙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리면서, 그 행동 하나까지도 오이카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카게야마에게 기울였던 아까와 같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나 때문이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 사이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와 오이카와의 시선이 겹쳤다. 검고, 푸른 눈동자. 오이카와가 눈동자를 한번 깜빡일 동안, 카게야마는 그저 곧게 오이카와만을 바라봤다.

왜 키스하셨어요?”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은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카게야마는 기어코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뇨, 연이어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낮았다.

아뇨, 됐어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짧게 불렀다. 동시에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금세 다시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졌다. 카게야마의 크고 까만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가득했다. 더위를 잊은 몸은 오이카와로 가득 차서, 귓속에 그날 들었던 매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미, 한 마리만 그다지도 울어대던 그 날, 쏟아 내리던 햇살, 녹아서 한 덩어리의 습기가 된 것 같았던 마주 잡은 손.

, 좋아해?”

오이카와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잡고 있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심장에 닿아있던 서로의 손은 떨어져, 남은 건 차가운 테이블 위에서 둘만의 여름을 맞잡고 있는 손 두 개뿐이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꾹, 굳게 다물어졌다가 다시 열렸다. 한숨이 나올 새도 없이 다시 닫혔지만.

, 물어요. 그런 거. 알고 있잖아요.”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싫어요. 오이카와씨 같은 사람. 심술궂고, 맨날 장난만 치고, 놀리기나 하고. 갑자기 찾아와서 데이트니, 키스니, 그런 거. 그런 짓만 하는 오이카와씨는 싫어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오이카와의 입술이 천천히 뜨거워져서, 그와 맞닿았던 카게야마의 입술도 이제는 달싹일 정도로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카게야마는 결국 눈을 감았다.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에요.”

. 나도.”

감긴 카게야마의 속눈썹에 오이카와는 살며시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뜨고, 검고 푸른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약간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 장면에서 그런 표정을 짓나? 오이카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게야마의 미간을 꾹 눌렀다.

감동적인 장면인데 표정이 왜 그래?”

솔직한 오이카와씨뭔가 기분 나빠요.”

진짜 한 대 때려버릴까. 요 꼬맹이.

건방지다니까, 진짜.”

그래도 싫진 않아요. 솔직한 오이카와씨.”

대답할 새도 없이 카게야마의 입술이 오이카와를 덮쳤다. 오이카와가 했던 가벼운 키스보다도 더 깊게 입술을 얽어매는. 떨어질 줄 모르고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눈을 마저 감았다.

역시 건방진 녀석이라니까.












Tell me, Please don’t tell

-중-

 

 

 

 

 

oikawa side

 

 

 

조각난 구름 몇 조각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부는 후끈한 열기는 전날보다도 더욱 심해져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에 답답한 공기가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몽롱한 머릿속에서 부옇게 전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길래 또 바보 같은 표정이냐.”

이와이즈미가 땀이 한두 방울 묻어있는 뺨에 대고 손부채 질을 하며 툭 내뱉었다. 한두 마리 울기 시작한 매미는 고요한 공간 안에 가끔씩 귀를 찌르는 이명을 던져넣었다.

으음, 그냥.”

무슨 일 있냐.”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어제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니, 오늘은 종일 이 상태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매미가 울기 시작했고, 햇빛은 더 강하게 지면을 태웠고, 날이 더욱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미안, 이와쨩. 나 먼저 갈게.”

또 어디 가서 사고 치려고?”

사고 치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확인해보는 것뿐이야.”

뭐를?”

이것저것.”

 

 

뭐하러 또 오신 거에요?”

누가 봐도 질색이란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쏘아붙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불만 섞인 목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있지, 나랑 데이트할래?”

데이트요?”

카게야마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위아래로 흘기는 느낌이 들어, 살며시 드러난 이마에 딱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데이트.

저 연습할건데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금세 툭 내뱉었다. 방금까지 한 건 연습 아니야? 카게야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투명한 땀방울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배구 바보. 그런 점은 중학교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배구밖에 모르는, 건방진 후배 녀석.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겠다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미소 짓는 오이카와를 보고, 카게야마가 인상을 더욱 구기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 뭐라 뭐라 꿍얼거리더니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내뱉었다.

어디 갈 건데요.”

데이트, 갈 거야?”

오이카와씨가 강제로 후배를 끌고 가는 걸 데이트라고 부르고 싶으시다면요.”

우와, 토비오쨩 건방지네~”

장난식으로 내뱉으면서 오이카와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와 동시에 비어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연습을 마치고 땀이 식어가던 카게야마의 손이 순식간에 열기로 물들었다. 거봐, 역시 좋아하는 거 맞지?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자, 카게야마의 얼굴이 순간이나마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순간적인 당황과 경계, 동시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슬며시 붉어진 얼굴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미간을 찌푸린다든가, 인상을 구긴다거나, 입술을 삐죽 내민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 보일 뿐인.

이상하게 묘한 두근거림에 금세 놀려주면서 놓으려고 했던 손을 놓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어정쩡하게 마주 잡은 채로 발을 움직였다. 손에 열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전날 갔던 카페,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길이 멀게 느껴졌다. 같은 곳을 돌고, 돌고, 또 도는 느낌.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발은 분명 움직이고 있고, 몸도 나아가고 있고, 태양도 기울고 있는데 왜일까. 카게야마와 이대로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길을 걸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시선을 돌려 살며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조금 아래로 내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오이카와와 보폭을 맞춰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의 타는 목구멍에서도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용한, 두 사람의 간격 25센치 정도의 적막 안에서 매미 한 마리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따라오면서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그렇게 울어댔다. 아지랑이가 저 끝에서 피어올랐다. 해가 더욱 뜨겁게 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람 한 점 없는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손은 놓을 수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랐던 목구멍이 더욱 비쩍 말라서, 약간의 통증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등을 타고 땀이 한줄기 흐르는 감각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등에 흐르는 간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손을 더욱 꽉 잡으면서, 카게야마를 다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바닥을 향했던 그 눈길은 이제 곧게 뻗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 밤하늘 같은 눈동자.

토비오쨩.”

발을 멈추고, 오이카와가 낮게 불렀다.

?”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린 순간, 조금 놀란 표정으로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당황한 탓일까, 슬며시 벌어졌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틀고 마치 키스할 것 같은 모양새로 카게야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말을 내뱉지 못한 카게야마의 입술에서 뜨거운 한숨이 나왔다. 결국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눈꼬리를 물들이면서 눈을 꼭 감았다.

,”

오이카와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카게야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슬며시 뜨자, 오이카와는 푸하핫,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그러게 솔직해지라니까?”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웃어 보이며 놀리듯이 말하자, 카게야마의 노란 끼 도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면서 오이카와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 어라? 무방비하게 웃고 있던 몸이 좀전과 같이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오이카와의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그 코끝이 귀 뒤의 연한 살을 간지럽혔다.

저라고 오이카와씨 못 놀릴 줄 아세요?”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더니, 이내 귓바퀴에 날카로운 통증이 훅 퍼졌다.

우왁?!”

오이카와가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징징 울리는 욱신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여름이어서 그런걸까, 더운 날씨 때문인 걸까. 오이카와의 흰 피부가 연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투명한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던 얼굴도 마찬가지여서, 붉어진 카게야마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 또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

말이 이어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는데, 정작 나오는 건 공기 거품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인상 나쁜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보면서 아직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습기가 손과 손 사이에 그득했다. 언제 땀방울이 배어 나와서 흘러내릴지 모를 정도로, 손가락 사이사이에 몽글몽글 열이 맺혀있었다.

이상해. 이거, 뭔가 이상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토비오쨩이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토비오쨩이 먼저 나를 좋아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난 그저그저. 그런데도 왜 자꾸만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죽을 것만 같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와 이어진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서, 모두 녹아서 그대로 손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오이카와씨, 두근거리고 있죠?”

카게야마가 쌤통이다라는 건방진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요 녀석이?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그 벌려진 입 사이로 고른 치아 선열이 보이자, 카게야마가 깨문 귓바퀴가 다시 욱신거렸다. 그가 깨물었던 잇모양이 하나하나 느껴져서, 귀가 마치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아니거든?”

전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건방지네.”

오이카와씨도요.”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지 카게야마는 미간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따라오던 매미는 울지 않고 있었다. 방금까지 강하게 울던 소리가 그치고, 조용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어느새 서로 간에 깍지를 끼고, 조금의 틈도 없이 겹쳐진 손안에는 더운 공기가 가득했다. 열기를 담은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렀다. 입술을 슬며시 열고, 오이카와는 낮게 내뱉었다.

건방진 토비오쨩.”

고른 치열이 보이는, 살짝 벌려진 카게야마의 입술에 오이카와는 그대로 가볍게 키스했다. 메마른 입술은 약간 짠맛이 났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향기였다. 매미 한 마리가 한차례 크게 울었지만,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의 숨 삼키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날이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Tell me, Please don’t tell

--

 

 




 

Oikawa side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티가 나는 법이다. 사람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건 선천적인 걸까, 그에 대해선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말을 거는 여자아이들, 모른 척 기대는 좁은 어깨, 남자치고 피부가 희다면서 가볍게 하는 접촉들. 그런 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자연적으로 머릿속에서 전환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다. 여름은 낮이 길다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역시 카게야마 토비오는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 뚱한 얼굴이 떠올랐다. 노란 끼가 도는 피부에 까만 머리, ‘뭐하러 오셨어요.’하며 삐죽 튀어나온 입술. 이상하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태도, 저는 모르겠지만 손끝까지 긴장한 것 같은 그 모습은 좋아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오이카와는 가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또 무슨 이상한 짓 꾸미고 있냐며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이며

그냥. 솔직하지 못하구나 싶어서.”

가볍게 내뱉을 뿐이었다. 연습이 없는 날의 귀갓길 가운데로 햇빛은 부서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습기가 끈적거렸다. 뜨끈한 바람이 드러난 팔에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카라스노에 도착했을 무렵엔 석양이 바닥 저변에 녹아들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나절은 매미 소리도 한풀 꺾여 낮에 비해서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무리를 보고 가방을 고쳐맸다. 지그시 한 사람만을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오이카와를 발견한 건지 강한 인상을 쓰고 있는 험악한 표정의 후배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눈을 가늘게 굽히면서 안녕, 토비오쨩. 가볍게 내뱉고 손을 살살 흔들어 보이면, 카게야마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강하게 한숨을 쉰 뒤 무리 속의 누군가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오이카와쪽으로 걸어왔다. 카게야마가 다가오면 올수록 그 까만 저지에 노을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까만 머리카락에도, 꾹 다문 입술에도. 어둑해져 가는 저녁에 얼굴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카게야마는 발을 멈췄다. 더는 찌푸려지지 않는 미간을 더욱 좁히면서, 뚱한 입술을 열었다.

뭐하러 오셨어요.”

토비오쨩 보러.”

거짓말 치지 마세요.”

조금의 쉼도 없이 주고받은 말 뒤에 카게야마는 시선을 틀었다. 잠시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를 그대로 지나치려는지 몸을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서둘러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냥 가지 말고. ? 할 말 있으니까.”

…….”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이카와와, 오이카와가 붙잡은 팔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잠시간 달싹였지만 오이카와가 응? 운을 떼자 다시 꾹 닫혔다. 연습을 끝낸 몸에서는 연한 땀 냄새가 나서,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같이 남아서 늦게까지 연습하던 날은 바람에 실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었다. 시선이 비슷해질 정도로 키가 자라도, 예전에는 순진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이제는 짜증이 가득해도, 예전과는 달리 굵어진 팔이 한 손에 들어오지 않아도, 카게야마는 카게야마였다.

 

 

저녁이 물드는 카페에는 사람이 적었다. 뚱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연거푸 물만 마셔대는 카게야마를 보면서, 오이카와는 기어코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를 올린 오이카와를 보더니 카게야마는 먼저 운을 뗐다.

할 말이 뭔데요.”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게야마가 놀란 듯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조금 뺐다. 열이 올랐던 몸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은 걸까, 그 팔을 조금 떨면서.

솔직하게 말하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오이카와는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간질간질한 목구멍을 타고 톡톡 튀는 아이스티가 내려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뭐가요?”

오이카와는 피식 웃더니, 아이스티의 얼음을 빨대로 휘적휘적 흔들었다.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다 아니까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 오이카와씨의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카게야마가 어떤 식으로 고백하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한가지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다는 당연한 이치처럼. 카게야마는 얼마간 조용한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지어 보인 미소에 이내 웃어 보였다.

? 웃었다고?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마시던 아이스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후배는 인상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요?”

,?”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지 못한 상황에 오이카와는 잠시간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카게야마는 웃고 있었고,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은 어느새 소소한 한기를 주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정해놓지 않은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소름이 돋는 미소를 거두더니 조용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씨가 뭘 생각하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카게야마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낚아채고 끌어당기더니, 두 입술 사이에 아주 조금의 간격만을 남겨두고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너무 바보로 보지 마시죠.”

입술에 와 닿는 뜨거운 입김에 오이카와는 입술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잡고 있던 넥타이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카게야마는 무언가 해냈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이카와는 얼마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간질이던 이마, 바로 앞에서 마치 별이 담긴 듯 반짝이던 검고 푸른 눈동자. 귓속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져 머릿속이 다시 한 번 새하얘졌다.

뭐야, 토비오쨩?”

얼굴이 뜨거웠다. 카페 안에서 저만 다른 세상인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서 오이카와는 손을 꽉 쥐었다. 카게야마에게 잡혔던 넥타이에 주름이 져 있었다. 목이 타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셔도 가시지를 않았다. 귓속에 들렸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재차 떠오르면, 다시 열이 올라 목구멍을 태웠다.

…… 토비오쨩?”

그 까맣고 푸르던 눈동자가, 저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는 착각이 일었다.

 

 

 

 

 

 

Kageyama side

 

 

오이카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그는 그랬다. 무언가를 꾸미고, 나를 놀리고, 장난치고, 자기가 한껏 즐거운 다음에 남겨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서브를 가르쳐달라는 나를 내치고, 혼자 앞으로 나아가고. 졸업식 날 세이죠에 가도 되나요? 라고 물었을 때 그건 토비오쨩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저 혼자 졸업해버리고. 오이카와는 그랬다.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와 마주할 때면 또 어떤 짓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던 손을 멈췄다. 아무도 없을 때 하는 연습은 조용하고 기분이 좋았다. 새벽 기운은 아직 오르지 못한 태양 빛을 가려주어 선선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도 열이 모인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낮게 숨을 내뱉자 폐에 가득했던 뜨거운 열기가 한차례 빠져나갔다. 그래도, 이제 예전과는 다르다. 당하지만은 않을 거니까. 다시 배구공을 들어 올리고, 서브 자세를 취했다. 뭘 꾸미는지는 모른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날, 오이카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결국엔 그런 일이겠지. 날 놀리려는 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석양이 녹아든 웃는 얼굴에, 이상하게 저 안쪽이 욱신거리는 건 카게야마에게 일종의 병이었다. 고질병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사라지질 않는 지독한 병. 서브를 내려치는 맛이 좋지 않았다. 공이 저 바깥쪽으로 빠져 아웃코스로 날아들었다. , 짧게 혀를 차고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었다.

토비오쨩, 솔직하게 말하지? 그의 정해진 순서였다. 먼저 저의 마음을 파헤치고, 무언가 재미난 건 없을까 떠보고. 바보같이 거기에 걸려들어서 저 속까지 드러내 보이면, 오이카와는 그 안을 온통 할퀴는 사람이었다. 여자애들이 자주 말하는, 쇼트케이크에서 딸기만 빼 먹는 얄미운 사람이란 건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 자세한 건 모르지만 비슷한 말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이제 당신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니까. 오이카와는 어차피 저를 놀릴 생각만 가득하니까, 나도 내 맘대로 할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내리치자, 공이 슬쩍 휘어 아웃선 아슬아슬한 곳에 꽂혔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들어 올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어 닦았다. 더워지고 있었다. 체육관의 열린 창문으로 후덥지근한 바람과 습기가 카게야마를 온통 휘어 감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어 올렸다. 반 박자 쉬고, 도움닫기를 하고. 팔을 휘두르면. 한 번 해보자구요,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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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기념 연성 첫번째. 상중하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평소 쓰던 느낌이 아니라 뭔가 어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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