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RS










새 햇빛을 집안에 맞아들인 지도 오늘로 8일째였다. 카게야마는 어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노란 바구니에 담았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오이카와의 민트색 티셔츠와 카게야마의 진한 청바지,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수건 등. 두 명이 쓰는 양이라 많지는 않았으나 카게야마 혼자 살던 대학생 초기 때를 떠올리면 확실히 한 사람 분량을 느끼고 만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거두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빤히 바라봤다. 이 바지를 입은 오이카와에게 안겼던 때가 잦다. 오이카와가 즐겨 입는 옷인지 아닌지, 그 판단 기준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토비오, 아직 멀었어?”

아뇨, 끝났어요.”

주방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 카게야마는 면바지도 바구니에 마저 집어넣고 말했다.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오면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에 놓인 식탁에는 벌써 2인용 식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이자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도 고개를 끄덕인 후 들고 있던 바구니를 소파 옆에 놓았다.

오늘은 된장국이랑 연어 카르파쵸, 렌틸콩을 넣은 보리밥과 찹스테이크야. 얼마 전에 찹스테이크 맛있다고 한 게 기억나서.”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이카와가 하는 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식 이름이었지만 카게야마에게는 딱히 상관없었다. ‘찹스테이크가 맛있다고 한 기억은 없으나 눈앞에 보이는 고기와 피망, 양파를 섞어 조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은 적은 있다. 나는 토오루씨의 좋아하는 음식이라고는 우유빵밖에 모르는데. 카게야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 한마디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얼굴에 보이는 행복까지도 잊지 않으며 또 요리까지 해내는 오이카와는 정말 대단하다. 나의 말을 그가 기억해준다. 최근 카게야마가 알게 된 행복 중 하나였다.

맛있어?”

. 토오루씨는 안 드세요?”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으며 먹어야지부드럽게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오이카와는 꿀을 넣은 홍차처럼 달콤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의아함을 느꼈으나 혀끝에서 달고 짭조름한 맛을 내는 찹스테이크를 먹는 데에 집중했다. 오이카와는 아,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토비오 물 주는 걸 깜빡했네.”

……!”

형태 좋은 근육이 잡힌 팔을 들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들고 정수기에서 찬물을 떠서 카게야마에게 주기까지. 카게야마는 씹는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한 채 오이카와를 계속 쳐다봤다. 제 옆에 놓인, 눈사람이 그려진 물컵을 만지고도 믿기지 않는다. 차가운 감촉은 현실이었으나, 오이카와가 물을 떠다 준 게 현실이라고? 정수기가 저랑 더 가까워도 항상 물을 뜨는 건 카게야마의 역할이었다. 심지어 카게야마보다 물을 더 자주 마시는 건 오이카와였으니, 밥을 먹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일으키는 건 요리 담당인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 쪽이었다.

토오루씨가 다 먹을 건데 왜 제가 떠야 하냐고요.’

토비오쨩은 내 후배니까.’

몇 번이고 투덜대며 불만을 표했으나 능청스레 내뱉는 오이카와의 말에 입술을 내미는 게 최선이었다. 후배라는 호칭에는 아직도 약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키는 거의 비슷한 지점까지 자랐다 해도 저는 그보다 2년 어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변하지 않는 목표 지점이자 이상적 존재였다. 중학교 졸업앨범만 봐도 그렇다.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는 앨범에 적힌 연도보다 카게야마의 앨범이 2년 뒤다. 그러했다.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선배였고, 어떻게 봐도 그를 이길 수 없는 건 카게야마였다.

결국 입을 삐죽 내밀고 갖은 불만을 꿍얼거려도 오이카와에게 물을 떠다 주는 건 카게야마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떠다 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는 불현듯 불안이 스며들어와 조심스레 오이카와를 흘겨봤다.

왜 그래? 밥 안 먹어?”

아뇨, 먹을 거예요.”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카게야마도 그를 알게 된 지 햇수로만 10년이 넘었다. 어느 정도 위험 수준을 넘으면 카게야마도 무의식중에 느끼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번은 모르겠다, 가 솔직한 심정이다. 오이카와는 다시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입은 실내복은 소매가 길게 늘어진 오버핏 형태의 터틀넥이다. 늘어진 소매가 그의 손등을 엄지손가락 아래까지 덮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오른쪽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사탕을 아삭 씹을 때 톡 터지는 달콤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오이카와와 살기 시작한 후로 그의 저런 표정을 보는 건 가끔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수룩한 감정이 귀 주변을 간질이는 건 어찌할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미야기로 한 번 내려오라고 그러시던데.”

, 들었어요.”

토비오한테도 말했어? 나한테만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일부러인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진 티를 냈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오이카와와 연락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카게야마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오이카와하고만 얘기할 리는 없다. 어머니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은 언제나 토비오를 돌봐주는 고마운 사람이 첫 번째였다.

토오루씨가 편한 날에 한 번 오라고 하셨어요.”

역시 어머니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도 제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를 집어 올렸다. 아직 연한 김이 올라오고 있다. 카게야마의 앞에 놓인 찹스테이크는 거의 소스만 남은 상태였다. 카게야마는 가운데에 놓인 연어 카르파쵸를 한 입 집어넣었다. 싱싱한 연어의 살결이 입 안에 돌았다.

토오루씨한테, 연락 자주 해요?”

어느 정도는.”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오이카와에게 자주 연락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카게야마와 그다지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를 따뜻하게 맞아주기는 했지만, 카게야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오이카와를 통해 말할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에 개인적인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렌틸콩을 오물오물 씹으며 카게야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밤이 내려앉은 바깥은 조용했다. 1층에 자리한 집치고는 주변이 조용한 편이었다.

최근 전지훈련 어디로 갔다 왔지?”

“Y 현이요. 체육관 시설이 좋았어요.”

, 그곳. 나도 갔었지. 거기 실업팀의 P 세터가 유명하잖아.”

봤어요! 굉장했죠.”

너무 미끼를 잘 무는 거 아냐, 토비오?”

?”

아냐.”

오이카와는 다시 기분이 나빠진 건지 고개를 홱 돌렸다. 카게야마는 한번 갸웃하고 찹스테이크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잘 먹었습니다.’ 열심히 오물거리느라 달아오른 입술로 말하면, 오이카와가 다시 푸핫 웃었다.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가지런하게 먹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되새기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넌 역시 어머니 쪽을 닮았어.”

그런가요?”

. 눈 쪽이 특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가로 손을 뻗어 보들 거리는 눈두덩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촉감이 눈가를 채운다. 어머니나 아버지 중 한쪽을 닮았다는 말을 흔히 들어보지는 않았으나, 오이카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게야마는 심야의 가로등 불빛처럼 말간 빛을 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토오루씨는 아버지를 더 닮은 것 같아요. 말로 하지는 않는다. 어느 부분이?라고 그가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이얗게 물결치는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속눈썹이, 달빛 아래서 특히 다정한 색으로 보이는 홍차 빛 머리카락이.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카게야마가 아는 단어는 적고 뜻이 협소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번 헤맸다.

토비오. 목걸이는 잘 메고 있어?”

오이카와는 표정을 고쳐 자못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목을 세로로 긋는 근육을 짚으면서, 그는 온기를 느끼듯이 손가락 다섯 개로 카게야마의 목을 감쌌다.

.”

카게야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얇은 은색 목걸이를 티셔츠 속에서 꺼냈다. 미색 조명등 아래의 은빛이 평소보다 반짝인다. 목걸이에 연결된 반지는 똑같은 은색이었고, 남성용이라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가느다랗게 반지를 감싸는 큐빅이 고급스러운 반지였다. 오이카와는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서 손을 거뒀다.

잃어버리지 마.”

안 잃어버려요.”

당신한테 받은 건 무엇 하나, 특히 이건. 카게야마는 양 볼을 찬찬히 물들였다. 오이카와는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의 입을 바라보았다. 또 입가에 뭐가 묻었나 싶어 카게야마는 입 주변을 만지작거렸고, 오이카와는 그게 아니라는 듯 눈꼬리를 휘면서 웃었다. 누군가가 그의 눈에 초승달을 심기운 것 같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내일?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일감독님이랑 미팅 있는데요.”

그 순간 오이카와가 놀란 듯 눈동자를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멀뚱히 바라봤다. 입이 몇 번 여닫히더니 겨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토비오. 진심이야?”

. 뭔가 위험하다. 카게야마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자신의 눈치 없음을 이럴때면 통감하고만다. 처음 오이카와가 내일이라고 특정해서 물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서서히 의심으로 물드는 걸 눈치 보면서 카게야마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무지 기억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꼬물거리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 알아요. 알죠.”

당장 이 순간만은 모면해야 한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일단 입 밖에 냈다. 이런 게 통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만다. 너무도 당연한 귀순에 따라 오이카와는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찹스테이크가 순식간에 얹힌 기분이다.

나 토비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싫은데.”

조금 전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냉기가 도는 목소리다. 날카로운 눈으로 카게야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낮은 음조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이건 진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해야 한다. 무언가, 어떤 거든. 동시에 안된다. 이 순간 허투루 말했다간 적어도 석 달은 아웃이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더듬으면서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냉정하게 그 입술을 흘겨봤다.

됐어. 기억 안 나면.”

끝이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타임아웃의 종소리가 들렸다.

 

 

⟡ ⟡ ⟡

 

 

토오루씨.”

한 침대 안에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만 쳐다보길 세 시간째였다. 조심스레 불러도 오이카와는 대답도 없다. 연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안은 평소보다 기온이 낮았다. 카게야마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시 한번 오이카와를 불렀다.

내일, 중요한 날이에요?”

글쎄. 토비오쨩에게는 엄청 중요한 날이겠지. 무려 감독님이랑 미팅하는 날이니까.”

저녁 식사할 때보다는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말 속에 씨가 박혀있다는 걸 카게야마가 모를 리는 없었다. 오이카와의 넓고 단단한 등이 한번 움직이더니 카게야마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잠시, 저가 날짜에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날짜 하나하나에 민감한 오이카와가 미워지기도 했으나 이번은 저가 잘못했겠지.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삐져나온 입술을 밀어 넣고자 애썼다.

오이카와의 생일은 720일이고몇 년 전 까먹었다가 오이카와에게 이 주 동안 괴롭힘당한 후에야 겨우 머리에 입력한 날짜였다, 내 생일은 1222일이고. 두 사람의 생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날 이길래, 카게야마는 세 시간 동안 오이카와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카게야마에게 날짜란 말 그대로 날짜일 뿐이어서, 제 생일은 기쁘고 주변에서 축하를 받는 것도 고맙지만 그건 수많은 날 중 하루에 불과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좋고 특별하다면 특정한 날을 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카게야마에게 하루는 순간이었으며, 순간은 영원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한기를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눈을 끔뻑거렸다. 머릿속에서 720일과 1222일의 숫자가 부유하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생일보다 중요한 날인가?

……토비오. 정말 모르는 거야?”

힌트도 줬다구? 토오루씨 할 만큼 했어.”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대답 없는 카게야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하게 들리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카게야마의 코 고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입가에 고이기 시작한 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카게야마는 폭신한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더니 기어코 오이카와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믿기지가 않네, 정말!”

오이카와는 입이 떡 벌어진 채 카게야마를 강하게 노려봤다. 오이카와로서는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날이다. 카게야마도 꼭 같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억은 할 줄 알았는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온도 차가 못내 아쉬워서 오이카와는 더욱 둥글게 몸을 말았다.

 

 

⟡ ⟡ ⟡

 

 

카게야마는 살포시 눈을 들었다. 연한 녹색의 이불보가 보였다. 비슷한 색깔의 베개도. 다시 눈을 감고 그곳을 한두 번 손으로 짚어도 있어야 할 사람은 없다. 시각으로나, 촉각으로나 부재(不在)는 명확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침이라 안 그래도 푹 꺼진 눈썹 사이가 더욱 좁아졌다.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는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오이카와는 먼저 집을 나선 후였다.

성가셔.”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척이나 깊고 풍성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카게야마가 보지 못하는 많은 걸 보고 예상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와 사귀고 함께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와의 인생을 선택한 건 제 인생 중 배구를 시작한 것 다음으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실감한다. 다만, 그것과 실제 삶에서 겪는 자잘 자잘한 충돌은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복잡하고 민감한 생각 회로를 느낄 때면 때로는 성가시고또 때로는, 버겁기도 했다. 예전 사귀던 시절에는 이럴 땐 며칠 안보는 게 상책이었는데. 며칠 안 보면 그만큼 보고 싶어지고, 불필요하게 빈자리를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것만이가장 큰 기쁨이 되고 말아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도 그를 이해하고자 다짐하곤 했다.

지금은 그와 같은 해결법은 쓸 수 없다. 관계가 변하면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 그와 함께하는 인생을 택했을 때 어머니가 충고했던 말대로다. 알고 있니, 토비오?

누구나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면 그만큼의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

난 영원히 네 편이겠지만 그 안에서의 고통은 너의 몫이야.’

그래도 손을 놓지는 말렴. 손을 놓지 못해서 그 선택을 한 거잖아?’

맞는 말이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뒤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불가피하게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었다.

 

 

⟡ ⟡ ⟡

 

 

감독과의 올해 들어 처음 있는 미팅을 마치고 난 후 카게야마답지 않게 서둘러 핸드폰을 들춰보았으나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흔히 보내곤 했던 배고파같은 라인 메시지 한 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겠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

하아…….”

뭐야? 싸웠던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어? 웬 한숨?”

A 감독은 짓궂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아뇨, …….”

굳이 말하면 연락이 없어서 한숨을 쉰 거지만. 굳이 무어라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죄 없는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A 감독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애인이랑 잘 해봐도움 되지 않는 조언과 함께 떠났다.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켜 A 감독에게 90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카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절로 답답한 기분이 들어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서둘러 풀었다. 기껏, 기껏 결혼해도 이 모양이다.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이해하기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그의 눈치를 볼 정도는 되었다 해도 오이카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카게야마에게는 심각하게 난해한 문제였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카페의 통유리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정면에는 꽃가게가 놓여있다. 지나가는 여성 두 명이 온실 안쪽에 놓인 백합을 가리켰다. 꽃집 주인은 흰색 백합을 꺼내 파스텔 색조 포장지로 감싼 후 여성 중 한 명에게 건넸다. 눈꽃이 내려앉은 듯 환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은 여성은 백합에 코를 묻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은색 목걸이. 목걸이를 조심스레 꺼내면 함께 걸려있는 반지는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잃어버리지 마.’

오이카와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받은 당일 이후로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본 적 없는 반지를 유심히 바라봤다. 바깥쪽은 세심하게 세공된 건지 매끈한 은빛을 빛냈고, 안쪽은 울퉁불퉁하게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건 숫자와 알파벳이었다. 이탤릭체로 끊어질 듯 말 듯 이어 새겨진 건, 아무리 영어에 약한 카게야마도 아는 이름이었다.

 

01. 09 Oikawa Toru

 

평생을 산다 해도 잊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 ⟡ ⟡

 

 

오이카와는 핸드폰에 등록된 유명한 카레 집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화면에 띄웠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오후 8시에 잡아둔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미처 움직이질 않는다. 카게야마가 어떤 날인지 대답하지 못한 시점에서 예약 취소를 결심한 오이카와였지만, 감정은 무 자르듯 선을 긋는 생각과는 달랐다.

……멍청이 토비오.”

사귀는 중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비난을 툭 내뱉은 후,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혼하고 1. 오히려 동거할 때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혼은 아주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오이카와는 식장에서 카게야마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안정감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을 때는 서로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제 토비오가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거구나.’

카게야마와 밤에 몸을 얽어맸을 때보다도 더 깊게 카게야마를 피부로 느꼈다. 오이카와는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아마 앞으로도 평생 겪기는 힘들안위(安慰)를 실감했다. 오이카와에게는, ‘누군가가 평생 자신의 유일하고도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서 옆에 있다.’는 건 배구만큼이나 묘한 의미였다. 더욱이 그 누군가가 토비오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고작 두 살 어릴 뿐인 중학교 후배한테 특별한 감정을 품고, 누구도 수긍하지 못할 인생을 함께 걸어간다.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때의 저 자신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오이카와는 중학교 시절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짧은 앞머리와 작은 몸통, 배구공만 들고 다니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오이카와는 다시금 카게야마가 저의 곁에 있는 게 기적과도 같은 건 아닐까 느낀다. 카게야마가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고오이카와의 옆에서 평생을 보내기로 택한 건 상상 이상으로 오이카와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5년 전의 오이카와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까지 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카게야마에게는 연락 한 통 없다. 오이카와는 카레 집 전화번호를 다시 띄웠다. 예약. 취소해야 하나. 작게 한숨을 내쉬자 노렸다는 듯이 카게야마에게 전화가 왔다. 뾰로통한 얼굴로 못마땅하게 바보라고 등록된 번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도적으로 10초 정도 기다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토오루씨. 어디세요?

일부러인 듯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게 또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대답하지 않았더니 카게야마가 토오루씨?’ 한 번 더 불렀다.

집에 가는 중인데.”

누구누구 씨 덕분에 예약했던 카레 집도 못 가고 말이야.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을 불만은 꾸욱 삼켰다.

집 앞의 M 공원에서 만나요.

?”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핸드폰 화면에는 총 통화시간 31초만 반짝였다. 오이카와는 전날 카게야마가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오이카와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건방지게 먼저 끊은 거야? 선배랑 전화하면서 감히?’

고작 2년 선배였던 걸로 생색내지 말라며 소꿉친구에게 몇 번이고 혼났지만 오이카와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2년이어도, 1년이어도 선배는 선배다. 카게야마는 저보다 2살 연하였으며 그건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생일도 내가 더 먼저고! 어느 모로 보나 카게야마 토비오가 이렇게 건방져도 된다는 법은 세상천지에 없다.

또 우유빵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기만 해봐.”

뻔하지, . 오이카와는 이를 갈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봤자 카게야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그는 오이카와의 손바닥 안이었고, 오이카와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결국 카게야마가 부르는 대로 가고 마는 게 무척 뻔한 두 사람의 관계였다.

 

 

⟡ ⟡ ⟡

 

 

두 사람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M 공원은 평소 두 명의 좋은 산책로였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도, 한여름의 태양이 흙을 달구는 대낮에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이곳을 함께 걸었다. 결혼하고 난 후 초기에는 특히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꼭 이곳이어야만 했던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꼭 이곳을 걸었고, 약속하지 않아도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그래선지 이른 저녁 시간이어도 M 공원의 내부는 익숙했다.

오이카와는 풀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어선지 꽃은 모두 시들어있고 벌레들도 고요했으나 상록수는 똑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해가 저문 뒤 하늘이 완연히 어두워지기 직전의 이런 시간대는 나무들이 초록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옷을 바꿔입는 때였다. 카게야마는 최근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상록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었다.

오셨나요.”

오이카와가 가까이 가자 몸을 일으키고 작게 말한 카게야마의 코와 귀가 온통 새빨갛다. 오이카와는 눈을 끔뻑인 뒤 그의 귀를 양손으로 감쌌다. 얼음물에 얼린 나무껍질처럼 차가웠다.

뭐야,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한 시간쯤이요.”

나한테 전화한 건 10분 전이잖아.”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카게야마는 시선을 오이카와의 발끝으로 옮겼다. , 이라고 반문하기 전에 카게야마가 손을 들었다. 윗단추 두 개가 풀린 제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빼낸 카게야마는, 달려있던 반지를 꺼낸 후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토비오,”

오이카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은 카게야마는 딱 들어맞는 반지를 바라보고 입김을 후 내뱉었다. 하얗고 투명한 입김이 두 사람 사이의 온기로 녹아 사라졌다. 오이카와의 왼손 약지에 걸린 차가운 은색 감촉. 오이카와는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듯이 놀라며 카게야마를 마주 봤다. 카게야마의 귀와 목, 얼굴이 살며시 물들었다.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소행성처럼 반짝였다.

토오루씨가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결혼할 때.”

카게야마가 왼손으로 오이카와의 왼손을 잡았다. 찬 공기에 식어있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안쪽에 새겨진 이름이 반대예요’, 제가 말했더니.”

토비오.”

오이카와가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으나 아직 말하지 말라는 듯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더니, 언제나 반지를 끼고 다닐 수 없는 사이니까 쉽게 잊을 수 있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라고.”

카게야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둘 다 운동선수인 데다가, 동성혼이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반지를 계속 끼고 다닐 순 없다. 물론 주변 사람의 눈길을 신경 쓸 정도였다면 아예 이 결혼을 선택하지도 않았겠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약속을 맺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았다. 반지와 목걸이도 마찬가지다.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손가락과 거울을 봐야만 비치는 목은 엄연히 되새김질의 정도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런 거다. 두 사람의 약속은 타인보다도 쉽게 허물어지는 토대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1년이 지나 다시 결혼했던 그 날이 되면 그 날만큼은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자고. 서로의 주인을 찾아주는 의미로. 아직, 반지는 서로에게 있다는 뜻으로.”

오이카와는 짙은 보랏빛 하늘 아래 제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추위 때문인지 조금 파래진 입술을 못난 모양으로 내밀었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지만1년이 벌써 지났네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잠시 망설이는 듯 눈동자를 살며시 내렸다가 이내 곧은 표정으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어느새 비슷한 정도의 온도로 따스해져 있었다.

토오루씨랑 결혼하고 1. 솔직히 동거할 때와 다른 점은 잘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가 토오루씨로 달라졌다는 것과 반지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래도, 저와 토오루씨만의 날이 생겼다는 게토오루씨가 주신 반지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 토오루씨가 제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그 목에 걸고 다닌다고 생각하면조금, 흥분돼요…….”

마지막 말을 뭉그러뜨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카게야마를 보고 오이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귀가 온통 불그스름하다.

뭐야, 그게. 토비오쨩 뭔가 변태 같은 말했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째려보곤 입술을 다시 삐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무어라 꿍얼거린다.

그냥, 그렇다고요.”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한번 피식 웃은 후 잠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고요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동이다. 다만 괜찮다. 카게야마가 옆에 있으면 오이카와는 가끔 심장병이 있는 건 아닐까 착각했다.

.”

오이카와는 제 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를 빼내 카게야마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오이카와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만들어진 반지답게 꼭 들어맞았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같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1년에 한 번은 주인에게 가야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또렷한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다. 카게야마의 깊은 눈동자는 오이카와가 몇 시간이고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신비(神祕)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다시 한번 세게 마주 잡더니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차피 전 항상 토오루씨와 함께 있으니까, 반지도 토오루씨가 갖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언제나 같이 있잖아요.”

조금의 차이를 두고 두 번 대답한 카게야마는 빨간 코에서 보얀 숨을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오랫동안 우린 홍차처럼 깊은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그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토비오 너, 갈수록 건방져진다.”

? 뭐가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은 후 고개를 돌려 쇄골과 목 사이 연한 살결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우왓?! , 하시는 거예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나려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오이카와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채 놔주지 않았다. 이어서 동글 튀어나온 목젖을 앙 깨물자 카게야마가 공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 ,”

느꼈어?”

오이카와가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올린 오이카와를 노려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변태는 그쪽이면서.”

? 한 번 더 해 달라구?”

낮게 속삭이며 오이카와가 야릇하게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물린 목젖이 따끔거린다. 오이카와가 선수 치기 전 그의 움직임을 막듯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찬 기운이 이슬처럼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토오루씨 냄새나요.”

향수 냄새?”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게야마의 온기로 어깨 한쪽이 온통 햇볕에 닿은 듯 뜨거웠다.

토오루씨의 냄새요.”

카게야마가 코를 묻은 채 강하게 들이마셨다. 살포시 눈감은 카게야마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차분히 눈꺼풀을 내렸다. 입꼬리가 보드랍게 올라가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토비오쨩밖에 없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카게야마의 단단한 근육을 지지한 오이카와의 왼손에서 은색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토비오.”

?”

카레, 먹으러 갈까.”

.”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볼이 반딧불처럼 환하게 빛났고 입가가 꼬물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손으로 문지른 후, 그곳에 입술을 대고 온기를 느꼈다. 딱 적당한 온도로 끓은 카레와 같은 온기였다.

 

넌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 쪽이.’

흐르는 은하수처럼 푸른 눈동자, 소행성처럼 반짝이는 빛깔을 보면서 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지 나는 알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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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아본 바로는 일본 몇몇개의 구에서 승인한, 사실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파트너 제도에서 어느 한 명의
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조항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다가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인게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흡수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부동성은 두 사람에게 맞지 않겠다 싶어
결혼했음에도 성은 그대로입니다 :)





  

** 카게야마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Happy Birthday, Maybe.

  



 

 

다녀올게요.”

, 잠깐만. 토비오. 손수건 챙겼지?”

.”

카게야마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남색 무지의 손수건은 작년 생일 때 그가 선물 받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조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잠깐만, 토비오. 정말 성질도 급하네.”

?”

왜긴 왜야? 오늘 몇 시에 들어오니?”

타박하는 말투였으나 얼굴에는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여성은 카게야마의 가쿠란 윗부분을 몇 번 다듬었다. 가쿠란에 붙어있던 하얗고 까만 먼지가 여성의 손끝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른다.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왼쪽 위에 뒀다가 다시 여성을 마주 봤다.

오이카와 선배랑 만나고 올 건데.”

토오루랑? , 집에 데려오지 않고. 같이 엄마가 만든 케이크 먹자.”

여성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토오루라고 부르는 여성의 탓인지 카게야마는 볼을 살며시 물들였다. 카게야마와 여성이 사는 집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발걸음한 건 적지 않다. 가장 최근은 일주일 전 즈음이다. 그 날 여성은 카게야마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반숙 카레를 만들었고, 오이카와는 동백꽃처럼 환하고 선명하게 웃으며 맛있다고 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세차게 흔들었다.

됐어. 오늘은.”

오늘이니까, 가 아니고?”

여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카게야마는 잠시 다시 생각한 후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됐어. 괜찮아.”

그래, 알았어.”

여성은 카게야마처럼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그 손길을 따라 잠자코 몸을 숙였다. 여성의 가느다란 양팔 안에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가 쏙 담긴다. 여성은 저의 어깨보다 넓은 카게야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게야마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렸다.

토비오. 열일곱 살 생일 축하해.”

.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크겠지? 이제 엄마가 안아주지도 못할 수도 있겠네.”

내가 앉으면 되니까.”

그렇게 작진 않아!”

어쩌라는 걸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머니는 타박하듯이 카게야마의 등을 한번 강하게 때렸다. 어릴 때는 배구공 겨우 들었으면서! 투덜거린 후 카게야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성에게 묻어있는 계란찜의 단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아침밥을 다시 먹는 기분으로 여성의 등에 팔을 둘렀다. 보슬보슬한 밥과 포동거리는 계란찜, 고소한 된장국과 아삭거리는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십칠 년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올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 토비오가 엄마 아들이라 엄마는 정말 행복해.”

…….”

카게야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겨울바람이 카게야마의 등을 둘렀고, 어머니는 따뜻하게 보호하려는 듯이 바람에 휩싸인 넓은 등을 더욱 힘주어 감쌌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다녀와. 생일 축하해.”

여성은 카게야마의 차가워진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그 한쪽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여성의 온기로 촉촉하게 젖어 든 심장이 무거워서 서둘러 발을 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카레랑 케이크 만들어 놓을게. 조심히 다녀와.”

여성은 손을 놓기 아쉬운 듯이 카게야마의 손끝을 조금 세게 쥐었다. 그 손조차 문밖을 나서는 카게야마의 등을 바라보며 살며시 놓고, 카게야마가 나간 현관에서 등을 돌렸다. 마음이 분주했다. 평소보다 정성스레 카레를 만들고, 카게야마가 맛있게 먹을 케이크를 구워야 한다. 올해는 레몬 필이 들어간 초콜릿 시트 케이크다. 겉면은 진한 다크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식용 금가루를 몇 개 올린 후 설탕 과자로 만든 작은 배구공을 올려놓으면 끝이다.

 

카게야마 토비오 열일곱 살의 생일은 오늘뿐이다. 여성은 그렇게 생각하면 유독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카라스노 선배들한테 아주 격렬한 축하를 받았나 보지?”

오이카와는 냉소를 지었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는 그의 뺨을 온통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바람 때문에 푸석해진 머리를 한번 거칠게 올리고, 오이카와는 후가느다란 입김을 뱉었다. 카게야마는 그 앞에서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양손 가득 들린 여러 선물 봉투에 꽂혀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치를 몇 번 살피다가 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꾸 못 가게 하셔서.”

그래서, 카라스노 선배들이 그 사랑스러운 후배인 토비오쨩을 너무 예뻐한 나머지 오이카와씨가 여기서 30분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도 못 받게 하고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양손에는 선물 바구니를 들려서 이제야 겨우 내보냈다는 거지? 오이카와씨가 이렇게 추운 영하 5도의 날씨에 가로등 아래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겨우 토비오쨩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오이카와는 천천히, 또박또박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살며시 들었던 고개를 푹 숙여 이제는 거의 90도 각도로 몸이 접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와중에도 카게야마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선물 봉투를 보며 몇 번 더 골려줄까 하다가 이내 한숨만 폭 내쉬었다.

됐어. 이런 날 너한테 화내서 뭐하겠어. 이거나 받아.”

? 이게 뭔데요?”

지금 네 양손에 들려있는 걸 보고서도 파악이 안 돼?”

오이카와가 건넨 건 아주 작은 상자였다. 손바닥 안, 핑거 푸드(finger food)마냥 조그만 모양 탓에 카게야마는 처음엔 오이카와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이카와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더한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야 카게야마는 손에 들린 짐을 내려놓고 오이카와의 선물을 받아들 수 있었다.

이게 뭔데요?”

눈을 빛내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까맣고 아름다웠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이 달빛 아래에서 고운 빛깔로 빛났고, 오이카와는 그 볼을 한번 쓰다듬으며 달을 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열어봐도 좋아.”

오이카와 선배 앞에서요?”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덧붙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마치 본능과도 같이 오이카와에게 다가서고 그 입에 입술을 마주쳤다. 소금 결정과도 같은 한기가 입술에서 입술 사이로 전달되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살며시 떨어질 때 즈음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카게야마의 뒷목을 조심스레 잡고 당겼다.

…….”

…….”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 키스. 여느 날처럼 지분거리지도 않고, 쪽 소리를 내지도 않고, 마치 그 입술이 있을 자리는 이곳이라는 것처럼 두 사람은 입술의 온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한쪽 손으로 오이카와의 볼을 더듬었다. 차가웠던 살결이 순식간에 보드라운 열기를 흡수한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잠시 뗐다가 오이카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이카와는 심기가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볼에는 왜.”

차가워서요.”

너 때문이잖아.”

그래서예요.”

…….”

그리 기분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핀 뒤 살며시 입술에 키스를 배달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겹쳐진 입술 때문에 카게야마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야 했다. 오이카와의 부석한 앞머리가 눈꼬리를 간지럽힌다.

토비오.”

…….”

선물. 열어봐.”

오이카와는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귓속을 침식했다. 따뜻하고 농밀한 혀가 귓바퀴를 천천히 타고 흘러, 카게야마의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알았으니까, 귀는 하지 마요.”

?”

……어쨌든요.”

카게야마는 험상궂게 노려본 뒤 오이카와가 준 작은 상자를 바라봤다. 연한 민트색 상자에 검은색 리본은 깔끔하다. 겨울에 어울리는 색조였다. 리본을 끌른 후 상자를 열면 달빛에 반사된 은색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그걸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두 눈동자의 방향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뭔데요.”

……저기, 토비오쨩?”

이거,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으로 뒤덮였다. 오이카와는 조금 놀란 것처럼 눈동자가 커져선 카게야마의 낯빛을 살폈다. 오이카와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큐빅이 사선으로 장식된 은색 반지였다.

생일이잖아.”

생일에 왜 저한테 이걸 주시는데요.”

…….”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그렇게 보신다는 건 알아요.”

무슨 소리야?”

카게야마가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그를 부르며 카게야마의 볼을 감쌌으나 카게야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드럽지만 완고한 움직임이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녹아있는 두 귀가 붉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오이카와의 옆자리를 스쳐 갔던 여자 선배들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언제나처럼, 그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저를 대하지는 말아주세요…….”

……….”

헤어져도 괜찮으니까, 오이카와 선배한테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있고 싶어요.”

왜 헤어지는 게 되는 건데. 누가 헤어진다고 하는데.”

오이카와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카게야마의 왼쪽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의 약지에 은색 반지를 강하게 끼워 넣자 아야, 아파요! 카게야마가 불만을 토로했다.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오이카와는 반 오기로 카게야마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거의 끝까지 들어간 은색 반지는 카게야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튼튼한 뼈대에 걸렸다. 은색 반지가 걸린 카게야마의 약지, 그 왼손을 오이카와는 강하게 쥐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닿았던 볼로 끌어당긴 후 손을 감싸듯이 붙잡는다. 눈썹을 올리고 날카롭게 카게야마를 쏘아본 오이카와는 내뱉듯이 말했다.

말해두는데, 토비오쨩이 사귀자고 한 거니까. 먼저 시작한 건 너여도 끝내는 건 나야. 알겠어?”

무슨 말이에요?”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는 카게야마 토비오고,”

오이카와는 저가 붙잡은 카게야마의 약지에 소리 내 키스했다.

아니, 내 인생에 토비오쨩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게 더 문제라니까.”

내가 왜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데.”

오이카와는 끝에 거의 화까지 내면서 카게야마의 약지를 작게 깨물었다. 아얏, 반지를 끼울 때와는 다른 형태의 신음이 카게야마의 얇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신음에 만족한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을 지었다.

생일 축하해, 토비오. 내년의 너도 나한테 주면 돼.”

……지금도 오이카와 선배랑 있잖아요.”

그래. 네가 매년 새로 태어날 때마다, 나한테 고백했을 때처럼 내 손을 잡아.”

왜 자꾸 그때 얘기를 하세요.”

토비오가 말한 거니까. 토비오쨩이 말한 건 기억하고 있어.”

오이카와는 설탕을 뿌리듯이 부드럽게 말한 뒤 카게야마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아침, 여성과 끌어안았던 기억을 회상했다. 여성과의 기억이 달콤한 향내를 풍긴다면, 오이카와는 그 자체가 달콤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손을 빼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오이카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몇 번 비비적거린 뒤 기댄 채로 잠시 조용히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를 만난 순간부터 오이카와 선배의 토비오예요.”

알아.”

앞으로도요.”

그래.”

오이카와 선배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진 않지만 또 입술을 내밀고 있겠지. 오이카와는 눈에 선하게 떠올라 그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카게야마의 핀잔 섞인 불만이 딱딱한 오이카와의 어깨에 닿았다.

왜 내가 너한테 반지를 선물했는지, 정말 모르겠어? 토비오쨩.”

?”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는 깊고 그윽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보고 있어. 네 입술에 키스하고 있어. 너를 안고 있어.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보다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

물론 그의 행동은 더욱 격렬하고 난폭한 때도 잦았다. 오이카와는 입으로는 달콤함을 자아내고 혀로는 열을 돋우는 사람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오이카와의 입술이 강하게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덮쳤다.

오이카와 선배, !”

키스에 연이은, 살이 찢기는 고통에 카게야마는 무심코 오이카와를 밀어냈다. 오이카와의 어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카게야마를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멀어진 곳에는 잇자국으로 낸 상처가 남았다. 연하게 불이 지핀 볼, 피가 몽골 올라온 상처가 붉다.

뭐하시는 겁니까!”

반지 같은 거야.”

반지는 끼웠잖아요.”

내가 왜 반지를 줬는지 모른 벌.”

눈처럼 순수하게 웃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상처 난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

어디 저 멀리의, 나와는 상관없는 A 씨 정도였으면 좋았을텐데.”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듯했다. 본인은 전혀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말하면서, 눈가를 찌푸린 오이카와는 겨울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오이카와 선배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닌 A 씨였다면 좋아했을까요.”

내가 사귀는 건 토비오쨩인걸.”

…….”

카게야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오이카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오이카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꼬리가 불쑥 올라간 채로 카게야마의 목을 쓰다듬었다.

네가 A 씨였다면 좋아했어도 사귀진 않았을 거야.”

모르겠어요.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기준이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그런다는 건 알아요. 일부러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래? 많이 컸네.”

날카롭게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모래 속을 더듬듯이 헤집었다. 텁텁하고 더운 모래였다. 겨울, 영하의 온도에 사막과도 같은 뜨거운 모래는 눈 끝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를 모르는 A씨가 될 생각은 없다. 그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가 될 생각도 없다. 카게야마는 왼손 약지에 파고든 반지의 압력을 느끼면서, 저가 어쩌면 오이카와에 한해서 욕심쟁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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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일 축하글로 쓰려고 한 게 있었는데 너무 생일과 맞지 않는 글이기도 했고
심하게 제 개인적인 글이라.. 급하게 카게야마를 축하하는(?)글을 썼어요.
여러모로 많이 모자르고 부족한 글이 되었습니다만 카게야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만 있다면
다 괜찮지 않을까요?(아님

오이카와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 사망 소재 있습니다.

- 모브가 주인공입니다만 오이카게입니다.

- 글에 나오는 모든 의학 지식은 의학적 사실 및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전등 몇 개는 약한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교체할 때가 된 건지 계속 깜빡였다.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둘러싸인 방은 조금 추웠다. ?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구석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홀대와 수액. C대 병원 로고가 박혀있는 환자복. 병원? 그 외 몇 가지 단서가 이곳이 병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문, 손잡이가 없는 창문 등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라니? 양쪽 손을 들어 보면, 낯선 굳은살과 손금이 보였다. 내 손이 이랬던가? 아주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방 한쪽에 세면대와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미닫이문이 열렸다.

, 일어나셨나요.”

백의를 걸친 남자 의사 2명과 백의를 걸치지 않은 한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 두 명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둘 중 한 명은 키가 크고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썹 숱이 적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음하며 운을 띄웠고 운을 띄울 때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백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수많은 종류의 펜과 펜 라이트 등이 정돈되지 않고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주머니 아래 명찰을 보니 그의 이름은 하야마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의사는 인자한 미소 때문인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살이 두껍게 쌓인 양쪽 볼과 턱 아래는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힘겹게 셔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남성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깊게 우린 홍차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반짝거리며 그 색을 바꾸었고, 곧게 뻗은 큰 키와 몸에 좋게 붙은 근육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의사 두 명과는 거리를 띄우고 미닫이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의사 둘 중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하야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

그의 말을 무시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원치 않게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지, 아닌지 조금 망설였다. 아주 잘생긴 미남미닫이문 옆에 서 있는이 차분한 표정으로, 동시에 꿰뚫을 것처럼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물빛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 짙은 남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 걸친 코트는 끈이 없고 허벅지까지만 내려오는 얇은 재질이었다.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조합이었다.

하야마는 내 무언(無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고 나를 마주 봤다.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였다.

많이 어지럽진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다른 증상은요?”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이라고 답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의 목소리에 더 큰 의문을 느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성인 남성의 목소리라기보다 조금 가볍고, 원한다면 가성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목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야마는 흡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살이 적은 얼굴 전면에 근육이 경련하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힘겨운 듯 금방 미소를 풀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왼쪽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바라봤다. 수액은 크기가 컸고, 무어라 적혀있었지만 앉아있는 상태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야마는 다시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의 안경이 다시 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뇌 이식 수술이요.”

뇌요?”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꼼꼼히 주변부를 만져보자 무언가 수술 자국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뒤통수에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신경 다발의 이식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12중 추돌 자동차 사고였죠. 당신의 몸은 아주,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가슴 아래쪽이 아주 납작하게 구겨져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만은 온전했죠. 뇌가 살아있으니 숨도 쉬고 있었고요. 기흉과 출혈로 호흡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뇌에 영양을 공급한 건 사실이죠.”

하야마는 말을 마칠 때마다 숨을 고르고 안경테를 올렸다. 나는 남성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하야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자 구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1층 혹은 2층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환의 사이로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계절. 날씨. 기억이 날 듯 말 듯 모호했다. 시린 이의 계절. 하늘로 높게 치솟는 연기의 계절. 바람이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들이대는 계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야마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기존에 뇌사로 사망 시 기증을 원한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에요.”

기증, 수술이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 저기.”

부끄럽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증, 수술, 뇌사 등 단어 자체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들어오기 전 봤었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당신은 젊었고, 수술을 서두른다면 뇌 기능이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말 그대로 몸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씨는 머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을정도로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고, 하야마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는 다른 의사 한 명과 남성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저들과의 눈빛 대화를 끝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빛 눈동자의 남성은 이제 살며시 웃고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가 인사와도 같다는 듯이 남자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현재 당신은 기증자인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쓰고 있습니다. 의족이라 말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의미죠. 뇌 이식 수술 기술은 현재 항생제 및 면역억제제만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하야마는 고개를 강하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그는 얇게, 아주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몇 번 뒤적거렸다. 하야마가 서류를 볼 사이 다른 의사 한 명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언어에 문제가 없으신 걸 보니 뇌 기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함 한 번 알려주시겠습니까.”

성함성함이요?”

성함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성함. 이름. , 나의 이름. 난 누구인가. 내가 누구지. 지금 현재,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이 더러운 기생충은, 뭐지. 심장 고동이 거세지면서 더욱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고조되는 박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대를 튀어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남성의 깊은 눈이 하지 말라는 듯 강한 눈동자로 나를 꽉 붙잡았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제 이름, 말이죠.”

. 그렇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의사 한 명이 천천히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던 하야마도 나를 바라봤다. 모두가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걸걸한 사막처럼 모래알갱이가 씹히는 착각도 들었다. 다만 나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이자 입술이었다.

그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지. 무엇이었을까. 낯선 목소리를 가진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입술과 목을 빌려 이름을 빚었다.

스도 하루나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 강하게 소리를 냈다.

 

 

 

 

 

 

 

Lost in Memory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거의 보름 가까이 신세 진 병원 입구를 나서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하늘의 계절이었다. 지금까지 지냈던 15층 병동을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 병동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야마도 만날 일이 없었다. 외래에서는 카노우 교수님을 만날 테니까당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분이 교수님이란 걸 내가 안 것은, 일주일이 지나 그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였다. 두툼한 잠바를 챙겨 입어도 목이나 허리, 발목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겼다. 스도는 얇은 입김을 새어 보내고 다리를 옮겼다. 남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원 수속 끝났어?”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을 한 그는 첫날과 비슷하게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밝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리는 코트는 그의 큰 키와 퍽 잘 어울렸다. 머리 한쪽을 빗어 넘기고 왁스로 고정한 그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났다.

. 방금요.”

첫날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자주 스도의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스도는 그와 대화를 하며 병원 생활을 적적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대부분은 기억과 관련한 상기 훈련이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의사 몇 명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가지였다.

이름은 스도 하루나, 현재 22살로 미야기 현 K 대학교에 재적 중이었다. K대학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도는 학생증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기에, 스도는 일부러 거울을 보진 않았다. 스도는 기억 훈련을 지속한 뒤 그가 여동생이 한 명 있는 4인 가족의 장남이면서, 2년 전 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그 이후 또 이런 끔찍한 사고에 휘말리다니 운도 없다며 스도는 가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대학을 1년 휴학한 뒤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까.”

남성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넓은 어깨는 사진으로 봤던 그의 코트 위 모습보다 더 넓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항상 사진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 눈동자의 빛깔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스도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발음해서일까. 예쁘고 앙증맞게 들리는 그 이름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스도는 그가 없을 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고는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현재 도쿄에 있는 A대 졸업반 4학년이다. 배구로 유명한 A대 안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인 세터로 꽤 유명한 사람인지 병원에서 스포츠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면 배구란에 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실려 있기도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T대 상대로 압도적 센스 자랑

“A대 배구부 공식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역량 분석

 

스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그가 고교 3년 동안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과 어떤 스파이커와도 금방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걸 스도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는 낯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저가 그의 웃는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도는 입술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만 웃은 뒤 기사 끝쪽에 달린 조막만 한 문구를 보았다.

 

뛰어난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 전격 분석 :: 월간 밸리 다음 호 게재 예정!”

 

지금의 스도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기사였다. 해당 홍보 문구가 달린 월간 밸리가 이번 달 잡지이니 월간 밸리 다음 호에 스도가 원하는 기사가 실릴 예정이었다. 스도는 서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도가 다시 잡지를 뒤적이며 오이카와의 기사를 찾는 순간 적당한 세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콩콩 뛰는 심장 때문에 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을 옷차림치고는 지나치게 얇게 차려입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한번 바라보고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찬바람의 꼬리가 잘린 덕분에, 방은 비슷한 정도의 온기를 유지했다. 오이카와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스도의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스도는 목을 가다듬고 오이카와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어 곱게 접고 입김을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정을 거쳤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부모님, 여동생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천애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신경 써 준 걸까. 몸의 주인이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관계를 그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정의했다.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서 이제 성인이 다 된 마당에, 그것도 뇌사 판정을 받고 다른 사람의 뇌가 이식된심지어 기억마저 다른자의 병문안을 오는 게 평범한 걸까. 그것도 도쿄에서 여기, 미야기까지. 스도는 제가 생각하는 평범에 대한 정의에 자신이 없어졌다. 평범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개인별로 다르니, 오이카와에게 그것이 평범이라면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도는 빛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질 나쁜 사람처럼 웃었다.

기증자를 아는 사람이 오는 건 불쾌한가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스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오이카와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스도의 옆에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홀대에 닿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수액 백이 달려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말없이 지켜봤다. 스도를 찾아오는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스도가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이카와 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알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알고 싶었다. 거울을 보면 보이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어쩐지 금세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처럼 우수를 두르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라.”

어차피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그래. 좋아.”

오이카와는 스도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지못한 듯 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도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그러한 행동이, 저가 거울을 일부러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러다가도 스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심산인 듯 스도만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럴 때면 지금 자신의 얼굴혹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는 오이카와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늦게 온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찬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산스럽게 코트를 벗어 정리하고 면회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미안, 이와쨩이랑 얘기하다 보니.”

…….”

스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한 박자 느리게 ,’ 중얼거리더니 스도의 손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 이와쨩이라는 건 내 소꿉친구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괜찮아요.”

스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사과해야 할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것. 스도는 그 점에 있어 오이카와를 이해하고 싶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토비오쨩이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실제로 오이카와는 때때로 스도를 잘못 부르고 나서 빠르게 정정하곤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 스도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구름 없는 하늘이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달력을 봤을 땐 벌써 한 가을이었다. 줄곧 병실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수 없는 스도는 오이카와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가늠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계절 상관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리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스도는 다시 떠올렸다. 하야마는 여느 때처럼 이젠 짜증 날 지경인 운을 떼더니 약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퇴원합시다. 몸에 있던 찰과상, 외상도 다 없어졌고. 기억이 아직 부정확하지만,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 한 명에게 스도씨 내일모레 퇴원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딱히 퇴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스도는 망설여졌다. 퇴원하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 그는 기생충이었다. 스도는 틈이 나는 대로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이전 몸에 대한 기억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이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도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 토비오씨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죠?”

. 맞아.”

카게야마 토비오씨아니,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실래요? 카게야마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오이카와는 창가에서 눈을 옮겨 스도에게 향했다. 그는 스도의 환자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넌 이제 스도 하루나인걸.”

오이카와씨 말씀대로, 전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이카와씨가 듣기엔 웃긴 소리일지 몰라도, 전 카게야마씨를 알고 싶어요. 알고, 기억하고 싶어요.”

스도는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스도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바심이 커졌다. 지금 오이카와를 잡지 않으면, 그가 영영 스도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도의 병실에 찾아올 때도 그저 방문객이었고, 오이카와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도는 그와 영영 타인이었다.

저 내일모레 퇴원합니다.”

다행이네. 축하해.”

그러니까, 퇴원 날 딱 하루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저를 데리고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세요.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좋아.”

그러지 말고, 부탁드려요! ……?”

좋다고. 데려가 줄게. 단 하루 동안.”

오이카와는 어느새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도중이었다. 스도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심산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빨리 승낙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어안이 빠진 표정에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작게 퇴원 축하해중얼거린 후 밤색 코트를 날리며 나갔다. 스도는 그 뒤로 이틀 내내 오이카와가 데리고 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틀이 지난 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앞에 나오자, 오이카와가 약속대로 서 있었다.

약속 지켰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그는 어쩐지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도는 잡지에서 말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의 다양한 매력에 대해 떠올리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 사이에서 모델처럼 웃다가도, 여름 한 철의 햇빛이 어울리는 소년처럼 웃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스도를 데리고 간 곳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이었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봄고 지역 예선 결승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스도는 어쩌면 난생처음 올지도 모르는 지역 체육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이카와가 놓고 간다한마디 한 뒤에야 체육관 실내로 들어갔다.

TV 같은 곳에서 비춰주는 코트 사이드가 아니라, 한쪽 코트 뒤에 앉자 색다른 시야가 보였다. 스도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스코어는 2 1. N 고교가 이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밀집해서 앉은 곳에서는 응원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호루라기 소리와 선수들이 소리치는 소리, 그 외에 운동화 밑창과 바닥이 마찰하여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도는 체육관 내부에 응집한 공기가 답답했다. 답답한 심장을 죄이는 건 떨림이었다. 스도는 제 쪽에 보이는 N 고교 선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선수들은 모두 공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로 동료와 눈 맞춤을 하고, 감독과도 손가락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인 만큼 좌석은 드문드문 비어있을 뿐 그 외에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스도의 바로 뒤에서도 남자 두 명이 현 상황에 대해 중계를 하고 있었다. 스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터, 리베로, 미들 블로커, 스파이커코트에서 보니 좀 더 잘 알겠네요.”

…….”

오이카와는 스도와 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갑작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몰래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저를, 오이카와는 분명 꿰뚫어 본 것이리라. 스도는 괜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입을 다시금 열었다.

오이카와씨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포츠 잡지나 월간 밸리 같은 걸 병원에서 봤어요. 초보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속공이 성공해서 선수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장면이 보였다. 눈을 굴려 세터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도는 속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저런 역할을 하는구나. 공을 올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누구나 세터에게 공을 보낸다. 중요한 역이구나. 스도는 잡지 어딘가에서 본 코트 위의 지휘자라는 문구를 기억했다. 굉장한 기교를 부리거나 엄청난 음색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가 있음으로써 코트는 새롭게 태어난다. 공을 올리는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시합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스도의 손끝이 간지럽고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분명 배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손끝을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겠지. 스도는 뛰어 내려가 코트 안에 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심한 편두통이 신경을 좀먹었다. 이게 바로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거겠지. 스도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봤다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토비오도 세터였어.”

.”

짜증 나는 천재였지.”

오이카와는 이가 보이게 미소 지었다. 호전적인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댔다. 스도는 저가 병원 간호사에게 졸라서 얻어낸 월간 밸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이름은 월간 밸리 곳곳에 등장했다. 특히 오이카와가 적혀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뛰어난 세터이자 고향이 같은 중학교 선후배 두 사람에 대한 드라마는 흔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유일하다시피 한 월간 밸리 인터뷰는 스도가 가장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식 실업팀 선수도 아니고, 대학 배구팀 선수에게 그런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질문에 아주 간결한 단답으로 응한 카게야마도 대단하다 싶었다. 분명 고집이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많은 분이 원하셨는데요. 카게야마 선수에게 오이카와 선수란?

카게야마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한번 이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배구에서도 저번 시합 때 이겼던 걸로 알고 있고요.

카게야마 항상 저보다 저 앞을 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그 등을 잡을 때면 이기고, 놓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오이카와씨의 등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구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이카와 두 명 모두 이후의 인생이 더 촉망받는 인물이었겠지. 스도는 카게야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가 고집이 세고 목표 의식도 있으며 심지어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에는 매번 제 머리를 이파리 따듯이 똑 떼서 그날의 사고 현장에 도로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폐가 저를 거부하듯 숨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스도는 기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사진으로 보는 카게야마는 거울로 보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든 토비오쨩은 스도한테 몸을 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걸까요.”

오이카와의 어조는 상냥하면서도 냉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N 고의 세터를 쳐다봤다. 시합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2 2, 마지막 세트를 앞둔 상태였다. N고 세터는 몸을 풀며 동료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N고 세터가 한 번 빙긋 웃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

, .”

스도도 몸을 일으켰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는 말로 하지는 않아도 금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스도는 다만 그걸 느끼곤 했다. 카게야마라면 그 이유를 알았을까. 스도가 묻지 못하는 질문이 한두 방울씩 모여 마음속에서 이미 샘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음으로 스도를 데려간 곳은 센다이 기차역仙台駅이었다. 센다이역 내부로 들어갈 때 스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차로 가야 하는 곳인가요?”

걸어갈 수 있으면 기차역으로 데려오지 않아.”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스도는 멋쩍게 대답한 뒤 오이카와의 뒤를 마냥 따라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미야기 출신이나 대학은 도쿄에 재적 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12중 추돌 사고는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겪은 일이었다. , 도쿄역에 가려는 건가. 스도는 제 나름대로 답을 도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이카와가 건넨 기차표는 스도의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을 뿐이었다.

 

미야기현宮城県 센다이역에서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데라역山寺駅까지, 다이토大東산을 지나 약 한 시간 삼십 분. 스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에 탑승한 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도쿄역이 아닌 건 스도에게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데라에 카게야마 토비오와 관련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기차표를 건넨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도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오이카와가 그의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센다이시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아무런 제약 없이 높이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마주 앉아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도 마주 앉은 승객이 보였는데, 승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스도는 그 승객 중 한 명이 N 고의 리베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연달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배구 경기가 떠올랐다. 세터의 움직임과 공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스도는 하나하나를 꼼꼼히 떠올렸다.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창밖을 보다가 곁눈질로만 스도를 마주 봤다.

, 배구는 잘 모르지만.”

스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세터보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하는 건 스도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었다.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스도는 배구 초보자에 불과할 텐데저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우습게 여길 게 분명했다. 스도는 양 귀 끝이 보얀 온기를 띠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스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도는 내가 배구하는 걸 본 적이 있어?”

, 아뇨.”

그렇지?”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감정이 그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배구를 가볍게 논한 건 스도의 잘못이었다. 스도는 잡지에서 얻은 그의 지식으로 감히 카게야마인 것처럼그를 평가한 게 부끄러웠다. 스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지 않자,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위로라도 건네듯 부드럽게 말했다.

토비오쨩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네.”

카게야마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말한 대로야. 짜증 나는 천재.”

엄청 똑똑했나 봐요.”

오히려 반대야. 너무 멍청해서 힘들었다니까.”

스도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는 것에 왠지 모를 짜증이 일었다. 거울로 본 카게야마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족함 없는 얼굴이었고신분증 너머로 본 자신의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렸다오이카와가 표현하는 만큼 멍청해보이진 않았다. 스도가 짜증이 난 듯 눈가를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니야?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보다 멍청한 건 다 알고 있네요.”

말을 마치고 스도보다 더 놀란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스도의 눈을 피한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속으로 있는 힘껏 후회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의 억양, 어조 등 전부 스도에게 어색했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토비오쨩으로 잠시나마 착각이라 해도 된다면한 게 분명했다. 스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스도는 만약 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뭐가?”

토비오쨩이라 부르셔도요. 오이카와씨에게는 토비오쨩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이카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확고하게 선을 그어 놓았던 토비오쨩스도의 경계가 아주 잠시라도 허물어졌던 건 그의 실수였다. 또한 그 실수가 단지 순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님을 그도 스도도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스도.”

오이카와는 긴 공백 끝에 답했지만 스도는 그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나온다면 스도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도는 다만 작게 입을 내밀고 괜찮은데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행동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스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 두 명을 보다가, 그들이 내린 뒤에는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창가와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등성이 보였다. 다음 역인 야마데라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가을 후반부로 접어든 산은 붉고 노란, 때로는 주홍빛의 군집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스도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오른쪽 눈동자 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도는 이 풍경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여행잡지 어딘가에서였겠지. 본인이 한가롭게 여행 잡지나 들춰 볼 만큼 여유로운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산등성 사이의 움푹한 곳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냇물은 햇빛을 받아 시린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은 스도에게 어색했다. 마치 뒤바뀌듯 카게야마 토비오의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스도는 그 사실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눈으로 새하얀 하늘과 구름 안개가 드리운 산, 날 선 냇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오이카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스도에게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먼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스도 또한 그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스도는 입고 있는 잠바를 여몄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웃었다.

추워? 나약하네.”

오이카와씨야말로 코가 빨간데요.”

난 원래 코가 빨개.”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코를 한번 훌쩍였다. 얇은 셔츠에 코트 차림이니 추울 게 분명했다. 산에 올 거였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스도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기차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높게 굽이진 산길과 그 사이사이의 절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절도 언뜻 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꼭대기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춥다고는 하지만 이 계절에 눈이라니 농담이 심했다.

갈까.”

가다뇨?”

저곳. 토비오와 간 적이 있어. 야마데라山寺.”

그 이름 그대로, 산속에 이어지는 절이었다. 오이카와는 놀리듯이 정상까지는 1,000개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야 해. 스도, 괜찮겠어?’ 물었고 스도는 대답 없이 입을 내밀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알 수 없었다. 운동선수이니 그럭저럭 갖춰져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몸이 저를 잘 이끌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계단을 앞서 걷기 시작한 건 오이카와였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행이었지만 1,000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스도는 오르는 중간중간 자신이 올라온 길을 뒤 돌아봤다. 흰 눈덩이가 얼룩처럼 검은 산 주변에 퍼져 있었다. 스도와 오이카와가 내렸던 기차역이 이슬만큼 작게 보였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경련했다. 확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동자는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도는 다시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전 카게야마씨와 뒤바뀐 사람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사잇길로 난 절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직 산 정상의 사원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찬 공기가 온몸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왔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에는 코트가 잘 어울렸다.

제가 생기고 카게야마씨가 사라졌으니까요.”

…….”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오이카와씨 외에 다른 사람이 절 본다면 절 카게야마씨로 볼까요, 스도로 볼까요? 겉모습은 카게야마씨잖아요.”

넌 스도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스도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눈을 닦아놓은 돌계단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한심한데도 닦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카게야마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스도는 지금 느끼는 저의 감정이 맞는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맞든 맞지 않든, 그건 분명 스도의 심장을 쪼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정상에 놓인 정자에는 네모난 상자를 두르듯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마를 가를듯한 추위였다. 오이카와는 죽는소리를 내뱉더니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값비싼 코트가 나무 의자에서 튀어나온 조각에 헤집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도는 깊게 심호흡했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 테두리에 몸을 붙이고 숨을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 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바람 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눈은 이세계(異世界)의 물질 같았다. 산등성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콰 코, 눈 중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스도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선 그는 건조한 시야 안에서 눈처럼 투명했다.

토비오쨩이랑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오이카와씨도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웬 건방진 소리야?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스도의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스도는 말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현하고 산등성을 다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스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스도.”

.”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오이카와는 애원하듯이, 동시에 마치 이뤄지지 않을 걸 부탁하듯이 말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배구를 하라는 부탁은 스도이기에 하는 부탁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스도 하루나이기에. 문득, 스도는 산 사이에 걸친 투명한 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매번 스도를 조용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는 어떤 관계예요?”

중학교 선후배 사이.”

오이카와는 금방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다시 묻냐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이 하얀 입김에 뒤덮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입김은 그 자리에서 녹았다.

아뇨, 그거 말고요.”

스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스도의 눈동자와 겹쳤다. 그의 눈을 빛내고 있는 홍차 빛 눈동자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비추고 있었다. 스도는 바로 그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책에 적힌 문구를 읽듯이 스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가 거울에서 봤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조용했던 눈동자, 저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던 푸른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담기면지독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채색됐다.

 

 

 

 

 

 

미야기 역에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하늘 한쪽에 걸린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푸른색부터 보라색까지의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하늘에 펼쳐졌다. 오이카와는 기차역에서 나와 스도를 마주 보았다. 그는 조금 서툴게 웃었다.

조심히 가.”

스도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스도와 했던 약속을 지킨 그는 두 번 다시 스도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만날 수 있죠?”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스도예요, 아니면 카게야마씨예요?”

오이카와는 안타깝게 웃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이 그의 머리에 닿아 묘한 빛을 자아냈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조금 매만졌다.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가 결국 스도를 마주 봤다. 그는 마치 하야마처럼 운을 뗐다.

짓궂네. 토비오쨩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씨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오이카와씨도 그걸 알고 있고요.”

……갈게.”

오이카와는 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실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봤던 그의 등이었다. 스도는 오렌지빛에 휩싸여 가는 그의 등을 보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어깨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오이카와가 멀어질수록 오렌지빛, 주홍빛 하늘이 번져 땅을 덮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퍼지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못 본 건가. 눈을 한두 번 비비다가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그러지는 차들. 치솟는 불꽃.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살코기가 타는 냄새. 어그러진 모습으로 자동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귀 양옆에서 울려 퍼지면서 스도를 덮쳤다.

아악!”

스도는 그 자리에서 고꾸러졌다. 앞으로 주저앉은 스도는 심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 머리가 아팠다. 심한 통증과 구역질이 위를 덮쳤다. 토하고 싶은데 창자를 한 꺼풀씩 칼로 벗겨내는 것 같은 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강한 빛과 함께 장면 장면이 튀어나왔다. 스도의 피에 젖은 신분증. 오토바이 아래에 깔아뭉개진 청년의 모습. 청년이 쓰고 있던 헬멧 사이로 검붉은 빛 피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와 다리를 적시는 장면. 다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다리의 근육? 하얀, 흩어진 살점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것은? 뇌가 갈고리에 채인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며 스도는 의식을 끊었다.

 

 

 

 

 

 

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몸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하얀 공간이었다. 저 앞에 오이카와가 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얇게 입은 옷차림. 곧 죽어도 멋 부릴 것 같은 그는 여전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카와 주변으로 새하얀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옆을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앞의 사람만 보고 있었다.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쳤고, 저 앞에는 다른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홍차 빛 눈동자에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번의 그는 말이 없었다. 넓은 어깨가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쳐져 있기도 했다. 걸어갈 때마다 오이카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흰 공간 속의 그는 하얗고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걷던 중 천장혹은 하늘이라고 해야 옳을까에서 작은 솜 덩어리가 눈처럼 떨어졌다. 솜사탕을 일부 뜯은 것처럼 엉성한 솜 덩어리는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 솜 덩어리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의 몸에 닿아 녹았다. 그 순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걸어가며 솜 덩어리 하나가 몸에 닿아 녹을 때마다, 하나씩.

웃지 말고.’

오이카와가 서투르게 웃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양팔을 폈다. 팔에 닿아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오이카와가 서서히 명확해졌다. 멈췄던 기억의 시냇물이 소리 없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담갔다.

 

전 오이카와씨를 좋아하는데요.

「…알아.

오이카와씨는요?

글쎄.

「…그렇게 대답하는 거 반칙이에요.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말을 안 하시잖아요.

「…토비오.

 

배구, 계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엇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해.

 

그럼 오이카와씨를 만날 수 있나요?

 

 

 

 

 

 

나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백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셨나요. 괜찮으세요?”

그의 왼쪽 가슴에 명찰이 달려서 흔들거렸다. 하야마라는 이름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펜 라이트를 들어, 내 눈 양쪽을 번갈아가며 비췄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펜 라이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몸 이곳저곳이 아파서 몇 번 뒤척이다가 일으켰다. 방은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에는 C대 병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병원? 왜 병원에? 고개를 갸웃하자 햐아마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서류를 앞뒤로 뒤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가 귀 뒤로 빗어 넘기려는 옆머리가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이에요. 길가에 쓰러졌던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또 기억에 변화가 있으셨나요?”

쓰러졌다고요?”

.”

자동차, 사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함,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안경을 올렸으나 금세 다시 내려갔다. 그는 내가 말하기 전 적어도 열 번은 안경을 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요.”

……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야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종의 발작까지 일어날 것 같은 격양된 움직임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기억? 돌아왔냐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야마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더니 의자에 다시 천천히 앉았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열심인 것 같았다. 낮게 읊조리듯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보이거나, 무언가 환청이 들리거나 하진 않죠? 몸에 변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물감이라든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등

없는 것 같은데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야마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보았다. 숱이 적은 눈썹 아래로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해리성 기억 장애였습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게야마의 입을 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과거나 자기 신분 및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기억장애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의 행세를 하고, 본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중에는 새로운 이름, 직장, 주소 등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요.”

정체성?”

보통 자연적으로 회복합니다만, 기억장애 기간의 일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는 카게야마씨가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리성 둔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스도 하루나라는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가족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도 하루나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물론 그렇죠. 원래 그렇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그러니까, 그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게야마씨는

 

 

끔찍한 사고였다. 카게야마가 통증을 이기고 눈을 뜨자 주변은 불바다와 같았다. 치솟아 오르는 불길, 무언가 타는 냄새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이 귀를 메우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불꽃, 불길이 입을 벌려 차와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어지럽고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야를 둘러보았다. 몇 걸음 앞에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 한 대와 차 한 대에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의 헬멧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카게야마에게까지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는 기어코 구토하고 말았다. 그가 쓰러진 옆으로 피에 젖은 지갑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지갑에 손을 댔는지 카게야마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누군가를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지갑을 열고, 그의 신분증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는 여성과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 작은 여자아이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가족사진이었다. 신분증에는 사진 속 청년이 남성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미야기 현 소재 K 대학교 학생증. , , 하루, 카게야마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문득, 다리로 시선이 향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욱 심해져 절단된 것 같이 타는 통증이 번졌다. 검은 피칠이 된 다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본 다리 주변에는 타고 있는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살점? 벌려진 다리, 뿌연 시야 안에서 헤쳐진 저의 다리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쇠로 만든 종으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머물렀고,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울 것만 같은, 울고 싶은 감정의 불꽃이 심장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병원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씨는 그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도 하루나의 행세요?”

. 자신은 스도 하루나인데, 도대체 왜 자기를 자꾸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부르냐며. 몇 번 과격한 행동도 보였죠. 불안한 심리에서 표현된 행동화(Acting-Out)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타국에 계신 카게야마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격으로 온 오이카와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오이카와씨가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움직였다. 하야마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의 말에 따라 저희는 뇌 이식 수술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쳐서 당신이 스도 하루나처럼 느끼게 만들었죠. 강제로 현실을 들이대는 방법이 성공하리라는 법도 없고, 더 강한 충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다리는 정상이었고 스도 하루나로서의 당신이 회복할수록 다리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신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점뿐이었죠.”

다리. 카게야마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멍을 포함해 아직 피부가 완전히 수복된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하면 매끈한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야마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서류에 무언가 적어나갔다.

퇴원 후 오이카와씨와 외출을 한 당신은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무언가 더 궁금한 건 있나요? 기억에 혼란이 있거나 한 점은요? 기억장애 기간의 기억이 없는 건 정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야마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눈을 있는 힘껏 구기면서까지 웃는 게 정말 기뻐 보였다.

정상, 이라고요?”

카게야마는 따끔거리는 머리 한쪽을 짚었다. 단풍나무 위에 포개져 있던 눈 더미, 골목마다 숨어있던 절과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 조각 조각나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기억해내려 하면 오이카와의 안타까운 미소만 떠올라서 이어지는 조각들을 맞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씨는요?”

하야마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어요.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하야마가 주의를 주었으나 카게야마는 두 다리를 딛고 다시금 일어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외투를 걸치고 카게야마는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어서 가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자꾸만 재촉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웠으나 카게야마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야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씨?”

가야 해요.”

어딜 가시게요? 아직 안 돼요. 인지 사고 검사를 하셔야죠. 어지러우실 텐데.”

가봐야 해요. 오이카와씨를 만나야,”

카게야마씨!”

하야마가 막으려고 했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카게야마는 그저 달렸다. 마침 눈앞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뛰듯이 몸을 구겨 넣고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저 열리기 전에 뛰었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몇 번이고 본 오이카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환의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몸을 바람이 거칠게 덮쳤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절대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한 가닥씩 몸을 휘어 감았다.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데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씨!”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때렸다. 하이얀 솜 덩어리가 한두 개씩 흩날렸다. 어머, 이 시기에 눈?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말을 나누며 하늘 사진을 찍었다. 꿈에서와 달리 회색빛깔 하늘에서 찢긴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눈이 닿아 녹아도,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향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만날 수 없을 거야.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소리치고 싶은 입술이 은색 한숨만 연신 내뿜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엷게 웃음 짓던 그는 드물게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와 겹치고, 그의 손이 카게야마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배구를 하면 만날 수 있어.”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울기보다 미소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배어 나오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 사랑은 배구니까.”

 

 

 

 

 

 

 

 

 

- 해리성 둔주는 실존하는 기억장애입니다만 글 안에서의 내용은 픽션입니다.

- 해리성 둔주의 개념을 참고한 문헌 :

양 수 외(2013). 정신건강간호학. 서울, 현문사.

  * 월간 오이카게 3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내일, 오늘

 

 

  




 

좋아해요. 저와 사귀어주세요.”

미안,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오이카와는 몇 번째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난감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웃으면,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욱 형용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놓은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그런가요……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미안해.”

 

오이카와는 이어지는 질문이 불편했다. 말을 마치지 못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화제가 지겨웠고, ‘미안해다시 한 번 천천히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렸다. 연습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닦은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신는 것만큼 익숙하고 정해진 일이었다. 고백을 받는 일. 타인의 호의를 구체화한 언어로 전달받는 일. 다른 점은 오이카와의 대답뿐이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교정 뒤뜰 길 주변에는 버려진 쓰레기가 몇몇 개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거의 먹지도 않고 버려진 빵 부스러기도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쁘게 포장되어 전달된 호의를 살짝 맛보고 길바닥에 버린 꼴이었다. 버려진 사랑을 쓰레기라고 명명하는 건 오이카와 본인도 지나치다고 느꼈으나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오이카와에게는 의미 없는 존재였으니까.

춘추복 안쪽으로 바람이 서늘하게 치고 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쓰레기 몇 개가 나뒹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이카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 카게야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자친구를 좋아하세요?”

 

점심시간 도중이었다. 며칠 찬바람만 불다가 유달리 따뜻한 날이었고, 오이카와는 여자친구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가던 길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우유를 먹고 있던 카게야마를 만나, ‘우유만 먹는다고 키 안 큰다?’ 장난기 섞인 인사를 건넨 뒤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했다. 카게야마는 우유를 쪽 빨더니, 쪼그라든 우유 팩을 들고 물었다.

여자친구를 좋아하냐고? 당연하지오이카와의 입이 뻐끔거리는 걸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보고 있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도 아니었고, 오이카와의 대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금붕어처럼 몇 번 움직이던 입술을 닫았고, 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만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결국 그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다시 돌려준 후, 며칠 안 가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것까지 기억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 날과 비슷하게 따뜻한 날이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뜻했으나 동시에 몇몇 곳을 따갑게 찔렀다.

 

오이카와 선배.”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고, 체육복을 입고 있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연습에 늦어 뛰어가고 있던 건지 짧은 앞머리 사이로 이슬같이 투명한 땀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도 지금 가세요?”

토비오쨩이야말로 1학년이 이렇게 늦게 가도 되는 거야? 더 일찍 가서 공 닦고 체육관 청소하고 있지는 못하고.”

종례가, 늦게 끝나서.”

 

목을 움츠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게야마를 지나친 후, 오이카와는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작은 발을 힘차게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에서 기대를 품은 듯 상기된 목소리가 흘렀다.

 

오이카와 선배,”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이어질 말이 나오기 전에 일부러 심술 맞은 투로 말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샐쭉 내밀었다. 항상 하고 싶은 말혹은 하지 못한 말의 반 이상을 담고 있는 건 카게야마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할 거야. 해도 토비오쨩한테는 안 알려줘.”

괜찮아요. 옆에서 보기만 할게요.”

 

오이카와가 서브 연습을 한다는 말에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몇 마디 말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릴 때 오이카와가 몇 번 향했던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햇빛을 등지고 음영 진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그 입술에 대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는 사이 또 오이카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가 저를 말없이 바라보는 건 그런 표시였다. 카게야마는 지금껏 다른 이가 내비치는 그러한 표시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다만 오이카와는 달랐다. 되도록 오이카와는 웃어주길 바랐다. 체육관 안의 불빛도, 햇빛도 전부 흡수해 밝게 빛나는 그의 미소를 카게야마는 예쁘다고 느끼곤 했다. 그 미소가 저에게만 향하지 않는 걸 안 뒤로, 그는 어쩌면 카게야마를 타인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말과 표정에 집중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그의 어떤 말에 기분이 상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일방적인 불쾌에 맞부딪쳤다. 카게야마는 어찌할 바 모르고 그저 재촉하듯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 선배!”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등에 대고.

 

 

* * *

 

 

 

예정된 연습 시합이 곧이었다. 평소의 리시브, 서브 연습에 더해 부내 모의 시합도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연습 사이의 짤막한 휴식시간이었고, 오이카와는 선 채로 땀을 닦고 있었다. 같은 스타팅 멤버인 K가 놀리듯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 쟤 또 왔다.”

 

K가 고개를 까딱이는 곳으로 오이카와도 눈길을 돌렸다. 며칠 전 고백을 거절했던 여자아이가 체육관 창문 너머로 연습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와 보얀 얼굴이 약간 붉었다. 오이카와는 그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손에 빤히 잡힐 듯 보이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 감정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건, 오이카와가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불만인 것도 알고 있었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긴 후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3학년에서 나름 귀엽다고 소문난 애잖아? 여자친구 있는데도 좋대?”

 

또 다른 동료인 A가 물을 마시다 말고 K와 오이카와의 근처로 왔다. AK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아직도 몰랐냐,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1학년 신입생이랑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진짜? 오래갈 줄 알았더니.”

 

오이카와가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실 동안 AK는 오이카와의 지난 여자 친구들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그 모든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었고, 오이카와는 창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여자아이를 주시했다. 예쁜 미인상이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검고 긴 머리카락, 뽀얗고 하얀 피부. 굳이 말하면 오이카와의 취향이었고, 그녀가 고백하며 건넸던 쿠키는 맛있어 보였고받지도 않고 물렀지만좋았지만. 어째서일까.

오이카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이 다시 시작된다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머리에 붙은 땀을 덜어내며 생각했다. 왜 저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 자신은 있다. 어릴 적부터 시선을 끌었던 얼굴에 그 어느 것도 대충 하지 않는 성격, 오이카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좋은 인상에 대한 자신. 거기에 배구까지 잘하니, 인기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좋아한다거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금세 허물어질 정도로 옅은 인상에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 여자아이와 사귀면 즐거웠고, 재밌기도 했고, 그 아이들이 베푸는 사랑에 오이카와는 뿌듯했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즐겁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그들이 주는 사랑을 즐겼고, 그 사랑이 쉽게 떠나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본디 무의식 아래에서 사람에게 영원한 건 없었다. 카게야마의 한 마디가 있기 전까지, 오이카와에게 연애는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묻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거짓말이 싫었고, 그래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좋아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다가오는 그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었고, 거절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아이들을 떠올리며 저가 그들을 좋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 그만! 오이카와씨 이제 배구에만 집중할 거니까! 너희도 진지하게 연습하라고?”

이제 와서 오이카와가 그런 말을 해봤자

그치?”

너무하잖아!”

 

AK의 장난 섞인 웃음에 오이카와는 우는 시늉을 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연습으로 다시 능숙하게 이끌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 그에 맞춰 행동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말하면 인간관계는 능사였다. 오이카와는 연애를 할 무렵, 저가 친구들과 여자친구를 다른 존재로 대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점이 없었다.

 

 

* * *

 

 

오이카와가 연습을 하려고 공 하나를 들었을 때였다. 카게야마가 아기 병아리처럼 쪼르르 달려와 오이카와의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빛내며 서 있는 모습이 아기 새가 따로 없었다. 오이카와는 못 본 척 공에 집중했다.

 

오이카와 선배.”

, .”

 

이어질 말은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지겹게 반복될 실랑이에 벌써 지친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작은 동물을 내쫓을 때처럼 쉿, 쉿 잇사이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카게야마는 불만을 양 볼에 가득 물고 부풀렸다.

 

그런 행동 하면 고양이한테 미움받는대요.”

잘됐네. 토비오쨩이라는 성가신 고양이한테 미움받으면 참 좋겠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카게야마로서는 드물게 큰 의사 표현이었다.

 

아뇨, 저 말고 고양이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저리 가라니까. 오이카와씨 이제 연습해야 돼. 연습 방해하면 나쁜 어린이지요?”

 

아이를 타이르듯 어르는 목소리로 대화를 끝맺은 후 오이카와는 손에 들린 공을 한 번 돌렸다. 카게야마는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선배 몇몇의 화두에 오른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시선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오이카와 선배. 쳐다보고 있는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공에 이마를 맞대었다. 항상 서브 전에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오이카와가 서브 준비 자세에 들어가면 카게야마는 보통 숨을 죽이고 그 존재를 지우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그녀와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살짝 홍차 빛 눈동자를 들어 곁눈질만 카게야마에게 향했다.

 

? 연습에 방해돼?”

그런 건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앞머리가 흔들렸고,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체육관 조명과는 상관없이 빛나면서 오이카와를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친구 안 하시나요?”

 

오이카와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가 깊은 의미 없이 말했다는 것은 오이카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저를 몰아가는 착각이 일었다.

 

글쎄. 지금은 아니어도, 마음이 바뀌어서 사귈 지도.”

마음이 바뀌나요?”

당연하지. 바뀌지 않는 마음이란 없어.”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공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이마에 대었던 공을 떼어내고,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돌렸다. 착잡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구를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배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안 바뀌는걸요.”

 

카게야마는 알 수 없다는 듯 고민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가 쪽으로 올린 뒤, 머릿속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한 번 흘겨본 뒤 그에게로 다가갔다. 줄어드는 거리에 비례하며 점점 커지는 오이카와의 신체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움츠렸다.

 

그건 다르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쉽게 바뀌니까. 방해 그만하고 안 가면 토비오쨩 괴롭힌다?”

, 서브 가르쳐 주세요.”

카게야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오이카와 선배 방해 그만하라고.”

오이카와 선배, 죄송합니다.”

 

오이카와의 눈빛이 다른 빛깔로 바뀐 걸 눈치챈 킨다이치와 쿠니미 두 사람이 카게야마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카게야마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했으나 두 사람은 팔을 놓지 않았다. 두 명보다 키가 작은 카게야마의 쓸데없는 고집이었다.

지겨운 찰거머리야. 오이카와는 속 언저리에서 솔솔 풍겨오는 짜증에 입술을 씹었다. 공을 들어 올렸다. 체육관 조명이 전부 공 한 점에 모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이란 쉽게 허물어진다. 금세 빛을 잃는다. 잘 만들어진 타르트가 바닥에 떨어지면 한순간에 모양이 망가지듯이, 사랑이란 그러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화학작용이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활처럼 굽혔다가, 공을 강하게 내리쳤다. 손바닥에 전달된 충격이 전기와도 같았다. 팔 전체가 후들거리며 끝에 이어지는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작년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헤어진 이후 다른 남자와 함께 복도를 걷다가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자신감, 충족감. 오이카와는 그가 누구를 사귀든, 어떻게 지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렇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그와 사귀기 전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 옳았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는 없어지기 마련이고, 오이카와를 언제까지고 좋아하고 사랑해줄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사랑은 그중에서도 달콤함이 제일 짧았다. 이와이즈미와 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기에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는 관계였고, 그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영원하지 않은 관계일지라도,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이즈미와의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별로, 사랑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저가 조금은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모든 걸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고, 그런 확신이 들어 관계의 온전한 만족을 포기 하고 마는 저 자신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번 리시브 연습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연습은 종료될 예정이었다. 오이카와는 익은 토마토 빛으로 물드는 창가를 보면서, 그 여자아이가 아직도 서 있는 걸 바라봤다. 노을과 같이 붉은 볼이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곱게 빗어놓았던 머리카락 끝부분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잠시 울고 온 걸까, 눈동자가 붉었다. 혹은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는 그녀가 안타까웠고, 달려가 울고 있는 그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뿌리가 사랑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자신. 자연스레 누구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오이카와에게 사랑은 종이로 만든 케이크였다.

 

 

* * *

 

 

가끔 비가 오는 날이 이어졌다. 맑게 갰나 싶다가도 찌푸린 구름이 모여 부슬부슬 얇은 비를 뿌렸고, 몸에 닿는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틀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친 날이었다. 연습시합에서 키타가와 제1중학교가 21로 이긴 뒤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체육관 창문으로 보이던 그녀가 안 보인지 일 주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오지 않게 된 그녀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팀 동료들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저 관심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창밖으로 그 여자아이가 보인 건 아주 흔한 우연이었다. 오이카와가 서 있는 2층 복도의 창밖은 1층 뒷문 근처였고, 그녀는 검도부 주장과 함께 있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던 미소 대신 볼을 파스텔 색조로 물들인 미소가 보였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교복 치마를 힘겹게 꼭 쥐고 있던 손은 검도부 주장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 사귀고 있구나. 그럼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야 할, 이루어져야 할 일의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후련함까지 느꼈다. 억지로 침수시켜놓았던 죄책감이 멀리 날아가 버린 상쾌함이었다. 조금의 미소를 입가에 걸고 앞을 보자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 토비오가 평소보다 기대감에 찬 눈동자로 뛰어왔다. 체육복이 든 에나멜 가방을 보니 연습에 가는 도중인 것 같았다. 무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오이카와는 불현듯 좋은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저거 봐.”

 

오이카와는 창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쏙 내밀었고, 카게야마의 푸른 눈동자에 두 사람이 비쳤다.

 

뭐가요?”

저기 저 여자애.”

……?”

 

카게야마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그 입이 열리려다가 다시 닫히고, 입꼬리를 꼬물거리는 것이 영.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해.”

, 런게, 아니고

 

오이카와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카게야마는 몇 번 말을 더듬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적중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토비오쨩, 진짜 심각하네. 그때 토비오쨩이 말했잖아? 이번엔 여자친구로 안 하냐고

그랬었나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그때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제가 생각하는 만큼 카게야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눈가를 구겼다. 생각해 보면 카게야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사랑 관과, 마음의 불변성에 대한 주제 같은 건.

 

저 선배가 왜요?”

변하지 않는 마음은 없다느니, 그때 토비오쨩이 건방진 말을 하면서 이 오이카와 선배를 가르치려 들었잖아? 저거 봐, 다 변하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저런 거야.”

저 선배가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했나요?”

그랬, .”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잇지 못했다. 고백은 받았으나, 오이카와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 체육관 창문에서 바라봤으나 실제 어땠는지 오이카와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더 모를 일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바뀌지 않는 좋아도 있는 걸요.”

토비오쨩은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래.”

 

오이카와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보폭을 넓혀 카게야마보다 앞섰다. 평소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얹은, 가벼이 여기는 어조였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렇게 입만 삐죽 내밀다간 언젠가 입 삐죽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그걸로 또 놀릴 생각을 여러 가지 해보았다.

 

몰라도, 제대로 좋아하고 있어요. 오이카와 선배요.”

?!!”

 

다리가 휘청,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갈 뻔했으나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쳐다보자 작은 체구가 계단에 멈춰 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러세요?”

, , 좋아, 좋아한, 다고?”

 

한심하게도 혀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방금까지 삐죽이고 있던 작은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배구도, 카레도,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도 좋아해요.”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다. 배구나, 카레 같은 좋아’. 심지어 그것도 서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동시에 그 작은 머리 위를 꾹 눌러주고 싶었다. 감히 오이카와씨를 서브로만 평가해? 실제 오이카와가 머리를 누른 것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인상을 안 좋게 찌푸렸다.

 

가끔, 괴롭힐 땐 싫을 때도 있지만그래도 좋아해요. 처음부터 똑같은 걸요.”

 

처음부터, 오이카와의 존재와 만났을 때부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순간적인 기분의 흔들림과는 별개로 쭉.

아니, 아니 아니. 오이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배구나 카레와 같은 좋아라니까. 그럼에도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제대로 된 좋아였다. 카게야마가 아마 앞으로도 쭉 좋아할 배구와 카레. 가끔 지칠 때는 있어도, 질리고 싫어질 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카게야마에게 사랑일 배구나 카레와 동일하다고. 동일하다고.

 

근데 그거 서브잖아?!”

?”

 

카게야마는 반문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가, 지금은 흰 피부를 붉은 거품처럼 몽글 물 들이고. 오이카와는 역시 이상했다. 가끔, 아니 혹은 자주.

 

 

* * *

 

 

토비오쨩, 집에 같이 갈까?”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굽혀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등 뒤에 섰다.

 

너 이 자식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아니, 아니라니까? 이와쨩, 그런 거 아니니까 진짜 무서워. 그냥 같이 가는 것뿐이니까?”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이즈미가 눈빛으로 넌지시 괜찮은지 의향을 물었으나 카게야마가 알아챌 리 없었다. 오이카와는 뒤에 있던 이와이즈미를 벗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전 소리가 났다.

 

가는 길에 만두 사줄까?”

!”

먹는 걸로 꼬셔서 뭐하려고?”

아니, 이와쨩 왜 그런 생각만 하는 건데. 늦었으니까 바래다주는 거라고?”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빛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가자, 이를 보이며 웃은 뒤 앞서 걸었다. 가방을 고쳐 맨 등이 카게야마보다 두 뼘 정도 컸다. 걸친 재킷에는 키타가와 제1중학교 배구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고 바라봤던 등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볼을 물들이면서 뒤를 쫓았다. 뒤따라오는 카게야마를 바라본 오이카와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어있었다.

 

 

, 뜨거우니까.”

감사합니다!”

 

만두를 한 개씩 사 들고 걸어가는 길목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점점이 퍼진 가로등 불빛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윤곽을 비췄다. 오이카와는 만두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카게야마의 볼에 닿아 촉촉이 젖는 걸 보면서, 작게 물었다.

 

토비오쨩은 집이 어디야?”

저기요.”

 

카게야마가 가리킨 곳은 골목 안쪽 주택가의 한 지점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나 거리상 멀지 않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문 카게야마의 발음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가깝네.”

오이카와 선배는요?”

거기서 15분 더 걸어가야 해.”

가깝네요.”

가까운 거야?”

못 만나는 거리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러네. 오이카와는 끄덕였다. 말로는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느덧 만두를 한입에 다 넣고 양쪽 볼 주머니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을 열면 만두가 튀어나오려는지 작은 입을 양손으로 누르면서 입안을 열심히 움직였다. 햄스터 같은걸, 오이카와는 생각하면서 카게야마 입술 옆에 붙은 만두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

 

말로 하지 못한 당황이 카게야마의 얼굴에 번졌다. 입을 열려고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손가락을 떼지 못하고 왜 그런 걸 먹어요라는 눈빛만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양팔을 잡아 끌어당긴 뒤, 보이는 작고 모양 좋은 귀에 속삭였다.

 

토비오쨩은 내가 서브 평생 안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할 거야?”

 

온기를 담고 있는 입김이 귓속의 솜털을 간지럽히자, 물감이 퍼지듯 귓바퀴를 따라 귀 전체가 천천히 붉어졌다. 귓불을 조금 세게 꼬집으면서,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었다.

 

토비오쨩 귀 붉어졌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눈가를 찌푸린 뒤 만두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작은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귀로 옮겼다. 작은 주먹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방해했다.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노려보면서, 카게야마는 작게 투덜거렸다.

 

지금도 안 가르쳐 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 카게야마의 말에 동조할 일이 잦았다. 카게야마와 그만큼 많이 마주 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갸우뚱하는 고개, 불만이 담긴 눈동자, 삐죽 내민 입술 모두 지금의 오이카와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카게야마의 저러한 버릇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제 귀를 감싸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맞잡고,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몇 번 주물렀다. 아기같이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냥,

 

그럼 오이카와 선배가 싫어지지 않겠어?”

 

카게야마는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내렸다. 흘러내린 가로등 불빛이 검은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가라앉았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고요한 적막이 카게야마의 입술 끝에 잠시간 머물렀다. 비가 그친 뒤 물기를 머금은 바람 한 점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맞잡은 손 사이를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지금껏 저와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사귀었던 여자친구, 이제는 싫어진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렸다. 이와이즈미와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오이카와는 제가 생각하는 온전한 이해와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없는 거라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이랑 달라질 게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까요?”

 

카게야마는 고민을 마친 듯 눈동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푸른, 별 몇 조각이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 중 한 가지였다.

 

오이카와 선배는 여전히 대단한 사람이고, 서브는가르쳐주시면 좋겠지만 안 가르쳐 주는 건 지금도 똑같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달라지잖아. 내가 언제까지 대단한 선수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단순히 토비오쨩이 나에 대한 마음이 훅 바뀔지도 모르고?”

 

오이카와는 그런 말을 하는 저가 이상했다. 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제까지혹은 언제 즈음. 오이카와는 저를 좋아하냐고 집요하게 물었던 지금까지의 여자 친구들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안 바뀌어요.”

 

카게야마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앞선 질문보다도 망설임이 없었다. 입술에 만두 부스러기를 붙인 꼬맹이가 당돌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불룩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장담해? 토비오쨩 미래 보고 왔어? 아직 꼬꼬마가 그렇게 책임도 못 질 말 막 하면 안 되는데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들어 카게야마의 이마를 꾹 눌렀다. 카게야마의 인상 쓴 얼굴이 뒤로 밀렸다가 다시 되돌아오자, 그 이마에 붉은 점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붉은 이마를 문지르고 싶었으나 오이카와에게 양손을 잡힌 상태였다.

 

미래는 모르지만지금은 안 바뀌는 걸요. 지금은 어제였고, 그저께였으니까, 내일이나 모레도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매일 매일 지나면 결국 안 바뀌는 거잖아요.”

토비오쨩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안 해?”

? 해요. 내일 저녁 메뉴는 카레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내일이면 오이카와 선배가 미워질지도 모르잖아?”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건 전부 지금이랑은 상관없는 얘기인 거 같아요. 빨리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오늘 저녁도 카레인데.”

 

카게야마는 이야기가 지겨운지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몸을 배배 꼬면서 저의 집 쪽으로 틀려는 걸 오이카와가 제지했다.

 

요 녀석, 선배가 얘기하는데! 그리고 너희 집은 매일 저녁이 카레냐! 얼마나 좋아 하는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당겼다. 찹쌀떡처럼 죽 늘어나 카게야마의 입이 벌려졌다. 우우, 아하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작은 손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웃고 말았다. 늘어난 볼을 놔주고, 머리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밤이 녹아, 카게야마의 우주 같은 눈동자와 어울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집에 가야지. 토비오쨩은 어린아이니까.”

…….”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을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빨간 코끝, 홍차 빛 눈동자와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봤다.

 

?”

, 오이카와 선배만큼 대단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

, 고마워?”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지만, 이상한 칭찬에 이상한 대답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머리 위를 쓰다듬던 오이카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카게야마의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담긴 수많은 별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안에서, 유성군처럼 떨어지는 별똥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면이 뒤집힌 것처럼 몰려드는 어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밤하늘이 오이카와의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달 웅덩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카게야마 주변으로.

 

어머니가 그랬어요. 그 선배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구 선수가 더 잘하지는 않냐고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에게 대단한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인걸요. 앞으로도 계속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제 손바닥까지 적셔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뜨거움이 전달되고 제 심장이 눅진하게 녹고 있는 걸 느꼈다. 카게야마가 뜨거웠다. 종이 케이크가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진짜 생크림과 과일로 덮이고 있었다.

 

토비오쨩그렇게 칭찬해도 서브는 안 가르쳐 줄 건데.”

.”

 

카게야마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전기가 한 차례 몸을 돌고 오이카와의 시야를 흔들었다. 그렇기에, 오이카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토비오쨩의 좋아는 어느 정도 오래 갈 것 같네. 어느 정도는.”

진짜예요. 자신 있어요.”

 

무슨 자신인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빛나는 눈동자를 손으로 한번 훑었다. 속눈썹, 눈꼬리까지 달빛을 한바닥 머금은 눈동자를. 오이카와의 머리 위에 뜬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람개비처럼 오이카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천천히, 조금 빠르게.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온통 카게야마가 흩뿌려놓은 별 가루로 가득했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내렸다. 양 볼이 마주 잡은 카게야마의 손만큼 뜨거웠다. 이끌리듯 카게야마의 눈꼬리에 키스하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꼭 잡았다.

 

한입에 집어넣은 카게야마의 케이크는 의외로 잊지 못할 맛이었다.












 약한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월간 오이카게 합작 홈의 편집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Love Actually








  소리 없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퐁당, 퐁당 액체가 물과 만나 작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그 파도는 변기 벽에 부딪혀 스러졌다.

  “우, …윽. 하아, 하아… 욱.”

  변기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타는 듯한 목을 타고 올라온 건 노란 신물이었다.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부여잡고 꼭꼭 짜내는 위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물과 섞인 침 몇 방울이 이미 더러운 변기 물에 떨어졌고, 오이카와는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와 찌릿한 코를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으나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표정. 공을 들고 서 있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박제된 나비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입과 코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다시 울렁거렸으나 오이카와는 손 한 번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카게야마는 돌고 돌았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오이카와 선배” 낮게 말한 뒤 오이카와에게 공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한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이카와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서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코 안을 깨끗이 씻어내자 하얀 덩어리와 침, 일부의 노란 신물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전부 쓸려 내려가면 될 일이다. 내장 구석구석에 붙은 토기(吐氣)도, 머릿속에 박제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내려앉았다. 세상이 하얗게 번지는 것이,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뿌옇고 제 모습조차 흐릿한데도, 머릿속 카게야마는 속눈썹 한 올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는 공을 매만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자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자리로 휙 가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만, 오이카와는 길게 바라봤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빛을 냈다. 오이카와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가락을 댔다. 며칠 전 병원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심전도검사, X-ray 등 몇몇 기초적인 검사 및 활력 징후까지 확인했으나 오이카와에게 이상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극히 건강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박동을 느꼈다. 뚝, 뚝뚝뚝, 뚝뚝뚝. 끊어질 듯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빠른 맥박이 이어졌다. 누가 만져 보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심장이 과도하게 팽창해, 폐를 짓누르는 탓일까. 혹은 여름 특유의 짭조름하고 답답한 공기 때문일까. 숨쉬기가 힘들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찮냐.”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가?”

  매만지던 공을 몇 번 바닥에 내려쳤다. 오늘도 해야 할 연습이 많았다.

  “네 표정 장난 아냐.”


  “또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서는 걱정 끼가 묻어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좋은 친구지만, 오이카와는 가끔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건, 이미 생긴 구멍을 후벼 파 넓히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그저 웃어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 하든 소용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브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심장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살을 찌르는 직사광선이 온통 저에게로 모이고, 등이 탈 것처럼 뜨거운 태양 탓에 다시 숨이 막혔다. 후, 후우. 들이쉬고, 내뱉고. 억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과도한 심박 수와 산소가 부족한 뇌 때문에 다시 토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바라봤다.


  연습 전 마셨던 스포츠 드링크가 그대로 나왔다. 연한 소다 빛깔의 좋아하는 음료수였는데.

  “하아….”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변기 물을 내렸다. 심한 심박동으로 울렁거림을 느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현재 오이카와가 겪는 증상이었다. 오이카와는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심장병’을 검색했다. 심계항진, 부정맥, 심근경색, 협심증 등…… 오이카와가 느끼는 증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심장의 고통,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건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처음 들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서브를 가르쳐 주세요.”

  어떤 부탁 조도, 애원하는 말투도 아니고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왜?”

  오이카와는 화가 나 있었다. 선배로서 응당 후배보다 침착하고 후배를 이끌어줘야 한다, 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와이즈미가 들으면 다르지 않다 말하더라도 오이카와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배우고 싶어요.”

  “관심 없어.”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붙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 뒤뜰에 울렸다. 뒤뜰에 심긴 나무의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 먼지처럼 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이카와의 머리가 울렸다. 손발이 조금 떨리면서 식은땀이 등 뒤로 배어 나와, 오이카와는 약한 오한을 느꼈다. 다리, 발목, 복부, 귀 뒤 등 여기저기에서 박동치는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로 인해, 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초원과도 같이 넓은 평원에는 보랏빛 풀이 번져 있었다. 깊은 밤과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 풀빛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차가웠다. 폐가 찢기듯 차가운 공기 탓에 오이카와는 꿈인데도 목이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느꼈다. 저 앞 초원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실루엣만으로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공을 들고 서 있었다. 흰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에 짧은 앞머리. 동그란 눈동자까지, 오이카와가 아는 카게야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빛도 없는 검은 꿈 안에서, 카게야마의 주변에만 반딧불이 몇 마리가 떠돌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카게야마의 말간 이마와 노란 빛깔의 팔, 흰 운동화까지 비췄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입을 연 카게야마의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뒤 그 몸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넘어진 카게야마의 아래로 보랏빛 풀이 흩날리고, 흰 티셔츠는 이슬방울에 젖어들었다. 카게야마 주변의 반딧불이는 흩어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흰색 가루가 총총히 박힌 검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을 힘주어 눌렀다. 배구공을 놀리는 오이카와의 악력이 결코 서툴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괴롭지 않은 듯 오이카와를 두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에 맞닿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보드라웠다. 톡 오른 복숭앗빛 입술이 기억 속에 떠올랐고, 제 손 아래에 짓눌린 게 그 입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이카와의 허리 주변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이 맞닿았고, 카게야마의 심장과 오이카와의 심장이 한 소리로 박동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제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유성우 무리가 소리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고, 초원의 밤은 광활한 우주와 같이 별의 죽음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왜?”

  오이카와는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야.”

  보랏빛 풀이 누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초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왜 나야. 왜 너고, 왜 나야. 어째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에 맞춰 오이카와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슬이 묻어 머리카락이 젖어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수술용 칼이 들려있었다.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에 대고 조심스레 긁자, 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선이 생기고 그 안으로 솜털이 오른 속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토기가 밀려왔다. 동시에 기대감도 있었다. 이 칼이 저 자신에게 닿기 전에 해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도 들었다. 오이카와는 실선 사이에 손을 넣고 흰 티셔츠를 벌렸다.

  카게야마의 폭신한 살결에 닿고, 조금 힘을 주어 칼을 내리그으면 말랑거리는 젤리처럼 피부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술용 칼에 달라붙는 피부조직을 떼어내면, 노란 빛깔의 동글동글한 지방과 갈비뼈 위에 겹쳐진 엷은 핑크 빛의 근육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총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어 나오는 장막 액과 혈액이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를 적셨다. 점점이 퍼지는 붉은 꽃잎이 카게야마의 가슴에서부터 퍼졌다. 근육에 손을 대보면 강한 박동이 갈비뼈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는 호흡곤란 때문에, 오이카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칼을 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렸다.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기분 나쁜 꿈이었다.




  “너 연습 할 수 있겠어?”

  “완전 괜찮다니까. 이와쨩 자꾸 왜 그러실까.”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은 뒤 체육복으로마저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놈이 말은 잘하네. 이와이즈미는 옷을 대충 구겨 접고 사물함에 넣었다. 새벽 2시에 오이카와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는 ‘혹시 자?’ 한 마디였다. 아침에 그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요 며칠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를 만나면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도 자주 있는 모습이었다.

  “이와쨩?”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탈의실 입구에 서서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이와이즈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서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미 아주 옛날 일이었다.

  ‘누구야, 쟤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던데. 이름이 독특했어. 카게… 뭐였지.’

  ‘카게야마 토비오쨩.’

  ‘알면서 물어본 거냐!’

  말 그대로 첫 만남 때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꽤 길게,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이카와의 그런 눈빛은 이와이즈미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었다. 오이카와가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부원이 연습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넓은 체육관이 사람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등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작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수많은 인원 사이에서 작고 검은 머리통이 오이카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꿈을 기억해냈다. 꿈에서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풀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인사가 마저 끝나기 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의 입술에서, 항상 다른 부원의 이름만 오가던 입술에서 저의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눈동자를 크게 뜬 뒤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다음 경기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료수, 주문하러 가자.”

  다음 경기용 음료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미리 정해놓은 매장에서 직접 공수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더더욱 연습 시간에 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부르자, 카게야마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공을 바라보고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이후 네, 작게 대답한 뒤 저가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공을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손이 꿈에서보다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육관의 2층 창문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카게야마의 볼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성우도 검은 밤도, 낮의 햇빛도 카게야마 주변을 돌고 돌았다. 카게야마는 지나치게 빛나는 존재였다.



  파란 하늘, 한두 번씩 울리다가 멈추고 다시 일제히 이어지는 매미 소리가 더웠다. 팔에 닿은 공기가 끈적거렸고, 눈에 닿는 초록이 부셨다. 길가에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바닥에는 매미 허물과 떨어져 죽은 매미 사체 한두 개가 보였다. 하수구 주변에는 진물이 번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서 걷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작은 볼이 더위 탓인지 조금 붉었다. 보폭 차 때문에 오이카와가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에서 네 걸음을 걸어야 하는 카게야마의 발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가슴을 새가 쫀 듯 강한 흉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시야에 현기증이 맺혔다. 올라가는 심박동과 여름의 습습한 공기가 기도를 눌렀고, 다시 호흡곤란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서브, 옆에서 연습하는 거 봐도 될까요.”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돼.”

  오이카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조금 충격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야.”

  꿈에서 물었던 말이었다. 왜 오이카와여야만 하는가. 왜 카게야마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왔고, 왜 오이카와는 그의 2년 선배이며, 왜 오이카와의 서브여야 하는가. 옆에서 걷던 카게야마가 재빨리 다리를 굴려 오이카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졌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보면 가슴이 뛰니까요.”

  “가슴이 뛴다고?”

  “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작은 손은 꿈에서 오이카와가 갈랐던 카게야마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 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세어 보았다. 뚝, 뚝뚝뚝… 지나치게 빨랐다.

  “어떻게 뛰는데?”

  “네?”

  “가슴이, 어떻게 뛰냐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고민하듯 머리를 갸우뚱해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어. 두근두근… 하고요? 오이카와 선배가 서브를 치려고 뛰어오르면, 체육관 안의 빛이 전부 오이카와 선배한테 모여서, 약간 눈이 부시니까 눈을 세게 뜨고 봐야 해요.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움직이고, 공 소리가 울리고 나면 가슴이 뛰어요. 강하게.”

  매미가 울고 있는 공기 속에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갔다. 그 속에 또, 카게야마의 심장 고동이 함께. 오이카와는 꿈에서처럼 손을 대지 않아도, 가슴을 맞닿지 않아도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빛 볼, 동그란 어깨에 떨어지는 태양 빛은 카게야마의 색과 섞여 부드러운 여름의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의 검은 밤, 아니 짙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는 오이카와를 담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공을 들고 있던, 꿈에 나왔던 카게야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낮에, 나무 한 그루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마주칠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박동치던 심장은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심장은 거짓말쟁이인 오이카와를 심하게 힐책하고, 오이카와의 전신을 뒤흔들어 놨으며, 카게야마의 앞에서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오이카와는 테이핑 되어 있는 검지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그곳에 오이카와의 심장이 있었다.


  "여기가 멈추면, 가르쳐줄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겹치고, 코끝의 한숨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보다 뜨거웠다. 질식해서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 심장이 그렇게도 소리친다면, 오이카와도 평생 거짓말쟁이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멈추면, 토비오쨩이 원하는 거 전부 줄게."

  그때까지는, 심장이 오이카와에게 굴복하기 전까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줄 이유'가 없었다.

  달콤한 한숨 한 번까지도.




  * HAPPY BIRTHDAY TORU!






다시 태어난 여름








카게야마는 꿈을 꿨다.

 

바닷속에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고, 보석같이 작고 파란 물고기 떼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지며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카게야마는 나신으로 바닷속에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이 기분 좋아 눈을 살포시 감았다. 볼과 가슴, 허리에는 보드라운 물의 손길이 닿는 듯하면 떨어졌다.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로 카게야마는 멈춰 있었다. 바다 위쪽으로 약한 바람이 불었고, 가끔 물살이 흔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언뜻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건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작은 드럼 소리가 들리는 재즈 음악이었고, 아버지가 즐겨 듣는 건 오래된 팝송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음악을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물방울 소리, 찌잉 머리를 달구는 햇볕의 뜨거움,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잠꾸러기 토비오쨩.”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오이카와가 샐쭉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듯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우린 홍차와 같이 예쁜 색의 머리카락, 형태 좋은 눈동자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조금 붉었다. 카게야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그나, 방금 잠에서 깬 카게야마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꿈에서 나신인 이유가 이거였나.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꿈 때문에, 카게야마는 의도치 않게 조금 웃었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웃어?”

지금 몇 시예요?”

일어나서 오이카와씨 얼굴을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옆에 있는 시계를 보시던가요.”

 

고개를 돌리니 작은 탁상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830.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가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행지에서 오이카와씨 혼자 밥 먹게 하려는 거야?”

아뇨, 배가 고프시다면야

됐고, 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이카와는 데구르르 표정을 바꾸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단단한 근육의 조합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에 맞춰 상체를 올렸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벗어나 왼쪽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나신 뒤쪽으로 투명한 통유리 창문 2, 그 너머로 하얀 베란다가 보였다. 아침의 태양 빛을 받아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연초록과 하늘색을 섞어놓은 바다는 지평선과 맞닿아 뿌연 경계선까지 뻗어있었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하얀 베란다까지 온통 새하얀 숙소는 커다란 배구공 안에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갈 거야?”

 

오이카와는 하얀 반소매 셔츠에 속이 비치는 민트색 칠 부 카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아색 면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뇨, 일어났어요. 그냥

 

꿈을 꿨어요. 뒷말을 삼키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기댔다. 오이카와의 숨소리에 따라 솟았다 가라앉는 오이카와의 배가 기분이 좋았다.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나왔던가, 안 나왔던가. 바다가 나왔단 건 기억이 나는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뱃속에서 낮은음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얼른 가자. 나도 배고파.”

 

오이카와는 어루만지던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부축하듯 톡톡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파도치는 소리가 시계 소리 사이사이로 들렸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바다를 보러 온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

 

 

남쪽 섬에 가자고 얘기를 꺼낸 건 오이카와였다. 기간은 719일부터 21일까지,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로 이틀. 3일의 여행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야기를 벗어나고 어디에 도쿄가 있는지, 오사카 혹은 삿포로가 있는지 등 지리에는 무심했다.

 

일본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라, .’

 

오이카와는 질렸다는 식으로 카게야마를 걱정스레 쳐다봤고, 카게야마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로 응수했다. 오이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야.”

?”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권 준비해놔.”

?”

외국이라고.”

 

설마 생애 첫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남쪽 섬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남쪽 섬인지, 위도 및 경도는 몇 도이며 어떤 문화가 있는지 등. 카게야마가 여행지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건 영어를 쓰는 나라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여권을 찍기 위해 갔던 사진관에서, 좀 더 웃으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던 사진사를 떠올렸다. 30분을 들여가며 힘들게 찍은 여권사진을 보고 오이카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찍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여권 사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찍었다고 하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 앳돼 보였다.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여권과, 카게야마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여권에는 같은 마크가 찍혀있었다. 새삼 카게야마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어를 쓰는 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와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다는 식으로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에, 같이 여행이라니. 얼마나 복 받은 건지 알라고,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호텔 1, 바닷가가 보이는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석에 앉았다. 6층 위, 같은 자리에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숙소가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연청빛 바다가 보이는 자리였다. 짚을 엮어 만든 듯 곳곳에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는 의자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선택한 자리에 앉고 바다를 바라봤다. 머릿속 바다보다도 에메랄드빛이 진했다. 연둣빛 바다가 흔들리고, 레스토랑에서 보아도 속이 비쳐 보이는 바닷속에는 암갈색 바위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물고기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지, 전날 저녁에 보였던 파란색에서 형광 노란색, 장미처럼 붉은색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백색과 상아색이 섞인 해안가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 무리가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 파라솔을 펴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 무리,카게야마가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쨩.”

 

어느새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앞에는 망고주스가 놓여있었다. 크고 투박한 얼음 두세 개가 동동 떠 있는 유리잔은 노란 빛깔로 채워져 있었고, 같이 나온 망고 1개는 반으로 잘려서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없어?”

 

떠보는 듯이 묘한 웃음을 띄우고,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고막 안을 채웠다. 카게야마는 오늘이 여행 둘째 날인 걸 떠올렸다.

 

생일, 축하해요.”

, 고마워.”

 

오이카와는 그제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자리한 입술에는 망고 주스가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도 앞에 있는 망고 주스를 한 입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밥 먹으면 바다를 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집에 가도 생각날 것 같다며?”

오늘 태어난 오이카와 선배랑 같이 보고 싶어요. 어제의 오이카와 선배랑 오늘의 오이카와 선배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네. 28년 전 난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오이카와 선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토비오쨩은 태어났겠지. 2년 뒤에.”

그러면 혼자서 이곳에 앉아있을까요. 혼자서 바다를 보면서.”

평행 세계의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만약의 이야기예요.”

글쎄. 그렇다면 토비오쨩은 방금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망고 주스를 시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숙소에 묵지도 않았겠지.”

 

카게야마는 그런 자신을 상상했다. 이 숙소에 묵지 않고, 바다를 보러 가지 않고, 망고 주스를 먹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 조건은 단지, 오이카와가 없다는 것뿐인데.

 

 

오이카와 선배가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바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오이카와 선배가 없었다면, 바다가 저런 색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망고 주스가 이렇게 달다는 것도. 아주 많이, 몰랐을 거예요.”

나도 몰랐을 거야. 토비오쨩이 망고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파도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똑같네요. 카게야마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

 

 

오이카와는 신발을 벗었다. 하와이안 꽃이 그려져 있는 샌들 한 짝을 손에 들고, 희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앞을 보면 오이카와의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바닷가를 향해 난 야자수 나무 그늘은 백사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파라솔을 펼친 몇 사람들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다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봤던 것보다 선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물살이 몰려드는 소리, 백사장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손톱만 한 물고기 몇 마리, 속눈썹을 무겁게 누르는 햇볕

 

바람이 기분 좋아.”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디건을 벗은 그는 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목을 타고 흐른 땀 몇 줄기가 셔츠 윗자락을 적셨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예쁜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

 

카게야마는 끄덕이며 대답한 후 오이카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볍게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와있는 이 여행에 대해서, 바다에 대해서, 오이카와의 생일에 대해서, 카게야마를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게 작은 심장 안에 꼭꼭 담겨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건 짤막한 단어 몇 마디였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선배.”

토비오?”

그냥, 다행이에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 선배여서.”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저보다 2년 먼저, 배구를 하는 사람으로.”

, 고마워.”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깊숙이 굽히며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 뒤로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렸다. 하얀 파도 빛깔과 오르는 물거품, 오이카와의 오뚝한 콧방울의 땀 몇 방울이 투명했다.

카게야마는 꿈을 기억해냈다. 바닷속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오이카와와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간 물고기와 남쪽 섬의 태양에 대해서도. 모두 오이카와가 태어났기에, 이곳에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카게야마는 웃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백사장 모랫바닥에서 열이 올라, 그 열이 오이카와의 몸을 돌아, 살아있는 온기로 카게야마에게 전해졌다. 카게야마를 울리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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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입니다 ㅠㅠ
멋진 합작 홈페이지는 여기 ▶ http://gywjd1555.wixsite.com/merrysummer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신 치리님 감사합니다!! >.<











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사망소재 주의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괴롭지 않게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서둘러 지나면서 생각을 털었다. 뛰어가는 오이카와의 옆으로 외제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잠시 주춤한 뒤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을 좋게 떠나는 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었다. 서점에는 요즘에서 안락사에 대한 책이 즐비해 있다. TV를 몇 번 돌려보면 여러 가지 죽음의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죽음, 사고 현장의 사망자 통계,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좋게 헤어지는 방법 등

오이카와는 드라마 속 배우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빗속을 뛰어가면서 그 표정을 조심스레 흉내 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단 건 알 수 있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봤다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발아래에서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튀겼다. 저번 주에 산 새 구두가 몹쓸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라는 글자가 왼쪽 귀 언저리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양 귀에 이어폰을 낀 듯 그 이름은 금세 머리 전체에 퍼져 카게야마와 연관된 몇 가지가 줄줄이 낚여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그중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이미 부유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했다.

 

 

**

 

 

잘 모르겠어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다는 말은 카게야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한쪽 입 끝을 오므리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작은 식탁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카게야마를 다리 사이에 끼면 어제 세탁한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조금 달콤한 솜사탕 향, 오이카와의 취향이었다.

생각해야지. 이후의 일.”

고집부리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 건 오이카와씨잖아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오이카와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가늘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요 근래 입에 제대로 대는 것이 없었다.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면 장골능이 오이카와의 허리에 닿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단단한 근육을 짓누르고, 카게야마는 약간 오이카와에게 기대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플라스틱 식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두른 카게야마의 팔을 풀고 얇은 팔을 덮는 티셔츠의 소매를 올렸다. 두 개로 곧게 뻗은 뼈는 보기에 좋았다.

요새 많이 건방져졌다? 이 오이카와씨한테 그런 말도 하고.”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제 팔을 힘겹게 빼냈다. 앞서 목에 둘렀던 팔을 재차 허리 뒤로 둘렀다. 검은 고양이 같았다. 두 검은 눈동자가 동그라니 떠서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고, 얇은 몸을 오이카와에게 천천히 부비적댔다.

지낸 시간 보다 이후의 시간이 더 길잖아.”

오이카와는 쓴맛을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방금 마신 커피는 평소보다 씁쓸했고, 평소 사던 원두가 아닌 걸 이제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매달린 팔이 힘겹게 풀리려고 해서, 오이카와는 그 허리를 더욱 지탱했다. 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갖다 대자 모난 뼈가 잡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전 상관없어요.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쟁이인지는 몰라도, 전 지금 정도면 됐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실핏줄을 닮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오이카와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물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식탁에 내려놓자, 플라스틱 식탁은 버겁다는 듯 날 선 소리를 냈다. 엉덩이 밑에 갖다 댄 손에는 카게야마의 청바지 촉감이 까슬하게 닿았다. 뒷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천천히 만지자, 카게야마는 하지 말라는 듯 오이카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지금은 언젠가 사라지잖아. 네가 말한 지금은 이미 방금 전이 됐고, 몇 분이 지나면 예전이 되고,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잖아.”

전 언제나 지금이에요. 지금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하는 건 항상 오이카와씨였죠.”

오이카와는 부정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솜사탕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티셔츠에 코를 묻으면서도, 당장 내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는 친선 경기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누나의 생일이었다. 이후를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간은 항상 어느 정도 어긋나있었고, 오이카와는 그러한 시간의 틈에 답답하면서도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제 오이카와와 싸운 일도, 내일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지금의 그에겐 두 팔에 남겨진 오이카와의 단단한 허리로도 충분했다.

버릇인걸.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말해줄래? 그러니까, 난 준비하고 싶은 거야. 헤어지는 준비는 일이 닥치고 나서 하면 늦으니까.”

만남과 이별은 하나였고, 일맥상통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맺어진 인연은 어디로 가든 이별로 통했고, 오이카와는 이 만남을 맺은 것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지점을 카게야마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끊는 건 카게야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집불통인 점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고개를 피하고 오이카와의 허리에만 들러붙고 있었다. 무겁게 누르는 카게야마의 뼈가 아팠다. 부엌의 통유리로 짙게 들어오는 햇볕이 등에 닿아 피부 사이사이로 땀이 한두 방울 맺혔다.

오이카와씨는 너무 뒷일까지 생각하시네요.”

카게야마는 불만인 듯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강하게 안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튀어나와 오이카와를 곳곳이 찔렀다. 이별하기까지의 아픔이었다.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 태양 빛에 오이카와의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먹먹한 목이 씁쓸했다. 식탁 위에 올려졌던 커피잔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고집을 부리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 아세요?”

그건 단어와 형용사의 조합이잖아. 말이 아니야.”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요. 죽음이란 건 제각기 다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준비는 닥치고 나서 해도 괜찮다고요. 항상 어긋났던 것들도 그때가 되면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는 않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피했다. 카게야마의 앞에서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입을 다물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마주 잡았던 손을 카게야마가 풀고 난 뒤에, 시간이 어긋난 채로 남는 건 오이카와였다. 좋은 죽음의 뒤에 새로이 기억을 덧입혀야 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그 준비를 하고 싶었다. 뒷일을 항상 미리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딱딱한 뼈를 만졌다. 튀어나온 팔꿈치 뼈, 아래팔뼈, 엉덩이 아래쪽의 몽글한 뼈, 톡 튀어나온 귀 아래쪽 턱뼈까지. 카게야마는 왜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냐며 비죽 웃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항상 왜 그렇게 어긋났을까 하고 생각할 지도요.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같이 지낸 시간도 길고, 의외로 저랑 오이카와씨는 닮았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오이카와씨를 누구랑 닮았다고 하는 거야. 전혀 다르잖아. 난 토비오처럼 어둡지도 않은걸.”

항상 조금씩 어긋났던 시간이 그때가 되면 마침 마주쳐서,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카게야마의 현재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오이카와에게 옮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단단히 짜증이 난 듯 오이카와의 목 언저리를 꽉 깨물었다.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촉촉한 감촉이 새로운 감각이 되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카게야마의 혀는 말캉거렸고, 솜사탕 향을 머금은 듯 조금 달달했다.

나쁜 버릇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나, 항상 이별을 생각하는 거나.”

버릇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한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가 생각하는 것과 카게야마의 생각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의 서브 모습을 찍은 비디오가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나치게 닮은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났었다. 그가 카게야마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는 점에서 더욱 싫증을 느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매사 어긋나는 것도, 조금의 취향도 겹치지 않는 것도, 전부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처럼, 좋은 이별이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오이카와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가끔 오이카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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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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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여성 주의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뱉었다. 검은 벚꽃의 향기가 머릿속에서 아롱아롱 떨어지고, 빛을 흘리고, 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나는 그날따라 너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꿨다. 나는 칠흑 벚꽃 잎 아래에 있었고, 너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입에 벚꽃 잎이 가득 들어찼다. 입속 점막에는 간지러운 벚꽃 잎 무더기가, 마른 혀끝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코 밖으로는 역한 꽃내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가 검은 태양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헉헉댔다. 나를 구해줘,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나약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는 아주 잠깐 가엾은 갓난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이젠 잊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목이 아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눈물 한 방울들이 벚꽃 잎 한 가지로 변해 발밑에 쌓였다. 눈물로 만들어진 하얀 벚꽃 잎을 발로 짓이기고, 입속의 벚꽃 잎들을 게워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꿈꿨어?”

.”

울고 있어.”

알아.”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낮게 떠서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찝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을 품에 안았다. 땀 냄새나, 그녀가 작게 내뱉은 불만은 귀 깊숙한 곳에 몽우리져 체내의 물방울이 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열었다.

꽃 폈어?”

한두 개라면.”

분홍색이야?”

분홍 벚나무라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분홍 벚꽃 잎을 떠올렸다. 너와 본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후회하세요?’

뭐를?’

저랑 꽃놀이 온 거요.’

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게 너라는 존재는 어렵고, 또 모호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에 대한 거라면 허벅지 안쪽의 별 모양 점에 대해서도 아는데, 나는 네가 어제 자른 손톱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네가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데, 네 안이 어떤 물질로 가득 차있는지도 몰랐다. 나와 너는 그런 상태로 함께하고 있었다.

꽃놀이, 오고 싶지 않았어?’

꽃이란 거 잘 모르니까요.’

벚꽃은 알잖아.’

오이카와씨가 아는 것만큼 알지는 못해요.’

나도 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벚꽃은 벚나무에서 열린다는 것, 향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한차례 강하게 불면 참기 힘든 꽃내음이 난다는 것, 떨어져서 발밑에 쌓여도 더럽지 않다는 것 정도. 너에 대한 것보다도, 나는 꽃에 대해 자세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건 가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회하는 거야? 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벚꽃은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꽃이 지는 걸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서서,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서로 아는 거라곤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너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나였고, 끄덕인 건 너였다. ‘후회하냐고 물어야 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는 건 나였고 대답하는 건 너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손톱 하나의 형태까지도 모르는 나는 대답이라는 질문이 어려웠다. 대답해줘, 토비오. 그렇게 말하면 너는 고민하다가도, 나를 조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럼, 후회하는 거야?’

선택한 건 저인걸요.’

너는 고개를 내리깔고 아래에 쌓인 벚꽃 잎들을 바라봤다. 목이 빠져라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몇몇 커플들이 너의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벚꽃 잎들이 네 아래에 형태 없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있었다. 눈가 끝이 엷게 붉어진 게 보였다. 숨을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다. 네가 내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후회만큼, 나는 너에게 입을 다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네가 오이카와씨,’라고 부른 말 뒤편에 삼켜버린 말 만큼, 나는 너를 안아줄 의무가 있었다. 설령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대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무 뒤편에 철저히 숨었다.

봄이란 건 후회의 계절이잖아.’

봄이요?’

. 작년엔 그러지 말걸, 올해 초반엔 왜 그랬을까, 뭐 그런 것들.’

오이카와씨도 후회란 걸 하나요.’

원망 섞인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에선 귀엽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토비오, 너는 다시 바닥을 바라봤다. 꽃을 보러 와서 바닥만 보는 너는 참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게 바른 거야, 나는 생각했다. 꽃이란 건 결국 지는 게 최종 형태니까, 네가 꽃을 가장 바르게 보고 있는 거야. 벚꽃을 보러 온 사람 중 오직 너만이 벚꽃을 가장 그 형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 발아래에 묻힌 벚꽃 잎들을 떠올렸다. 처음 네가 나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날, 나는 내 심장이 네 발아래 짓이겨지는 상상을 했다. 꽃은 지고, 떨어져서, 밟히는 게 가장 올바른 꽃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쯤은 한다고. 그런 걸 먹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날 받아들이지 말걸, 키스하지 말걸,’

오이카와씨.’

좋아하지 말걸,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밤, 내 앞에서 손톱을 깎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였던 것들을 그 어딘가에 버리면서 너는 무슨 상상을 할까. 한 번쯤, 너는 내가 없는 너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나는 그런 밤이면 눈 끝이 붉은 너를 안고, 어두운 침대로 끌어들였다. 검은 벚꽃 잎이 너를 덮고 나를 덮어 그 방안에 가득 차면, 네 뒤편에 쌓인 후회에 깨끗이 포장된 한 개의 상자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토비오.’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너는 대답했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기어코 너의 눈에서 나온 물 한 방울이 나는 무겁고 또 버거워서 어깨를 툭 떨구고 싶었다. 나는 항상 대답을 네게로 미뤘고, 너는 내 이름 뒤에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고 내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네가 손톱을 버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였을, 그 수많은 좋아하지 말걸의 후회들이 발아래에 쌓였다. 오늘도 네게서 호롱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나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살아났어?’

품 안의 그녀가 낮게 물었다. 땀이 식은 등허리에 고통이 뚝뚝 끊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손톱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벚꽃을 보고, 밤에는 손톱을 자르자. 나는 눈을 작게 내리깔고 손톱을 자르던혹은 꽃의 홍수를 바라보던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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