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1

 

오이카와 선배와 만나는 날이었다.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붉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는 작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옆에서 큰 농사를 짓는 한 노부부의 물길이 벽돌 옆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라스노 고교 앞에만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공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까, 반질반질한 회반죽이 그대로 굳은 느낌이었다.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은 태양은 어울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손에 들린 우유빵이 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늦었잖아.”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내뱉은 입의 주변에는 우유빵 조각이 붙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가, 여느 때와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지나가던 카라스노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 힐끔거리며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여학생에게 살포시 미소 짓자, 그 두 명은 꺄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선배를 기다리게 하다니, 토비오쨩 안 되겠네.”

오이카와 선배는 남은 우유빵 한 입을 내게 내밀며, ‘하고 말했다. 조금만 입을 벌리면 바로 쏙 들어올 것 같은 우유빵을 살며시 밀고, 됐어요. 하며 인상을 구부렸다.

귀염성 없네, 정말.”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중얼거리고 남은 우유빵은 전부 제 입에 넣어버렸다. 입가 끝에 묻은 우유빵 조각을 손으로 훑어 삼킨 뒤, 오이카와 선배는 작게 웃었다.

갈까.”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끝에서 지고 있는 하늘 안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짙은 하늘색의 그라데이션이 구름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걸어가는 동안 우유빵 봉지를 작게 접어 딱지를 만들었다. 작은 딱지를 몇 번 손에서 굴리더니, 이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옆모습에 짙은 분홍빛의 그라데이션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의 얼굴과 같이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고 있어.”

오이카와 선배는요?”

글쎄, 어떤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오이카와 선배는 장난치는 듯이 미소 짓더니,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감정이 담긴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토비오쨩이 귀여운 여자아이였다면 좋아했을지도.”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몰래 쳐다봤던 여학생 두 명을 떠올렸다. 길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에,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어깨가 동그랬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 아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손을 흔들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선 얘기 끝난 거야?’ 되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젊었을 적 어머니와 같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양털과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러 많은 남자 선배들이 여자 배구부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토스를 올리려고 팔을 드는 순간, 내 손가락이 유달리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지금 있는 곳은 카라스노 고교 여자 배구부였다. 체육관 바깥쪽에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빛깔의 태양을 보고 난 그제야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남자 선배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카게야마가 여길 보고 있어.”

역시 귀엽네. 저번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귀여운데.”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발꼬리에 쌓여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난 귀여운 여자애구나. ‘귀엽다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푸른 태양의 세상에서 나는 귀여운 여자애였다.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리려고 가볍게 뛰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렸다.

 

 

토비오쨩, 만두 먹을래?”

오이카와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기만두를 내밀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받아들고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들면 짙은 보라색의 하늘이 구름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색깔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 입가에 묻은 만두 조각을 손으로 훑어다가, 자기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듯한실제로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적이 없다달콤한 행동, 목소리, 말투. 이 꿈속에서 난 오이카와 선배보다 훨씬 작아서, 나를 바라보고자 고개를 약간 숙인 행동까지. 오이카와 선배에게 나는 여자애로 보이고 있었다. 푸른 태양, 보랏빛 구름과 존재할 리 없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의 세계 안에서 오이카와 선배는 설탕 시럽처럼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조금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서, 다시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고민하는 듯 음낮은 목소리를 내며 오이카와 선배는 눈가를 좁혔다. 만두를 들고 있는 내 오른손을 이끌더니, 남은 만두 한입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고 오이카와 선배는 웃어 보였다. 만두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손가락 하나에 가볍게 키스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이지, 토비오쨩이.”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떨어뜨린 뒤,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흘러내려 갔다.

만약, 말이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가 아쉬워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이 배구를 안 했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배구 안 하는 토비오쨩을.

오이카와 선배가 살며시 깨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푸른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3

꿈을 꿨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1학년, 주변에서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애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카게야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 선배들이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배구부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간에는 카라스노 고교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이카와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오바죠사이라는 고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세터, 키타이치 중학교 시절의 나의 토스, 지금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푸른 태양이 일그러져 바닥에 녹아내렸다. 보랏빛 하늘 아래 카게야마 토비오와, 푸른색 태양조각이 흩어져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깨물었던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오쨩.”

 

눈을 떴다. 침대 안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울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1학년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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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7 동거

 



 

오이카와 선배네 집은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개인 주택의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고, 현관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화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몇 개 피어있었다. 당겨서 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는 신문을 놓을 수 있는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왼쪽에는 안 쓰는 방이 있었다. 매일 닦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계단을 오르면 발을 내딛는 곳 아래쪽으로 나무 썩는 소리가 들렸다. 삐이, 삐극, 삐걱하는 소리가 끝나고 2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오이카와 선배의 방이었다. 사각으로 접어놓은 이불, 좌식 책상과 옷에 걸린 교복까지, 무엇 하나 오이카와 선배의 향이 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배구공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로서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벽걸이형 달력에 표시되어있던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319, 졸업식. 오이카와 선배의 글씨체가 아닌 그 표시는 가족 중 누군가가 적어놓은 듯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간 날이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달력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젖었다가 마른 흔적까지 생각나는데도, 기억이란 이상한 곳에서 모호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돼, 토비오쨩.’

난 그 말을 듣고 좌식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 할지, 혹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좋을지 잠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손바닥에 차가운 식은땀이 번졌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지금껏 집에 초대한 후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나는 쿠니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초등학교 이후로 오이카와 선배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이와이즈미 선배와 오이카와 선배의 대화로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깨에 멘 에나멜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봤다.

저기,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무언가 소중한 걸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앉아도 돼, 한 번 더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뇌 속의 바람이나 기호에 따라 조금씩 가공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에나멜 가방을 한 손으로 빼서,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계 두 개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서로 어긋난 박자로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조금 머리가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는 양손으로 내 체육복 저지 상의를 벗겼다. 저지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다다미 바닥은 소리 흡수를 잘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내 흰색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비오,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로 이사를 왔다. 걸어서 역까지 8, 역에서 학교까지 30.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며 히나타는 부러워했다. 오이카와 선배와는 가끔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도쿄로 이사 왔다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 오이카와 선배와 같은 대학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었고, 그쪽에서 먼저 스카우트하러 온 걸 보고 츠키시마는 행운이네라고 했다. 성적으로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학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 선배가 없는 2년은 회색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했고, 기쁘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오이카와 선배에 대한 감정은 생각 날 때만 한 번 꺼내보는 상자였다. 가끔가다 기억을 되새기곤 했지만 꿈에 나올 때는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있는 때가 많았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연락을 보내오는 오이카와 선배도 신기루 같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여자 선배와 함께 있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동거를 먼저 시작한 선배라며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아주 드물게 배구를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마다 동거생활의 소소한 팁을 말했다. 프라이팬 하나로 반찬을 세 개 만드는 법, 설거짓거리를 줄이는 방법, 처치 곤란한 채소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 등……. 나는 거의 항상 끼니를 밖에서 때우거나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의외로 살림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밥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대학 내에서 유명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자취하는 집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많은 여자 선배와 사귀었고, 대학 내에서 친구도 많았으며 여전히 배구부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누가 데려다줘야 할 정도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 후에는 애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으며, 평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 해주면서도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는 부드럽게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우와,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이 대학 무섭네.”

네가 조금 유명한 사람이어야지하긴, 2년이면 오래 사귀었네.”

같은 강의실 뒤편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까.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웠다. 강의실 창문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햇볕이 내 뒤로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웠고, 머릿속에선 기억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퍼즐처럼 흩어져 있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세리자와랑 얘기해봐야지.”

그래서? 이제 동거하는 건가?”

우와, 나카지마 불건전해! 오이카와씨는 동거란 말은 모른답니다!”

무슨곧 졸업인데, 결혼하기로 정한 남녀가 뭐하러 따로 사냐고.”

동거는 안 해. 그건 세리자와랑도 얘기 끝난 사항이야.”

오이카와 선배는 시합할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내 오이카와 선배는 가벼운 말투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 만의 비밀이야!’ 작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

발신인은 중학교 때부터의 선배였다.

 

 

왜 안 먹어? 이제 카레 싫어하나?”

오이카와 선배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이카와 선배 앞에는 방금 만든 로제 파스타가 있었다. 카레의 달콤한 향이 코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반질거리는 겉면의 반숙 달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뜨거운 카레 위에서 뒤척였다.

좋아해요.”

근데 왜 안 먹어?”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 속의 오이카와 선배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본 오이카와 선배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그건 오이카와 선배가 결혼하기로 결정 한 세리자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굳이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이카와 선배는 잊을만하면 연락했고, 나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러 나온 건 나였고, 그의 앞에 앉아 카레를 주문한 것도 나였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불러낸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기억도 변형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있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는 아예 기억 자체의 상자를 닫아버린 것인지. 나는 오이카와 선배도 같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도 선명했던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억에는 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바람이 투영된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찰나와 같이 웃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내 귀를 덮고 볼에서 목까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토비오, 우리 같이 살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주 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중학교 때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어린아이였다. 그를 아는 것은 저뿐이라는 기분에 젖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서 시작한 기억을, 그와의 동거로 끝맺는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된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도 그에게 끌리고 있는 채였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그날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에 잘못된 일은 없어.”

일어나야만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이야.”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일어나는 일의, 일어나야만 하는 일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의, 그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동거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면. 아니, 그의 사랑이고 나의 사랑이라면. 내 기억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만 선명한 것도 그러한 일종인 걸까.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이외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외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았다.

저랑 만난 걸 후회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너를 만난 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에는 후회라는 말이 필요 없지.”

오이카와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던 카레 속 반숙 달걀이 저 혼자 터져서, 누런 노란 빛의 달걀 속이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속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서 오이카와 선배와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건 이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일까.













오이카게 전력 #6  컬러버스 AU

 

 

 

운명의 상대라는 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 보면 자주 나오는 저 말은, 쉽게 생각하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상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색이 아주 특별한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회색의 세상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 내가 먹고 있는 수프의 색과 아주 단순하게 내 몸의 털이 무슨 색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전부 다 회색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말을 배우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회색 그림책을 내게 사줬다. 그림책 안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에는 색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그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지만. 어머니는 색을 찾은 사람”, 제목을 읽고 한 장 넘겼다.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시아는 회색의 세상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 내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

어느 날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빛깔, 얼음처럼 차갑고 사나운 빛깔,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은 빛까지. 루시아는 그것이 색깔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시아의 운명의 상대는 소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림책의 문자를 읽어나갔다. 책 속의 루시아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어머니는 그림책을 덮고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어머니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에 찬 듯 반짝였다.

토오루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야. 루시아에게 소니 같은 사람, 엄마에게 아빠 같은 사람. 운명의 상대.”

운명의 상대.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내 행복이라고. 어머니는 그렇게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입술을 문지르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나가기 전 동거 상대가 데려온 회색 고양이 토토가 가늘게 울었다. 토토의 등을 한두 번 쓰다듬어준 후 작은 코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동거 상대와 머무는 회색 지붕의 건물 3층은 경치가 꽤 좋고, 안방이 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군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2인용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동거 상대는 자주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안방에서 토토와 함께 뒹굴뒹굴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저녁이면 직접 만든 카레를 먹고, 회색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그와 보내는 시간은 무료했고, 루시아가 말했듯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얼마 후 있을 국가대표 결정전을 대비하고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날도 별로 없는 것이 요즘이었다. 나는 그가 없는 침대에서 가끔 잠을 잤고, 동거 상대는 내가 없는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선잠이 드는 날이 늘어갔다.

급해서 대충 챙겨 입고 나온 외투는 초겨울용이었다. 소매 안으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색이 없는 세상에서회색을 색이 아니라고 본다면사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바람의 세기와 피부에 와 닿는 온도, 콧속을 한꺼번에 채우는 향기뿐이었다. 봄의 벚꽃과 장미향기, 여름의 턱 끝까지 답답한 열기,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겨울의 회색 눈덩이가 내가 아는 계절의 전부였다. 그러니 실내에 있다 보면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바쁘게 연습과 시합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면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건 내 동거 상대가 더 심해서, 작년 겨울에는 후드 티에 얇은 조깅팬츠 하나만 입고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하고 와서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지독하게 건강한 건지 결국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키스를 한 내가 감기에 걸린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단 건 답답한 일이었다.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세상은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비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뭐가?”

토비오는 설탕으로 착각해서 소금 범벅이 된 계란말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물었다. 냉장고에 몇 개 있는 남은 반찬을 식탁에 꺼내놓고, 수저를 놓은 후 내가 대답했다. 쓰레기통 속에 여전히 시선을 향한 채, 토비오는 내게서 등 돌리고 있었다. 회색 브이넥은 입은 어깨가 넓었다. 똑같이 브이넥을 입은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는 커플티를 입은 상태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커플 옷을 사 입는 경우가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옷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고 옷장에 따로 보관해도 섞이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체격이 더 큰앞으로도 토비오보다는 항상 더 클내가 옷을 구분해서 다시 넣어놓는 게 일상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거요.”

회색은 보여.”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보인다던데요.”

그런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

나는 조금씩 짜증이 났다. 토비오는 가끔 내가 짜증 낼만 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짜증을 내는 나 또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길 바랐다. 나는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로 토비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토비오는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토비오의 회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여러 가지 말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는 말로 대화하는 아이였고, 나는 그런 토비오에게 익숙해져 있었으나 항상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몰랐다.

어쨌든 저희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

내 말투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토비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토비오의 시선이 식탁 위의 회색 반찬들을 향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 이상하게 느껴져서요.”

토비오는 뭘 하고 싶은 건데?”

짜증 섞인 말투를 억누르는 게 내게 있어 최선이었고, 토비오는 또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토비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가끔 토비오는 내게 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건넸다. 운명의 상대가 아닌, 색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에서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일이었고 나와 토비오는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에게는 가끔 힘이 들었다.

전 오이카와씨랑 함께 있고 싶어요.”

함께 있잖아.”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요?”

……토비오.”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토비오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멋진 소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덧입혀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기억 속에서 거품처럼 떠올랐다. 회색의 세상이 말로만 듣던 채도를 갖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로 반짝이는 경험은 나에겐또한 토비오에겐없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나는 중학교 때 토비오를 만났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들어가 배구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 토비오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비오와 생활하고 있는 3층 동거 집은 회색 일색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색에 대해 떠올렸다. 꿈속에선 너무 많은 색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결국 웃고 마는 나 자신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토비오의 머리색은 무슨 색일까, 눈동자는 어떤 빛으로 빛나고 태양 빛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할까 같은 것들을 생각했고 어떨 땐 꽤 그럴싸한 걸 상상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운명의 상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의미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그쳤다. 나는 그날 밤 회색 이불 안에서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잠이 든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회색 머리에 얼굴을 묻고, 회색 입술에 입을 맞추고 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내 세상은 회색이었고, 토비오였다.

 

약속장소는 동거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라고 정해져 있었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살얼음 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다리를 조급히 움직였다. 카페의 넓은 통유리 너머로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토비오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눈동자에 붙었던 먼지가 하나둘 닦이는 듯 색채가 촛불처럼 드러났다. 카페의 지붕은 황갈색이었고, 하늘에선 색유리를 낀 구름이 눈부시게 새하얀 빛으로 빛났고,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온 민들레 잎이 무섭도록 노랗게 반짝였다. 고개를 급하게 돌려보니 먼발치에서 한 여성도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박차고 달렸다. 회색 렌즈를 끼듯 한 줌, 두 줌 멀어지는 색채가 아쉽고 덧없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중심을 잃고 몇 번 발을 헛디뎠으나 카페 입구에 몸을 부딪치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카페의 입구 문은 회색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점원은 회색 옷을 입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그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토비오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토비오의 앞머리를 몇 번 정돈해준 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루시아가 소니를 만난 순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토비오, 드디어 만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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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5 마츠리(축제)

 

 

 

사방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오른쪽에서는 친구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쪽 조금 위쪽에선 딸을 잘 챙기라고 남편을 다그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에선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뭇게 타버린 밤하늘에선 멀리 북소리가 둥, , 둥 일정한 리듬을 두고 들려왔다. 이 길로 가면 오른쪽에는 타코야끼 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떼자 어깨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하고, 유카타를 입은 소녀는 뛰어가 버렸다. 나와 한, 두 살 정도 차이 날 뿐 같은 나잇대였는데도 눈가에 보드랗게 퍼진 펄 빛 눈화장과 입술에 물든 분홍 꽃잎 색이 낯설었다. 투명한 흰 피부에 보스스 달아오른 볼이, 오늘이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새삼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소녀가 신은 나막신이 따각따각 나무 부딪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좁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앞서 걷던 소년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어가 버렸다. 나는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앞이 이곳이 맞는 걸까. ‘이란 말조차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해 있는 키타이치 중학교 배구부는 부원이 많았다. 배구로 유명한 강호교에, 특히나 올해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끄는 시기였다. 예년보다 부원의 수도 많았고, 더 강하고 단단한 팀이 되고자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지역 축제에 다 같이 가서 팀워크를 돈독히 하자! 는 목표 자체는 원대하고 좋아 보였다. 할 일이라고는 가끔 모이는 지역 소모임에 참가하는 일 혹은 때때로 폭설이 내리면 소일거리 차원에서 자기 집을 넘어 옆집 눈 치우기가 전부인 시골 마을에서, ‘축제란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카게야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전국대회 영상을 본 이후로 처음 알았고, 사람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두가 다 함께 축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자는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학년별로 모여 다니자는 것에 겨우 합의를 봤을 때는 이미 몇몇이 개별활동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속한 1학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년 대다수가 각자 알아서 돌아다니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킨다이치, 쿠니미와 이곳저곳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이동하고 다녔다. 도쿄나 큰 도시에서는 커다란 불꽃놀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시골인 미야기에서는 작은 불꽃 몇 개가 하늘을 점점이 수놓는 게 전부였다. 꽃 모양에 용 모양, 하트모양에 작게는 두 번 연이어 터지는 불꽃도 있다지만 전부 소문에 불과했다. 항상 화려한 불꽃놀이는 먼 나라혹은 먼 지역의얘기였으며, 카게야마가 알고 있는 불꽃놀이는 북소리나 사람들 소리에 가려져 작게 터지는 불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모인 것은 역시나 시골이기 때문이었다. 행사가 별로 없는 시골에서 축제는 공식적인 즐거움의 장이었다.

쿠니미는 타코야끼를 사들었으며, 킨다이치는 금붕어 잡기에 열중했다. 카게야마는 다만 가만히 서서 그들을 구경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기도 했다. 축제에는 가족과 함께 몇 차례 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카게야마는 사람들에 쏠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정신없는 한바탕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올해도 사람이 많기는 여지없이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올해의 축제가 여느 때와는 다르단 것을 알고 있었다.

여우 가면 어때?”

그건 쿠니미지. 카게야마는 이게 더 좋을 거 같다. 까마귀 가면.”

까마귀를 보통 가면으로 만드나. 어울리긴 하네. 킨다이치는 이거 어때? 랫서 팬더 가면.”

랫서 팬더야말로 왜 가면으로 만드는 거야?”

어울리니까 됐잖아.”

우연히 마주친 가면 가게에서 각자 하나씩 사자는 얘기를 꺼낸 건 킨다이치였다. 아무렇지 않게 몇몇 가면을 골라든 쿠니미 손에 이끌려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얼굴에 썼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오직 정면만 시야에 가득했다. 쿠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를 보고 조금 웃었지만, 쿠니미는 알아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여우 가면을 쓴 쿠니미는 사람으로 둔갑해서 마을에 내려온 여우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정면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보려면 고개를 평소보다 더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에 카게야마는 잠시 헤매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너머로 익숙한 머리색이 보였다. 검은 하늘 아래 붉은색으로 퍼지는 전등 불빛 옆에서,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색은 평소보다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진한 바다색에 줄무늬가 들어간 유카타는 썩 잘 어울렸다. 3학년 배구부 선배 몇 명과 이와이즈미 선배, 그 앞에 유카타를 입은 몇몇 여자 선배들이 오이카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뒤편에서 서로 손잡고 가자는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시야 건너편에서 오이카와는 입을 바삐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팔짱을 낀 유카타 소매가 아래로 늘어져서 흰 속살이 드러났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조그맣게 난 두 개의 눈구멍은 오이카와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애초에 옆은 볼 수 없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까마귀 가면 속의 카게야마의 시야는 어두웠고, 고요하고,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만 존재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그랬다고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까마귀 가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카게야마는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아이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몇 번 치이면서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가는 도중,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며 걸음을 멈췄다. 이와이즈미의 곧은 눈동자가 이내 비껴졌다. 그렇구나. 지금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 쿠니미가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 축제를 구경하러 온 여우였듯이, 카게야마는 산의 외로움을 피해 도망쳐 온 새끼 까마귀였다. 카게야마는 다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이제 다섯 발자국 앞에 있었다. 유카타가 감싸고 있는 등은 곧게 뻗어 있었고, 코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빛무리를 형성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일지도 몰랐다. 그의 등만 보이면 달라붙고, 서브를 가르쳐 달라 조르는 게 일상이었던 카게야마의 본능일지도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까마귀 가면 속에서 저의 숨 쉬는 속도가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두 발자국 앞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면 시야에 오이카와는 없었다. 저 멀리서 둥, , 둥 일정한 속도로 북소리가 들렸다. 북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북 치는 장인이 치고 있는 건 제 심장일지도 몰랐다. 지금 이 축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이카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불꽃놀이인가? 옆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토비오쨩?”

뒤편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뒤를 돌아보려던 카게야마는 몸만 조금 떨고, 발을 다시 움직였다.

토비오,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는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오이카와가 말했다. 이와이즈미가 옆에서 왜 생사람 잡냐라며 오이카와의 등을 한 대 강하게 때렸고, 주변 사람들은 토비오?’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야! 그치만 이와쨩! 토비오인걸!”

카게야마는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거의 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속도였다. 사람들에 끼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적어도 오이카와 선배만큼이라도. 몸이 조금 더 다부졌다면, 평소에 근력 트레이닝을 열심히 했어야지. 자책하는 목소리와 후회감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북 치는 장인이 두들기는 심장에 차올랐다. 콧속으로 탄내가 스며들어왔다. 멀리서 불꽃을 쏘아 올린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카게야마는 다리를 움직였다. 축제는 무언가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 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오이카와 선배를 보지 말 걸,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까마귀 가면을 쓰지 말 걸, 화약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탄내의 정도가 짙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걸.

토비오!”

어깨가 강하게 잡힌 아픔이 카게야마의 전신에 퍼졌다. 겨우 멈춘 양 다리가 후들거렸다. 힘들게 서 있는 몸이 살며시 비틀거리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돌리고 마주 바라봤다.

왜 도망치는 건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좁은 시야는 다시 오이카와로 가득 찼다. 예쁜 홍차 빛 눈동자 위로 작은 땀방울이 한두 방울 걸려있었다. 까마귀 가면 속은 지나치게 더웠고, 숨소리가 엉망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왜 알아보는 건데요.”

?”

오이카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잔뜩 어긋난 호흡에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오이카와는 당황스러웠다. 너무 세게 잡은 건가, 어깨에 실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왜 알아보는 건데요. 까마귀 가면, 썼는데…….”

아니, 토비오쨩이잖아?”

그러니까, 왜 알아보냐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원망이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까마귀 가면을 벗겼다. 손길이 지나치게 상냥해서, 카게야마는 한차례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고 싶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어떤 표정인데요.”

못난이 표정.”

오이카와는 짓궂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이카와의 큰 손이 땀으로 눅눅하게 젖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좋게 말해도 쓰다듬는다고는 할 수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데 내가 어떻게 설명해? 토비오쨩은 그냥 토비오쨩이잖아? 머리를 짧게 잘랐어도 토비오고, 하복을 입든 동복을 입든 사복을 입든 토비오고, 까마귀 가면을 써도 토비오고.”

축제로 앞뒤가 안보이고 꽉꽉 막힌 곳에서 만나도요?”

.”

북 치는 장인이 손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북소리도 뚝 끊겼다. 축제 소리는 저 멀리 멀어지고, 콧속으로 끝도 없이 들어오던 탄내는 점차 사라졌다. 카게야마의 시야는 다시 넓어졌다. 오이카와의 뒤편으로 수많은 사람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뒤에서는 불꽃놀이가 벌써 끝났냐고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왼쪽 조금 위쪽에선 저쪽 타코야끼가 더 맛있다며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오이카와는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 있든 오이카와였다. 여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도, 멋진 유카타를 입어도,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그렇듯.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까마귀 가면을 다시 받았다. ‘써봤자 소용없다니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안 쓸 거예요. 안 써도 괜찮으니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천천히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처음 들었던 일정한 리듬 그대로였다.











오이카게 전력 #4 발렌타인 데이

 

 




 

겨울 끝자락에는 항상 달콤한 향이 머물렀다. TV나 길거리 현수막에는 달콤한 사랑을 전하라는 문구로 가득 찼다. 달콤하다는 건, 콧속을 따끔하게 채우는 겨울 구름 냄새보다 더 따스한 걸까. 어머니가 자주 보던 드라마 속 커플은 서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고 자주 말했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그렇게나 따뜻한 거냐고 묻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몸은 추워도 마음이 따뜻한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 놔두고 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친 겨울바람의 기승 속에서 연습하면서 몸을 데우는 것과는 또 다른 걸까. 어머니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토비오에게는 조금 어려울지도, 빠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을 스가와라 선배에게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알아?”

알아요. 화이트데이랑 반대되는 말이죠? 화이트랑 반대면 블랙 아니에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기는 츠키시마를 한껏 의식하면서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츠키시마는 또 코웃음 칠 뿐이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생글 웃더니, 목도리를 여미며 말했다.

, 반대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그 날에 주는 물건이 뭐인진 알고 있어?”

, 알아요. 초콜릿이랑, 사탕이잖아요.”

잠시간 머릿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릿이었는지, 사탕이었는지 고민을 거쳤지만 다행히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며칠간 떠들썩했던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던 높은 옥타브의 재잘거림이 생각났다. 결국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는 거로 결론이 났던가. 수제가 역시 좋다느니, 진심이 담겼다느니. 초콜릿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수제라면 그 안에 진심이 담기는 걸까. 가게에서 파는 걸 사면 진심이 아닌 걸까.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가끔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네. , 맞아. 곧 있으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설명하려고 준비했다가 필요가 없어진 걸 알았는지 잔뜩 들이마셨던 숨을 가볍게 뱉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이 하얗고, 또 서늘했다. 왜 발렌타인 데이가 이 차가운 겨울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달콤한 향내가 뜯어낼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덕지덕지 붙은 계절이 좋을 텐데. 하필 2, 겨울 끝자락이 날카로운 이빨을 사람들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이 때가 아니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난 몇 년간 나와 상관없던 날에 대한 생각이 물에 풀린 물감처럼 점점이 퍼졌다. 구태여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 선배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가 어떤 날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부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은 올해도 세이죠의 부실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아니, 어쩌면 올해는 많이 받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많이 받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만인에게 초콜릿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인이었다.

카게야마는 받을 사람 있어?”

스가와라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짓궂은 얼굴로 왕님은 얼굴만은 꽤 인기 많으니까라고 했지만, 항상 츠키시마가 말하는 얼굴만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짜증 나니까 한번 째려봤다. 초콜릿은 어머니에게서 받는 게 전부였다. 올해가 어떨지는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는 걸까, 받는 걸까.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기에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말하든 일반적이진 않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일반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구든 한 명이 꼭 무언가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이런 날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낯설었다.

받아야 하는 건지, 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뭘 줘야 할지도요.”

줄 사람은 있는 거야?”

스가와라 선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서 걷던 히나타나 다이치 선배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설명을 요구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 카게야마, 무슨 소리야? 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히나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와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줄 게 있다면 줄 사람이 있는 거고, 줄 게 없다면 없는 거 아닌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과 무언가가 다르단 건 알겠는데, 어디에서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맹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상한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준비한 초콜릿은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수제는커녕, 가게에서 톡 치면 쏟아 내릴 정도로 수많은 양의 초콜릿을 쌓아올린 곳에서 젠가를 하듯이 하나를 꺼내온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겠지만실제로 여자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만드는 아이가 몇 있는 것 같았다어쨌든 오이카와 선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내게 초콜릿 기대한다는 둥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면 키스해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손을 잡고 싶으면 말없이 내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 사람이었다. 누구나가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듯 이상한 관계니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도 괜찮았다.

, 어쨌든. 줄 사람이 있든 없든 그건 카게야마의 문제고. 올해 다들 하나씩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저도요! 저도요!”

스가와라 선배가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고, 히나타는 내게 향했던 눈을 돌려 땅에서 휙 뛰어올랐다. 스가와라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웃었다. 입꼬리가 얇게 올라가자, 약간 붉게 달아오른 볼이 말갛게 부풀어 올랐다.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

 

 

오늘도 춥네. 토비오, 목도리 정말 안 해도 괜찮아?”

, 괜찮아요. 목에 뭔가 닿는 게 싫어서.”

그 말 몇 번이고 들었지만, 용케 감기에도 안 걸리네. 몸은 진짜 건강하다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풋 웃으면서 목도리를 더 강하게 묶었다. 맵시 좋게 묶인 목도리를 부드럽게 매만져서 형태를 만들고, 오이카와 선배는 왼쪽 쇼핑백을 고쳐 들었다. 붉은 리본으로 장식한 쇼핑백 끈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상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하트 모양에 랩핑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고, 포장지만으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얘기하던 초콜릿 중에 몇 번이고 들었던 유명 상표의 포장지도 보였다. 쇼핑백을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오이카와 선배는 그저 웃으면서 부실에 남은 건 내일 가져가려고.’ 중얼거렸다.

한 개 먹을래?”

그걸 왜 제가 먹어요.”

맛있잖아.”

오이카와 선배한테 준 거잖아요. 저한테가 아니라.”

그럼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한테 주는 걸로.”

…….”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단순한 말에도 이상하게 의미를 생각하고 마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이카와 선배가 강제로 내 입에 각진 사각형의 초콜릿 한 개를 입에 집어넣은 까닭도 있었다. 열린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입안 양쪽에서 조금씩 묻어난 침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혀끝에 진한 단맛이 퍼지고, 코에서 초콜릿 향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선배는 볼을 물들이며 웃더니, 손가락에 조금 묻어나온 초콜릿을 살며시 핥았다. 붉은 혀와 옅은 분홍색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코와 입을 침식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맛과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초콜릿이 오이카와 선배의 윗입술 끝자락에 묻었다. 흰 피부는 한겨울 날씨에 보들보들하고 투명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전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좋아요.”

……?”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요.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는 초콜릿을 핥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입에서 전부 녹은 초콜릿은 아쉬운 단 맛만 남기고 약간의 까슬 거리는 쓴맛이 입 점막을 긁었다.

그거 지금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되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이해하는가. 내 말에 등장도 하지 않은 키스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토비오쨩은 내 손가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상아조각처럼 자리 잡은 손톱은 분홍색 조약돌 같았다.

손가락은그것도, 좋지만. 입술이 좋아요. 예쁘잖아요.”

예쁘다고?”

. 오이카와 선배한테 초콜릿을 주는 여자들은, 어쩌면. 자기 앞에서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지 않았을까요. 오이카와 선배의 입술이 먹는 초콜릿이라고 생각하면 사 오는 게 좋았을지도요. 발렌타인 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러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토비오 역시 지금 키스해달라고 하는 거지?”

제 말 제대로 들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키스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에 조금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 선배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알았으니까, 토비오. 초콜릿 한 개 더 먹어.”

싫다고 말하고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안에 침투해 온 초콜릿의 단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맛있어? 오이카와 선배는 달콤함이 툭툭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 쇼콜라티에 되고 싶다던 아이였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오이카와 선배는 쇼핑백 안의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웃는 얼굴이 귀엽고, 이 아이는 보조개가 귀여워. 이 아이는 속눈썹이 정말 길고, 얘는 어깨선이 동그랗게 퍼져서 참 예쁜 애야. 방금 줬던 초콜릿을 만드는 아이는 말했듯이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들고. 토비오,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요.”

그 모든 사람을 기억할 정도로 오이카와 선배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만은 알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의 원하는 토스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그건 자연스러운 기억 회로일지도 몰랐다. 오이카와 선배는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의 일을 가끔 말할 때면 아무리 나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러니, 방금 언급한 그 여자아이들도 모두 오이카와 선배에게 있어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속 방 하나가 물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 울진 않지만.

, 이 아이들은 그렇게나 귀엽고 나에게 초콜릿까지 주잖아? 토비오가 말했듯이 난 달콤한 걸 좋아하고.”

.”

그래도 난, 초콜릿 한 조각 주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토비오가 좋아. 토비오를 좋아하는 거야. 내 입술이 좋다는 토비오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토비오의 귀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끌어안고 싶어.”

…….”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잖아? 토비오, 초콜릿 맛있었어?”

……저기, .”

다행이네.”

오이카와 선배는 살며시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입안의 초콜릿은 다시 순식간에 녹아 혀끝을 아찔한 단맛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말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려는 여자아이의 추억은 내 입술 안에서 녹았다. 그 뒤에 애매하게 남은 쓴맛이 조금 견디기 힘들어서, 오이카와 선배의 손을 먼저 잡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마주 잡아준 손에서는 방금 먹은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오이카게 전력  #3  안경

 

 




눈이 마주치고, 눈을 한번 깜빡였다. 깜빡, 하고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 인화된 사진 속 오이카와씨는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기는 눈을 닮았다고 하던가, 눈이 사진기를 닮았다고 하던가. 무엇이 먼저든 간에, 눈은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구나하고 납득하고마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씨를 담아내기에는, 그렇다. 눈으로는 부족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진기 1개로조차도. 수십 개의 사진기가 오이카와씨를 감싸는 풍경을 상상했다. 눈부신 섬광이 몇 차례 지나가고 잠시 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고 나면 오히려 그 사진은 물먹은 듯 흐려지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생각은 신경전달의 다발로 뚝뚝 끊기며 전달되다가 이윽고 온전히 끊겼다. 오이카와씨가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다시 깜빡이고 마주 보자, 오이카와씨는 내 앞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이카와씨 뒤편은 큰 통유리였다. 넓은 카페 안의 구석진 자리는 항상 우리가 앉는 자리였다. 유리를 등지고 앉은 의자 옆에는 키가 큰 인조 산세베리아가 넓은 잎가지를 퍼뜨리고 자리 잡고 있었다. 구석진 카페 안쪽 자리의, 흰색 둥근 화분으로 가려진 의자 안쪽에 앉아서 오이카와씨와 나는 마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뒤편의 통유리에는 석양이 몰려드는 거리를 몇몇 사람이 분주히 걸어갔다. 낮이 잠기고 붉은 바다에 삼켜지는 이 시각 즈음의 오이카와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쁘셨나요.”

오이카와씨가 끼고 있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보고 말했다. 오이카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수 없는 안경이야.”

그럼 왜,”

토비오한테도 선물해줬잖아. 방금, 안경.”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이카와씨와 똑같은 검은색 뿔테 안경이 손에 들려있었다. 언제 받은 건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진기와 눈에 대한 생각을 하기 이전일 것이다. 아이스티를 주문하기 전이던가, 그 이후던가. 오른쪽에 놓인 아이스티 속 각진 얼음은 4개 정도 둥둥 떠서 아이스티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안경을 들어 올려 코에 걸쳤다. 귀 옆에 닿은 감각이 서늘했다. 오이카와씨가 보이고, 오이카와씨가 쓰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 너머의 안경, 그 안경의 짧은 수평선 너머의 오이카와씨는 웃음을 참는 듯 이상한 표정이었다.

안 어울려.”

무슨 상관이에요알고 있어요.”

선글라스를 쓴 적이 있다. 아오바죠사이로 가고, 오이카와씨를 만나고 금방 벗어버렸지만 어울리지 않는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웃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연기처럼 흘러다니는 사람이었다. 고정된 이미지도, 형태도 없이 녹아내린 채로 흘러다니는 오이카와씨는 내게 안경을 건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형상이 부서지는 오이카와씨를 이 안경으로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가르쳐줘요, 오이카와 선배. 어릴 적처럼 마냥 물어보는 곳에 답이 오리란 법은 없었다. 오이카와씨도 가르치는 것은 적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를 대상으로는.

안경을 다시 벗으려고 손을 들었다.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던 손끝은 벗는 방법에서도 한참을 방황했다. 안경을 어찌 쓰고 벗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진은 찍는 법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눈을 깜빡여 대상을 뇌 속에 전기처럼 박아 넣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중학교 시절 그 방법을 알려준 건 오이카와씨였다. 정확히 말한 건 오이카와씨의 배구, 서브였다. 뇌 속에 무언가를 찍어놓고 떠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입이 말랐다. 좋은 선생이 되진 못하는 오이카와씨는 안경을 어설프게 벗는 내 손끝을 잡고 잠시간 소리 내어 웃었다.

벗지 마. 쓰고 있어.”

왜요. 답답하다고요.”

있잖아. 토비오.”

안경에 닿아있던 내 양손을 잡아 테이블에 단단히 고정한 오이카와씨는 몸을 기울였다. 오이카와씨 뒤쪽 통유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씨의 눈동자와 속눈썹, 가는 눈썹이 전부였다. 눈의 움직임에 따라 흰 볼과 깨끗한 코끝,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보였으나 이윽고 나는 오이카와씨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몇 가지 할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말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결국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스티 속 얼음이 모두 녹을지도, 같은 생각이 가끔 튀어 오르는 것만큼 의미 없었다.

눈동자는 영혼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니까,”

오이카와씨의 속눈썹이 가까이 다가왔다. 둔탁한 플라스틱 제제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경이 조금 내려앉았다. 안경끼리 부딪치는 순간, 오이카와씨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옅은 홍차 빛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을 마주 본다는 건,”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안경끼리의 마찰음이 빗소리처럼 간간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오이카와씨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의 형태를 빚고 있었다. 오이카와씨에게 잡혀있던 양손은 어느새 그와 마주 잡고 있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그가 새겨졌다. 찰칵, 셔터음이 들리면 머릿속 필름은 돌아가고 언젠가 인화할 때를 기다린다. 머릿속 사진 폴더는 오이카와씨로 가득했지만, 무엇 하나 초점이 맞는 사진이 없었다.

영혼을 마주 본다는 뜻인지도 몰라.”

오이카와씨는 눈을 천천히 뜨고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안경 너머에서, 속눈썹끼리 키스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그에 맞춰 나도 눈을 가늘게 떴다. 마주보는 눈동자 사이에서 시야는 흐려졌다. 오이카와씨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영혼이라는 것도 결국 눈동자에 갇혀 있는 거니까,”

초점이 흐린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는 눈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경 너머의 눈동자, 또 그 눈동자 너머의 영혼, 영혼 안의 안경 속에서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사진기가 비추는 섬광이 지나고 나면 오이카와씨는 전부 녹아내려 머릿속 폴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몇 단계의 프리즘을 거친 뒤의 오이카와씨가 거꾸로 된 사진일지, 반쪽이 잘린 사진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짧고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오이카와씨의 영혼은 극히 단시간이기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영혼도 눈동자라는 프리즘을 지나면 무엇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영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주 봤다. 속눈썹끼리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키스를 하고 눈을 마주쳤다. 코끝이 서로 맞닿을 지점까지 온다면, 영혼끼리 닿아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의 거리였다. 안경 너머라 해도, 오이카와씨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셔터 소리가 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천천히 인화되어 나왔다. 오이카와씨의 입술 감촉이 새겨져 있는 사진이었다.






 

 





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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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져버릴까.

 

 

 

 

 

 

 

 

 

바다라는 건 무섭잖아.”

왜요?”

가끔은 잡아먹힐 거 같거든.”

 

- 시원한 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0월 말의 모호한 날씨에 바다라니, 애초부터 이상했다. 추운 것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약간 쌀쌀한,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날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이카와씨의 제안이었다.

바다에 갈까.’

그 말만 들어도 코끝에 소금 냄새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혀끝에 퍽퍽하게 소금이 묻었다. 왜요? 반문해봤자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에 나와.’ 라고 통보식으로 말할 게 뻔한 사람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씨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좋아 혰지만, 예쁜 옷을 구경하거나 희귀한 소품들을 사 모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 간다고 한다면, 글쎄. 바다를 구경한다기보다 예쁜 색을 띠는 조개를 모으거나, 근처 음식점에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빙수를 사 먹거나. 그 정도의 소일거리만 하고 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끔 오이카와씨는 바다에 가자고 조르곤 했다.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파도나, 귀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갈매기 소리 등바닷가에 서 있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운동화 속 양말까지 다 젖을 정도로 물속에 잠긴 적이 있지만, 이렇다 할 물놀이를 한 적은 딱히 없었다. 어쩌다 가게 된 동네 풀장에선 그렇게도 장난을 쳤으면서, 바다에선 오이카와씨는 점잖은 어른이 되었다. 애초에 저를 제외하고 보면 장난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째서 저에게만 그리도 짓궂은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바다는 오이카와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특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언뜻 동그란 지평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평상시와 달리, 슬쩍 물빛을 띠었다. 바다에 가자. 그렇게 말할 때의 오이카와는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오전 10.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가려니, 작년의 바닷바람을 떠올리고 다시 겉옷을 바꿔 입었다. 그대로 신발을 신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비오, 잠깐만.”

.”

어머니가 목도리를 들고 서 있었다. 검은색의, 털실로 짠 목도리. 끝 매듭의 올이 서툴게 묶여있었다. 몸을 돌려 마주 보자 어머니가 빙긋 웃어 보였다.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침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안을 휘어잡는 날씨였다. 어머니 양 볼에 말갛게 홍조 빛이 돌았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은, 다음 주인데요.”

, 알고 있어. 어제저녁에 완성했거든. 얼른 주고 싶어서.”

말간 볼을 소소하게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내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아직 새것의 섬유 냄새가 남아있는 털실이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털실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 따뜻한 온감이 퍼졌다.

. 잘 어울려.”

……, 감사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감사인사를 내뱉을 땐 입을 삐죽이게 된다. 어릴 적에 자주 지적받던 나쁜 버릇이었지만, 어머니는 이제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웃으며 대답해주곤 했다. 그 덕분일까. 한 박자 늦지만, 제대로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입이 되었다. 목도리에 파묻힌 탓에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일 축하해다시 말했다.

올해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네.”

올해12월인데요.”

바보. 생일부터가 내년인 거야.”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볼을 한번 쓰다듬었다. 차갑고 주름진 손끝이 부드럽게 볼을 왕복했다. 검은 눈동자 끝을 조금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다시 천천히 미소 지었다. 30. 나이의 앞자리에 3이 붙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저 카게야마 토비오일 뿐인데. 이걸 그 사람은 벌써 2년 전에 겪은 걸까. 그 사람 생일 때는 어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같이 보냈는데도, 그와는 벌써 몇 년이나. 몇 년이나앞자리 숫자가 1일 때를 넘어, 2일 때를 지나, 3일 때인 지금에 와서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거리에 있었고,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는가 하면 숨 막히게 뜨거운 스킨십을 할 때도 있었다. 30살이 훌쩍 넘은 그도 여전히 내겐 오이카와씨일 뿐인데. 나이가 들면 관계는 언젠가 변하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있는 감정도.

다녀올게요.”

목도리는 따뜻했다. 늦지 말고, 라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대답은 벌써 몇 년째 들어온 대답이었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볼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까슬까슬하던 손끝이 떠올라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늦잖아.”

오이카와씨야말로 집 앞이라고만 했지, 집 앞 카페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어쨌든. 늦었으니까, 토비오가 커피 사.”

오이카와씨는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앞에 나와 보니 평소에 기다리던 장소에 오이카와가 없는 걸 알고서, 급히 연락했다가 이런저런 골목길을 찾아보느라 고생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애초에 애매하게 집 앞이 아닌 카페라고 했으면 헤맬 일도 없고, 늦을 일도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가 마시던 커피는 거의 다 마신 뒤라 바닥이 보였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카페 안은 포근한 온기와 초콜릿 시럽 향기가 가득했다. 이른 시간의 카페는 손님이 별로 없는 터라 오이카와를 몰래 훔쳐보는 여성들도 없었다. 밝은 갈색빛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오이카와는 어딘가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조금 더 짧게 잘라 정돈된 머리는 카페의 브라운 조명에도 부드러운 홍차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는 제가 먹던 초콜릿 케이크의 마지막 한입을 내 입에 쑥 집어넣더니, ‘토비오쨩도 먹었으니까, 공범.’ 툭 내뱉었다. 입안에 퍼지는 촉촉한 단맛을 느끼면서 무슨 공범이요? 물었더니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였다.

초콜릿 케이크 살인사건.”

뭐라는 건지.

 

 

 

전철을 타고 1시간 반, 버스를 갈아타서 2시간. 도보로 걸어서 20분을 지나고 나면, 길 건너로 넓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걸어오는 동안 잔뜩 식은 몸을 바닷바람이 동그랗게 휘감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손에는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입속에서는 아직도 초콜릿 향기가 남아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짠맛, 혀끝에 맺힌 단맛. 바람이 센 탓에 눈동자 끝에 망울망울 달린 눈물까지. 최악이었다.

무슨 생각해?”

모래사장 한가운데까지 걸어오고 난 뒤, 오이카와씨는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 차가운 귀를 매만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순간 스치고 이내 오이카와 손에 있는 온기가 귓바퀴를 통해 이동했다. 오이카와의 손에도 남아있던 습기가 귓불에 닿아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심장이 펌프질했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몸을 덮쳐 손끝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마침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요.”

맞춰 볼까? 오이카와씨 생각했지?”

……

저런 말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몇 년 동안 배운-라기보다 이와이즈미씨에게 배운-방법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채 연신 파도만 바라보고 있자, 오이카와씨는 문지르던 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건방져.”

이내 귀에서 손을 뗀 오이카와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흐렸다. 몇 가지의 물감을 섞은 듯한 회색 하늘에는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파도, 젖어드는 모래가루, 가끔 풍기는 참기 힘든 소금 냄새. 몇 번이고 오이카와와 왔던 바다였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얀 거품이 일다가 가라앉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이질감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 다음 주인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맑은 홍차 빛 눈동자는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흰 피부가 바닷바람을 맞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32년이랑, 30. 겨우 2년이네.”

겨우 2. 겨우 2년인데도, 그는 항상 지나치게 컸다. 그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2년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오이카와 씨만큼 자라면, 오이카와는 이미 그만큼 앞서 걷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이카와의 등은 영원히 내 앞에 존재했다. 그런 2년을 앞서 보내고 있는 오이카와는 33살이 되는 내년 1, 배구선수로서 은퇴한다. 33. 운동선수로서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였다. 선수 생명은 길어봤자 30대 후반까지니까. ‘나이라는 숫자 앞에 3이 붙은 시점에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도 30살이 된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리라. 그는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국가 대표 세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생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허리 문제로 받고 있던 물리치료는 은퇴 후에도 받는 듯했다. 이렇다 하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높은 강도로 오래 지속한 운동 때문인 것을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은퇴하는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보여도, 그쯤은.

 

바다는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집어삼킬 거 같잖아. 통째로.”

오이카와는 쓴 초콜릿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바람이 한차례 불어 모래사장이 흔들거렸다. 눈앞에 흩날리는 모래가루가 싫어서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중 제일 큰 파도가 밀어닥쳐 와, 운동화 코끝까지 젖었다.

젖어봤자 운동화 코끝인데요.”

그렇게 방심하다간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힌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열기를 품은 손 두 개가 만나 얽히고, 매만지다가, 이내 마주 잡았다. 기분 좋은 온기가 주머니 속에 가득했다. 딱 손 두 개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그 주머니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하게 뭉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세게, 조금 힘껏. 그 대신 그의 단단한 손을 꽉 붙잡았다.

토비오쨩. 몇 년까지 있을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이고 같이 있었는걸요.”

내일이면 헤어지게 될지도? 갑자기 오이카와씨가 사라지거나, 토비오쨩이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애초부터 약속 없는 관계였으니까.”

약속은커녕, 그 어느 것으로도 묶이지 않은 관계였다. 그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잡고 있는 이 손도, 어느 한 쪽이 풀어버리면 다시 붙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나도. ‘그럼, 안녕.’ 중학교 졸업식 날 들었던 그 말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걸로 아예 끝일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벚꽃 잎 피어있는 봄날은 아닐지라도, 안녕이란 말은 머릿속에 그 장면을 자동 재생했다. 그곳이 푸른 바다가 피어있는 바닷가라 할지라도, 안녕은 그대로 안녕이었다.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지금까지처럼 하루하루 계속될지도 모르죠.”

있지, 토비오쨩. 같이 바다에 빠져버릴까.”

싫어요. 춥잖아요.”

거절의 이유가 그거야?”

올해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어머니가 그랬는걸요.”

……. 그러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토비오쨩은 착한 어린이니까.”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찬바람 사이에서 미소가 슬쩍 흐려졌다가,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르게 굽은 호물선이 작은 얼굴에 피었다. 립밤을 열심히 바르는 오이카와의 입술은 겨울에도 얇은 주름이 예쁘게 남아있었다.

바다에 빠지면 잡아먹히는 거 아니었나요.”

잡아먹히는 게 나을지도, 라는 생각을 했거든.”

이대로 잡아먹히면너도, 나도. 전부 바다 탓으로 하면 되잖아. 바다, ..에서. 토비오쨩이랑

오이카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향한 시선 끝에는 젖은 모래가 어느샌가 말라 있었다. 사이로 빼꼼, 작은 조개가 묻혀있었다. 오이카와가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이젠 거의 아플 정도의 악력이 심장까지 조이는 느낌이었다. 바다 안에서, 오이카와씨랑. 이것도 저것도 모두 바다 탓으로 하고 빠져버리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퇴도, 나이도 없는 바닷속에서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다른 세상인 것처럼 산다면. 시간이 지나 점점 흐려질 것들을 걱정하지 않은 채바뀌지 않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오이카와씨의 숨소리, 눈동자, 흰 피부, 목소리 같은. 생각만 해도 목 끝까지 뜨거워지는 오이카와씨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2년뿐인걸요. 저도 금세 32살이 될 거에요.”

그럼 난 34살이잖아!”

그땐 저도 금세 34살이 되니까요.”

36.”

“2년씩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2년뿐인걸요.”

“2

오이카와는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2년이라,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눈을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의 경계는 하늘과 맞닿아 뿌옇게 흔들거렸다.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는 항상 이질감을 주었다. 이 바다에 빠진다면, 말 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히고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세찬 바람 소리만 가끔 이명처럼 들렸다. 추웠다. 지독하게 추웠다. 오이카와와 연결된 손을 제외한, 전신이. 바다는 춥잖아요, 우리 바다는 피하는 거로 해요. 가끔 찾아와서 몰려드는 파도를 보고, 예쁜 조개를 찾아서 줍고, 여름에는 얼얼한 빙수를 먹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2년은 금방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약속 없이 그저 질질 끌고 있는 이 관계도 어느 정도는 약속이란 게 생길지도 몰랐다. 굳이 말로 하는 게 아닌, 지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놓지 않고 있는 손처럼. 그때가 오면 바다엔 더는 오기도 싫어질지도 몰라요. ‘바다에 빠지자고? 싫어, 춥잖아라고 오이카와씨가 먼저 말할지도 몰라요. 그때쯤엔그때쯤엔, 말로 하는 약속을 해요. 그땐 저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이카와씨. 저랑 사귈래요?”

















Tell me, Please don’t tell

--

 

 

 

 

 

Kageyama side

 

 

키스란 건 뭘까. 언제 하는 걸까. kiss. 케이아이에스에스. 사전을 뒤져보면, ‘키스, 입맞춤, 뽀뽀라는데. 아니, 물론 맞는 말이지만. 카게야마는 묻었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구겨진 인상은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교실 내에 가득 차오른 질척한 습기가 머리카락에 들러붙었다. 며칠 전부터 울기 시작한 매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을 젖히며 울어댔다. 매미가 한번 울 때마다 뒷목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미지근한 땀이 귀 뒤로 한줄기 흐르는 걸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책상의 네모난 공간 안에는 답답한 열기와 습기가 그득했다. 무거웠던 눈꺼풀을 내리면, 다시금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뭘까. , 어째서. 오이카와씨는 나에게 키스한 걸까. 오이카와는 그 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도 찾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찾아왔기에 성립된 관계였다. 나를 놀리고자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충분히 놀려준 이상 오이카와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찾아올 일도, 필요도 없겠지. 그래서였다. 오이카와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찾아가지 않는 건. 엎드린 카게야마의 뒤통수에 직사광선이 내리 쬈다. 머릿속이 다시 천천히 익어갔다. 몽롱한 의식이 카게야마를 뒤덮고, 그 날의 감촉이 떠올랐다. 조금 촉촉했던 오이카와의 입술, 땀이 송골 맺힌 보드라운 코끝이 맞닿은 느낌. 오이카와의 입술이 떨어진 뒤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매미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는 것 외에는.

뭐였을까. 카게야마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뭐였을까, 오이카와씨의 수수께끼는. 정답이 무엇이었을까. 장난이었는걸, 뭘 그렇게 진지해? 왜 키스했냐고 물으면 오이카와는 그렇게 대답할 게 뻔했다. 분명 또 풋, 하고 일부러 보여주듯이 비웃으면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마에 묻었던 땀방울이 팔에 질척하게 번졌다. 카게야마가 뱉은 숨이 그대로 책상에 닿아서, 이미 충분히 오른 열기를 더했다. 괜스레 머리에 열이 올랐다. 뜨거운 이마가 간질간질했다.

그만하자. 낮게 숨을 내뱉었다. 치아 끝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보드라운 귓바퀴의 감촉도, 입술에 남아있는 그 온기도, 모두 그만하자.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했고, 난 이번에도 당한 거고. 그냥 그걸로 끝인 거지. 오이카와씨랑은. 그냥 그걸로. 카게야마는 뜨끈해진 이마, 습기를 몰고 온 낮은 바람,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던 손이 이상하게 뜨거워져서, 열기를 잠재우고자 주먹을 쥐었다. 의식 안에서, 태양 빛이 부서지며 닿았던 홍차 빛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건방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방진 토비오쨩. 성격 나쁜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식이죠.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남겨진 사람은 어찌 되든중학교 때도, 난 당신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

다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거. 날 놀리려는 거. 날 가지고 놀려는 거. 그런데도 당신에게 할 말이라고는 왜 저한테 키스했어요?’라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난 아직도 여전히,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걸까. 잠의 호수로 빠져드는 의식 너머에서, 매미 소리가 울렸다. 그 날 울었던 매미일까, 한 마리가 줄기차게 울어댔다. 뜨거웠던 오이카와의 손, 뜨거운 입술, 이상하게 두근거리던 가슴. 죽을 것만 같던 숨 막힘.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정도로.

 

 

 

 

 

 

 

 

Oikage side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날이 맑았다. 비 오기 전의 어찌할 바 없는 더위가 하늘 끝부터 땅 아래까지 차곡차곡 가득했다. 여름의 낮은 뭉게구름은 몇 조각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칼날같이 직선으로 내리꽂는 태양을 막을 것은 없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이 햇빛을 흠뻑 받아 선명한 노란빛으로 빛났다. 그래서였다, 카라스노 고교 앞엔 노란빛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날과 같이, 교문 앞에서 선연한 태양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카게야마가 저 멀리서 나오는 것을 보고 첫날과 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후배는 첫날과는 달리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오이카와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날이 길어진 탓에 그때와 달리 노을이 지려면 아직 한참이라는 듯 태양은 더 진하게 타오르며 더위를 흩뿌렸다.

안녕,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놀리듯이 웃으며 말하자, 카게야마는 모래 씹은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용건도 끝났는데 왜 오셨어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꿍얼꿍얼 내뱉더니 그대로 오이카와를 지나가려는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또 뜨거웠다.

나랑 데이트할래?”

인사를 건네듯 가볍게 물어본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뜬 뒤 내뱉었다.

데이트요?”

. 데이트.”

요모조모 따져보면 역시나 잘생긴 그 얼굴 안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그날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피어올랐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뭐하러요?”

싫어?”

됐어요. 어차피 선배 명령이겠죠.”

오이카와는 싱긋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손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꽉 잡았다. 오이카와의 손에 있는 굳은살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두 손이 강하게 밀착했다.

갈까.”

오이카와의 모습이 그날과는 달랐다. 이상하게 깔끔한 목소리, 마치 옆에서 꺅꺅거리는 여자애들에게나 보여줄 것 같은 싱그러운 미소. 뭘까. 카게야마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래 봤자 카게야마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놀리려는 목적도 달성했고, 더는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을 텐데. 오이카와는 무얼 하려는 걸까.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카게야마와. 왜 키스했어요? 다시 혀까지 올라온 말을 카게야마는 꿀꺽 삼켰다. 쓴맛이 났다.

 

 

지독한 여름 때문이었을까, 카페에는 한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땀으로 젖은 몸을 순식간에 식혔다. 갑자기 몰려드는 한기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면서,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쪽으로 홍차 빛 눈동자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해지자구?”

피식피식 웃으면서. 카게야마의 안에 첫날의 기억이 지나갔다. 오이카와와의 첫날. 변덕스러운 그가 찾아왔던 첫날과 같이, 그는 또다시 반복하려는 걸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카게야마는 무언가 결정한 듯 오이카와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솔직해지자구요. 오이카와씨가 원하는 대로 절 놀렸으니까, 이제 다 없던 일로 해요. 키스도, 손을 잡았던 것도, 데이트도.”

카게야마가 툭툭 토하듯이 내뱉었다. 이상하게 명치 깊숙한 곳이 욱신거렸다. 태양이 몸을 찌르던 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무언가가 콕콕 박혔다. 오이카와가 이끌었던 손, 입술의 감촉, 왠지 그게 다. 여름날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습기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도 사라지는 걸까. 아지랑이와 같이 사라지는 걸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시선을 비껴 내려가더니 마찬가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흰 피부가 전등 빛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오이카와는 흐리게 웃고 있었다. , 솔직해지자.

있잖아,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손을 끌어, 그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채웠다. 깍지 낀 두 손이 선선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포근한 열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마주 보자, 그 홍차 빛 눈동자가 카게야마의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순식간에 빛났다. 솔직해지자.

있지, 토비오쨩. 나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이요?”

엄청 두근거렸거든. 그때.”

그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굽히고, 얼굴을 틀어 밀착하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귓가에 닿은 입술에서 나온 그의 한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한기 도는 전신에 뜨거운 한숨이 퍼질 정도로 가까이. 카게야마의 몸이 움찔 떨리면서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오이카와가 깍지 낀 손을 당겨 제지했다. 귓속에 숨을 불어넣듯이, 숨소리만으로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눈앞에 있는 오이카와의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내가 났다.

토비오쨩이 깨물었을 때.”

이어진 통증에 카게야마는 앗, 낮게 내뱉었다. 급하게 손을 들어 귀를 가리고 뒤로 몸을 빼자, 오이카와도 좁혔던 거리를 되돌렸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씹은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 예쁜 치열이 저의 귓바퀴에 와 닿았다는 사실이 무의식중에 점점 확실해져서, 귀에서 시작한 통증이 전신으로 아찔하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또 놀리시려는 거에요? 짜증스럽게 내뱉으려던 입술을 카게야마는 다시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흰 피부가 희미한 열로 붉어져 있었다. 카페의 조명은 상아빛으로 흘러내리는데, 오이카와는 그 아래에서 더 붉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온이 올랐다. 36.7도로 이루어져 있는 체내의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지금도, 두근거리거든. 엄청.”

오이카와는 마주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제 심장에 갖다 댔다. 일정한 박자로 조금의 쉼도 없이 뛰어오르는 펄떡임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제 손도 똑같이 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마저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다른 한 손이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슬며시 닿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 아래에서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두근대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게도.

토비오쨩도 두근대고 있네.”

오이카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도 거짓말, 했지?”

카게야마가 말라붙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리면서, 그 행동 하나까지도 오이카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카게야마에게 기울였던 아까와 같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나 때문이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 사이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와 오이카와의 시선이 겹쳤다. 검고, 푸른 눈동자. 오이카와가 눈동자를 한번 깜빡일 동안, 카게야마는 그저 곧게 오이카와만을 바라봤다.

왜 키스하셨어요?”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은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카게야마는 기어코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뇨, 연이어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낮았다.

아뇨, 됐어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짧게 불렀다. 동시에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금세 다시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졌다. 카게야마의 크고 까만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가득했다. 더위를 잊은 몸은 오이카와로 가득 차서, 귓속에 그날 들었던 매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미, 한 마리만 그다지도 울어대던 그 날, 쏟아 내리던 햇살, 녹아서 한 덩어리의 습기가 된 것 같았던 마주 잡은 손.

, 좋아해?”

오이카와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잡고 있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심장에 닿아있던 서로의 손은 떨어져, 남은 건 차가운 테이블 위에서 둘만의 여름을 맞잡고 있는 손 두 개뿐이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꾹, 굳게 다물어졌다가 다시 열렸다. 한숨이 나올 새도 없이 다시 닫혔지만.

, 물어요. 그런 거. 알고 있잖아요.”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싫어요. 오이카와씨 같은 사람. 심술궂고, 맨날 장난만 치고, 놀리기나 하고. 갑자기 찾아와서 데이트니, 키스니, 그런 거. 그런 짓만 하는 오이카와씨는 싫어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오이카와의 입술이 천천히 뜨거워져서, 그와 맞닿았던 카게야마의 입술도 이제는 달싹일 정도로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카게야마는 결국 눈을 감았다.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에요.”

. 나도.”

감긴 카게야마의 속눈썹에 오이카와는 살며시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뜨고, 검고 푸른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약간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 장면에서 그런 표정을 짓나? 오이카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게야마의 미간을 꾹 눌렀다.

감동적인 장면인데 표정이 왜 그래?”

솔직한 오이카와씨뭔가 기분 나빠요.”

진짜 한 대 때려버릴까. 요 꼬맹이.

건방지다니까, 진짜.”

그래도 싫진 않아요. 솔직한 오이카와씨.”

대답할 새도 없이 카게야마의 입술이 오이카와를 덮쳤다. 오이카와가 했던 가벼운 키스보다도 더 깊게 입술을 얽어매는. 떨어질 줄 모르고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눈을 마저 감았다.

역시 건방진 녀석이라니까.












Tell me, Please don’t tell

-중-

 

 

 

 

 

oikawa side

 

 

 

조각난 구름 몇 조각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부는 후끈한 열기는 전날보다도 더욱 심해져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에 답답한 공기가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몽롱한 머릿속에서 부옇게 전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길래 또 바보 같은 표정이냐.”

이와이즈미가 땀이 한두 방울 묻어있는 뺨에 대고 손부채 질을 하며 툭 내뱉었다. 한두 마리 울기 시작한 매미는 고요한 공간 안에 가끔씩 귀를 찌르는 이명을 던져넣었다.

으음, 그냥.”

무슨 일 있냐.”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어제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니, 오늘은 종일 이 상태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매미가 울기 시작했고, 햇빛은 더 강하게 지면을 태웠고, 날이 더욱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미안, 이와쨩. 나 먼저 갈게.”

또 어디 가서 사고 치려고?”

사고 치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확인해보는 것뿐이야.”

뭐를?”

이것저것.”

 

 

뭐하러 또 오신 거에요?”

누가 봐도 질색이란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쏘아붙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불만 섞인 목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있지, 나랑 데이트할래?”

데이트요?”

카게야마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위아래로 흘기는 느낌이 들어, 살며시 드러난 이마에 딱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데이트.

저 연습할건데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금세 툭 내뱉었다. 방금까지 한 건 연습 아니야? 카게야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투명한 땀방울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배구 바보. 그런 점은 중학교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배구밖에 모르는, 건방진 후배 녀석.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겠다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미소 짓는 오이카와를 보고, 카게야마가 인상을 더욱 구기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 뭐라 뭐라 꿍얼거리더니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내뱉었다.

어디 갈 건데요.”

데이트, 갈 거야?”

오이카와씨가 강제로 후배를 끌고 가는 걸 데이트라고 부르고 싶으시다면요.”

우와, 토비오쨩 건방지네~”

장난식으로 내뱉으면서 오이카와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와 동시에 비어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연습을 마치고 땀이 식어가던 카게야마의 손이 순식간에 열기로 물들었다. 거봐, 역시 좋아하는 거 맞지?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자, 카게야마의 얼굴이 순간이나마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순간적인 당황과 경계, 동시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슬며시 붉어진 얼굴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미간을 찌푸린다든가, 인상을 구긴다거나, 입술을 삐죽 내민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 보일 뿐인.

이상하게 묘한 두근거림에 금세 놀려주면서 놓으려고 했던 손을 놓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어정쩡하게 마주 잡은 채로 발을 움직였다. 손에 열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전날 갔던 카페,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길이 멀게 느껴졌다. 같은 곳을 돌고, 돌고, 또 도는 느낌.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발은 분명 움직이고 있고, 몸도 나아가고 있고, 태양도 기울고 있는데 왜일까. 카게야마와 이대로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길을 걸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시선을 돌려 살며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조금 아래로 내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오이카와와 보폭을 맞춰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의 타는 목구멍에서도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용한, 두 사람의 간격 25센치 정도의 적막 안에서 매미 한 마리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따라오면서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그렇게 울어댔다. 아지랑이가 저 끝에서 피어올랐다. 해가 더욱 뜨겁게 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람 한 점 없는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손은 놓을 수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랐던 목구멍이 더욱 비쩍 말라서, 약간의 통증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등을 타고 땀이 한줄기 흐르는 감각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등에 흐르는 간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손을 더욱 꽉 잡으면서, 카게야마를 다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바닥을 향했던 그 눈길은 이제 곧게 뻗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 밤하늘 같은 눈동자.

토비오쨩.”

발을 멈추고, 오이카와가 낮게 불렀다.

?”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린 순간, 조금 놀란 표정으로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당황한 탓일까, 슬며시 벌어졌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틀고 마치 키스할 것 같은 모양새로 카게야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말을 내뱉지 못한 카게야마의 입술에서 뜨거운 한숨이 나왔다. 결국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눈꼬리를 물들이면서 눈을 꼭 감았다.

,”

오이카와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카게야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슬며시 뜨자, 오이카와는 푸하핫,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그러게 솔직해지라니까?”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웃어 보이며 놀리듯이 말하자, 카게야마의 노란 끼 도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면서 오이카와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 어라? 무방비하게 웃고 있던 몸이 좀전과 같이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오이카와의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그 코끝이 귀 뒤의 연한 살을 간지럽혔다.

저라고 오이카와씨 못 놀릴 줄 아세요?”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더니, 이내 귓바퀴에 날카로운 통증이 훅 퍼졌다.

우왁?!”

오이카와가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징징 울리는 욱신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여름이어서 그런걸까, 더운 날씨 때문인 걸까. 오이카와의 흰 피부가 연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투명한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던 얼굴도 마찬가지여서, 붉어진 카게야마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 또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

말이 이어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는데, 정작 나오는 건 공기 거품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인상 나쁜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보면서 아직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습기가 손과 손 사이에 그득했다. 언제 땀방울이 배어 나와서 흘러내릴지 모를 정도로, 손가락 사이사이에 몽글몽글 열이 맺혀있었다.

이상해. 이거, 뭔가 이상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토비오쨩이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토비오쨩이 먼저 나를 좋아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난 그저그저. 그런데도 왜 자꾸만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죽을 것만 같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와 이어진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서, 모두 녹아서 그대로 손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오이카와씨, 두근거리고 있죠?”

카게야마가 쌤통이다라는 건방진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요 녀석이?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그 벌려진 입 사이로 고른 치아 선열이 보이자, 카게야마가 깨문 귓바퀴가 다시 욱신거렸다. 그가 깨물었던 잇모양이 하나하나 느껴져서, 귀가 마치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아니거든?”

전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건방지네.”

오이카와씨도요.”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지 카게야마는 미간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따라오던 매미는 울지 않고 있었다. 방금까지 강하게 울던 소리가 그치고, 조용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어느새 서로 간에 깍지를 끼고, 조금의 틈도 없이 겹쳐진 손안에는 더운 공기가 가득했다. 열기를 담은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렀다. 입술을 슬며시 열고, 오이카와는 낮게 내뱉었다.

건방진 토비오쨩.”

고른 치열이 보이는, 살짝 벌려진 카게야마의 입술에 오이카와는 그대로 가볍게 키스했다. 메마른 입술은 약간 짠맛이 났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향기였다. 매미 한 마리가 한차례 크게 울었지만,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의 숨 삼키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날이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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