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 소재 있습니다.

- 모브가 주인공입니다만 오이카게입니다.

- 글에 나오는 모든 의학 지식은 의학적 사실 및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박이로 붙어있는 전등 몇 개는 약한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교체할 때가 된 건지 계속 깜빡였다.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둘러싸인 방은 조금 추웠다. ?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구석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홀대와 수액. C대 병원 로고가 박혀있는 환자복. 병원? 그 외 몇 가지 단서가 이곳이 병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문, 손잡이가 없는 창문 등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 ‘라니? 양쪽 손을 들어 보면, 낯선 굳은살과 손금이 보였다. 내 손이 이랬던가? 아주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방 한쪽에 세면대와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 미닫이문이 열렸다.

, 일어나셨나요.”

백의를 걸친 남자 의사 2명과 백의를 걸치지 않은 한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사 두 명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나 둘 중 한 명은 키가 크고 주름이 깊게 팬 얼굴에 눈썹 숱이 적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음하며 운을 띄웠고 운을 띄울 때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백의 왼쪽 가슴주머니에 수많은 종류의 펜과 펜 라이트 등이 정돈되지 않고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주머니 아래 명찰을 보니 그의 이름은 하야마인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의사는 인자한 미소 때문인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살이 두껍게 쌓인 양쪽 볼과 턱 아래는 창백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힘겹게 셔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았다.

한 명의 남성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깊게 우린 홍차 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빛에 따라 반짝거리며 그 색을 바꾸었고, 곧게 뻗은 큰 키와 몸에 좋게 붙은 근육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의사 두 명과는 거리를 띄우고 미닫이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의사 둘 중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하야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

그의 말을 무시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원치 않게 그런 모양새가 되었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지, 아닌지 조금 망설였다. 아주 잘생긴 미남미닫이문 옆에 서 있는이 차분한 표정으로, 동시에 꿰뚫을 것처럼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한 물빛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 짙은 남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겉에 걸친 코트는 끈이 없고 허벅지까지만 내려오는 얇은 재질이었다.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조합이었다.

하야마는 내 무언(無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의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그는 안경을 고쳐 올리고 나를 마주 봤다.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더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뒤적였다.

많이 어지럽진 않으세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다른 증상은요?”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이라고 답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의 목소리에 더 큰 의문을 느꼈다. 이런 목소리였던가. 성인 남성의 목소리라기보다 조금 가볍고, 원한다면 가성도 낼 수 있을 것 같은 얇은 목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남성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하야마는 흡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살이 적은 얼굴 전면에 근육이 경련하며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힘겨운 듯 금방 미소를 풀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왼쪽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바라봤다. 수액은 크기가 컸고, 무어라 적혀있었지만 앉아있는 상태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야마는 다시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의 안경이 다시 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 뇌 이식 수술이요.”

뇌요?”

무슨 소리지.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도 그대로였다. 꼼꼼히 주변부를 만져보자 무언가 수술 자국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뒤통수에 아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신경 다발의 이식입니다. 사고를 당하셨어요. 12중 추돌 자동차 사고였죠. 당신의 몸은 아주,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가슴 아래쪽이 아주 납작하게 구겨져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만은 온전했죠. 뇌가 살아있으니 숨도 쉬고 있었고요. 기흉과 출혈로 호흡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뇌에 영양을 공급한 건 사실이죠.”

하야마는 말을 마칠 때마다 숨을 고르고 안경테를 올렸다. 나는 남성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하야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자 구름 없는 하늘이 보였다. 적어도 1층 혹은 2층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얇은 환의 사이로 찬기가 스며들어왔다. 계절. 날씨. 기억이 날 듯 말 듯 모호했다. 시린 이의 계절. 하늘로 높게 치솟는 연기의 계절. 바람이 칼을 날카롭게 갈아 목에 들이대는 계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야마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기존에 뇌사로 사망 시 기증을 원한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에요.”

기증, 수술이라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 저기.”

부끄럽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증, 수술, 뇌사 등 단어 자체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의사들이 들어오기 전 봤었던 내 손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어요. 당신은 젊었고, 수술을 서두른다면 뇌 기능이 정상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말 그대로 몸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카게야마 토비오씨는 머리만 있다면 문제없이 살 수 있을정도로 몸에는 손상이 없었고요. 그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고, 하야마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는 다른 의사 한 명과 남성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저들과의 눈빛 대화를 끝마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차 빛 눈동자의 남성은 이제 살며시 웃고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스운 것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닌, 그에게 있어 웃는다는 행위가 인사와도 같다는 듯이 남자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현재 당신은 기증자인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쓰고 있습니다. 의족이라 말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의미죠. 뇌 이식 수술 기술은 현재 항생제 및 면역억제제만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요.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카게야마 토비오씨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하야마는 고개를 강하게 두세 번 끄덕였다.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해줬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그는 얇게, 아주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몇 번 뒤적거렸다. 하야마가 서류를 볼 사이 다른 의사 한 명이 인자한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몸을 기울였다.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언어에 문제가 없으신 걸 보니 뇌 기능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성함 한 번 알려주시겠습니까.”

성함성함이요?”

성함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성함. 이름. , 나의 이름. 난 누구인가. 내가 누구지. 지금 현재,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이 더러운 기생충은, 뭐지. 심장 고동이 거세지면서 더욱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고조되는 박동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대를 튀어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남성의 깊은 눈이 하지 말라는 듯 강한 눈동자로 나를 꽉 붙잡았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제 이름, 말이죠.”

. 그렇습니다.”

인자한 미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의사 한 명이 천천히 대답했다. 서류를 뒤적이던 하야마도 나를 바라봤다. 모두가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걸걸한 사막처럼 모래알갱이가 씹히는 착각도 들었다. 다만 나의, 것이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이자 입술이었다.

그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지. 무엇이었을까. 낯선 목소리를 가진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입술과 목을 빌려 이름을 빚었다.

스도 하루나입니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 강하게 소리를 냈다.

 

 

 

 

 

 

 

Lost in Memory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거의 보름 가까이 신세 진 병원 입구를 나서고 밖으로 나오면 높은 하늘의 계절이었다. 지금까지 지냈던 15층 병동을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후 그 병동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야마도 만날 일이 없었다. 외래에서는 카노우 교수님을 만날 테니까당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분이 교수님이란 걸 내가 안 것은, 일주일이 지나 그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였다. 두툼한 잠바를 챙겨 입어도 목이나 허리, 발목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겼다. 스도는 얇은 입김을 새어 보내고 다리를 옮겼다. 남성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원 수속 끝났어?”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호감 가는 얼굴을 한 그는 첫날과 비슷하게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밝은 갈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게 흘러내리는 코트는 그의 큰 키와 퍽 잘 어울렸다. 머리 한쪽을 빗어 넘기고 왁스로 고정한 그는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강하지 않은 꽃향기가 났다.

. 방금요.”

첫날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자주 스도의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유일한 방문객이었고, 스도는 그와 대화를 하며 병원 생활을 적적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대부분은 기억과 관련한 상기 훈련이었다. 하야마를 비롯한 의사 몇 명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가지였다.

이름은 스도 하루나, 현재 22살로 미야기 현 K 대학교에 재적 중이었다. K대학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가지고 있던 학생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도는 학생증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기에, 스도는 일부러 거울을 보진 않았다. 스도는 기억 훈련을 지속한 뒤 그가 여동생이 한 명 있는 4인 가족의 장남이면서, 2년 전 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그 이후 또 이런 끔찍한 사고에 휘말리다니 운도 없다며 스도는 가끔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대학을 1년 휴학한 뒤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갈까.”

남성은 짧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넓은 어깨는 사진으로 봤던 그의 코트 위 모습보다 더 넓고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항상 사진보다 실제가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그 눈동자의 빛깔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스도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발음해서일까. 예쁘고 앙증맞게 들리는 그 이름은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스도는 그가 없을 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고는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현재 도쿄에 있는 A대 졸업반 4학년이다. 배구로 유명한 A대 안에서도 유명인사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인 세터로 꽤 유명한 사람인지 병원에서 스포츠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면 배구란에 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실려 있기도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T대 상대로 압도적 센스 자랑

“A대 배구부 공식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역량 분석

 

스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그가 고교 3년 동안 전국대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과 어떤 스파이커와도 금방 호흡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걸 스도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는 낯은 조금 낯설게 보였다. 저가 그의 웃는 얼굴을 얼마나 많이 봤다고 낯설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도는 입술을 올리지 않고 속으로만 웃은 뒤 기사 끝쪽에 달린 조막만 한 문구를 보았다.

 

뛰어난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 & 카게야마 토비오 전격 분석 :: 월간 밸리 다음 호 게재 예정!”

 

지금의 스도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기사였다. 해당 홍보 문구가 달린 월간 밸리가 이번 달 잡지이니 월간 밸리 다음 호에 스도가 원하는 기사가 실릴 예정이었다. 스도는 서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스도가 다시 잡지를 뒤적이며 오이카와의 기사를 찾는 순간 적당한 세기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나쁜 일을 저지른 것처럼 콩콩 뛰는 심장 때문에 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을 옷차림치고는 지나치게 얇게 차려입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한번 바라보고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닫았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찬바람의 꼬리가 잘린 덕분에, 방은 비슷한 정도의 온기를 유지했다. 오이카와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스도의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요.”

스도는 목을 가다듬고 오이카와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어 곱게 접고 입김을 내뱉는 일련의 행동과정을 거쳤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병원 생활 중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부모님, 여동생 모두 사고로 죽었으니 천애 고아와 다름없는 나를 신경 써 준 걸까. 몸의 주인이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관계를 그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정의했다. 중학교 선후배 사이로서 이제 성인이 다 된 마당에, 그것도 뇌사 판정을 받고 다른 사람의 뇌가 이식된심지어 기억마저 다른자의 병문안을 오는 게 평범한 걸까. 그것도 도쿄에서 여기, 미야기까지. 스도는 제가 생각하는 평범에 대한 정의에 자신이 없어졌다. 평범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개인별로 다르니, 오이카와에게 그것이 평범이라면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도는 빛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질 나쁜 사람처럼 웃었다.

기증자를 아는 사람이 오는 건 불쾌한가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스도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오이카와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생각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의 시선이 스도의 옆에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홀대에 닿았다. 그곳에는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수액 백이 달려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말없이 지켜봤다. 스도를 찾아오는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스도가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이카와 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알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알고 싶었다. 거울을 보면 보이는 깊고 푸른 눈동자로, 어쩐지 금세 눈물 한 방울을 흘릴 것처럼 우수를 두르고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러질 못하는 성격이라.”

어차피 제가 나이도 어리잖아요?”

……그래. 좋아.”

오이카와는 스도를 조용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지못한 듯 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도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그러한 행동이, 저가 거울을 일부러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오이카와는 그러다가도 스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심산인 듯 스도만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므로, 그럴 때면 지금 자신의 얼굴혹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는 오이카와가 평소 오던 시간보다 늦게 온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찬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그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산스럽게 코트를 벗어 정리하고 면회용 의자에 앉았다. 그는 눈썹을 좁히며 웃었다.

미안, 이와쨩이랑 얘기하다 보니.”

…….”

스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한 박자 느리게 ,’ 중얼거리더니 스도의 손을 바라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미안. 이와쨩이라는 건 내 소꿉친구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괜찮아요.”

스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작게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사과해야 할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것. 스도는 그 점에 있어 오이카와를 이해하고 싶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토비오쨩이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실제로 오이카와는 때때로 스도를 잘못 부르고 나서 빠르게 정정하곤 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 스도가 이 방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구름 없는 하늘이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달력을 봤을 땐 벌써 한 가을이었다. 줄곧 병실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를 알 수 없는 스도는 오이카와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가늠하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계절 상관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리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이틀 뒤 퇴원이라는 말을 스도는 다시 떠올렸다. 하야마는 여느 때처럼 이젠 짜증 날 지경인 운을 떼더니 약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퇴원합시다. 몸에 있던 찰과상, 외상도 다 없어졌고. 기억이 아직 부정확하지만, 서서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 한 명에게 스도씨 내일모레 퇴원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딱히 퇴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스도는 망설여졌다. 퇴원하고,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 그는 기생충이었다. 스도는 틈이 나는 대로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이전 몸에 대한 기억 한 조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이 제 몸인 것처럼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도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이카와씨는 카게야마 토비오씨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했죠?”

. 맞아.”

카게야마 토비오씨아니,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실래요? 카게야마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오이카와는 창가에서 눈을 옮겨 스도에게 향했다. 그는 스도의 환자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넌 이제 스도 하루나인걸.”

오이카와씨 말씀대로, 전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이카와씨가 듣기엔 웃긴 소리일지 몰라도, 전 카게야마씨를 알고 싶어요. 알고, 기억하고 싶어요.”

스도는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이 없었다. 스도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바심이 커졌다. 지금 오이카와를 잡지 않으면, 그가 영영 스도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도의 병실에 찾아올 때도 그저 방문객이었고, 오이카와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도는 그와 영영 타인이었다.

저 내일모레 퇴원합니다.”

다행이네. 축하해.”

그러니까, 퇴원 날 딱 하루만이라도 부탁드려요. 저를 데리고 카게야마씨와 관련된 곳에 데려가 주세요. 단 한 곳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좋아.”

그러지 말고, 부탁드려요! ……?”

좋다고. 데려가 줄게. 단 하루 동안.”

오이카와는 어느새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도중이었다. 스도는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심산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빨리 승낙했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어안이 빠진 표정에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작게 퇴원 축하해중얼거린 후 밤색 코트를 날리며 나갔다. 스도는 그 뒤로 이틀 내내 오이카와가 데리고 갈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틀이 지난 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앞에 나오자, 오이카와가 약속대로 서 있었다.

약속 지켰지?”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그는 어쩐지 남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도는 잡지에서 말하던, ‘오이카와 토오루의 다양한 매력에 대해 떠올리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 사이에서 모델처럼 웃다가도, 여름 한 철의 햇빛이 어울리는 소년처럼 웃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스도를 데리고 간 곳은 센다이시체육관仙台市体育館이었다. 입구의 안내판을 보니 봄고 지역 예선 결승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스도는 어쩌면 난생처음 올지도 모르는 지역 체육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이카와가 놓고 간다한마디 한 뒤에야 체육관 실내로 들어갔다.

TV 같은 곳에서 비춰주는 코트 사이드가 아니라, 한쪽 코트 뒤에 앉자 색다른 시야가 보였다. 스도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스코어는 2 1. N 고교가 이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밀집해서 앉은 곳에서는 응원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호루라기 소리와 선수들이 소리치는 소리, 그 외에 운동화 밑창과 바닥이 마찰하여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스도는 체육관 내부에 응집한 공기가 답답했다. 답답한 심장을 죄이는 건 떨림이었다. 스도는 제 쪽에 보이는 N 고교 선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봤다. 선수들은 모두 공 하나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로 동료와 눈 맞춤을 하고, 감독과도 손가락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인 만큼 좌석은 드문드문 비어있을 뿐 그 외에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스도의 바로 뒤에서도 남자 두 명이 현 상황에 대해 중계를 하고 있었다. 스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터, 리베로, 미들 블로커, 스파이커코트에서 보니 좀 더 잘 알겠네요.”

…….”

오이카와는 스도와 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도는 갑작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몰래 공부한 것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든 저를, 오이카와는 분명 꿰뚫어 본 것이리라. 스도는 괜한 말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입을 다시금 열었다.

오이카와씨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포츠 잡지나 월간 밸리 같은 걸 병원에서 봤어요. 초보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도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속공이 성공해서 선수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장면이 보였다. 눈을 굴려 세터에게 초점을 맞췄다. 스도는 속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저런 역할을 하는구나. 공을 올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누구나 세터에게 공을 보낸다. 중요한 역이구나. 스도는 잡지 어딘가에서 본 코트 위의 지휘자라는 문구를 기억했다. 굉장한 기교를 부리거나 엄청난 음색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가 있음으로써 코트는 새롭게 태어난다. 공을 올리는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시합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스도의 손끝이 간지럽고 심장이 어색하게 뛰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분명 배구를 기억하고 있겠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손끝을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겠지. 스도는 뛰어 내려가 코트 안에 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심한 편두통이 신경을 좀먹었다. 이게 바로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거겠지. 스도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봤다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토비오도 세터였어.”

.”

짜증 나는 천재였지.”

오이카와는 이가 보이게 미소 지었다. 호전적인 미소와는 다르게 그는 몸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댔다. 스도는 저가 병원 간호사에게 졸라서 얻어낸 월간 밸리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이름은 월간 밸리 곳곳에 등장했다. 특히 오이카와가 적혀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뛰어난 세터이자 고향이 같은 중학교 선후배 두 사람에 대한 드라마는 흔히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유일하다시피 한 월간 밸리 인터뷰는 스도가 가장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식 실업팀 선수도 아니고, 대학 배구팀 선수에게 그런 지면을 할애했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모든 질문에 아주 간결한 단답으로 응한 카게야마도 대단하다 싶었다. 분명 고집이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많은 분이 원하셨는데요. 카게야마 선수에게 오이카와 선수란?

카게야마 이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한번 이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배구에서도 저번 시합 때 이겼던 걸로 알고 있고요.

카게야마 항상 저보다 저 앞을 뛰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그 등을 잡을 때면 이기고, 놓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오이카와씨의 등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스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구계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이카와 두 명 모두 이후의 인생이 더 촉망받는 인물이었겠지. 스도는 카게야마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가 고집이 세고 목표 의식도 있으며 심지어 뚜렷한 목표도 있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에는 매번 제 머리를 이파리 따듯이 똑 떼서 그날의 사고 현장에 도로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폐가 저를 거부하듯 숨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스도는 기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사진으로 보는 카게야마는 거울로 보는 것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어쨌든 토비오쨩은 스도한테 몸을 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걸까요.”

오이카와의 어조는 상냥하면서도 냉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N 고의 세터를 쳐다봤다. 시합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2 2, 마지막 세트를 앞둔 상태였다. N고 세터는 몸을 풀며 동료들과 무어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N고 세터가 한 번 빙긋 웃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갈까.”

, .”

스도도 몸을 일으켰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는 말로 하지는 않아도 금세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스도는 다만 그걸 느끼곤 했다. 카게야마라면 그 이유를 알았을까. 스도가 묻지 못하는 질문이 한두 방울씩 모여 마음속에서 이미 샘을 이루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음으로 스도를 데려간 곳은 센다이 기차역仙台駅이었다. 센다이역 내부로 들어갈 때 스도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기차로 가야 하는 곳인가요?”

걸어갈 수 있으면 기차역으로 데려오지 않아.”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스도는 멋쩍게 대답한 뒤 오이카와의 뒤를 마냥 따라갔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미야기 출신이나 대학은 도쿄에 재적 중인 상태였다. 애초에 12중 추돌 사고는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가 겪은 일이었다. , 도쿄역에 가려는 건가. 스도는 제 나름대로 답을 도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이카와가 건넨 기차표는 스도의 예상을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을 뿐이었다.

 

미야기현宮城県 센다이역에서 야마가타현山形県 야마데라역山寺駅까지, 다이토大東산을 지나 약 한 시간 삼십 분. 스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에 탑승한 뒤,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도쿄역이 아닌 건 스도에게 뜻밖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마데라에 카게야마 토비오와 관련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스도에게 기차표를 건넨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도는 그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제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오이카와가 그의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작은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센다이시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하늘이 아무런 제약 없이 높이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마주 앉아있었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도 마주 앉은 승객이 보였는데, 승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기차에 오르자마자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스도는 그 승객 중 한 명이 N 고의 리베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연달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배구 경기가 떠올랐다. 세터의 움직임과 공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스도는 하나하나를 꼼꼼히 떠올렸다.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창밖을 보다가 곁눈질로만 스도를 마주 봤다.

, 배구는 잘 모르지만.”

스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 세터보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하는 건 스도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었다.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스도는 배구 초보자에 불과할 텐데저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우습게 여길 게 분명했다. 스도는 양 귀 끝이 보얀 온기를 띠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스도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도는 내가 배구하는 걸 본 적이 있어?”

, 아뇨.”

그렇지?”

오이카와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감정이 그의 두 눈동자를 가렸다.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배구를 가볍게 논한 건 스도의 잘못이었다. 스도는 잡지에서 얻은 그의 지식으로 감히 카게야마인 것처럼그를 평가한 게 부끄러웠다. 스도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들지 않자,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위로라도 건네듯 부드럽게 말했다.

토비오쨩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신선하네.”

카게야마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말한 대로야. 짜증 나는 천재.”

엄청 똑똑했나 봐요.”

오히려 반대야. 너무 멍청해서 힘들었다니까.”

스도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카게야마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는 것에 왠지 모를 짜증이 일었다. 거울로 본 카게야마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족함 없는 얼굴이었고신분증 너머로 본 자신의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심에 찔렸다오이카와가 표현하는 만큼 멍청해보이진 않았다. 스도가 짜증이 난 듯 눈가를 구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니야?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보다 멍청한 건 다 알고 있네요.”

말을 마치고 스도보다 더 놀란 건 오이카와였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스도의 눈을 피한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속으로 있는 힘껏 후회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의 억양, 어조 등 전부 스도에게 어색했다. 오이카와는 스도를 토비오쨩으로 잠시나마 착각이라 해도 된다면한 게 분명했다. 스도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스도는 만약 저 자신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이카와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뭐가?”

토비오쨩이라 부르셔도요. 오이카와씨에게는 토비오쨩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오이카와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서 확고하게 선을 그어 놓았던 토비오쨩스도의 경계가 아주 잠시라도 허물어졌던 건 그의 실수였다. 또한 그 실수가 단지 순간의, 일시적인 실수가 아님을 그도 스도도 알고 있었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잖아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스도.”

오이카와는 긴 공백 끝에 답했지만 스도는 그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렇게 나온다면 스도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도는 다만 작게 입을 내밀고 괜찮은데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스도의 행동을 곁눈질로 바라보고선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스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 두 명을 보다가, 그들이 내린 뒤에는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창가와는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등성이 보였다. 다음 역인 야마데라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가을 후반부로 접어든 산은 붉고 노란, 때로는 주홍빛의 군집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스도는 풍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오른쪽 눈동자 끝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스도는 이 풍경을 본 것만 같았다. 아마 여행잡지 어딘가에서였겠지. 본인이 한가롭게 여행 잡지나 들춰 볼 만큼 여유로운 인생이었는지에 대해서 지금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산등성 사이의 움푹한 곳으로 가느다란 실처럼 흐르는 냇물은 햇빛을 받아 시린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은 스도에게 어색했다. 마치 뒤바뀌듯 카게야마 토비오의 시간이 멈춤과 동시에 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스도는 그 사실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이 몸으로 산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눈으로 새하얀 하늘과 구름 안개가 드리운 산, 날 선 냇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이라는 안내 방송이 다시 한 번 들렸다. 오이카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스도에게 말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먼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스도 또한 그를 따랐다.

 

 

 

 

 

 

기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스도는 입고 있는 잠바를 여몄다. 오이카와는 한 차례 웃었다.

추워? 나약하네.”

오이카와씨야말로 코가 빨간데요.”

난 원래 코가 빨개.”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코를 한번 훌쩍였다. 얇은 셔츠에 코트 차림이니 추울 게 분명했다. 산에 올 거였으면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스도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기차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높게 굽이진 산길과 그 사이사이의 절이 보였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절도 언뜻 보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꼭대기에는 눈도 쌓여 있었다. 춥다고는 하지만 이 계절에 눈이라니 농담이 심했다.

갈까.”

가다뇨?”

저곳. 토비오와 간 적이 있어. 야마데라山寺.”

그 이름 그대로, 산속에 이어지는 절이었다. 오이카와는 놀리듯이 정상까지는 1,000개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야 해. 스도, 괜찮겠어?’ 물었고 스도는 대답 없이 입을 내밀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은 알 수 없었다. 운동선수이니 그럭저럭 갖춰져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몸이 저를 잘 이끌어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돌계단을 앞서 걷기 시작한 건 오이카와였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산행이었지만 1,000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스도는 오르는 중간중간 자신이 올라온 길을 뒤 돌아봤다. 흰 눈덩이가 얼룩처럼 검은 산 주변에 퍼져 있었다. 스도와 오이카와가 내렸던 기차역이 이슬만큼 작게 보였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경련했다. 확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동자는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도는 다시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뒤를 따랐다.

어찌 보면 전 카게야마씨와 뒤바뀐 사람이잖아요.”

무슨 말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다. 정상이 가까이에 있었다. 오이카와와 스도는 사잇길로 난 절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직 산 정상의 사원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찬 공기가 온몸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왔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등을 바라봤다. 넓은 어깨에는 코트가 잘 어울렸다.

제가 생기고 카게야마씨가 사라졌으니까요.”

…….”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오이카와씨 외에 다른 사람이 절 본다면 절 카게야마씨로 볼까요, 스도로 볼까요? 겉모습은 카게야마씨잖아요.”

넌 스도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스도는 무언가 대답을 하려다가, 저의 눈 끝에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눈을 닦아놓은 돌계단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한심한데도 닦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카게야마를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눈 끝이 바르르 떨렸다. 스도는 지금 느끼는 저의 감정이 맞는 건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맞든 맞지 않든, 그건 분명 스도의 심장을 쪼고 있었다.

 

힘들어 죽겠다.”

정상에 놓인 정자에는 네모난 상자를 두르듯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마를 가를듯한 추위였다. 오이카와는 죽는소리를 내뱉더니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값비싼 코트가 나무 의자에서 튀어나온 조각에 헤집어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스도는 깊게 심호흡했다. 몸이 지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 테두리에 몸을 붙이고 숨을 내뱉었다.

굉장하네요.”

. 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바람 소리, 햇빛을 반사하는 눈은 이세계(異世界)의 물질 같았다. 산등성 어딘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콰 코, 눈 중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스도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스도의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선 그는 건조한 시야 안에서 눈처럼 투명했다.

토비오쨩이랑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오이카와씨도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웬 건방진 소리야?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스도의 이마를 한번 톡 쳤다. 스도는 말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현하고 산등성을 다시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스도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스도.”

.”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오이카와는 애원하듯이, 동시에 마치 이뤄지지 않을 걸 부탁하듯이 말했다. 스도는 오이카와가 저를 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배구를 하라는 부탁은 스도이기에 하는 부탁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몸을 가지고 있는 스도 하루나이기에. 문득, 스도는 산 사이에 걸친 투명한 구름을 보다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매번 스도를 조용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에게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씨와 카게야마씨는 어떤 관계예요?”

중학교 선후배 사이.”

오이카와는 금방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다시 묻냐는 표정이기도 했다. 대답하는 오이카와의 입이 하얀 입김에 뒤덮였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입김은 그 자리에서 녹았다.

아뇨, 그거 말고요.”

스도는 고개를 가로젓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스도의 눈동자와 겹쳤다. 그의 눈을 빛내고 있는 홍차 빛 눈동자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비추고 있었다. 스도는 바로 그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책에 적힌 문구를 읽듯이 스도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가 거울에서 봤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 조용했던 눈동자, 저를 다그치듯 몰아세웠던 푸른 눈동자가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담기면지독한 그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채색됐다.

 

 

 

 

 

 

미야기 역에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하늘 한쪽에 걸린 태양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푸른색부터 보라색까지의 파스텔톤 그라데이션이 하늘에 펼쳐졌다. 오이카와는 기차역에서 나와 스도를 마주 보았다. 그는 조금 서툴게 웃었다.

조심히 가.”

스도는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스도와 했던 약속을 지킨 그는 두 번 다시 스도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스도는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만날 수 있죠?”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건 스도예요, 아니면 카게야마씨예요?”

오이카와는 안타깝게 웃어 보였다. 보랏빛 하늘이 그의 머리에 닿아 묘한 빛을 자아냈다. 오이카와는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를 조금 매만졌다.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눈을 내렸다가 결국 스도를 마주 봤다. 그는 마치 하야마처럼 운을 뗐다.

짓궂네. 토비오쨩이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씨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

오이카와씨도 그걸 알고 있고요.”

……갈게.”

오이카와는 스도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실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봤던 그의 등이었다. 스도는 오렌지빛에 휩싸여 가는 그의 등을 보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어깨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발견했다. 오이카와가 멀어질수록 오렌지빛, 주홍빛 하늘이 번져 땅을 덮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퍼지고, 오이카와의 뒷모습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못 본 건가. 눈을 한두 번 비비다가 뒤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찌그러지는 차들. 치솟는 불꽃.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 살코기가 타는 냄새. 어그러진 모습으로 자동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귀 양옆에서 울려 퍼지면서 스도를 덮쳤다.

아악!”

스도는 그 자리에서 고꾸러졌다. 앞으로 주저앉은 스도는 심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오이카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 머리가 아팠다. 심한 통증과 구역질이 위를 덮쳤다. 토하고 싶은데 창자를 한 꺼풀씩 칼로 벗겨내는 것 같은 심한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강한 빛과 함께 장면 장면이 튀어나왔다. 스도의 피에 젖은 신분증. 오토바이 아래에 깔아뭉개진 청년의 모습. 청년이 쓰고 있던 헬멧 사이로 검붉은 빛 피가 끝도 없이 새어 나와 다리를 적시는 장면. 다리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다리의 근육? 하얀, 흩어진 살점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것은? 뇌가 갈고리에 채인 듯한 심한 통증을 느끼며 스도는 의식을 끊었다.

 

 

 

 

 

 

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하얀 몸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력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건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하얀 공간이었다. 저 앞에 오이카와가 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얇게 입은 옷차림. 곧 죽어도 멋 부릴 것 같은 그는 여전했다.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썩 잘 어울렸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이카와 주변으로 새하얀 부스러기가 가득해서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옆을 걸어가며 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오이카와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눈앞의 사람만 보고 있었다.

 

가끔이어도 좋고, 자주여도 좋고, 어떤 형태든 좋아. 배구는 계속해.

그냥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쳤고, 저 앞에는 다른 오이카와가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홍차 빛 눈동자에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번의 그는 말이 없었다. 넓은 어깨가 조금 자신 없는 것처럼 쳐져 있기도 했다. 걸어갈 때마다 오이카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흰 공간 속의 그는 하얗고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따라 걷던 중 천장혹은 하늘이라고 해야 옳을까에서 작은 솜 덩어리가 눈처럼 떨어졌다. 솜사탕을 일부 뜯은 것처럼 엉성한 솜 덩어리는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 솜 덩어리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의 몸에 닿아 녹았다. 그 순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걸어가며 솜 덩어리 하나가 몸에 닿아 녹을 때마다, 하나씩.

웃지 말고.’

오이카와가 서투르게 웃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양팔을 폈다. 팔에 닿아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오이카와가 서서히 명확해졌다. 멈췄던 기억의 시냇물이 소리 없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담갔다.

 

전 오이카와씨를 좋아하는데요.

「…알아.

오이카와씨는요?

글쎄.

「…그렇게 대답하는 거 반칙이에요.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말을 안 하시잖아요.

「…토비오.

 

배구, 계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엇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해.

 

그럼 오이카와씨를 만날 수 있나요?

 

 

 

 

 

 

나는 눈을 떴다. 은빛 천장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백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셨나요. 괜찮으세요?”

그의 왼쪽 가슴에 명찰이 달려서 흔들거렸다. 하야마라는 이름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펜 라이트를 들어, 내 눈 양쪽을 번갈아가며 비췄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펜 라이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몸 이곳저곳이 아파서 몇 번 뒤척이다가 일으켰다. 방은 연한 초록빛과 상앗빛의 색조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에는 C대 병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병원? 왜 병원에? 고개를 갸웃하자 햐아마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가지고 있는 서류를 앞뒤로 뒤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가 귀 뒤로 빗어 넘기려는 옆머리가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이에요. 길가에 쓰러졌던 거 기억나지 않으세요? 또 기억에 변화가 있으셨나요?”

쓰러졌다고요?”

.”

자동차, 사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함, 성함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안경을 올렸으나 금세 다시 내려갔다. 그는 내가 말하기 전 적어도 열 번은 안경을 올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요.”

……기억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야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종의 발작까지 일어날 것 같은 격양된 움직임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기억? 돌아왔냐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하야마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더니 의자에 다시 천천히 앉았다.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열심인 것 같았다. 낮게 읊조리듯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환각이 보이거나, 무언가 환청이 들리거나 하진 않죠? 몸에 변화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물감이라든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등

없는 것 같은데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하야마는 카게야마를 곧게 바라보았다. 숱이 적은 눈썹 아래로 옅은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해리성 기억 장애였습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게야마의 입을 막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과거나 자기 신분 및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기억장애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의 행세를 하고, 본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특징이죠. 그중에는 새로운 이름, 직장, 주소 등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요.”

정체성?”

보통 자연적으로 회복합니다만, 기억장애 기간의 일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희는 카게야마씨가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해리성 둔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스도 하루나라는 인물이며, 그와 관련된 가족관계나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스도 하루나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물론 그렇죠. 원래 그렇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그러니까, 그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게야마씨는

 

 

끔찍한 사고였다. 카게야마가 통증을 이기고 눈을 뜨자 주변은 불바다와 같았다. 치솟아 오르는 불길, 무언가 타는 냄새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이 귀를 메우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 불꽃, 불길이 입을 벌려 차와 사람들을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어지럽고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시야를 둘러보았다. 몇 걸음 앞에 청년 한 명이 오토바이 한 대와 차 한 대에 짓이겨진 채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의 헬멧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카게야마에게까지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는 기어코 구토하고 말았다. 그가 쓰러진 옆으로 피에 젖은 지갑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지갑에 손을 댔는지 카게야마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누군가를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지갑을 열고, 그의 신분증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웃는 여성과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남성, 작은 여자아이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가족사진이었다. 신분증에는 사진 속 청년이 남성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미야기 현 소재 K 대학교 학생증. , , 하루, 카게야마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문득, 다리로 시선이 향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더욱 심해져 절단된 것 같이 타는 통증이 번졌다. 검은 피칠이 된 다리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본 다리 주변에는 타고 있는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살점? 벌려진 다리, 뿌연 시야 안에서 헤쳐진 저의 다리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쇠로 만든 종으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비명이 이명처럼 귓가를 머물렀고,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웠다. 울 것만 같은, 울고 싶은 감정의 불꽃이 심장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병원에서 눈을 뜬 카게야마씨는 그의 행세를 하기 시작했어요.”

스도 하루나의 행세요?”

. 자신은 스도 하루나인데, 도대체 왜 자기를 자꾸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부르냐며. 몇 번 과격한 행동도 보였죠. 불안한 심리에서 표현된 행동화(Acting-Out)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타국에 계신 카게야마씨의 부모님 대신 보호자 격으로 온 오이카와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오이카와씨가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킬 것처럼 크게 움직였다. 하야마가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눌렀고, 카게야마는 시야가 흔들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의 말에 따라 저희는 뇌 이식 수술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을 쳐서 당신이 스도 하루나처럼 느끼게 만들었죠. 강제로 현실을 들이대는 방법이 성공하리라는 법도 없고, 더 강한 충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다리는 정상이었고 스도 하루나로서의 당신이 회복할수록 다리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당신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는 점뿐이었죠.”

다리. 카게야마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고 자신의 다리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멍을 포함해 아직 피부가 완전히 수복된 건 아니지만 그걸 제외하면 매끈한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야마는 그의 행동을 보더니 서류에 무언가 적어나갔다.

퇴원 후 오이카와씨와 외출을 한 당신은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무언가 더 궁금한 건 있나요? 기억에 혼란이 있거나 한 점은요? 기억장애 기간의 기억이 없는 건 정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야마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눈을 있는 힘껏 구기면서까지 웃는 게 정말 기뻐 보였다.

정상, 이라고요?”

카게야마는 따끔거리는 머리 한쪽을 짚었다. 단풍나무 위에 포개져 있던 눈 더미, 골목마다 숨어있던 절과 굽이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 조각 조각나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기억해내려 하면 오이카와의 안타까운 미소만 떠올라서 이어지는 조각들을 맞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오이카와씨는요?”

하야마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버렸어요. 당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고요.”

카게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하야마가 주의를 주었으나 카게야마는 두 다리를 딛고 다시금 일어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외투를 걸치고 카게야마는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어서 가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자꾸만 재촉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버거웠으나 카게야마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야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씨?”

가야 해요.”

어딜 가시게요? 아직 안 돼요. 인지 사고 검사를 하셔야죠. 어지러우실 텐데.”

가봐야 해요. 오이카와씨를 만나야,”

카게야마씨!”

하야마가 막으려고 했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카게야마는 그저 달렸다. 마침 눈앞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뛰듯이 몸을 구겨 넣고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봤으나 핸드폰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저 열리기 전에 뛰었다. 병원 밖으로 뛰어나가고,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몇 번이고 본 오이카와의 등은 보이지 않았다. 환의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몸을 바람이 거칠게 덮쳤다.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절대 제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알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한 가닥씩 몸을 휘어 감았다. 기억이 이렇게 또렷한데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씨!”

바람 소리가 이명처럼 귀를 때렸다. 하이얀 솜 덩어리가 한두 개씩 흩날렸다. 어머, 이 시기에 눈?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말을 나누며 하늘 사진을 찍었다. 꿈에서와 달리 회색빛깔 하늘에서 찢긴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눈이 닿아 녹아도,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향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만날 수 없을 거야.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소리치고 싶은 입술이 은색 한숨만 연신 내뿜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엷게 웃음 짓던 그는 드물게 차가운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와 겹치고, 그의 손이 카게야마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배구를 하면 만날 수 있어.”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울기보다 미소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배어 나오기 전에 입꼬리를 올려버리는 사람이었다.

너와 내 사랑은 배구니까.”

 

 

 

 

 

 

 

 

 

- 해리성 둔주는 실존하는 기억장애입니다만 글 안에서의 내용은 픽션입니다.

- 해리성 둔주의 개념을 참고한 문헌 :

양 수 외(2013). 정신건강간호학. 서울, 현문사.

 약한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 월간 오이카게 합작 홈의 편집을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Love Actually








  소리 없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퐁당, 퐁당 액체가 물과 만나 작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그 파도는 변기 벽에 부딪혀 스러졌다.

  “우, …윽. 하아, 하아… 욱.”

  변기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타는 듯한 목을 타고 올라온 건 노란 신물이었다. 더 나오지 않는 것을 부여잡고 꼭꼭 짜내는 위장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신물과 섞인 침 몇 방울이 이미 더러운 변기 물에 떨어졌고, 오이카와는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와 찌릿한 코를 닦아내려고 손을 들었으나 이내 주저앉아버렸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동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표정. 공을 들고 서 있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박제된 나비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입과 코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다시 울렁거렸으나 오이카와는 손 한 번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다. 카게야마는 돌고 돌았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오이카와 선배” 낮게 말한 뒤 오이카와에게 공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서브를 가르쳐주세요.


  한여름 밤의 악몽과도 같았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이카와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서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코 안을 깨끗이 씻어내자 하얀 덩어리와 침, 일부의 노란 신물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전부 쓸려 내려가면 될 일이다. 내장 구석구석에 붙은 토기(吐氣)도, 머릿속에 박제된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아주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내려앉았다. 세상이 하얗게 번지는 것이,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뿌옇고 제 모습조차 흐릿한데도, 머릿속 카게야마는 속눈썹 한 올조차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는 공을 매만졌다.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자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더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자리로 휙 가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만, 오이카와는 길게 바라봤다. 뛰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부옇게 빛을 냈다. 오이카와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지는 부위에 손가락을 댔다. 며칠 전 병원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심전도검사, X-ray 등 몇몇 기초적인 검사 및 활력 징후까지 확인했으나 오이카와에게 이상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극히 건강했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박동을 느꼈다. 뚝, 뚝뚝뚝, 뚝뚝뚝. 끊어질 듯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빠른 맥박이 이어졌다. 누가 만져 보더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심장이 과도하게 팽창해, 폐를 짓누르는 탓일까. 혹은 여름 특유의 짭조름하고 답답한 공기 때문일까. 숨쉬기가 힘들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찮냐.”

  옆에 있던 이와이즈미가 목소리 톤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가?”

  매만지던 공을 몇 번 바닥에 내려쳤다. 오늘도 해야 할 연습이 많았다.

  “네 표정 장난 아냐.”


  “또 숨이 안 쉬어져서 그래?”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서는 걱정 끼가 묻어나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좋은 친구지만, 오이카와는 가끔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계속 거론하는 건, 이미 생긴 구멍을 후벼 파 넓히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그저 웃어 보인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 하든 소용이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브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문득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손목에 손가락을 갖다 댈 필요도 없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있는 심장이 뼈를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살을 찌르는 직사광선이 온통 저에게로 모이고, 등이 탈 것처럼 뜨거운 태양 탓에 다시 숨이 막혔다. 후, 후우. 들이쉬고, 내뱉고. 억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과도한 심박 수와 산소가 부족한 뇌 때문에 다시 토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오이카와를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바라봤다.


  연습 전 마셨던 스포츠 드링크가 그대로 나왔다. 연한 소다 빛깔의 좋아하는 음료수였는데.

  “하아….”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변기 물을 내렸다. 심한 심박동으로 울렁거림을 느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나 현재 오이카와가 겪는 증상이었다. 오이카와는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은 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심장병’을 검색했다. 심계항진, 부정맥, 심근경색, 협심증 등…… 오이카와가 느끼는 증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심장의 고통, 숨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건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처음 들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서브를 가르쳐 주세요.”

  어떤 부탁 조도, 애원하는 말투도 아니고 마치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고,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왜?”

  오이카와는 화가 나 있었다. 선배로서 응당 후배보다 침착하고 후배를 이끌어줘야 한다, 고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와이즈미가 들으면 다르지 않다 말하더라도 오이카와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배우고 싶어요.”

  “관심 없어.”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붙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 뒤뜰에 울렸다. 뒤뜰에 심긴 나무의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 먼지처럼 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이카와의 머리가 울렸다. 손발이 조금 떨리면서 식은땀이 등 뒤로 배어 나와, 오이카와는 약한 오한을 느꼈다. 다리, 발목, 복부, 귀 뒤 등 여기저기에서 박동치는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로 인해, 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꿈을 꿨다. 초원과도 같이 넓은 평원에는 보랏빛 풀이 번져 있었다. 깊은 밤과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 풀빛 냄새가 섞인 공기는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차가웠다. 폐가 찢기듯 차가운 공기 탓에 오이카와는 꿈인데도 목이 얼어붙어 호흡곤란을 느꼈다. 저 앞 초원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실루엣만으로도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알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공을 들고 서 있었다. 흰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에 짧은 앞머리. 동그란 눈동자까지, 오이카와가 아는 카게야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빛도 없는 검은 꿈 안에서, 카게야마의 주변에만 반딧불이 몇 마리가 떠돌았다. 어스름한 불빛이 카게야마의 말간 이마와 노란 빛깔의 팔, 흰 운동화까지 비췄다.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입을 연 카게야마의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뒤 그 몸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넘어진 카게야마의 아래로 보랏빛 풀이 흩날리고, 흰 티셔츠는 이슬방울에 젖어들었다. 카게야마 주변의 반딧불이는 흩어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흰색 가루가 총총히 박힌 검은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을 힘주어 눌렀다. 배구공을 놀리는 오이카와의 악력이 결코 서툴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괴롭지 않은 듯 오이카와를 두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에 맞닿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보드라웠다. 톡 오른 복숭앗빛 입술이 기억 속에 떠올랐고, 제 손 아래에 짓눌린 게 그 입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오이카와의 허리 주변을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이 맞닿았고, 카게야마의 심장과 오이카와의 심장이 한 소리로 박동했다. 아니, 오이카와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제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유성우 무리가 소리 없이 카게야마에게로 떨어졌고, 초원의 밤은 광활한 우주와 같이 별의 죽음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손이 새하얗게 변질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카게야마 때문이었다.

  “왜?”

  오이카와는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야.”

  보랏빛 풀이 누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초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왜 나야. 왜 너고, 왜 나야. 어째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에 맞춰 오이카와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이슬이 묻어 머리카락이 젖어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손에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수술용 칼이 들려있었다.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에 대고 조심스레 긁자, 눈에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실선이 생기고 그 안으로 솜털이 오른 속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토기가 밀려왔다. 동시에 기대감도 있었다. 이 칼이 저 자신에게 닿기 전에 해야만 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도 들었다. 오이카와는 실선 사이에 손을 넣고 흰 티셔츠를 벌렸다.

  카게야마의 폭신한 살결에 닿고, 조금 힘을 주어 칼을 내리그으면 말랑거리는 젤리처럼 피부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술용 칼에 달라붙는 피부조직을 떼어내면, 노란 빛깔의 동글동글한 지방과 갈비뼈 위에 겹쳐진 엷은 핑크 빛의 근육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총총한 눈동자로 오이카와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어 나오는 장막 액과 혈액이 카게야마의 흰 티셔츠를 적셨다. 점점이 퍼지는 붉은 꽃잎이 카게야마의 가슴에서부터 퍼졌다. 근육에 손을 대보면 강한 박동이 갈비뼈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목구멍을 조이는 호흡곤란 때문에, 오이카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칼을 들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렸다.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기분 나쁜 꿈이었다.




  “너 연습 할 수 있겠어?”

  “완전 괜찮다니까. 이와쨩 자꾸 왜 그러실까.”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은 뒤 체육복으로마저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상이던 놈이 말은 잘하네. 이와이즈미는 옷을 대충 구겨 접고 사물함에 넣었다. 새벽 2시에 오이카와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는 ‘혹시 자?’ 한 마디였다. 아침에 그것을 보고, 이와이즈미는 요 며칠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를 만나면 심장을 내리누르는 것도 자주 있는 모습이었다.

  “이와쨩?”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탈의실 입구에 서서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이와이즈미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서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이미 아주 옛날 일이었다.

  ‘누구야, 쟤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던데. 이름이 독특했어. 카게… 뭐였지.’

  ‘카게야마 토비오쨩.’

  ‘알면서 물어본 거냐!’

  말 그대로 첫 만남 때였다. 오이카와는 그 날, 꽤 길게,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이카와의 그런 눈빛은 이와이즈미의 인상에 오래 남아있었다. 오이카와가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부원이 연습하고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넓은 체육관이 사람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등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작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수많은 인원 사이에서 작고 검은 머리통이 오이카와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 나쁜 꿈을 기억해냈다. 꿈에서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풀의 향기가 어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선‐”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인사가 마저 끝나기 전,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카와의 입술에서, 항상 다른 부원의 이름만 오가던 입술에서 저의 이름이 불린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잠시 눈동자를 크게 뜬 뒤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다듬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다음 경기용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료수, 주문하러 가자.”

  다음 경기용 음료수?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미리 정해놓은 매장에서 직접 공수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더더욱 연습 시간에 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부르자, 카게야마는 자신이 들고 있는 공을 바라보고 다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이후 네, 작게 대답한 뒤 저가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공을 잡고 있던 손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손이 꿈에서보다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육관의 2층 창문 위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카게야마의 볼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유성우도 검은 밤도, 낮의 햇빛도 카게야마 주변을 돌고 돌았다. 카게야마는 지나치게 빛나는 존재였다.



  파란 하늘, 한두 번씩 울리다가 멈추고 다시 일제히 이어지는 매미 소리가 더웠다. 팔에 닿은 공기가 끈적거렸고, 눈에 닿는 초록이 부셨다. 길가에는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바닥에는 매미 허물과 떨어져 죽은 매미 사체 한두 개가 보였다. 하수구 주변에는 진물이 번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서 걷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작은 볼이 더위 탓인지 조금 붉었다. 보폭 차 때문에 오이카와가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에서 네 걸음을 걸어야 하는 카게야마의 발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입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가슴을 새가 쫀 듯 강한 흉통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시야에 현기증이 맺혔다. 올라가는 심박동과 여름의 습습한 공기가 기도를 눌렀고, 다시 호흡곤란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서브, 옆에서 연습하는 거 봐도 될까요.”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돼.”

  오이카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조금 충격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야.”

  꿈에서 물었던 말이었다. 왜 오이카와여야만 하는가. 왜 카게야마는 키타이치 중학교에 왔고, 왜 오이카와는 그의 2년 선배이며, 왜 오이카와의 서브여야 하는가. 옆에서 걷던 카게야마가 재빨리 다리를 굴려 오이카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졌다.

  “오이카와 선배의 서브를 보면 가슴이 뛰니까요.”

  “가슴이 뛴다고?”

  “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작은 손은 꿈에서 오이카와가 갈랐던 카게야마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 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세어 보았다. 뚝, 뚝뚝뚝… 지나치게 빨랐다.

  “어떻게 뛰는데?”

  “네?”

  “가슴이, 어떻게 뛰냐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고민하듯 머리를 갸우뚱해보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어. 두근두근… 하고요? 오이카와 선배가 서브를 치려고 뛰어오르면, 체육관 안의 빛이 전부 오이카와 선배한테 모여서, 약간 눈이 부시니까 눈을 세게 뜨고 봐야 해요.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움직이고, 공 소리가 울리고 나면 가슴이 뛰어요. 강하게.”

  매미가 울고 있는 공기 속에 오이카와의 심장 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갔다. 그 속에 또, 카게야마의 심장 고동이 함께. 오이카와는 꿈에서처럼 손을 대지 않아도, 가슴을 맞닿지 않아도 카게야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빛 볼, 동그란 어깨에 떨어지는 태양 빛은 카게야마의 색과 섞여 부드러운 여름의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카게야마의 검은 밤, 아니 짙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는 오이카와를 담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공을 들고 있던, 꿈에 나왔던 카게야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의 한낮에, 나무 한 그루마다 후두두 떨어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마주칠 때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박동치던 심장은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심장은 거짓말쟁이인 오이카와를 심하게 힐책하고, 오이카와의 전신을 뒤흔들어 놨으며, 카게야마의 앞에서 언제나 오이카와를 배신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 오이카와는 테이핑 되어 있는 검지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그곳에 오이카와의 심장이 있었다.


  "여기가 멈추면, 가르쳐줄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겹치고, 코끝의 한숨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보다 뜨거웠다. 질식해서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로 구역질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이 심장이 그렇게도 소리친다면, 오이카와도 평생 거짓말쟁이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멈추면, 토비오쨩이 원하는 거 전부 줄게."

  그때까지는, 심장이 오이카와에게 굴복하기 전까지는, 카게야마에게 '아무것도 줄 이유'가 없었다.

  달콤한 한숨 한 번까지도.




  * HAPPY BIRTHDAY TORU!






다시 태어난 여름








카게야마는 꿈을 꿨다.

 

바닷속에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고, 보석같이 작고 파란 물고기 떼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햇빛이 투명하게 부서지며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렸다. 카게야마는 나신으로 바닷속에 있었다. 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함이 기분 좋아 눈을 살포시 감았다. 볼과 가슴, 허리에는 보드라운 물의 손길이 닿는 듯하면 떨어졌다. 몸에 힘을 빼면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로 카게야마는 멈춰 있었다. 바다 위쪽으로 약한 바람이 불었고, 가끔 물살이 흔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언뜻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어머니가 즐겨 듣는 건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작은 드럼 소리가 들리는 재즈 음악이었고, 아버지가 즐겨 듣는 건 오래된 팝송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추천해주는 음악을 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귀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물방울 소리, 찌잉 머리를 달구는 햇볕의 뜨거움,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잠꾸러기 토비오쨩.”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오이카와가 샐쭉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듯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우린 홍차와 같이 예쁜 색의 머리카락, 형태 좋은 눈동자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조금 붉었다. 카게야마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그나, 방금 잠에서 깬 카게야마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꿈에서 나신인 이유가 이거였나.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꿈 때문에, 카게야마는 의도치 않게 조금 웃었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웃어?”

지금 몇 시예요?”

일어나서 오이카와씨 얼굴을 보고 처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궁금하면 옆에 있는 시계를 보시던가요.”

 

고개를 돌리니 작은 탁상시계가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830.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가시지 그랬어요.”

지금 여행지에서 오이카와씨 혼자 밥 먹게 하려는 거야?”

아뇨, 배가 고프시다면야

됐고, 일어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오이카와는 데구르르 표정을 바꾸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단단한 근육의 조합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고 그에 맞춰 상체를 올렸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벗어나 왼쪽에 마련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의 나신 뒤쪽으로 투명한 통유리 창문 2, 그 너머로 하얀 베란다가 보였다. 아침의 태양 빛을 받아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연초록과 하늘색을 섞어놓은 바다는 지평선과 맞닿아 뿌연 경계선까지 뻗어있었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하얀 베란다까지 온통 새하얀 숙소는 커다란 배구공 안에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작았다.

 

안 갈 거야?”

 

오이카와는 하얀 반소매 셔츠에 속이 비치는 민트색 칠 부 카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아색 면바지를 입었다. 상체를 일으켰을 뿐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뇨, 일어났어요. 그냥

 

꿈을 꿨어요. 뒷말을 삼키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기댔다. 오이카와의 숨소리에 따라 솟았다 가라앉는 오이카와의 배가 기분이 좋았다. 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가 나왔던가, 안 나왔던가. 바다가 나왔단 건 기억이 나는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뱃속에서 낮은음을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

 

얼른 가자. 나도 배고파.”

 

오이카와는 어루만지던 카게야마의 뒷머리를 부축하듯 톡톡 두들겼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오이카와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파도치는 소리가 시계 소리 사이사이로 들렸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바다를 보러 온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

 

 

남쪽 섬에 가자고 얘기를 꺼낸 건 오이카와였다. 기간은 719일부터 21일까지,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해서 그 전후로 이틀. 3일의 여행이었다. 카게야마는 미야기를 벗어나고 어디에 도쿄가 있는지, 오사카 혹은 삿포로가 있는지 등 지리에는 무심했다.

 

일본인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라, .’

 

오이카와는 질렸다는 식으로 카게야마를 걱정스레 쳐다봤고, 카게야마는 몰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항상 하는 말로 응수했다. 오이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야.”

?”

비행기 타고 갈 거니까, 여권 준비해놔.”

?”

외국이라고.”

 

설마 생애 첫 해외여행이 될 줄이야. 남쪽 섬이 정확히 어디인지, 어느 나라의 남쪽 섬인지, 위도 및 경도는 몇 도이며 어떤 문화가 있는지 등. 카게야마가 여행지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는 건 영어를 쓰는 나라이며, 바다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뿐이었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여권을 찍기 위해 갔던 사진관에서, 좀 더 웃으라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던 사진사를 떠올렸다. 30분을 들여가며 힘들게 찍은 여권사진을 보고 오이카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찍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여권 사진은 대학교 1학년 때 찍었다고 하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 앳돼 보였다.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여권과, 카게야마가 이번에 새로 만든 여권에는 같은 마크가 찍혀있었다. 새삼 카게야마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자리를 옮기자 일본어를 쓰는 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뿐이었다.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안도감을 느꼈다. 오이카와와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다는 식으로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같은 나라에, 같은 언어에, 같이 여행이라니. 얼마나 복 받은 건지 알라고,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호텔 1, 바닷가가 보이는 자리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석에 앉았다. 6층 위, 같은 자리에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숙소가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연청빛 바다가 보이는 자리였다. 짚을 엮어 만든 듯 곳곳에 지푸라기가 튀어나와 있는 의자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선택한 자리에 앉고 바다를 바라봤다. 머릿속 바다보다도 에메랄드빛이 진했다. 연둣빛 바다가 흔들리고, 레스토랑에서 보아도 속이 비쳐 보이는 바닷속에는 암갈색 바위가 군데군데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물고기까지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지, 전날 저녁에 보였던 파란색에서 형광 노란색, 장미처럼 붉은색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백색과 상아색이 섞인 해안가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 무리가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는 무리, 파라솔을 펴고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듣는 무리,카게야마가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쨩.”

 

어느새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앞에는 망고주스가 놓여있었다. 크고 투박한 얼음 두세 개가 동동 떠 있는 유리잔은 노란 빛깔로 채워져 있었고, 같이 나온 망고 1개는 반으로 잘려서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없어?”

 

떠보는 듯이 묘한 웃음을 띄우고,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고막 안을 채웠다. 카게야마는 오늘이 여행 둘째 날인 걸 떠올렸다.

 

생일, 축하해요.”

, 고마워.”

 

오이카와는 그제야 얼굴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자리한 입술에는 망고 주스가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도 앞에 있는 망고 주스를 한 입 먹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밥 먹으면 바다를 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집에 가도 생각날 것 같다며?”

오늘 태어난 오이카와 선배랑 같이 보고 싶어요. 어제의 오이카와 선배랑 오늘의 오이카와 선배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네. 28년 전 난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오이카와 선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토비오쨩은 태어났겠지. 2년 뒤에.”

그러면 혼자서 이곳에 앉아있을까요. 혼자서 바다를 보면서.”

평행 세계의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만약의 이야기예요.”

글쎄. 그렇다면 토비오쨩은 방금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망고 주스를 시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숙소에 묵지도 않았겠지.”

 

카게야마는 그런 자신을 상상했다. 이 숙소에 묵지 않고, 바다를 보러 가지 않고, 망고 주스를 먹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 조건은 단지, 오이카와가 없다는 것뿐인데.

 

 

오이카와 선배가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

바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오이카와 선배가 없었다면, 바다가 저런 색이라는 것도 몰랐을 테고, 망고 주스가 이렇게 달다는 것도. 아주 많이, 몰랐을 거예요.”

나도 몰랐을 거야. 토비오쨩이 망고 주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파도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도, 에어컨 없는 방에서도 잘 수 있다는 사실도.”

 

똑같네요. 카게야마가 말하자 오이카와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

 

 

오이카와는 신발을 벗었다. 하와이안 꽃이 그려져 있는 샌들 한 짝을 손에 들고, 희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는 백사장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앞서 걷는 오이카와의 한 발자국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앞을 보면 오이카와의 어깨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바닷가를 향해 난 야자수 나무 그늘은 백사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 파라솔을 펼친 몇 사람들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다는 레스토랑 창가에서 봤던 것보다 선명한 에메랄드빛이었다. 물살이 몰려드는 소리, 백사장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손톱만 한 물고기 몇 마리, 속눈썹을 무겁게 누르는 햇볕

 

바람이 기분 좋아.”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디건을 벗은 그는 하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목을 타고 흐른 땀 몇 줄기가 셔츠 윗자락을 적셨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예쁜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

 

카게야마는 끄덕이며 대답한 후 오이카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볍게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와 함께 와있는 이 여행에 대해서, 바다에 대해서, 오이카와의 생일에 대해서, 카게야마를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서. 그 모든 게 작은 심장 안에 꼭꼭 담겨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온 건 짤막한 단어 몇 마디였다.

 

생일 축하해요, 오이카와 선배.”

토비오?”

그냥, 다행이에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오이카와 선배여서.”

태어나주셔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 저보다 2년 먼저, 배구를 하는 사람으로.”

, 고마워.”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깊숙이 굽히며 웃었다. 오이카와의 얼굴 뒤로 작고 큰 파도가 넘실거렸다. 하얀 파도 빛깔과 오르는 물거품, 오이카와의 오뚝한 콧방울의 땀 몇 방울이 투명했다.

카게야마는 꿈을 기억해냈다. 바닷속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오이카와와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간 물고기와 남쪽 섬의 태양에 대해서도. 모두 오이카와가 태어났기에, 이곳에 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카게야마는 웃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백사장 모랫바닥에서 열이 올라, 그 열이 오이카와의 몸을 돌아, 살아있는 온기로 카게야마에게 전해졌다. 카게야마를 울리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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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 기념 합작입니다 ㅠㅠ
멋진 합작 홈페이지는 여기 ▶ http://gywjd1555.wixsite.com/merrysummer
정말 좋은 합작 열어주신 치리님 감사합니다!! >.<











오이카와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붉은 그라데이션의 구름과 진한 자몽 빛의 태양은 눈언저리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버스 내부의 몇몇 승객은 각자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버스 내에서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을 꺼내 라인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오이카와가 보낸 가고 있어가 마지막이었다. 상태는 읽음 표시인 채로, 아무런 갱신도 없는 터라 오이카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언뜻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검은 긴 생머리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기어이 멈췄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도, 그 뒤의 차도 길거리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몇몇 차들조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거리는 하나의 주차장이 되었다. 오이카와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퇴근길의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객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남은 승객은 옆에 누군가가 남아있었던 온기를 느끼며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버스에서 내린 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30분 전부터 라인 답장이 없었고, 이런 묘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전화가 없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핸드폰이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기관에서 보낸 긴급 문자였다.

현재 원인불명의 실종 사고 속출. 속히 귀가할 것.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집 안은 조용했고, 낯선 공기가 열린 문밖으로 흘러나갔다. 신발을 벗고 몇 걸음 걸은 뒤에 오이카와는 숨을 삼켰다. 오이카와가 사는 집에는 큰 소파가 있었다. 덩치 있는 성인 남자 두 명에게 트윈으로는 부족하다며 3인용으로 산 소파였다. 항상 둘이 앉아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몇 번 껴안고 잠까지 잤던 소파였다. 오이카와는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소파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 한 곳 한 곳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와는 반대로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검은 물체는 데자뷔(deja vu)처럼 익숙한 것이 본인에게도 의아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동거 중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서, 오이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열린 문 바깥으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오셨어요.”

 


 

 



Blindness Love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중 무작위로 선택된 한 명이 사라지는 현상, 통칭 Blindness Love61일 오후 737분에 돌연 일어났다. 나이, 사회적 지위, 그 외 기타 조건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뒤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사라진 사람 중 가장 연장자는 96세와 97세 노인 부부의 남성이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어제 애인이 생겼다던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에서만 일어난 이런 특이 현상에 대해 세계는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예를 들면 다른 파장의 세계, 다른 물질의 존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의것일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가설도 나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망이 통한 걸까, 최종적으로 그 날 일어난 일은 Blindness Love라는 꽤 로맨틱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려운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일본 전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사냐며 자살시도가 속출했고, 인구가 순식간에 줄어든 일본 내부는 국가 비상사태에 버금가는 인력난 및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분명 그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임이 확실하겠지만, 작고 큰 치정 싸움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두 명 다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 연인은 서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며 이별 혹은 이혼을 했고, 그 날 이후로 법원에 신청된 이혼서류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일이 일어난 며칠 뒤 함께 나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주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였지만, 간혹 오이카와가 선별한 음식점에 가는 일도 있었다. 그 날은 후자의 경우였기에, 오이카와가 고른 일식집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의 불빛은 채도 낮은 상아색 전구 몇 개만이 책임지고 있었고, 낡은 TV는 꺼져 있었다. 대신 움직이고 있는 라디오에선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간간이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무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 오른쪽 구석에 적혀있는 카레를 가리키면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전 이거요.”

여기까지 왔는데 질리지도 않아? 난 라멘 먹을 건데.”

카레가 좋아요.”

그럼 그렇지.”

 

메뉴를 주문하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마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제 집에 몇 시에 도착했어?”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돌리듯 눈을 오른쪽 위로 떴다. ,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씨 올 무렵..이요.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니까요.”

흐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마셨다. 코 근처에서 달콤한 카레 향이 풍겨왔다. 카게야마는 조금 전 오이카와가 했던 것처럼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구태여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묻든 묻지 않든 저가 하고 싶다면 말을 하는 남자였고, 오이카와도 또한 그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을 때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볼 때면 미묘한 긴장이 입술 끝에 머물렀고,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질 때 입을 여는 사람은 매 순간 달랐다. 이번에는 다만 두 명 모두 입을 열지 않은 것뿐이었고, 이러한 일은 동거를 시작한 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무를 자르다 만듯한 이런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또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배구를 할 때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항상 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오이카와의 관계에서도 답답함을 느꼈을지는 오이카와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처음 동거를 시작한 무렵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끝은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오이카와는 그 때 카게야마에게 저의 감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낀다는 평을 이와이즈미에게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과다할 정도로 수다쟁이인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마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카게야마라면. 지나치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를 보면서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믿고 있었고, 카게야마 또한 저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침 일찍 이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옆집 부부를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낡은 치정 싸움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진정한 사랑 운운할 마음은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없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백들은 전부 동경을 착각한 마음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오이카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자기를 가지고 논 거냐며 몇 번 장난처럼 카게야마의 무드(mood)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 그렇습니까하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가 몇 번이나 입으로 고백한 사랑에 대해서 오이카와는 믿고 있었지만, 카게야마의 마음속을 수술하듯 헤집어 본 것도 아니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카게야마의 사랑을 믿고 싶다는 바람이 만들어낸 솜사탕 보석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과 같은 얼음처럼 차디찬 진실의 강에 씻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요리 나왔습니다.”

 

주인집 딸이 요리 두 개를 쟁반에 들고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하고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들었다. 배고팠는지 카게야마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카레를 허겁지겁 먹었다. 오이카와는 라멘을 몇 번 휘저었다.

 

그 날 집에 오고서 무슨 생각했어?”

 

오이카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입꼬리에 묻은 밥알 한두 개 때문에 오이카와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이카와씨 언제 올까, 하는 생각이요.”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오셨잖아요. 집에.”

내가 왔을 때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 궁금하잖아.”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아침에 추한 치정 싸움을 벌이던 옆집 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밥이나 먹자, 멋대로 시작한 대화를 역시나 제멋대로 차단한 채 오이카와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잠시간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 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라디오를 끄고, 작은 노트북에서 음악을 틀었다. 가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느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깐 공원에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 어딘가에 수놓아진 태양이 뿜어내는 열기가 등에 닿았다. 6월 초반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기 직전의 습기 없는 열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얇은 가디건을 입고 나온 오이카와는 목 부근에 부채질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카게야마는 이마 옆에 투명한 땀방울을 한두 개 매달고 있었다.

 

순식간에 더워졌네.”

그러게요.”

토비오네 대학 체육관에는 에어컨 있어? 우리는 있긴 한데, 영 오래돼서.”

글쎄요. 있던 거 같긴 한데저희도 틀어보진 않아서.”

우리 둘 다 여름에 연습할 때 열사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으니 그건 좋은 건가? 배구는 어쨌든 실내경기니까.”

탈수로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몇몇 개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조금은 보였을 터지만, 오늘따라 공원에는 모래밭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비둘기 몇 마리만 보였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는 가지를 빈틈없이 메꾼 나뭇잎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과 같은 검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날씨에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몸이 녹초가 된 오이카와는 서둘러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카게야마는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자리를 확인하더니 그 옆자리에 앉았다. 흰 티셔츠를 입은 카게야마의 상체가 아주 얇은 땀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뒤편에서 불어오는 나무 냄새에 섞여 카게야마의 체향이 오이카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를 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일 연습은 오전이랬나?”

모르겠어요. 그때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선배들한테서 아직 연락이 없어서. 일단 제시간에 가보려고요.”

늦어지면 연락해.”

전화할게요.”

 

카게야마는 벤치 등받이에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속에 오이카와의 향이 섞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난 이후로 저가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같이 성장하는 몸 곳곳에 오이카와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고통이기도 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카게야마는 음식점에서 오이카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고 아주 잠깐 집을 나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에선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가득했고, 카게야마는 평범하게 그들에 섞여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만 그 또한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어졌을지, 혹은 집으로 돌아올지,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갈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카게야마였고, 동거를 시작한 후 그에게 먼저 깊은 관계를 요구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속마음은 알지 못해도 저가 정말 싫다면 떠날 것이라는 오이카와의 성격은 믿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떠나지 않는 동안에는 괜찮다고, 그때까지는 오이카와도 아예 싫은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감정이어도, 카게야마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지는 않을까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나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양손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과한 과장까지 섞어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사랑하는 연인관계라고 말한다면만약 그럴 수 있다면카게야마는 그 또한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사라진 건 예상 가능한 누군가일 텐데, 그건, 카게야마에게는, 지극히도.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끌어안고,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고마워요라고? 혹은, ‘여기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라고? 어느 쪽이든 오이카와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일테고, 카게야마 또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얇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저만 하고 있는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무릎처럼 쓰라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 안을 따스한 햇볕이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 안에는 얇은 구름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고, 코끝에 닿는 건 연한 나뭇잎 냄새였다.

 

동거, 그만할까요.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엷은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검은 그늘의 그는 밤하늘 아래처럼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 먹던 비둘기 한두 마리가 구구 울면서 푸드덕 날았다. 오이카와는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동거 그만두고, 어디에 가려고?”

글쎄요. 어디로든 갈 수 있겠죠.”

 

오이카와는 박동하는 심장이 독을 뿜는 듯 심한 흉통을 느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낡은 우상을 부순 그에게 펼쳐지는 건 더 넓은 세계였다.

 

동거를 그만두면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뀌는 거 없이 똑같겠지. 똑같이 연습에 가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그렇겠죠.”

 

카게야마는 칼로 긁어낸 깔끔한 상처를 물로 씻는 듯 소름 돋는 통증을 느꼈다.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의 살과 뼈와 피에는 카게야마가 녹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와쨩한테 한 대 맞겠지. 정신 차리라고.”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이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머리에 약한 현기증이 돌았다. 아니, 그러한 말은 변명이었다. 검은 그늘 안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 대해 욕심내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믿는 만큼 카게야마의 사랑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설사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차가운 감정이라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분명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잦을 테고, 서브를 제대로 넣고 나서 , 괜찮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되뇌기도 할 테고, 카레가 문득 먹고 싶어져서 만들 때도 있을 테고, 무심코 2인분 이상 만들기도 하고.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반쯤 꼴사나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죽죽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매번 지나치게 말을 아끼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항상 듣는 잔소리이기도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 전적으로 오이카와의 잘못이었다. 오이카와는 사실 솜사탕 보석이 녹아 없어질까 봐 가두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카게야마였고, 토비오였고,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 뒤에는, 토비오쨩한테 연락을 하겠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고.”

……

 

오이카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더니, 오이카와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공원을 다시 바라보고. 입가를 가리고 결국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햇볕이 뜨거운 날 공원에 앉아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같이 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거 토비오 냄새나잖아.’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바닥에 벗어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면서, 장난스레 웃어보인 오이카와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세포 구석구석에 오이카와가 녹아있듯, 어쩌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세탁을 하면서 저도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두 사람의 옷에는 섬유유연제 냄새보다 서로의 냄새가 더 깊게 배어있었고, 그 체취는 섞여서 그대로 두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오이카와도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기분에 잠겼다.

 

그런 오이카와씨를 상상하니 뭔가 엄청 이상하네요.”

토비오 너 진짜 선배한테 건방진 거 알고 있지?”

어제오늘 일인가요.”

 

건방진 후배였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변하지 않았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 좋아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중력에 이끌리듯 카게야마를 끌어안고 그 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인력과도 같은 행동이었고,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 두 사람의 키스는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벤치와 짙고 검은 그늘이 보였다. 몇 마리 남아있던 비둘기 무리가 남김없이 날아올랐다. 바람이 인 뒤의 먼지 구름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 향기와 먼지 향기가 났다. ‘카게야마 토비오였던 공기는 오이카와의 손안에 있다가 연한 바람 때문에 공기 중에 흩날려갔다.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 편집은 월간 오이카게 주최님이 쓰신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깔끔한 편집 감사합니다.

※ 미약한 쿠니카게 요소가 있습니다.






  오이카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장면은 희뿌옇게 먼지처럼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그 단계를 3단계로 분류하고 천천히 상기시켰다. 어느 위치에 서고, 손가락의 굽히는 정도, 어느 순간에 다리를 올려야 하는지 깊게 생각한 뒤 다시금 눈을 들었다. 배구공의 오밀조밀한 매듭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매듭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돋움을 하고,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이미지를 눈앞에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앞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였다.





Kill Your Darlings





  “―목요일에는 쪽지 시험 볼 거니까 잊지 말고. 아, 이거 내일까지 적어와야 한다? 진로희망조사서.”


  손에 들린 15x10cm, 두께 약 5mm에 해당하는 종이를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봤다. 이름, 반, 번호, 희망 고등학교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아직 ‘진로’라는 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마지막 시기에 한 번 만났던 그 종이는 다시금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채 잠깐의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몇 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정확히 두 번 접어, 교탁까지 걸어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3학년, C반, 오이카와 토오루까지 적은 뒤 손을 멈췄다. 몇 번 나눴던 대화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느 학교 갈 거야?’

  ‘어느 학교로 가시나요?’

  ‘오이카와, 고등학교도 대학 못지않게 중요해.’


  같은 3학년 친구들, 이제 부에 들어온 지 갓 1년이 되어가는 1학년 후배들, 코치에게 각각 들었던 말이다. ‘어느’ 학교에 갈 건지― 저러한 말 뒤에는 항상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 배구부도 유명하니까.’


  오이카와는 찝찔한 얼굴로 입가를 굽실거렸다. 중학교 3년은 배구가 전부인 기간이었다.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체육대회 때는 일부러 다른 구기 종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항상 중요한 건 배구였고, 오이카와는 배구보다 더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오바죠사이 아니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가방을 들고 오이카와의 옆에 서 있었다. 옆 반인지라 종례가 끝나면 오이카와의 반에 들러 함께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던 그는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종이를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와쨩은 이미 냈어? 진로조사서.”

  “당연하지. 그런 건 집에 가져가면 분명 까먹을걸. 특히 오이카와 너는.”

  “특히라는 말 뒤는 이해할 수 없는걸. 뭐, 실제로 이런 건 가방에서 구겨지기 일쑤지만. 뭐라고 적었는데?”

  “아오바죠사이.”

  “아니, 칸이 세 개잖아?”

  “한 개밖에 안 썼어.”


  이와이즈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와쨩이야. 오이카와는 몇 번 달깍달깍 시끄럽게 볼펜을 괴롭히더니, 반쯤 열려있는 가방에 종이와 함께 집어넣었다. 지금 쓰라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이와이즈미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연습이 금방 시작될 터였다. 주장, 부주장인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시라토리자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레 내뱉었다. 종이의 가장 위 칸에 적기에는 적합한 이름이었다. 시라토리자와학원이라.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네, 생각했다. 


  “이와쨩은 왜 아오바죠사이야?”

  “…선배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그곳 배구가 맘에 드니까.”

  “배구가 맘에 들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이와쨩, 나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이카와는 핀잔을 들은 아이처럼 볼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이와이즈미는 화를 억누른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흘겨본 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그건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이카와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멈췄다. 애매하게 마음을 깊게 드리우고 있던 안개가 수증기가 되어 가슴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이미 우시지마에게 추천이 들어간 건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있어 시라토리자와에서 추천이 오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전날 연습 중에 떠올랐던 장면이 다시금 축축한 심장에서 살아났다.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은 느릿느릿하게 재생되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말한 ‘잘하는’ 배구가 어떤 배구인지, 누구의 배구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는 단계에서, 지금 있는 그 어떤 고등학교에도 그러한 배구가 없는 단계에서 진로희망조사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못내 짜증이 나서, 오이카와는 계단을 몇 개씩이고 뛰어 내려갔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카게야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새하얀 배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얇은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는 깨끗한 글씨로 적힌 ‘카게야마’가 수로 박혀있었고, 짧게 올라간 반바지 아래에는 솜털이 막 빠진 반질한 살결의 두 다리가 생채기도 없이 뻗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조그만 이마를 꾹 눌렀다.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린 카게야마는 갸우뚱한 채 오이카와를 말끔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조금 짧아진 앞머리 때문에 이마가 평소보다 잘 보였다.


  “오이카와 선배, 안녕하세요.”


오이카와가 못 들은 거라 생각했는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건넸다. 배구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작아서, 그 끝의 손톱은 모래알로 착각할 정도였다.


  “오늘은 서브 연습 안 하시나요.”

  “토비오쨩이랑 무슨 상관인데.”

  “점프 서브, 알려주세―”

  “대답할 가치도 없네.”


  오이카와는 마저 듣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포기하지도 않고 서둘러 앞으로 달려와서는 다시금 공을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가슴을 다시 툭, 친 배구공이 괜스레 거슬렸다.


  “서브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코치에게 들었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평판이 기억났다.

  주변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것 같던데.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긴 하지, 그 성격이면.

  코치는 이따금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를 오이카와와 둘만 있을 때 꺼내곤 했다.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하시는 거예요? 가끔 묻고 싶었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보고 그 기분을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못하고 코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주장이니까.

  오이카와는 배구부 주장이고, 카게야마 선배니까. 왜 코치는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오이카와에게 하는가. 코치가 개인적으로 학생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카게야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도 굳이 물어볼 것 없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른 존재였고, 그건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부류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한 뒤에 세대 교체할 사람으로서 내정해두었단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적어도 오이카와 만큼의 친화력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왜 토스가 아니고?”

  “네?”

  “말해봐, 토비오쨩. 왜 토스가 아니고 서브인데?”

  “…서브를 가장 잘하는 건 오이카와 선배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오이카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쯤은 빤히 보였다.


  “토스를 가장 잘하는 건 내가 아닌가 보지?”

  “그런 건 아니고…”


  카게야마는 무언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밀었던 배구공을 천천히 끌어당겨 다시 제 품에 가둔 카게야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난 알아, 토비오쨩.”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밀접하게 끌어당기고, 부드러운 목 뒤를 가볍게 쓸면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까만 눈동자에 담긴 오이카와의 형체는 흔들거리고 있었다.


  “네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거. 누가 가장 토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난 알아.”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동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밀어내듯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조바심 때문에 퇴출당했던 그 시합, 코치는 카게야마를 대타로 내보냈었다. 2학년 세터인 니카이도 있는데, 왜 카게야마냐며 내부에서도 목소리가 높았다. 당연히 카게야마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2학년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잘하니까.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니카이보다 카게야마가 들어가야 팀이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코치는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니카이보다, 그때의 오이카와보다 카게야마가 더 잘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세터로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네트 앞쪽에 섰다. 세터의 위치였다. 코트 가장자리에서 오이카와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는 1학년 후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 던져주지 않을래? 혹시 괜찮으면.”


  1학년 후배는 잠시 당황하더니 공 바구니를 끌고 온 뒤 배구공 하나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 하나가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며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꿈보다도 선명하게 그 날의 시합이 떠올랐다. 그 날 카게야마의 위치, 어떤 곳을 시선으로 훑는지, 누구를 쳐다보는지,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이카와는 일련의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한 뒤, 발돋움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이 흘러가는 토스 전 단계에서는 배구공의 매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이 방금 봤던 카게야마의 손처럼 보이는 환상을 느꼈다. 

  잘하는 배구가 하고 싶거든. 오이카와는 제 안에서 비웃는 듯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이건 그냥 흉내쟁이잖아. 오이카와는 입술을 씹었다. 오이카와가 하고 싶었던 배구는 아오바죠사이에도, 시라토리자와에도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천재 자체에 있었다.

  세터로서 하고 싶었던 토스를 상상하는 건, 동시에 자신이 한낱 따라쟁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




  “오이카와 선배처럼은 못 뛸걸.”

  “…알아.”


  쿠니미가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꾸물거렸다. 카게야마는 집 근처 지역체육관에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오이카와처럼 높은 점프력과 강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키타이치 중학교에 들어가고 오이카와의 서브를 본 뒤로, 몇 번 이렇게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으나 기억 속 그 점프 서브에 가까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서브 자세만 나빠지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옆에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카게야마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배구부 연습이 끝나서까지 집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따라오는 이유는 몰랐지만, 카게야마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가끔 ‘못할걸’의 말만 툭툭 던졌다.


  “오이카와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잖아.”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곁눈질로 보고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해?”

  “…왜 안 가르쳐주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저번에 오이카와 선배가 그랬어. ‘왜 토스가 아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오이카와 선배가 자긴 다 알고 있다고 말했고, 알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걸.”

  “카게야마, 너 영어 시간에 졸았지?”


  무슨 말이야?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로 가방을 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깨서 수업을 들어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가 봐도 체육계 소년이었고, 쿠니미는 주변으로부터 배구부여서 의외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쿠니미는 다만 그런 편견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Kill Your Darlings’이란 말이 있어. 공부해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공부해보라고. 너랑 오이카와 선배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쿠니미는 오이카와가 요 근래 서브 연습 대신 토스 연습이 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서브를 보며 받았던 오이카와의 그림자는 오이카와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게서 오이카와의 모습이 보이듯이, 오이카와에게도 카게야마의 배구가 어정쩡한 상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좋은 형태든 나쁜 형태든 두 사람은 닮아있었다. 쿠니미는 그것이 서로가 만난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순간 두 사람은 밀접하게 교감하고, 아주 작은 신경학적 신호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숨소리조차도 겹치게 되었다. 그건 두 사람 탓이 아니었다. 이미 모른척하기에는 서로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




  “카게야마가 최근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한다던데.”


  반쯤 장난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에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더라.”

  “지역 체육관에서 혼자 한다던데. 네가 안 가르쳐주니까 몸 달았나 보지?”


  비아냥거리며 툭툭 오이카와의 어깨를 치는 친구에게 피식 웃어준 뒤 오이카와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카게야마나, 가르쳐주지 않고 요즘 토스 연습에 매진하는 오이카와에 대한 건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체육관 안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 연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던가. 다만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 건 조금 상쾌했다. 그래서였는지도.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 한 명과 서둘러 헤어진 뒤 지역 체육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서브 연습을 하는 카게야마에 대해 상상해보았지만 원하는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오이카와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서 배드민턴 연습을 하는 초등학생 그룹, 멀리서 3대 3으로 배구연습을 하는 아주머니 그룹이 보였고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더 다가가지 않고 체육관 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공을 올리고, 높이 뛰고, 공을 내려치는 일련의 과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아니, 선명한 것 그 이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저 과정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3단계로 나눠서 기억해놓은 저 과정은 오이카와의 서브 과정이었다. 


  “…바보 아냐?”


  픽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입을 가렸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제 서브를 흉내내고 있는 카게야마나, 카게야마의 토스를 상상하며 제 토스 자세를 비트는 오이카와나. 모든 것이 바보 같았고, 왜 카게야마와 저는 이런 바보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바벨탑과 같이 쌓고 있던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토스가 모래성처럼 바닥부터 허물어졌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게야마의 서브가 어긋날 때마다, 그 서브 뒤편으로 오이카와의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꿈에서보다도 선명했던 카게야마의 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자세도, 위치도 전부 다 오이카와의 안에서 녹아내려서, 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등을 돌렸다. 

  넌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어, 토비오. 형태도 없는 내 그림자만 따라가면서 흉내쟁이로 살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해줄 테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네 그림자를 부숴주러 올게.

  오이카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구름이 말갛게 빛나고,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기분 좋은 현기증이 거리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오이카와는 배구가 하고 싶었다. 또한, 간만에 서브 연습을 하고 싶었다. 반에서 오이카와만 제출하지 못한 진로희망조사서에 쓸 내용도 저절로 떠올랐다.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배구를 하고 싶었다.




**




  “이와쨩, 이거 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진로희망조사서를 내밀었다. 1순위부터 3순위까지,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똑같은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


  이와이즈미는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뚝뚝 끊어 읽었다. 배시시 웃어 보인 오이카와는 종이를 정확히 2번 접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갈 거야. 이번엔 꼭 우시와카쨩 이길 거라고. 아, 토비오쨩도.”

  “네가 말하는 ‘잘하는’ 배구는 어쩌고?”

  “아, 그건 됐어. 하고 싶은 거 바뀌었으니까.”

  “가벼운 남자네, 이거.”

  “이와쨩, 한 마디 많다고!”


  오이카와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떠올랐다.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가슴 통증이 그 눈동자와 함께 찾아올 때면, 오이카와는 다시 그 날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를 봤던, 그 영겁의 삶도 가치 없어질 만큼 무섭게 아름답던 순간을.










-


** 사망소재 주의





오이카게 전력 #16 이별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괴롭지 않게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서둘러 지나면서 생각을 털었다. 뛰어가는 오이카와의 옆으로 외제 차 한 대가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잠시 주춤한 뒤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을 좋게 떠나는 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었다. 서점에는 요즘에서 안락사에 대한 책이 즐비해 있다. TV를 몇 번 돌려보면 여러 가지 죽음의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죽음, 사고 현장의 사망자 통계,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좋게 헤어지는 방법 등

오이카와는 드라마 속 배우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빗속을 뛰어가면서 그 표정을 조심스레 흉내 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럽단 건 알 수 있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가 봤다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발아래에서 물방울들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튀겼다. 저번 주에 산 새 구두가 몹쓸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라는 글자가 왼쪽 귀 언저리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양 귀에 이어폰을 낀 듯 그 이름은 금세 머리 전체에 퍼져 카게야마와 연관된 몇 가지가 줄줄이 낚여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그중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떠올렸다기보다는, 이미 부유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에 불과했다.

 

 

**

 

 

잘 모르겠어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다는 말은 카게야마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 하나였다. 오이카와는 한쪽 입 끝을 오므리고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작은 식탁 위에 엉덩이를 내리고, 카게야마를 다리 사이에 끼면 어제 세탁한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조금 달콤한 솜사탕 향, 오이카와의 취향이었다.

생각해야지. 이후의 일.”

고집부리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 건 오이카와씨잖아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고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오이카와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가늘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요 근래 입에 제대로 대는 것이 없었다. 허리를 더욱 끌어당기면 장골능이 오이카와의 허리에 닿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뼈가 단단한 근육을 짓누르고, 카게야마는 약간 오이카와에게 기대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플라스틱 식탁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두른 카게야마의 팔을 풀고 얇은 팔을 덮는 티셔츠의 소매를 올렸다. 두 개로 곧게 뻗은 뼈는 보기에 좋았다.

요새 많이 건방져졌다? 이 오이카와씨한테 그런 말도 하고.”

지낸 시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카게야마는 피식 웃으면서 오이카와의 손에 들린 제 팔을 힘겹게 빼냈다. 앞서 목에 둘렀던 팔을 재차 허리 뒤로 둘렀다. 검은 고양이 같았다. 두 검은 눈동자가 동그라니 떠서 오이카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고, 얇은 몸을 오이카와에게 천천히 부비적댔다.

지낸 시간 보다 이후의 시간이 더 길잖아.”

오이카와는 쓴맛을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방금 마신 커피는 평소보다 씁쓸했고, 평소 사던 원두가 아닌 걸 이제야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매달린 팔이 힘겹게 풀리려고 해서, 오이카와는 그 허리를 더욱 지탱했다. 한 손을 엉덩이 아래로 갖다 대자 모난 뼈가 잡혔다.

글쎄요. 어느 쪽이든 전 상관없어요.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쟁이인지는 몰라도, 전 지금 정도면 됐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베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실핏줄을 닮은 얇은 머리카락들이 오이카와의 볼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돋는 이물감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리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식탁에 내려놓자, 플라스틱 식탁은 버겁다는 듯 날 선 소리를 냈다. 엉덩이 밑에 갖다 댄 손에는 카게야마의 청바지 촉감이 까슬하게 닿았다. 뒷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천천히 만지자, 카게야마는 하지 말라는 듯 오이카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지금은 언젠가 사라지잖아. 네가 말한 지금은 이미 방금 전이 됐고, 몇 분이 지나면 예전이 되고,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잖아.”

전 언제나 지금이에요. 지금이 아니라, 이후를 생각하는 건 항상 오이카와씨였죠.”

오이카와는 부정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솜사탕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티셔츠에 코를 묻으면서도, 당장 내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는 친선 경기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누나의 생일이었다. 이후를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간은 항상 어느 정도 어긋나있었고, 오이카와는 그러한 시간의 틈에 답답하면서도 일종의 편안함을 느꼈다. 카게야마에게는 어제 오이카와와 싸운 일도, 내일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지금의 그에겐 두 팔에 남겨진 오이카와의 단단한 허리로도 충분했다.

버릇인걸. 미래를 대비하는 거라고 말해줄래? 그러니까, 난 준비하고 싶은 거야. 헤어지는 준비는 일이 닥치고 나서 하면 늦으니까.”

만남과 이별은 하나였고, 일맥상통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떠올랐다. 맺어진 인연은 어디로 가든 이별로 통했고, 오이카와는 이 만남을 맺은 것이 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지점을 카게야마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손을 끊는 건 카게야마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집불통인 점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고개를 피하고 오이카와의 허리에만 들러붙고 있었다. 무겁게 누르는 카게야마의 뼈가 아팠다. 부엌의 통유리로 짙게 들어오는 햇볕이 등에 닿아 피부 사이사이로 땀이 한두 방울 맺혔다.

오이카와씨는 너무 뒷일까지 생각하시네요.”

카게야마는 불만인 듯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강하게 안았다.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튀어나와 오이카와를 곳곳이 찔렀다. 이별하기까지의 아픔이었다. 점점 진득하게 들러붙는 태양 빛에 오이카와의 등이 젖어들기 시작했고, 먹먹한 목이 씁쓸했다. 식탁 위에 올려졌던 커피잔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고집을 부리는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 아세요?”

그건 단어와 형용사의 조합이잖아. 말이 아니야.”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요. 죽음이란 건 제각기 다르잖아요.”

오이카와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오이카와씨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준비는 닥치고 나서 해도 괜찮다고요. 항상 어긋났던 것들도 그때가 되면 서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는 않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피했다. 카게야마의 앞에서 약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입을 다물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마주 잡았던 손을 카게야마가 풀고 난 뒤에, 시간이 어긋난 채로 남는 건 오이카와였다. 좋은 죽음의 뒤에 새로이 기억을 덧입혀야 하는 건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그 준비를 하고 싶었다. 뒷일을 항상 미리 생각하는 건 오이카와의 버릇이었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딱딱한 뼈를 만졌다. 튀어나온 팔꿈치 뼈, 아래팔뼈, 엉덩이 아래쪽의 몽글한 뼈, 톡 튀어나온 귀 아래쪽 턱뼈까지. 카게야마는 왜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냐며 비죽 웃었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항상 왜 그렇게 어긋났을까 하고 생각할 지도요. 닮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같이 지낸 시간도 길고, 의외로 저랑 오이카와씨는 닮았을지도 몰라요.”

지금 이 오이카와씨를 누구랑 닮았다고 하는 거야. 전혀 다르잖아. 난 토비오처럼 어둡지도 않은걸.”

항상 조금씩 어긋났던 시간이 그때가 되면 마침 마주쳐서,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카게야마의 현재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오이카와에게 옮을지도 몰랐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단단히 짜증이 난 듯 오이카와의 목 언저리를 꽉 깨물었다. 따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촉촉한 감촉이 새로운 감각이 되어 허리를 간지럽혔다. 카게야마의 혀는 말캉거렸고, 솜사탕 향을 머금은 듯 조금 달달했다.

나쁜 버릇이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나, 항상 이별을 생각하는 거나.”

버릇이니까.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한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그가 생각하는 것과 카게야마의 생각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의 서브 모습을 찍은 비디오가 낡은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나치게 닮은 그 모습에 오이카와는 짜증이 났었다. 그가 카게야마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는 점에서 더욱 싫증을 느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매사 어긋나는 것도, 조금의 취향도 겹치지 않는 것도, 전부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처럼, 좋은 이별이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오이카와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가끔 오이카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모습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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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버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서랍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의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봉투는 우그직,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고, 눈 끝에 젖은 붉은 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 울고 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그의 서랍 안에는 그 작은 편지와, 빛바랜 월간 밸리 잡지 한 권, 이미 멈춘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서랍 위에는 마른 꽃병과 영원히 생생하게 피어있는 조화(造花)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오이카게 전력 #13 고백

 

 




카게야마 토비오는 대학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한 사람답게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은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첫 수업에서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라고 자기소개한 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그러한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넓다면 넓을 강의실 안에서 그는 뒷자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고개를 들어 머리를 한번 털고, 하품한 뒤에 다음 수업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를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람이 한두 명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 날은 하늘 안에 여과할 먼지 한 점 없이 맑았고, 잔디밭은 태양이 내리꽂는 탓에 누렇게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전 수업 2개가 끝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른 잔디밭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에 여자애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로 혼잡했고, 나는 그 어떠한 생각도 없이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눈 끝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빈 눈 끝이 살며시 물들어있었고, 손으로 밀어버려서 귀까지 이어진 건 맑은 물빛의 눈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른쪽 눈 가운데에 또 한 방울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나는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그 날 처음 봤다.

신입생 모임에서으레 그렇듯 이러한 것은 술자리였다참여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왔을 때 나는 그가 이러한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육계 사람이면서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니, 참 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어떠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어떤 선배들 밑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술 잘 마셔요라며 벌컥벌컥 들이키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실제 주량과는 상관없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신입생 중에서 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찍이 선배들에게 점찍혀서 술잔이 빌 새도 없이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맨 노란빛이 도는 건강한 피부에 한 두 점 열꽃이 피었다. 그 사이 그의 주변은 신입생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여자아이들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 카게야마 성역이 생겨 있었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맥주잔을 위태롭게 들고 있었다. 그 얇고 매끈한 형태의 눈동자가 술집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나에게 향했을 땐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가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배인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내가 보고 있던 걸 들킨 건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그 날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떤 식으로 취해서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이었다.

아주 일부분의 사실들은 주로 그에 대한 화제가 끊이지 않는 여자아이들에게서 알 수 있었다. 그는 형제가 없고 외동아들에, 꽤 유명한 우리 학교 배구부 주전 세터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에 취미는 배구였다. 그가 입는 특이한 티셔츠 대부분은 그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고어디서 사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얘기가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화제는 배구였고, 그가 배구선수라는 걸 그 무엇보다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화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브토스에 특히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스파이크밖에 모른다고 말한 한 여자아이에게는 장장 3시간에 걸쳐서 서브와 토스의 대단한 점에 대해 토로했다고도.

제일 멋지다고요.”

내가 들은 건 그의 끝맺음말 뿐이었다. 흥분한 듯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을 마쳤다. 주변에 있던 몇몇 동기들은 그래, 알았으니까.’라며 이제 충분하다는 듯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얄쌍하고 모양 좋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났고, 입은 아직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오물거렸다. 20살 아닌가, 마치 초등학생 같다. 그의 키는 180을 훌쩍 넘었고 어깨도 남들보다 넓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폼은 잡지 화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끄러웠고,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날이 좋을 때면 햇빛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 아주 어린애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주변의 무언가를 흡수하는 습성과, 자신의 곧은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도 있었다. 대부분의 과 활동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따른 반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과 사람들이 모두 알면서도 그저 쓴 물을 삼키듯 넘어가는 사실들에 대해 카게야마는 왜 그렇게 해야 하죠?”라며 반문하는 경우가 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매우 순수하게, 정직하게 어째서 그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원했다. 그러한 설명을 하는 역으로나도 자주 지목받았다. 나는 그러한 역이 달갑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굳이 말한다면 머나먼 시야에 있는 관찰자로 바라보고 싶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내가 설명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가 왜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가로젓지 않았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만 그러한 일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주 극히 일부분이었으니까.

하루는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움직이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강의실에서와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는 웃고, 화내고, 때로는 분하다는 듯 혀를 차고 또 의연하게 팀 내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배구공을 잡고 살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표정을 지었다. 배구에 대해 말할 때면 쿠와앗이라든가 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쓸 때도 잦았다. 그의 그러한 모든 모습은 전부 그의 배구로 귀결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배구로 가장 많이 대화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배구가 사라진 세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를 상상했다. 그는 배구를 하지 않는 평범한 남자로 살아갈까, 혹은 결국 그의 유일한 통로였던 배구가 없는 채로 숨이 막혀 죽게 될까. 배구가 없는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수 있고, 혹은 아예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무심코 오랫동안 지켜봤다. 시선은 잔디밭에 고정된 채로, 눈가에선 몇 번 훔친 뒤로 눈물이 말라붙어 얇은 소금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졌기에, 나는 그가 소리 내 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달리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때, 그 날 신입생 모임 때처럼 적잖이 놀랐다. 급히 시선을 돌리려 하였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카게야마 토비오 외에 눈 둘 곳이 없었다. 나는 그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얇은 눈동자는 검고 깊은 우주 같았다. 카게야마는 내 앞에 서서, 조금 어긋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저를 바라보고 계세요?”

편지도, 버렸는데.”

제가 졸업식 날 드린 편지, 그 자리에서 제게 돌려주셔서.”

저도, 그 날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올해가 되기까지 서랍 속에 넣어뒀던 그 편지, 며칠 전에 오이카와 선배가 발견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버리고.”

그랬는데.”

 

카게야마 토비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목 뒤쪽이 눌린 듯 힘겹게 내뱉는 그의 입이 산소를 원하는 듯 뻐끔뻐끔 여닫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큰 알사탕을 그냥 삼키는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은 건 없어. 네 편지도 관심 없고. 버리든 말든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건지, 절 제대로 봐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기대만 하게 하는지.

바보 아냐, 토비오쨩? 네가 했던 고백도 편지도, 나한테는 민폐일 뿐이라고. 그 정도로 기대한다면 그건 네 잘못이지. 네가 말 한마디 건 거로 기대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을 나왔다. 알사탕을 삼킨 목이 얼얼하고 답답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는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얇고 검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배구를 하던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나는 입을 삼키고,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에 남은 수많은 말이 눈동자가 된다면, 온통 카게야마에게 달라붙어 있을텐데. 조금 메스꺼운 장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입가를 짓눌렀다.

 

이건, 나의, 아주 간결하고 일방적인 그에 대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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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브여성 주의




오이카게 전력 #11 벚꽃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다시 내뱉었다. 검은 벚꽃의 향기가 머릿속에서 아롱아롱 떨어지고, 빛을 흘리고, 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걸 깨닫고 눈을 떴다. 나는 그날따라 너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꿨다. 나는 칠흑 벚꽃 잎 아래에 있었고, 너는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입에 벚꽃 잎이 가득 들어찼다. 입속 점막에는 간지러운 벚꽃 잎 무더기가, 마른 혀끝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코 밖으로는 역한 꽃내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가 검은 태양이 되어 나를 찌르고 있었고,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헉헉댔다. 나를 구해줘,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나약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는 아주 잠깐 가엾은 갓난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나를, 이젠 잊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목이 아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눈물 한 방울들이 벚꽃 잎 한 가지로 변해 발밑에 쌓였다. 눈물로 만들어진 하얀 벚꽃 잎을 발로 짓이기고, 입속의 벚꽃 잎들을 게워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났다.

 

꿈꿨어?”

.”

울고 있어.”

알아.”

등이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태양이 낮게 떠서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찝찝한 채로 몸을 일으키고, 눈앞에 있는 젊은 여성을 품에 안았다. 땀 냄새나, 그녀가 작게 내뱉은 불만은 귀 깊숙한 곳에 몽우리져 체내의 물방울이 되었다. 나는 마른 입을 열었다.

꽃 폈어?”

한두 개라면.”

분홍색이야?”

분홍 벚나무라면.”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분홍 벚꽃 잎을 떠올렸다. 너와 본 것은 작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후회하세요?’

뭐를?’

저랑 꽃놀이 온 거요.’

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게 너라는 존재는 어렵고, 또 모호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동물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에 대한 거라면 허벅지 안쪽의 별 모양 점에 대해서도 아는데, 나는 네가 어제 자른 손톱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네가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데, 네 안이 어떤 물질로 가득 차있는지도 몰랐다. 나와 너는 그런 상태로 함께하고 있었다.

꽃놀이, 오고 싶지 않았어?’

꽃이란 거 잘 모르니까요.’

벚꽃은 알잖아.’

오이카와씨가 아는 것만큼 알지는 못해요.’

나도 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벚꽃은 벚나무에서 열린다는 것, 향이 없으면서도 바람이 한차례 강하게 불면 참기 힘든 꽃내음이 난다는 것, 떨어져서 발밑에 쌓여도 더럽지 않다는 것 정도. 너에 대한 것보다도, 나는 꽃에 대해 자세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건 가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후회하는 거야? 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벚꽃은 말이 없었고, 나 또한 말이 없었다. 꽃이 지는 걸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서서, 무엇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서로 아는 거라곤 아주 일부분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너에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나였고, 끄덕인 건 너였다. ‘후회하냐고 물어야 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묻는 건 나였고 대답하는 건 너라는 공식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손톱 하나의 형태까지도 모르는 나는 대답이라는 질문이 어려웠다. 대답해줘, 토비오. 그렇게 말하면 너는 고민하다가도, 나를 조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럼, 후회하는 거야?’

선택한 건 저인걸요.’

너는 고개를 내리깔고 아래에 쌓인 벚꽃 잎들을 바라봤다. 목이 빠져라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몇몇 커플들이 너의 뒤편으로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벚꽃 잎들이 네 아래에 형태 없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너는 숨을 참고 있었다. 눈가 끝이 엷게 붉어진 게 보였다. 숨을 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다. 네가 내 뒤편에 수북이 쌓아놓은 후회만큼, 나는 너에게 입을 다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네가 오이카와씨,’라고 부른 말 뒤편에 삼켜버린 말 만큼, 나는 너를 안아줄 의무가 있었다. 설령 네가 원하는 것이 나의 대답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의무 뒤편에 철저히 숨었다.

봄이란 건 후회의 계절이잖아.’

봄이요?’

. 작년엔 그러지 말걸, 올해 초반엔 왜 그랬을까, 뭐 그런 것들.’

오이카와씨도 후회란 걸 하나요.’

원망 섞인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에선 귀엽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토비오, 너는 다시 바닥을 바라봤다. 꽃을 보러 와서 바닥만 보는 너는 참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게 바른 거야, 나는 생각했다. 꽃이란 건 결국 지는 게 최종 형태니까, 네가 꽃을 가장 바르게 보고 있는 거야. 벚꽃을 보러 온 사람 중 오직 너만이 벚꽃을 가장 그 형태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는 토비오 발아래에 묻힌 벚꽃 잎들을 떠올렸다. 처음 네가 나와 함께 살겠다고 찾아온 날, 나는 내 심장이 네 발아래 짓이겨지는 상상을 했다. 꽃은 지고, 떨어져서, 밟히는 게 가장 올바른 꽃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쯤은 한다고. 그런 걸 먹지 말걸, 그런 말을 하지 말걸, 그날 받아들이지 말걸, 키스하지 말걸,’

오이카와씨.’

좋아하지 말걸,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톱이 길게 자란 밤, 내 앞에서 손톱을 깎으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였던 것들을 그 어딘가에 버리면서 너는 무슨 상상을 할까. 한 번쯤, 너는 내가 없는 너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까. 나는 그런 밤이면 눈 끝이 붉은 너를 안고, 어두운 침대로 끌어들였다. 검은 벚꽃 잎이 너를 덮고 나를 덮어 그 방안에 가득 차면, 네 뒤편에 쌓인 후회에 깨끗이 포장된 한 개의 상자가 자리 잡았다.

미안해, 토비오.’

나는 사과해야만 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너는 대답했고,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기어코 너의 눈에서 나온 물 한 방울이 나는 무겁고 또 버거워서 어깨를 툭 떨구고 싶었다. 나는 항상 대답을 네게로 미뤘고, 너는 내 이름 뒤에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고 내게 대답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네가 손톱을 버린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였을, 그 수많은 좋아하지 말걸의 후회들이 발아래에 쌓였다. 오늘도 네게서 호롱이 떨어지는 벚꽃 잎을 나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살아났어?’

품 안의 그녀가 낮게 물었다. 땀이 식은 등허리에 고통이 뚝뚝 끊어진 채로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는 손톱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벚꽃을 보고, 밤에는 손톱을 자르자. 나는 눈을 작게 내리깔고 손톱을 자르던혹은 꽃의 홍수를 바라보던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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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10 눈물

 

 

1

 

오이카와 선배와 만나는 날이었다.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붉은 아스팔트 길 사이사이에는 작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었다. 카라스노 고교 옆에서 큰 농사를 짓는 한 노부부의 물길이 벽돌 옆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라스노 고교 앞에만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공사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일까, 반질반질한 회반죽이 그대로 굳은 느낌이었다. 불그스름하게 내려앉은 태양은 어울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빵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손에 들린 우유빵이 반 정도 사라져 있었다.

늦었잖아.”

미간을 좁히고 불만스럽게 내뱉은 입의 주변에는 우유빵 조각이 붙어있었다. 평소와 같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가, 여느 때와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지나가던 카라스노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 힐끔거리며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여학생에게 살포시 미소 짓자, 그 두 명은 꺄악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당연하지. 선배를 기다리게 하다니, 토비오쨩 안 되겠네.”

오이카와 선배는 남은 우유빵 한 입을 내게 내밀며, ‘하고 말했다. 조금만 입을 벌리면 바로 쏙 들어올 것 같은 우유빵을 살며시 밀고, 됐어요. 하며 인상을 구부렸다.

귀염성 없네, 정말.”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중얼거리고 남은 우유빵은 전부 제 입에 넣어버렸다. 입가 끝에 묻은 우유빵 조각을 손으로 훑어 삼킨 뒤, 오이카와 선배는 작게 웃었다.

갈까.”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태양이 저 끝에서 지고 있는 하늘 안에는 보라색과 분홍색, 짙은 하늘색의 그라데이션이 구름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걸어가는 동안 우유빵 봉지를 작게 접어 딱지를 만들었다. 작은 딱지를 몇 번 손에서 굴리더니, 이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보다가, 그 옆모습에 짙은 분홍빛의 그라데이션이 내려앉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나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의 얼굴과 같이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고 있어.”

오이카와 선배는요?”

글쎄, 어떤 거 같아?”

저야 모르죠.”

오이카와 선배는 장난치는 듯이 미소 짓더니,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감정이 담긴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토비오쨩이 귀여운 여자아이였다면 좋아했을지도.”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몰래 쳐다봤던 여학생 두 명을 떠올렸다. 길게 뻗은 검은 머리카락에,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어깨가 동그랬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 아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손을 흔들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선 얘기 끝난 거야?’ 되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꿈을 꿨다. 나는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젊었을 적 어머니와 같이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양털과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러 많은 남자 선배들이 여자 배구부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토스를 올리려고 팔을 드는 순간, 내 손가락이 유달리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애였고, 지금 있는 곳은 카라스노 고교 여자 배구부였다. 체육관 바깥쪽에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빛깔의 태양을 보고 난 그제야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남자 선배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카게야마가 여길 보고 있어.”

역시 귀엽네. 저번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저렇게 귀여운데.”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발꼬리에 쌓여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구나, 난 귀여운 여자애구나. ‘귀엽다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푸른 태양의 세상에서 나는 귀여운 여자애였다. 다시 한 번 토스를 올리려고 가볍게 뛰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렸다.

 

 

토비오쨩, 만두 먹을래?”

오이카와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기만두를 내밀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만두를 받아들고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잘 먹겠습니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들면 짙은 보라색의 하늘이 구름을 물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색깔의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 입가에 묻은 만두 조각을 손으로 훑어다가, 자기 입에 가져갔다.

맛있어?”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듯한실제로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본적이 없다달콤한 행동, 목소리, 말투. 이 꿈속에서 난 오이카와 선배보다 훨씬 작아서, 나를 바라보고자 고개를 약간 숙인 행동까지. 오이카와 선배에게 나는 여자애로 보이고 있었다. 푸른 태양, 보랏빛 구름과 존재할 리 없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의 세계 안에서 오이카와 선배는 설탕 시럽처럼 달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해요, 오이카와 선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선배는 조금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서, 다시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고민하는 듯 음낮은 목소리를 내며 오이카와 선배는 눈가를 좁혔다. 만두를 들고 있는 내 오른손을 이끌더니, 남은 만두 한입을 자기 입에 쏙 집어넣고 오이카와 선배는 웃어 보였다. 만두의 열기가 남아있는 뜨거운 손가락 하나에 가볍게 키스하고, 오이카와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이지, 토비오쨩이.”

다시 한 번 쪽 소리가 나는 키스를 떨어뜨린 뒤, 오이카와 선배는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느리게 살결을 흘러내려 갔다.

만약, 말이지.”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가 아쉬워서, 나는 살포시 눈을 감고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비오쨩이 배구를 안 했다면, 좋아했을지도 몰라.”

배구 안 하는 토비오쨩을.

오이카와 선배가 살며시 깨문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푸른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3

꿈을 꿨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1학년, 주변에서 귀엽다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애였다. 배구를 하지 않는 카게야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남자 선배들이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배구부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간에는 카라스노 고교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이카와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오바죠사이라는 고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세터, 키타이치 중학교 시절의 나의 토스, 지금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여자애는 아는 것이 없었다. 푸른 태양이 일그러져 바닥에 녹아내렸다. 보랏빛 하늘 아래 카게야마 토비오와, 푸른색 태양조각이 흩어져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깨물었던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토비오쨩.”

 

눈을 떴다. 침대 안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좋아한다고,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 울었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의,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1학년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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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전력 #7 동거

 



 

오이카와 선배네 집은 중학교 시절,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개인 주택의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고, 현관문 양옆으로 가지런히 늘어놓은 화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몇 개 피어있었다. 당겨서 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는 신문을 놓을 수 있는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들어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거실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왼쪽에는 안 쓰는 방이 있었다. 매일 닦은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계단을 오르면 발을 내딛는 곳 아래쪽으로 나무 썩는 소리가 들렸다. 삐이, 삐극, 삐걱하는 소리가 끝나고 2층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오이카와 선배의 방이었다. 사각으로 접어놓은 이불, 좌식 책상과 옷에 걸린 교복까지, 무엇 하나 오이카와 선배의 향이 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배구공이 구석진 곳에 있는 게 유난히 눈에 띄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로서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벽걸이형 달력에 표시되어있던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319, 졸업식. 오이카와 선배의 글씨체가 아닌 그 표시는 가족 중 누군가가 적어놓은 듯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간 날이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달력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젖었다가 마른 흔적까지 생각나는데도, 기억이란 이상한 곳에서 모호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도 돼, 토비오쨩.’

난 그 말을 듣고 좌식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 할지, 혹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냥 서 있는 게 좋을지 잠시간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손바닥에 차가운 식은땀이 번졌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지금껏 집에 초대한 후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나는 쿠니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초등학교 이후로 오이카와 선배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이와이즈미 선배와 오이카와 선배의 대화로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깨에 멘 에나멜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 선배를 바라봤다.

저기,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 선배는 무언가 소중한 걸 바라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앉아도 돼, 한 번 더 말했던 것 같다. 아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뇌 속의 바람이나 기호에 따라 조금씩 가공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오이카와 선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입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에나멜 가방을 한 손으로 빼서,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계 두 개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서로 어긋난 박자로 들려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조금 머리가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는 양손으로 내 체육복 저지 상의를 벗겼다. 저지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다다미 바닥은 소리 흡수를 잘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말없이 내 흰색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토비오,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이 되고 도쿄로 이사를 왔다. 걸어서 역까지 8, 역에서 학교까지 30.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며 히나타는 부러워했다. 오이카와 선배와는 가끔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도쿄로 이사 왔다며.’,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 오이카와 선배와 같은 대학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하고 있던 대학이었고, 그쪽에서 먼저 스카우트하러 온 걸 보고 츠키시마는 행운이네라고 했다. 성적으로는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학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금에도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 선배가 없는 2년은 회색 필름처럼 흘러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했고, 기쁘기도, 분하기도 했지만 오이카와 선배에 대한 감정은 생각 날 때만 한 번 꺼내보는 상자였다. 가끔가다 기억을 되새기곤 했지만 꿈에 나올 때는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있는 때가 많았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연락을 보내오는 오이카와 선배도 신기루 같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여자 선배와 함께 있는 오이카와 선배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동거를 먼저 시작한 선배라며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아주 드물게 배구를 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그때마다 동거생활의 소소한 팁을 말했다. 프라이팬 하나로 반찬을 세 개 만드는 법, 설거짓거리를 줄이는 방법, 처치 곤란한 채소를 한 번에 처리하는 방법 등……. 나는 거의 항상 끼니를 밖에서 때우거나 사 먹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의외로 살림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밥을 혼자 먹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대학 내에서 유명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자취하는 집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많은 여자 선배와 사귀었고, 대학 내에서 친구도 많았으며 여전히 배구부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누가 데려다줘야 할 정도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 후에는 애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집으로 향했으며, 평소에는 이것저것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 해주면서도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말에는 부드럽게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우와,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이 대학 무섭네.”

네가 조금 유명한 사람이어야지하긴, 2년이면 오래 사귀었네.”

같은 강의실 뒤편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까.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웠다. 강의실 창문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햇볕이 내 뒤로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뜨거웠고, 머릿속에선 기억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퍼즐처럼 흩어져 있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 세리자와랑 얘기해봐야지.”

그래서? 이제 동거하는 건가?”

우와, 나카지마 불건전해! 오이카와씨는 동거란 말은 모른답니다!”

무슨곧 졸업인데, 결혼하기로 정한 남녀가 뭐하러 따로 사냐고.”

동거는 안 해. 그건 세리자와랑도 얘기 끝난 사항이야.”

오이카와 선배는 시합할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이내 오이카와 선배는 가벼운 말투로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이건 여기서 만의 비밀이야!’ 작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10분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

발신인은 중학교 때부터의 선배였다.

 

 

왜 안 먹어? 이제 카레 싫어하나?”

오이카와 선배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이카와 선배 앞에는 방금 만든 로제 파스타가 있었다. 카레의 달콤한 향이 코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반질거리는 겉면의 반숙 달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뜨거운 카레 위에서 뒤척였다.

좋아해요.”

근데 왜 안 먹어?”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 속의 오이카와 선배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본 오이카와 선배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그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그건 오이카와 선배가 결혼하기로 결정 한 세리자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굳이 오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몇 번이고. 오이카와 선배는 잊을만하면 연락했고, 나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이카와 선배를 만나러 나온 건 나였고, 그의 앞에 앉아 카레를 주문한 것도 나였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불러낸 이유를 듣고 싶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기억도 변형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있는 것인지, 혹은 어쩌면 그는 아예 기억 자체의 상자를 닫아버린 것인지. 나는 오이카와 선배도 같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처럼, 그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도 선명했던 건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억에는 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바람이 투영된 카게야마 토비오의 기억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찰나와 같이 웃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내 귀를 덮고 볼에서 목까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토비오, 우리 같이 살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 선배의 손이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나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마주 잡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였다.

그게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중학교 때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어린아이였다. 그를 아는 것은 저뿐이라는 기분에 젖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서 시작한 기억을, 그와의 동거로 끝맺는다는 건 지나치게 미화된 방법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도 그에게 끌리고 있는 채였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쨩, 그날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일어나야만 하는 일에 잘못된 일은 없어.”

일어나야만 하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이야.”

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일어나는 일의, 일어나야만 하는 일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의, 그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동거라면. 우리의 사랑이라면. 아니, 그의 사랑이고 나의 사랑이라면. 내 기억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의 집에 대한 기억만 선명한 것도 그러한 일종인 걸까.

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가 내미는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이외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이외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의 몫이었다. 나는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았다.

저랑 만난 걸 후회하세요, 오이카와 선배?”

너를 만난 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에는 후회라는 말이 필요 없지.”

오이카와 선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던 카레 속 반숙 달걀이 저 혼자 터져서, 누런 노란 빛의 달걀 속이 천천히 퍼졌다. 나는 그 속이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서 오이카와 선배와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건 분명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고 생각하는 건 이것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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