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세계

 

 

 

가끔 생각해요. 당신이 없는 세계를.

그러면, 항상.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니까.

금방 생각을 멈춰버리곤 해요.

 

 

 

 

 

 

 

 


오이카와 선배가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말은 어딘가 왜곡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땅으로 가라앉거나 하늘로 솟을 수 있을까. ‘어딘가에 있다라는 말은 쓸 수 있어도 사라졌다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것이 카게야마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라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언제나 조금은 말에 대해 망설였으므로, 이번에도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오이카와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망설였던 마음 그대로 그는 말하기 전, 매번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옳은 걸까. 오이카와 선배가 그저, 그저. 옆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타인의 말을 빌렸다. 카게야마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타인의 말을.

그 자식, 사라졌어.”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돌을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낮의 역 앞 카페는 붐비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아 간단한 브런치를 먹으러 온 직장인들과 주중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커플들로 꽉 들어찼다. 그날은 날이 좋았다. 선명한 태양이 2월 중반의 차가운 바람을 슬쩍 잠재우고, 구름조각이 그저 밝게 빛나는 태양을 커튼 치듯 드리우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사라졌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포크 카레를 휘적거리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사라..졌다고요?”

그래. 깨끗이. 말 그대로 자국 하나 남김없이.”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했던 아파트에, 오이카와가 돌아오지 않게 된 지 3일이 지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바람과 같은 남자였다. 어느 날 훌쩍 사라져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카게야마는 조금의 불안함과 허전함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혼자인 밤, 침대에 누워 그저 뒤척거리다 아침을 맞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매번 제대로, 아파트로 돌아오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어느새 적응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시간이 언제인지는 몰랐다. 낮일 때도 있었고, 새벽녘일 때도 있었고, 한밤중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항상 아파트로 돌아왔다. 카게야마가 있고, 자신이 누울 자리가 있는 침대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돌아오는 날이면 그때까지 겪었던 무수한 밤의 쓰라림을 잊곤 했다. 그는 돌아오는 날은 다정했다. 아니, 오이카와는 항상 다정했다. 그런데도 카게야마는 그가 돌아오는 날에는 특히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애틋함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든 카게야마는 이제 그가 훌쩍 사라지는 것에 더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돌아올 테니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 성에 차면 돌아와서, 카게야마를 안고, 부드럽게 키스하며 다녀왔어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이카와가 사라지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옆에 있어준다는, 언제나 절대적인 진리만으로 충분했다. 카게야마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이번도. 분명 제 성에 차면 어느샌가 돌아와서, 자고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것이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는 3일의 밤을 보내며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슬쩍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와이즈미는 걱정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없는 카게야마를. 카게야마가 없는 오이카와를.

 

소속 팀 감독이랑 코치한테도 미리 말해뒀더라. 팀원들에겐 몰래, 얼마간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감독이 그 기간은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글쎄요라고만. 정말이지, 그 바보는 아무리 나이가 차도 철이 안 든다니까.”

 

고등학교 때 시작한 둘의 관계는 어느새 차곡차곡 쌓여, 오이카와 27세 카게야마 25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럭저럭 8년이다. 더 이상은 어린애처럼 훌쩍 모험을 떠날 나이가 아니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던 눈길을 거둬 거리로 돌렸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옆에 오이카와가 없어도 세상은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저도, 연락이 안 된 지 3일째에요. 그저 항상 있는 방랑벽이 도졌다고 생각했는데, 팀원도 모두 어디 갔는지 모르더라고요. 항상 조금은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이었는데. 쪽지라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넌지시 말해두던가, 아니면 조그만 사진 한 장이라도. 그런데 이번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카게야마는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없단 걸 알았을 때의 소름이 몰려드는 것 같아 몸을 작게 떨었다. 여지를 남겨두는 남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그런 남자였다. LA로 갈 때는 LA의 야경사진을, 홍콩으로 갈 때는 팀원에게 잔뜩 쇼핑하고 올 거야라고 말하고. 카게야마는 어느새 익숙해지곤 했다. 오이카와가 주는 여지에. 행방의 조각에. 그래서, 더욱.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던 조각에 심장이 두근거릴 때였다. 이와이즈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바보카와 어딨는지 혹시 알고 있어?”

 

일단, 오이카와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 내용을 확인해봤어. 그런데 아무것도, 기차표 하나 안 긁었더라. 철저하게. 무슨 돈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네.”

짚이는 곳에 연락해보고, 찾아다녀 봐도 없어요. 어디에도, 없어요. 그냥 정말로이와이즈미 선배 말대로 사라진것 같은. 사라진 걸까요, 오이카와 선배는.”

일단 나도 전력으로 찾아보고 있어. 너도 너무 고생하진 말고, 천천히 찾아보자. 분명 그 바보 자식은 어디선가 농땡이 피우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말 되네요.”

 

 

* *

 

 

피곤한 날이었다. 낮에 이와이즈미를 만나고, 그 후로 다시 돌아가 오후 연습을 마치고. 언제나 가보던 대로 오이카와가 자주 가는 카페, 술집을 모두 들렀지만. 오늘도 허탕이었다. 카게야마는 한숨이 되지 못한 입김을 뱉으며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파트 내부는 쌀랑했다. 차가운 내부 공기가 카게야마의 이미 식어버린 볼을 다시 한 번 건드리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그 공기가. 차가웠다, 오이카와가 없는 방이. 오이카와의 살결을 느끼고, 체온을 나눈 지 3일이 지나있었다. 이전에는 오이카와가 아무리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차갑지 않았다.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믿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조각이, 이제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목마름을 자꾸만 채워 넣고 있었다.

 

어디로 갔냐고요멍청이.”

 

카게야마는 유일하게 자주 내뱉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파트 신발장에 주저앉아, 팔을 돌려 무릎을 감싸고 얼굴을 묻었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당신이. 그저 3일 보지 않았는데도, 그 얼굴을 잊을 것만 같아. 내 기억 속 당신의 실체를 보고, 만지고, 키스하고 싶은데. 왜 당신은 내 기억 속에서만 숨 쉬고 있는지. 기억이라는 주머니가 저도 모르게 해져서, 전부 빠져나가 버릴까봐.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존재가 더 이상 자신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못할까 봐. 카게야마는 두려웠다. 오직 그것만이 두려웠다.

 

 

 





 

 

그 날은 오이카와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함께 트레이닝을 할 때 가끔 들렀던 24시 카페도, 주말 저녁 함께 마셨던 술집도. 오이카와의 흔적은 없었다. 이미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그가 없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날 밤잠을 설쳤다. 오이카와가 없는 침대가 그날따라 유난히 삐걱거렸다. 끼익, 끼익. 침대는 낡은 스프링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슬며시 볼을 매만졌다. 차가웠다. 오이카와는 손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녀왔어, 토비오.’

역시 토비오 옆이 제일 좋아. 제일, 따뜻해. 기분 좋아.’

 

아직도 그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한데. 어느새 당신이 없는 세계는 흐려지고 있었다. 당신과 트레이닝하던 길에서 자주 만났던 강아지도, 항상 장을 보곤 했던 슈퍼의 판매원도. 모두 카게야마를 그저 지나쳐갈 뿐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카게야마와 달리 매번 안녕하세요하며 밝게 인사하는 당신이 없는 세상은 그저, 그저 색이 바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없는 빈자리를 매만지다가, 꼬옥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유달리 찬 볼을 덮고자, 이불을 잔뜩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살풋, 잠이 들었다.

 

 

* *

 

 

꿈을 꿨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왔던 카페였다. 그 날과 같이 선명한 태양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태양이 높게 뜬 거로 봐서 오후 2시쯤인 것 같았다. 날은 2월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따뜻했고, 카페 내의 모든 사람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주말인 걸까, 사람이 많이도 붐볐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와 앉았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포크 카레, 반대편에는 커피 한잔이 놓여있었다.

무슨 꿈인 걸까. 꿈이란 걸 알고 꾸는 꿈,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카게야마는 언젠가 스가와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자각몽을 많이 꾼다고 했었다. 자각몽의 좋은 점은, 꿈인 걸 알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점이라고. 카게야마는 평소 꿈을 자주 꾸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좋은 점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주말 날씨는 기분 좋았다. 요즘 매일 추웠으니까.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눈가에 퍼지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받아들였다.

 

뭐야? 중요한 거래처라더니웬 꼬맹이야?”

 

번쩍. 엄청난 기세로 눈이 떠졌다. 기억 속에서만 들렸던 목소리였다.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의, 오이카와의 목소리였다.

오이카와, 선배?”

 

눈앞에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블랙 수트를 입고 앉아있었다. 그는 더운 건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머리를 헤집어 넘겼다. 하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투명했다. 이렇게 따스한 날이다. 저 옷으로 안 더운 게 이상하다. 저런 정장 차림은 처음 보지만 몇 번이고 눈에 담고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오이카와는 항상 가벼운 티셔츠를 선호했으니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카게야마는 눈을 부릅떴다.

 

선배?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는데? 이름은 어떻게 알아?”

 

오이카와는 커피를 조심스레 홀짝이더니 카게야마를 흘겨봤다. 날카로운 눈동자는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는 다정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바라봤었다. 그의 이런 눈동자는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걷어붙인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이 단단했다.

저기, 에요. 카게야마 토비오. 저기

 

오이카와는 새로운 장난에 취미를 들인 걸지도 몰랐다. 가끔 이상한 설정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부터 토비오는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이런 것 등등. 이와이즈미는 변태 같은 장난이라며 혀를 찼지만, 자신은 그렇게 싫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는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척하기, 뭐 그런.

 

카게야마 토비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만? 근데 전혀 모르겠는데. 너 같은 후배가 있었나?”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아까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눈동자가, 이것이 설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몸이 식었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자각몽이라고, 자신이 꿈이라는 걸 알고 꾸는 꿈이 있어.’

 

그랬었다. 자신은 꿈을 꾸고 있었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카게야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포크 카레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나, 명확한데. 무엇하나 손에 잡힐 것만 같은데, 눈앞의 오이카와는 꿈이었다.

날이 따뜻했다. 카게야마는 마음을 고쳤다. 이 사람은 오이카와 선배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얘기만이라도 하고 싶다. 그 목소리만이라도 새기고 싶다. 더는 기억의 조각이 흩어지지 않게

 

처음뵙겠습니다.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저기괜찮다면 얘기를 해도 좋을까요.”

…….”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 헤집었던 머리는 어느새 정돈되어 있었다. 팔짱을 낀 손의 손가락이 탁탁, 그 단단한 팔뚝을 건드렸다. 그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평가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불쾌한 사람. 오이카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한번 감겼다가, 다시 떴다. 오이카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좋아. 재밌을 것 같으니까. 난 오이카와 토오루. 27살에 HQ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어. 참고로 너에 대해서는나도 한 마디 밖에 못하겠네. 처음 뵙겠습니다.”

 

27, 증권회사. 눈앞의 오이카와, 꿈속의 오이카와는 배구선수가 아니었다. 저 단단한 팔뚝으로 봐서는 운동 하나쯤은 할 것 같은데. 눈앞의 그는 검은 수트를 입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싫어하던 옷을.

 

운동 같은 건 안 하시나요? 좋아하는 음식은요?”

뭐야? 이거 무슨 선이야? 얘기 하자더니 그런 거 물어보려고 한 거야?”

 

오이카와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미소 지었다. 카게야마는 너무 앞서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인 것 같지만, 오이카와가 아닌 남자. 그가 얼마나 오이카와와 비슷한지 알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서 기억의 조각을 찾길 바랐다.

 

, 좋아. 운동은 딱히 안 하고 있어. 웨이트 트레이닝은 자주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빵.”

 

이내 선심 쓰듯 눈가를 가늘게 뜨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추가로 말해주자면, 우유빵은 우유 그리고 빵이 아니니까. 엄연한 우유빵이라는 빵의 종류니까. 다음에 사 올 생각 있으면 기억해둬.”

 

누가 사다 준다고 했나.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게야마도 그에 이끌리듯 포크 카레를 입에 옮겼다. 맛있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갔던 카페의 포크 카레 맛이었다. 웨이트 트레이닝. 그래서 그렇게 팔뚝이나 어깨가 단단했던 건가. 오이카와 선배도 웨이트 트레이닝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원래 트레이닝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카게야마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눈앞의 오이카와도 분명, 그럴 것이다.

 

중학교는어디 나오셨어요? 고등학교는요?”

진짜 선보는 기분인데. 계속 나만 질문받는 것도 억울하지 않아? 그럼 토비오쨩은? 취미는 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오이카와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투명한 유리 테이블에 팔을 두고 턱을 괴었다.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만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눈앞에서 홍차 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슬며시 부는 바람에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당신은 내 기억 속의 오이카와인데도. 이미 몇 년이고 알고 지냈을, 그런 걸 질문하는 당신이.

 

배구를 하고 있어요. 배구선수입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반숙 달걀을 얹은 포크 카레.”

뭐야, 그거. 엄청 자세한데?”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따뜻한 공기를 타고 흘러와 카게야마의 귓속에서 퍼졌다. 이 목소리가 좋았다. 지금도, 좋다. 오랜만에 듣는 오이카와의 웃음소리에 카게야마의 속이 먹먹해졌다. 여전히 아프다. 그가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럼 중학교는? 고등학교는?”

 

카게야마가 물었던 걸 마치 처음인 양 묻는 오이카와의 미소가 눈에 서렸다. 카페는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테라스는 거리의 소리까지 더해져 더욱 소란스러웠다. 자동차 소리, 웃음소리,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까지. 그런데도 오이카와의 소리는 귀에 닿았다. 카게야마에게는, 정확히 말하면. 오이카와의 소리만이 들렸다.

 

배구를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중학교는 배구부가 유명한 키타가와 제일 중학교로 들어갔어요. 고등학교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요.”

우와, 키타가와? 거기 들어본 것 같아.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서? 지금 배구 선수 하고 있으면 잘하겠네? 인터..하이였나? 미안, 도통 스포츠엔 관심이 없어서. 거기서 우승도 해봤어?”

 

오이카와의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이카와는 꽤 흥미가 돋은 듯 몸을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이 댔다. 정갈하게 갖추어진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말끔한 회사원의 얼굴. 그는 인터하이조차 모른다. 그 여름, 우리의 시합도.

 

인터하이에선

, 미안. 나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얘기, 즐거웠어.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네. 만날 수 있으면.”

 

카게야마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고, 남겨놨던 커피를 한번에 쭈욱 들이켰다. 눈앞에서 오이카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사라지려하는 오이카와를 보고 몸을 서둘러 일으켰다. 두려웠다. , 그가 사라져버린다.

또 나를 두고

 

..오이카와 선아니, 오이카와씨!”

미안, 정말 급해서. 가볼게.”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을 하고 손을 올리며 미안포즈를 짓는 그는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카게야마는 몸을 돌린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급하게 몸을 움직인 카게야마 덕분에 테이블이 크게 덜거덕거렸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포크 카레가 조금 흘러넘쳤다. 카게야마의 눈에 포크 카레는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의 오이카와에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함께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곳에서.”

……좋아. 대신, 마음이 내키면.”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내 카게야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빼낸 오이카와가 걸음을 서둘렀다. 등을 돌리고 잰걸음으로 가버리는 오이카와의 등을 카게야마는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검은 수트가 반짝이는 햇빛을 받아 연하게 빛났다. 그리고 제 손을 한번 바라봤다. 만졌다. 오이카와를, 만질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의 손이었다.

 

오이카와의 손은, 따뜻했다.



 

 

 

 

 

 

눈을 뜬 곳은 침대 안이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침대 옆 협탁에서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쳐놓고 잔 탓일까, 방안은 아직도 어둑하니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앞에 카페, 그 빛나던 햇빛, 김이 오르던 포크 카레, 커피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손을 뻗어, 오이카와가 없는 침대 옆 빈자리를 툭툭 쳤다. 침대는 차가웠다. 그리고 다시 뻗었던 손을 거둬,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볼은 신기하게도, 따뜻했다.

 

 

* *

 

 

오이카와 선배는 아직 못 찾았어?

. 철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없어. 행방을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전부터 이상한 곳에 집착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그래. 장난 하나를 치려고 일주일 동안이나 말도 안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킨다이치가 핸드폰 건너편에서 멋쩍은 듯 말을 흐렸다. 그걸 왜 네가 부끄러워하냐고.

 

오이카와가 사라진 지 2주 하고도 3. 13일에는 쿠니미에게서 전화가 왔고, 오늘은 킨다이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희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냐. 이와이즈미는 그 뒤로 메일만 몇 통 보낼 뿐 그다지 연락이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여기저기로 오이카와의 행방을 알아보는 중인 것 같았다. 카게야마도 그랬듯이, 이와이즈미가 보내는 메일도 모두 진척 없음을 나타내는 내용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러한 상황에 조바심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의 감정은 조바심이나, 당황, 초조 등.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슬펐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러한 두려움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실제 했던 오이카와가, 그저 기억 속의 오이카와가 되어버리는 것. 만질 수 없고, 끌어안을 수 없고, 그의 품에 안길 수 없다. 카게야마의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아무튼, 어딜 가더라도 꼭 돌아오던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웃는 얼굴로 모두~ 걱정 많이 했어~?’이러면서 돌아올 거야. 그럼 또 이와이즈미 선배가 한 대 때리지 않을까. ‘바보카와, 어디 갔다 이제 기어들어 오냐!!’라면서.

. 그러게.”

 

킨다이치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흉내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 서툰 흉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전부터 다정한 킨다이치였다. 말로 하진 않지만, 꼬박꼬박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는 쿠니미와 말은 서툴지만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킨다이치. 좋은 친구였다. 그래서 더욱,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 끝이 없던 사랑. 그 끝이 없던,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카게야마는 바닥을 모르는 애정을 느끼고 가끔 몸을 떨었다. 그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다. 더 없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내 옆에 없어. 내 기억 속에서만 웃고 있어. 그런데도, 오이카와가 없는 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 *

 

 

오늘도 있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포크 카레? 정말 좋아하나 보네.”

.”

 

오이카와는 재킷을 의자 뒤편에 걸치고, 의자를 끌어다 카게야마의 앞에 앉았다. 애초에 의자가 2개뿐인 2인용 테이블은 성인 남자 두 명이 앉자 꽉 들어찼다. 오이카와는 낮게 한숨을 내뱉고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꿈속의 오이카와를 만난 건 이번으로 4번째였다. 꾸는 꿈마다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카페에 있었지만 오이카와가 나오지 않아 허탕 치는 날도 있었고. 그저 부유물같이 오이카와가, 오이카와와 함께한 추억이 떠도는 꿈을 꾼 적도 있다. 그럼에도, 꾸준히. 꿈속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는 날은 확실히 있었다.

꿈속의 카페는 언제나 붐볐다. 모든 사람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매우 즐거워 보이는 단란한 가족의 테이블도 여러 곳 있었다. 마치 봄날과 같은 날씨. 따뜻했다. 오이카와가 나오는 꿈을 꿀 때면, 매일 밤 추위에 떨며 잠드는 카게야마도 기분 좋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난방을 틀어도 방안은 따뜻해지지 않았는데. 시린 발을 이불에 싸매도 그토록 추웠는데. 어째서 이 꿈속은 이다지도 따뜻한 걸까. 어째서, 항상이 사람 옆은 따뜻한 걸까.

 

그렇게 맛있나? 어디, 나도 한 번 먹어볼까.”

,”

 

카게야마가 말릴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포크 카레를 한가득 떠서 합,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카게야마는 자신의 몫이 꽤 많이 줄어든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의미로 눈가를 구기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는지 안 보는지 응, 응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내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 맛있긴 하네. 조금 달긴 하지만.”

여기 엄청 많이 퍼간 자국 보여요? 완전 구멍 파였어요.”

쩨쩨하게 그런 거로 생색내기야? 이쪽은 바쁜데도 일부러 시간 내고 있는데.”

 

카게야마의 삐죽 튀어나온 입에서 나오는 불만을 들은 오이카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풀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 손사래를 치며 툭, 오이카와가 퍼먹은 자리를 가리키는 카게야마의 손을 쳐냈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손이 힘없이 테이블 너머로 날아가서, 카게야마는 또다시 입술을 내밀며 손을 거뒀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 그것이 꿈속의 오이카와에 대한 인상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의 기억 속 오이카와보다 어린아이 같았다. 장난의 정도는 덜했지만 자잘한 장난이 많았다. 그러고선 꼭,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눈가를 접고, 입꼬리를 익살스럽게 올리고, 홍차 빛 눈동자를 굴리며.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카게야마를 바라본다. 그 미소는 기억 속 오이카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기억 속 오이카와는 이렇게 미소 짓지 않았다. 좀 더 깊은 웃음을 짓는 사람이었다. 보고 있으면 그에 빠져들어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미소. 그저 카게야마를 끌어들여서, ‘토비오부드럽게 부르고. ‘토비오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토비오’.

 

그 얘기 해줘. 나 닮은 사람 얘기.”

멍하니 머릿속 오이카와를 재생하고 있자, 눈앞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을 톡 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몸은 카게야마에게로 기울어있었다. 화제에 관심을 보이는 그의 표현방식이었다.

 

? , 들어도 괜찮아요? 지루하잖아요.”

아냐, 안 지루해. 재밌다니까?”

……….”

 

거짓말. 저번에 하품하는 거 다 봤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온 걸 카게야마는 꿀꺽 집어삼켰다. 이 말을 하면 어린아이 같은 이 사람은 또 삐질 게 분명했다. 저번에는 삐져서 그냥 가버리는 바람에 카게야마가 꽤 곤욕을 치렀다. 한번 이렇게 재촉하기 시작하면 얘기를 안 해줘도 삐지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어느새 턱을 괴고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얘기를 들을 때면 그는 항상 이런 자세를 취했다.

항상.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하루에 한 번은 꼬옥 끌어안고, 매일 아침 잘 잤어?’ 인사해주고. 가끔 장난을 치는 일은 있어도, 결코 장난으로 네가 싫어라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꿈속의 오이카와는 응,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동자가 상상을 하는 듯 조금 먼 곳을 바라봤다. 꿈속의 오이카와에게 기억 속 오이카와 얘기를 하는 것은 이걸로 3번째였다.

 

근데 처음에 왜 오이카와 선배라고 한 거야?’

혹시 누구로 착각한 거 아냐? 나랑 엄청 닮은 사람. 그것도, 성이 똑같은.’

재밌을 것 같은데. 한번 얘기해봐.’

 

두 번째 만났을 때 가볍게 내뱉은 그의 말에 카게야마는 잠시 그대로 굳어있었다. 말해도 괜찮은 걸까. 어쩐지 꿈속의 오이카와에게 기억 속 오이카와의 존재를 알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신은 없었다.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말하면, 말해버리면. 이 사람도 떠나가는 건 아닐까.

역시 이름까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 이외는 조금씩 말을 내뱉자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몇 년이고 옆에 있던 상대였다. 사랑한 상대였다. 기억이라는 주머니에서 꺼내서 가져오는 오이카와의 존재는 너무나도 알싸하니 달콤하면서도, 약간 빛이 바래 있었다. 간혹 기억이 애매한 때도 있었다. 애초에 카게야마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이카와와 추억담을 나눌 때도, 오이카와가 기억의 빈 구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해주곤 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채워줄 수 없었다. 그저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테라스의 2인용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자신의 얘기에 집중해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홍차 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잘 웃고, 상냥하고. 옛날부터 주변에서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었어요.”

, 그거. 나랑 똑같네.”

……. 배구도 굉장히 능숙하고. 서브가특히나. 그 서브를 배우고 싶어서, 중학교 때 그 뒤를 그냥 쫄래쫄래 따라다녔죠.”

 

오이카와의 가벼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내뱉었다.

 

고등학교는 다른 곳으로 진학했는데, 시합에서 만났어요. 시합 때 제대로 지고 나서, 다음에는 이겨주겠다고. 꼭 이겨주겠다고 다짐했어요.”

헤에정말 배구 잘했나 보네. 현직 배구 선수를 이길 정도면.”

. 현 내에서, 최고의 세터였죠. 지금도 제게는 최고이고.”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보며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기억 속 오이카와에게는 한 번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부끄러웠고, 뭔가 조금 간질거렸으니까. 항상 자신의 마음의 첫 번째는 오이카와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 등을 따라잡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눈앞의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은 뒤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손등을 슬쩍 매만졌다.

 

귀엽네, 토비오.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 지금도, 여전히.”

같은 얼굴에, 같은 이름에,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한테도 반하는 거 아냐?”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내뱉은 말에 카게야마는 웃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두려웠다. 기억 속 오이카와 대신, 꿈속 오이카와가 채워가는 주머니가. 눈앞의 오이카와에게 말할수록 기억 속 오이카와가 빠져나가서, 꿈속 오이카와로 채워진다. 말하지 않으면 될 텐데. 하지만 그러면 또, 당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당신과의 기억이 흩어지고 만다. 카게야마는 괴로웠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저 눈동자를 보며 얘기하고 싶다.

 

토비오, 토비오? 또 생각하고 있는 거야?”

, . 죄송합니다.”

됐어. ‘오이카와 선배에 대해서지? , 가끔 생각에 빠진 토비오의 얼굴을 뜯어보는 것도 재밌지만.”

얼굴너무 빤히 보지 마세요.”

? 귀여운데. 토비오쨩, 의외로 예쁜 얼굴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오이카와는 손을 매만지던 곳에서 더욱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이 카게야마의 볼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또한 장난이리라.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얼굴을 뒤로 당기며 피할 수 없었다. 날이 뜨거웠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연하게 불이 지폈다. 포크 카레가 너무 달았던 탓일까, 입안에 단맛이 슬며시 퍼졌다

귀여워,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순간적이나마,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고 카게야마만을 바라봤다. 그 홍차 빛 눈동자가 아주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어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꼬옥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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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책의 일부입니다. 샘플도 아니고... 음.. 더이상 팔 생각은 없지만 전체를 공개하기엔
  넘 부끄러워서... 수정해서 케스 ? 카게른 ? 때 판매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엄청난 수정을 가할 예정입니다. (아마도...)
  지금 내용도 좀 수정할 부분이 보이는데(내용이 아닌 글씨 간격이나 기타 등등..) 귀찮아서... 죄송합니다......ㅠㅠ...흑...

오이카게 교류회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ㅠㅠㅠ 오이카게는 역시 세계최고....(??





* 조금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어서 시작한 글. 하지만 여전히 지루함 주의만...

* 키타이치 시절의 오이카와랑 카게야마입니다.









연애를 가르쳐 주세요.


 

 


 

지독한 겨울이었다. 아프고 아파서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조그만 볼 안을 맴돌고 나간 바람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아팠다. 이곳저곳이 아팠다. 후우 내뱉는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추워?” 근처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돌렸다. 습관과도 같았다.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눈을 맞추고, 한번 깜빡. 그림으로 그린 듯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도 습관인 걸까,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진득하니 녹아내린 설탕이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니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이카와는 짙은 남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덜미에 두른 목도리의 색이 썩 예뻤다. 올리브색, 이라고 하나. 저런 걸. 카게야마는 제 목에 둘린 검은색 목도리를 바라봤다. 카게야마가 내쉰 입김을 한번 바라본 뒤, 오이카와가 손을 잡았다. 꺼끌거리는 손바닥. 오늘도 이 손에서 몇 번이고 그림 같은 서브가 쏟아져 나왔다. 살며시, 마주 잡으면. 오이카와는 저 달과 같이 눈을 굽혔다. 차갑네. 중얼거리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모르고 시작한 연애는 힘겨웠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감정의 정의도 제대로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고민이 될 즈음, 오이카와가 말했다. “토비오쨩, 나랑 연애할래?” 연애가 뭐에요? 묻는 나에게 오이카와씨는 그저 웃어 보였다.

연애? 연애는 있잖아

 

무슨 생각해?” 눈을 들어 앞을 봤다. 오이카와가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 . 무슨 생각하고 있어? 찌릿하게 등을 훑는 듯한 시선. 말끔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저를 비웃는 듯했다. 오이카와씨를 눈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시선을 틀었다. 어두운 길 가운데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약했다. 빛이 바람에 서서히 흔들거렸다. 그만하세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기어코 내뱉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그렇게 다가오는 거.” 결국 완성되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 오이카와는 목울대를 울리며 소리를 냈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까. 귀가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시리고, 아픈 귀가 그대로 얼어서 떨어져서. 오이카와의 목소리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녹는 귀를 바라보면 카게야마는 무슨 생각이 들까. 그 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까. 오이카와의 목소리로 녹는다면, 그렇다면.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이 아직도 차가웠다. “손잡고 있는 거 싫어?” 오이카와가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밤이 그의 눈에 녹아있었다. 입김을 내뱉는 입술이, 보드라워 보여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늘로 두 번째였다. 머릿속에선 아뇨, 라는 말이 맴도는데. 정작 나오는 건 고갯짓뿐이었다. 그 대신 손을 꽉 맞잡았다. 오이카와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안 그래도 쪼그라든 폐에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 천천히 내뱉었다.

 

토비오쨩. 우리 연애한 지 벌써 한 달이네.” 오이카와는 몸을 다시 되돌리더니 앞서 걸어나갔다. 그의 손에 이끌리듯 카게야마가 몸을 움직였다. 타박, 타박.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길 끝에 놓여있는 좁은 길가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붙을 만한 너비였다. 어깨에 닿은 오이카와의 단단한 팔. 옆모습조차도 다시 보게 만드는 사람. 진한 홍차 빛의 눈동자에는 카게야마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저 시선 끝에 있는 건 무엇일까. 카게야마는 가로등 불빛이 부서지는 한가운데서 그런 것만 생각했다. “한 달, 이네요.” 그 말을 나지막이 따라 한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찬 바람에 몇 번이고 한 심호흡 때문일까. 떨리는 목소리가 힘겨웠다. 오이카와가 낮게 웃었다. 묘한 웃음소리였다. 카게야마와 둘이 있을 때만 내던 그의 목소리. 뱃속을 훑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달 해보니까 어때?” “연애요?” “. 어땠어? 오이카와씨랑 보낸 한 달.” “, 모르겠어요.” “연애를?” “…….” 카게야마는 숨을 참았다. 거리에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연애를. 모르겠어요. 오이카와씨와의 연애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꾸욱 잡았다. 저릿하게 퍼지는 아픔에 읏,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건 달 뿐인데. 밤이 길었다. 아플 정도로 길었다. 밤이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몸을 뱀처럼 타고 올라왔다. 그 목소리로, 눈길로, 손으로, 달콤하게 끌어안는 몸으로. 오이카와가 손을 끌어당겨서 카게야마는 그 몸에 폭 안겼다. 오이카와에게 안긴 카게야마의 몸이 떨렸다. 오이카와에게 안기는 감각은 푸근하면서도 싸늘했다. 그 긴 팔이 카게야마의 등을 낚아채듯 감싸 안았다. 눈앞에는 오이카와의 남색 코트뿐이었다. 눌린 팔 안에서 숨이 막혀왔다. 시야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카게야마는 그냥 눈을 감았다. “토비오쨩. 나 좋아해?” “아시잖아요.” “. 알면서 묻는 거야.” “좋아, 해요. 잘 모르겠지만. 좋아해요.” “뭐야, 그거?”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오이카와에게 낚아채여서, 갈고리로 뜯기듯이.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물어봤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과 같이, 졸졸졸 흘러 넣었다. 나 좋아해, 토비오쨩? 그 말을 들으면 온몸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카게야마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오이카와가 끌어당기는 대로. 좋아해?

 

. 나도, 좋아해. 좋아하고 있어, 토비오쨩.” “거짓말하지 마세요.” “우와, 너무한다. 오이카와씨 의심하는 거야?” “믿는다고 해도, 거짓말이니까요. 거짓말은 믿기 싫어요. 믿어봤자 거짓말이잖아요. 서브 알려주겠다는 오이카와씨 말처럼.” “으응오이카와씨 거짓말은 안 하는데? 항상 진심이야. 서브는 알려주지 않을 거니까 싫다고 말하는 거고,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말하고.” 졸졸졸 흘러들어오는 말의 물방울은 귀 안을 가득 메웠다. ,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가 거짓말 잘한다는 거. 쿠니미한테 캐러멜 사탕 사준다고 해놓고 우유빵 사주고, 이와이즈미씨한테 안 한다고 말해놓고 사귀지도 않는 여자 선배랑 키스하고. 저랑 연애한다고 해놓고, 저를 먹어버릴 생각만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사실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거짓말은 믿지 않거든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도릿짓했다.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턱을 두었다. 무거워진 머리에 카게야마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나 이렇게 신뢰가 없었어? 토비오쨩, 나 좋아한다면서 안 믿어주고. 오이카와씨 서운한데?” “믿는 거랑 좋아하는 건 다르잖아요. 좋아하지만 오이카와씨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나 좋아해? 토비오쨩.” “왜 자꾸 물어봐요. 좋아한다니까요?” “나랑 하는 연애, 좋아?” “모르겠어요.”

 

오이카와와 하는 연애부터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애초에 얘기했던 것은 한 달 뿐이었다. 우리 한 달만 연애해볼까? 그 한 달이 지나면 뭐가 있는 걸까. 자신에게 짜증만 내던 오이카와가 눈에 띄게 상냥해진 것은 연애하기로 한 때부터였다. 토비오쨩, 다정한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의 달콤한 목소리. 설탕을 졸이면 그런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걸까. 정성스레 모양이 예쁜 각설탕만 골라서, 몇 시간이고 졸인 시럽의 맛. 한 달이 지나면, 한 달이 지나면. 카게야마는 매일 밤 그것만을 생각했다. 왜 한 달일까? 한 달이 지나면 더는 오이카와씨의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걸까? 한 달이 지나면오이카와는 더는 카게야마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 ✤ ✤

 

 

카게야마, 이거. 네 거지?” 이름이 불려서 고개를 돌린 곳에는 쿠니미가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검은색 목도리가 낯익었다. 이미 많은 부원이 옷을 갈아입고 나간 한적한 부실에서, 손이 느려서 여태 나가지 못한 카게야마에게 쿠니미가 말했다. “저기 떨어져 있던데.” 쿠니미의 손이 오이카와의 사물함 근처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전날 오이카와가 멋대로 뺏어간 목도리였다. 카게야마의 집 앞에서 헤어질 때. 오이카와가 씨익 웃으면서.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니까, 오이카와씨한테 상 하나만 줘. 카게야마의 붉어진 귀를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면서,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달콤한 감각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퍼졌다. 앗 하는 사이에 목덜미는 생경한 바람으로 뒤덮였다. 다 지나지 않은 겨울의 알싸함이 뒷목까지 덮쳤다. 그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에 카게야마는 뒷덜미를 매만졌다. 쿠니미가 뭐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끄덕,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뻗었다. 쿠니미에게서 건네받은 목도리는 차가웠다.

고마워.” “오이카와 선배랑 요즘 뭐 하고 지내는 거야?” “?” “요즘 묘하게 잘 지내잖아. 특히 둘만 있을 때.” “…….”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목도리를 잡은 후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목도리를 따라서 카게야마의 무언가가 쿠니미에게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쿠니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적. 조용해진 부실. 이미 쿠니미와 카게야마를 빼곤 모두 돌아간 후였다. 킨다이치가 밖에서 쿠니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돌아가는 것이 요즘의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카게야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요즈음 카게야마의 옆에는 항상 오이카와가 있었다. 그것도 한 달째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한 달, 연애해볼까. 했을 때부터 날을 세었다. 어째서일까.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로 며칠째. 저절로 계산이 됐다. 그것이 오늘로 꼭 한 달이었다. 오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 달 전만 같았다. “그래. 알았어.”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목도리에서 손을 놓았다. 쿠니미의 손이 떨어진 목도리가 무거웠다. “내일 보자.” “. 내일 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쿠니미는 부실을 나갔다. 덜컥, 문고리 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귀 안에서 울렸다. 오이카와의 달콤한 물방울로 가득 찼던 귀는 어느새 말라버려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고, 시린 공기 속에서 얼어서 떨어지면. 오이카와는 그 귀에 속삭여줄까. 귀를 녹여줄까. 형태도 사라질 정도로, 달콤한 시럽으로 녹여줄까. 카게야마는 목도리를 둘렀다. 귀까지 덮이게 꼭꼭 싸매고, 그 목도리에 고개를 묻었다. 오이카와의 냄새. 오이카와의 품 안에서 나던 냄새가 카게야마를 채웠다.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좋아해요. 말하면 말할수록 떨어져 나가는 귀가 아픈데. 또 말하지 않고는 못 버티니까. 카게야마는 눈을 꼬옥 감고, 다시 뜨고. 몸을 움직였다. 밖에서 오이카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카게야마를 기다리지 않는 오이카와가.

 

 

✤ ✤ ✤

 

 

체육관 밖은 한산했다. 오후 연습이 끝나고, 손이 느린 카게야마가 나오면 항상 이랬다.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동아리 홍보지가 벽에서 바람결에 파라락 흔들렸다. 목도리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후,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흘러내린 가방을 다시 고쳐매고, 목도리를 여미고, 발을 내디뎠다. 체육관 근처, 교사(校舍)에서는 또 떨어진 곳이 한곳 있었다. 크게 자란 고목(古木) 아래가 그곳이었다. 키타이치 중이 자랑하는 그 나무는 500년도 더 됐다고 하던데. 카게야마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한 숫자는 쥐약이었다. 오이카와와 연애한 한 달은, 그렇게도 잊히지 않았는데. 여름에는 꽤 장관이 펼쳐지는 그 나무 아래는 여자 선배들이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큰 잎이 그늘을 만들고, 햇볕에게서도.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가려주었다. 결국에는 다 보이는데도, 여자 선배들은 뭐만 하면 그렇게 그곳을 찾아갔다. 겨울이어서, 잎이 모두 사라진 가지 아래는 오늘도 여전히. 그 옆을 지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 선배였다. 이와이즈미가 언젠가 했던 말이, 카게야마의 귀에 떨어졌다. “바보카와, 너 아무 여자하고나 키스하고 다니지 마.” “어어? 이와쨩 혹시 봤어? 몰래 훔쳐보다니 변태!”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여기저기 이상한 짓하고 다니지 마.” “으응알았어. 슬프지만!”

거짓말쟁이. 오이카와는 거짓말쟁이였다. 거짓말은 믿지 않았다. 믿어봤자 진실이 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믿고 싶어도, 진실이 되길 원해도, 한 달을 믿어도 거짓말이니까. 카게야마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눈이 달과 같이 휘었다. 오이카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모르는 여자 선배와 고목 아래에서 키스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그저 바닥을 보면서 지나갔다. 귀가 시렸다. 떨어질 것만 같았다. 떨어져서, 툭 하고 떨어져서. 오이카와가 녹여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썩어버릴 텐데.

 

 

✤ ✤ ✤

 

 

토비오쨩.” 뒤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습관이었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한번 깜빡. 오이카와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트는 두르지 않고, 목덜미에 덮여있는 올리브색 목도리는 흐트러져있었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시간이었다. 정갈하게 자리 잡은 코를 한번 훔치더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오이카와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이 불어서 카게야마는 눈을 한번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폭 안았다. 눈앞에 오이카와의 셔츠만이 보였다. 가만히 숨을 쉬면 오이카와의 냄새. “오늘, 한 달째잖아.” “.” “그러니까 이제 연애 끝. 그렇지?” “.” “있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연애.” “…….”

연애. 연애인 걸까. 이런 게 연애인 걸까. 카게야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리끝에서 퍼졌다. 밤이 되면 또,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몸을 감아온다. 발끝에서 시작해서, , 가슴, 귓속까지. 이게 연애인 걸까. “연애는, 이상한 거 같아요.” “이상해?” “. 오이카와씨랑 하는 연애는, 이상해요.” “흐음. 그게 토비오쨩의 결론이야?” “그럼 오이카와씨는 어떠신데요?” “연애?” “. 오이카와씨의 연애는 어떠신데요.” 오이카와는 푸핫, 거칠게 부는 바람과 같이 웃더니 카게야마의 몸을 떼어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거친 손길에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흔들거렸다. 눈을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면. 어둑해지기 시작한 저녁 속으로 오이카와의 미소가 녹아들었다. 있잖아, 토비오쨩. 연애는그 입이 예쁘게 움직였다. 아까 여자 선배가 닿았던, 그 입술. 예쁜 분홍빛 입술이 카게야마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연애는 중독이야.” 중독. “하면 할수록 빠져들거든. 연애 자체에.”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 연애 자체에 사랑을 하는 거야. 연애 자체는 좋아할 수 있거든.” 대상은 상관없이. “그러니까, 있지. 토비오쨩. 나랑 연애할래?” 오이카와는 슬며시 카게야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람에 차가워졌던 카게야마의 이마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그것을 보고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웃어보였다. 당신의 입술은 독이었다. 내 몸을 옭아매고, 저 깊은 곳까지 떨어뜨리면서. 이곳도 저곳도 모두 녹아버려. 당신의 목소리는 독이었다.

한 달만 저를 사랑해주시는 건가요.” “한 달만 너를 바라보는 거야. 그리고 또 한 달, 또 한 달. 연애는 중독이니까, 하다 보면 토비오쨩과의 연애에만 빠져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오이카와씨는 거짓말쟁이인 거에요.” “? 너무하네. 오이카와씨는 항상 진실만 말한다니까? 진짜야.” “거짓말쟁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몸에 안겼다. 그 팔을 돌려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교복끼리 닿았다. 밤이 내리깔렸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좋아해, 토비오쨩.” , 떨어졌다. 귀가 떨어졌다. “나도 좋아해요, 오이카와씨.”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오이카와의 손톱에 긁혀서, 미소에 긁혀서 오늘도.

적어도 카게야마의 몸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진 할 수 있는 연애였다. 이렇게 또 한 달,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녹아내려 간다.









[오이카게] 오이카와의 벚꽃

*하이큐 글전력 주제 : 벚꽃 참여했습니다.

*지루함 주의입니다..

 

 

 

꽃놀이란 말을 처음 알았을 때. 카게야마는 정말로 꽃을 가지고 노는 놀이인 줄 알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꽃과 놀이라는 말의 결합이 의아했다. 꽃으로는 어떻게 놀면 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오이카와가 꽃놀이 갈까?” 라고 했었던 날은, 정말로. 카게야마의 안에서 꽃놀이라는 말이 이질적인 단어가 될 정도로 고민했었다. 저로서는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오이카와에게 답을 얻고자 찾아갔으나, 돌아온 대답은 맥빠질 정도로. 오이카와는 방금 핀 꽃처럼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바보, 벚꽃 보러 가는 것뿐이야.”

벚꽃. 벚꽃. 그 말을 되풀이할 때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이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 찼다. 벚꽃은 분홍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막상 떠오르는 것은 분홍색 일색이었다. 정면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아닌, 고스란히 퍼지는 햇볕. 따뜻한 공기 가운데에 퍼지는 약간은 차가운 바람. 그곳에 흩날리는 벚꽃잎들. 바람이 불 때마다 폭풍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퍼붓는 벚꽃잎의 홍수는 아름다운 공포였다. 모두 떨어지면 결국에는 엉성한 나무만이 남을 뿐이었다. 나무는 아주 짧은 순간 모두의 눈빛을 끈 뒤에, 결국에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나머지는 아주 긴, 긴 겨울 뿐이었다. 벚나무에게는 벚꽃잎이 없는 자신이란,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카게야마는 그걸 보는 것이 싫었다. 꺾일 때를 놓쳐버린 고목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는 져버리는 꽃잎. 언젠가는 사라져버리는 봄. 그런데도, 벚나무는 어째서. 매번 그다지도 꽃잎을 내버리는지. 제 몸을 모두 소멸시키려는 듯이. 그때만큼은 벚나무가 무서워 보일 정도로, 카게야마에게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모양은 무서운 신기루였다.

 

그래서일까, 오이카와와 가는 꽃놀이는 조금 두려웠다. 어쩌면 카게야마와 오이카와 앞에서 모두 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그런 장면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이카와와 바라본 벚나무, 순식간에 바람이 몰아쳐서, 모두 떨어진 벚꽃잎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머리에도, 땅에도, 공기 중에도 온통 벚꽃잎으로만 가득해서. 그때 오이카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카게야마는 그것이 무서웠다. 오이카와는 어쩌면, 벚꽃잎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그 뒤엔 긴, 긴 겨울을 오이카와 혼자 보낼지도 몰랐다. 벚나무는 오이카와를 떠올리게 했다.

 

 

✤ ✤ ✤

 

 

, 아직 남아있네.”

그러게요.”

연습으로 바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서로 학교도 다르고, 연습시간도 달랐다. 같은 것은 둘 다 연습을 빠지진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겨우 잡은 시간은 벚꽃 만개기보다도 꽤 늦은 시기였다. 벚나무가 그득하니 늘어선 공원은 없지만,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공터는 그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어느 정도 떨어진 벚꽃잎이 바닥에서 흥건히 분홍빛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꽃의 잔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가 제 몸을 흔들어댔는지 알게 해줬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빈틈없이 피어있는 벚꽃 사이로 포근한 햇살이 쏟아졌다. 따스한 날이었다. 가쿠란을 입고 있는 몸이 조금 더웠다. 오이카와는 이미 세이죠의 재킷을 벗은 상태였다. 홍차 빛의 머리카락이 연한 바람에 조금씩 흔들 흔들거렸다. 그 사이로 물 흐르듯 흐르는 벚꽃잎이, 한 방울. 두 방울. 오이카와 주변으로 떨어졌다.

 

덥지 않아? 가쿠란.”

조금, 덥네요.”

오이카와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항상 깔끔한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목 부근의 단추뿐만이 아닌, 나머지의 단추도 모두 풀었다. 그런 뒤 오이카와가 했듯이 가쿠란을 벗어 팔에 걸쳤다. 짙은 검은색의 가쿠란에 떨어진 벚꽃잎이 묘하게 눈에 띄었다.

토비오.”

.”

나 내일 졸업식인데.”

알아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오이카와는 졸업하고. 도쿄의 대학으로 가버린다. 어긋나기만 했던 시간을 겨우 맞췄더니 다시 어긋나버린다. 뭐가 아쉬운 걸까. 카게야마는 그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없는 미야기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없는 인터하이가 어색했다. 오이카와가 제 영역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카게야마의 미간을 좁혔다.

 

뭘 안다는 거야.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내뱉은 뒤 미소 지었다. 화려한 얼굴에 꽃과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벚나무와 같은 사람. 당신을 보면 눈이 부셔서 모두 넋을 놓고 바라보지만, 무대 아래의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미소를 바라볼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도 결국에는 똑같으면서. 무대 위의 모습만을 바라보는 건 카게야마도 같았다. 온통 빛으로 가득 찬 등만을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항상 큰 존재였다. 그가 서브를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벚꽃잎 폭풍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눈부셔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붙잡고 싶어서, 분홍색 시야 사이로 손을 내뻗으면 오이카와는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도쿄로 갈 거니까.”

.”

절대 따라오지 마. 알았지?”

……왜요.”

그러라면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거야. 여전히 귀엽지 않은 녀석이네.”

오이카와는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었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다. 따스한 햇볕으로 상기된 두 볼이 붉었다. 카게야마의 얼굴 또한 붉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가 뜨거웠고, 오이카와는 그 열을 느끼는 듯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봤다. 좁혀진 미간으로 인해 험상궂은 얼굴이 오롯이 오이카와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내뱉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놓여있는 오이카와의 손에 한 방울, 벚꽃잎이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봤다. 카게야마에게는 보이지 않는 벚꽃잎이 떨어질 듯 말 듯 흔들거렸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모아 그 벚꽃잎을 다시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다. 흔들, 흔들. 그 새끼손톱만 한 잎이 빙글빙글 돌면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불어넣은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뭐하시는 거에요?”

? 벚꽃잎은 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

오이카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떨어지기 위해 몽우리가 맺히고, 떨어지기 위해 꽃이 피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셔츠를 가만히 붙잡았다. 카게야마가 상상했던 그대로, 어쩐지 오이카와가 사라질 것 같아서.

도쿄로 가면 영영 안 오실 건가요?”

. 안 올 거야. 토비오가 있는 곳으로는.”

그렇게 혼자서 어디까지 가시려구요?”

글쎄. 다 떨어질 때까지?”

오이카와는 피식 웃음 지었다.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놓였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손이 가르는 공간 사이로 벚꽃잎이 흩어졌다. 세찬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벚나무는 또 한 차례 벚꽃을 제 몸에서 깎아냈다.

오이카와가 셔츠를 붙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떼어내고, 그 몸을 돌릴 때까지. 카게야마는 울렁거리는 가슴에 어지러웠다. 언젠가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의 등이 분홍빛 시야 사이로 보이고, 오이카와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아직도 그 등이 커 보이는데. 당신은 아직도, 내게는 봄인데.

따라, 갈 거에요.”

…….”

따라갈 거라구요. 도쿄. 그러니까, 그때까지. 혼자 멋대로 사라지지 마세요. 기다리셔야 돼요.”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몸은 아직도 벚꽃잎을 내뿜고 있었다. 언젠가 져버릴 때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가만히 혼자서. 카게야마가 없는 도쿄에서, 그는 길고 긴 겨울을 보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조급하게 내뱉었다.

도쿄는 더 벚꽃이 많죠? , 같이 보러 가요. 꽃놀이. 그때는 오이카와 선배 시간에 맞출게요. 그러니까또 같이 가요.”

 


, 같이. 당신과 벚꽃을 보고 싶어요. 그때는, 당신의 손을 잡을 테니까. 나만 두고 져버리지 않게, 붙잡고 말 거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길고 긴 겨울을오이카와의 겨울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오이카게] 봄비를 닮은 사람

 

 

 

 

오랜만에 맞는 봄비였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봄비는 3월 막바지에야 겨우 내리기 시작해서 겨울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바람을 잠재웠다. 부슬비라고 하던가, 이런 비를. 카게야마는 복슬복슬 흐르는 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검은 우산 아래서의 까맣던 손이, 확 노래지면서 비를 맞게 되었다. 손에 와 닿는 감촉도 없이 젖어갔다. 서서히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하는 손을 다시 끌어당겨 우산 아래로 옮겼다. 젖어버린 손을 타고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줄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연하게 부는 바람은 카게야마의 귀 뒷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

 

카게야마는 툭 내뱉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빗줄기 안에서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우산 안에서 맴돌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몸을 적시는 봄비. 누군가와 닮았다, 는 생각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조그맣게 보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글몽글하게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있어서 봄비는 생소한 존재였다. 아니, 생소하다기보다낯선 느낌이었다. 무섭게 쏟아내리는 소나기나, 여름의 끝없는 장마 같은 장대비나, 겨울의 거친 바람 속의 흩날리는 비가 아닌. 소리도 없이 몸을 적시는 봄비는 낯설었다. 모 아니면 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확실한 카게야마에게는 낯설고. 또 어려웠다. 항상 봄비를 맞이할 때면 누군가가 생각났다. 벌써 이런 봄비 아래에서 그 사람을 생각한 것도 몇 년째였다. 이제는 조금 알 법도 한데여전히 어려운 그 사람은 카게야마에게 수수께끼였다. 눈앞에 흐르는, 느낌조차 없이 젖어드는 봄비와 같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카게야마에게 하나의 답 없는 문제였다.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

 

비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등을 돌렸다.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세이죠 교복을 입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눈가는 찡그리고 웃으며 서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빗줄기 건너로 보이는 오이카와는 약간의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벌써 약간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우산을 꼭 잡았다. 검은색 우산이 약한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뭐해? 가만히 서서.”

여기서, 기다리라고.”

여기 말고 저기. 저쪽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카게야마가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멋들어진 카페가 눈에 보였다. ‘멋들어진이란 표현은 오이카와에게 배운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게 무엇이냐고 오이카와에게 반문했지만 오이카와는 저런 걸 말하는 거야라며 카페를 가리켰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말에 있어서는 오이카와가 더 능숙했기 때문에 그런 거냐며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다. 카게야마는 멋들어진카페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 들어서면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사실 오이카와는 어디에 서 있어도 풍경을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사람이었다.

 

뭔가 저런 데 혼자 있는 건 거북해서요.”

하핫, 그런 무서운 표정 짓고 있으면 당연히 그렇지.”

뭐라고요?”

, . 인상 쓰지 말라니까? 인상만 안 쓰면 꽤 괜찮은 얼굴인데 말이야.”

…….”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우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연한 민트색의 우산은 세이죠 교복과도 어울려 오이카와의 흰 피부를 더욱 드러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의 우산 아래에 오이카와의 흰 손이 불쑥 들어왔다. 우산과 우산이 겹쳐 비가 묻지 않은 그 흰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오이카와가 픽 웃었다.

 

, 안 잡아?”

밖이잖아요.”

, 어때?”

 

오이카와는 으쓱하면서 그저 공기 중에 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잡았다. 우산끼리 맞부딪쳐 어느 정도의 충격이 우산을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으로 전해졌다. 오이카와의 무게였다. 약간 버거운 느낌이 들면서도 기분 좋은 무거움. 눈앞의 오이카와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잡힌 손이 뜨거웠다. 부슬거리며 내리던 비는 어느새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봄비란 그런 것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시작되고, 저도 모르는 새에 그치고. 그러면서도 어느새 봄비에 함빡 젖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 ✤ ✤

 

 

카페 안에선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딸랑가벼운 종소리에 종업원들은 고개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카페 내부는 많이 북적이진 않았다. 다만 봄비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끌어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자주 앉는 그 자리만 고집하는 오이카와를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는 어디든 똑같을 텐데도, 오이카와는 매번 그 자리에 가 앉곤 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기억하려고라고 대답했다. 무얼 기억하고자 한 걸까. 오이카와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카게야마도 그에 대해서는 짚이는 점이 있었다. 정해진 자리에서 보는 오이카와는 약간 빛이 났다. 약간 노란 전등불빛이 몸에 닿아 부서져 흰빛을 뿜어냈다. 카페라떼를 마시는 손가락의 움직임, 눈의 움직임. 가볍게 내렸던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볼 때의 그 얼굴. 카게야마는 그 모든 것들을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모두 저 자리에서만 오이카와를 마주 본 덕이었다. 어쩌면 오이카와도 그런 의미였을지도 몰랐다. 그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지고, 주변의 풍경에 녹아드는 그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그에게도 카게야마가 그런 모습일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토비오쨩은 언제나 먹던 거지? 나도 그걸로 주문했어.”

왜 항상 마시던 카페라떼 아니구요?”

비오니까. 가끔은 좋잖아.”

비가 오면좋은 건가요?”

. 비가 오면 같은 걸 마시고 싶잖아.”

…….”

 

카게야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얼굴에 볼그랗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운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오이카와는 자리에 앉더니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항상 보던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이카와가 앉아있는 의자 뒤편은 통유리라서 밖이 그대로 보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뒤로 비치는 가느다란 빗줄기에 눈이 갔다. 봄비는봄비는, 오이카와를 닮았다.

 

오이카와 선배는 봄비를 닮았어요.”

?”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말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놀란 것은 카게야마였다. , 하는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숙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말이야? 반문하며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앞머리가 길지 않아 카게야마의 얼굴이 다 가려지지 않은 것이 카게야마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오이카와는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어느새 좁아진 미간을 흰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머리가 밀리는 느낌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마주봤다. ? 말해봐, 토비오쨩.

 

저기, 그러니까.”

.”

봄비는, 언제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잖아요. 그칠 때도 그렇고.”

.”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런 기척도 없고. 그래서 괜찮나 보다, 하고 발을 내디디면 순식간에 젖어버려요. 봄비로. 전부.”

, 그렇네.”

 

오이카와는 약간의 웃음기를 지우고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빠질 만한 말을 내뱉었나 고민해봤지만 아무런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지 오이카와는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해도 되는 걸까, 하면 안 되는 걸까. 카게야마는 짧은 시간 고민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등 뒤로 흐르던 봄비가 그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빗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눈에 얇게 봄비가 다시 보였다. 멈춘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적시고, 나무를 적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우산 위로 떨어져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오이카와 선배도. 어느 순간 저를 적셔서 이것도 저것도 다 오이카와 선배로 만들어버리니까. 저도 모르는 새에 모두 흠뻑 젖어서 말릴 틈도 없이 오이카와 선배로 가득 차버려서. 봄비를 닮았구나, 하고.”

…….”

 

오이카와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조심조심 오이카와의 눈치를 살폈다. 화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알기 힘들었다. 정말이지,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던 머리가 순간 새하얘졌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하얀 피부가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입술, , 이마까지. 그 작은 흰 얼굴이 전부 붉게 물들었다. 카게야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오이카와는 갑자기 짜증을 부렸다.

 

으아아, 정말이지! 토비오쨩 진짜 바보야?”

, ?”

 

갑작스레 욕을 얻어먹은 카게야마는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한 번 머리가 새하얘졌다. 오이카와가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테이블에 풀썩 엎어졌다. 부드러운 오이카와의 홍차 빛 머리가 보였다. 보송보송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는 만지면 너무도 부드러워 이 세상의 감촉이 아닌 느낌을 느끼게 했다.

 

바보 토비오쨩. 날 또 죽이려고?”

, 뭘 죽여요?”

맨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는 툭툭 내뱉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까 봤던 붉어진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잡고, 저도 몰랐지만. 어째선지 키스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제 얼굴에도 확확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째선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생각한 것을 오이카와에게 그대로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보드랍게 퍼지는 머리카락은 예쁜 빛을 띠었다. 빛이 부서져, 반짝반짝.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길을 느끼는 건지 머리를 살짝 틀어 옆얼굴을 보였다. 정갈한 옆모습이 카게야마의 눈길을 끌었다. 그 자세 그대로, 눈길만을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움찔, 몸이 떨렸다. 그 홍차 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신기한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의 볼은 약간 발그랗게 물들어 있었다.

 

토비오쨩, 건방져졌어.”

제가요?”

. 중학교 때보다, .”

, 런가요. 아니, 중학교 때도 건방지진 않았어요!”

 

카게야마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오이카와는 그에 화내는 기색도 없이 생글 웃어 보였다. 예쁜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붉은 입술이 분홍빛 볼에 어울렸다.

 

너도봄비야.”

?”

봄비라구.”

…….”

 

카게야마는 아까 오이카와가 했듯이 서서히 얼굴이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이내 푹.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번엔 오이카와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마주 볼 수 없었다. 심장이 이상한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밖에선, 오이카와 건너편에선. 벌써 그친 봄비가 햇볕을 받아 바닥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맑은 햇살, 바닥을 적신 비. 마치 당신처럼.

 

토비오쨩, 나 봐봐.”

싫어요

? 고개 들어보라니까?”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서서히 눈을 들었다. 오이카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다. 어딜 가나 풍경이 되는 사람이다. 햇살 아래에서도, 빗줄기 아래에서도, ‘멋들어진카페에서도. 그 풍경 속에 젖어드는 게 자신이 되길 바랐다. 온통 오이카와로 젖어서, 그 안에 살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이카와도.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에 놓였던 카게야마의 손을 깍지껴서 맞잡아, 쭉 자신에게로 당겼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몸이 오이카와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그대로, 오이카와는 가볍게 카게야마의 입술에 키스했다. 스칠 뿐인 키스였다. 바로 앞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코가 스쳐서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달콤한 향기였다. 약간의 민트향도 섞인, 오이카와의 냄새. 카게야마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따스한 기운이 그 안에서 피어났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바라보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도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생크림같이 말랑한 입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이카와도 또한,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오이카게] 카게야마의 맛은 달다.

* 퍄님이 리퀘해주신 오이카게입니다 u//u

* 제가 사랑니로 한동안 고생해서..카게야마에게도 충치를 만들어줬습니다. 
 

* 리퀘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충치?”

 

  킨다이치의 목소리다. 오이카와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킨다이치와 쿠니미, 그리고 카게야마. 일상의 조합이었다. 평소 킨다이치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말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빨리 찾아온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를 크게 내면 모두의 시선을 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또한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 너무나도 의외의 단어에, 오이카와는 그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킨다이치와 쿠니미가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향해있었다. 체육관 내의 밝은 조명이 쏟아지는 한가운데, 카게야마는 볼을 감싸고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볼을 감싸면서도 절대 배구공을 놓지 않는 게 카게야마다웠다. 오이카와는 서브를 내려치려던 손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슬며시 물기를 띄고 상대 없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

  충치. 몇 년 전 오이카와에게도 큰 두려움의 단어였다. 2년 전, 카게야마와 같은 나이였을 때. 14살의 여름, 오이카와는 충치로 인해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치과에 갔다. 그때의 아픔과 공포를 떠올리면 지금도 조금 몸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오이카와의 마음속에서 저릿하게 검은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걸 뭐라 부르면 좋을까. 괴롭히고 싶은 마음? 장난치고 싶은 마음? 아니면? 아니면?

  오이카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제하지 못하면서 배구공을 높이 치켜들었다. 타앙. 총소리에 가까운 충격음이 체육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등 뒤로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 느낌이 좋다. 오늘의 서브는.

 

 

✤ ✤ ✤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게야마가 착각해서 뒤돌아볼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오이카와 선배. 상대를 알아챈 카게야마가 이마를 찌푸리며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쪼옥 빨았다. 오이카와는 점심, 오후 1240분이면 항상 카게야마가 이곳에 와서 자판기의 우유를 뽑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뜰을 지날 때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선 서브 가르쳐주세요!’하며 귀찮게 하곤 했으니까. 카게야마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항상 오후 1240분 자판기 앞이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름의 태양은 뜨거웠고, 쏟아지는 햇볕의 칼날 앞에서 카게야마는 차양 하나 없이 서 있었다. 그 검은 머리카락은 햇빛을 모두 끌어안으려는 듯 연하게 빛났다. 그 앞머리는 땀으로 인해 이마에 달라붙어 흐트러져있었다.

 

   충치라며? 아침에 들었어.”

   아직 아니에요. 그냥, 조금 이가 아파서.”

 

  오이카와에게 들킨 것이 쑥스러웠는지 카게야마의 눈가가 사르르 붉어졌다. 미간을 좁히고, 입은 삐죽 내밀고. 시선은 틀어 내린 채. 여느 때의 카게야마였다. 그 입가에 비어져 나온 우유가 희었다. 오이카와는 엷게 땀이 스며든 입가를 가볍게 핥았다. 짠맛이 나야 하는데, 연한 달콤한 맛이 나는 듯했다.

  오이카와는 우유를 다시 쪼옥 빨아들이는 카게야마의 볼을 스치듯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이미 오이카와의 약간 서늘한 손길이 익숙한지, 눈을 들어 바라볼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까만 눈동자에, 쏟아지는 햇빛, 카게야마의 이마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땀방울. 오이카와는 이마 옆에 흐르는 땀이 간지러웠다.

 

   오이카와씨도 충치로 고생한 적이 있어서. 친절한 오이카와씨가 한번 봐줄까?”

   …….”

 

  카게야마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올곧게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의심을 담고 있었다. 내가 언제 토비오쨩을 속인 적이 있다고.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카게야마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더니, 다시 우유를 빨아들였다. 그러더니, 꿀꺽. 그 작은 목젖을 움직였다.

 

   ..어요. 왠지 오이카와 선배한테 봐달라고 하면 더 심해질 거 같아요. 치과 갈래요.”

 

  아직도 의심하는 듯한 발언에 오이카와는 욱, 짜증이 치밀었지만 애써 목 아래로 내리며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시 손을 들어, 이번에는 엷게 우유가 맺힌 입가를 쓰다듬었다. 오이카와의 흰 손가락에 흰 우유가 묻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카게야마는 그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치과, 갈 거야? 정말? 엄청 아플 텐데?”

   언젠가.”

   그러다 심해지면 어쩌려고? 그냥 보기만 할게. 경험자에게서 배우는 게 빠르잖아?”

 

  배운다는 말은 카게야마를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리 부탁해도 결코 서브를 가르쳐주지 않던 그가, 그런 말을. 카게야마는 그럼 서브를 가르쳐줄 것이지, 욱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슬며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미소 지은 얼굴을 풀지 않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붉은 입술이 눌렸다. 더 벌려봐. 말이 없는 강요가 카게야마의 입술을 휘감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꼭 감으며 입을 벌렸다. 고르게 난 하얀 치아가 오이카와의 눈앞에 여실히 드러났다. 매끈하고 붉은 혀가 덜덜 떨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혀 위에 놓인 미처 삼키지 못한 우유가 침과 함께 섞여 희고 투명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 착하네.”

 

  오이카와는 머리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아랫배 근처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감각은 하나로 통해있으니까. 오이카와는, 그래. 흥분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찡그린 얼굴, 떨리면서도 제대로 벌린 입, 그 안에 엷게 비치는 하얀 액체. 오이카와는 얇은 입술을 다시 한 번 핥았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힘든지 카게야마의 눈가에 엷게 눈물이 맺혔다. 붉어진 눈가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선명했다.

  오이카와는 아랫입술을 누르던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입술 옆에 두었다. 가늘고 긴 검지를 부드럽게 집어넣어 왼쪽 어금니를 느리게 쓸었다. 그 느낌이 생소했는지 카게야마가 눈을 찔끔 감으며 혀에 힘을 주었다.

 

   ...,”

   왼쪽은 괜찮은 것 같네.”

 

  오이카와는 흰 액체가 막을 이루고 있는 볼 점막을 손톱으로 가냘프게 긁었다. 카게야마가 응,.. 목에서 울리는 얇은 신음을 흘린 뒤 눈을 꼬옥 감았다. 결국 얇은 눈방울이 그 붉은 볼을 타고 흘렀다. 오이카와는 저릿해지는 아랫배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중지도 넣어 혀를 느슨하게 쓸었다. 우유가, 오이카와의 긴 손가락에 얽혀 예쁜 빛깔을 띠었다. 머리 위에서 바로 내리쬐는 햇볕이 손가락을 비추고 지나갔다. 검지는 아랫니의 잇몸을 훑고, 중지는 혀 아래의 예민한 살결을 조심스레 만졌다. 연한, 14살의 입안 점막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감쌌다.

 

   , ........하아...”

 

  카게야마는 숨쉬기 괴로운 듯 눈을 찡그리며 말이 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오이카와 선배.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카게야마의 마음대로 되게 두질 않았다. 혀를 가볍게 긁고, 그 흰 액체를 치아 여기저기에 묻히고, 오이카와의 엷은 미소는 이제 약간의 욕망을 담고 있었다.

   토비오쨩. 오른쪽여기야? 두 번째 어금니.”

   ........으응....”

 

  카게야마는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그에 따라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혀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이제는 꽤 배어 나온 침이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더욱 옭아맸다. 오이카와는 중지로 천천히 두 번째 어금니를 만졌다. 그 아래 잇몸이 슬며시 부어올라 있었다. 부은 잇몸을, 서서히. 중지로 매만지면서 동시에 검지로 혀 천장을 가볍게 긁었다. 카게야마는 순간 몸을 크게 떨며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 까만 눈동자 안에 당황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약간 다른 빛이 섞인 것도 오이카와는 놓치지 않았다.

 

  . 좋아, 심하진 않네. 치과 가면 금방 치료받을 수 있을 거야.”

 

  오이카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그리도 붙어있던 손을 뗐다. 손가락에서 미처 떨어지지 못한 침이 고리를 이루어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흰 우유는 이미 녹은 지 오래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빠져나간 뒤에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하악대는 숨을 고르는 게 최선이었다. 붉은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한 번 더 떨어졌다. 그 까만 눈동자 위의 땀이, 이마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촉촉한 입가에선 앞서 고리를 이루었던 침이 묻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젖어있는 눈동자. 오이카와는 다시 아랫배 근처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맛이 나는 손가락을 끌어올려할짝. 아까까지 얇은 입술을 핥던 혀로 느릿하게 핥았다.

 

  달콤한 맛이 났다.




[오이카게] 카게야마의 일상, 그의 배구

* 키타이치 오이카게

* 조각글. 짧아요.

 

 

 

 

   서브 가르쳐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싫거든? -, -!”

   바보카와, 후배 놀리지 말라고!!”

 

 

  오늘도 어김없는 풍경이다.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체육관으로 들어와서, 그 얇은 다리를 흔들며 부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와 타박타박 걸으며 오이카와에게 다가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봤다. 그러더니, 어김없이. 제 머리보다 약간 큰 배구공을 오이카와에게 쭈욱 건네며 내뱉는 말은 오늘도 똑같았다. 쿠니미는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질렸다, 정말. 오이카와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쿠니미의. 오이카와는 혀를 내밀고 카게야마에게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작 그 앞의 카게야마는 멀뚱멀뚱 오이카와를 쳐다볼 뿐이었다.

 

  한창 실랑이가 일어나더니 연습 시작한다고 이와이즈미와 자리를 이동하는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다시 하프 팬츠 아래의 흰 다리를 움직여, 오이카와의 뒤를 쫓았다. 그 조그만 발이 도도도, 가벼운 소리를 내며 오이카와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 서브 연습 하실 거에요?”

   아니거든? 그리고 한다고 해도 토비오쨩한테는 안 알려줄 거거든?”

   그럼, 그냥 보기만 할게요. 옆에서 보기만 할게요.”

   됐어, 보지 말라고. 토비오쨩은 바보야? 절대 싫거든.”

 

  오이카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데, 그 뒤편에 선 카게야마의 표정이 떼구르르 바뀌었다. 머리카락이 가라앉으며 조금 시무룩했다가 다시 파앗 밝아지며 입을 오물거렸다가. 다시 추욱 가라앉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저게 바로 그 카게야마 토비오냐며 놀랄 것이다. 카게야마는 감정표현이 결코 적진 않았으나 풍부하지도 않았다. 놀라면 눈을 크게 뜨고, 졸리면 눈가를 끔뻑거린다. 기쁠 땐 볼을 연하게 지피며 입가를 오물거린다. 그걸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그렇기에 처음 만난 사람은 카게야마를 오해할 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오이카와 앞의 카게야마는 조금의 충격일지도 모른다.

 

  쿠니미에게는 일상인 저것이, 다른 아이들에겐 일상이 아니듯이. 교내에서 카게야마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오이카와를 만나면. 그 삐죽 내밀었던 입술이 오물거리면서, 도도도 그쪽으로 뛰어가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일상이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다.

 

   오이카와 선배, 오늘은 서브 알려주실 건가요?’

   왜 당연히 알려줄 것처럼 말하는 건데? 싫다고, -! 토비오쨩 바-!’

 

  쿠니미는 그 반복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아아, 또 시작이네라고 생각할 뿐이지만. 다른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쿠니미를 바라보는 것이 하나의 약속이 되었다. 그러면 쿠니미는 다시 약속처럼 내뱉는다.

 

   , 저거. 항상 저래.’

 

  항상저렇다. 그 말이 쿠니미에게는 이렇게나 당연한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이질적인 말이 되고 만다. 그래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카게야마는 항상 저러니까.

 

  오이카와를 만난 순간부터. 그 서브를 본 순간부터.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처음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만남. 나름 이름난 키타이치 배구부 주장 오이카와 토오루의, 서브 연습을 본 예비입부 시절. 그 모습을, 마치 동영상을 찍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던 카게야마의 옆모습. 그 옆에 있던 쿠니미에게는 멋진 서브를 하는 오이카와보다, 그런 눈빛을 하는 카게야마가 더 시선을 끌었다.

 

   카게야마."

 

  가볍게 이름을 불렀었다. 대답이 없었다. 평소 꾹 닫혀있던 카게야마의 입술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기쁜 듯 보였다. 눈가는 당장에라도 눈물이 차오를 듯 붉게 스며들었다.

 

   찾았어.”

   뭐가?”

 

  얘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뭐를 찾았다는 걸까. 오이카와는 이미 한 번의 서브 연습을 끝내고, 또 한 번의 서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긴 손가락 안에서 배구공이 슈르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옆에서 카게야마가, 다시 중얼거렸다. 낮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 배구.”

   …….”

 

  카게야마의 배구.를 찾았다고? 그게, 오이카와라고? 배구는 전부일 것 같은 네가그 배구를, 찾았다고.

 

 

  쿠니미는 그때 느낀 전류를 잊을 수가 없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 그 선명한 충격. 그걸 뭐라 말하면 좋을까. 쿠니미는 애매한 눈빛을 하고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오이카와는, 공을 크게 올리고서브를. 내리쳤다.

 

  그래. 굳이, 말하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랄까.

  쿠니미는 약간 질색인 기분이 되어선, 고개를 틀어 킨다이치를 바라봤다. 그리고, . 괜스레 그 넓은 어깨를 쳤다.

* 하이큐 글전력 60분. 주제는 편지.
* 지루함. 재미없음 주의
* 전력이기에 조각글입니다. 짧아요!






[오이카게] 편지는 싫어하지만.




  수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항상 살아왔다.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편했다. 머리로 전달할 말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저 팔을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말이란 하나의 숙제와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말로 전달한다는 것에 대해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고자 입을 열어도 나오는 건 잉어와 같은 뻐끔거림 뿐이었다. 비단 말 뿐만이 아니었다.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 문자메세지부터 시작해서- 메일, 낙서, 노트정리 등등 하기까지. 모든 것에서 카게야마는 '말'에 서툴렀다.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그건 그에게 숙제였다. 정말 그러했다.

  그것은 편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고등학교 1학년의 2월,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졸업하는 선배들에게 다같이 편지를 쓰고자 합의하고, 카게야마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로 문구점에 들렀다. 예쁜, 알록달록한 편지지를 고르는 여자아이들이 고른 걸 곁눈질로 바라봤다. 다양했다. 칸이 작은 것에서부터 아예 칸이 없는 것까지. 꾸밈이 없는 것에서 편지지라고 하기 힘들정도로 화려한 것까지. 카게야마는 그저 눈가를 찌푸리고 편지지들 앞에서 망부석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몰랐다. 카게야마에게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편지라는 숙제는 더 어려운 고난일지도 몰랐다. 이렇듯 편지지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힘들다면-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결국 연한 아이보리색의 편지지를 들어올렸다. A4 반쪽 크기의, 20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아무런 배경없이 그저 휑하니 줄만 그어진 것이, 카게야마답다고 하면 그렇기도 했다. 언제나 카게야마는 진심으로 부딪치는 남자였다. 백마디 말을 포기한 대신 그는 솔직하게 행동했다. 그렇기에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의 진심이 흐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서투른 그의 말이, 언어가 그 안에서 존재감 없이 부웅 떠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카게야마 토비오는 편지를 싫어했다.




* * *



  허나 그 바로 3개월 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그 문구점으로 향했다. 그것도 편지지가 모여있는 앞으로. 그는 3개월 전과 같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였고, 여전히 여자아이들이 고르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눈가가 깊게 패인것은 3개월 전보다는 더 심해져있었다. 눈동자가 더 날카로웠다. 카게야마는 집중하고 있었다. 전에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편지지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그 색 하나하나를 보면서. 줄 간격까지 신경쓰면서.

  며칠 전 오이카와에게서 편지가 왔다. 정확히 3일 전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미 추천을 받았던 여러 대학 중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오이카와가 은퇴 후 시작한 관계이기 때문에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오이카와와 더욱 함께 있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싶고, 그 냄새를 맡으며 품에 안기고 싶었다. 더더욱, 그래서. 오이카와가 도쿄의 대학으로 가는 것이 기쁘고, 축하하고 싶은 마음인 동시에 슬펐다. 슬프다는 표현이 옳은 걸까. 카게야마는 알지 못했다.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카게야마는 자신의 감정표현에 서툴렀다. 그러니 그저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조금 더 내 옆에 있어주세요. 가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편지, 보낼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그렇게 말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대학 입학을 위해 도쿄로 가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3월 후반의 날은 아직 추웠고, 바람은 허리를 가르고 매섭게 지나갔다. 그래서 오이카와의 귀는 붉게 올라 있었다. 눈앞의 붉은 귀와, 귓가에서 들려오는 슬며시 떨리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묵지근한,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하나씩 배아래에 쌓였다. 그냥 옆에 있어주면 되는데. 편지가 아닌, 그냥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의 깨끗한 글씨가 아닌, 그냥 오이카와씨가.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안개와 같이 뿌옇게 흐려지기만 하는 시야가 아파서. 오이카와의 체온이 그저 그저 그리워질 것만 같아서. 왜 편지일까. 왜 편지여야만 했을까. 항상 새로운 유행은 반드시 체험해보고야 마는 오이카와가. 핸드폰을 손에 끼고 절대 놓지 않는 오이카와가. 왜 굳이, 편지를 골랐을까.



* * *



  카게야마는 결국 편지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벌써 연한 장밋빛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날이 지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이마에는 조그만 땀방울이 한두어개 맺혀 있었다. 힘겨웠다, 편지지와의 싸움이. 하지만 이 승리의 전리품을 들고 집으로 가면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카게야마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약간 상기된 눈가가 생그랗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꼬옥 감겼다가, 다시 깜빡거렸다. 들고있던 배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손에는 편지지를 들어올렸다. 굳이 그 조그만 편지지를 양손으로 들고.


  편지에서 오이카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편지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보내 온 작은 엽서를 떠올렸다. 도쿄의 야경을 찍은 사진 뒷면에는 오이카와의 깨끗한 글씨가 놓여있었다. 선이 없는데도 정갈하게 줄을 맞춰서. 글씨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오이카와에게 들었던 도쿄의 자취집 주소, 그리고 카게야마의 집주소. 풀자국도 없이 붙여진 우표 아래의 오이카와의 글씨가 무언가 생소했다. 항상 라인으로만 대화했으니까, 글씨를 보는 것은 중학교 이래 처음일지도 몰랐다. 글씨를 잘 쓰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의 깨끗한 글씨로 쓰여진 '카게야마 토비오 귀하' 가 못내 생소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두근두근하면서도, 무언가 오이카와가 다른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어쩌면 오이카와는 자신이 못 본 며칠 사이에 조금씩 변한 걸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조금의 두려움을 느끼며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깨끗한 오이카와의 글씨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편지의 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이 조금 움찔거렸다.


  '너와 보고싶은 것 첫번째'






  카게야마는 손에 든 편지지를 꽉 쥐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완연히 석양빛으로 물든 하늘이 거리를 부드럽게 비췄다. 동네 빵집은 문을 열어 방금 갓 구운 빵냄새를 풍겼다. 슈퍼 앞 할머니는 여전히 이 시간엔 졸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을 지나며 카게야마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어느새 반 달리다시피 하며 그 풍경들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보고싶다. 오이카와가. 보고싶다. 오이카와가 보는 풍경이. 이제는 오이카와에게 익숙해졌을 그 풍경이, 나도 보고싶다.




  편지는 귀찮다. 편지는 골치아프다.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하나의 전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펜을 든다. 예쁘지 않은 글씨이지만, 길게 쓰지도 못하지만.
  오이카와가 좋아한 민트색의 편지지에 글을 적는다. 펜을 굴린다.


  '오이카와씨를 생각하며 산 편지지 첫번째.'


  그건 분명 편지로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 오이카게인데 오이카게다운 내용이 안 나옵니다.
* 카게야마 어머니가 주인공.
* 재미없음, 지루함 주의
(제 기준으로 긴 글. 길어요!!)
 







[오이카게] 우리 아이의 애인은 배구부 주장








 아오바죠사이 고교. 이 좁은 미야기현에서, 그 고등학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다. 시라토리자와와 더불어 배구 강호로 유명한 그 학교는 언제나 여름만 되면 미야기현의 배구 팬들을 불태웠다. 그저 고교 배구 아냐? 라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한번 그 경기를 보면, 그 고교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지역 TV에도 나온, 아오바죠사이 고교 배구부 주장 오이카와씨네 아들 오이카와 토오루는 더더욱.

 수려한 용모에 184를 넘는 키, 갖춰진 몸에 배구부 주장이라는 리더십까지. 덕분에 바로 옆에서 꺄악꺄악하는 소녀들처럼 나설 수는 없지만, 뒤편에서 그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우는 것은 이제 한 아이의 엄마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미야기현에 이사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나도, ‘오이카와씨 댁네 아들’에 대한 얘기는 벌써 많이 들었었다. 듣자하니 어릴 적부터 유명인사였다고. 꽤나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것 같았다. 오이카와씨네 가족은 그다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도 오이카와 토오루를 제외한 그 가족에 대해선 의문이 가득이지만.

 어찌됐든 이제 갓 중학교 입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이사온 미야기현 안에서- 주변 어머니들과 나눈 대화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는 일종의 지역 아이돌이란 느낌을 받을 정도로. 헤에, 그런 아이도 있구나. 정도의 느낌뿐이었지만 확실히 그 이름은 뇌리에 새겨졌다.

 

 

 그래서 겨울, 하나뿐인 아들의 중학교 1학년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좋아하는 사람?”

  “응.”
 

 저녁밥을 먹으며, 약간 볼을 홍조로 물들이고- 평소의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아들에게서 보기 힘든 그 모습을 봤을 때. 드디어 이 아이에게도!! 라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게 대견함이 마음속에 퍼졌다.

 하나뿐인 아들, 카게야마 토비오는 엄마인 내 입으로 말하기도 참 뭐하지만. 감정 표현이 서툴고 그저 배구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얼굴은 꽤 귀엽고, 나중에 크면 여자애들도 여럿 울릴 것 같은데. 초등학교 2학년, 처음으로 데려갔던 어린이 배구 교실에서 배구를 접한 이후로 아들의 마음에는 오직 배구 한 길 뿐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흥분하며 ‘이 아이는 천재에요. 꼭 배구를 시키세요, 어머님.’ 이라고 말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괜찮을까? 정말로, 괜찮을까? 천재라는 이유로 배구를 시키는 게 과연 이 아이의 행복이 될까? 스포츠 세계는 쉽지 않다. 어릴 적 신동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던 운동 선수 얘기를 TV에서 볼 때마다 그런 걱정은 커갔다. 하지만 배구공을 만질 때마다 토비오의 무뚝뚝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누가 봐도 즐거운 듯이 배구를 하는 토비오에게서 배구를 뺏을 수는 없었다. 이미 이루어진 운명적인(?) 만남에는 엄마인 나조차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그 이후로, 아들의 세계는 배구 일색이다.

 


 그랬던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엄마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아이가 잘 크고 있구나. 그런 마음이 드는 동시에 여러 가지 조급한 마음도 들었다. 첫사랑은 흔히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조그만, 배구밖에 모르는 아이가 받을 아픔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나도 참 과보호인 엄마구나. 조심, 또 조심.

 그래서 일부러 관심있게, 그러나 너무 과도한 관심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내뱉었다.

 


  “그래? 잘됐네. 어떤 사람이야?”

  “우리 부 주장. 배구, 엄청 능숙한 사람이야.”

  “...배구부 주장?”

  “응. 오늘, 고백했더니 그럼 사귀자고.”

  “....”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그 하얗던 얼굴이 스르륵 붉어지는 건 무엇보다 귀엽지만. 토비오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배구부, 주장? 배구가 엄청 능숙한 사람? 분명 배구는- 으음, 남녀 별개이다. 그리고 토비오가 다니는 중학교는..



  “음... 여자 배구부 주장?”

  “...? 아니? 여자 배구부는 따로 있는데?”

  “...?”

 

 아들과의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토비오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여자 배구부가 따로 있다면.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배구부 주장이고, 배구가 능숙하고- 그런데 여자 배구부는 아니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머릿 속에 지역 아이돌의 얼굴이 훅 지나갔다. 분명, 그 아이도 키타이치 중학교였다.

 

 

  “...‘오이카와 토오루’?”

  “..! 어떻게 알아?”

 


 아들의 얼굴이 생전 처음보는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기뻐 보인다. 그 눈동자가 반짝반짝 거리며 검은 눈동자 안에 별들이 가득 빛났다. 이미 발그레 한 볼이, 눈가까지 붉게 물들이며 더욱 붉어졌다.

  놀랐다. 까만 눈동자 안에, 잔뜩 기대와 당혹을 담고서. 아들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말주변이 없고, 감정표현은 서툰, 그래도 제대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낙담할 줄 아는.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좋아하면. 얼마나 기뻤으면-
  오이카와씨 댁네 아들은, 어떻게 아들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걸까.

   "근데...음-... 사귄다고?"
   "응. '우리 오늘부터 연인이야, 토비오쨩' 이라고 했어."
   "...."


  머리가 어질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토비오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저 기쁜 마음에 나에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처음으로 좋아한 상대와, 처음으로 사귀게 되고- 그게 남자인 것과는 상관없이. 좋아하는 '오이카와 선배'와 사귀게 되어서, 그게 기쁘고 기뻐서.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눈앞에서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이고 미소짓는 아들을 보며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그 선배는 남자잖아? 토비오도 남자고- 남자랑 남자가 사귄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건 쉬웠다. 아니,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어린 마음의 미숙한 사랑을 착각으로 치부하고, 그 마음을 짓뭉개서- '정상'을 강요하는 것이 옳았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과연 이 아이의 행복일까? 처음 배구를 시킬 때 들었던 고민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그 때도 이런 고민을 했었다. 어쩌면, 토비오. 배구를 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평범한 남자애, 땀냄새가 나는 동아리 선배가 아닌- 꽃향기가 나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애로 너를 키우는게 옳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평소에는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하는 그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미소짓는게 보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행복하다면.
  자식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 어떤 길을 택하든 난 네 편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게 부모 아닐까. 그 어떤 감정이라도, 토비오가 행복하다면.

 난 받아들여줄 수 있으니까.


   "응.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다니, 좋겠네. 토비오."
   "....응."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너를 보며 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와, 오늘 저녁도 먹고 갈거니?"
   "네. 매번 감사합니다."
   "토오루는 맛있게 먹어주니까 좋아. 토비오는 매번 물어봐야 대답해주니까. 정말, 내가 생각해도 무뚝뚝한 아들이야."

  토비오는 또 입을 삐죽 내밀며 미간을 좁혔다. 정말이지, 저 버릇 고쳤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저것도 저 아이 나름대로의 감정표현이라고 생각하면, 토비오도 의외로 표정이 다양하다는 걸 알게된다.

  토비오는 오이카와와의 관계를 나에게 말한 것에 대해서 조금 쓴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 오이카와 선배랑 사귀는 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건, 나쁜 일이야?"

  라고 물어왔으니까. 그에 대해서는, 음. 조금 고민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다른 사람한텐 비밀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 사귄다는 건 두 사람만의 약속이니까."
   "...하지만 엄마한텐.."

  이미 말했는데. 끝까지 말하지 못 한 토비오의 입술이 삐죽 튀어 나왔다. 아직 말랑말랑한 얼굴근육을 구기며, 미간을 좁힌 토비오를 보며.
  이 아이가, 그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순간적인 기쁨으로 나에게 말해버린 걸, 후회할 정도로.
  그정도로 소중히 여길 사람이 생겼다는 게 기쁜 동시에, 벌써 엄마에게 비밀이 생길 나이구나. 그런 마음도 들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심장 한쪽이 욱신거렸다.


   "그럼, 엄마가 비밀 알아버린 사과로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다음에 오이카와 선배도 데리고 와."
   "...괜찮을까?"
   "응. 엄마가 꼭 왔음 좋겠다고 했다고, 오이카와 선배한테 말하면 올거야."
   "....응."

  자신도 옳다고 생각하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은 토비오의 좋은 습관이었다. 입술을 내밀거나, 미간을 좁히거나, 가끔 혀를 차거나- 고쳤으면 하는 습관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솔직한 아이로 자란 것에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합니다."
 
  동네 애엄마 모임에서 항상 빠짐없는 주제였던, 그리고 토비오에게 대단하다고 전해 들었던 바로 그 오이카와씨 댁네 아들은.
분명 수려한 외모에 각잡힌 몸, 그리고 어린아이라고 보기 힘든 갖춰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 말할 때 약간 떨리는 손이, 아- 이 애도 그냥 중학교 남자애구나.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토비오의 엄마인 나를 보며 무서워하고 있구나. 그 관계가 깨어질까봐.
  그렇게 생각하니, 참 이상했다. 그때까지 아무리 떨쳐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던,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져 가라앉아있던 걱정들이 모두. 가루가 되어 사르륵 모래와 같이 바람에 나부껴 사라졌다.

  이 아이도 제대로 토비오를 좋아하고 있구나. 이 아이들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만큼 어리숙한게 아니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토비오를 위해 한 선택이 잘못된게 아니야, 라고 토오루의 떨리는 손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오렴. 저녁, 카레인데 괜찮니?"

  뜨거워진 눈가를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말투를 애써 밝은 목소리로 가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토오루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래도 그 호박빛의 예쁜 눈동자로 똑바로 나를 바라보면서.

   "네. 카레, 좋아해요."


  그 뒤로는 토오루도 가끔씩 놀러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들어올 때마다 떨리던 손이, 어느새 떨림이 멈추고 자연스럽게 토비오의 손을 맞잡고 들어오기까지. 천천히, 그래도 확실히 토오루에게 신뢰를 주었다는 느낌이 들어 그 무엇보다도 기뻤다.

  받아들여줬구나, 나를.
  너희가 그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토비오가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수긍할 수 있는 나를.




  그 뒤로 중학교 기간을 거치며 토비오는 여러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은 것 같았다. 나름대로 상처도 받고, 또 슬프기도 하고, 가슴아픈 일도 있었으리라.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똑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편이야, 토비오.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비난하고, 네 적이 된다고 해도.
  나는, 나 만큼은.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아이는 커간다. 부모 마음을 모르던 아이는 어느새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이제는 자신과 자신의 연인이 어떻게 보일지도 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세상에서 말하는 '정상이 아닌' 관계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그걸 중학교 1학년 때 뭣도 모르고 나에게 말해버린 자신이 바보같다는 것도.
  그래도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도 그렇게, 너에게 카레를 만들어주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오늘 토오루 오는 날이지? 저녁, 카레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 너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그래도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 -응. 카레, 좋아."



  그 얼굴이 평소와 똑같이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 눈가가 슬며시 붉어진 걸 이제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입가가 평소보다 조금 더 느슨해진 것도.


  그러면 나는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미소짓는다.
  오늘도 행복하구나, 토비오.
  오늘도 너는, 내 하나뿐인 자랑스런 아들로 잘 크고 있구나.





-
카게야마에 대한 모성애가 마구 솟구쳐서 쓴 글입니다. 그냥
사랑해. 항상 행복하면 좋겠어. 이 말을 해주고 싶다고 떠올리며 썼습니다.
오이카게라고 하기 참 부끄러운 글이네요....ㅠㅠ


[오이카게] 악몽 (R-15)
* 직접적 장면은 없지만 수위적 묘사 있습니다. 아주 약간.
* 오이카와가 조금 너무할지도.







   "오... 오이카와 선배... 무서... 워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흔들거리며, 두려운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했다. 아직 제대로 복근이 자리잡지 않은 카게야마의 배를 매만지며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웃었다. 살짝 눈망울이 맺힌 그 눈끝을 슬며시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벌써 몇번이고 했잖아? 여기도, 몇번이고 만졌고."
   "으흣...!"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동그랗게 솟아오른 유두를 가볍게 튕기자, 카게야마가 눈을 꼭 감으며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언젠가 봤던 AV의 여자보다 더 색이 엷게 잡힌 카게야마의 유두를 괴롭히는 것을, 오이카와는 그 무엇보다도 맘에 들어했다. 이제는 살살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카게야마의 작은 돌기는 쉽게 달아올랐다. 벌써 발그레해진 볼과 마찬가지로, 그 붉어진 작은 돌기에 입술을 갖다대면 카게야마가 순간 숨을 들이마시는게 느껴졌다. 그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서, 오이카와는 입 안의 돌기에 촉촉한 혀를 돌렸다.

  두 학년 아래인 후배와, 이런 일을 하는 건 얼마나 되었을까.





  카게야마를 때릴 뻔할 충동을 이와이즈미가 막아준 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차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이전까진 다양한 감정과 증오, 미움이 섞여있는 상태에서 왜곡되어 보였던 카게야마를 아주 순수하게. 그저 한 명의 카게야마 토비오로서 바라봤다. 그 타는 듯이 뜨거운 눈동자, 그 동그란 머리, 자신을 잡아먹을듯이 항상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느끼고, 오이카와는 알 수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저 당돌한 1학년 꼬마는.
  나, 오이카와 토오루를 좋아하고 있다.


  그렇게 깨닫고 나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일종의 흥분을 느꼈다. 저 타는 듯한 눈동자는 오이카와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애정 또한 담고 있었다.
  애초에 카게야마의 인생은 배구이니, 그에게 배구를 빼고 사람에 대해서만 논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배구에 반한 거라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반했다는 뜻이 된다. 등을 훑듯이, 잡아먹을듯이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한 몸에 안기는 그 작은 몸은. 배구공같이 작은 머리에, 그를 덮는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은. 자신에 대한 연정으로 괴로워 몸부림 칠 때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 조그만 후배에게- 오이카와는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작고, 붉은 입술에 마치 잡아먹을 듯한 키스를.






   "으...으응..!"

  동아리 연습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체육관 안에서, 그 조용하고 적막한 가운데서 오직 오이카와의 입술을 받아들이는 카게야마의 신음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입술을 맞닿았을 때 커진 동그란 눈동자 안에, 자신의 호박빛 눈동자만이 가득했을 때. 오이카와는 코로 숨을 뱉으며 후, 웃었다.
  혀를 타고 카게야마의 입안으로 바로 전해진 오이카와의 한숨에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떨렸다. 자꾸 도망가는 카게야마의 혀를 기어코 잡아서 끌어내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마치 생크림같이 부드러운 입 안의 점막을 혀로 간질거리자 눈 앞의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카게야마의 타는 듯하던 눈동자가, 물에 젖어, 색욕을 띠고, 맞닿은 입술 사이로 말이 되지 못한 한숨이 새어나올 때.

  오이카와는 아랫배 근처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아..하..아.."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가늘게 이어진 투명한 실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카게야마는 거칠게 숨을 골랐다. 까만 눈동자는 긴 속눈썹에 가려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토비오쨩, 나- 좋아하고 있지?"
   "...에...?"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열에 들뜬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오이카와는 혀로 입술을 가볍게 핥은 뒤, 다시 키스할 듯이 카게야마에게 몸을 밀착했다.
  카게야마가 '아..' 하며 고개를 살짝 틀어 내렸다. 그 몸을 비틀어 뒤로 가려 하지만 벽에 가로막혀 오가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좋아하고 있잖아. 그치? 토비오쨩."
   "저...저기, 전 오이카와 선배의 배구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그치만 좋아한다던가, 그런건 잘 모르겠어서-"


  카게야마의 말에 오이카와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했는데, 무의식인건가. 그 타는 듯한 눈동자도, 나에 대한 갈망이 담긴 손 끝도. 이것도 저것도 전부, 무의식에서 나온 나에 대한 욕망인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타액이 묻어 채 마르지 않은 자신의 입술을 다시 핥았다. 어쩐지, 달콤한 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겹친 입술. 카게야마는 그 순간, 그때까지 오이카와를 밀어내던 손의 힘을 풀었다. 그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의 티셔츠를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걸 보고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이번엔 더 깊게. 카게야마의 혀를 얽어맸다.





  그 뒤로는 연습이 끝난 체육관 뒤 부실이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장소가 되곤 했다. 평소에도 남아서 연습하곤 했던 두 사람이기에 아무도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매번 상쾌한 미소로 남는 오이카와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입술을 깨물며 돌아가곤 했다.


   "왜 피하는 거야? 토비오쨩."
   "...."


  둘이서 부실에 있게 되면, 카게야마는 매번 오이카와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몸을 당기곤 했다. 오이카와는 그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지만, 더욱 거리를 벌리는 카게야마에게 미간을 좁히고. 결국 그 희고 가는 팔을 끌어 자신의 품에 가뒀다. 품 속에서 카게야마가 팔을 흔들며 바르작거렸지만 오이카와는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결국 그 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더니, 그 젖은 눈동자가 약간 떨리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그 눈동자.

  평소에는 곧고, 바르고, 자신을 그저 순수하게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자신에게 안기고, 키스를 하면. 촉촉하게 젖어 눈가에 약간의 물방울을 머금고. 떨리는 속눈썹 아래에서 오이카와에 대한 욕망에 휘둘리는 걸 볼 때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전류가 척추를 휘감아 도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 왜- 이런.."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거둬 다시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오이카와의 품안에서 카게야마의 하반신은 아주 조금이지만 열을 띠고 있었다.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일까, 카게야마는 다리를 슬쩍 오무락거리며 오이카와의 허벅지 사이에서 빠져나가고자 했다.


  왜, 라고?
  오이카와도 의문이었다. 자신은 어째서 카게야마를 범하는 걸까. 여자라면 곤란하지 않을 정도로 있었고, 욕망의 배출구는 굳이 카게야마가 아니어도 된다.
  그런데, 어째서? 오이카와에겐 일종의 장난에 불과한 이 행동에 왜 자신은 이리도 흥분하는 건가. 왜 카게야마의 미완성된 몸을 만지고, 그 몸에 자신의 각인을 새길 때마다- 이리도.

  오이카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생각을 중단했다. 그리고 후, 가볍게 웃으며 눈꼬리를 내렸다.
  생각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이건. 그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젖은 눈동자를 가렸다. 가린 자신의 손이, 카게야마의 작은 얼굴을 반정도 덮었다. 그 아래에서 영문을 모르는 입술이 조금 달싹거렸다.



  "이건 모두- 나쁜 꿈이야, 토비오쨩."



  그래. 이건 모두, 하룻 밤의 나쁜 꿈이다. 토비오에게도, 나에게도.



   하룻 밤의, 지독한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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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전.. 수위.. 못써요.. 못쓰겠어요...ㅎㅎ...

R-19 쓰시는 분들 정말 대단한거 같은... 으아아아아아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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