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꿈을 꿨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 서브를 내려쳤을 때 짓는 미소 같았다.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유추였다. 가을날의 연습이었던 걸까, 밖에서는 석양이 거미줄처럼 주욱주욱 붉은빛을 늘어뜨리며 꺼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체육관 바닥은 오이카와씨의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색이었다. 발밑을 바라보면 흰 운동화가 보였다.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줬던 운동화인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부원들은 모두 오이카와씨 주변을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몇몇 부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3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도 있었고, ‘저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있었던가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닥에는 배구공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내 발치에도 공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공을 들어 올렸다. 손도 발도 기억 속의 것보다 작았다. 지금의 난 중학생인 걸까. 꿈속인데도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자각몽이라고 하나, 이런 걸. 스가와라 선배가 했던 말이 잠깐 스쳐 갔다. 일주일에 한 번 꿈을 꿀까 말까 한 나에게 이렇게나 명확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의 감촉이 선명했다. 석양의 붉은 색에 사로잡힌 발도, 빛이 닿아 겉면이 반질거리는 공의 느낌도 모두 눈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오이카와씨가 나오는 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씨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아니, 내가 오이카와씨를 불러낸적이 여러 번 있었다. 꿈속의 오이카와씨는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익숙했다. 나를 보며 짓는 미소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미소와는 다른, 지겨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짓뭉갠 상대를 볼 때 짓는 미소였다.

 

카게야마랑은 얘기 안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부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내 이름을 꺼낸 부원이 누군지, 왜 하필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엄마가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 꿈이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이카와씨가 꿈에 나온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공을 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오이카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빛이 몸을 태울 듯이 감쌌다. 꿈인데도 뜨거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기본적으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씨는 자기 주변으로 모여든 부원들을 한번 훅 훑어본 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군데?”

 

눈을 떴다. 똑딱, 똑딱. 시계 소리만 귀 안에서 웅웅거렸다. 목 안이 비쩍 말라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간신히 움직이지 않는 목구멍을 움직여 건조한 공기를 삼켰더니 입안에 쓴맛이 가득했다.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문에서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들렸다. 때늦은 폭풍우가 장맛비를 때려 붓고 있었다. 이상하게 추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가 아직도 덜 말랐는지 귀에 붙어 열기를 뺏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렸던 부원들의 웃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꿈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꿈이냐고 물어봤자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만. 꿈이란 건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꿈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시계 소리가 똑딱이며 들려왔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혀 또독또독 소리를 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추운, 추운 밤이었다. 발끝에 쥐가 날 것처럼 찌릿 전기가 올랐다. 몸을 실컷 웅크린 채, 잠들고자 눈을 꼬옥 감았다.

 

 

-

 

 

대왕님이랑 같은 대학으로 한 거 아니었어?”

같은 대학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멍청아. 같은 지역일 뿐이라고.”

흐응. 왜 거기로 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편이, 붙을 기회가 더 높잖아.”

우와, 카게야마 너 진짜 대왕님 스토커 같다!”

시끄러워. 멍청아!”

히나타에게 큰소리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카게야마!’ 뒤에서 소리치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에서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잔상처럼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낙엽 투성이였다. 전날 내린 비에 온통 젖어서 떨어져서, 짓뭉개져 있었다. 바닥에는 젖어서 찢어진 전단지도 몇 개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쏟아질 듯이 거무죽죽했다. 검은 그라데이션이 구름 곳곳에 남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비가 또 내릴 테니 낙엽도, 전단지도 치우는 사람 없이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어차피 또다시 불어닥칠 태풍이라면 정리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낙엽과 전단지로 어지러운 길을 가만히 밟으면서 걸어갔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날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댔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뒷목을 움츠렸다. 고개를 숙이고 발만 움직이다보니, 다섯 발자국 거리를 남기고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상대에게도 부드럽게 말을 거는 법을 익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보며 어른은 성가신 거라고 생각했다. 눈가를 찌푸리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네, 토비오쨩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른은 귀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 몸속 성분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 몸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도 나이를 먹어 변한 걸까. 어쨌든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곤 내 안에 있는 그의 기억뿐이었다.

왜 오셨어요.”

우와, 후배의 시험결과가 걱정돼서 와본 선배한테 그게 할 소리야? 오늘이었지? 합격통지.”

…….”

히나타인건가. 합격 통지 날짜 따위 가르쳐준 적도 없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치는지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히나타밖에 없었다. 예부터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은 뛰어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째려보자 오이카와씨는 다시 빙긋이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미소였다. 차갑네~ 애인이 이렇게 직접 와줬는데도.

애인. 그 말에는 아직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정식으로 사귄 것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를 시작하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오이카와씨였다. 아니, 그 상대는 당신이거든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오이카와씨는 그럴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곤 했다. 애인, 인 건가. 느낌이 없었다. 오이카와씨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나에게서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말들을 듣고 싶어 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뿐이었다.

갈까.”

오이카와씨가 내 머리를 헤집었다. 평소 입는 사복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모습이 낙엽이랑 섞여서 그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사람은 전단지를 밟아도, 개똥을 밟아도 멋있으리라. 단순한 의미로 오이카와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격했어?”

세게 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어깨에서 털어내면서, 오이카와씨는 말했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오이카와씨의 옆모습에 익숙해졌다. 눈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한번 마주 본 뒤,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자 오이카와씨가 생글 웃었다. 잘됐네, 한마디를 더 하고.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시끄럽게 울렸다. 오이카와씨의 향수 냄새가 났다. 비 냄새에 섞여서 젖은 향수 냄새는 평소 맡는 것보다 눅눅했다. 오이카와씨는 이 향수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다. 프랑스어로는 아무.. 아무, 어쩌고라고. 그냥 그런가 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애초에 향수 같은 건 자세히 모른다. 오이카와씨가 생일에 한두 개 선물해줬지만 만나는 날 어떻게 뿌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얼굴에 있는 힘껏 뿌린 뒤 죽을뻔했던 경험을 말해줬더니 그냥 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선물한 거야?

다만 어감이, 그랬다. 토비오랑 만날 때면 이 향수만 뿌리거든. 오이카와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난 대답했다. 제목이 사랑이니까. 오이카와씨는 다시 말했다. 그런가요, 난 다시 대답했다. 오이카와씨는 그 뒤 한번 웃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래 봤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향수라는 정도뿐이었다.

배구 계속 할 거지?”

?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냥.”

오이카와씨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의 표정이었다. 입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오이카와씨에게 이에 대해 말했을 때, 오이카와씨는 차갑게 웃으면서 쓸데없는 관찰력이네, 라고 말했다.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나를 불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딱 기분좋을 정도의 단 향을 품고 있었다.

배구 말야. 내가 그만뒀다면 토비오는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했을까.”

뭐를요?”

토비오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오이카와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짓궂게 물었다. 보드라운 머리가 낙엽색을 닮아있었다. 물에 젖은 낙엽은 전단지랑 섞여서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오이카와씨의 손가락이 올라와서 가만히 앞이마에 닿았다. 여기로 하는 것?앞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손가락은 가늘었다. 아니면, 여기로? 손가락이 흐르듯이 내려와서 눈가를 두들겼다.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이카와씨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란 향수는, 아무 어쩌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로 사랑이란 머리나 눈동자로 하게 되거든. 공통점이 있으면 마음이 확하고 열리게 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 많이들 말하잖아? 사랑에 있어 최저한의 조건은 공통점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통점.”

조용히 그 말을 따라 말하면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공통점이 없으면 얘깃거리도 없다. 얘깃거리가 없으면 단순한 친구가 되기조차도 힘들다. 입을 열지 못하면 무언가를 나누는 것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으니까. 시선을 오이카와씨에게서 비껴 내려,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익숙하지 않았던 목소리는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입을 열지 못한 상대였다. 모두, 내가.

우리 전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잖아. 공통점이라곤, . 배구?”

배구밖에 없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랑은 배구라고.”

뭐라는 거에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이카와씨가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 그걸 즐기면서 가끔 뭐라는지 헷갈리는 말을 하는 게 이 사람이었다. 그런 장난은 내가 짜증을 내며 오이카와씨를 노려보면 한두 번 이어진 뒤 끝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는 다시 웃어 보였다. 구름의 이동처럼 느릿한 미소였다.

배구가 없으면 너랑 난 아무것도 없잖아.”

…….”

사랑이란 이름의 향수는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였을 것이다. 그 향수를 언젠가 버리는 날은 나를 버리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날은. 나와 오이카와씨에게 있어 배구가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서로의 배구가 아니라, 오이카와씨와 나의 배구가. 최저한도의 조건인 공통점이 사라지면 얘기조차 나누기 힘들어진다. 친구조차 될 수가 없다. 친구도 아니었던 우리가 그 끝날에 될 수 있는 관계라고는 타인외에는 없었다.

,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말만 하시네요.”

그런가. 가을이니까, 조금은 이런 말도 해야지 멋있어 보이잖아.”

짓궂게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씨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남자였다. 가을은 젖은 낙엽의 계절이었다. 그의 향수에서도 젖은 냄새가 났다. 내년이면 그가 다니는 대학의 근처 학교로 입학할 것이다. 오이카와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수를 다음에도 살까. 얼마간 남은 향수를 그냥 버리고 나면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톤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카게야마?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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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져버릴까.

 

 

 

 

 

 

 

 

 

바다라는 건 무섭잖아.”

왜요?”

가끔은 잡아먹힐 거 같거든.”

 

- 시원한 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0월 말의 모호한 날씨에 바다라니, 애초부터 이상했다. 추운 것이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약간 쌀쌀한,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날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이카와씨의 제안이었다.

바다에 갈까.’

그 말만 들어도 코끝에 소금 냄새가 스치는 느낌이었다. 혀끝에 퍽퍽하게 소금이 묻었다. 왜요? 반문해봤자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에 나와.’ 라고 통보식으로 말할 게 뻔한 사람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오이카와씨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좋아 혰지만, 예쁜 옷을 구경하거나 희귀한 소품들을 사 모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 간다고 한다면, 글쎄. 바다를 구경한다기보다 예쁜 색을 띠는 조개를 모으거나, 근처 음식점에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빙수를 사 먹거나. 그 정도의 소일거리만 하고 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끔 오이카와씨는 바다에 가자고 조르곤 했다.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파도나, 귀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갈매기 소리 등바닷가에 서 있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운동화 속 양말까지 다 젖을 정도로 물속에 잠긴 적이 있지만, 이렇다 할 물놀이를 한 적은 딱히 없었다. 어쩌다 가게 된 동네 풀장에선 그렇게도 장난을 쳤으면서, 바다에선 오이카와씨는 점잖은 어른이 되었다. 애초에 저를 제외하고 보면 장난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째서 저에게만 그리도 짓궂은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바다는 오이카와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특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언뜻 동그란 지평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평상시와 달리, 슬쩍 물빛을 띠었다. 바다에 가자. 그렇게 말할 때의 오이카와는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사람과도 같았다.

오전 10.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을 하고 나가려니, 작년의 바닷바람을 떠올리고 다시 겉옷을 바꿔 입었다. 그대로 신발을 신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비오, 잠깐만.”

.”

어머니가 목도리를 들고 서 있었다. 검은색의, 털실로 짠 목도리. 끝 매듭의 올이 서툴게 묶여있었다. 몸을 돌려 마주 보자 어머니가 빙긋 웃어 보였다. 가을이라고는 하나 아침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집안을 휘어잡는 날씨였다. 어머니 양 볼에 말갛게 홍조 빛이 돌았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은, 다음 주인데요.”

, 알고 있어. 어제저녁에 완성했거든. 얼른 주고 싶어서.”

말간 볼을 소소하게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내 목에 목도리를 둘렀다. 아직 새것의 섬유 냄새가 남아있는 털실이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털실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 따뜻한 온감이 퍼졌다.

. 잘 어울려.”

……, 감사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감사인사를 내뱉을 땐 입을 삐죽이게 된다. 어릴 적에 자주 지적받던 나쁜 버릇이었지만, 어머니는 이제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웃으며 대답해주곤 했다. 그 덕분일까. 한 박자 늦지만, 제대로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는 입이 되었다. 목도리에 파묻힌 탓에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일 축하해다시 말했다.

올해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네.”

올해12월인데요.”

바보. 생일부터가 내년인 거야.”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볼을 한번 쓰다듬었다. 차갑고 주름진 손끝이 부드럽게 볼을 왕복했다. 검은 눈동자 끝을 조금 물들이면서, 어머니는 다시 천천히 미소 지었다. 30. 나이의 앞자리에 3이 붙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저 카게야마 토비오일 뿐인데. 이걸 그 사람은 벌써 2년 전에 겪은 걸까. 그 사람 생일 때는 어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같이 보냈는데도, 그와는 벌써 몇 년이나. 몇 년이나앞자리 숫자가 1일 때를 넘어, 2일 때를 지나, 3일 때인 지금에 와서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거리에 있었고, 장난스럽게 키스를 하는가 하면 숨 막히게 뜨거운 스킨십을 할 때도 있었다. 30살이 훌쩍 넘은 그도 여전히 내겐 오이카와씨일 뿐인데. 나이가 들면 관계는 언젠가 변하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있는 감정도.

다녀올게요.”

목도리는 따뜻했다. 늦지 말고, 라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대답은 벌써 몇 년째 들어온 대답이었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볼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까슬까슬하던 손끝이 떠올라서,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늦잖아.”

오이카와씨야말로 집 앞이라고만 했지, 집 앞 카페라고는 말 안 했잖아요.”

어쨌든. 늦었으니까, 토비오가 커피 사.”

오이카와씨는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앞에 나와 보니 평소에 기다리던 장소에 오이카와가 없는 걸 알고서, 급히 연락했다가 이런저런 골목길을 찾아보느라 고생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애초에 애매하게 집 앞이 아닌 카페라고 했으면 헤맬 일도 없고, 늦을 일도 없었을 텐데. 오이카와가 마시던 커피는 거의 다 마신 뒤라 바닥이 보였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바깥과 달리 카페 안은 포근한 온기와 초콜릿 시럽 향기가 가득했다. 이른 시간의 카페는 손님이 별로 없는 터라 오이카와를 몰래 훔쳐보는 여성들도 없었다. 밝은 갈색빛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오이카와는 어딘가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조금 더 짧게 잘라 정돈된 머리는 카페의 브라운 조명에도 부드러운 홍차 빛을 띠었다. 오이카와는 제가 먹던 초콜릿 케이크의 마지막 한입을 내 입에 쑥 집어넣더니, ‘토비오쨩도 먹었으니까, 공범.’ 툭 내뱉었다. 입안에 퍼지는 촉촉한 단맛을 느끼면서 무슨 공범이요? 물었더니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였다.

초콜릿 케이크 살인사건.”

뭐라는 건지.

 

 

 

전철을 타고 1시간 반, 버스를 갈아타서 2시간. 도보로 걸어서 20분을 지나고 나면, 길 건너로 넓은 모래사장이 보였다. 걸어오는 동안 잔뜩 식은 몸을 바닷바람이 동그랗게 휘감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손에는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입속에서는 아직도 초콜릿 향기가 남아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짠맛, 혀끝에 맺힌 단맛. 바람이 센 탓에 눈동자 끝에 망울망울 달린 눈물까지. 최악이었다.

무슨 생각해?”

모래사장 한가운데까지 걸어오고 난 뒤, 오이카와씨는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 차가운 귀를 매만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순간 스치고 이내 오이카와 손에 있는 온기가 귓바퀴를 통해 이동했다. 오이카와의 손에도 남아있던 습기가 귓불에 닿아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심장이 펌프질했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몸을 덮쳐 손끝에 찌릿 전기가 올랐다. 마침 파도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요.”

맞춰 볼까? 오이카와씨 생각했지?”

……

저런 말은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몇 년 동안 배운-라기보다 이와이즈미씨에게 배운-방법이었다. 입을 삐죽 내민 채 연신 파도만 바라보고 있자, 오이카와씨는 문지르던 귀를 세게 꼬집었다.

아얏,”

건방져.”

이내 귀에서 손을 뗀 오이카와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이 흐렸다. 몇 가지의 물감을 섞은 듯한 회색 하늘에는 태양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파도, 젖어드는 모래가루, 가끔 풍기는 참기 힘든 소금 냄새. 몇 번이고 오이카와와 왔던 바다였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얀 거품이 일다가 가라앉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이질감은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30번째 생일 축하해.”

생일, 다음 주인데요.”

알아.”

오이카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맑은 홍차 빛 눈동자는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흰 피부가 바닷바람을 맞아 더욱 하얗게 빛났다.

“32년이랑, 30. 겨우 2년이네.”

겨우 2. 겨우 2년인데도, 그는 항상 지나치게 컸다. 그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2년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오이카와 씨만큼 자라면, 오이카와는 이미 그만큼 앞서 걷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이카와의 등은 영원히 내 앞에 존재했다. 그런 2년을 앞서 보내고 있는 오이카와는 33살이 되는 내년 1, 배구선수로서 은퇴한다. 33. 운동선수로서 많다고 하면 많은 나이였다. 선수 생명은 길어봤자 30대 후반까지니까. ‘나이라는 숫자 앞에 3이 붙은 시점에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도 30살이 된 때부터 생각해온 것이리라. 그는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국가 대표 세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생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허리 문제로 받고 있던 물리치료는 은퇴 후에도 받는 듯했다. 이렇다 하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높은 강도로 오래 지속한 운동 때문인 것을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은퇴하는 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보여도, 그쯤은.

 

바다는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집어삼킬 거 같잖아. 통째로.”

오이카와는 쓴 초콜릿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바람이 한차례 불어 모래사장이 흔들거렸다. 눈앞에 흩날리는 모래가루가 싫어서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중 제일 큰 파도가 밀어닥쳐 와, 운동화 코끝까지 젖었다.

젖어봤자 운동화 코끝인데요.”

그렇게 방심하다간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힌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열기를 품은 손 두 개가 만나 얽히고, 매만지다가, 이내 마주 잡았다. 기분 좋은 온기가 주머니 속에 가득했다. 딱 손 두 개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그 주머니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하게 뭉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싶었다. 세게, 조금 힘껏. 그 대신 그의 단단한 손을 꽉 붙잡았다.

토비오쨩. 몇 년까지 있을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이고 같이 있었는걸요.”

내일이면 헤어지게 될지도? 갑자기 오이카와씨가 사라지거나, 토비오쨩이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애초부터 약속 없는 관계였으니까.”

약속은커녕, 그 어느 것으로도 묶이지 않은 관계였다. 그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잡고 있는 이 손도, 어느 한 쪽이 풀어버리면 다시 붙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나도. ‘그럼, 안녕.’ 중학교 졸업식 날 들었던 그 말이 다시 한 번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걸로 아예 끝일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벚꽃 잎 피어있는 봄날은 아닐지라도, 안녕이란 말은 머릿속에 그 장면을 자동 재생했다. 그곳이 푸른 바다가 피어있는 바닷가라 할지라도, 안녕은 그대로 안녕이었다.

이대로 끝날지도 모르고, 어쩌면지금까지처럼 하루하루 계속될지도 모르죠.”

있지, 토비오쨩. 같이 바다에 빠져버릴까.”

싫어요. 춥잖아요.”

거절의 이유가 그거야?”

올해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어머니가 그랬는걸요.”

……. 그러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토비오쨩은 착한 어린이니까.”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찬바람 사이에서 미소가 슬쩍 흐려졌다가,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르게 굽은 호물선이 작은 얼굴에 피었다. 립밤을 열심히 바르는 오이카와의 입술은 겨울에도 얇은 주름이 예쁘게 남아있었다.

바다에 빠지면 잡아먹히는 거 아니었나요.”

잡아먹히는 게 나을지도, 라는 생각을 했거든.”

이대로 잡아먹히면너도, 나도. 전부 바다 탓으로 하면 되잖아. 바다, ..에서. 토비오쨩이랑

오이카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향한 시선 끝에는 젖은 모래가 어느샌가 말라 있었다. 사이로 빼꼼, 작은 조개가 묻혀있었다. 오이카와가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이젠 거의 아플 정도의 악력이 심장까지 조이는 느낌이었다. 바다 안에서, 오이카와씨랑. 이것도 저것도 모두 바다 탓으로 하고 빠져버리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퇴도, 나이도 없는 바닷속에서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다른 세상인 것처럼 산다면. 시간이 지나 점점 흐려질 것들을 걱정하지 않은 채바뀌지 않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오이카와씨의 숨소리, 눈동자, 흰 피부, 목소리 같은. 생각만 해도 목 끝까지 뜨거워지는 오이카와씨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2년뿐인걸요. 저도 금세 32살이 될 거에요.”

그럼 난 34살이잖아!”

그땐 저도 금세 34살이 되니까요.”

36.”

“2년씩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2년뿐인걸요.”

“2

오이카와는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2년이라,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눈을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의 경계는 하늘과 맞닿아 뿌옇게 흔들거렸다. 저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는 항상 이질감을 주었다. 이 바다에 빠진다면, 말 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잡아먹히고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세찬 바람 소리만 가끔 이명처럼 들렸다. 추웠다. 지독하게 추웠다. 오이카와와 연결된 손을 제외한, 전신이. 바다는 춥잖아요, 우리 바다는 피하는 거로 해요. 가끔 찾아와서 몰려드는 파도를 보고, 예쁜 조개를 찾아서 줍고, 여름에는 얼얼한 빙수를 먹고. 그렇게 보내다 보면 2년은 금방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약속 없이 그저 질질 끌고 있는 이 관계도 어느 정도는 약속이란 게 생길지도 몰랐다. 굳이 말로 하는 게 아닌, 지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놓지 않고 있는 손처럼. 그때가 오면 바다엔 더는 오기도 싫어질지도 몰라요. ‘바다에 빠지자고? 싫어, 춥잖아라고 오이카와씨가 먼저 말할지도 몰라요. 그때쯤엔그때쯤엔, 말로 하는 약속을 해요. 그땐 저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이카와씨. 저랑 사귈래요?”

















Tell me, Please don’t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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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eyama side

 

 

키스란 건 뭘까. 언제 하는 걸까. kiss. 케이아이에스에스. 사전을 뒤져보면, ‘키스, 입맞춤, 뽀뽀라는데. 아니, 물론 맞는 말이지만. 카게야마는 묻었던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구겨진 인상은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교실 내에 가득 차오른 질척한 습기가 머리카락에 들러붙었다. 며칠 전부터 울기 시작한 매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을 젖히며 울어댔다. 매미가 한번 울 때마다 뒷목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미지근한 땀이 귀 뒤로 한줄기 흐르는 걸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책상의 네모난 공간 안에는 답답한 열기와 습기가 그득했다. 무거웠던 눈꺼풀을 내리면, 다시금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뭘까. , 어째서. 오이카와씨는 나에게 키스한 걸까. 오이카와는 그 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도 찾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찾아왔기에 성립된 관계였다. 나를 놀리고자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충분히 놀려준 이상 오이카와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렇다면 찾아올 일도, 필요도 없겠지. 그래서였다. 오이카와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찾아가지 않는 건. 엎드린 카게야마의 뒤통수에 직사광선이 내리 쬈다. 머릿속이 다시 천천히 익어갔다. 몽롱한 의식이 카게야마를 뒤덮고, 그 날의 감촉이 떠올랐다. 조금 촉촉했던 오이카와의 입술, 땀이 송골 맺힌 보드라운 코끝이 맞닿은 느낌. 오이카와의 입술이 떨어진 뒤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매미 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는 것 외에는.

뭐였을까. 카게야마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뭐였을까, 오이카와씨의 수수께끼는. 정답이 무엇이었을까. 장난이었는걸, 뭘 그렇게 진지해? 왜 키스했냐고 물으면 오이카와는 그렇게 대답할 게 뻔했다. 분명 또 풋, 하고 일부러 보여주듯이 비웃으면서. 카게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마에 묻었던 땀방울이 팔에 질척하게 번졌다. 카게야마가 뱉은 숨이 그대로 책상에 닿아서, 이미 충분히 오른 열기를 더했다. 괜스레 머리에 열이 올랐다. 뜨거운 이마가 간질간질했다.

그만하자. 낮게 숨을 내뱉었다. 치아 끝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보드라운 귓바퀴의 감촉도, 입술에 남아있는 그 온기도, 모두 그만하자.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했고, 난 이번에도 당한 거고. 그냥 그걸로 끝인 거지. 오이카와씨랑은. 그냥 그걸로. 카게야마는 뜨끈해진 이마, 습기를 몰고 온 낮은 바람,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던 손이 이상하게 뜨거워져서, 열기를 잠재우고자 주먹을 쥐었다. 의식 안에서, 태양 빛이 부서지며 닿았던 홍차 빛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건방진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방진 토비오쨩. 성격 나쁜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는 항상 그런 식이죠.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남겨진 사람은 어찌 되든중학교 때도, 난 당신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데.

다 알고 있어요. 오이카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거. 날 놀리려는 거. 날 가지고 놀려는 거. 그런데도 당신에게 할 말이라고는 왜 저한테 키스했어요?’라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난 아직도 여전히,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걸까. 잠의 호수로 빠져드는 의식 너머에서, 매미 소리가 울렸다. 그 날 울었던 매미일까, 한 마리가 줄기차게 울어댔다. 뜨거웠던 오이카와의 손, 뜨거운 입술, 이상하게 두근거리던 가슴. 죽을 것만 같던 숨 막힘.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정도로.

 

 

 

 

 

 

 

 

Oikage side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날이 맑았다. 비 오기 전의 어찌할 바 없는 더위가 하늘 끝부터 땅 아래까지 차곡차곡 가득했다. 여름의 낮은 뭉게구름은 몇 조각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칼날같이 직선으로 내리꽂는 태양을 막을 것은 없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이 햇빛을 흠뻑 받아 선명한 노란빛으로 빛났다. 그래서였다, 카라스노 고교 앞엔 노란빛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날과 같이, 교문 앞에서 선연한 태양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카게야마가 저 멀리서 나오는 것을 보고 첫날과 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더니. 후배는 첫날과는 달리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오이카와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날이 길어진 탓에 그때와 달리 노을이 지려면 아직 한참이라는 듯 태양은 더 진하게 타오르며 더위를 흩뿌렸다.

안녕,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놀리듯이 웃으며 말하자, 카게야마는 모래 씹은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용건도 끝났는데 왜 오셨어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꿍얼꿍얼 내뱉더니 그대로 오이카와를 지나가려는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또 뜨거웠다.

나랑 데이트할래?”

인사를 건네듯 가볍게 물어본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뜬 뒤 내뱉었다.

데이트요?”

. 데이트.”

요모조모 따져보면 역시나 잘생긴 그 얼굴 안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그날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피어올랐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뭐하러요?”

싫어?”

됐어요. 어차피 선배 명령이겠죠.”

오이카와는 싱긋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손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꽉 잡았다. 오이카와의 손에 있는 굳은살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두 손이 강하게 밀착했다.

갈까.”

오이카와의 모습이 그날과는 달랐다. 이상하게 깔끔한 목소리, 마치 옆에서 꺅꺅거리는 여자애들에게나 보여줄 것 같은 싱그러운 미소. 뭘까. 카게야마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래 봤자 카게야마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놀리려는 목적도 달성했고, 더는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을 텐데. 오이카와는 무얼 하려는 걸까.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카게야마와. 왜 키스했어요? 다시 혀까지 올라온 말을 카게야마는 꿀꺽 삼켰다. 쓴맛이 났다.

 

 

지독한 여름 때문이었을까, 카페에는 한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땀으로 젖은 몸을 순식간에 식혔다. 갑자기 몰려드는 한기에 카게야마는 몸을 조금 떨면서, 오이카와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쪽으로 홍차 빛 눈동자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해지자구?”

피식피식 웃으면서. 카게야마의 안에 첫날의 기억이 지나갔다. 오이카와와의 첫날. 변덕스러운 그가 찾아왔던 첫날과 같이, 그는 또다시 반복하려는 걸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카게야마는 무언가 결정한 듯 오이카와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솔직해지자구요. 오이카와씨가 원하는 대로 절 놀렸으니까, 이제 다 없던 일로 해요. 키스도, 손을 잡았던 것도, 데이트도.”

카게야마가 툭툭 토하듯이 내뱉었다. 이상하게 명치 깊숙한 곳이 욱신거렸다. 태양이 몸을 찌르던 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무언가가 콕콕 박혔다. 오이카와가 이끌었던 손, 입술의 감촉, 왠지 그게 다. 여름날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습기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도 사라지는 걸까. 아지랑이와 같이 사라지는 걸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시선을 비껴 내려가더니 마찬가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흰 피부가 전등 빛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오이카와는 흐리게 웃고 있었다. , 솔직해지자.

있잖아,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토비오의 손을 끌어, 그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채웠다. 깍지 낀 두 손이 선선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포근한 열기를 나눴다. 카게야마가 동그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마주 보자, 그 홍차 빛 눈동자가 카게야마의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순식간에 빛났다. 솔직해지자.

있지, 토비오쨩. 나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이요?”

엄청 두근거렸거든. 그때.”

그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굽히고, 얼굴을 틀어 밀착하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귓가에 닿은 입술에서 나온 그의 한숨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한기 도는 전신에 뜨거운 한숨이 퍼질 정도로 가까이. 카게야마의 몸이 움찔 떨리면서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오이카와가 깍지 낀 손을 당겨 제지했다. 귓속에 숨을 불어넣듯이, 숨소리만으로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눈앞에 있는 오이카와의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내가 났다.

토비오쨩이 깨물었을 때.”

이어진 통증에 카게야마는 앗, 낮게 내뱉었다. 급하게 손을 들어 귀를 가리고 뒤로 몸을 빼자, 오이카와도 좁혔던 거리를 되돌렸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씹은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 예쁜 치열이 저의 귓바퀴에 와 닿았다는 사실이 무의식중에 점점 확실해져서, 귀에서 시작한 통증이 전신으로 아찔하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또 놀리시려는 거에요? 짜증스럽게 내뱉으려던 입술을 카게야마는 다시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흰 피부가 희미한 열로 붉어져 있었다. 카페의 조명은 상아빛으로 흘러내리는데, 오이카와는 그 아래에서 더 붉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온이 올랐다. 36.7도로 이루어져 있는 체내의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이런 기분일까.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지금도, 두근거리거든. 엄청.”

오이카와는 마주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끌어 제 심장에 갖다 댔다. 일정한 박자로 조금의 쉼도 없이 뛰어오르는 펄떡임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제 손도 똑같이 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마저 떠올렸다. 오이카와의 다른 한 손이 카게야마의 왼쪽 가슴에 슬며시 닿았다. 오이카와의 큰 손 아래에서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두근대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게도.

토비오쨩도 두근대고 있네.”

오이카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이카와씨.”

토비오쨩도 거짓말, 했지?”

카게야마가 말라붙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울리면서, 그 행동 하나까지도 오이카와가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카게야마에게 기울였던 아까와 같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나 때문이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 사이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와 오이카와의 시선이 겹쳤다. 검고, 푸른 눈동자. 오이카와가 눈동자를 한번 깜빡일 동안, 카게야마는 그저 곧게 오이카와만을 바라봤다.

왜 키스하셨어요?”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은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카게야마는 기어코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뇨, 연이어 내뱉은 말은 지독히도 낮았다.

아뇨, 됐어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짧게 불렀다. 동시에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금세 다시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졌다. 카게야마의 크고 까만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가득했다. 더위를 잊은 몸은 오이카와로 가득 차서, 귓속에 그날 들었던 매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미, 한 마리만 그다지도 울어대던 그 날, 쏟아 내리던 햇살, 녹아서 한 덩어리의 습기가 된 것 같았던 마주 잡은 손.

, 좋아해?”

오이카와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잡고 있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심장에 닿아있던 서로의 손은 떨어져, 남은 건 차가운 테이블 위에서 둘만의 여름을 맞잡고 있는 손 두 개뿐이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꾹, 굳게 다물어졌다가 다시 열렸다. 한숨이 나올 새도 없이 다시 닫혔지만.

, 물어요. 그런 거. 알고 있잖아요.”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싫어요. 오이카와씨 같은 사람. 심술궂고, 맨날 장난만 치고, 놀리기나 하고. 갑자기 찾아와서 데이트니, 키스니, 그런 거. 그런 짓만 하는 오이카와씨는 싫어요.”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오이카와의 입술이 천천히 뜨거워져서, 그와 맞닿았던 카게야마의 입술도 이제는 달싹일 정도로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카게야마는 결국 눈을 감았다.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에요.”

. 나도.”

감긴 카게야마의 속눈썹에 오이카와는 살며시 키스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눈을 뜨고, 검고 푸른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약간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 장면에서 그런 표정을 짓나? 오이카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게야마의 미간을 꾹 눌렀다.

감동적인 장면인데 표정이 왜 그래?”

솔직한 오이카와씨뭔가 기분 나빠요.”

진짜 한 대 때려버릴까. 요 꼬맹이.

건방지다니까, 진짜.”

그래도 싫진 않아요. 솔직한 오이카와씨.”

대답할 새도 없이 카게야마의 입술이 오이카와를 덮쳤다. 오이카와가 했던 가벼운 키스보다도 더 깊게 입술을 얽어매는. 떨어질 줄 모르고 붙어있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눈을 마저 감았다.

역시 건방진 녀석이라니까.












Tell me, Please don’t tell

-중-

 

 

 

 

 

oikawa side

 

 

 

조각난 구름 몇 조각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부는 후끈한 열기는 전날보다도 더욱 심해져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에 답답한 공기가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몽롱한 머릿속에서 부옇게 전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길래 또 바보 같은 표정이냐.”

이와이즈미가 땀이 한두 방울 묻어있는 뺨에 대고 손부채 질을 하며 툭 내뱉었다. 한두 마리 울기 시작한 매미는 고요한 공간 안에 가끔씩 귀를 찌르는 이명을 던져넣었다.

으음, 그냥.”

무슨 일 있냐.”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보면서,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이라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어제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니, 오늘은 종일 이 상태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오이카와만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매미가 울기 시작했고, 햇빛은 더 강하게 지면을 태웠고, 날이 더욱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미안, 이와쨩. 나 먼저 갈게.”

또 어디 가서 사고 치려고?”

사고 치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확인해보는 것뿐이야.”

뭐를?”

이것저것.”

 

 

뭐하러 또 오신 거에요?”

누가 봐도 질색이란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쏘아붙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불만 섞인 목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토비오쨩. 있지, 나랑 데이트할래?”

데이트요?”

카게야마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위아래로 흘기는 느낌이 들어, 살며시 드러난 이마에 딱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데이트.

저 연습할건데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카게야마는 금세 툭 내뱉었다. 방금까지 한 건 연습 아니야? 카게야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투명한 땀방울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배구 바보. 그런 점은 중학교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배구밖에 모르는, 건방진 후배 녀석.

지금 선배 말을 무시하겠다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미소 짓는 오이카와를 보고, 카게야마가 인상을 더욱 구기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 뭐라 뭐라 꿍얼거리더니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내뱉었다.

어디 갈 건데요.”

데이트, 갈 거야?”

오이카와씨가 강제로 후배를 끌고 가는 걸 데이트라고 부르고 싶으시다면요.”

우와, 토비오쨩 건방지네~”

장난식으로 내뱉으면서 오이카와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와 동시에 비어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연습을 마치고 땀이 식어가던 카게야마의 손이 순식간에 열기로 물들었다. 거봐, 역시 좋아하는 거 맞지?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자, 카게야마의 얼굴이 순간이나마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순간적인 당황과 경계, 동시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슬며시 붉어진 얼굴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미간을 찌푸린다든가, 인상을 구긴다거나, 입술을 삐죽 내민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 보일 뿐인.

이상하게 묘한 두근거림에 금세 놀려주면서 놓으려고 했던 손을 놓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어정쩡하게 마주 잡은 채로 발을 움직였다. 손에 열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전날 갔던 카페,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길이 멀게 느껴졌다. 같은 곳을 돌고, 돌고, 또 도는 느낌.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발은 분명 움직이고 있고, 몸도 나아가고 있고, 태양도 기울고 있는데 왜일까. 카게야마와 이대로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길을 걸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시선을 돌려 살며시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조금 아래로 내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오이카와와 보폭을 맞춰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오이카와의 타는 목구멍에서도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용한, 두 사람의 간격 25센치 정도의 적막 안에서 매미 한 마리가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따라오면서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그렇게 울어댔다. 아지랑이가 저 끝에서 피어올랐다. 해가 더욱 뜨겁게 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람 한 점 없는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손은 놓을 수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랐던 목구멍이 더욱 비쩍 말라서, 약간의 통증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등을 타고 땀이 한줄기 흐르는 감각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등에 흐르는 간지러움에 오이카와는 손을 더욱 꽉 잡으면서, 카게야마를 다시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바닥을 향했던 그 눈길은 이제 곧게 뻗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 밤하늘 같은 눈동자.

토비오쨩.”

발을 멈추고, 오이카와가 낮게 불렀다.

?”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린 순간, 조금 놀란 표정으로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있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당황한 탓일까, 슬며시 벌어졌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틀고 마치 키스할 것 같은 모양새로 카게야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말을 내뱉지 못한 카게야마의 입술에서 뜨거운 한숨이 나왔다. 결국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눈꼬리를 물들이면서 눈을 꼭 감았다.

,”

오이카와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카게야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슬며시 뜨자, 오이카와는 푸하핫,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그러게 솔직해지라니까?”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웃어 보이며 놀리듯이 말하자, 카게야마의 노란 끼 도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면서 오이카와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서 강하게 끌어당겼다. , 어라? 무방비하게 웃고 있던 몸이 좀전과 같이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뒀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오이카와의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그 코끝이 귀 뒤의 연한 살을 간지럽혔다.

저라고 오이카와씨 못 놀릴 줄 아세요?”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더니, 이내 귓바퀴에 날카로운 통증이 훅 퍼졌다.

우왁?!”

오이카와가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징징 울리는 욱신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여름이어서 그런걸까, 더운 날씨 때문인 걸까. 오이카와의 흰 피부가 연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투명한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던 얼굴도 마찬가지여서, 붉어진 카게야마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오이카와 또한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

말이 이어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는데, 정작 나오는 건 공기 거품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인상 나쁜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보면서 아직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습기가 손과 손 사이에 그득했다. 언제 땀방울이 배어 나와서 흘러내릴지 모를 정도로, 손가락 사이사이에 몽글몽글 열이 맺혀있었다.

이상해. 이거, 뭔가 이상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토비오쨩이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토비오쨩이 먼저 나를 좋아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난 그저그저. 그런데도 왜 자꾸만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죽을 것만 같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와 이어진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서, 모두 녹아서 그대로 손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오이카와씨, 두근거리고 있죠?”

카게야마가 쌤통이다라는 건방진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요 녀석이?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그 벌려진 입 사이로 고른 치아 선열이 보이자, 카게야마가 깨문 귓바퀴가 다시 욱신거렸다. 그가 깨물었던 잇모양이 하나하나 느껴져서, 귀가 마치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아니거든?”

전 두근거려요.”

?”

오이카와씨 때문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건방지네.”

오이카와씨도요.”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지 카게야마는 미간에 힘을 주고 오이카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따라오던 매미는 울지 않고 있었다. 방금까지 강하게 울던 소리가 그치고, 조용한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었다. 잡고 있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어느새 서로 간에 깍지를 끼고, 조금의 틈도 없이 겹쳐진 손안에는 더운 공기가 가득했다. 열기를 담은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렀다. 입술을 슬며시 열고, 오이카와는 낮게 내뱉었다.

건방진 토비오쨩.”

고른 치열이 보이는, 살짝 벌려진 카게야마의 입술에 오이카와는 그대로 가볍게 키스했다. 메마른 입술은 약간 짠맛이 났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향기였다. 매미 한 마리가 한차례 크게 울었지만, 오이카와에게는 카게야마의 숨 삼키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날이 더웠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 있었다.













 Tell me, Please don’t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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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kawa side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티가 나는 법이다. 사람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건 선천적인 걸까, 그에 대해선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말을 거는 여자아이들, 모른 척 기대는 좁은 어깨, 남자치고 피부가 희다면서 가볍게 하는 접촉들. 그런 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자연적으로 머릿속에서 전환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다. 여름은 낮이 길다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역시 카게야마 토비오는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 뚱한 얼굴이 떠올랐다. 노란 끼가 도는 피부에 까만 머리, ‘뭐하러 오셨어요.’하며 삐죽 튀어나온 입술. 이상하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태도, 저는 모르겠지만 손끝까지 긴장한 것 같은 그 모습은 좋아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오이카와는 가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또 무슨 이상한 짓 꾸미고 있냐며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오이카와는 피식 웃어 보이며

그냥. 솔직하지 못하구나 싶어서.”

가볍게 내뱉을 뿐이었다. 연습이 없는 날의 귀갓길 가운데로 햇빛은 부서지며 떨어지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습기가 끈적거렸다. 뜨끈한 바람이 드러난 팔에 닿아서, 오이카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카라스노에 도착했을 무렵엔 석양이 바닥 저변에 녹아들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나절은 매미 소리도 한풀 꺾여 낮에 비해서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무리를 보고 가방을 고쳐맸다. 지그시 한 사람만을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오이카와를 발견한 건지 강한 인상을 쓰고 있는 험악한 표정의 후배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눈을 가늘게 굽히면서 안녕, 토비오쨩. 가볍게 내뱉고 손을 살살 흔들어 보이면, 카게야마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강하게 한숨을 쉰 뒤 무리 속의 누군가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오이카와쪽으로 걸어왔다. 카게야마가 다가오면 올수록 그 까만 저지에 노을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까만 머리카락에도, 꾹 다문 입술에도. 어둑해져 가는 저녁에 얼굴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카게야마는 발을 멈췄다. 더는 찌푸려지지 않는 미간을 더욱 좁히면서, 뚱한 입술을 열었다.

뭐하러 오셨어요.”

토비오쨩 보러.”

거짓말 치지 마세요.”

조금의 쉼도 없이 주고받은 말 뒤에 카게야마는 시선을 틀었다. 잠시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를 그대로 지나치려는지 몸을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서둘러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냥 가지 말고. ? 할 말 있으니까.”

…….”

카게야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오이카와와, 오이카와가 붙잡은 팔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잠시간 달싹였지만 오이카와가 응? 운을 떼자 다시 꾹 닫혔다. 연습을 끝낸 몸에서는 연한 땀 냄새가 나서,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같이 남아서 늦게까지 연습하던 날은 바람에 실려 카게야마의 땀 냄새가 났었다. 시선이 비슷해질 정도로 키가 자라도, 예전에는 순진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이제는 짜증이 가득해도, 예전과는 달리 굵어진 팔이 한 손에 들어오지 않아도, 카게야마는 카게야마였다.

 

 

저녁이 물드는 카페에는 사람이 적었다. 뚱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연거푸 물만 마셔대는 카게야마를 보면서, 오이카와는 기어코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를 올린 오이카와를 보더니 카게야마는 먼저 운을 뗐다.

할 말이 뭔데요.”

있지,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게야마가 놀란 듯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조금 뺐다. 열이 올랐던 몸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은 걸까, 그 팔을 조금 떨면서.

솔직하게 말하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오이카와는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간질간질한 목구멍을 타고 톡톡 튀는 아이스티가 내려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뭐가요?”

오이카와는 피식 웃더니, 아이스티의 얼음을 빨대로 휘적휘적 흔들었다.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다 아니까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 오이카와씨의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카게야마가 어떤 식으로 고백하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한가지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음료가 마시고 싶다는 당연한 이치처럼. 카게야마는 얼마간 조용한 표정을 짓더니, 오이카와가 장난스레 지어 보인 미소에 이내 웃어 보였다.

? 웃었다고?

오이카와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마시던 아이스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후배는 인상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요?”

,?”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지 못한 상황에 오이카와는 잠시간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카게야마는 웃고 있었고,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은 어느새 소소한 한기를 주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오이카와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정해놓지 않은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소름이 돋는 미소를 거두더니 조용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씨가 뭘 생각하는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카게야마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오이카와의 넥타이를 낚아채고 끌어당기더니, 두 입술 사이에 아주 조금의 간격만을 남겨두고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너무 바보로 보지 마시죠.”

입술에 와 닿는 뜨거운 입김에 오이카와는 입술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잡고 있던 넥타이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카게야마는 무언가 해냈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이카와는 얼마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간질이던 이마, 바로 앞에서 마치 별이 담긴 듯 반짝이던 검고 푸른 눈동자. 귓속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져 머릿속이 다시 한 번 새하얘졌다.

뭐야, 토비오쨩?”

얼굴이 뜨거웠다. 카페 안에서 저만 다른 세상인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서 오이카와는 손을 꽉 쥐었다. 카게야마에게 잡혔던 넥타이에 주름이 져 있었다. 목이 타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셔도 가시지를 않았다. 귓속에 들렸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재차 떠오르면, 다시 열이 올라 목구멍을 태웠다.

…… 토비오쨩?”

그 까맣고 푸르던 눈동자가, 저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는 착각이 일었다.

 

 

 

 

 

 

Kageyama side

 

 

오이카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그는 그랬다. 무언가를 꾸미고, 나를 놀리고, 장난치고, 자기가 한껏 즐거운 다음에 남겨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중학교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서브를 가르쳐달라는 나를 내치고, 혼자 앞으로 나아가고. 졸업식 날 세이죠에 가도 되나요? 라고 물었을 때 그건 토비오쨩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저 혼자 졸업해버리고. 오이카와는 그랬다.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와 마주할 때면 또 어떤 짓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카게야마는 공을 올리던 손을 멈췄다. 아무도 없을 때 하는 연습은 조용하고 기분이 좋았다. 새벽 기운은 아직 오르지 못한 태양 빛을 가려주어 선선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도 열이 모인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낮게 숨을 내뱉자 폐에 가득했던 뜨거운 열기가 한차례 빠져나갔다. 그래도, 이제 예전과는 다르다. 당하지만은 않을 거니까. 다시 배구공을 들어 올리고, 서브 자세를 취했다. 뭘 꾸미는지는 모른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날, 오이카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결국엔 그런 일이겠지. 날 놀리려는 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석양이 녹아든 웃는 얼굴에, 이상하게 저 안쪽이 욱신거리는 건 카게야마에게 일종의 병이었다. 고질병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사라지질 않는 지독한 병. 서브를 내려치는 맛이 좋지 않았다. 공이 저 바깥쪽으로 빠져 아웃코스로 날아들었다. , 짧게 혀를 차고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었다.

토비오쨩, 솔직하게 말하지? 그의 정해진 순서였다. 먼저 저의 마음을 파헤치고, 무언가 재미난 건 없을까 떠보고. 바보같이 거기에 걸려들어서 저 속까지 드러내 보이면, 오이카와는 그 안을 온통 할퀴는 사람이었다. 여자애들이 자주 말하는, 쇼트케이크에서 딸기만 빼 먹는 얄미운 사람이란 건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 자세한 건 모르지만 비슷한 말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이제 당신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니까. 오이카와는 어차피 저를 놀릴 생각만 가득하니까, 나도 내 맘대로 할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내리치자, 공이 슬쩍 휘어 아웃선 아슬아슬한 곳에 꽂혔다.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를 들어 올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어 닦았다. 더워지고 있었다. 체육관의 열린 창문으로 후덥지근한 바람과 습기가 카게야마를 온통 휘어 감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카게야마는 재차 공을 들어 올렸다. 반 박자 쉬고, 도움닫기를 하고. 팔을 휘두르면. 한 번 해보자구요,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씨가 좋아하는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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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생일기념 연성 첫번째. 상중하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평소 쓰던 느낌이 아니라 뭔가 어색하네요...








만약 네가

 

 

 

 

 

연이어 내린 비로 공기 중에 수분이 가득했다. 카게야마는 창문을 열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너져 내릴 듯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보슬비로 바뀌어있었다. 젖은 냄새가 났다. 킁킁, 카게야마는 몇 번 소리 내어 비 냄새를 맡은 뒤 고개를 들었다. 검회색 구름이 온통 뒤덮인 하늘은 가느다란 실을 뚝뚝 끊어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안개에 그대로 노출된 머리카락이 수분을 머금고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토비오쨩? 비 다 들어오잖아.”

오이카와가 읽던 잡지를 내려놓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흰색 브이넥에 주름진 청바지, 집에서의 그는 지나치게 바깥 모습과는 달랐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안경까지 쓰고, 홍차 빛 눈동자를 빛내며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를 읽는 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 오는 날은 싫어, 머리가 맘에 안 드니까라고 했던 오이카와는 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넘긴 채였다. 쉬는 날이어도 머리 세팅은 반드시 했으면서. 비가 오는 날의 오이카와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일 때가 많았다. 오이카와가 커피 테이블에 올려둔 코코아에서 나는 달콤한 향내가 거실 전체에 퍼져서, 비 냄새 사이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비 냄새는 싫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돌렸던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향한 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토비오쨩?’ 낮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빗소리 뒤로 넘겨버린 채.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 곳은 작은 임대주택이었다. 아직 대학생 신분인 카게야마 대신 오이카와 명의로 된 집. ‘같이 살까라고, 오이카와는 그 날 우산 아래에서 말했었다. 오늘같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 비에 쫄딱 젖어서 조그만 구멍가게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오늘과 같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같이 살까, 토비오쨩.”

그 날 오이카와가 그 말을 건넨 건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와 눈이 마주치면 무심코 데려오고 마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그 날 카게야마를 만나버렸기에, 카게야마와 같이 사는 걸까. 카게야마는 비에 젖은 강아지와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걸까. 오이카와를 만나버리면, 카게야마는 그런 눈을 하고 마는 것일까. 서로가 어찌할 수 없었던 걸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보면 그런 눈을 하는 것도, 오이카와가 그런 눈을 한 카게야마를 보면 데려올 수밖에 없는 것도. 서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걸까, 결국은.

오이카와는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카게야마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집안일은 반반씩이니까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벌써 반년. 오이카와는 여전히 카게야마와 같이 살고 있다. 카게야마는 비 오는 날이면 거울을 들여다봤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난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에 비친 저를 아주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저에게 오이카와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조금도 모르는 오이카와와도 같이.

무슨 생각해?”

뒤에서 큰 손이 뻗어와 제 입술을 톡 치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둘러 뒤를 바라보면 오이카와가 속 끝까지 훑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카게야마의 정면에는 흰색 브이넥 사이로 보이는 쇄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날 자신이 남겼던 붉은 자국이 여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걸 알고서 브이넥을 입은 게 분명하다. 성격 나쁜 건 변하질 않는군, 카게야마는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투둑, 툭 짧은 빗줄기가 창가에 떨어져 맑은소리를 냈다. 창 아래에는 꽃이 그려진 우산을 쓴 여고생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저러면 다 젖어버릴 텐데. 그런데도 강아지는 좋다고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코코아의 달콤한 냄새, 비 냄새, 오이카와의 향수 냄새가 났다. 보드라운 입술이 뒷목 선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

뿔테안경의 테두리가 귀 뒤편을 간지럽혔다. , 쪽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내려가던 오이카와는 손을 올려 창틀을 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창문, 닫는 게 좋지 않아?”

오이카와가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예쁜 손가락이 흘러 창문에 닿는 것을 보고,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창문 바깥, 아래층에서 키우는 화초에서 조그만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달팽이의 표면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오면. 저 달팽이는 저렇게 기어가는 걸까. 보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면서.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는 곳에 뭉근하게 열이 올랐다. 속눈썹이 무거웠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것을 견디면서,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

오이카와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착한 몸의 허리 부근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의 향수가 아닌, 그의 냄새. 그의 피부에서 나는 냄새는 카게야마의 침샘을 자극했다.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삼킨 뒤,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씨는 만약. 제가 달팽이로 변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달팽이?”

. 강아지나, 고양이나, 토끼같이 귀여운 동물이 아니라. 달팽이 같은 거요. , 지렁이여도 좋구요.”

토비오쨩, 달팽이야?”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게야마에게 눈을 맞췄다. 뒤돌아있던 카게야마도 창가에서 몸을 떼어내고, 오이카와에게로 돌아섰다. 약간 거세진 빗줄기가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에 후두둑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브이넥을 꽉 붙잡았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달팽이가 되고 싶은 거야?”

…….”

카게야마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틀었다. 오이카와는 동그란 눈동자로 잠시간 카게야마를 바라보더니, 글쎄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빗소리가 들렸다. 비는 연이어 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한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가 비를 타고 건너온 바람결에 흔들흔들 움직였다.

휙 버려버릴지도.”

, 이요?”

. 휙 하고. 달팽이로 변한 토비오쨩을 바깥으로 버려버릴지도.”

그런가요.”

아무렇지 않게, 여러 여자를 울렸던 웃는 얼굴로 말하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슬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던져지면 더는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시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오이카와의 브이넥도, 주름진 청바지도, 저 익숙지 않은 까만 뿔테안경도, 홍차 빛 눈동자도, 쉬는 날이면 약간은 무장 해제되는 그의 모습도. 모두,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평생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있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창가에 서 있느라 온통 식어버린 입술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부드럽게 누르는 손가락은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그런데도 손톱이 가지런히 정리된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카게야마를 다루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허락해줄게. 배고파하는 것 같으면 양배추 한 쪼가리는 건네줄 수 있어. 비바람이 심하면 아주 잠깐이지만 집 안에 있는 것도 허락해줄게.”

달팽이인데도요?”

달팽이여도. 토비오쨩이잖아?”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요?”

비에 젖은 강아지가 아니어도. 비에 쫄딱 젖은 토비오쨩이 아니어도. 오이카와씨는 징그러운 건 질색이니까, 징그럽게 생긴 달팽이여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때, 오이카와씨 친절하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허리 뒤로 손을 두른 뒤,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그의 피부에만 닿으면 카게야마는 열이 올랐다. 전신이 그의 냄새를 기억하고 반응하는, 하나의 화학작용과도 같이. 카게야마에게 있어서의 오이카와는, 오이카와가 평생 가도 모르는 존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어떤 존재인지,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봐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친 저가 어떨지. 그래도, 아주 조금. 카게야마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카게야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이카와에게 저는, 어쩌면.

카게야마는 이제 슬며시 열이 오른 팔을 들어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의 등에 대고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의 쇄골에 입술을 묻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도 보통 달팽이 이상은 되는 것 같네요.”

보통 달팽이면 버리긴커녕 창문에서 떨어뜨릴 거야. 징그럽잖아.”

착하다기보단 잔인한 거 같은데요.”

징그럽잖아.”

어린아이같이 투덜거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귓속에 녹아드는 것을 느끼면서, 카게야마는 무거웠던 눈꺼풀을 그제야 내려놓았다. 뜨끈뜨끈한 눈가가 기분 좋았다. 빗소리가 다시 약해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숨을 들이켰다. 젖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코코아의 향기도 났다. 오이카와와 사는 집의 향기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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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카와의 브이넥, 검은 뿔테안경 이미지는 히징님이 언젠가 그렸던 오이카와에게서...

  키루님, 예월님과 함께한 오이카게 '결혼식' 키워드 조각 글입니다.
    제가 너무 많이 늦어버려서..ㅠㅠㅠ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 기다려주신 키루님, 예월님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려요 ㅠㅠㅠ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OO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소리에 카게야마는 살며시 눈을 떴다. 쏟아 들어오는 햇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 열린 창문으로, 커튼의 결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식어버린 몸에 툭 하니 떨어졌다. 그대로 내려앉은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떤 뒤 허리께에 흘러내린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올렸다. 드러난 발목을 쓰다듬는 손길이 그곳에 있었다.


토비오쨩, 같이 안 갈래?”

간질이는 듯 복사뼈 아래를 문지르는 손길을 다른 쪽 발로 툭 쳐 내린 뒤, 베개에 얼굴을 더욱 묻었다. 아직 졸린걸요, 밤새 못 자게 한 게 누군데. 말로 하지 못한 원망을 아릿한 아픔이 퍼지는 허리 아래로 내려놓은 뒤, 대답을 삼켰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손을 놓더니 재차 부산스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고, 닫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소리. 쉬는 날 오전 10시의 고요한 햇살은 침대를 그대로 비췄다. 묵직한 허리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며 몸을 뒤척이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바람을 타고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같이 갈까?” 

…….”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 아직 잠이 마저 깨지 않은 머리를 베개에 부빈 뒤, 카게야마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가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홍차 빛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으며, 흰 와이셔츠가 눈부시게 빛났다. 와이셔츠에 가려진 단단한 가슴이 머릿속에 떠올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부터 몸이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이 부드러운 옆모습이 햇빛을 받아 말간 빛을 띠었다. 긴 속눈썹, 그 아래로 이어지는 매끈한 흰 피부, 도드라진 부드러운 입술까지. 몰캉한 복숭아 같던 그 입술을 떠올리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뭐하러 가요, 결혼식인데.”

그것도 오이카와씨랑. 말하지 못한 대답을 꿀꺽 삼켰다. 삼킨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뱃속으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뭐하러 가요. 오이카와씨랑. 뭐하러 가요. 결혼식에. 뭐하러 가요. 우리 둘이. 남자 둘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이카와가 가볍게 목울대를 울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가지 말까? 모처럼 쉬는 날인데. 토비오랑 있을까.”

오이카와의 손이 흘러서 카게야마를 덮고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 손길만 닿으면 예민해지는 목 뒤를 지나, 벌써 열이 오르려고 하는 어깨뼈를 가볍게 톡톡 쳤다. 그대로 이불을 걷어내리더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키스를 도드라진 어깨뼈에 떨어뜨렸다. 어깨에서부터 퍼지는 온기에 몸이 떨렸다. 다른 곳까지 속속들이 들어오는 오이카와의 온기가 아플 정도로 뜨거웠다. 그대로 오이카와의 손이 척추 선을 곰곰이 짚어내려 가더니, 엉덩이골까지 가볍게 문질렀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오이카와에게로 시선을 향하자, 장난스러운 표정의 오이카와는 전날 밤 카게야마를 괴롭히던 오이카와의 모습 딱 그대로였다. 언제까지고 당해낼 수가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날카롭게 째려봤다.

빨리 가시죠? 꼭 가야 된다고 일주일 전부터 그랬잖아요. 소속 배구팀 에이스인 사람의 결혼식이라면서요.”

같이 가자. 카레 사줄게.”

키득거리며 귀를 녹일 듯이 흘러들어오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결국 다시금 베개에 묻었던 고개를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오이카와가 얼른 준비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항상, 매번. 당신에게는 이길 수가 없는 걸까. 배구도, 그 무엇 하나도. 당신을 이겨본 기억이 없다. 난 항상 당신 앞에서는 약자다.

 

 

◆ ◆

 

 

시끌벅적했던 교회를 빠져나와 얼마간 길을 걸으면, 적막한 고요가 가득했다. 꼭 밥을 먹고 가라는 신랑의 말을 듣기 좋게 거절하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면서, 발을 움직여 먼저 빠져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였다. 결혼식이 행해진 교회는마치 외국 교회처럼조그마한 시골 구석진 곳, 나무가 무성한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주변은 모든 것이 그림처럼 빛나고 있었다. 날이 더웠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나무, , 햇빛, 간간이 부는 낮은 바람. 오직 그뿐이었다. 찌르르, 높은 새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쏟아내리는 햇살이 머리에 그대로 흡수돼서, 이곳저곳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토비오쨩.”

약간의 현기증이 일 무렵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면 교회 입구에서 오이카와가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 그대로 햇빛 아래에 서더니, 손 가리개를 만들며 위를 올려다봤다. “이런 날 결혼하다니, 행복하겠네.” “그러게요.”

작게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이카와는 눈을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카게야마도 마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는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었다. 옆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말이 없는 시간이 길게 지나갔다. 가끔 부는 바람에 나무가 부스스 흔들렸다.


토비오도 결혼하고 싶어?”

오이카와가 시선을 낮게 내리깐 채 말했다. 입술에 걸려있던 미소는 사라져있었다. 결혼. 사람과 사람 간의 결합, 그 단순한 의미 이상의 무언가. 그것이 만약 영원한 사랑이란 의미라면, 그렇다면.

카게야마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비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거운 목 안에서 울컥 무언가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 내려놓은 시야 안, 그 안에선 보이지 않는 오이카와가 부드럽게 물었다. 일렁이는 감정 하나하나가 카게야마의 뜨거운 몸을 한 번씩 흔들고 지나갔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입술을 열었다가, 달싹이며 다시 다물었다. 열기로 가득한 공기 가운데 퍼지는 건 긴 한숨뿐이었다.

,” 오이카와씨도, 알고 있으면서. 꼭 그렇게 묻는,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묻는 당신은. 정말이지 짓궂은 사람이다.

전 결혼 안 해요.”

아까운걸. 얼굴도 나름 괜찮고, 오이카와씨보단 별로지만. 배구 선수로 활약도 하고 있고, 나보단 못하지만. 달려드는 여자들도 많잖아? 나보다는 적지만.”

어쩌라는 거야. 울컥 솟아오른 짜증에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려 쏘아붙였다. “그러는 오이카와씨는요?” 오이카와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더운 날씨 때문일까, 흰 피부가 피어오른 열 때문에 분홍빛을 띠었다.

난 토비오가 있잖아.” 몸을 치고 지나갔던 감정 하나가 다시 한 번 카게야마를 휘감았다. 시계 초침이 흐르듯 일정한 박자로 뛰던 심장 리듬이 한 박자 빨라졌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얼굴에 열이 모이는 것이 저도 느껴져서, 고개를 숙이고만 싶었다. 더운 날씨 탓이었다. 열이 피어오르는 것도, 고개를 숙이면 목덜미가 뜨거워지니까 숙일 수 없는 것도. 모두 날씨 때문이었다. 눈앞의 오이카와가 아니라.

저도 오이카와씨가 있는 걸요.”

우리 둘 다 바보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찡그리면서 웃더니 카게야마의 축축한 손을 꼭 잡았다. 오이카와의 손은 불에 달군 듯이 뜨거웠다. 어깨가 떨릴 정도로 뜨거운 그 손을 놓칠 뻔하자, 오이카와가 더욱 강하게 잡아왔다. 홍차 빛 눈동자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오이카와에게서 약간의 땀 냄새가 났다. 찌르르 울려 퍼지는 새소리, 여느 때보다 더욱 불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카게야마는 그 눈조차도 피할 수가 없었다. 뒤편에 있는 교회 안에서 세차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귓바퀴로 얼굴을 갖다대고, 핥아 올리듯이 혀를 굴리는 키스를 한 뒤 귓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내보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영원히 사랑하는 걸 맹세합니까?”


카게야마는 온몸을 간질이는 감각에 어깨를 떨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차오르는 물덩이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오이카와가 일렁거리며 햇살 사이에서 빛났다.

맹세합니다.” 오이카와가 선선한 바람결의 끝에 웃어 보인 뒤,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로 제 입술을 겹쳤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오이카와의 분홍빛 입술이 촉촉이 젖어들어 있었다.

오이카와씨는요?”

난 토비오쨩이 있으니까,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걸?”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이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지금 장난하나. “, 그러십니까. 놓아드릴 테니 얼마든지 결혼하시죠.” 어깨를 비틀며 빠져나가려는 카게야마를 더욱 품에 옭아매면서 오이카와가 키득거렸다. 그대로 뜨거운 손을 올리더니, 엷게 땀이 밴 카게야마의 얇은 목 뒤를 한번 훑었다.

내가 안 놓아줄 건데.”

다시 한 번 겹친 입술이, 이번에는 지독히도 달콤했다. 오이카와의 향기, 옅게 나는 땀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었다.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오이카와가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오이카와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맹세할게. 죽을 때까지.” 오이카와의 단단한 가슴안에 카게야마가 폭 싸여 들어갔다.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인데도, 손을 돌려 그 등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이카와의 등에도 희미하게 땀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눈꼬리에 물주머니가 한 덩어리 쌓여서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아슬아슬 매달려있었다. 가슴이, 심장이, 온몸이 뜨거워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요, 말뿐이라는 거. 내일이면 또, 오이카와씨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오늘만큼은. 오늘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사랑을 맹세한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전신의 물이 증발할 정도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와의 하루뿐인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 히징님(@phantom_hj)과 한문장 연성하기 '나는 아직도 당신이 어렵다.' (호칭 변경 가능) 첫문장 맡았어요!! >.<
    히징님의 세계 최고 오이카게 만화는 이쪽입니닷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6524C335545CE290D









와르르 무너져 내린 하늘이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빗줄기가 거칠게 우산에 붙어왔다. 오이카와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우산을 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때리는 비바람이 거셌다. 아침에는 맑았는데, 입술을 씹으면서 생각해봤자 몰아치는 폭우에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우산으로 머리는 겨우 가렸지만 덮치듯이 불어온 빗줄기는 온몸을 흠뻑 적셨다.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는 오이카와의 눈앞에 현관문이 보였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함께 사는 집. 2층 주택을 싸게 구한 건 더 없는 행운이었다. 여기저기 낡았다거나, 이런 비 오는 날 가끔 물이 새는 걸 빼면 아쉬울 것 없는 집이었다. 겨우 도착했네,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2층 베란다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시야 속에서 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멈춰선 뒤, 입을 벙긋거리며 하얀 한숨만 토해냈다.

지금, 잘못 본 거 아니지? 눈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광경에, 짙은 회색빛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오이카와는 고개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다리를 조금 전보다 거칠게 움직이자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 물방울들이 다시 첨벙거리며 솟아올랐다. 다 젖어버린 손에 들려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 때문에 버스럭버스럭 소리를 냈다.

 

✤ ✤

 

토비오! 빨래!”

 

외치면서 들어온 오이카와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거실에서 월간 밸리 잡지를 읽고 있던 카게야마가 눈을 들어 올리자마자 오이카와는 사라져있었다. 오이카와씨, 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카게야마도 몸을 일으켰다. 계단이 물 얼룩으로 가득이었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면서, 양말이 젖지 않게 얼룩들을 피하며 발을 내디뎠다. 기껏 청소 다 해뒀더니. 꿍얼거리면서 계단을 모두 오르자, 오이카와는 2층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빗물이 잔뜩 물든 옷가지를 걷어들이고 있었다. 이미 젖어버린 오이카와의 셔츠와 바지에 한 차례 물벼락이 쏟아졌다.

오이카와씨?!”

비 오는데 왜 빨래를 여기에 널어놔?!”

오이카와는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빗줄기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옆에 개켜놓았던 수건 한 장을 들어 그 머리에 허겁지겁 엎었다.

오이카와씨가 빨래 널라고 하고 나가셨잖아요!”

비가 오면 당연히 걷어놔야지!”

갑자기 쏟아질 줄 저도 몰랐다고요!”

오이카와는 베란다 옆에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젖어버린 빨래들을 던져놓고선, 제 머리를 거칠게 문지르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 떨리면서 손이 멈췄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자, 깊은 한숨을 내뱉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보였다. 머리에 붙어있던 물기를 모두 머금은 수건 사이로, 축 늘어진 홍차 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열린 채로 남아있는 베란다 문 너머, 눈에 보일정도로 선명한 빗줄기가 연이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투둑, . 베란다 문에,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쑥날쑥 들려왔다. 오이카와의 전신에서 풍기는 축축한 비 냄새가 작은 2층 방 안에 훅 퍼졌다. 금속같이 차가웠던 손이 카게야마의 온기를 받아 서서히 열을 띠었다. 젖은 셔츠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카게야마의 귓속에 울렸다.

진짜, 토비오. 정말이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동골동골 맺힌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난 네가. 나는 아직도 네가 어렵다.

 

 

 

 

 

 

 

 

 

 

30년이 지나도

 

 

 

 

 

 

 

 

 

샤워를 방금 끝내 보송보송 열이 오르는 몸은 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오이카와는 작게 휘파람을 불면서, 저녁 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봉지에 손을 넣어 재료를 꺼내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오이카와는 아까와 같이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보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토비오, 뭐 해줄까? 저녁.”

카레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묻자 카게야마는 읽던 잡지를 거칠게 내려놓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은 별이 담긴 듯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알았어.”

오이카와는 손을 움직여 봉지 속의 카레 루를 꺼냈다. 이어서 나오는 것은 고기, 당근, 양파, 감자누가 봐도 카레 재료였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달걀 두 개까지 꺼내면, 머릿속에 있는 레시피의 재료로 빠진 것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고소한 냄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갈 때까지 볶았다. 2인분으로 샀던 냄비를 찬장에서 꺼내 볶은 재료들을 넣고, 익숙한 양만큼 물을 채워 넣으면 밑준비는 완성이었다. 그 안에 방금 사 온 카레 루를 조심조심 넣고 불을 올리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포크커틀릿으로 만들 돼지고기 등심을 다듬고 있자, 등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달걀도 올려주실 거에요?”

내키면.”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으로 오이카와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티셔츠 끝자락을 붙든 손이 컸다. 중학교 때에는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어깨에 턱 괴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네. 오이카와는 기억 속의 카게야마를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매달린 채로 고기를 다듬는 손길을 뚫어질 듯이 바라봤다. 강하게 뻗어오는 시선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한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목 뒤를 쓰다듬었다.

몇 번이나 만들어줬잖아? 이제와서 다를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봐.”

오이카와씨가 만들어주는 카레는 매번 다른걸요. 매일매일 다른 맛이 나요.”

카게야마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말에, 오이카와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카게야마의 시선은 그대로 돼지고기에 고정된 채였다.

뭐야, 맛없던 적도 있어?”

똑같은 레시피인데 매일매일 다른 맛이라니. 카게야마가 맛있다고 말한 레시피만을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었기에, 오이카와의 요리실력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의 등에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퍼졌다. 카게야마는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강하게 도리질 쳤다. 꾸욱 꾸욱 눌리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푸핫,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제대로 대답하라니까. 벌이라는 의미로 쓰다듬던 목 뒤를 찰싹, 가볍게 때렸다. 카게야마는 아야,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고개를 갸웃해 보인 카게야마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날따라 조금씩 느낌이 달라요. 어떨 땐 뭐랄까, 행복해지는 맛이고. 어떨 땐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고. 어떨 땐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쳤다. 입은 그대로 열려있는데, 들리는 건 불에 올려놓았던 카레가 잘게 끓는 소리뿐이었다. 오이카와는 한번 가볍게 숨을 들이킨 후, 어떨 땐? 짐짓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떨 땐 매일 먹고 싶어요.”

매이일~?”

오이카와는 대놓고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카게야마에게 향했던 얼굴을 돌려 다시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오이카와씨는 매일 카레는 싫어.”

전 좋은걸요!”

카게야마는 어깻죽지 사이에 머리를 갖다 대더니, 꾸욱 꾸욱. 오이카와의 상체가 약간 밀릴 정도로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깨에서 느꼈던 간지러움이 살살살 등에 모이자 오이카와는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토비오, 그만하라니까.”

오이카와는 고기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제 등에 매달려있던 카게야마에게로 몸을 돌려서 그 얼굴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오이카와의 팔이 카게야마의 허리에 둘려 있었다. 티셔츠 너머로 단단한, 그래도 아직은 얇게 잡힌 근육이 느껴졌다. 오이카와씨에 비하면 아직은 한참 멀었다니까. 오이카와는 눈을 얇게 뜨고, 카게야마의 살짝 열려있는 입술에 닿을 뿐인 키스를 했다. , 가벼운 소리가 나기 전에 눈을 감았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채 떨어지기 전에 살포시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오이카와의 홍차 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민트 색의 티셔츠를 붙들고 있는, 오이카와의 가슴께에 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까지 굳어있는 그 손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잡은 뒤 오이카와는 입술 간의 좁은 사이를 메우듯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얼굴을 틀어 더욱 깊숙이 혀를 집어넣고, 침이 고인 카게야마의 혀 밑을 훑었다.

,

얼굴을 새로 겹칠 때마다 젖은 소리가 귀에 촉촉하게 젖어 붙었다. 그 사이사이 섞여나오는 카게야마의 비음에, 오이카와는 혀가 녹을 것 같은 달콤함을 느끼며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마간의 키스가 지난 뒤, 오이카와는 동그랗게 붉어진 카게야마의 눈가를 매만졌다.

카레, 다 끓겠다.”

오이카와가 말랑말랑한 귓불을 꼬집으며 흘려 넣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불퉁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그럼 허리 놔주세요.”

카게야마의 볼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귓가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키득거렸다.

.”

오이카와는 솜털이 보들보들 남아있는 귓바퀴에 가볍게 키스하더니, 다시 입술로 옮겨 카게야마의 입 안쪽으로 혀를 돌렸다. 입천장을 쓸 듯이 긁고, 몰캉한 볼 안쪽도 간질이자 카게야마가 헐떡이는 신음을 흘렸다. 불 위에 올려둔 카레에서 폭폭폭 끓는 소리가 났다. 뇌 속을 녹이는 달콤한 입술에서 겨우 얼굴을 뗀 후, 오이카와는 타액이 묻어있는 입술을 다셨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르르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그 상태 그대로 제 얼굴을 오이카와의 가슴팍에 묻더니, 다시 꾸욱꾸욱. 머리를 비비면서 밀어왔다. 이번에는 자연스레 솟아나는 웃음에, 오이카와는 다시 미소 지으면서 카게야마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 달짝지근한 카레 냄새가 부엌 공기를 가득 메웠다.

 



✤ ✤

 



조그마한 2인용 목제 식탁은 둘이서 고른 물건이었다. 가구 같은 건 잘 모르겠다는 카게야마를 외국에서 들어온 유명한 가구점으로 이끈 건 오이카와였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성이 좋은 걸 몇 개 오이카와가 먼저 고른 후 그 안에서 카게야마가 고르게 했다. 안 그러면 가구점에서 죽치고 앉아서 땀만 뻘뻘 흘리는 카게야마를 평생 기다릴 게 뻔하니까. 당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골라 온 몇 개의 후보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간 고민하더니, 정사각형 모양에 백색에 가까운 상아색의 목제 식탁을 골랐다. 왜 이걸로 골랐느냐는 오이카와의 질문에, 그냥요. 가장 오이카와씨랑 어울리니까? 그렇게 대답한 건, 아직도 의문이지만.

오이카와는 민트 색의 식탁보가 깔린 양쪽 측면에 카레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았다. 방금 튀겨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크커틀릿을 얹고, 완숙이 되지 않게 신경 쓴 반숙 달걀을 올리면 음식 자체는 완성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샐러드를 투명한 볼에 담고, 레몬 갈릭 드레싱을 살짝 뿌리면 평소의 저녁밥이었다. 마지막으로 물 두 잔을 정수기에서 받은 뒤 접시 옆에 두면, 작은 목제 식탁은 꽉 들어찼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부르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금세 다물었다. 상아색 식탁 한가운데에는 연한 초록빛의 로즈마리 화분이 놓여있었다. 3일 전 카게야마가 먹을 수 있대요, 하면서 갑자기 사온 허브 화분이었다.

아니, 먹을 수는 있지만?’ 오이카와는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꿀꺽 삼킨 후, 손을 들어 로즈마리 화분을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로즈마리 잎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문지르던 손을 들어 가만히 코에 갖다 대면, 언젠가 맡았던 아로마 향초같이 노곤한 향기가 슬그머니 묻어나왔다. 오이카와는 손을 내리고, 다시 카게야마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앉아 월간 밸리 잡지를 읽는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소파에 앉아있는데도 꿋꿋이 다리를 올리고, 특정 부분을 읽을 때면 미간을 좁히면서 표정이 험악해지는 버릇. 눈이 반짝이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몰입한 모습에,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토비오, 밥 먹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가면, 카게야마는 귀를 쫑긋 세우고 돌아봤다. 방금까지 빛나던 눈동자가 더욱 밝기를 더하더니, 읽고 있던 월간 밸리를 던지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눈앞에서 스르르 연기가 오르는 카레를 보고선, 카게야마는 진정되지 않는 모양새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오이카와도 마주 보듯이 자리에 앉은 뒤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잠시간 가만히 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숟가락을 들더니, 카레를 한 움큼 퍼올렸다. 아앙크게 벌린 입안으로 카레 한 움큼이 푹 들어가는 걸 보면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입가 구석에 카레 소스를 잔뜩 묻히는 것을 바라봤다. 한 입 넣었는데도 벌써 묻다니. 한숨이 나오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아직도 그래서 넌 어떡하냐, 진짜.”

약간의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장난스레 내뱉은 뒤, 또 한 입을 넣으려는 카게야마의 턱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 입꼬리에 묻어있는 묽은 금빛의 카레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쓸고, 손가락을 끌어 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만히 혀에 갖다 대고 맛을 음미하면, 오이카와의 기억 속 그 맛 그대로였다.

, 맛있네. 역시 내가 만든 카레야.”

오이카와는 뿌듯한 듯이 미소 지으며 자기 몫의 카레를 한 입 떴다. 그대로 집어넣으려고 조그마한 입을 벌리자, 카게야마의 눈빛이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먼 곳을 보는 듯이 멍하게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눈치채고, 오이카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콧망울에 닿을 듯이 모락모락 오르던 카레 김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깊은 카레 향이 목제 테이블 안에 가득했다.

?”

오이카와는 말없이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미소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의 입 주변은 아까와는 달리 깨끗했다. 그 입이 슬며시 닫혔다가, 오물거린 뒤 다시 열리는 것을 오이카와는 가만히 지켜봤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오이카와씨가 만든 카레는 30년이 지나도 이 맛이겠죠?”

오이카와는 머릿속이 잠시간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 끝에 걸어놓았던 미소를 내려놓았다. 뒷골이 슬쩍 당기는 것을 느끼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손을 아로쥐어 주먹을 꾹 쥐었다.

토비오, 너 나한테 30년이나 카레만 만들게 할 셈이야?”

카게야마는 물음으로 대답한 오이카와에게 누가 봐도 놀랐다는 얼굴로 엇,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안 만들어 주실 건가요?”

연이어 이어진 질문에 오이카와는 하아깊은 한숨을 내쉰 뒤, 주먹 쥐었던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무거운 두통이 눈 바로 위에서 뚝뚝 떨어졌다.

저기 있지, 토비오. 너 말야

오이카와는 입을 연 채로,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눈을 낮게 내리깔자, 푸근한 열기가 오르는 카레가 보였다. 오이카와가 생각한 오리지널 레시피. 바삭하게 튀긴 포크커틀릿, 그 위에 올린 반숙 계란. 전부 오이카와의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자다가 일어나도 대답할 수 있는 레시피. 혀끝에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맛.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하고 오이카와를 의아한 눈동자로 바라봤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조금 전의 카게야마와 같이 입을 다물고, 얼마간 우물거리다가 다시 열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약하게 들리면 어쩌지, 조금 걱정하면서.

있지, 토비오쨩. 나 벌써 스물일곱 살이잖아? 마음의 나이는 스무 살이지만. 토비오는 스물다섯 살이고.”

마음의 나이, 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죠.”

카게야마는 의문의 눈초리로 미간을 좁히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걸쭉하게 흰 쌀밥 위를 덮고 있는 카레를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밥과 카레가 섞이면서, 고운 빛깔이 촉촉하게 빛났다. 테이블 위의 전등에서 부드러운 크림색의 빛이 부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토비오는 언제까지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인걸까.”

오이카와씨의 토비오요?”

카레를 휘저을 때마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연기가 뭉텅이로 터져 나와 조용한 공기 속에 퍼졌다. 오이카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로즈마리를 흘끗 곁눈질했다. 연초록색 잎들이 싱싱했다. 오이카와는 약간의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뽑아냈다.

카레도 언젠가는 식고. 로즈마리도, 언젠가는 말라죽을거고. 그렇게 하나하나 지워가다 보면, 이 집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토비오도

오이카와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 입이 이번에는 열리지 않았다. 꾹 다문 입술을 입안으로 당긴 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번 갸웃, 해 보이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주름이 깊게 파였다.

??”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기어코 팔짱까지 낀 카게야마의 관자놀이에 연하게 땀이 배었다. 눈에 안 보이는 증기가 피쉭 피쉭 머리 위로 몰려나오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입을 툭 내밀더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저기무슨 뜻이에요?”

하아, 하하

오이카와는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단념이 섞인 한숨을 흘린 후, 휘젓던 카레를 숟가락으로 한 입 떴다.

아냐, 됐어. 카레나 먹자.”

오이카와씨는 항상 어려운 말만 하시네요.”

오이카와가 눈을 들자, 카게야마는 조용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오이카와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전등에서 떨어지는 불빛이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아 흩어졌다. 오이카와는 다른 존재를 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끼는 동시에 저 아래 쪽으로 접어넣은 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저 안 어린데요. 스물다섯인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 낮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흐응? 코를 울린 뒤 눈썹을 씰룩이더니 카게야마의 깨끗한 입 주변을 가리켰다.

입가에 묻히면서 먹는 토비오는 아무리 커도 어린애랍니다.”

…….”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노려보듯 오이카와를 치켜봤다. 오이카와가 이겼다라는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는 다시 차분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전 어려운 말은 잘 몰라요. 오이카와씨가 하는 말 대부분은 어려운 말이니까, 대부분은 잘 몰라요. 그래도 그건 알아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눈앞의 카레로 향했다.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어느새 잦아든 오이카와의 카레는, 아직도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이카와씨는 1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저한테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는 건 알아요.”

오이카와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곧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은 눈동자 안에 오이카와만이 아는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조금 기울이더니, 어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 때의 카게야마였다.

,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오이카와씨는 언제나 제 옆에 있으실거잖아요? 믿고 있거든요, 오이카와씨를.”

입가가 시큰거릴 정도로 달큼한 카레의 향기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얼풋 로즈마리 향이 나는 듯했다. 코 안쪽이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로 가득차서 머리가 약간 몽롱해졌다. 오이카와는 입가를 몇 번 달싹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저 뱃속까지 내려갈 듯이 아래쪽을 향해 고동치고 있었다. 흰 볼이 열기로 인해 따끔거릴 정도로 붉어진 게 느껴졌다. 뜨거운 카레의 맛이 그 볼에 닿아 훅훅 퍼졌다. 입을 열면 그 열기가 한꺼번에 후욱 빠져나올 것 같아 오이카와는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나랑 같이, 계속 이대로 있고 싶어? 토비오.”

카게야마는 짜증이 톡 올라온 얼굴로 오이카와를 째려봤다. 인상나쁜 눈매의 끝이 엷게 물들어 있었다.

꼭 말해야 해요?”

.”

오이카와는 심장으로부터 열이 전달된 손을 들어, 다홍빛으로 물든 그 눈꼬리에 가만히 갖다 댔다. 카게야마는 제 볼에 닿은 오이카와의 손에 가볍게 기대면서 시선을 틀었다. 우주가 담긴 눈동자 끝이, 여름날 잘 익은 체리처럼 더욱 붉어졌다. 오이카와의 손바닥의 열기와 카게야마의 볼에 담긴 따스함이 뭉근한 열을 만들어냈다.

전 그냥, 오이카와씨가조금만 더 저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걸?”

제가 오이카와씨를 그저,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요.”

믿고 있다고?”

카게야마가 틀었던 시선을 돌려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오이카와의 속을 훑어, 저 끝까지 꿰뚫어보는 눈동자였다. 저에게 고백할 때도 카게야마는 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오이카와의 겉모습, 행동, 말투 모든 것과는 상관없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향한 눈동자. 오이카와는 이상하게 카게야마의 저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임을 실감했다.

. 30년 뒤의 일은 몰라요. 제가 어떻게 될지,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그저 배구를 계속하리란 것뿐이에요. 근데 오이카와씨는 믿을 수 있어요. 30년 뒤에도 카레를 만들어주실 거라고. 오이카와씨는, 그때도 제 얼굴을 잡고. 키스, 해 주실 거라고.”

잠시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던 카게야마는, 다시 얼굴을 고쳐 들었다.

이 집이 아니어도 돼요. 로즈마리 화분이 있는, 이 테이블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냥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의 카레면 돼요.”

오이카와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아, 목덜미를 붙잡힌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따뜻해진 심장에 머리가 적응하지 못해, 여기저기서 치직치직 불꽃이 타는 느낌이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더라, 전부 익어서 녹아내린 뇌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과도한 열로 인해, 카게야마의 볼에 대고 있는 손바닥이 축축한 땀으로 가득했다. 가슴을 그대로 부여 잡힌 듯한 괴로움에 발끝까지 쥐가 난 듯 움찔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볼에 닿았던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토비오.”

제대로 말로 나오고 있는 걸까.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인 건 아닐까. 입술이 작게 떨리면서, 오이카와는 눅눅하게 익어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머릿속에서 부옇게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낯익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말했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는 너무 알기 쉽다면서요?”

불만이 담긴 입술이 튀어나오더니, 카레를 한 입 떠서 제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따스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오이카와도 금빛 카레를 담았던 숟가락을 들어 입안에 넣었다. 코끝에만 가득했던 카레 향이 입안 곳곳에 퍼졌다. 토비오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레시피는, 누가 쿡 찔러도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 30년이 지난 뒤에도 잊을 수는 없겠지. 오이카와는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올라간 입꼬리를 보더니, 카게야마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또 저 비웃으려고 그러죠?”

푸핫, 아니야.”

됐어요. 익숙하니까.”

불퉁한 얼굴로 반숙 달걀과 함께 카레를 입에 넣고, 카게야마는 쩝쩝 소리가 나게 씹었다. 오이카와는 하핫,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난 아직도 네가 어려워. 가끔은.”

전 항상 오이카와씨가 어려운데요.”

그건토비오가 어려서 그래.”

안 어리거든요?!”

오이카와는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카게야마의 손을 감싸듯이 잡았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단단한 손은 오이카와가 전부 감쌀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오이카와는 스물다섯 살 남자의 손을 확인하듯 가만히 쓰다듬었다.

. 알아. 알고 있어, 토비오에 대해선 전부.”

그런데도, 난 아직도 네가 가끔 무서워질 정도로 어려울 때가 있어. 내가 알 지도 못 하는 곳에 조용히 스며들어서, 넌 가끔 툭 튀어나오거든. 난 몰랐던 네가. 오이카와는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이사이로 열이 퍼지자, 카게야마도 몸을 오이카와에게로 기울인 후 속눈썹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감긴 눈두덩이 전등 빛을 받아 보드라운 색을 띠고 있었다. , 가벼운 소리가 퍼지며 서로의 입술이 닿자마자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가늘게 뜬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다시 키스를 떨어뜨렸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숨소리만 퍼지는 공기 속에 간간이 들렸다. 코끝으로 달콤한 카레 향에 섞인 카게야마의 냄새가 스치고 지나갔다.

“30년 뒤에도, 카레 먹고 싶어?”

낮게 물으며 간지럽히듯이 콧망울에 키스하자, 카게야마는 눈을 살포시 뜬 뒤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볼덩이를 말갛게 붉혔다.

. 오이카와씨의 카레요.”

카게야마에게서부터 얽어오는 혀가 뜨겁고, 물컹하고, 또 전기가 오를 정도로 달았다. 익숙한 카레 맛이 타액에 속속들이 녹아들어 풍미를 더했다. 맞잡은 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이 들어갔다. 30년 뒤에도 네 손이 똑같이 따스하다면, 그렇다면.

 

, 만들어줄 수는 있어. 카레쯤이야. 30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도.







* 란오님의 생일 기념 짧게 끄적인 글입니다!!
   * 란오님 생일 축하드려요!!!! >////<






[오이카게] 눈치 없는 후배

 

 

 

 

번쩍하는 섬광이 하늘을 찢고 지나갔다. 그 뒤를 잇는 거대한 천둥소리가 지면을 흔들었다.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여름날의 장마는 매번 심했지만, 이번 해에는 유달리 강렬하게 퍼부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회색의 시야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거세게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살풍경해서, 세상 끝날에라도 서있는 기분을 자아냈다. 이제 겨우 오후 5시인데도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리저리 튀어 오른 머리를 짜증스레 매만지며 체육관을 나섰다. 아침에 챙겼다고 생각했던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집 안 신발장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정하게 학교까지 데리러 오는 부모는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는 포기하고 가방을 머리에 단단히 이었다. 겨우 머리만 감쌀 수 있는 가방은 이미 눅눅한 습도에 축 늘어져있었다.

이와쨩, 너무해. 오이카와는 굳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꿍얼거렸다. 한 시간 일찍 가버린 이와이즈미는 우산을 쓰고 여유롭게 갔으리라. 그 때에는 오이카와도 우산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이와이즈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뒤적이니 언제나 쓰고 다니던 민트 색 우산이 없었다. , 가볍게 혀를 차며 오이카와는 다리를 박차 검은 공간에 몸을 던졌다. 얼굴을 때리는, 몸을 때리는 매서운 빗줄기가 따가웠다. 막을 새도 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비바람에 오이카와는 가방을 잡고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입안에 고이는 젖은 먹구름의 맛은 축축했다. 가볍게 입술을 핥고 발을 열심히 움직였다. 교복으로 안 갈아입길 잘했다, 오이카와는 가빠오는 숨을 느끼며 생각했다. 비록 세이죠의 새하얀 저지는 더럽혀질지언정, 저지는 항상 빨 수 있으니까. 발 끝자락에 스며든 검은 흙탕물을 보면 조금 불쾌해질 것 같지만, 뭐 그 정도야.

 

◆ ◆

 

오이카와는 눈앞에 보이는 처마 끝에 급하게 몸을 우겨넣었다. 평소 이와이즈미, 마츠카와, 하나마키와 즐겨 들르던 작은 가게였다. 가게 주인인 할머니는 지병인 무릎통증 때문에 비가 오면 가게를 열지 않곤 했다. 애초부터 이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빗줄기가 나아지길 기다릴 예정이었다. 온 몸이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젖어있었다. 가방으로 겨우 가린 머리카락도 세찬 바람에 의해 잔뜩 젖어서, 그 끝에 종모양의 물방울을 톡톡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흘린 뒤 어깨며 머리카락을 털었다. 몸 구석구석 싸인 비의 장막을 덜기에 소용은 없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불쾌감만이라도 덜고 싶었다. 속눈썹 끝에 맺힌 물방울이 간지러워서 눈을 감았더니, 볼 언저리로 또륵 흘렀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빗소리만이 들렸다. 파도소리가 끝도 없이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젖은 공기, 흔들리는 진동, 몰려드는 한기. 언제쯤 그치는 걸까. 멈추지 않는 물소리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검은 시야검은 시야였다. 아니, 빗줄기로 채워진 검은 공간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질이 그곳에 있었다. 익숙한 검은색 저지였다. 낯익은 몸이었다.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몸통이 아닌 제대로 된 고등학생의 몸이었다. 이제는 시선의 방향이 퍽 비슷한 몸이기도 했다. 검은 색 우산을 쓰고, 검은 색 저지를 입고, 검은 색 가방을 매고, 검은 색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뭘까, 검은 사신일까.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뭐해, 토비오쨩?”

오이카와 선배야말로 이런 곳에서 뭐하세요?”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약간 음영이 진 얼굴은 험악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매번 저런 표정을 지었다. 짜증을 내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단순히 ?’라는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보면 몰라? 우산 없어서 쫄딱 젖었잖아. 여기서 잠깐 기다릴거야.”

, 오늘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하던데요.”

카게야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이카와를 꼼꼼히 바라봤다. 젖어서 가라앉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흙탕물이 이리저리 튄 발끝에 이르기까지. 오이카와는 검은 색 일색이라 젖은 티도 나지 않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욱한 심정이 들었다. 상쾌함이라고는 일점도 없는 음울한, 말 그대로 찌그러진 비구름에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나도 알거든? 잠깐 빗줄기가 약해질때까지만이야.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옷 다 젖었는데요. 바람도 거칠고. 춥지 않으세요?”

또 한 번, 갸웃거린 카게야마는 우산을 든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하나하나 생각이 눈에 보이는 번거로운 후배였다. 오이카와는 그 눈에 빤히 보이는 움직임에 시선을 사선으로 틀어 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나하나를 보고 있자면 눈이 아팠다. 오이카와 선배, 귀 안에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카게야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가 다시 시선을 맞추자 카게야마는 한 발자국 다가와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선 짙은 파랑 빛이었던 눈동자가, 검은 하늘 아래에선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우산.”

필요 없어.”

오이카와는 조급하게 내뱉었다. 차갑게 떨궈낼 요량으로 낮게 내뱉었으나 카게야마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도 없는 후배는 이런 때에도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제 생각은 하나하나 눈에 박힐 정도로 보이게 만들어놓고선, 오이카와가 던지는 비언어적인 표현은 하나도 알아먹질 못하는 짜증나는 후배였다. 카게야마가 가까워져서일까, 그의 검은 우산에 퍼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욱 커졌다. 투둑 툭 간헐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계속되는 바람소리. 거칠게 처마 안으로도 노나드는 빗줄기는 오이카와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바람이 거칠었다.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 그럼, 갈게요.”

그래. 얼른 가라니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내리더니 그 길로 뛰어가 버렸다. 찰박 찰박, 촉촉한 물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메꿨다. 오이카와는 괜시리 짜증이 났다. 자신에 대해서, 카게야마에 대해서. 중학교 때 제 등을 지칠 줄 모르고 쫓아다니던 카게야마는 더이상 없었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옆에 서서, 같이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 , 다시 혀를 차면서 머리를 털었다. 처마로 들어온 비 때문이었을까, 젖은 머리에서 아까와 같이 다시 물방울이 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이카와가 전하고자하는 생각은 못 알아먹는 후배였다. 건방진 녀석, 항상 하던 말을 머릿속에서 툭 내뱉은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먹구름이 하늘 안에 빼곡히 차들어 있었다. 저게 다 투명한 흰색으로 돌아오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걸까. 굳게 닫힌 가게 셔터에 몸을 기댄 뒤 길게 한숨을 뱉었다. 몰려드는 피로감과 끝도 없는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뛰어오는 소리. 뛰어오는 소리? 오이카와는 다시 정면으로 시야를 돌렸다. 검은 사신이 오이카와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건, 밝은 갈색의우산이었다. 사신은 아까와 비슷한 거리까지 오더니 몸을 굽혀 숨을 가다듬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오이, 카와 선배

, 토비오쨩?! 뭐 하러 다시 온 거야?”

이거요!”

처마 밑으로 내민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밝은 갈색의 우산. 온통 검은색 일색인 카게야마 안에서, 유일하게 을 가진 존재였다. 오이카와는 우산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에서 새끼손톱만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라니. 항상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좀 더 심했다. 아니, 모든 것이 빤했다. 제 감정 따위, 생각 따위 숨기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후배 녀석.

이거 뭐? 우산이잖아.”

오이카와는 애써 넘겼다. 받아야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걸 위해 카게야마가 다시 온 것조차도, 오이카와는. 모든 건 오이카와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속속들이 보였음에도 오이카와는 눈을 가렸다.

우산, 쓰세요. 저희 집에서 가져온 거에요. 가지셔도 되니까 안 돌려주셔도 돼요.”

아니, 됐다니까? 왜 내가 너희 집 우산을 받아야하는데?”

저 집 문을 열어두고 와서요. 얼른 돌아가야 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들린 채 그 길로 다시 뛰어가 버렸다. 서서히 사라지는 검은 사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이카와는 더 이상 눈을 가릴 수 없었다. 손에 들린 우산이 묘하게 무거웠다. 무거워서, 떨어뜨릴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꼭 감쌌다. 메마른 우산이, 물기가 녹아있는 오이카와의 두 손 안에서 젖어 들어갔다. 항상 검은색 우산만 들고 다니는 카게야마가, 밝은 색의 우산을 고르고. 집 문도 열어둔 채, 온 몸이 젖어가면서. 오이카와에게 검은 사신은, 건방진 후배는 정말이지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온갖 정보를 들이붓는 귀찮은 녀석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 위에는 흘러내릴 물방울이 없었다. 그런데도 볼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톡톡 튀는 별사탕이 목구멍에 잔뜩 걸린 느낌이었다.

더럽게 귀여운 후배 녀석.”

별사탕이 하나씩 터져서 목이 따끔거렸다. 볼은 간질간질, 목은 따끔따끔. 손 안에서 우산이 자꾸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아서, 오이카와는 우산을 펼쳤다. 둥그렇게 퍼지는 밝은 갈색의 우산이, 누군가의 머리통을 떠올려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 우산을 들어 머리 위에 썼다. 새하얀 저지가 갈색 빛에 물들었다. 약간 어두운 색이 더해진 그 저지는, 마치 검은 빛에 감싸인 것만 같아서. 오이카와는 킁, 코를 훔치며 거센 빗줄기 속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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